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처신 잘 하라고
* * *
거진 한 달에 달했던 와병으로 살이 조금 빠졌기 때문일까. 가뜩이나 날카롭던 턱선이 유달리 도드라졌다.움푹 들어간 볼은 흉하지 않았고, 묘하게 깊어진 눈매는 유한 인상을 날카롭게 변하게 만들었다.
덥수룩했던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고, 일본 특유의 품이 넓은 검은 옷에 황금색으로 적당히 수놓아진 연꽃 문양이 수수한 멋을 더했다.
뿐인가.
살짝 칠해진 분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일본 창세신화 속의 주신이자 태양신,그리고 미남이라 추앙받던아마테라스 오미카미アマテラスオオミカミ와 비견할 만했다. 가히 신성의 경지라는 뜻이다.
주변을 뒤덮는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일영은 오랜만에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를 만족스럽게 쓸며 생각했다.
‘촌마게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가 괜스레 생각났다. 일본이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촌마게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촌마게ちょんまげ.
흔히 머리 가운데를 미는 헤어 스타일로 변발과 비견되는 머리다. 물론 투구를 썼을 때 열 배출이라거나 그런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풍성충에서 리버스 투블럭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던 일영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그나저나….’
얼굴에 분칠은 또 처음 해보는데.
묘한 분내와 얼굴을 덮는 감각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한편, 그런 생각을 일영을 곁에서 지켜보던 요시나리는 순간 볼을 붉혔다.
‘…미쳤나 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영의 모습을 보면 어떤 여자라도 그렇지 않을까싶을 정도였으니까.
일영 자신은 몰랐지만, 최대한 옅게 분을 칠했기에 오히려 약간 창백한 얼굴이 퇴폐감을 더했다.
때문에, 요시나리는 살짝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부터 낯선 얼굴들까지 모두가 일영을 보고 있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선. 쯧.
…허.
남자들의 제각기의 속삭임이 귀를 울린다.
몇몇은 질투나 부러움이 섞인 말이었으나, 솔직한 이들은 그저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
반면, 여자들의 반응은 태반이 같았다.
얼굴을 붉히며 멍하니 바라보거나, 혹은 시선을 피하며 은근히 훔쳐보거나.
당연히 요시나리의 얼굴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저 도둑 고양이 같은 년들이 지금 누구를….
그때였다.
“큼.”
어딘가 불편한 헛기침이 울린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다름이 아닌 당주이자 이젠 같은 남자의 연인인 노부나가의 울대가 꿈틀거렸다.
“큼.”
그녀 역시 비슷한 심정인지, 묘한 우월감과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숨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내딛는 걸음을 따라 요시나리와 일영이 뒤따른다. 머잖아 제일 상석에 다다른 그녀는 망설임없이 자리에 앉아 모두를 훑고는 말했다.
“연회를 시작해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둥, 두둥.
미리 준비된 악사들의 연주와 함께,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서늘한 것을 넘어서 한기가 도는 밖과는 달리, 연회장 내부는 곧 술과 웃음으로 분위기가 달궈진다. 일영이 앉은 곳은 히라테 마사히데의 바로 곁이었다. 기본적으로 노부나가와 가장 가까운 상석이자 히라테 가의 장남인 일영의 신분과 걸맞는 자리였다.
때문에, 내심 일영은 자신의 신분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몸은 괜찮으냐.”
그때 귓가로 히라테 마사히데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일영은 그저 묘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일영과 히라테 마사히데의 관계는 뭐랄까, 묘한 관계였다. 처음엔 그저 의심과 거래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이젠 뭐랄까그래, 이웃에 친한 아저씨 정도의 느낌이랄까.
‘허, 후대의 역사가들이 알면 미친놈처럼 보려나?’
오다 노부나가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오와리의 대부를 이렇게 생각하다니. 일영은 무심결 헛웃음을 흘렸다.
“우에몬이 네 걱정을 많이 했다.”
“알고 있습니다.”
어찌 몰라줄 수 있을까.
