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이노 전투(3)
* * *
또 한번의 해가 지고 떠올랐다.
남색의 하늘은 서서히 밀려오는 주홍빛 하늘에 잠식되어 사라지고 밤새 꼈던 물안개는 떠오르는 햇빛에 비추어 부서진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일영은 니와 나가히데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야 했기에 그리 과음은 하지 않았다. 술에 따뜻한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었기에 내부에 열기를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말없이 술잔이 오갔을까.
“일기토에서 이길 자신은 있으신가요?”
문득, 니와 나가히데가 일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일영은 가벼운 반상에 놓인 야채 절임을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질 것 같습니까.”
“글쎄요.”
일영은 비어있는 그녀의 술잔에 병을 기울였다. 그리고 탁자에 놓자, 니와 나가히데 역시 그의 술잔에 병을 기울이고 화답했다.
“죽으면 미워할 사람이 꽤 많으실 것 같아서요.”
부채로 가린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흐른다. 그녀의 말에 정곡이 찔린 일영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순간 니와 나가히데의 눈동자가 흔들리긴 했으나, 이내 술잔을 쥐고 가볍게 일영의 술잔에 잔을 튕겼다.
터억.
전장에 도자기로 된 술잔을 들고올 순 없었기에, 나무로 깎은 잔이 둔탁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술을 입에 머금은 일영은 바깥에서 들어온 이츠키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철컥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니와 나가히데도 막사를 떠나는 일영의 뒤를 좇았다. 그러자 곧 일전의 일기토를 들었던 사무라이들과 아시가루들이 일제히 일영을 바라보았다.
펄럭.
히라테 가문의 가몬이 펄럭였다. 그 곁에는 니와 가문의 가몬이 흔들렸고, 제일 거대한 깃발에는 오다 가문의 가몬이 흔들린다.
일영은 가몬 아래를 걸었다.
동시에, 저 멀리 보이는 평원 너머를 향해 가는 배 위에 올랐다. 일영이 건넨 제안이었다.
‘일기토를 제안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것이 옳다. 더욱이 이번에 죽일 사람이 아닌 제압 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전우가 될 사람이라면 말이다.
물론, 이츠키를 비롯한 니와 나가히데 역시 말리긴 했으나 이미 일영의 결심은 확고했다.
스르륵.
배가 움직인다. 배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이 치고, 새벽에 낀 물안개를 잠시 느끼던 일영은 이젠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하관을 덮는 가면을 썼다.
검은 가면으로 하관을 가린다.
동시에, 저 멀리에 어제 일영이 주었던 가면을 쓴 시바타 가쓰이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관만 드러낸 사무라이와 하관을 가린 사무라이라. 어딘가 우스운 상황에 일영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배가 육지에 닿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머지않아 일영이 탄 배가 육지에 닿자 일전에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배를 탔었던 사무라이가 고개를 살짝 조아리며 일영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일영을 그리 곱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다소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정작 일영은 아주 태연하게 그런 시선을 넘긴 채 시바타 가쓰이에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붉은 갑주를 쓴 채, 일영이 선물한 붉은 오니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시바타 가쓰이에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꽤나 거대한 일본도를 찬 후 일영에게 다가왔다.
‘검…. 나를 배려했나.’
시바타 가쓰이에는 창과 검 모두 사용하는 맹장이다. 때문에, 굳이 검을 들고 왔다는 건 일영을 배려한 측면이 있으리라.
일 합에 생사가 걸리는 만큼, 창은 꽤 이점이 있었으니까.
“굳이 긴 대화는 필요가 없겠지요.”
시바타 가쓰이에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둘의 대화는 일전의 배 위에서 끝이 났기에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으리라.
끄덕.
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둘은 강가의 바로 앞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눴다.
이미 둘 다 뒤로 병력을 물린 상태였기에, 서로의 습격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성격의 둘도 아니었고.
일영의 검신이 바닥에 닿고, 시바타 가쓰이에는 사선으로 검신을 겨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먼저 앞으로 돌진한 것은 시바타 가쓰이에였다.
“흐읍!”
드러난 하관에 달린 붉은 입술이 살짝 들썩이고, 이내 그어진 검로가 일영의 가슴을 향해 그어졌다. 그러나 일영은 너무나 가볍게 그녀의 검을 피한 후 바닥에 늘여 놓았던 검을 비스듬하게 올려 그었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둘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힌다. 그리고 이내 일영은 검의 손 보호대 부분으로 시바타 가쓰이에의 검신을 걸었으나, 그녀 역시 이미 닳고 닳은 검술의 달인이기에 유려한 손길로 일영의 손등을 베었다.
