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깨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 * *
“너는, 히카게를…. 일영을 사랑하느냐.”
나지막이, 그리고 실로 나긋하게 내뱉어진 물음이 요시나리의 심장을 쿵하고 내리치게 만들었다.
“…예?”
잿빛 동공이 흔들리고, 술잔을 들고 있는 손이 순간 미약하게 떨렸다.
당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함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떨리는 눈동자였다.
입술을 달싹인다.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다가, 이윽고 멈춘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아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무슨 의미지?’
뇌리에 스친 노부나가의, 자신의 주군의 물음을 곱씹는다. 나아가 되뇌이며, 복기한다.
그녀의 동공에 노부나가의 얼굴이 맺혔다.
자악한 찻잎을 머금고, 달빛에 음영진 여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래, 여인의 얼굴이.
동시에 요시나리는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리라.
여인으로서의 직감인가.
아니면, 모시던 자의 가늠인가.
주군을 혼돈케 하는 감정의 편린을 엿보았다. 때문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잡는다.
척추를 따라 흐르는 불안을 짓누르고, 술기운에 강렬해진 충동을 부추긴다.
나아가, 입을 연다.
“예. 사랑합니다.”
말을 한 것은 장수가 아니었다.
가신이 아니었으며, 나아가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으니.
단지, 술기운에 흐트러진 여인일 따름이었다.
휘이잉소리를 내며 찬 바람이 두 여인의 뺨을 스쳤다. 내뱉어진 말은 바람에 실려 서로의 사이에 맴돌았고, 나아가 요시나리는 눈을 떴다.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히라테 히카게가 아니다.
히라테 가문의 장남도 아니다.
나가아, 히카게 또한 아니다.
그저, 조선에서 상처 입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온 여리고 바보 같은 남자를 사랑할 따름이다.
때문에, 그녀는 말할 수 있었다.
“저는, 일영을 사랑합니다.”
뺨이 달아올랐다.
몸이 흔들리고, 판단력이 흐려졌다.
만약 지금 살수가 든다면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했다.
시선을 내렸다.
창백한 뺨에 아련한 숨결을 내뱉는 남자를 두 눈에 담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일영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환기를 조금 과하게 하여 그럴까. 그의 손이 유달리 차가웠다.
깍지를 꼈다.
달아오른 자신의 손이, 차가운 그의 손을 조금이라도 데워주길 바라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음영진 목선을 따라 달아오른 뺨이 붉었고, 흐트러진 머리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렇더냐.”
순간, 노부나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복잡한 기류가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이다.
아니, 오히려 알기에 물었다.
물으면, 묻기라도 한다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정해지리라 생각했다.
찰랑.
손에 쥔 찻물이 흔들려 작은 물결을 일렁거렸다. 어쩐지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같아, 그녀는 그저 씁쓸한 입김을 내뱉을 뿐이다.
“부질없는 물음이었다.”
번뇌에 번뇌가 더해졌다.
신을 믿지 않았으나 오늘따라 하늘이 야속한 밤이었다. 문득 시선을 옮겨 검은 하늘을 바라보니 더욱 그러했다.
‘유달리 달이 밝구나.’
이리도 방 안이 밝은 이유가 저 달에 있는 듯싶다. 그녀는 서늘하게 식어버린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채, 두 여인 사이에 야속하게도 누워있는 일영을 내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죄가 많은 놈이다. 그렇지 않으냐.”
실로 그러했다.
두 여인의 마음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근시일 내에 사경을 두 번이나 다녀오다니.
아무리 난세라고는 하나,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당주님은.”
그때, 요시나리가 열리지 않는 입술을 애써 달싹이다가 마침내 물었다.
“그를 사랑하십니까.”
애석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피했다.
문득, 요시나리의 손에 들린 술병이 눈에 밟혔다. 여흥이 없어 취하기 싫건만, 이리도 마음이 쓰이니 취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물음을 곱씹었다.
당주님은, 그를 사랑하십니까.
가뜩이나 위태롭던 심정에 꽤나 큰 화두를 던졌다. 때문에, 그녀는 잠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글쎄다.”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아직은 온기가 남은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채웠다.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것이 애정의 유무가 아닐 뿐이다.
이미 인식한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쓸데없이 밖으로 돌리지 말 걸 그랬다.
