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76화 (76/171)

〈 76화 〉 스에모리 성(2)

* * *

달빛이 대지를 비춘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살짝 데운 술이 병을 달아오르게 만들어 취기를 더한다.

“…하아.”

노곤한 한숨이 붉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흐른다. 길고 검은 비단과 같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연하게 선홍빛을 띄는 뺨을 손으로 훑었다.

“…날이 좋네.”

무심결, 한 마디를 내뱉는다. 노부유키의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불어오는 바람이 중정에 있는 나무의 가지를 흔들었다.

쪼륵.

병의 입구에서 술이 흐른다. 잔을 채우고, 곧 흩어질 온기를 손바닥에 녹이며 노부유키는 묵묵히 잔을 기울였다.

알싸한 술이 목젖을 따라 흐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지나 턱선을 따라 방울이 스쳐 턱에 맺힌다. 노부유키는 그것을 손등으로 가볍게 닦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쓰네.”

쓰다. 술이 유달리 쓰다.

원래 쓴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입맛이 쓴 것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녀는 다시금 술을 따른다.

탁자에 놓인 가벼운 안주가 다 식어감에도 그녀는 홀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잔을 더 기울였을까.

사박.

문득, 적막함만이 자리하던 중정에 누군가 얼은 대지를 밟는 소리가 울린다. 노부유키는 반쯤 채운 잔을 잠시 응시하다가 술잔을 쥐고 단번에 꺾어 마셨다.

그리곤 술 방울이 남은 입술을 혀로 한번 가볍게 훑고는 말했다.

“누구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가 울린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정갈히 보관되던 카타나의 손잡이를 쥐었다.

투박한 손잡이의 감촉은 이질적이다.

허나, 난세를 대비하던 그녀가 검술을 모른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기에 노부유키는 검을 스릉뽑았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검날에 달빛이 비친다. 그녀는 서늘한 예기를 뿜는 검을 쥐고 몸을 돌렸고, 이내 중정 너머 기둥 뒤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마침 적적하던 참이다. 빠르게 오거라.”

패배를 상정하지 않은 굳건한 목소리다.

그 찰나의 순간, 노부나가의 동생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패기였다.

스윽.

검을 들어, 앞을 겨눈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달아오른 술기운을 단번에 떨쳐내는 것이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수밖에.”

그녀의 읊조림에 이윽고 암행복을 입은 일련의 이들이 기둥에서 벗어나 중정의 흙을 밟았다.

노부유키는 빠르게 훑었다.

‘3명.’

암살자를 보내지 않으리란 낭만적인 생각은 진즉에 접었다. 그녀는 일순간 지나간 일영에 대한 생각을 접고 묵묵히 다다미를 대딘 채 검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내부에 간자가 있는 걸까.

하필, 마음이 적적해 주변을 비우고 술잔을 기울이려 할 때 습격을 하러 오다니. 실로 절묘한 시기다.

‘아무래도, 솎아내기를 할 필요가 있겠어.’

마음속으로 가신들에 대한 칼날을 품는다. 동시에,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금색 눈이 번뜩이고, 이윽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히며 깊은 심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빠르게 한 명을 제압한 후, 그대로 길을 뚫고 호위를 불러야 해.’

그녀 자신은 검사보다 책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3명을 홀로 상대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을 박찬다.

그리고, 선두에 선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를 향해 돌진하려던 그때.

스윽.

남자의 손이 복면에 닿는다.

그리고, 이윽고 드러난 얼굴에 노부유키는 무심결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니.

“…당신은.”

특유의 갸름한 턱과 흰 얼굴이 눈에 밟힌다.

덥수룩했던 머리는 어디로 가고, 단정하고 멀끔하게 잘린 머리카락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흔들린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큰 키와 드넓은 어깨.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스친다.

“예. 아가씨.”

때때로 술에 취할 때 무심결 보고 싶었던 그 남자. 어떻게든 가지고 싶던…. 언니에게 가져오고 싶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챙그랑.

손에 쥔 검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런가요.”

니와 나가히데와 맞먹는 지략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그녀다. 때문에, 일영이 이 자리에 다다랐다는 것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질줄은 몰랐는데요.’

