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미노의 아가씨(1)
* * *
짙은 회색의 하늘이 눈물을 흘린다.
겨울이라 부르기엔 사뭇 아쉽고, 가을이라 부르기엔 과한 날씨 속에서 때와 맞지 않는 폭우가 솨아아…. 소리를 내며 대지로 추락한다.
회색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짙은 물안개가 숲을 가득 메우니.
도망하는 이에겐 다행이요.
추격하는 이에겐 낭패이리라.
“쿨럭!”
요시나리는 검은 삿갓의 경사를 따라 빗물이 흘러내림을 느끼며 핏물이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도주 중 입은 옆구리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방심했어.’
설마, 하급 사무라이들이 배신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꽤 오랜만에 진심으로 살심을 품으며 이빨을 으드득갈았다.
“…저기.”
그때, 그런 그녀의 앞에 흰 손수건이 불쑥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어 내밀어진 손수건의 끝을 쫓자 곧 그곳에 죄책감과 공포, 그리고 슬픔이 담긴 눈으로 서 있는 은발의 여자가 눈에 담겼다.
성인이라기엔 소녀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은 그녀가 내민 손수건을 잠시 바라보던 요시나리는 그것을 받아들곤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키쵸 아가씨.”
“아, 아니요. 이게 다 저 때문인걸요.”
요시나리의 가벼운 인사에 그녀는 되려 마주 고개를 숙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 장발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그녀는 요시나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바스락.
그때 수풀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요시나리는 곧바로 창을 쥐었으나 그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작게 속삭여졌다.
“나에요. 요시나리.”
목소리를 듣자 요시나리는 쥐었던 창에 준 힘을 살짝 풀었다. 그러곤 몸을 숨기고 있는 수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다.
“읏차, 고마워요.”
갈색 머리에 귀족이라기엔 어딘가 소탈한, 그러나 묘한 기품이 흐르는 그녀의 분위기에 요시나리는 내심 정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코마 키츠노.’
오와리에 거점을 둔 이코마 상단의 총단주이자 이번 호위 임무의 대상 중 한 명.
“그보다, 그 닌자들은 괜찮으련지 모르겠네요.”
닌자들이라는 말에 요시나리는 이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이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이 도망칠 수 있게 적들의 이목을 끈 것이 닌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안전해진 것도 아니건만,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일영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길 듯싶었다.
그녀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쓴웃음을 지었다.
‘일영.’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상하기 싫었지만 만약 죽는다고 해도 마음 정도는 전했다는 걸까.
허나 그 순간.
“표정이 왜 그래요? 곧 죽을 사람처럼.”
이코마 키츠노는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외투를 손으로 툭툭털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
그녀는 대충 요시나리의 걱정을 눈치라도 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어딘가 볼록한 것이 보이는 손목을 흔들었다.
“어제 봤잖아요?”
그 볼록한 모양을 본 요시나리는 그것이 어떤 무기인지 회상했다.
흔히 석궁이라 불리는 것을 팔에 찰 수 있도록 작게 축소한 모양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까.
실제로, 하급 사무라이들에게 배신당하고 교전하는 그 순간 그녀는 팔목에 달린 개량 석궁으로 두 명의 미간을 꿰뚫은 후, 단검을 휘둘러서 한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허나 요시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죽어도 상관이 없지만, 아가씨와 총단주님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차하면 저를 버리고 도망치세요.”
당주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저 은발의 아가씨, 키쵸와 키츠노를 오와리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 그러니 요시나리는 그 명령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이코마 키츠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뭘 버려요?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지. 설마 노부나가 걔가 그렇게 말했어요?”
“노, 노부나가라니요. 당주님을….”
“됐어요. 나한텐 그냥 괜히 센 척이나 하는 철없는 동생이니까.”
그런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이라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혹시 모른다는 듯 석궁에 묻은 물기를 대충 수건으로 닦아내곤 덧붙였다.
“살 수 있으면 살아요. 괜히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이 슬프잖아요?”
마치 이미 겪어본 듯한 그녀의 목소리 안에는 어딘가 씁쓸함과 회한이 가득했다.
때문에, 요시나리는 별다른 답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키츠노도, 요시나리도 입을 열지 않자 곧 정적이 찾아왔다.
솨아아….
안개가 낀 숲속에 자리한 것은 쏟아 내리는 빗소리와 나뭇잎에 추적추적 부딪히는 바람 소리, 나아가 간간이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전부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정도는 비가 옅어지고, 그녀들 역시 슬슬 그것을 느끼고 이동을 재개해야겠다 생각한 그때.
바스락.
다시금 멀지 않은 곳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막 허리를 편 그녀들은 순간 멈칫하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으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러 간 이코마 키츠노와 달리 이제 그녀들에게 올 이들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제 뒤로.”
“…예.”
