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 *
‘날 찾는다….’
일영은 노복의 뒤를 따라 마사히데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회의에 다녀온 그가 일영을 부를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간단한 안부 인사나 심부름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닐뿐더러 그러면 노복까지 보내 찾아올 이유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을 불렀다는 건….
‘이마가와 가문이나, 사이토 가문에 대한 이야기겠군.’
중신 회의가 끝나자 바로 부를 이유는 그 정도밖에는 없었다. 때문에 일영은 내심 추측을 해보며 미사히데의 거처 앞에 멈췄다.
“소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호위를 맡고 있는 사무라이가 고개를 숙이며 일영이 왔다는 것을 전했고, 곧 마사히데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거라.”
끼이익.
“예.”
시종들이 열어주는 문을 너머 안으로 들어가자 수수한 회색 의복을 입고 손수 차를 내리는 마사히데가 눈에 들어왔다. 일영은 예를 갖춰 앞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차입니까?”
“녹차다. 꽤 향이 좋은 놈이지.”
턱. 마사히데가 차를 따른 잔을 건네자 일영은 가볍게 손에 쥐고 향을 음미했다.
“말씀대로 향이 꽤 좋습니다.”
저렇게 나이를 먹은 동안 차를 우리면 뭔가 경지에 다다르는 건가. 피식 웃으며 그런 생각을 하던 일영은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음.”
묘한 씁쓸함과 대비되는 따스한 온도. 거기에 잔잔히 밀려오는 풍미는 차를 즐겨 마시지도 않던 일영에게도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배워볼까?’
생각해보면 마땅한 취미도 없는 상황에 진지하게 다도(茶?)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이후의 일. 일영은 찻잔을 탁. 내려놓고 마사히데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설마 양자와 차를 나누며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건 아닐 테고.”
“피차 불편한 일이지.”
마사히데는 피식 웃으며 잔잔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녹차를 마시곤 덤덤하게 답했다.
“마츠다이라가 움직였다.”
“마츠다이라…그러면 당주인 모토야스가 움직인겁니까.”
“잘 아는구나. 아니. 모르는 것이 이상한가.”
생각해보면 사이토 가문과의 복잡한 정세도 추측한 그가 마츠다이라 가문과 오다 가문의 사이를 모른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다.
물론, 일영이 사이토 가문을 언급한 이유는 단순히 조총 수입에 관한 것이었지, 노히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사히데가 그것을 알 리는 없었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노부나가가 다진 밭에 히데요시가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손에 쥔 것은 이에야스라는 말이 있다. 결국 전국을 제패하는 것은 오다 가문도, 도요토미 가문도 아닌 도쿠가와 가문이었으니까.
‘지금은 비록 이마가와 가문에 거의 종속된 가문일 뿐이지만….’
그, 아니 그녀로 변했다고 운명까지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일영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곧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마츠다이라 가문도 미쳤다고 진심으로 부딪히지는 않을 텐데요. 이마가와 가문이 함께 온다면 모를까….”
일영의 말은 정설이었다. 겨울의 전쟁은 사실상 양측 모두 제 살을 깎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노부나가와 모토야스는 어릴 적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히라테 마사히데가 우려할 상황까지는 아닐 텐데.
“그렇지.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말이야.”
탁. 그의 말을 묵묵히 듣던 히라테 마사히데의 말에 일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으나.
“…무슨 문제라도. 아?”
곧 그는 현재 오다 가문의 상황을 깨닫고 뒤늦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자 히라테 마사히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사실상 가문이 반으로 갈라진 상태지. 그리고 그것은 이마가와 가문에게 적잖은 기회가 될 터.”
“그 말은….”
“이마가와에 숨어든 인자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마가와의 군세가 국경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마츠다이라와 합세하여 우리를 치려는 생각이겠지.”
일영이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사료가 많이 없던 것인지 이 시기 즈음에 벌어진 무라키토리데 전투에 대해선 일영도 많이 알지 못했다.
