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꿈과 자존심
* * *
스에모리 성은 과거 오다 노부히데가 축성한 것으로,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훗날의 도쿠가와)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꽤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성으로, 일영은 뒤따르는 20여 명의 호위무사와 시바타 가쓰이에를 대동하고 언덕을 올랐다.
일전에 침투했을 때와는 달리, 정문을 향해 걷자 꽤 깊은 해자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이츠키가 스에모리의 병력들이 볼 수 있게 백기를 더욱 높이 들자 곧 그들을 발견한 스에모리 성의 병력은 웅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저거. 시바타 장군 아니야?
이런 미친….
이미 야밤에 도망친 패잔병들에 의해 이노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확인하는 건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 증거로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했다는 걸 끝까지 믿지 않고 도망친 사무라이들이 그녀를 음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시바타 가쓰이에.
오니라고 불리며, 오와리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다이묘들도 탐낸다고 알려진 장수의 명성은 이제 자리 잡은 지 1년이 안 된 일영이 걷기에는 확실히 큰 것이었으니.
그러나, 일영이 시바타 가쓰이에를 데리고 스에모리 성 앞으로 다다른 순간 그들의 뇌리에 더욱 더 깊게 박힐 것은 오니가 아닌, 야차가 되리라.
당장 상부에 알려!
당연하게도 그들은 당혹감에 무기를 쥔 채 상부에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일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외쳤다.
“히라테 가의 양자, 히라테 히카게다! 대화를 청한다!”
주어를 굳이 대진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대화의 대상이 오다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때였다.
끼기기긱!
성문이 거친 소리를 동반하며 땅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뒤이어 성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꽤 잘생겼다고 생각되는 남자였다.
“조선의 마늘 냄새가 진동하는군.”
그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인상을 찡그리며 일영을 향해 말했다. 일영은 그런 남자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모릅니다.”
“시바타 공께선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그분께서 떠난 후 이곳에 합류한 낭인이니까.”
일영은 그를 보았다. 낭인이라. 그 말에 걸맞게 남자는 꽤 훈훈한 얼굴과 대비되는 다소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일영은 대충 주변을 살폈다.
‘누구도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기대를 품고 있지 않다. 특히 사무라이들은 더더욱. 그나마 아시가루 몇몇이 남자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고 있으나 그마저도 소수였다.
즉, 지금 남자는 일영을 발판으로 노부유키 진영에 각인을 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야차를 벰으로써.
씨익.
일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남자가 검을 쥔 모습과 자세를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백일영의 모습으로 살핀다.
허름한 모습은 전투로 인한 결과라기엔 우습다. 검흔도 없고 그저 낡아서 헤진 것이 전부다. 검사에게 흉터가 가장 많이 지는 곳은 단연코 팔이다. 때때로 심장이나 목, 배같은 치명상을 피하기 위해 바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일영 역시 팔에 무수한 상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 조만간 문신이라도 박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에 반해 저 사무라이의 몸에는 상처하나 없었다.
저벅.
일영은 발걸음을 성큼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뽑았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받은 오니마루 쿠니츠사가 주인의 손길에 따라 허공을 미끄러지듯 그어지고, 이윽고 일영은 말했다.
“하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사인가.”
무수한 검술의 유파가 있고, 나아가 수많은 농민의 자식들이 사무라이를 꿈꾸고 검술을 배우는 시대다. 일영은 가당찮다는 듯한, 나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뽑는 놈을 바라보다가 무심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알지.”
꿀꺽.
놈은 긴장을 여유로움으로 애써 덮으며 일영을 향해 비웃음을 머금었다.
“조선에서 도망쳤다가 운이 좋아 무사가 된 놈이 아니신가.”
“그것 말고.”
구태여 말같지도 않은 것에 답할 이유가 없다. 일영이 묻는 것은 자신의 출신이 아니었기에.
“내가 뭐라고 불리는 지 말이다.”
처음에는 다소 오글거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제는 썩 마음에 드는 칭호다. 일영의 말에 그는 허하고 답했다.
