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신선이 아닌가
* * *
막 남은 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일영이 되물었다.
“연회요?”
“그래.”
노부나가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주곤 말했다.
“너도 어느덧 기력을 차렸으니, 공을 얘기하는 자리에 빠지면 안 되지.”
비록 가신들에겐 알리지 않고 행한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오와리에는 또 하나의 패가 생긴 셈인 것이다. 더욱이 이건 신호였다.
미노가 흔들리고 있다.
교토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미노가 흔들린다는 것은, 언젠가 그곳에 닿으리라 생각하는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도 썩 달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신들 역시 이번 일에 대해 노부나가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대충
당주님의 명을 받고 미노에서 온 히메를 구원하러 간 요시나리를 마찬가지로 당주의 명을 받은 일영이 구원하러 간 것이다.
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넓게 보면 그리 틀리지도 않은 말이긴 했으나 자세한 행간을 살피면 사소한 부분에서 다르긴 하다.
그래도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나저나, 연회라….’
일전에도 연회를 겪어보긴 했으나, 그땐 그저 조선 낭인으로 갔던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히라테 마사히데의 양자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히라테 가의 양자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때였다.
문득, 의문이 든 것이다.
“그러면 미노의 그 아가씨와 이코마 총단주께서도 오시는 겁니까?”
“그렇다만.”
“으음.”
미노의 아가씨. 키쵸.
솔직히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끝도 없이 비가 내리는 현장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것도 있었고 반쯤 눈이 돌아간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거라면….
‘은발?’
분명 은발에 은안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어서 그건 확실히 봤다.
그나저나, 은발과 은안이라.
이 시기 일본 전국시대에.
‘허.’
내심 헛웃음이 터졌다.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거참. 가끔씩 이런 괴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차마 뭐라 말할 수도 없는 묘한 괴리감이.
그에 반해, 이코마 키츠노는 조금이나마 현실적이긴 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와 눈이었으니까.
물론, 얼굴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코마 키츠노, 키쵸….’
일영의 눈이 살짝 돌면서 노부나가에게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여자 모두 노부나가의 여자가 아니었던가.
그래, 노부나가의 여자였다.
이 세계의 여자 노부나가 아니라 원 역사의 남자 노부나가.
키쵸그러니까 미노에서 온 히메라고 해서 노히메라는 이름을 얻은 아가씨는 원 역사에선 노부나가가 당주를 물려받기도 전에 결혼한 상대다.
‘듣기론 꽤 당찬 여자였다는 사족이 있긴 한데…. 뭐, 그건 당장 알 수가 없으니.’
오히려 일영은 이코마 키츠노가 키쵸보다 훨씬 흥미가 갔다. 왜냐고? 그녀에겐 후대에서 붙인 하나의 별명이 있었으니까.
‘노부나가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
듣기론 연상의 누나였는데, 내심 짝사랑을 하다가 그녀가 미망인이 된 후에 곧바로 데려와 첩으로 삼았다고 들었다.
그녀의 별명이 저런 이유는 간단하다.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은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났으니까.
노부타다, 노부카츠, 토쿠히메….
실로 하나하나 역사에 이름이 각인된 이들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일영은 순간 젓가락을 멈칫하곤 생각했다.
‘잠깐.’
그럼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동안은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이 머리를 스치다 못해 때리고 지나갔다. 부와 모가 바뀐 상황에서 어떻게 후대가 이어지는가.
일영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다. 젠장.’
고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여태까지 뭘 고민해서 한 번이라도 시원한 해답이 나온 적이 있던가.
‘그래도, 이코마가 일찍 죽진 않으려나.’
이코마 키츠노는 3년은 연달아 출산한 끝에 오케하자마 전투의 승리 이후 사망한다. 그러나 이번 생에선 임신할 일이 없으니 병약해지진 않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전에 간간이 들은 거로 대강 추측해도, 이 세계의 노부나가 역시 그녀를 사람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이야. 음.’
이미 태어나지 않은 애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사랑하는 여자가 아끼는 지인이 죽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눈초리에 살짝 시선을 올리자,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자신을 응시하는 노부나가와 요시나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시선이 곱지 않다.
그렇다고 막 노려보는 건 아닌데, 뭔가 의심하는 듯한…. 아.
일영은 언젠가 한 번 겪었던 일을 떠올리고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흔히 질투라고 말하는 건가?
‘어째서?’
이코마와 키쵸의 칭찬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요시나리와 노부나가의 표정을 보면 마치 일영이 두 여자를 떠올리며 무슨 말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 아닌가.
일영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요시나리와 노부나가는 어딘가 여전히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시선을 거뒀다.
“흠.”
