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충성의 재해석
* * *
밀실에서의 대화가 끝이 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도타 고젠의 목소리가 울렸다.
“……알겠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
“예. 어머…….”
일영이 던지고 간 화두에 대한 답을 정한 듯한 모녀의 대화는 곧 끊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밀실이 있는 전각을 둘러싼 묘한 기류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밀실이라고 해도, 완전히 대화를 차단하기엔 무리가 있기에 일대에 자리를 잡았던 사무라이들을 모두 물렸던 그들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 텐데.
노부유키는 싸늘한 시선으로 전각 앞의 복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하야시 미치카츠.”
전각에는 일련의 사무라이들이 들어차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노부유키의 사무라이가 아닌 눈앞에 선 하야시 미치카츠의 사무라이들이라는 점일까.
반역인가.
아니다.
도타 고젠과 노부유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반역이라기엔 그녀들을 둘러싼 사무라이들의 태도가 아직은 공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당주님.”
하야시 미치카츠.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그녀를 당주로 지지한 주된 가신이자, 한때 노부나가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오다 가문의 중신.
그는 예의를 잃지 않고 그녀들에게 먼저 무릎을 꿇은 후, 고개를 조아렸다.
흔히 말하는 도게자였다.
“긴 시간을 고민했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신이 내린 결론이고 말입니다.”
하야시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곁에 선 사무라이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두 모녀에게 고개를 조아림으로써 예를 갖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럼에도 두 모녀는 위축되기 보단, 그를 지그시 노려보며 이 상황을 설명하기를 종용했다. 그런 기백에 일순간 사무라이들조차도 압도될 정도로 말이다.
그때였다.
와아아아!
챙, 채앵!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미약한 소리에 노부유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유달리 일렁거리는 불빛과 일련의 함성. 나아가 검과 검이 맞붙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방향을 본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일갈했다.
“하야시!”
그녀의 목소리가 전각에 가득 울린다.
그곳이 다름이 아닌, 일영이 머무는 곳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기에.
그러나 하야시 미치카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덤덤히 말할 뿐이다.
“이것이 소신이 내린 결론입니다.”
히라테 히카게.
아니, 백일영.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갑자기 굴러 들어와 오다 노부나가의 곁을 꿰찬 그를 곱게 보는 중신들은 없었다.
특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유키를 따르는 중신들은 더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일영은 단지.
“가뜩이나 부덕한 노부나가의 곁에 붙어 살육과 헛된 망상을 부추기는 버러지가 이젠 당주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신하 된 도리로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딱 그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의 행보는 좋게 말해서 파격적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오와리에 혼란을 가져올 뿐이었으니.
그의 말에 노부유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납득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 믿고 있기에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하야시는 전각을 점령한 사무라이들에게 외쳤다.
“모셔라!”
예!
아무리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이 권위를 보였다고 한들, 결국 그들은 힘없는 여인들에 불과하다. 그것을 상기한 사무라이들은 이윽고 최대한 예를 갖추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
노부유키는 자신과 어머니에게 다가오는 사무라이들의 너머로 보이는 하야시 미치카츠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이윽고 경고한다.
“장담하건대, 네놈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라.”
젊은 주군의 의미심장한 경고에 이젠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는 하야시 미치카츠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 가(家)를 위해서라면, 백번이라도 하지요. 그것이 소신의 충성입니다.”
주군의 명령이 이치에 맞지 않는데도 그저 따르는 것은 협의(??: 좁은 의미)의 충성.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주군을 강제로라도 바로 잡아주는 것이 광의(??: 넓은 의미)로의 충성.
그것이 하야시 미치카츠를 움직이게 만드는 신념의 발로였다.
“그대의 가문이 중추가 된 오다 가문을 위한 것이겠지요. 하야시.”
물론, 도타 고젠은 싸늘한 시선으로 죽은 남편의 가신이자 자신의 딸의 가신이 된 그를 노려보며 더 깊숙한 곳을 찔렀지만 말이다.
하야시 미치카츠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곁에 서 있는 소대장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두 분을 모셔…….”
“털끝이라도 건드리지 말거라. 역겨운 놈들. 내 발로 갈 것이다!”
노부유키는 그렇게 말하곤 밀실 안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도타 고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 주군. 어찌할까요?”
둘의 돌발행동에 소대장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하야시는 저럴 줄 알았다는 듯 매끄럽게 명령하니.