의붓동생이 지어오거나 가져온 약재만 수십 개다. 때문에, 일영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흡!
그러자 왜인지 주변에서 사례가 걸린 듯한 목소리가 울리긴 했으나, 별 관심은 없었다. 그저 술을 급하게 마셨나보다정도의 감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럽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눈물마저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도련님!”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이츠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성큼 다가오는 꼴이 어딘가 심상치 않아 일영은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껴안으면 할복이다.”
“옙.”
그러자 이츠키는 재빨리 팔을 감추고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어딘가 데자뷰가 느껴지는 광경이었으나 눈이 마주친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이번엔 일영이 먼저 이츠키를 꽉껴안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에이, 뭘요.”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일영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얼마나 자신이 무모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회는 하지 않았으나, 믿고 따라준 이에게 이 정도 사과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껴안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미쳤다고 좆달린 놈을 10초 이상 껴안겠는가. 기분은 기분이고 이건 신념이었다.
당연히 이츠키고 남색을 취하는 풍습과는 멀었기에, 빠르게 일영의 품에서 벗어나 이내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유독 잘생기셨습니다. 대체 조선에서 뭘 먹고 자라신 겁니까?”
“왜, 알면 먹게?”
“구해는 봐야죠. 저도 장가는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퍽이나.”
그렇게 말하는 이츠키도 체격이나 외모적으로 그리 떨어지진 않았기에 일영은 그것을 농담으로 치부하곤 웃어 넘겼다.
물론, 이츠키는 진심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
“오랜만이에요!”
이번엔 앞쪽에서, 어딘가 낯설지만 묘하게 귀에 익은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살짝 고개를 돌린 일영은 머잖아 그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상처는 괜찮나요?”
적당히 큰 키와 건강미 넘치는 웃음이 흘려진다. 동시에 술을 먹어서 살짝 달아오른 목선이 도드라지고, 풍만한 가슴 위쪽에 살짝 직힌 점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가 찰랑거린다.
나아가, 일영의 시선이 곁에 선 다소 체구가 작은 여자에게 향했다.
은발에 은안. 술을 마신 것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까지.
이 정도면, 모르는 게 바보다.
일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려해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이코마 총단주님, 노히메님.”
노히메.
미노에서 온 아가씨라는 뜻임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에, 키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면 이코마는 잠시 멍한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산에서와는 딴판이네요? 후훗. 나도 모르게 반할 뻔했잖아요.”
“예?”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말한 이코나는 짐짓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정말로 장난이었다. 비록 정략혼이었다지만, 사별한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의 여유로운 말 때문일까.
일영은 스윽 웃고는 답했다.
“아쉽습니다.”
지극히 형식적인 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크흠!”
제일 상석에 앉아있던 노부나가의 헛기침이 들리고, 뒤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일영은 본능적인 생존본능을 상기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일영을 구해준 것은 다름이 아닌 히라테 마사히데였다.
“허허. 키츠노 너는 여전하구나.”
“대부님이야 말로요. 훗.”
히라테 마사히데는 이코마 키츠노와 적잖은 친분이 있었는지, 소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데리고 노부나가에게 향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자신의 남자에게 장난스럽게 꼬리를 친 친한 언니를 노려보면서도 내심 반가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기.”
그때, 여태껏 침묵하던 노히메, 키쵸가 작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뜩이나 체구가 작은 그녀와 체구가 큰 일영이 마주하자 묘한 그림이 보였다.
‘아빠와 딸…. 아니. 그보단 더 불건전한 느낌인데.’
때문에, 뒤에서 지켜보던 이츠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요시나리 역시 내심 키쵸가 가여우면서도 귀여웠는지 옅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히, 히카게 님.”
어딘가 떨리는, 그리고 묘하게 불안한 키쵸의 표정을 본 요시나리는 순간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심 일영을 흘겨보던 노부나가 역시,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마침내 결심을 한 듯, 키쵸는 은발의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푸욱숙이고 외쳤다.
“저, 저와 혼인해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