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정해진 대답
* * *
“저랑도, 할래요?”
“예?”
그 말을 들은 일영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나올 수가 없는 결론이 아닌가. 그러나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노부유키의 얼굴이 실로 진지하다는 점이었다.
그때, 왜인지 뒤통수가 간지럽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본 일영은 곧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의 표정을 확인하곤 어이가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게, 왜 짐승을 보는 듯한 시선이냐 이 말이야. 대충 표정에서 하고 싶은 말이 보이는 듯했다.
귀축이라느니, 여자를 밝히는 속물이라거나 말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영은 심히 억울하기가 그지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애초에 그는 단 한 번도 의도를 가지고 여자를 꼬신 적이 없다. 모리 요시나리 조차도 반쯤은 꼬심당한 것 아닌가. 오다 노부나가는 말할 것도 없다. 절대 먼저 꼬시겠다는 속보이는 행동을 한 적은 추호도 없단 말이다.
그러면 달려드는 여자는?이라고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걸 거절하면 미친 놈이 아닐까?
‘애초에, 어떻게 되어먹은 세상이야?’
추녀도, 추남도 없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일영의 주변 여자들은 태반이 아름다웠다. 그런 여자들이 대시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냐고.
일영은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곧 술에 취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노부유키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피가 섞이긴 했나.’
놀랍도록 비슷한 검은 머리에 금안이다. 비단 색깔뿐만 아니라, 묘하게 얼굴형이나 몸의 굴곡도 닮았다.
술에 취해 살짝 풀어진 눈동자와 함께 달아오른 뺨이 눈에 담긴다. 비슷한 겉모습과 달리 성격과 하고 다니는 모양새는 정 반대다.
‘오다 노부나가는 여전히 거칠지.’
밤에만 귀엽다. 밤에만. 전형적인 낮이밤져인가. 그에 반해 오다 노부유키는 이런 때에는 적극적이라니. 참 재미있는 자매다.
물론, 그런 생각만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말에 두서가 없었지.’
노부유키의 논리에는 허점이 많았다. 추측과 상황으로만 가늠하여 결론을 내린 부분 역시 많았다. 즉, 지금 그녀가 읊조린 것은 오직 자신의 생각을 나열했을 뿐이다.
도타 고젠이 어떤 여자인지.
또, 오다 노부히데가 어떤 남자인지 모른다.
그들이 어떤 부모였는지도 모르고, 나아가 두 자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일영이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다만, 일영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전쟁을 막는 것.’
그리고 그것에 사적인 감정이 자리할 틈은 없다. 더욱이 들키는 순간 목이 떨어지는 지금같은 순간에는 더더욱.
때문에,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답은 처음부터 완곡한 거절뿐이었다.
스윽.
노부유키의 어깨를 부드럽게 말아쥔다. 그리고 살짝 그녀를 밀어내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취하셨습니다. 아가씨.”
바보라도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완곡한 거절의 표현. 그런 일영의 말을 들은 노부유키는 일순간 씁쓸함과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 스친다.
‘그래.’
그녀도 일영도 바보는 아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의 결과를 뻔히 짐작하기에, 그녀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애써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대었던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찰나의 순간 정적이 흘렀다.
둘의 시선이 맞닿고, 이윽고 일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곧 둘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슬슬 해가 뜰테니.”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지요.”
일영이 먼저 운을 띄웠고, 노부유키가 뒤이어 문장을 완성했다. 마치 둘이 사전에 입을 맞춘 듯한 모습이었다.
스윽.
일영의 걸음이 다다미를 디딘다. 그리고, 노부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잖아 자신을 베러 돌아올 적장을 배웅하니.
“혹,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통을 주시길.”
실로 모순적인 기류의 틈에 일영은 일말의 여지를 남겨둔 채 입가에 늘어트린 복면을 끌어올리곤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를 데리고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휘잉.
새벽의 씁쓸함을 머금은 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스친다. 마치 찰나의 꿈에서 깨어나라는 듯한 감각에 그녀는 잠시 일영이 떠난 자리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오이치.”
