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죄많은 남자(3)
* * *
일영은 홀로 성밖으로 나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요시나리와 함께 나오려던 그때, 노부나가 직속 사무라이가 고개를 숙이며 요시나리를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노부나가의 명령이기도 했고, 또 정황상 위험한 일도 아닐 테니까.
다만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했다.
그때, 밖에서 둘을 기다리던 이츠키는 홀로 나오는 일영을 바라보며 물음표를 띈 얼굴로 물었다.
“어라? 왜 혼자 나오십니까?”
“아, 요시나리는 당주님께서 부르셔서.”
“어, 그렇습니까.”
당주가 가신을 부른 것이다.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기에 이츠키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때문에, 일영도 곧 그냥 시킬 일이 있나 보다정도의 감상을 끝으로 관심을 끊었다.
‘한동안은 조용할 테니까.’
기억을 뒤져봐도 딱히 생각나는 큰 사건은 없었다. 그러니 아마 사소한 일이겠지.
그는 그런 생각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고, 거리를 천천히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슬슬 입지를 다졌으니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지금쯤 큰그림을 그려야 할 시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객관적으로 봐도 일영의 입지는 꽤 견고해지고 있었다.
일단 히라테 마사히데의 장남이니, 모리 요시나리와 연인 관계이니 그런 건 다 제쳐두더라도 그가 이룬 공은 고작 몇 달 사이임을 감안하더라도 꽤 특출난 것이니까.
더욱이 어느정도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음을 직감했기에, 일영은 머릿속으로 어디까지 미래 지식을 이용해도 될지를 가늠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단 탄창 개념으로 화약을 일정량 포장하는 건 당연히 도입해야 하고, 조총의 성능 자체를 개량하는 것도 생각해 볼 법해.’
물론 생각나는 건 많았지만, 일단은 추리고 추린 건 저 2가지였다.
‘문제는 그게 후에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냐인데.’
아무리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일영에 의해 발전한 기술이 후에 임진왜란을 촉발하는 걸 넘어서 성공을 거둔다면 입맛을 쓴 수준이 아니라 후회 속에서 자살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비약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당장 일영이 없이도 독자적으로 조총을 개량하여 실전에 써먹은 역사적 사실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요점은, ‘적당한 선’을 지켜서 기술을 앞당기거나….
‘혹은, 조선도 아예 덩달아서 발전시키거나.’
그 외에도 방법은 많다.
노부나가를 앞세워 열도를 통일한 후, 조선과 평화를 도모하여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고, 아예 정보를 개방하지 않아서 원 역사대로 흘러가는 길을 택하는 것도 있다.
문제는 뭐가 맞는 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
때문에 일영은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한편, 그런 일영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이츠키가 말했다.
“그 도련님?”
“응?”
“그런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 아, 그러네.”
이츠키의 말에 일영은 뒤늦게 슬슬 배가 고파옴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을 해보니 정오가 넘은 시간임에도 제대로 된 요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이츠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제가 맛있는 식당을 알아 놨습니다. 모실까요?”
“그래. 그러자.”
저번에 이츠키가 추천한 식당도 꽤나 맛이 좋았었지. 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고, 이츠키는 곧바로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뒤에서 귀에 익은, 그러나 썩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울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머, 여기서 다 뵙네요? 히라테 공.”
늘 그랬듯 여성스럽고 격식을 차리지만, 어째서인지 묘하게 어색한 그 말투에 이츠키는 빠르게 걸음을 멈춘 채 일영의 뒤로 물러섰고, 일영은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두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일영은 형식상의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숙인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노부유키님도 아닌, 아가씨.
그 거리감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기에 노부유키는 어딘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라고 바보가 아니다.
어째서 일영이 평소보다 더 선을 긋는지, 자칫 모욕으로 여겨질 정도로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억지이긴 했지.’
저번 전투에서 일영을 억지로 선봉에 세운 것이 바로 그녀였다. 물론 제안 자체는 노부유키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하긴 했지만, 일영이 거절할 수 없게 상황을 만든 것은 그녀였으니까.
‘으음, 아무래도 꽤 미움을 산 모양이네.’
솔직히 죽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괘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누구인가.
비록 지금은 미약하나 장차 오와리의 주인이 될 야망을 품고 있는 여장부였다.
그런 자신이 장난스럽게나마 혼약을 청했는데 그리 매정하게 거절한 것도 모자라, 곧바로 다른 여인과 배를 맞추니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 한들 일영의 다친 팔을 보자 살짝은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그렇게 격렬하게 싸울지 누가 알았겠어.’
조선에서 무사 생활을 했다고 한들, 왜의 무사들에 비해서 모자라리라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흔히 명은 창, 조선은 활, 왜는 검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시바타 가쓰이에의 증언으로 알게 된 일영의 무력은 상상외였다.
더욱이 그가 상처로 일주일간 사경을 헤맸다는 소식까지 듣자, 내심 미안함과 그와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먼저 말을 건 것이다.
허나, 일영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니 내심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어느정도 유명해진 일영, 그리고 누구라도 알아보는 노부유키가 거리 한복판에서 마주 서 있자 자연히 일대의 사람들은 서서히 물러섰고, 그 모습을 잠시 흘겨보던 일영은 작게 한숨을 내쉰 채 말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먹을만한 식당이 있다고 하니, 들지 않으셨으면 함께 가시지요. 아, 시바타 공도 함께 말입니다.”