“사무라이들에게 두 분을 보좌하되,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 밖으로 나오시지 못하게 막거라.”
지금은 충심을 의심하여 화를 내고 있지만, 건방지게도 야차라 불리는 히라테 히카게의 수급을 가져오면 환심을 살 수 있으리라.
겸사겸사,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베면 좋고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니와 나가히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고작 스물 초반의 애송이 계집에 불과하다. 빠르게 그 병력을 흡수하고 기요스로 몰아붙인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아들과 노부유키를 혼인시켜 오와리를 부강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명민한 아내의 곁에는 든든한 무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
저 멀리 사라지는 노부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노부유키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재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든든한 뒷배로 혼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왕이면 충신의 가문과 하는 것이 오다 가문에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태까지 하야시의 생각을 모두 일영이 읽었더라면 아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포장했다고 한들, 결국 권력욕 때문에 저지른 일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하야시 미치카츠는 적어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빠르게 전각을 호위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신의 사무라이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마무리가 되었겠지.”
“예, 아마 그럴 것입니다.”
비록 바람을 타고 전투 소리가 들려오긴 하지만, 저것도 머지않아 사그라들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하야시 미치카츠는 직접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하야시 미치카츠를 비롯한 사무라이들이 떠나자, 전각은 경계를 서는 이들의 숨소리와 때때로 불어오는 밤바람만이 가득해졌다.
나무가 흔들리고, 때때로 이르게 깨어난 벌레들의 울음이 스친다.
그렇게 정적에 가깝게 조용해진 전각을 바라보며, 복면을 쓴 여인은 서늘한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뒤에 숨어있던 이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니.
두 분, 고립.
구출.
3분 안에 탈출 후, 합류,
그것을 본 닌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달이 구름에 가려지자 마치 그림자처럼 전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 흐른 후.
억!
컥!
아주 자그마한 신음과 함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들이 울렸다.
*
하야시 미치카츠.
본명은 히데사다로, 오다 노부히데의 가신이자 노부나가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녀의 자질에 의심을 품고 노부유키를 따르게 되었다.
물론, 사람인지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욕심?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확신했다.
노부나가를 따를 바에는 노부유키가 훨씬 낫다고 말이다. 특히 오니라고 불리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합류는 그에게 자신감을 복돋아주기에 매우 충분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노부유키는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활력과 패기를 잃었고, 도타 고젠은 그런 딸을 바라보며 나약해지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거기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희대의 개짓거리를 했다.
‘차라리 전장에서 죽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기가 오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 일인지 구태여 일기토를 벌였고, 패배 후 항장으로 스에모리로 돌아왔다.
거기에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조선놈이 들어와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을 만나고 얘기했다는 것을 들은 하야시는 답답함에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들려온 민심은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항복하지. 빌어먹을 권력 다툼 때문에 농사도 망치고 이게 뭐여.
거, 입조심 혀.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사무라이들 눈에 잘못 띄면 팔다리는 날아가는 거니께…….
어느새, 나약함이 거리를 매웠다.
비단 농민이나 평민들뿐만이 아닌 아시가루와 사무라이들조차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하야시는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강을 잡아야 한다.’
때마침, 얘기를 나누고 성을 나서리라 생각한 조선놈은 멍청하게도 성 안에서 머무른다고 말했다.
기회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
하야시는 즉시 가문은 물론 가신들의 병력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정예로 이뤄진 백여 명을 일영 측으로 보냈다.
그러고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을 억류 후,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일영에게로 향한 것이 현재였다.
“……이, 이 무슨.”
그러나 도착할 때쯤 모든 것이 끝나있으리라 생각한 그는 눈앞의 광경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으니.
후욱, 후욱.
마치 짐승이 내뱉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전각 안을 스친다. 동시에,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어두운 저 멀리에서 안광이 번뜩이니.
뚝.
짙은 혈향의 근원지를 알려주겠다는 듯, 손에 쥔 검신에서 핏물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다. 그리고 곧 벌레처럼 기어다니던 ‘마지막’ 사무라이의 위에 선 일영은 전각 너머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하야시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본다.
그리고 그 순간.
밑에 쓰러져 있던 사무라이가 하야시를 보며 무어라 입을 열려던 그때.
푸욱!
“끄륽…….”
그는 발치에 있는 사무라이의 목을 단번에 찌르곤 말했다.
“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