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무라키토리데(???) 전투(1)
* * *
이른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얼굴에 나앉은 이슬을 걷어내고 막사 밖으로 나온 병사들은 별다른 명령 없이도 밥을 지어 간단한 아침 식사를 시작했고, 그건 일영이나 요시나리 같은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크흠.”
“…….”
다만, 막사 밖으로 나오자 둘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영의 막사는 천장도 없이 대충 천으로 가려놓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주변에 있던 사무라이들이나 아시가루들은 둘의 정사를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던 것이다.
“…으…으으.”
당연히 요시나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수치심에 죽기 직전이었고, 일영은 길게 검흔이 그어진 한야 가면을 요시나리에게 씌워주고서야 겨우 막사 밖으로 데려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사 밖으로 나오자, 일영은 ‘또?’라는 표정으로 앞에 선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노부유키와 시바타 가쓰이에였으니까. 때문에 일영은 지친다는 듯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번엔 왜….”
“…취향이 아니라는 뜻이. 이런 거였나?”
“예?”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일영이 예상하던 그것과는 한참 달랐다. 이번에도 어거지 정략결혼을 들이밀 거로 생각한 거와 달리, 그녀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하관을 가린 요시나리와 일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 뜻이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례할 줄은 몰랐군. 히라테 히카게.”
“어. 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일영은 아침이라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그녀가 왜 저렇게 싸늘한 반응인지를 살피려 했지만, 노부유키는 더는 말을 섞지 않은 채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때, 묵묵히 그녀를 뒤따르려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일영을 힐끔 바라보곤 나지막이 말했다.
“조선은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저도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
이미 시바타 가쓰이에와 노부유키는 멀어졌지만, 일영은 그녀들의 말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곁에서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살피던 요시나리는 불안한 눈으로 일영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서 왜….”
“으음…그게.”
일영은 정황을 묻는 요시나리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곧 일말의 가감 없이 어제의 상황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네 얼굴이 죽상인 걸 보고 널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노부유키가 잡아서 정략결혼에 대해 또 얘기를 꺼내기에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바로 널 찾아와서….
그리고 그 말을 경악어린 얼굴로 듣던 요시나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요약했다.
“그, 그러니까.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오다 가 차녀의 청혼을 2번이나 거절한 것도 모자라서, 그 직후 나한테 왔다고…?”
“응.”
“이, 이 멍청아!”
요시나리는 눈앞이 흐려짐을 느끼고 들고 있던 창을 일영에게 휘둘렀고, 일영은 진짜 살기가 담긴 창격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지.
아무래도 진짜 실수한 것 같은데.
그렇게 몇 번이나 창을 피했을까. 슬슬 진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무릎 꿇고 도게자를 박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요시나리의 창격이 멈췄다. 그녀는 창을 더 휘두르는 대신 머리를 쥐어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 만약 이걸 본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시면 어떡하지…?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안돼…내가 미쳤지. 미쳤어…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리고 그제야 일영은 새삼 자신이 저지른 일이 가볍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고 구리스를 바르지 않은 듯 뻑뻑하게 굴러가는 머리를 최선을 다해 굴렸다.
자. 상황을 요약해보자.
분명 처음 정략결혼을 거절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뿐만 아니라 히라테 가(家)의 가주인 히라테 마사히데도 난색을 표했으니. 그럼 문제는 어제라는 건데.
‘내가 뭘 했다고?’
자꾸 급한 사람 붙잡고 늘어지길래, 조금 강하게 말한 정도인데? 설마 그 말을 하고 바로 요시나리와 떡쳤다고 이러는 거야?
그래. 인정한다. 도의적으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겠지. 그런데 저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요시나리까지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실수를 한 건 맞는 것 같았다.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아가씨께….”
그리고 그때. 요시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진즉에 멀어진 노부유키의 뒤를 따르려던 그때.
“히라테 히카게님. 모리 요시나리님.”
그들에게 성큼 다가온 오다 가(家)의 무사들은 눈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쓴 채 그들의 진로를 막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으아아.”
그리고 당연하게.
그 말을 들은 요시나리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
“그래서, 노부유키의 말을 요약해보자면 일…아니. 히라테 히카게가 네 청혼을 가차 없이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보란 듯이 요시나리와 정을 통했다?”
“그리고 그건, 언니와 나를 비롯한 오다 씨에 대한 충심이 있다면 저지를 수 없는 일이지.”
일영은 막사 안에 서 있는 가신들과 노부유키, 노부나가를 빠르게 훑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노부유키 아가씨의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쯧. 히라테 공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아니. 저걸 저렇게 받아들인다고?
“조선에서 온 저자는 그렇다고 쳐도, 모리 공도 단단히 물든 게야.”
