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미노의 아가씨(2)
* * *
다그닥! 다그닥!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내리는 폭우 아래로 수십에 달하는 사무라이들이 말을 타고 평원을 내달렸다.
히잉!
지친, 또는 추위에 몸을 떠는 말들은 주인의 강압적인 운전에 묵묵히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투둑, 투둑.
이츠키는 머리에 쓴 진가사를 더욱 내려 달릴 때 얼굴로 튀는 빗물을 막아내며, 제일 선두로 내달리는 일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그는 몇 시간 전, 일영이 닌자의 말에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곤 고삐를 꽈악쥐었다.
그것은 은연중에 느낀 두려움에서 오는 자연적인 반응이었다.
뭐랄까.
어쩌면 요시나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일영의 표정은 그야말로 무미건조했다.
허나 그것인 감정이 죽은 게 아니라, 너무 큰 분노였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머잖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히랴!
하!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 중, 여유가 있는 이들을 모두 모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런 강압적인 모습에 다른 사무라이들이 반발할 법도 했지만, 이츠키는 그들이 그러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쫄리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이츠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일영은 제정신이 아니다.
‘빌어먹을, 히데요시 그 개자식은 대체 왜…!’
하필 엮여있는 게 일영과 감정이 좋지 않은 히데요시와 그 파벌이었다.
더욱이, 어쩌면 정실이 될 수도 있는 요시나리까지 엮여있지 않은가.
여러모로 일영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츠키는 부디 요시나리가 살아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일영의 분노를 막을 자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저 길목입니다!”
그때, 일영과 마주 달리며 길을 안내하던 닌자가 외쳤다.
그는 척 보기에도 울창한 수풀에 가려져 좁은 길목을 가리키며 일영에게 말했다.
“산 안에서는 말로 움직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도련님. 어쩌시….”
“전원, 말에서 내린다.”
일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이츠키 역시 뒤따라 내려 일영의 뒤에 섰고, 다른 사무라이들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일영을 따라 말에서 내렸다.
“안내해라.”
“아, 알겠습니다.”
일영은 머리에 쓴 진가사를 살짝 들어 덥수룩한 머리 사이로 서늘한 안광을 뿜으며 곁에 서 있는 닌자에게 말했다.
일영과 눈을 마주친 닌자는 살짝 몸을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산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때.
“죽여라!”
“이야아아!”
초입 부근을 지나 길의 양옆으로 나무가 울창한 부근에 다다르자, 일련의 무리가 함성을 내지르며 검과 창, 내지는 도끼를 들고 그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도련님을 지켜!”
다행히 활은 없는지 놈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일영과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에게 내달렸다. 때문에 이츠키를 비롯한 사무라이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일영을 호위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허나.
“도, 도련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던 일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그의 흔적을 쫓았다.
그때, 문득 귓가에 핏물에 익사하는 듯한 고통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르륵….”
서걱, 툭.
“다들 뭐 하는 거냐.”
일영은 자신에게 도끼를 들이미는 적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곤, 검을 한 바퀴 돌려 핏물을 털어내며 서늘한, 아니오직 살기만이 담긴 눈으로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모조리 죽여버려.”
그의 말에 담긴 감정은 간단히 말해서 귀찮음이었다. 그래. 귀찮음.
일영은 눈앞의 적들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급 사무라이나 될법한, 아니.
계급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잔챙이다, 잡졸이며, 일영의 앞길을 가로막는 버러지들일 뿐이다.
때문에, 일영은 귀찮은 것이다.
일검에 죽을 버러지들이, 쓰레기들이 앞길을 막는 것이 말이다.
“끄아아악…! 커억!”
일영은 또 한 명의 적의 팔을 베어버리고,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다른 놈의 도끼를 들어 단번에 미간을 반으로 쪼갰다.
파앗하고 검붉은 핏물이 얼굴에 튀었고, 도끼에 맞은 충격으로 안구가 터져 바닥에 줄줄 흘렀어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런 일영을 본 사무라이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버러지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말이다.
*
타다닥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숲 안에 울렸다. 짙은 어둠과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그녀들은 어떻게든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읏!”
중간에 달리던 키쵸가 돌부리에 살짝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는 등, 실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쉬이익!
그때, 나무들 사이로 날카로운 살기를 뿜는 화살들이 비바람을 가르며 쏟아졌다. 척 보기에도 적잖은 수에 선두에서 내달리던 요시나리는 그녀들을 먼저 보낸 후 창과 함께 허리를 돌렸다.
“흐읍!”
태반은 좁은 시야 탓인지 나무에 박히거나 수풀로 떨어졌으나, 그럼에도 그녀들을 노리는 화살은 꽤 많았다. 때문에 그녀는 손에 든 창을 한번 크게 돌린 후 그대로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오는 하급 사무라이의 머리를 베어냈다.
“여기에… 컥!”
서걱, 툭.
