소설리스트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90화 (90/171)

〈 90화 〉 스쳐 지나간 폭풍

* * *

길고 잔인했던 밤이 지나갔다.

새벽 사이 흙으로 스며든 핏물은 우물에서 길러온 물로 닦아냈고, 얇은 벽에 의지하여 모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스에모리 성의 주민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짹짹…….

어둠이 사라진 빈자리에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그러나,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가신들은 지난밤 있었던 하야시의 몰락과 열린 성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오다 노부나가의 군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공하셨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영은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는 니와 나가히데에게 마주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말 위에서 그를 바라보던 니와 나가히데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니와 나가히데 휘하 가신들을 비롯한 히라테 가문의 가신들까지 모두 말에서 내렸다.

히이잉!

성의 입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노부유키 측의 가신들과 스에모리 성의 백성들.

노부나가 측의 가신들과 그의 군사들.

모두가 일영을 바라보고 있었고,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니와 나가히데는 촥펼친 부채로 입가를 부드럽게 가리며 속삭이니.

“이 일을 노부나가님이 아시면 경을 치를 거에요.”

“그러겠지요.”

니와 나가히데는 현명한 여자다.

그녀의 진심이 어린 충고에 일영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니와 나가히데는 말에서 내린 가신들의 앞에서 직접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며 외치니.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히라테 공.”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히라테 공!

그녀의 나긋한 선창에 화답하는 군세들의 외침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대단해.”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 모습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 고작 대단하다는 말로 그를 설명할 수 있을까.

‘……노부나가 역시, 듣던 대로 망나니가 아니었다지만 이건 느낌이 달라. 마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움직이잖아.’

은색과 핑크색이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에 일영의 모습이 맺힌다. 당장 그녀가 합류한 이후에 일영이 세운 공이 몇 개인가.

그녀가 합류한 지 이제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영은 미노의 혼란을 틈타 일부 지역을 삼키고 자칫 공멸까지 갈 수 있었던 자매의 항쟁을 가장 적은 피해로 막아내지 않았는가.

그 모습은 차라리 지략이라기엔 예언에 가까웠다. 그는 이노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자신과 일기토를 할 것이라 예측하듯 그녀를 대했고, 스에모리 안으로 들어서 말로 도타 고젠과 오다 노부유키를 설득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동안 외면했던, 아니 감추고 사실상 체념했던 자그마한 진심을 꺼내어 생각했다.

‘아가씨께 미노를 되돌려 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

사이토 요시타쓰.

그 희대의 패륜아를 몰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닌 히라테 히카게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미노의 주인이 누군지.

그것을 그녀가 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적법한 주인이 사티오 요시타쓰는 아니게 하리라.

“자, 들어가시지요.”

아케미 미쓰히데는 니와 나가히데의 예우를 어색하다는 듯이 받아넘기고 내성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영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머리에 쓴 검은 진가사를 살짝 내려 눈을 가렸다.

마음이라는 것은 실로 기이해서, 누군가는 쉽사리 들여다보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밤 보았던 일영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핏물을 흘리며 떨리던 손.

잠시 상처를 입었나 생각했지만, 핏물이 묻은 옷을 벗은 일영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다.

혹,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일까?

그럴 리가.

아케치 미쓰히데는 스스로도 우스운 얘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의 뒤를 따라 내성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턱도 없는 생각이지.’

아마, 검을 오래 쥐어 손이 저렸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내성의 안에는 이미 추포된 하야시 가문의 식솔들과 가신들이 고초를 겪은 채 반쯤 풀린 눈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야시의 쿠데타에 동원된 것은 당연하게도 가문의 병력이었고, 그마저도 모두 일영과 시바타의 손에 죽었으니 저항다운 저항을 할 수조차 없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조금은 동정을 일으킬 법도 했으나, 상석에서 그들을 내려보는 노부유키의 눈에는 일말의 여지조차 없었다.

“…….”

서늘한 정적이 흐른다.

