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할복을 달리 말하면? 밀어서 잠금해제
* * *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노부나가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요시나리는 가져오지도 않은 창을 찾았다.
“…어.”
또한, 일영 역시 본능적으로 좆됐음을 감지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이츠키는 언제 사라졌는지 아예 자리를 떠났고, 히라테 마사히데 역시 긴 정치에서 온 직감으로 늙은 가신들 사이로 몸을 감췄다.
정적이 흘렀다.
일영은 직감했다. 여기서 대처를 잘못하는 순간, 아침에 묶은 붕대를 벗고 밀어서 잠금 해제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답할까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일영은 머잖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이 소녀에게 답했다.
“아가씨.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나이가 차면 그때….”
“저, 저 성인이에요!”
아, 제대로 좆됐다.
성인 이후에 생각해보자는 말은 되려 키쵸의 기대감을 부풀릴 뿐이었다. 흔히 히메 컷이라 불리는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나아가 부끄러움에 떨리면서도 대답을 기대하는 미소녀, 아니 미녀의 시선이 꽂혔다.
“…어, 아가씨. 그러니까.”
단번에 거절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딱 잘라서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듯 시선을 돌렸으나 돌아오는 건 말같지도 않은 가신들의 중얼거림이었다.
나쁘지 않을 수도….
그러게 말이야. 오히려 미노에 영향력을 확대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당황한 일영과 순수히 일영에게 반한 키쵸와 달리, 정치에 도가 튼 가신들은 그저 일영이 키쵸, 그러니까 노히메와 혼인을 하게 될 경우 얻게 될 이득을 셈할 뿐이었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흘렀고.
일영이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던 그때.
“노히메.”
낮고, 어딘가 서늘한 음성이 연회장 안을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일전의 전장에서나 보았던 서늘한 시선이 일영에게 꽂힌다.
“미안하지만, 히카게는 내어줄 수 없다.”
“…예?”
그러자 키쵸는 충격을 받은 듯 되물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요시나리가 성큼 걸어와 일영의 곁에 서며 키쵸를 내려보았다.
“맞습니다. 아가씨. 일…. 아니, 히카게는 혼인을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연이은 두 여자의 말에 키쵸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이윽고 다가온 이코마 키츠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속삭이자,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키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하얗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그런….”
다시 생각해보니, 일영이 구원하러 온 계기는 자신이 아니라 그의 곁에 서 있는 요시나리였다. 때문에 그녀는 무어라 말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찰나의 연심과 치기로, 여러 사람에게 불편함을 안겨준 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일영은 가슴 즈음에나 오는 키쵸를 내려보다가 살짝 시선을 낮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가씨.”
“…네?”
“정말 영광입니다만, 죄송하게도 저는 아직 혼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키쵸는 잠시 멍한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이해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알겠어요. 네!”
살짝 눈물까지 맺혔던 시선에 일말의 희망이 비친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의 속뜻은
비록 지금은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아가씨께도 기회가 있습니다.
가 아닌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 없다.
일단 정혼자가 없다면, 어떻게든 기회는 남아있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키쵸가 일영의 의도와는 달리 무언가를 결심한 순간, 요시나리와 노부나가는 그녀들 나름대로 눈동자를 굴리며 일영의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혼인할 뜻이 없다.
‘분명 저 철없는 아이를 진정시키려 한 말이겠지.’
‘…그래, 아직 제대로 밝히기에는 이르니까.’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그리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일영을 탓하진 못했기에, 둘은 이코마의 곁에 딱 달라붙은 키쵸를 흘겨보며 생각했다.
그래, 인정한다.
작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키가 작아, 은연중에 보호 심리를 자극할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가슴은 더 커.’
‘일영은 내 가신이다. 허락하지 않으면 그만일 뿐.’
둘은 제각기 가진 이점을 되뇌이며, 마음도 모르고 잘 해결되었나하고 안도하는 머저리를 응시했다.
안도하는 입꼬리가 올라간다.
눈가가 살짝 호선을 그리고, 나아가 옅은 미소를 띤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다.
뿐인가. 가끔 둔한 걸 빼면, 저만한 남자가 없다.
