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얼떨결에
* * *
너무나 위험한 망상이다.
일영의 말을 들은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천황이란 상징적일 뿐이다.
관백이든 쇼군이든 권력의 정점이기 마련, 오죽하면 훗날 출신 상의 이유로 쇼군에 오르지 못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쉬운 대로 관백에 올랐겠는가. 물론 그들의 세계 선에는 없어진 이야기가 되겠지만.
“…으음.”
일영의 말에 도타 고젠은 잠시 말을 아꼈다. 아마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바쁘게 계산을 하는 중이리라.
차라리 저 말을 오다 노부나가가 했다면,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내뱉은 주체가 일영이었기에 그들은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노부유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복잡한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저 말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주군을 뛰어넘어 만인지상에 오르겠다.’
라는 반역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비약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일영. 달리 말하면 히라테 히카게.
그 자신은 스스로 자각할지 모르겠으나, 지금 오와리에서 가장 두각을 보이는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태반은 그를 가리킬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급 사무라이로 시작하여, 히라테 가의 양자가 되었다. 그가 나가서 벤 사무라이가 몇이고, 또 이룬 전공이 얼마인가. 더욱이 외모도 출중하고, 평소에 흘리는 유한 분위기에 그를 싫어하는 이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
요약하자면, 현재 일영은 오와리에 나타난 가장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라는 것이다. 심지어 유일한 문제였던 출신마저 히라테 가문의 양자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는 커버가 되었고 말이다.
유능한 가신.
평소에도 주군들을 두렵게 만드는 그것은 난세에 더욱 두려운 단어가 되었다.
…하다 못해서, 피를 나누고 함께 자라온 형제자매조차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목숨을 빼앗는 시대다. 아비가 자식에게 할복을 명령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형제가 형제를 교살하며 부인이 남편을 암살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그런 난세 속에서, 유능한 부하는 그 자체로 자리를 위협하는 변수였다. 특히 그런 가신이 야망을 품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순간, 도타 고젠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간 안광을 터트렸다. 야망으로 가득한 남자와 일생을 함께한 그녀였기에 느낀다. 일영의 야망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말이다.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일영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들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덧붙인다.
“어디까지나 전 노부나가님의 가신입니다. 동시에….”
사실, 그로선 꽤 의외였다. 나름 소문이 퍼졌으리라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었는데 도타 고젠은 모르는 듯하니 말이다.
“노부나가님의 애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
그제야, 노부유키는 구태여 일영이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깨달으며 도타 고젠의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묘한 씁쓸함이 입안을 맴돌았으나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반면, 도타 고젠의 표정은 꽤나 가관이었다.
“…어, 음. 그렇군요.”
일영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오다 노부나가와 일영, 그리고 모리 요시나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꽤나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도타 고젠에게 굳이 그것까지 알리는 가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노부유키는 당연히 어머니가 알았으리라 생각했고, 가신들 입장에선 굳이 알릴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얼떨결에 딸의 애인을 눈앞에 두게 된 도타 고젠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무너진 채로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갈등하는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일영도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상견례…?’
애초에 주된 이야기로 이걸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일영은 어색하게 뺨을 긁다가 무어라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녀에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말은.”
“일단.”
하지만 그의 말은 이내 끊겼다.
도타 고젠은 대충 뜻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결론은 분열된 가문을 하나로 합치자는 것이니 그리 긴말은 필요 없겠지요. 당주와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당주는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유키였다. 즉, 일영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는 무언의 뜻인 것이다.
그것을 일영이 못 알아먹을 리가 없었기에, 그는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을 나섰다.
끼이익. 탁!
일영이 나가고, 노부유키는 앞에 놓인 찻잔의 찻물이 살짝 식음을 느끼며 조심스레 도타 고젠의 눈치를 살폈다.
정적이 흐른다.
두 모녀에겐 익숙했으나, 노부유키에겐 늘 불편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후룹.
그때, 특유의 고풍스러운 손길로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도타 고젠이 노부유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히카게라는 사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당주.”
“으음.”
어머니의 물음에 노부유키는 잠깐의 고민을 한 후, 최대한 그녀가 마음에 들 답을 떠올렸다.
…오만하다거나, 당장 내쫓자거나 하는 말을 말이다.
습관적으로, 학습된 대로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그렇게 말하면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열던 그녀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글쎄. 과연 그럴까.
잠시 갈등하는 노부유키의 뺨에 도타 고젠의 무언의 시선이 스친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답했다.
“…저는.”
*
일영이 밖으로 나서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사무라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그러나, 제각기 표독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그 누구도 쉽게 일영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감히 야차에게 시비를 걸어 죽고 싶겠는가. 거기에 이긴다고 해도 명령 불복종이니,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덕분에 일영은 적진의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지나 배정받은 전각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그가 잠시 대화를 나눈 사이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시바타 가쓰이에는 물론 그의 호위로 들어온 이들 역시 안전했다. 덕분에 일영은 자신을 반기는 그들에게 가볍게 웃어주곤 말했다.
“자, 일단 좀 쉬고 있지.”
물론, 적진 한가운데에서 쉰다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었지만 왜인지 그의 말은 믿음이 갔다. 때문에, 이츠키는 곧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차출하고 일영을 제일 넓은 방으로 모셨다.
시간은 때때로 빠르게 흐른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부유키 측에서 보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짧게 생각을 정리하자 곧 밤이 되었다.
화르륵!
전각 곳곳에서 밤을 비춰줄 화톳불들이 피어오르고, 호위들은 아직은 서늘한 밤의 한기에 옷을 여미며 사방을 경계했다.
당연한 일이다.
밤에는 야습을 걱정해야 하니까.
“끄응차.”
그러나, 정작 일영은 실로 가벼운 옷을 여미며 오니마루를 쥐고 마루를 디뎠다. 신발을 신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전각의 뒤편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내딛는 걸음에 부딪힌 모래들이 썩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스친다. 일영은 전각 뒤편의 중앙에 서서 이내 검을 뽑았다.
스릉.
평소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검신은 달빛을 머금고 은빛으로 번뜩였다. 잠시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검신을 앞으로 밀었다.
일영의 검술은 꽤 특이했다.
본신의 주인이 조선의 사람이기에 조선의 그것을 담았으면서, 카나타 특유의 구조를 보다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일본의 그것 역시 합쳤다.
물론 그가 무언가를 알고 합쳤다기보단, 몸이 알아서 만든 검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느샌가 일영 역시 그것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검을 밀고, 부드럽게 회수하며 벤다.
검술이란 단순히 베고, 찢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검술이란 결국, 상대를 죽이는 무술이다.
그러니 구태여 검신으로만 적을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때로는 어깨로 민다.
다리를 걸고, 손목을 쳐서 검을 놓게 만든다.
무투는 검술에 자연스럽게 섞이며, 일영은 그것을 점차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홀로 달빛 아래에서 검을 휘두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벅.
문득, 땀이 흐르는 그의 뺨 너머로 인기척이 스쳤다.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일영은 머잖아 그 상대를 바라보며 검을 내렸다.
그리곤 손등을 들어 땀을 닦고, 이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으니.
“무슨 일이십니까. 시바타 공.”
그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닌 시바타 가쓰이에였다.
“실례를. 수련 중이셨습니까.”
그녀는 실수를 범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검로는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수련을 엿보는 것은 대단한 결례였기에.
허나, 일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신지요.”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바람을 쐬려 했습니다. 다만, 둘러볼 곳이 이곳밖에 없는지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