그 아이가 보고싶었다.
지금쯤 잠을 자고 있을 테니, 눈에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그런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순수를 유지 중인 핏줄을 보고 싶다는 작은 위안이었다.
*
스에모리 성을 나설 때도 일영과 두 호위무사는 칼에 핏물을 묻혀야 했다. 그러나 비단 일영 뿐만 아니라 무예가 출중한 그들이었기에 뒤따르는 추격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떠오르는 해와 밝아지는 하늘 아래 숲을 내달린 그들이 다시금 진영에 닿았을 땐, 뒤늦게 그들이 자리를 비웠음을 깨달은 무사들이 한창 수색 작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오셨네요. 그래도 말씀은 하고 가시지.”
진영의 아시가루에게 말을 넘긴 일영이 내리자 니와 나가히데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제야 일영은 니와에게 출타를 말하지 않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급했던 터라.”
“뭐, 어디 갔는지는 대충 예상이 가고….”
일영의 말에 니와 나가히데는 묘한 눈웃음을 흘기며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성과는 있으신가요?”
“글쎄요.”
아예 없다고 하기는 뭐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전쟁을 막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 일영의 답에 니와 나가히데 역시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안다는 듯 혀를 찼다.
“어렵죠.”
“어렵더군요.”
아마, 니와 나가히데도 일영이 아는 것과 비슷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그녀 역시 이제 막 중신 자리를 노리는 가신에 불과했으니.
결국 니와 나가히데도 더 할말은 없는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참, 시바타 공이 찾으시던데요.”
“그렇습니까.”
하긴,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진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으리라.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시바타 가쓰이에를 억류하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막사엔 오직 일영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와 아시가루들 뿐이었다. 진영 내의 다른 무인들을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가 컸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에게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음을 확인했으니.
“별일은 없었겠지.”
“예. 다만….”
“다만?”
일영은 빨리 말하라는 듯 사무라이를 바라보았고, 사무라이는 그리 큰 비밀은 아니라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를 하시지 않습니다.”
“아침을 걸렀다고?”
“예.”
경계를 서던 사무라이의 말에 일영은 혹시하는 시선으로 되물었다.
“모습을 보고 있었나?”
“아닙니다.”
애초에 시바타 가쓰이에가 얼굴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음을 모르는 이는 오다 가문 내에 없었다. 때문에, 그것도 이유가 되진 못했다. 그의 말에 일영은 잠시 턱을 쓸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알겠으니까, 경계를 서라. 부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접근도 모두 물리고.”
“예. 알겠습니다.”
경계를 서던 사무라이는 일전에 일영이 모리 요시나리를 구원하러 갔을 때 대동했던 사무라이 중 하나였기에, 그에게 감히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애초에 반기를 들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출신이 조선인 것이 조금은 걸리지만, 난세에서 그런건 하등 필요가 없는 말이다.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사무라이를 뒤로 한 채 일영은 스윽하고 막사의 천을 걷었다. 그러자 곧 묵묵히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 시바타 가쓰이에가 눈에 밟혔다.
탁자에는 식어버린 밥상이 놓아져 있고, 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영이 들어오자 눈을 뜨고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선이 맞닿는다. 이윽고 일영은 뒤늦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이츠키에게 명령했다.
“식사를 가져와. 내것도.”
“예. 주군.”
이츠키는 애초에 예상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 대충 걸터앉은 일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거르시다니, 장수에게 밥은 중요한 것을 모르시지 않을텐데요.”
일부러 가볍게 내뱉은 말이다.
분위기를 한층이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덕분일까.
곧 시바타 가쓰이에의 눈이 떠졌고, 이윽고 그녀는 그의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와 마주 앉았다.
작은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본다. 언뜻 보면 로멘틱할지도 모른다. 갖춰 입은 갑주만 아니라면.
그때, 침묵을 깨고 시바타 가쓰이에가 물었다.
“스에모리 성에 다녀오셨군요.”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일영으로선 꽤나 의외의 말이었으니. 일영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번에 맞출 줄은 몰랐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