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그가 살기를 바래야 할 거다.
* * *
도련님.
그 한 단어에 노부나가는 물론 히라테 마사히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둘의 머릿속에서 아주 최악의 상황이 스쳐지나갔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랬던가.
…언제나 불길한 예상은 적중한다고.
“도련님께서 갑자기 가문의 무사들을 이끌고 미노 접경 지역으로 향하셨습니다!”
사무라이는 고개를 푸욱숙이며 말을 이었고, 동시에 노부나가는 전각이 떠나가라 외쳤다.
“당장 병력을 모아!”
그리고 채 10분이 지나기 전.
일련의 기마 사무라이 백여 명이 일제히 기요스 성을 나와 평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노부나가였다.
검은 단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늘 광기와 묘한 씁쓸함이 머물던 금색 눈동자는 하릴없이 흔들리고, 고삐를 쥔 손 역시 미친 듯이 떨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척추가 저릿했으며, 달빛이 이리도 만연하거늘 시야는 어둡기 그지 없었다.
‘안 돼. 안 돼.’
아직 팔도 낫지 않았다.
듣기론, 약재도 채 다 달여 먹지 못했단 말이다.
악몽을 꾸었다 들었다.
밤을 새우며 끙끙거렸기에, 의동생인 우에몬이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들었다.
때문에, 악몽을 쫓아주는 부적이나 하나 내어줄 참이었다.
자꾸만 가슴이 저릿했다.
절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동시에 가장 최악을 상상하고 말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일영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유능한 가신을 잃기 싫다는 이기심에서 오는 감각일까.
모른다.
알 리가 없다.
다만, 그녀의 머리에 각인된 사실은.
일영이 어쩌면 사지死?일지도 모를 곳으로 갔다는 사실이고, 어쩌면 늦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녀는 달렸다.
평원을 내달렸고, 때때로 마주친 작은 강가는 그저 뛰어 넘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당주님, 저기…!”
멍하니 앞을 보고 달리기만 하던 그녀의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순간 시야가 밝아졌고.
“…아.”
그녀는 안도가 담긴 탄식을 내뱉었다.
저 멀리.
그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
비가 그치자, 안개 역시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젖어버린 몸에 체온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짙은 혈향이 풍겨오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일영과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이 지나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으니까.
“…….”
앞서 길을 여는 사무라이들이 보이는 족족 시체나 장기등을 치우긴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흔적을 지울 순 없었다.
가령 바닥에 떨어져 널브러진 장기 조각이라거나, 나뭇잎과 가지에 그득하게 묻은 핏물이라거나 말이다.
한편, 이츠키는 지독히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동자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요시나리를 비롯한 여자들은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츠키에게 부축되어 앞서 걸어가는 일영의 등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빨리 움직여라. 버러지들.”
“커헉!”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뒤로는, 무장이 해제된 하급 사무라이들이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에 의해 감시받으며 거칠게 끌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츠키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면.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일영의 상처가 너무 깊고, 많았다.
가뜩이나 팔의 상처도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무리를 했으니, 지금 그의 상태는 반쯤 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초에 이츠키가 봤을 땐, 요시나리와 조우했을 때 이미 한계였다.
오죽하면 하급 사무라이에게 배를 뚫리겠는가. 그러나 일영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때문에, 이츠키 역시 그저 그를 부축하며 최대한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하아, 하아.”
묵묵히 움직이던 일영마저도 거칠게 숨을 몰아쉴 정도로 지쳐갈 무렵, 저 멀리 산의 초입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왔습니다. 도련님. 조금만 더 걸으시면….”
순간, 이츠키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던 일영의 무게가 일순간 사라지고, 일영의 몸이 서서히 기울며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기울어가던 일영의 몸이 멈췄다.
때문에, 일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잡은 손을 따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시나리.”
갈라진, 핏물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요시나리는 입술을 질끈깨물었다.
그녀의 잿빛 눈에 복잡한 감정이 차오른다.
그것이 후회인지, 미안함인지, 원망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죄책감인지 일영은 차마 가늠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홀로 일영을 부축하던 이츠키의 반대편에 서서, 일영의 무게를 함께 견디며 앞으로 걸을 뿐이었다.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대지를 디딘 발걸음은 물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피를 흘려서인지 더욱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진다.
일영은 고통마저 흐릿해지는 감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는 건가?’
생각해보면, 잘도 이런 세상에서 몇 달이나마 살아남았구나 싶었다. 당장 누구 하나 죽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닌 세상인데 말이다.
어느새 말에서 내렸던 초입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젖은 풀을 뜯어먹는 말들이 보였고, 사무라이들은 다급히 일영을 옮기기 위해 말들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때.
