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마지막 발악과 다가온 선택
* * *
“어, 어떻게.”
하야시 미치카츠는 눈앞에 나타난 노부유키의 모습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어떻게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당장 경계를 서는 사무라이들이 10명에 아시가루도 꽤 많았다. 혹시 몰라 노부유키 직속 사무라이들 역시 억류해둔 상황이었거늘.
“난 분명히 말했지.”
그러나 노부유키는 하야시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욕심에 가득 찬 늙은 가신을 응시하며 뒤따른 사무라이들에게 읊조릴 뿐.
“하야시를 제외하고 전부 죽여라. 필요하다면 하야시 역시 반쯤은 죽여도 괜찮다.”
스릉.
그녀의 말에 뒤따른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동시에 하야시의 곁에 남은 사무라이들은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들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하야시에게 그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라고 뾰족한 답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무능한 놈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쪽을 처리할 때까지 기껏해야 반 시진(1시간) 정도만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쉬운 일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저렇게 빌빌거리는 꼴을 보면 분노가 치솟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을 굴렸다.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앞에선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가 검을 쥐고 서 있었고, 뒤에선 노부유키 측 무사들이 그를 압박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하야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끝인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삐걱 거린 것인가.
히라테 히카게. 조선에서 온 저 백일영이라는 사내가 예상보다 너무 강했는가.
그게 아니면 차라리 이후 입지를 조금 잃을지언정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는가.
과연 무엇이 정답이었을까.
늙은 그의 앞에 노부유키가 섰다.
꽤 거구인 하야시 미치카츠의 앞에 선 그녀였기에 언뜻 압도될 법도 하건만, 어떤 무장도 없이 그의 앞에 선 노부유키는 오직 싸늘함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충심으로 한 일이라고 했었지.”
물론, 그녀도 모두 계산이 된 상황이었다.
하야시 미치카츠는 세력 구도에서 축이 될 수는 있었으나 하나의 세력에서 상징적으로 내세울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오다 노부유키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일영을 친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모든 상황이 어그러진 현재 그에겐 어느 길로 가도 죽음뿐이다.
노부유키도, 그녀의 뒤에 선 도타 고젠도,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예정된 죽음.
그렇기에, 노부유키는 그에게 선택지를 줄 생각이었다. 물론 답은 하나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야시 미치카츠.”
이미 하야시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태반이 전의를 잃고 서 있었다. 그들도 묵묵히 검을 늘어트린 주군을 보며 느낀 것이다. 이 이상 자신들에게 활로는 없다는 걸.
그때, 노부유키의 곁에 선 한 사무라이가 허리에서 단도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자 노부유키는 무심히 그 단검을 하야시에게 던졌다.
투욱.
떨어진 단도는 다소 묵직한 울림과 함께 하야시의 발치로 떨어졌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노부유키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할복해라.”
할복(せっぷ).
스스로 배를 가르고, 뒤에 선 이가 목을 벰으로써 명예를 지키는 사무라이의 방식.
그것을 그녀는 하야시에게 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명령했다.
“하아…….”
하야시 미치카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할복을 권했다는 말은 결국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침표였기에.
비록 개인의 욕심을 대의에 넣었으나 분명 충심이 존재했던 늙은 가신은 옛 주군의 차녀에게 물었다.
“정녕, 그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하시나이까.”
오다 노부나가는 포악하다.
무례하며,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다.
차라리 일개 장수였다면 맹장이 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가문의 당주라면 옳지 않다.
때문에, 그는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그리고 부인께서는 그것을 감내하실 수 있겠나이까.”
그의 물음에 내심 일영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노부유키는 입을 열었다.
“대답은 하지 않겠다. 죽어라.”
그녀의 말에 하야시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동시에 일영의 곁에 서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스릉.
이윽고 시바타 가쓰이에의 검이 뽑히고, 노부유키는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을 보며 무언가 배신감을 느낀 표정으로 천천히 단도를 뽑는 그의 뒤에 섰다.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나이다.”
