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그래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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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히라테 공의 양자이신 히카게 님과 혼례를 치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노부유키의 말을 들은 일영의 심정은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래도 이번엔 무심결에 내뱉는 것은 참았으니 성장한 걸까. 혹시 현대인은 이해하지 못할 농담인가 싶어 잠시 분위기를 살폈던 일영은 곧 한 단어를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정략결혼.’
왜 바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첫 만남에 결혼까지 제안 당하는 경우를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일영은 조선 출신 낭인이 아니라 히라테 가의 장남이 아닌가. 그러니 노부유키는 일영을 보자마자 반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히라테 가(家)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스스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쩝.’
아무래도 현대적인 인식을 쉽게 놓을 순 없는 듯했다. 이 시기 기득권에게 결혼이란 사랑보단 가문을 위해서. 라는 개념이 더 강할 텐데 말이다.
“흐응.”
그런 일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유키는 침묵하는 일영을 바라보며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어떤가요? 이렇게 말하기도 뭣하지만 저 정도면 꽤나 좋은 신붓감이 아닌가요? 자랑은 아니지만, 언니보다 아름답다는 소리도 꽤 들어봤는데.”
‘…아닌데.’
일영은 차마 내뱉으려던 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노부유키는 분명 미녀다.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피부는 창백하다는 느낌마저 살짝 받을 정도로 하얗다. 굳이 표현하면 능글맞은 기생오라비를 여자로 바꾼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노부유키가 노부나가보다 아름다운가? 그건 개인적으로 아니었다. 분명 노부유키는 아름답지만 노부나가 역시 그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니까.
굳이 따지자면 미(美)의 방향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노부유키는 능글맞은 고양이의 느낌이라면 노부나가는 야생의 늑대와 같은 느낌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아가씨. 제 양자를 그리 좋게 봐 주실 줄은 몰랐군요. 허나 제 양자는 아가씨의 반려가 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랍니다. 부디 재고를.”
“흐응?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히라테 마사히데는 곧 정신을 되찾고 최대한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그것에 납득하지 않고 되려 묘한 웃음을 흘리며 일영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렇게 듬직한데요.”
일영의 키는 크다. 현대의 기준이 아닌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말이다. 그러니 노부유키가 일영을 올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큼.”
그리고, 미녀가 웃으며 자신을 올려보는 상황에서 일영이 내뱉을 수 있는 리액션은 이게 최선이었다. 상대가 평범한 여자라면 어색함을 벗어나려 개그라도 던져봤겠지만, 하필 상대가 주군의 라이벌이자 여동생이 아닌가. 차라리 침묵하는 게 현명했다.
“어때요. 히카게님. 제가 싫으신가요?”
그녀는 아쉬움과 은근한 압박을 담아 일영에게 말했다. 하지만 일영은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내가 미쳤나. 대놓고 망하는 길로 가게.’
물론 그가 생각을 바꿔 노부유키에 임관한다면 오와리, 아니 미노까지는 먹을 수 있도록 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굳이?
“으음.”
일영이 계속 답을 하지 않자, 노부유키는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을 흘기며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노부유키. 그새 취향이 원숭이로 바뀌었나 봐?”
묘한 짜증이 섞인, 그러나 여유로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당주를 뵙습니다.”
“당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모두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이 땅의 주인이었으니까.
일영 역시 고개를 조아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곧 특유의 걸음걸이와 행색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노부나가를 눈에 담았다.
정리되지 않은, 그러나 더러운 게 아니라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의 단발 뒤로 금색 각인이 새겨진 화승총이 흔들린다. 남색 계열의 도포는 늘 그랬듯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었고, 가슴은 대충 감은 붕대가 위태롭게 지탱한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회색 포니테일을 한 거유…아니. 요시나리와 사무라이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언니. 오랜만이네요?”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으나, 노부유키만은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는 모두가 알았으나 모두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노부유키. 아버지 장례 이후로 처음인가.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심지어 노부나가 역시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원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늦춰 노부유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선 후 말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언니의 얼굴을 보러와서 한다는 짓이 내 원숭이를 탐하는 거라니. 짓궂구나.”
‘…원숭이.’
일영은 진심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원숭이를 닮았나 고민할 정도였으나, 노부나가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캐치한 노부유키는 새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언니. 사람보고 원숭이라니요. 가신에게 그런 언행은 좋지 않아요. 거기에 이 얼굴이 원숭이라니요. 언니야말로 눈을 다친 건가요?”