‘단순히 승리했다고만 읽고 넘겼으니까.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일영은 내심 쓴웃음을 삼키며 히라테 마사히데를 바라보았고, 마사히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번 전투를 막기 위해선 당주님과 노부유키 아가씨께서 힘을 합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완전히 웃음기를 거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일영을 향해, 히라테 마사히데는 덤덤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오다 가문은 무너지겠지.”
그때였다.
“가주님.”
사무라이 한 명의 그림자가 방 밖에 비췄고,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부유키 아가씨와 시바타 공이 입성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히도.
일영과 히라테 마사히데는 눈을 마주치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터벅. 터벅.
일련의 무사들이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들이 따르는 것은 투박한 갑주를 차려입은 사무라이가 아닌, 정복에 가까운 차림을 한 반반한 긴 흑발의 아가씨. 노부유키였다.
“참, 슬픈 일이야. 아버지의 실수로 가문이 이렇게 분열되었으니.”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가씨.”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을 한 채, 척 보기에도 흉악한 붉은 오니 가면을 쓰고 있는 무장이었다. 겉보기에는 흉악했으나 갑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매끈한 굴곡은 그녀가 여무장임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말 안장에 닿은 허벅지가 도드라졌다.
“…저 여자가 오니(おに)시바타...?”
“듣기론 실제로 오니를 베었다던데?”
“적들은 무자비하게 도륙한 후에, 밤에 몰래 인육을 탐한대…!”
하지만 거리의 그 누구도 그녀를 보고 욕정을 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품지 못하는 것이다.
“후훗. 시바타. 널 보며 모두가 두려워하는데?”
“…신경 쓰지 않습니다.”
노부유키의 말에 잠시 멈칫한 시바타 가쓰이에였으나 다행히 얼굴에 쓴 가면 덕분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시바타를 재미없다는 듯 바라보던 노부유키는 곧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재미없긴 하지만, 그게 또 시바타의 매력이니까.”
“…송구합니다.”
누군가는 노부유키를 뱀 같다고 말하긴 했으나, 시바타 가쓰이에는 그들의 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오다 가문을 위해 따를 뿐.’
그녀가 보기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당주의 그릇이 아니었다. 뱀 같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악하다는 것. 그녀라면 최소한 오다 가문을 망하지 않게 보존할 능력은 있으리라.
사람이 아닌 가문에 충성한다.
그것이 시바타 가쓰이에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히라테 마사히데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분께서 아가씨를 지지한다면, 사실상 가문의 당주를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명분은 차고 넘쳤다. 애초에 노부나가가 전대 당주이신 노부히데 님의 장례식에서 저지른 짓만 해도 얼마나 큰 패악이었던가.
“흐응.”
그때,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말을 몰던 그녀의 귀에 노부유키 특유의 짓궂은 추임새가 울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그녀는 어째서 노부유키가 흥미가 돋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파 사이로, 아주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함께 시야에 잡힌 것이다.
‘히라테 공. 그리고…그런가. 저자가 그 조선에서 왔다던….’
그러나 가면의 시야가 너무 좁았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너무 생각에 몰두했던 것일까.
잠시 멍을 때린 사이에 노부유키는 말에서 내려 이미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쯧.”
당연히 그녀를 호위해야 했기에 다급히 말에서 내려 뒤따른다. 뒤이어 시바타 가(家)의 사무라이들 역시 빠르게 인파를 몰아내며 길을 열었다.
‘…하긴, 인사를 나눠서 나쁠 건 없으니.’
조금 급하긴 했으나 그녀도 노부유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히라테 공은 그녀 역시 존경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사실상 현 오다 가문의 중심축을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오랜만이에요. 히라테 공(?).”
“아가씨를 뵙습니다.”
애초에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노부유키는 곧 히라테 마사히데의 앞에 다다랐다. 자연히 그 역시 간결하게 웃음으로써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제가 곧바로 히라테 공께 말을 건 이유는, 꽤 중요한 일로 제안 드리고자 해서에요.”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단순한 안부 정도가 나오리라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마사히데. 정확히는 곁에 서 있는 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히라테 공의 양자이신 히카게 님과 혼례를 치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그것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