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헛된 망상의 결과
* * *
철퍽.
흐르는 핏물이 아케치 미쓰히데의 발치를 적셨다. 동시에 그녀와 이츠키 비롯한 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눈앞의 광경이 정녕 현실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한 사무라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단둘이서, 백 명을.”
사무라이의 말 대로였다.
물론,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검을 쥔 무사로써 많이도 베었고, 또 그 찰나의 순간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막거나 상처를 입기 급급했던 그들과 달리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적들을 베었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자명하게 말이다.
“하아, 하아…….”
물론 시바타 가쓰이에와 일영의 숨이 고르진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전 일영이 직접 찔러 죽인 사무라이를 끝으로, 전각 안에 살아있는 적들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변변찮은 상처하나 없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괴물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 어느새 허리를 편 일영이 안광을 번뜩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구나.”
분명한 물음임에도 어떠한 고저도 없다.
단지,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듯한 평온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전각 너머에 서 있는 중년인에게 닿을 따름이다.
그런 일영의 모습에 중년인, 아니 하야시는 무심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 과연 야차라는 별명이 허상은 아니었구나.”
일영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인지, 놈은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은 물론 하야시의 가신들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떨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하야시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꽈악.
손을 꽉 쥔 그의 얼굴에는 짙은 모욕감이 차올랐다. 스스로 겁을 먹었다는 사실도 사실이었으나 그 모습을 하필 일영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싶다.
조선에서 온 미꾸라지다.
그런 놈이 오와리에서 분탕을 치는 모습은 도무지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동시에 위기감이 차오른다.
이 이상 놈에게 기세를 넘겨주면 안 된다.
때문에, 하야시는 눈을 번뜩이며 끌고 온 병력에게 일갈했다.
“놈은 지쳤다! 죽여라!”
본디 생포를 하려고 했으나, 그 또한 한 명의 사무라이이자 무사였기에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저놈을 살려두면 안 된다. 후대에 큰 후환이 될 수도 있다.
“하, 하지만.”
“……아아.”
그러나 태반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검을 쥐었다고 해서 모두가 전장을 겪어본 게 아니다. 특히 하야시는 일전에 무라키토리데로 출전하는 것조차 거부했기에 휘하의 무사들은 태반이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있던 선대 당주인 오다 노부히데를 따를 때 함께 싸웠던 정예들은 이미 일영의 손에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다.
“주, 주군.”
하야시의 무사들이라고 그것을 모를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지친 일영이라고 해도 지금 덤비면 최소 태반은 다치고 죽는다는 것을.
스읍.
안광을 번뜩인 채, 묵묵히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그를 마주보는 이들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진리가 스쳤다.
제일 두려운 맹수는 다름이 아닌, 상처 입은 맹수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지 않으면…….”
일영은 한심함과 노곤함이 짙게 깔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는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덧붙였으니.
“내가 가는 수밖에.”
그제야 하야시 역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일갈했다.
“죽여버려!”
“……이이익!”
뒤늦게 사무라이들 역시 생각했다.
어차피 마주해야 한다면, 차라리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옳다고 말이다. 이윽고 하야시의 곁에 서 있던 일련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내달렸다.
동시에, 일영의 뒤에 서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측에서 달려오는 7명은 제가 맡겠습니다. 백공.”
“그럼 좌측 9명은 제가.”
이미 피를 본 야차와 오니에게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대지를 박찼고, 곧 마주 달려오는 사무라이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흡!”
시바타 가쓰이에의 검술은 그 자체로 투박하면서도 묵직했다. 제일 먼저 목을 노리고 뻗어지는 검을 피하곤 그대로 상대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었다.
“커억!”
명치는 급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인 만큼, 당연하게도 명치를 직격당한 사무라이는 기침을 내뱉으며 검을 놓쳤다. 그리고 시바타 가쓰이에는 그의 목을 잡아 그대로 측면을 가렸다.