‘암. 그렇고말고.’
노부유키가 달갑지 않았던 일영마저도 이번만큼은 노부유키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조센징이라고 욕먹는 건 그러려니 할 테지만 원숭이를 닮았다는 건 도저히 인정할 수 없으니까. 스스로 잘생겼다…라고는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은 아닌가.
“그보다, 이리 찾아온 걸 보면 너도 이마가와 쪽의 움직임을 눈치챘구나.
노부나가는 일영과 관련된 얘기는 더 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노부유키는 의외라는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나지막이 답했다.
“뭐, 당연한 일이죠. 아무래도 이마가와의 당주가 슬슬 몸이 간지러운 모양이에요.”
“후방이 조용하니 슬슬 교토를 넘보는 것이겠지. 건방진 놈.”
둘의 대화를 듣던 일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기 이마가와 가문은 호조 가문과 정략결혼을 함과 동시에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의 결혼을 중매하여 후방을 든든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뭐, 그거랑은 별개로 한창 전성기를 누리면 누구라도 천하를 삼키고 싶어지겠지.’
거기에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이마가와는 TS가 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오케하자마에서 목을 벨 때, 죄책감은 덜 하겠어.’
아무리 미녀라고 해도 필요하다면 베겠지만, 그래도 이왕 벨 거라면 미녀보단 미남이 낫다. 미남보단 중년의 아저씨가 더 낫고.
‘…물론, 그렇다고 괜찮은 건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을 벤다면 정상일 수가 없다. 실제로 그가 노부토모의 목을 베었을 때 요시나리와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았으면 악몽을 꿨을지도 모른다.
“크, 크흠!”
새삼 그날의 밤이 떠올라 요시나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옅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더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 사이 두 자매는 살벌한 대화를 끝내고 거의 동시에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지.”
“자세한 말은 안에서 하죠.”
덕분에 일영은.
‘…밥 먹고 낮잠이나 좀 자려고 했는데.’
강제로 그녀들을 따라 내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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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유키를 따라온 것은 시바타 가쓰이에만이 아니라 중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도 알고있는 것이다.
오와리를 지배하기 위해 당주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공격에 아예 손을 놓고 있다간 자칫 남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 다 좋은데….’
“흐암.”
일영은 허리춤에 맨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하품했다.
‘난 왜 여기에….’
원래 계획은 그동안 고생한 자신을 위해 맛있는 밥을 먹고 낮잠이나 좀 자려했는데, 일이 꼬여도 아주 제대로 꼬여버렸다. 거기에 일영의 신경을 긁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넌 왜 지랄이냐. 이츠키.”
“히데요시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 죽어버려라. 조선 귀축.”
다름이 아닌 이츠키가 질투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것 때문이었다. 놈은 귀축이니, 쓰레기라느니 말을 내뱉으며 일영을 매도했다. 덕분에 일영은 억울함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막말로 자신이 저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이츠키는 부러움과 시기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누가 봐도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모습이었는데, 변명을…!”
“무슨 개소리를…됐다.”
어차피 장난인 걸 알기에 일영은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진심이면 모를까.’
결국, 그녀가 원하는 건 인간 ‘백일영’이 아니라 히라테 가문의 장남 ‘히카게’가 아닌가. 그러니 일영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차라리 요시나리가 더 낫지.’
예쁘지, 성격도 그만하면 좋은 편이지, 가슴 크지. 거기에 가슴이 특히 예쁘….
“크흠.”
그때, 지극히 순수한 생각을 하고 있던 일영의 귓가에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울리자 그는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곤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바타 공.”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이 아닌 시바타 가쓰이에였다. 그녀는 특유의 금발을 늘어트린 채 붉은 오니 가면을 쓰고 일영의 앞에 서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은 일영은 새삼 역사 속의 시바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조금 더 호탕한 성격으로 추측했는데, 의외네.’
원래 시바타 가쓰이에는 호방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계의 그. 아니 그녀는 조금 다른 듯싶었다. 뭐랄까. 약간 점잖고 상황판단이 빠른 누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조선에서 왔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가쓰이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일영은 그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련을 제안드립니다만.”
그래도, 시바타는 시바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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