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죄많은 남자(4)
* * *
“아, 그리고….”
일영의 그런 반응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내심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결례 하나를 꺼냈다.
“이, 일전에 본명을 부른 것, 사죄드립니다. 흥분하여 그만….”
본디 친밀하지 않은데 본명을 부르는 것은 큰 결례였다. 더욱이 그 상대가 히라테 공의 양자라면 더더욱.
물론, 그걸로 큰 사죄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심 그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었던 가쓰이에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아…. 아, 그랬죠.”
허나 정작 일영은 그녀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니, 뒤늦게 일본 문화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인데, 어떻게 문제를 삼겠는가.
‘잠깐, 이거 어쩌면?’
무심결에 이름을 불렀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호의가 살짝이나마 있다는 말이다.
즉, 그녀와 친해질 기회라는 뜻.
“아니요. 오히려 친근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일영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화답했다.
“아….”
그러자 시바타 가쓰이에는 당황했는지, 아니면 의외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잠시 멍하니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이내 노부유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 앉아 있는 일영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황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어딘가 묘하게 들뜬듯한 그 발걸음에 일영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뭐,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남은 음식을 집으려 젓가락을 들었다.
한편, 곁에서 일영과 두 여자의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이츠키는 뭐랄까, 존경심과 질투가 가득한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뭐지? 친구 집안이 박살 났다는 건 핑계고, 여자 문제로 쫓겨난 거 아니야?’
어쩌면 이 자리에서 이놈을 암살하는 게 열도를 위한 길이 아닐까?
이츠키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장난으로 해본 생각이기도 했고.
지체 높은 가문의 장남이 여러 여자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외모도 외모 아닌가.
‘설마, 나중에 부인과 첩실까지 2자리 수를 넘어가기라도 하겠어. 적당히 멈추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츠키는 남은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
식사를 마친 후, 일영은 곧바로 히라테 가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한산했다.
기요스 성으로 이주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다니기 썩 좋지는 않은 겨울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선선하네.’
다행히도 일영은 이런 분위기를 썩 싫어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현대에 있었을 때도 때때로 홀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취미였던 그였다.
‘물론…. 구경할 거리가 없긴 하지만.’
이미 평소에 이 시대 일본의 거리는 꽤 많이 봐 왔기에, 오늘은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읏.”
일영은 바람에 스친 것인지, 아니면 찬 공기를 많이 맡아서 시린 것인지 슬슬 아려오는 팔의 통증에 쓰게 웃었다.
회복력이 좋다고 해도 환자는 환자다.
때문인지 잠깐 밖에 나돌아다닌 것만 해도 평소보다 심력 소모가 꽤나 컸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회복하는데 주력해야겠어.’
의원이 괜찮다고는 했지만, 현대인이 이 시대의 의학을 모두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아편이나 수은을 치료약으로 쓰던 시대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노부나가가 약재를 보냈다고 했지.’
다른 사람도 아닌 당주인 그녀가 보낸 약재이니, 적잖이 좋은 것들을 보냈으리라.
일영은 겉으론 고압적인 척하면서 내심 챙겨줄 건 알뜰하게 챙겨준다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고, 머잖아 가문의 정문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그때.
“어? 저분….”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걸으며 하품을 하던 이츠키는 문득 가문의 저택 앞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곤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곧 일영이 고개를 들자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때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 아니 요시나리는 언제 초조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환한 얼굴로 안도가 섞인 단말마를 내뱉었다.
“일영!”
그리곤 곧바로 일영을 향해 달려오는 그 모습이 마치 집에 돌아온 주인을 마중 나온 강아지와 같아 웃음 지으려던 그는, 곧 그녀가 웬 경갑에 삿갓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옷은 왜?’
당분간 전투는 없을 텐데?
라는 생각에 그가 뭐라고 물어보려던 그때, 요시나리는 어느새 일영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그를 올려보며 안도하는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
“못 보고 가다니?”
순간, 흔히 진가사라고 불리는 검은 삿갓 모양의 투구에 살짝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게, 작은 상단을 호위하러 가는 길이야. 원래는 곧바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시간이 살짝 비어서….”
사실 그를 보려고 억지로 만들어 낸 시간이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 일영에게 생색을 낼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진가사를 조금 더 젖혀 자신을 내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일영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덥수룩한 검은 머리에 비해 턱선은 갸름하고, 때때로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대면서도 진지할 땐 너무나 든든하다.