“큭!”
다행히 갑주로 막아 상처가 있진 않았으나, 그래도 힘을 주고 그은 것이기에 아예 멀쩡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시바타 가쓰이에도 피해가 없진 않았다. 그녀가 일영의 손등을 노린 순간 일영 역시도 발로 그녀의 복부를 찼기 때문이다.
일순간 두 무사의 사이가 멀어진다.
동시에, 둘은 가볍게 맞붙었음에도 단번에 실력을 가늠하곤 놀라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실력이….”
“더욱 늘으셨습니다.”
말을 흐린 것은 시바타 가쓰이에였고, 뒤에 덧붙인 것은 일영이었다. 둘은 저릿한 손을 가볍게 털고 이윽고 다시금 서로를 향했다.
채앵!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때때로 검신이 떨리고,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둘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윽고 갑주의 틈 사이로 서로의 살을 베었고, 일영은 가슴을, 시바타 가쓰이에는 팔을 옅게 베였다.
핏물이 주륵 흐른다.
동시에, 일영은 축축해지는 가슴을 힐끔 내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일전에는 제가 졌던가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노부나가 님께서 개입하셨죠.”
거의 난타 수준으로 서로를 팼었지. 그리고 말미에 노부나가가 총을 쏴서 둘을 멈췄고 말이야.
일영이 웃자 시바타 가쓰이에도 무심결 웃음을 지었다.
이미 둘의 마음은 같았다.
서로를 죽이기 싫다.
때문에, 서로의 깃발 아래로 오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결국 굴복을 전제로 한 일기토이자, 둘만의 전투였다.
그렇기에 일영은 이윽고 검을 거두고 솔직한 심정으로 읊조렸다.
“노부유키 아가씨께서는 결국 지게 될 것입니다.”
“그건….”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려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말을 막고, 일영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제가 그것을 기억하니까요.”
“…그게 무슨?”
시바타 가쓰이에는 이번만큼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 하지만 진실이 그러했다.
노부유키는 죽는다.
그것도, 당신의 밀고에 죽는다.
원래의 역사가 그렇다.
오다 노부유키.
…혹은 노부카쓰, 혹은 다쓰나리 그리고 또한 간주로.
수많은 이름을 가졌던 원 역사의 그녀, 아니 그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이노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하고, 스에모리 성에서 농성하다가 어머니의 중재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또 한번의 모반을 계획하다가 실망한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밀고되어 목숨을 잃는 것이다.
즉, 그녀는 과거의 주군을 죽이게 된다.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노부나가와 시바타, 노부유키에게 행복한 결말은 아니게 되리라.
일영은 검신에 맺힌 시바타 가쓰이에의 핏물을 힐끔 바라보았다.
“난세입니다. 때문에 혈육이라도 서로를 죽여야 할 때가 오는 법이죠.”
난세이자, 하극상의 시대다.
그의 말에 문득 아케치 미쓰히데의 표정이 쓰게 변했다. 사이토 도산과 요시타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혈육이 서로를 죽인다.
그만큼 미노를 잘 다룬 이야기가 있을까.
허나, 일영은 뒤에 선 아케치 미쓰히데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묵묵히 경청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나간 인연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하지요.”
오다 노부나가는 열도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일영 역시 열도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젠 소중해진 이들을 위해 그들을 위협할 적들을 모조리 베고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갈 오다 가문을 위해선 당신이 필요하다. 어쩌면 노부유키도.
그렇기에….
스릉.
망설임 없이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멍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지 않습니까. 거기에….”
솔직히 개인적인 사심도 조금은 있었다.
아무래도, 척 보기에도 미녀의 살결에 흉터를 남길 순 없잖아.
일영은 검집에 넣어 목검이 된 오니마루를 겨누며 말했다.
“자, 다시 싸우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런 일영을 본 시바타 가쓰이에는 순간 입술을 짓씹었다.
“…모욕입니다.”
검집에 검을 넣었다는 건, 목검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런 무력을 지닌 일영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도 검을 검집에 넣을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일영이 앞으로 도약했고, 어쩔 도리 없이 목검과 진검이 재차 맞붙기 시작했다.
파삭!
나무로 만들어진 검집에 순식간에 흉터가 생긴다. 때문에, 일영은 무심결 웃었다.
…아무래도, 노부나가에게 엄청나게 혼날 거 같다고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