“끄아아악!”
“이, 이런!”
그러자, 그녀의 측면을 노리고 뻗어지는 창이 정확히 사무라이의 왼쪽 등을 파고들어 심장을 찔렀다. 핏물이 튀고, 시바타 가쓰이에는 순식간에 죽어버린 사무라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시각.
“괴, 괴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검에 베이고 있는 것은 일영의 앞에 선 사무라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지쳤다고 한들, 그게 뭐 어쩌란 말인가.
퉤.
일영은 입에 머금어진 핏물을 뱉었다.
그러곤, 짙은 노곤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감이 오는군.”
“뭐?”
갑작스러운 일영의 말에 사무라이들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으나, 정작 일영은 그럼 그렇지라는 시선으로 하야시 미치카츠를 바라보았다.
“당혹, 자책, 분노……. 그리고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나를 고민하다가 결국엔 분노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놈들을 죽이다보니 어느 순간 의문이 차올랐다.
‘노부유키가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한다고?’
아닌 게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장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노부유키는 적어도 도타 고젠을 제외하면 세력의 상징이며, 그녀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일영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고작’ 사무라이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대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조총수들과 사무라이들을 퇴로에 배치해서 싸그리 몰살시켰겠지.
당장 전투 중에 흘러가듯 생각한 방법조차 이럴진대, 총명한 노부유키가 그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이런 허술한 야습을 기획한다고?
‘아귀가 맞지 않았지.’
하지만 일단 눈앞에서 덤비는 놈들을 베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검을 쥔 손바닥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적들을 베고 찌르던 그가 마지막 사무라이를 벤 그 순간.
“……이, 이 무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당황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스쳤다.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보자 일영은 머지않아 그를 떠올렸다.
하야시 미치카츠.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노부유키를 옹립하고, 이노 전투의 패배 후 빠르게 항복한 가신이었다. 훗날에 오케하자마에서도 활약하는 장수인만큼 그가 기억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당황하고 있다.
그리고, 뒤따르는 노부유키나 도타 고젠조차 없었다.
어딘가 소극적인 습격.
예상보다 낮은 놈들의 수준.
그리고, 허술한 구성과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노부유키까지.
모든 상황을 훑은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는 거의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곧 동일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예, 하야시의 독단인 거 같습니다.”
둘의 말에 하야시는 순간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 빨리 눈치를 챌 줄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아직 적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 당황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틀렸다.
둘은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굳이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꿀꺽.
때때로, 여유는 상대를 두렵게 만든다.
특히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들이 희대의 맹장이라 칭송받는 무인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운이 좋게도 시바타 가쓰이에와 일영의 검에 죽지 않은 이들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뒤에 선 하야시에게 눈빛을 보냈다.
제발, 살려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야시가 꼭 일영을 잡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을 억류하고 벌인 일이다. 그런데 성과도 없이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의 입지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던 사무라이들에게 무어라 외치려했다.
그래. 외치려 했다.
저벅.
“하야시 미치카츠.”
뒤에서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와…….
“주, 주군.”
뒤를 돌아본 가신들의 떨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일영은 검을 내렸다.
그러곤, 자신이 아닌 하야시 미치카츠를 둘러싼 노부유키 휘하 병력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히, 예상한 대로 오다 노부유키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덕분에, 일영은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노부유키.’
이미 조금은 정이 든 그녀를 베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느새 오니마루 쿠니츠사를 검집에 밀어 넣은 일영은 혹여 누가 볼까 떨리는 손을 품속으로 숨겼다.
물론, 그는 몰랐다.
“…….”
그것을 곁에 선 시바타 가쓰이에와 뒤에 서 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동시에 봤다는 걸 말이다.
두 여인은 눈을 굴렸다.
그리곤 이윽고 같은 생각을 떠올렸으니.
‘어째서 손을……?’
그건 그녀들이 처음으로 알게 된, 일영의 약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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