무심결, 품에 기대고 싶을 만큼.
그녀는 회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을 한가득 담았다. 비록 며칠밖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 찰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야.’
사실, 이미 시간을 살짝 넘긴 후였다.
황급히 일영의 저택으로 향했는데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리에 혹여나 못 보고 갈까 얼마나 전전긍긍했는가.
한편, 일영은 자신을 보고 안도하는 요시나리의 모습에 역시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고작 며칠 떨어질 뿐인데 잠깐 시간이 나자마자 자신을 보러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았던가.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상대가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라면 더더욱.
일영은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대형견처럼 옅은 홍조를 띤 채, 헤실 웃는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보다 상단 호위면 당주님 명령이야?”
“응, 자세한 얘기는….”
“말 안 해도 돼. 얼마나 걸리는데?”
상단 호위라면 굳이 자세히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전의 전장에서 그녀의 무력을 직접 보았건만 무슨 걱정이 되겠는가.
요시나리는 일영의 물음에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다가, 이내 답했다.
“길어도 일주일?”
“다행이네. 짧아서.”
이동 수단이라곤 말, 또는 걷는 것밖에 없는 이 시대에서 왕복 일주일이면 꽤 가까운 거리였다.
‘아마 미노, 그러니까 사이토 가문과 교역한 물품을 호위하는 일이겠지.’
어느 시대에나 산적은 늘 있는 존재고, 그것이 각 영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습격당하는 일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는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린 채 요시나리의 머리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와. 다치지 말고.”
모르긴 몰라도, 아까 그렇게 초조해 하는 걸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난 것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그녀를 보내주려던 그 순간.
요시나리는 어딘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게 전부야?”
“응?”
어쩐지 익숙한, 그리고 불길한 말에 일영은 순간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 없을 텐데.
“됐어. 귀 대봐.”
“어, 응.”
갑작스러운 요시나리의 표정 변화에 일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대라는 말에 일영은 고개를, 아니 상체를 숙인 채 그녀의 어깨에 닿을 듯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영이 그녀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던 그 순간.
요시나리는 살짝 입술을 열려다가 문득 저 멀리서 자연스럽게 뒷짐을 진 채 하늘을 구경하고 있는 이츠키를 힐끔 바라보곤 피식 웃었다.
오전부터 생각했지만, 저 무사는 눈치가 좋다. 그리고 적당히 자리도 비킬 줄 알았고 말이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하겠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깐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눈을 질끔 감고 일영의 귓가에 들릴 정도로 살짝 속삭임과 동시에
“사랑해. 일영.”
쪽.
붉은, 생기가 맴도는 입술로 일영의 뺨을 살짝 훑은 후 이윽고 떨어졌다.
“어…?”
덕분에 그녀가 뭐라고 말할지, 혹시 화를 낸다거나 삐지진 않았을지 고민하던 일영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촉에 볼을 부여잡고 맹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요시나리는 이미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손으로 살짝 가린 채 뒤로 물러선 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움에 속눈썹이 살짝 떨림에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미약하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
덕분에 잠시 벙쪘던 일영 역시, 마주 웃음을 터트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녀와.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둘의 대화는 끝났다.
일영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요시나리는 곧바로 상단을 호위하러 떠났다.
*
그리고 일주일 후.
사흘 전부터 일까.
“다시 말해봐.”
우중충한 하늘에서 내리는 빗속에 서 있는 웬 남자에게 일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솨아아….
쏟아내리는 빗물이 남자의 검은 삿갓을 따라 바닥에 투둑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상처 입은 팔에 핏물이 함께 떨어지고, 남자. 아니 코우카 류의 닌자인 그는 일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조금 전 그에게 전했던 말을 전달했다.
“…적들의 습격에 닌자와 상단 호위병은 전멸, 뒤늦게 합류하신 죠닌(上?: 상급닌자)과 모리 공께서 분투하셨지만.”
콰득.
남자는 이빨이 부서질 듯 세게 악물었다.
“함께 따라간 하급 사무라이들의 배반으로 현재 쫓기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간 후.
척.
거치대 위에 올려놓았던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쥔 채, 방 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츠키에게 말했다.
“이츠키.”
“예. 도련님.”
“가문 내에 기용 가능한 모든 무사를 모아.”
일영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또한 놀랍도록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히데요시, 그 버러지를 죽이러 가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