오니는 야차를 이기지 못하는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영은 애초에 뽑지도 않은 오니마루를 그대로 중정의 바닥에 내려놓곤 터벅그녀의 앞으로 향했다.

“마침 술을 드시고 계셨군요.”

마루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와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영의 말을 들은 노부유키는.

“…좋아요.”

마찬가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이미 일영이 신분을 밝힌 이상,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둘은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일영과 노부유키가 술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때, 아케치 미쓰히데를 바라보던 노부유키가 어딘가 살짝 불만인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새로 들이신 호위무사인가요.”

“예.”

일영은 그녀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곤, 자신은 새 술병을 들어 살짝 내밀었다. 그러자 노부유키는 자연스럽게 그의 술병에 잔을 부딪쳤고, 곧 둘은 거의 동시에 술잔을 기울였다.

꿀꺽.

목젖이 꿀렁거리고, 곧 알싸한 술 내음이 입가에 퍼진다. 일영은 안주로 놓인 생선 전을 한입 베어 물어 씹고는 말했다.

“아케치 가문의 미쓰히데입니다. 이번에 미노에서 넘어왔기에 제가 가주께 청하여 제 호위가 되었죠.”

“아케치 가문이라면….”

일순간, 그녀의 눈에 동정이 스쳤다.

오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주변 정세에 적잖은 신경을 쓰고 있는 그녀이기에 아케치 가문의 멸족 역시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정작 일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예상하신 대로.”

스윽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반으로 잘린 가면을 꺼냈다. 그리곤 탁자 옆 다다미에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시바타 공은 제게 패하셨습니다.”

노부유키의 시선이 반으로 갈라진 가면에 닿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일영과 반으로 갈라진 가면을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오랜 시간 시바타 가쓰이에를 곁에 둔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어.’

일영이 내민 반으로 갈라진 가면은 분명히 시바타 가쓰이에의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쥐었다.

그리곤, 시선을 올려 일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리고 일영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보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말을 내뱉어야 했다.

“항쟁을 멈추고, 노부나가를…. 당주님을 당주로 인정하시지요. 아가씨는 물론 휘하의 가신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일영 혼자의 힘으론 힘들지 모르겠으나, 히라테와 니와, 모리 요시나리의 힘을 빌리면 오다 가문 내의 반대 여론은 억누를 수 있다. 그리고 억눌리지 않는다면….

‘꺾어야지.’

구태는 늘 청산되어야 할 적폐였다.

때문에, 일영은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기쁜데요.”

그때, 일영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노부유키가 무심결 웃었다. 예쁜 미소가 얼굴에 만연한다.

“하지만, 전제부터 잘 못 되었답니다.”

그녀는 일영이 따라 놓은 술잔을 쥐고 이내 살짝 기울여 입에 머금었다. 그리곤 살짝 젓가락을 들어 생선 전을 쥐고 한입 베어문다.

할짝.

입가에 묻은 소금기를 살짝 훑는다. 그리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영에게 말했다.

“저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히카게.”

동시에 선언한다.

자신은 당주 자리에 앉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일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려던 그때.

탁.

노부유키는 손에 쥔 잔을 상에 내려놓았고, 묘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어머니가 저를 지지한지 아세요?”

그때, 바람이 살짝 둘 사이를 맴돌다가 사라진다. 일영은 답했다.

“모릅니다.”

실제로, 역사에도 그건 나와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영이 읽은 책에는 없었다. 때문에, 내심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일영의 답에 노부유키는 내심 알고 있었다는 듯 웃었다. 당연한 일이다. 조선 출신인 그가 알기엔 굳이 내뱉을 말도 아니니.

조륵.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그리고, 노부유키는 이윽고 술잔을 입에 가져대며 살짝 머금고는 시선을 중정으로 향했다.

겨울을 지나 조금은 초라해진 뜰이 눈에 밟힌다. 그것이 어쩐지 자신과 같아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과 겨울을 지나며 한없이 초라해진 점이 말이다.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영을 향해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원래, 언니를 지지했어요.”

그녀의 시선이 중정을 지나, 기요스에 닿는다. 그리고 과거 오와리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가 그런짓만 하지 않았다면, 당주는 당연히 언니가 되었겠죠.”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