뭐라는 거야. 저 새끼들.
애초에 노부유키와 사귀었다거나, 조금이라도 여지를 줬으면 모른다. 지 혼자 다가와 놓고 저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많은 가신, 사무라이들은 물론 당장 아시가루나 하급 사무라이들조차 인근 마을에 있는 유곽에 드나들지 않았나. 그런데 저렇게 본다는 건 평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꼬투리 잡았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그런 일영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평소 그를 곱게 보지 않은 이들이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일영 그 스스로는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노부유키의 논리가 어느 정도 그들에게 먹히고 있던 것이다.
지식은 있어도 그 시대에 살았던 관념 자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계급이 존재하며, 가문이 존재하며, 그 가문이 지배하는 영토가 존재하는 시대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현대에서 살아온 일영의 한계였다.
그때. 묵묵히 얘기를 듣던 노부나가는 한동안 일영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곧 탁자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꿀꺽.
꽤 많이 마신 듯, 평소였으면 잘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가 막사에 울렸다. 그렇게 단번에 술병을 가볍게 만든 노부나가는 붉은 입술에 방울지게 맺힌 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곤 귀찮다는 듯 말했다.
“노부유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못을 박아주마.”
그녀는 곁에 앉아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한 노부유키에게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히라테 히카게는 내 사람이다. 내 가신이고, 내 대부님이신 히라테 공의 양자이지. 그러니 괜한 수작질은 멈춰라.”
그 말에 노부유키는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전의 장례식장과 마찬가지도 묘한 조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이미 정략결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언니. 중요한 건 오다 가문에 충성하는 가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을 업신여겼다는 거고, 그건 충분히 처벌할 이유가….”
“노부유키.”
순간, 여태까지 애써 짜증을 억누르고 있던 노부나가는 살기어린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마치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오다 가문의 당주가 바로 나다.”
그리고 그 순간. 막사 안이 급속도로 얼어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척후조가 급보를 날렸습니다! 이마가와 측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전장이었으니까 말이다.
*
하늘색과 남색이 어지럽게 섞인 듯 어스름했던 하늘이 개어지고, 새벽의 안개도 걷혀 평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척후의 보고를 받은 오다 노부나가와 노부유키는 곧바로 가신들을 이끌고 전장이 될 평원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언덕 위로 올랐다.
그러자 과연 저 멀리 흩날리는 2개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원에 가로로 2개의 굵직한 선이 그어진 이마가와의 문양.
그리고 세 잎의 접시꽃이 동그란 고리에 둘러진 마츠다이라의 문양.
그들을 묵묵히 응시하던 가신 중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수가 더 많군요.”
현 오다 가문이 동원한 군세는 노부나가와 노부유키를 합쳐 대략 5,600명. 거기에 사이토 도산 측에서 지원한 500명까지 합치면 6,100명이었다. 절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마가와 측 군세는 얼핏 봐도 그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은 수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
“어떡하실 생각이신지요. 당주님.”
그때,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서 있던 카와지리 히데타카가 나지막이 묻자 노부나가는 잠시 전장을 응시하다가 붉은 입술을 떼고 말했다.
“어제 미리 세워뒀던 목책에 조총병들을 배치해라. 놈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일제히 사격한 후, 선봉을 보내 전열을 무너트린다.”
이미 구상하고 있던 전술이 일영의 선례로 인해 어느 정도 쓰임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조총을 무조건 맹신하는 실수는 저지를 생각이 없었다.
“3열이 모두 사격 후, 선봉이 무너트린 상대의 진영으로 일제히 아시가루들을 진격시킨다.”
그리고 그 아시가루에는 조총수들 역시 포함되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영은 묵묵히 노부나가의 전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전략이야.’
조총으로 모든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건 허상이다. 미래 개량된 조총이면 모를까, 현재의 조총은 아시가루들도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
실제로, 지난 기요스 성 전투에서도 선두는 거의 죽일 수 있었지만 금방 목책에 닿아 백병전을 해야 하지 않았는가.
‘저번에 내가 올린 보고를 꼼꼼히 검토했다는 반증이겠지.’
일영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전장을 응시하며 손에 쥔 조총을 꽉 쥐는 노부나가를 바라보곤 생각했다.
그때, 노부나가의 곁에서 대략적인 상황을 살피던 노부유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선봉은 시바타 공에게 맡겨야겠네요. 그녀라면 능히 저 전열을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까.”
노부유키가 존대까지 붙이며 말할 때는 2가지 경우였다. 비꼬는 것이거나, 파벌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내린 결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거나. 당연히 이번에는 후자였다.
“선봉에 시바타를 세운다라.”