요시나리는 창대를 꽉 쥐며 가녀린 체구를 가진 키쵸를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앞으로 내달려 놈들을 베어버릴 수 있도록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철컥.
그리고 때마침, 키츠노 역시 손목의 석궁을 장전하여 수풀을 조준했다.
찰나의 순간.
긴장감이 숲을 맴돌았다.
키쵸는 가뜩이나 작은 몸을 더욱 웅크리며 곧 벌어질 혈전을 두려워했고, 요시나리는 언제라도 적을 베어버리겠다는 듯 서슬 퍼런 안광을 뿜어댔다.
그러나 그 순간.
“접니다.”
“…아!”
무뚝뚝한, 아니 차라리 감정이 없다고 표현하는 게 편할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수풀 속을 헤치고 한 여자가 걸어 나오자, 그녀들은 안도와 반가움이 섞인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름이 아니라.
코우카 류의 죠닌(上?: 상급닌자)이자 이번 상행에서 노부나가의 밀명으로 그녀들의 호위를 맡은 가신.
요시나리는 창을 쥔 손의 힘을 풀며 진가사를 살짝 들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
그러나 순간, 곁에서 마찬가지로 안도하던 이코마 키츠노는 가까워진 타키가와의 상처를 확인하곤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살에 스친 것뿐입니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다.
스쳤다면, 이렇게 핏물이 묻어나올 일도 없겠지.
그녀는 팔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무리만 하지 말아요. 뼈에 닿지만 않았으면 괜찮을 테니까.”
그러나 숱한 상행을 통해 어지간한 상처를 볼 줄 알게 된 키츠노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에, 그녀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고 오직 타키가와 카즈마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충고에.
긴 장발에 갸름한 턱선을 가진 그녀는 진가사 아래로 살짝 시선을 내려 이코마 키츠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여전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총단주님.”
*
그때, 묵묵히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키쵸가 최대한 조심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저…. 함께 갔던 다른 닌자분들은?”
그것은 비단 은발의 여인뿐만 아니라, 요시나리와 이코마 키츠노 역시 내심 궁금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굳이 입밖으로 그 물음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대충은,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닌자들은.”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무심한 얼굴로 매듭이 헐거워진 진가사를 벗었다. 그리곤 너무나 무심한 얼굴로 매듭을 다시 묶으며 답했다.
“절반은 놈들을 따돌리다가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지원을 요청하러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아마 그들 태반도 도중에 잡혀 목숨을 잃겠지요.”
“아….”
무미건조한, 그렇기에 더욱 날카로운 그녀의 말에 찔리기라도 한 듯 은발의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자신 때문에 죽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듯 말이다.
때문에, 곁에 있던 키츠노는 키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키쵸.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일단, 살아남는 것부터 생각하자고요. 죄책감이란 감정은 값이 비싸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씨익 웃었다.
그런 그녀의 말이 어딘가 의미심장해서, 키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위태롭지만 조금은 감정을 추스른 얼굴을 했다.
한편, 타키가와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매듭이 똑바로 묶인 진가사를 다시 썼다.
그녀는 동시에 곳곳이 찢어지고 베여 헐거워진 옷을 여미며 생각했다.
‘지원이 오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할까.’
그녀를 따라서 오다 가문으로 투신한 코우카 류 닌자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이번 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나, 그녀에게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곳곳으로 흩어져 지원을 요청하러 떠난 닌자들이 몇 명이나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 뿐이었다.
본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모두에게 나고야로 향할 것을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오다 가문은 본거지를 기요스 성으로 옮기고 있다. 때문에, 당주인 노부나가가 부재하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택한 방법은 2가지.
기요스, 나고야로도 사람을 보내고, 히라테 가로도 사람을 보내는 것.
거기까지 생각한 타키가와는 힐끔 시선을 돌려 요시나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배를 맞춘 사이라고 했지.’
그녀는 일영을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믿지 않았다라기 보다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게 옳으리라.
다만 그녀가 믿는 것은 관계였다.
히라테 히카게.
아니, 백일영이라는 그 남자가 요시나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
그것 때문에 그녀는 히라테 가로도 사람을 보낸 것이다.
‘물론, 최선은 당주님께 닿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히라테 가로 보낸 닌자는 단 한 명.
반면 기요스와 나고야로 보낸 닌자는 각각 세 명이다.
확률적으로도 그녀에게 일영은 일종의 보험인 셈이었다.
“이동해야 할 듯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이동할 것을 재촉했다. 비록 폭우와 안개가 껴서 추적이 헐거워졌다지만 완전히 추적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야죠. 가요.”
“맞습니다.”
그녀들 역시 타키가와의 생각에 동의했기에,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 했다.
타다닥.
“쏴!”
안개 낀 저편에서 들려오는 일련의 뜀박질 소리와 짧게 울려 퍼지는 적의 가득한 외침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순간 그녀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고.
“달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들은 일제히 숲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추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