그는 복부로 단검을 가져댔다.
그 모습에 모두가 그가 할복하리란 생각에 각기의 방식대로 마지막을 눈에 담을 준비를 마쳤다.
“…….”
노부유키는 그저 묵묵히 그를 응시했고.
“……크흑.”
하야시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다가올 주군의 죽음을 기다린다.
하지만, 일영은 달랐다.
‘느낌이 이상해.’
하야시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복부에 단검을 꽂아 넣을 듯했으나, 그동안 숱한 사선을 넘었던 일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어느새 하야시의 뒤까지 접근한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가면 아래에서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
주름진 입가가 나지막이 꿈틀거린다.
동시에, 그는 역수로 쥐었던 단도를 누구도 보지 못하게 바로 쥐곤 고개를 들었다.
“신이 이러는 것 역시, 대답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게 무슨?”
워낙 작게 속삭인 목소리에 노부유키는 미처 듣지 못하고 되물었고, 그 순간 하야시는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때마침 드러난 달빛이 단도의 검신이 번뜩인다. 그리고, 그 순간 뒤늦게 그 모습을 본 도타 고젠이 외쳤다.
“노부유키!”
뒤늦게 일영 역시 앞으로 도약했다.
설마, 하야시 미치카츠가 자신을 노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노부유키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굳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싶었다.
대지를 디딘 발과 움직이는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일영은 반쯤 뽑힌 검으로 하야시의 등을 베려고 했다.
사실 머리로는 느끼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검을 뽑고 그를 베려는 모습이 보였으나, 바로 앞에서 단도로 목을 찌르는 것에 비해선 한참 늦을 거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
“크윽!”
갑작스럽게 하야시 미치카츠가 손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덕분인지 그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검을 피할 수 있었으나 뒤늦게 검을 뽑은 노부유키의 사무라이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다급히 그녀를 보호하는 사무라이들을 해치고 일영은 쓰러진 하야시 미치카츠에게 다다랐다. 그러자, 곧 시바타 가쓰이에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누고 경멸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사무라이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놈이었구나.”
차라리 조금 전 할복을 했다면, 비록 그릇된 마음이나마 충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주군을 해하려 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마지막 기회조차 놓친 것이다.
“큭……. 큭큭.”
그것을 아는지, 하야시 역시 허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다. 일영은 그런 그의 손목을 내려보았다.
‘수리검?’
흔히 현대에서도 닌자라고 하면 대명사로 떠오르는 수리검이 하야시의 손목에 떡하니 박혀있었다. 크기가 그리 작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손목은 뼈가 드러나 있었고, 하야시가 쓰러진 바닥에는 어느새 맺힌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날아온 궤적을 좇은 것이었고, 머지않아 민가의 천장에 서 있는 한 닌자와 눈을 마주쳤다.
암행복에 복면을 써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곧 오른쪽 눈 아래의 검은 점을 본 일영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
코우카 류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밑으로 들어온 닌자이자, 일전에 도요토미를 벨 때 보았던 그녀가 하야시의 손목을 날린 것이다.
‘분명, 하야시는 노부유키가 절대로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눈치였지.’
노부유키와 하야시의 대화로 추측컨대, 억류된 그녀와 도타 고젠을 구한 것 역시 타키가와 휘하 코우카 류의 닌자들이리라.
결국, 그녀에게 빚을 졌다.
꾸벅.
일영은 그녀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타키가와 역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일영의 귓가로 커억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보인 것은.
“끄르륵…….”
뒤늦게 현실을 인정한 것인지, 스스로의 목에 단도를 박아 넣은 하야시의 모습뿐이었다.
스릉.
일영은 검을 검집에 집어 넣었다.
놀랐기 때문인지, 떨리던 손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어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
바람에 혈향이 스치는 민가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노부유키 아가씨.”
그리고, 정적을 깬 것은.
“어찌, 선택은 하셨습니까.”
어딘가 노곤한 일영의 목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