아침이 되어서야 사태를 파악한 가신들은 그저 몸을 사리며 사태를 관망하기에 급급했고, 도타 고젠 역시 어두운 낯빛을 애써 가다듬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적도 일영이 들어오자 끝이 나고 말았다.

“히라테 히카게에에!”

“죽여버리겠다아!”

가솔들은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이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지만, 하야시를 진심으로 따르던 무사들 몇몇은 당장이라도 포박을 끊고 일영에게 달려들 듯이 몸을 비틀었다.

힐끔.

일영은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동시에 마치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는 듯 그들을 지나 노부유키의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런 일영의 뒤를 니와 나가히데를 필두로 한 노부나가 휘하 가신들이 뒤따르니. 어느새 노부유키의 앞에 다다른 일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당주님의 가신이자 히라테 가의 양자. 히라테 히카게가 노부유키 아가씨께 반역한 하야시 미치카츠를 제압했습니다.”

“네.”

노부유키는 덤덤하게 화답했으나,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이해한 이들에게 이것은 예정된 충격이었다.

이미 오다 노부유키는 당주를 자처했다.

그러나, 조금 전 일영의 말에 수긍함으로써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자 동생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크흠.”

그 모습을 본 노부유키 측 가신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마른기침과 함께 다가올 풍파에서 자신과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기를 빌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하하하하하!”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호쾌한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가솔들이 묶여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 제일 선두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중년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야시 미치카츠와 얼굴이 사뭇 닮았다.

때문에, 일영은 곧 그가 하야시 미치카츠의 동생인 하야시 미치토모 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걸 알았을까.

미치토모는 호쾌한 웃음을 끝으로 얼굴을 구기며 일영과 노부유키를 향해 일갈했다.

“작금의 오와리가 조선에서 온 미꾸라지 한 놈에게 흔들리니, 앞으로 오다 가문이 무너질 것은 확실하구나! 이 우둔한 히메(ひめ)여. 네년의 야망에 죽어간 이들을 기리진 못할지언정 이리도 무도하게 다루니, 네년을 주군이랍시고 따랐던 과거가 후회된다. 시바타!”

뒤이어 그는 모두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시바타의 이름을 부르곤, 비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오니라는 말도 아까운 버러지 같은 년! 네년은 후대에 희대의 졸장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가 될 것…….”

“미치토모.”

그러나 그 순간.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온 일영은 미치토모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러자 미치토모는 일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하등 두렵지 않다는 듯이 외치니.

“그래, 조선에서 온 원숭아. 어디 한번 지껄여 보거라!”

“그래, 노부나가의 애완용 원숭이 주제에!”

“네 주군의 보지 맛은 어떻더냐?”

죽음의 앞에서 너무나 당당한 미치토모의 모습에 감화라도 된 것일까. 하야시의 사무라이들은 하나같이 입에 담기도 힘든 말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비난을 앞에서 마주하는 일영은 너무나 태연하게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일까.

노부유키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유언치고는 길구나.”

“뭐?”

“아가씨.”

일영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노부유키를 바라보며 청했다.

“처형의 순서를 바꾸기를 청합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힐끔.

일영은 자신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하야시 미치토모를 잠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든 가솔들을 하야시 미치토모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그를 제일 마지막에 죽이기를 청합니다.”

“……!”

그의 말에 하야시 미치토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고, 당연하게도 정적이 흘렀다.

그런 일영의 말에 노부유키조차 쉽사리 답하지 못했으니, 그의 말이 가진 의도를 모두가 이해한 것이리라.

“……히카게.”

노부유키는 조금은 뜸을 들인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심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주군에게 반기를 든 가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할복과 같은 명예를 누릴 자격조차 없지요.”

노부유키의 뒤, 전각 안에서 앉아 있던 도타 고젠이 일영에게 말했다.

“전 동의합니다.”

도타 고젠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기에, 하야시 미치토모는 떨리는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끌어내.”

“아, 안 돼! 세상 어디에도 이런 법도는 없단 말이다!”

지독한 후회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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