“저, 저도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일영의 언급에 붉은 한야 가면을 쓴 채 노부유키의 뒤에 서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 모습에 순간 그녀들의 뒤로 서 있던 호위무사들은 경악이 담긴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일영은 어느새 태연하게 바꾼 얼굴로 이츠키에게 말했다.
“가자. 안내해.”
“예, 도련님.”
덩달아 이츠키의 긴장도 풀린 것일까.
이츠키는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능글맞은 얼굴로 앞장서기 시작했고, 얼떨결에 식사 초대를 받은 두 여자는 잠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서히 멀어지는 일영의 뒤를 황급히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거리는 다시금 일반 민초들로 채워졌다.
한편, 그들 사이에서 일영과 노부유키 일행의 대화를 묵묵히 바라보던 젊은 여자는 죽립을 눌러쓰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숨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히라테 히카게…. 조선 이름은 백일영이라고 했지.”
그녀는 잠시 그 이름을 곱씹다가, 이내 눈 깜짝할 사이 상인에 가까운 옷으로 변복하곤 골목을 나섰다.
지금 중요한 건, 당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
“물부터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요. 도련님.”
일영은 노파에게 말하곤, 너무나 태연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거리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두 여자는 물론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는 사무라이들 역시 그런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노부유키와 가쓰이에는 시선을 교환하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돌아온 것은 혼란스러워하는 서로의 눈빛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영의 분위기는 누가 봐도 적대적인 것에 가깝지 않았는가. 헌데 갑자기 식사를 제안하고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으니 그녀들의 입장으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노부유키가 당황하는 것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으니
‘나, 나 식사 했는데….’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이미 그녀는 가신들과 함께 식사한 후였다. 그것도 단순히 몇 시간 전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에 말이다. 그리고 그건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녀 역시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때, 때마침 노파가 잘 차려진 상차림을 들고 그들의 앞으로 다가와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요.”
노파는 그렇게 말하곤 최대한 책잡힐 일이 없게 공손히 고개까지 숙이며 그들에게 멀어졌고, 일영은 상에 정갈하게 차려진 일본식 백반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기가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대부분 절임 채소나 국, 내지는 간결한 생선 요리가 전부였지만 이미 익숙해진 일영에겐 꽤 군침이 도는 상이었다.
“자, 드시죠.”
“어…. 네.”
일영이 먼저 젓가락을 들자, 이츠키를 비롯하여 노부유키와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앞에 놓인 밥을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일영이었다.
그는 어느새 밥 반 공기를 비운 채,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제가 일전부터 아가씨의 정략혼을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일단 먼저 묻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그녀를 정면에서 응시하며 일전의 여유로운 모습을 살짝 거두곤 물었다.
“대체 절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흐음….”
그의 물음에 노부유키는 내심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물음은 어느 정도 핵심을 뚫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노부유키는 손에 쥔 젓가락을 잠시 손안에서 굴리다가 이윽고 답했다.
“그야, 당연한 거잖아요? 당신은 히라테 가의 양자이자 장남이며, 언니가 아끼는 무사에요. 더욱이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충성심을 증명할 길도 없었고요. 저로선 탐나지 않을 수가 없었는걸요?”
말 그대로였다.
그녀의 입장으로선 일영이 큰 쓸모가 없어도, 그저 언니에게 골탕을 먹였다정도의 결말만 났어도 만족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할걸.’
그런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가 없다.
당장 시바타 가쓰이에의 반응만 봐도 어떤가. 평소엔 조용하다가 전투나 대련에는 환장하는 여자다.
즉, 전투나 무력에 대해선 진심이란 뜻이다.
그런 여자가 일영의 칭찬했으니 내심 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군요. 맞는 말입니다.”
일영은 잠시 손에 쥔 도자기 잔의 굴곡을 어루만지다가, 곧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전 이미 당주님을 주군으로 정한 몸입니다. 조선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낭인을 전전하던 제게 기회를 주신 것이 바로 당주님이니까요.”
“그건 저도….”
“아니요. 아가씨.”
일영은 순간 뭐라 말하려던 그녀의 말을 끊고,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답했다.
“아가씨께선 이미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아….”
그제야 노부유키는 일전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웬 조선 낭인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뭐? 됐어. 별 볼 일 없는 놈이겠지.’
라는 말로 일축했다.
물론, 당시 언니가 가문을 이어받게 된 것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일영이 굳이 그것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아쉽게도 저희의 인연은 그때가 끝인 듯합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당주님과의 반목을 끝내시고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저도, 저의 양부이신 히라테 공께서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노부유키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어느새 다 비워진 물잔에 이츠키가 따라주는 물을 받곤,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짧은 묵례를 건네며 덧붙였다.
“하지만, 일전 요시나리와 있었던 일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드릴 수 없지만…. 남녀 간 정을 통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되더군요.”
“…그런가요.”
노부유키는 어딘가 복잡함과 묘한 웃음이 담긴 얼굴로 깨작거려 채 반도 먹지 못한 상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특유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와, 식사를 거의 끝내가는 일영에게 말했다.
“듣기론 오니 멘구를 즐겨 쓰신다던데, 마침 저희 쪽에 나름 명성이 알려진 멘구 장인들이 몇 명 있어요.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기꺼이 받겠습니다.”
준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참, 스에모리에도 맛이 괜찮은 식당이 있는데, 나중에 한 번 오시겠어요?”
“그러죠.”
그의 흔쾌한 답에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고, 곧 먼저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다, 이내 살짝 고개를 돌려 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잖아 뵙게 되겠군요.”
식사로든, 아니면 전장에서든.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허나 일영은 그런 그녀의 말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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