“야차? 그런 별명을 가진 이들이 이 열도에 수백은 될 거다.”
그의 말대로다. 결국 별명은 겹칠 수밖에 없는 것, 훗날 시바타하면 떠오르는 오니조차도 전국 시대에 몇 명의 앞에 붙었다가 떨어진 칭호인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허나.
“그럼, 전부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일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물론 이츠키, 아케치 미쓰히데 역시 순간적으로 일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거구의 육신이 앞으로 걷는다.
동시에, 일영은 사무라이에게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사무라이는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앞으로 내달렸다.
흐아아압!
긴장할 거 없다. 배운 대로, 검을 찌름과 동시에 말아 올리면 된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큰 키와 꽤 장대한 기골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그뿐.
‘오히려, 벨 곳이 넓다는 거겠지!’
놈은 멍청하게 갑주조차 입지 않았다. 이대로 놈을 베고, 능력을 인정받은 후 오와리에서 노부유키를 당주로 추대한다. 그러면 나는 농민의 아들에서 당당한 사무라이로….
얼굴에 환희가 떠오른다.
비록 작디작은 오와리지만, 스승께서는 이곳에 앞으로 열도를 집어삼킬 용이 잠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본 용은 다름이 아닌 노부유키였다.
‘예뻤지.’
정갈하며 정숙한 미. 그럼에도 일가의 당주로 자처하여 패악스러운 언니를 몰아내기 위해 그 여린 몸으로 군세를 이끄는 그녀.
그런 그녀가 용이 아니라면, 누가 용이겠는가. 그리고 늘 미녀의 곁에는 든든한 무사가 서 있는 것이 관례다.
때문에, 그는 생각했다.
이 남자를 베고 그녀에게 인정받으리라고.
“다른 생각까지 하다니. 어지간히 좆으로 보였나.”
그때, 그런 그의 귓가로 어딘가 서늘한 일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때문에 그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
서걱, 툭.
검이 빠르게 그어지고,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본능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성벽 위에서,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보는 수많은 사무라이들과 어느새 서 있는 노부유키 뿐이었다.
*
단 일검.
일영은 자신을 향해 도발하며 달려온 낭인을 베었고, 바닥에 구르는 수급을 주울 가치조차 없다는 듯 내려보다가 성벽 위에 올라선 노부유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마치, 조금 전 자신이 벤 낭인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이다. 실제로 발치에 수급이 굴러왔음에도 그의 사무라이 중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
정적이 흐른다.
그제야 모두가 현실을 직감한 탓이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졌다. 그것도 저 히라테 히카게에게 패했다.
가뜩이나 평균적인 키가 현대인의 기준보다 작은 시대다. 일영은 현대인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이었고 말이다. 즉, 그들이 일영에게 느끼는 공포심을 더하는 것은 그의 체구이기도 했다.
마른 듯하나 마르지 않았다.
때때로 품이 넓은 옷이 바람에 흩날려 살에 닿아 드러난 근육은 탄탄했고, 무심하게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내는 모습은 가히 인외의 것을 보는 듯했다.
“아, 아가…. 아니. 당주님.”
노부유키의 곁에 서 있던 사무라이가 무심결 실언을 하고 말았다. 이미 당주로 추대가 완료된 그녀에게 아가씨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실수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만큼 일영이 보여준 모습은 충격이었기에.
그때, 노부유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무사가 없나요?”
굳이 이길 필요도 없다.
이긴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기에, 그저 쫓아내기만 하면 족하다. 그러나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크흠….”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진정한 당주의 그릇이라며 추대하던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눈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그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한다.
조금 전 본 압도적인 무력과 시바타 가쓰이에라는 무장의 패배에 물에 빠진 개처럼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와의 격차가 이토록 컸던가.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백기를 든 채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마주 보았다.
눈으로 말을 건네는 듯하다.
어서, 성문을 열으라고.
때문에, 그녀는 결국 몸을 돌리며 곁에 선 사무라이들에게 명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사신의 자격으로 대우하세요.”
결과가 보이는 항쟁에서의 사신 대우.
그것이, 그녀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