흥미를 가졌을 때, 곁으로 둘 것을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생각이 미처 정리되지 않아, 무감한 말을 내뱉을 참이었다.
“……아.”
갈라진 일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통이 찬 신음이었으나, 일영의 입술이 순간 열리고 닫히자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창백한 뺨이 부르르 떨렸다.
사이사이 갈라진 입술에서 맺힌 핏방울이 살짝 흔들리다 턱선을 따라 떨어지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둘은 경솔히 움직이지 않았다.
보름간 수차례 있던 일이다.
단지 일영의 목소리에 집중했을 뿐, 그 이상의 일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이 다시금 불어 두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동시에 미약하게나마 있던 희망은 어느새 체념으로 변질되어 두 여인을 움직였다.
결국, 이번에도 일영은 깨어나지 못했다.
다만 천수각에 남은 것은 달빛에 흔들리는 차와 술인 것이다.
때문에, 요시나리는 침중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노부나가 역시 다시 식은 찻물을 입가로 가져댔다.
그리고 막 두 여인이 액체를 한 모금씩 머금으려던 그때.
“……쿨럭!”
일영의 기침 소리와 함께 둘의 움직임이 멎었다. 동시에 천천히 잔이 내려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살핀다.
미간이 좁혀졌다. 눈가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나아가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요시나리.”
“예. 당주님.”
노부나가의 다급한,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요시나리가 곧바로 일어나 옆방으로 향했다.
옆방에 일전에 일영을 치료했던 의원이 와 있었다. 아마 지금쯤은 자고 있을 테지만, 곧 깨어나 상태를 살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일영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미련한 가신의 얼굴이다.
동시에, 이대로 차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서서히 일영의 눈이 떠진다.
나아가, 입술이 열렸다.
“…노, 부나가.”
당주님도, 주군 아닌.
그녀의 온전한 이름이 내뱉어진다.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처 내뱉어지지 못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고개를 숙여 들을 참인데.
끼이익!
“다, 당주님. 자리를.”
문이 열리고, 요시나리가 데려온 의원이 양해를 구하며 일영을 진맥하기 시작했다. 잠시 당주된 권위로 그를 밀어낼까고민하던 그녀는 머잖아 한 발자국 뒤로 돌아가 남은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일영이 깨어났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이다.
*
일영은 의원의 진맥이 끝나자 다시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그 이후로는 긴 치료의 연장선이었다.
내장이 상했다.
일전에 다친 팔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몸에 옅은 검상만 거진 20개에 달했다.
의원은 차라리 죽는 게 이치에 맞았으리라고 일영에게 말했다. 그만큼 일영의 소생은 기적이었다.
때문에, 일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몸이 제정신은 아니구나.’
현대 의학이 아닌 지극히 구시대적인 의술로 그만한 상처를 입고 살았다. 그 말인즉, 일영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홍삼의 효능인가?’
라는 개소리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곧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낸 이가 부린 수작이거나, 진짜 기적이거나.
그러나 일단 살았다고 안심할 건 아니었다.
상처가 상처였으니, 완치하는 데에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문제될 것은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쉬면 되는 일이니.
하지만 일영에게 제일 고역은 따로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찾은 첫날을 울고 불며 품에 안기는 요시나리를 달래야 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품에 안겨서 몇 대도 맞았다.
그래도 이때까진 버틸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조선에서 들여온 마늘이다. 먹거라.”
“어성초라는 것이다. 염증에 그렇게 좋다지.”
“강황이다.”
“민들레다.”
“…당귀다.”
일영은 눈앞의 기이한 상을 바라보며 곁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검은 단발에 금안이 인상적인 여자.
오와리의 주인이자, 자신의 당주다.
때문에, 일영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당주님. 약재는 생으로 먹는 게 아니라 달여오는 것입니다만.”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상에는 온갖 종류의 약재들이 즐비했다. 또한 태반은 염증이나 내상에 좋은 것들이란다.
그래, 다 좋은데.
왜 생으로 내놓는 건데?
그런 일영의 얼굴에 노부나가는 피식 웃었다. 평소 묘하게 어두운 얼굴에 드물게 핀 웃음이었다.
“나도 안다. 헌데 골려주고 싶어서 말이다.”
“예?”
순간, 그녀는 일영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일전에 다쳤던 팔을 어루만지며, 아주 낮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해 보거라. 누가 네놈에게 출진을 명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