노부나가의 금빛 눈동자에 순간 미약한 살기가 맴돌았다. 동시에 요시나리는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방금 웃었어.’
‘웃었지.’
노부나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이코마 키츠노와 키쵸가 온다는 말에 일영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러자 내심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래, 하다 못 해 다른 남자였다면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일영인 이상 걱정을 하지 않으려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 대체 뭐로 보는 겁니까. 둘 다.”
당연히 일영은 억울했다.
내가 여자에 미친놈도 아니고 고작 한 번 본 여자들을 떠올리면서 군침을 흘리겠냔 말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제야 노부나가와 요시나리 역시 내심 과민반응을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크흠하는 헛기침을 하곤 뒤늦게 산만한 그의 머리와 긴 와병으로 수척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연회 얘기를 꺼낸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연회 자리에 그러고 나갈 순 없으니, 내 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알아라.”
“어, 예….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일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제 신분이 신분인 만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도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라테 가의 양자 때문이 아니다.
다만, 두 여자의 연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리 요시나리는 오다 가문의 중신이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그 오다 가문의 당주다.
헌데 연인이 된 자로써 가신들의 앞에 예전처럼 좋게 말해서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다소 추레한 행색으로 나설 순 없는 일 아닌가.
물론,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반반해서 아무도 추레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게 넌센스였지만 일영이 알 턱이 없었다.
때문에, 일영은 곧 밥상을 가져가고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는 일련의 시종들의 손에 묵묵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부나가는 머잖아 탄성을 내지르며 곁에 선 요시나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으니.
“실로, 얼굴을 대충 쓰는구나. 저놈은.”
그건 내심 요시나리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
오와리에서 때아닌 혈겁이 불었다.
물론, 이 시기에 숙청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잔혹한 숙청이 한차례 지나가자 모든 가신은 알아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도 본 것이다.
온갖 고문을 당하는 배신자들의 비명이 담장을 넘어 민가로 스며들었다. 근처를 지나가면 미처 흩어지지 못한 피냄새가 코를 찔렀고, 오죽하면 까마귀들조차 고통 소리에 달아나 하늘이 맑았다.
보름을 지나, 일영이 깨어난지도 어언 보름이 흘렀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열린 이번 연회는 그동안 경직되어 있던 오와리, 나아가 오다 가문 내부의 분위기를 풀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히라테 공께선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말년에 용을 얻으셔서 그런 것인지. 하핫!”
“용이라니요. 허허. 과찬이십니다.”
히라테 마사히데의 주변으로 온갖 가신들이 모여 그에게 잘 보이고자 감언이설을 풀어대었다.
비록 확인되진 않았으나, 노부나가가 이번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이유가 히라테 가의 히라테 히카게 때문이라는 설이 거진 기정 사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히라테 마사히데는 때아닌 관심에 겉으론 웃으면서도 곤란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남색 장발에 정갈한 의복을 갖춘 니와 나가히데는 후훗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리곤 곁에 선 마에다 토시이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멍청한 이들이랍니다. 히라테 공께서 제일로 싫어하는 것이 바람이 부는 데로 갈대처럼 흔들리는 자들이거늘.”
원래부터 히라테 마사히데를 따른 것과 별개로, 은근히 대부인 그를 견제한 이들조차 주변에서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고자 한다.
그 박쥐같은 모습을 히라테 어르신께서 좋아하실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짜증나.”
반면, 마에다 토시이에는 평소처럼 틱틱거리기보단 그저 반쯤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니와 나가히데는 그런 토시이에가 너무나 귀여워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곧 당주님을 뵙잖아요. 기분 풀어요.”
“그치만….”
노부나가가 천수각에서 두문불출한 지가 근 한 달이다.
물론 당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기에 불만은 없다고 아무리 되뇌여도 존경하며 따르고자 하는 이를 한 달이나 보지 못한 것은 서운할 수밖에 없던 탓이다.
그러나 그때.
끼이익소리가 울리고.
“아, 다들 와 있었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연회장 내부를 울린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고,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뒤에 선 일영에게 말했다.
“내 너와 모리를 위해 만든 자리다. 일…. 아니, 히라테 히카게.”
그리고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노부나가가 아닌 그녀보다 한 발자국 뒤에 선 남자에게 꽂혔고.
허억.
허.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당주님.”
모두가 히라테 히카게 하면 생각하는 것은 크게 3가지였다.
조선 출신.
덥수룩한 장발.
꽤 반반한 얼굴과 큰 키.
딱 이 정도였다.
반반하다곤 해도 압도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텐데.
니와 나가히데는 무심결 부채를 쥔 손을 떨구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시, 신선 아닌가요. 저 정도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