현 오다 가문의 제일 중요한 중신을 꼽는다면 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 가의 제일가는 맹장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시바타 가쓰이에를 꼽겠지.
때문에, 그녀가 선봉에 선다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더욱이 일시적인 지휘권을 그녀가 가져갔다면 하나는 내어줘야 하는 게 도리니까 말이다.
“그래. 그런데….”
노부나가는 잠시 턱을 쓰다듬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곧 뒤에 서 있는 일영을 힐끔 바라보곤 말했다.
“일…아니. 히라테 히카게도 함께 보내는 것은 어떻겠느냐. 노부유키.”
“뭐?”
그녀의 말에 노부유키는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고, 다른 가신들과 일영 역시 무슨 소리인가싶어 노부나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노부나가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 히라테 공의 양자를 높게 사긴 했지만, 직접 무훈을 세우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선봉은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동시에 위험한 자리이니 충성심을 입증하기에 좋겠지.”
“충성심이라….”
지금 노부나가의 말은 얼핏 듣기엔 썩 명분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묘한 감정이 더해져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노부유키는 늘 들고 다니는 수수한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의외로 순진하다니까.’
일전의 논쟁은 노부나가 측에 선 모리 요시나리와 히라테 히카게. 즉 일영의 입지를 조금이나마 깎아내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물론 일영의 행동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노부유키는 ‘고작’ 그 정도로 진심을 드러내는 하수가 아니니까.
헌데 노부나가가 직접 사지에 가까운 곳으로 일영을 보낸다고 하니, 그녀는 빠르게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전의 대련에서 시바타와 어찌 맞붙었다고 해도 전장은 달라. 물론 노부토모의 목을 베었다고 해도…이빨이 다 빠진 개를 죽였다고 맹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
노부토모에게 이긴 것은 절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도 마음만 먹는다면 진작 노부토모를 죽일 수 있었다. 다만 선수를 빼앗겼을 뿐.
거기에 일영은 시바타와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으로 대련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시바타 가쓰이에는 이미 증명된 맹장이다. 그러니 그녀는 이런 작은 전장에서 죽을 리가 없지만.
‘히라테 가(家)의 양자가 죽는다면, 이후에 꽤 도움이 되겠지.’
만약 살아온다고 해도, 노부유키가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계산을 끝낸 그녀는 답을 기다리는 노부나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럼 결정되었군.”
노부나가는 곧바로 일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곤 그의 허리춤에 있는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번 보여주거라. 네가 그 검을 얼마나 잘 다루고 있는지.”
“…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일영은 이제 와 뺄 수도 없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으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당주님.”
그리고 머지않아, 이마가와 군이 온전히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
일영은 곧바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갖춰 입지 못한 갑옷을 꼼꼼히 입었다. 이젠 익숙해진 검은색 갑옷을 모두 입자 다시금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내가 이번에도 살아올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무력은 괜찮은 편이다. 오다 가 맹장인 시바타와 비록 가검이지만 비등하게 싸웠다는 걸 생각하면 일영의 무력은 객관적으로도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기요스 성 전투를 겪었던 일영은 알았다. 진짜 칼과 창이 오가는 전장은 생각보다 더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지독한 지옥에 가까웠다.
때문에 두려웠다.
두렵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그때.
펄럭.
흰 막사가 부드럽게 들춰졌다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일영은 고개를 돌렸고, 곧 시야에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일영은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당주님.”
“히카…쯧. 일영.”
노부나가는 일영의 일본식인 히카게라고 부르려다가, 곧 입안이 껄끄러운 듯 입술을 몇 번 들썩이다가 말을 바꿨다.
그러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일영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의 말을 따라 고개를 들자, 곧 노부나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역시 이런 자리에서까지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붕대에 도포를 입지는 않았다. 그 대신 푸른 빛에 붉은색으로 포인트가 더해진 갑주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은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웠다.
그런 일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나가는 잠시 그가 갑주를 입은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붉은 입술을 떼어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느냐.”
“하셨던 말이라면….”
일영은 잠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고민하다가, 얼마 전 둘이서 술을 나눴던 기억을 떠올렸다.
‘너도 알겠지만, 곧 이마가와 측과 전투가 있을 거다. 그곳에서 내가 만족할 만한 공훈을 세운다면….’
‘그땐, 고작 술이 아니라…더 좋은 보상을 내려주겠다.’
그 말을 떠올리며 일영은 노부나가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노부나가는 피식 웃으며 일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끌어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대해도 좋다.”
만약, 네가 정말로 날 만족시킨다면.
노부나가는 뒷말을 삼키곤, 천천히 그를 등지고 막사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죽지는 말거라. 그러면 내가 대부님을 뵐 면목이 없어지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