한때는 사람이라 불렸던 고깃덩어리가 기울어지는 것조차 다 눈에 담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금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쫓아라아!”
“놓치면 안 돼! 무조건 잡으라고!”
요시나리는 수도 샐 수 없는 무수한 발소리에 입술을 질끈깨물었다.
처음엔 30명에서 시작된 습격이었으나 점점 병력이 불더니 구원을 맡은 하급 사무라이들의 배신까지 겹치자 이젠 수를 가늠할 수조자 없게 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평소 욕지거리나 험한 말을 잘 입에 담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이번에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욱씬.
아무래도 옆구리의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달리면서 갑옷과 살이 마찰 될 때마다, 지독한 쓰라림과 저릿함이 척추를 따라 그녀를 괴롭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일행을 쫓았으나 그마저도 곧 큰 의미가 없어졌으니.
“…아.”
서서히 나무와 수풀이 사라졌다.
드러난 공터는 옅은 안개를 살짝 걷어내는 듯했고, 공터에는 오래전 발길이 끊긴 듯한 허름한 신사만이 자리할 따름이었다.
그 풍경을 눈에 담은 이코마 키츠노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곁에 서 있는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바라보았다.
“…이거.”
“예.”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인지,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몰이를 당한 듯싶습니다.”
우연히 이런 장소로 왔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큭, 크큭.”
그때, 포위된 그녀들의 앞에 웬 키작은 사무라이 한 명이 광소를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하핫!”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요시나리는 창대가 부서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꽈악쥐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히데요시. 감히 하급 사무라이 주제에.”
원숭이와 닮은 얼굴에 육손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그를 모를 수가 없다. 옆구리의 상처를 낸 것이 바로 저놈이었으니까.
가문의 가주이자 노부나가의 가신인 그녀에 비해 그는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만민이 평등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하급 사무라이라고 어찌 용맹하고 지모가 빼어난 자가 없겠는가. 당장 그녀가 사랑하는 일영조차도 하급 사무라이였던 과거가 있다. 허나, 요시나리에게 저 사무라이들은 버러지였다.
“아무리 푼돈에 목숨을 파는 낭인이라지만, 최소한의 긍지조차 없는 것들…!”
여태껏 오다 가문의 밑에서 빌어먹은 놈들이, 조금 틈이 나자마자 주군을 배신하다니 저들에게 사무라이라는 말도 아깝지 않은가.
그녀는 마침내,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머리에 쓴 진가사를 벗어 던졌다.
투욱하며 검은 삿갓이 비로 인해 진창이 된 흙바닥에 떨어지고, 그녀는 푸른 빛이 도는 창을 한 바퀴 크게 돌리며 당당히 외쳤다.
“덤벼라!”
그러나 그때.
“자지에 굴복한 계집년 주제에, 호탕한 척은 천하제일이로구나. 큭큭.”
“이 개….”
히데요시의 이죽거림이 귓가에 꽂히고, 그것에 요시나리가 발끈하려는 찰나 그는 덧붙였다.
“요시타쓰님께서 내게 약속한 것이 뭔지 아나?”
“뭐?”
히데요시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비록 낭인의 것이라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잘 버려진 칼날에 핏물이 맺히고, 그는 비릿한아니, 실로 비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가독 1만 석과 네년을 받기로 했지. 큭큭. 히카게라는 우스운 이름을 받았다고 하나 조선놈은 조선놈일 뿐. 그런 버러지에게 굴복한 네년을 내가 잘 보듬어 줄 생각이다.”
“…이제보니, 버러지라는 말도 아까운 놈이었구나.”
요시나리는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다리에 힘을 주고 대지를 박차려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말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뿐인 줄 아느냐? 네년의 뒤에 서 있는 상단 계집은 사형수들의 정액받이로 던져줄 것이고, 닌자년은 같은 닌자들에게 겁간당한 후 토막 내어 버릴 것이다.”
모두 천박하고 패악적이기 그지없는 미래였기에, 사무라이들은 그녀들이 겁을 먹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겁을 먹은 것은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떠는 키쵸 뿐, 이코마 키츠노와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말들은 공유하는 건가요, 아니면 모든 남자들 머리에 공통적으로 있는 망상인가요?”
“글쎄요.”
철컥키츠노의 석궁이 장전되고, 그녀는 히데요시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일순간 섬광과 같은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히데요시를 향해 뻗어졌다.
“흐읍!”
그러나 히데요시도 일전에 보았던 무기이기 때문인지, 꽤나 수월하게 피하는 듯 했다. 그러나 머리나 심장을 노리고 쏘아지리란 예상과 달리 히데요시는 허벅지 부근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시선을 내려 허벅지를 바라보니, 오른쪽 허벅지 중앙에 반쯤 부러진 화살이 꽂혀있었다. 그 모습에 키츠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고환을 노렸는데, 아쉽네요. 비가 와서 그런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