다그닥, 다그닥!
대지를 따라 울리는 일련의 말발굽 소리에 막 고삐를 쥐려던 그들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서서히 걷어지는 안개 너머로 다가오는 무리를 확인하자 사무라이들은 다급히 검을 뽑았다.
평소라면 오와리 방향에서 오는 병력을 경계하지 않았을 테지만, 조금 전까지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들이었기에 경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 당주님이시다!”
제일 선두로 달려오는 노부나가의 얼굴을 확인한 한 사무라이가 외치자, 모두가 언제 발검했냐는 듯 빠르게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막 마지막 사무라이가 검을 검집에 넣은 그 순간.
노부나가는 제일 먼저 말을 멈춰 세운 후, 곧바로 말에서 내려 다급히 평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주님!”
그런 그녀의 다급한 모습에 뒤따른 사무라이들 역시 재빨리 말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난리는,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는 일영의 고개를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살짝 떨리며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던 고개가 당주라는 소리에 바로 선다. 그리고 머잖아 일영에게 도착한 노부나가는 하염없이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
얼핏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피를 이미 많이 흘린 듯 얼굴은 새하얗기 그지없었고, 일전에 다쳤던 팔은 물론 복부에는 중상이라도 입었는지 급조한 천 쪼가리로 출혈이나 겨우 막고 있었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생사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이, 일영.”
히카게라는 일본식 이름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일영이라는 조선 이름이 생각났을 뿐.
그녀는 일영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한없이 창백한 그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곧 살짝 떨릴 정도로 서늘한 감촉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당주님.”
문득, 조금 전 그녀의 앞에서 죽어간 닌자의 얼굴이 그와 겹쳤다. 때문에 그녀는 평원이 떠나가라 외쳤다.
“의원, 의원을…!”
허나, 의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의 뒤를 따라온 사무라이 중 한 명이 흥분한 그녀의 뒤로 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당주님. 일단 빠르게 나고야로 옮기는 것이….”
치료를 받지 않으면 필시 죽는다.
때문에, 그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노부나가도 뒤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의원에게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허나 그 순간.
“쿨럭…!”
일영의 입에서 내뱉어진 기침이 노부나가의 품으로 향했고, 척 보기에도 적잖은 양의 핏물이 그녀의 가슴을 가린 붕대 위를 적셨다.
“일영!”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요시나리가 다급히 외쳤고, 이츠키 역시 사색이 되어 노부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더는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입술을 질끈깨물며 외쳤다.
“당장 나고야로 옮긴 후 치료해!”
“예!”
환자가 타기에 말을 너무 거칠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과 이츠키는 일영을 말 위에 억지로 태운 후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릴 틈도 없이 곧바로 박차를 가했다.
이랴!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이 다급히 평원을 떠났다. 그렇게 되자, 평원에 남은 것은 노부나가가 데려온 백여 명의 사무라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배신한 낭인들이 전부였다.
요시나리의 시선이 저 멀리 멀어지는 일영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때.
찰싹!
일순간 뻗어진 노부나가의 손바닥이 요시나리의 뺨에 정확히 꽂혔다.
요시나리의 고개가 돌아가고, 서늘한 공기에 창백해진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어떤 동요도 없이 너무나도 서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명해라. 요시나리.”
“…예.”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간의 일을 모두 설명했다. 히데요시의 배신과 며칠간 쫓기다가 일영의 도움으로 겨우 살았지만, 일영이 저렇게 되고 말았다고.
그런 그녀의 말에 노부나가의 시선이 끌려온 하급 사무라이들에게 꽂혔다.
그리고 일순간 그녀는 뒤에 선 사무라이의 검을 뽑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 무슨.”
척 보기에도 살갑진 않은 그녀의 흉흉한 모습에 배신한 하급 사무라이들은 몸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 머잖아 찰나의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서걱, 툭.
잘린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동시에, 노부나가는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목소리로 남아있는 낭인들을 향해 말했다.
“저 남자가 살기를 바라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역시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테니까.”
순간, 그녀의 말을 들은 사무라이가 악에 받힌 목소리로 외쳤다.
“제, 제발 살려주신다면…!”
“살려줘?”
비릿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놈들이, 버러지들이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검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꽉들어간다. 동시에, 그녀는 성큼 앞으로 걸어 또 하나의 목을 베어냈다.
서걱, 툭.
다시금 평원에 고깃덩어리가 늘어나고, 그녀는 사색이 된 채 눈을 감고 있는 버러지들을 향해 말했다.
“기대해라.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만들어 줄 터이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