때문에 그녀들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는가. 반한 것이 죄지.
*
연회가 무르익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깐의 소란을 안주 삼아, 그들은 제각기의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부딪쳤다.
당연히 이번 연회에서 제일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단언코 일영이었다. 애초에 그의 무훈을 치하하려 만든 자리였기에 일영은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야 했다.
만약 그걸 다 마셨다면, 일영의 주량을 아득히 넘었을 것이다. 그래. 다 마셨다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
“다음에 꼭 마시겠습니다. 부디 양해를….”
일영은 능숙하게 웃으며 술잔을 사양했다. 때때로 은근히 강권하는 이들이 있긴 했으나 슬쩍 앞섬을 풀어 상처를 보여주거나 노부나가의 시선이 닿으면 퇴치되곤 했다.
물론 그들은 몰랐다.
술을 마시진 않지만, 배의 상처가 터질 때까지 섹스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녁 즈음 시작되었던 연회는 어느새 새벽이라 부를 정도의 시간까지 이어졌고, 분위기는 무르익다 못해 반쯤 맛이 가 있었다.
하하핫!
네 이년! 어서 속옷을 벗지 못할까!
훗날 성진국이라 불리게 되는 나라의 연회다. 당연히 유녀들이 빠질 리가 없기에, 곳곳에서 은근한 희롱과 말미암아 관계가 이어졌다.
물론 일영도 조금은 땡기긴 했지만, 하필 연인 관계인 여인들이 가진 위상이 위상인지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 내음이 진동을 하는 자리에 있다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영은 잠시 시선을 돌려 노부나가와 요시나리를 바라보았다.
“…음. 그런가.”
노부나가는 이코마 키츠노와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나누는 듯, 술잔을 기울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하아. 좋구나. 더 줘.”
반면, 요시나리는 평소 친분이 있는 듯한 여 사무라이들의 사이에 껴서 웃으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여러모로, 둘 모두 바쁜 것이다.
때문에 일영은 꽤 오랜만에 홀로 산책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조용히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아,”
그러자 연회장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무라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호위를 하려는 듯 뒤에 따라붙었으나 일영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잠시 산책인데 뭐.”
연회장 옆에 있는 연못이나 잠시 둘러 볼 참이었다. 애초에 연회장은 기요스 성 내부에 있기에 암살 걱정도 크게 없는 곳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경비를 서던 사무라이들 역시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일영의 명령에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때문에 일영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아하고 입김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 성 특유의 언덕을 오르며,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를 구경했다. 때때로 마주친 시종들이나 사무라이들이 일영을 단번에 알아보곤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수고들 해.”
그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하대로 화답하며 웃어주었다. 그러자 일부 여 시종들이 멍하게 서 있는 경우가 생기긴 했으나 정작 일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머잖아 목적하던 연못에 다다른 일영은 옅게 언 연못의 아래로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를 응시했다.
“…붕어인가?”
물고기에 대해 그리 잘 알지를 못하니, 무심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잉어랍니다.”
묘하게 나긋한, 그러나 어딘가 미약한 색기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남색 장발에 정갈한 의복을 갖춰 입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그녀의 이름이 단번에 떠올랐다.
“…니와 공?”
니와 나가히데.
이미 몇 번이나 안면이 있는 그녀의 성을 부르자, 니와 나가히데는 후훗하는 웃음을 흘리며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일영의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잉어는 두 상의 콧수염이 존재하지만, 붕어에는 콧수염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니, 살짝 비치는 얼음 너머로 나풀거리는 콧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일영의 기분을 눈치라도 챈 걸까. 니와 나가히데는 어느새 일영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특유의 존대가 섞인 어투로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그래. 하려했다.
파앗!
문득 일영의 귓가로 들려온 무언가 쏘아지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몇 번이나 전장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생존 본능의 일환일까.
“이런!”
일영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를 손에 끌어안고, 그대로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들의 몸은 연못으로 서서히 기울었고.
“어, 어머?”
파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꽂힌 화살을 바라보며, 일영과 그의 품에 껴안긴 니와 나가히데는 그대로 연못 위의 얼음을 깨고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