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아버지?(3)
* * *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직 노부유키라는 잠재적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기에 노부나가는 자정 즈음에서 연회를 파(?)했다.
덕분에 히라테 히카게. 아니 일영을 포함한 가신들은 연회장을 나설 수 있었다.
“어르신. 얼른 가요.”
“하핫…그래. 그러자꾸나.”
물론 곧바로 자택으로 향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가신이 각기 여자나 남자를 끼고 곳곳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허나 일영과 히라테 마사히데는 애초에 유녀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에 성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때.
“히라테 공.”
촤락.
그녀가 편 부채에서 흐르는 미약한 바람을 따라 남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그녀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묘한 색기가 흐르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후훗.”
“…오, 오랜만입니다! 히라테 공!”
그리고 뒤이어 시선을 조금 뒤로 돌리자 그곳엔 척 보기에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한 붉은 숏컷에 왼쪽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온 소녀가 서 있었다.
일영은 당연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누군지 알아보진 못했으나 히라테 마사히데는 이미 숱하게 봐온 얼굴인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려. 니와 공. 마에다 공.”
“후훗. 공(?)이라니요. 과분합니다.”
공(?)이란 본디 관직이나 작위, 혹은 그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는 이를 높여 부르기 위해 붙이는 칭호다. 그러니 마사히데가 아직 어린 그녀들에게 공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일종의 농담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일영에겐 적잖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농담도 할 줄 알았나. 그보다.’
두 여자의 나이는 아무리 봐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니와 가문과 마에다 가문이라면 아마도.
‘남색 머리카락에 조금 더 성숙한 얼굴은 니와 나가히데. 숏컷에 송곳니가 도드라진 여자는 마에다 토시이에.’
둘 다 오다 노부나가의 중요한 가신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큰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어 중용되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나름 이름이 있는 가문의 후계자들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물론 마에다 토시이에는 사고를 쳐서 밉보이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거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흥미롭게 그녀들을 훑어보던 그였으나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흥.”
붉은 숏컷에 왼쪽 송곳니가 도드라진 마에다 토시이에는 일영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며 괜히 심술을 부리는 고양이 같긴 했으나 당연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히라테 공의 양자(?子) 자리를 탐내는 이들이 많았는데요. 솔직히 조금은 놀랐답니다?”
그것을 니와 나가히데가 모를 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렇긴 하지.’
그리고 그녀의 말에 일영은 일정 부분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히라테 마사히데의 양자가 된다면 오다 노부나가가 권력을 가진 이상 어지간해서는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난 노린 적이 없었지만.’
일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본다면 전혀 나쁘지 않은 일이다. 비록 원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일영. 아니 히라테 히카게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다만 일영은 히라테 히카게라는 이름을 온전히 받아들일 생각 따위 없었다.
‘내 이름은 백일영. 조선 출신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백일영이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일영은 그것을 가슴 깊숙이 각인시켰다.
한편, 일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히라테 마사히데는 귀여운 손녀들을 바라보듯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늙은 내 자식이 되어서 무엇을 하겠다고. 과분한 관심이오.”
그의 말에 니와 나가히데는 입가를 가린 부채 너머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겸손도.”
“저런 놈 말고 차라리 저를 양녀로…으읍!”
물론 다혈질인 마에다 토시이에가 다시 급발진을 하긴 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입을 틀어막은 니와 나가히데는 어색한 표정으로 일영에게 눈웃음치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 아이가 히라테 공을 너무나 존경하다 보니. 그보다 전 니와 가(家)의 나가히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읍! 으으읍!”
니와 나가히데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마에다 토시이에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의외로 강한 그녀의 악력에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은 흡사 애니에서 나올 법한 모습이어서, 일영은 무심코 실소를 흘리며 그녀들에게 성큼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니와 공. 마에다 공.”
“…어머.”
그리고 그 순간.
니와 나가히데는 일영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꽤나 거구인 히라테 마사히데보다 더 큰 키를 가진 일영은 이 시대로선 쉽게 볼 수 없는 덩치였고, 가뜩이나 반반한 얼굴에 잔잔히 비춰지는 달빛은 그의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거기에 태도 역시 공손했으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이었으니, 니와 나가히데는 물론 그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던 마에다 토시이에 역시 잠깐이나마 눈이 흔들렸다.
“큼.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구려.”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히라테 마사히데는 가볍게 대화를 끊으며 일영에게 눈짓했고, 일영은 곧바로 그녀들에게 짧게 묵례하며 히라테 마사히데의 뒤를 따랐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히라테 공!”
둘이 떠나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뒤늦게 적대감을 내비치며 투지를 불태웠다.
‘…얼굴로 당주님을 홀린 건가! 제기랄…하마터면 나까지도…!’
원래 역사적으로도 미인계(美人?)는 수없이 많이 쓰인 전략이다. 어느 놈이 저놈의 배후인지는 몰라도 놈은 벌써 히라테 공과 당주님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내가 모두를 구하지 않으면…!’
물론, 명백한 개소리였으나 16살 소녀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니와 나가히데는 흥미와 묘한 색기가 가득한 눈으로 일영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흐응. 히라테 가(家)의 양자와의 혼인이라면. 의외로 괜찮을지도.’
정략결혼은 거의 필수나 마찬가지였고, 그녀의 입장에선 일영은 꽤나 매력적인 상대였다. 집안은 물론이거니와 이왕이라면 얼굴이 반반한 편이 좋지 않겠는가.
물론, 일영의 입장에선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을 마시는 것으로 느껴질 테지만 말이다.
둘은 서로 아예 상반된 생각을 가지며 점점 멀어지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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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과 히라테 마사히데는 인적이 드물어진 성 밖으로 나섰고, 미리 대기 중이던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들이 그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모시겠습니다. 가주님. 소가주님.”
이미 얘기가 되었는지, 그들은 일영을 향해 소가주라고 부르는 것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덕분에 일영은 내심 그들의 충성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조선의 낭인에 불과했던 내게 저럴 수 있다니. 거참.’
나름 사무라이로서의 자존심이 강할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영은 앞서 걸어가는 히라테 마사히데의 뒤를 따랐다.
가로등이나 특별한 조명이 없는 밤거리의 특성상 달빛에 의지하여 길을 거닐어야 했으나, 다행히 달이 밝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묵묵히 걷던 마사히데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츠키라는 사무라이는 내가 꽤 눈여겨보던 자다. 며칠 내로 네 호위무사로 붙여주마.”
그의 목소리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호의는 물론이고 적의까지도 말이다. 때문에 일영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가 뭡니까?”
“무엇이 말이더냐.”
일영과 히라테 마사히데가 멈춰서자 곧 사무라이들 역시 자리에 멈춰섰고, 그들은 조금 떨어져 그들을 등졌다. 덕분에 온전히 둘이 남게 된 일영은 물었다.
“절 양자로 들인 이유가 뭐냐는 말입니다. 설마 제가 마음에 들어선 아닐 테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굳이 양자로 자신을 들일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유라.”
그의 물음에 마사히데는 잠시 입 안에서 그 물음을 곱씹다가, 곧 나지막이 답했다.
“나는 네게 어떤 감정도 없다. 호의도, 그리고 적의도.”
“그럼 대체 왜….”
“다만.”
순간, 일영의 말에 히라테 마사히데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너를 쓰고자 하는 당주를 위해서다.”
“…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일영은 순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이어지는 히라테 마사히데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주께서 직접 너를 중용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그것은 당주의 실책이지만, 나의 양자가 된다면 모든 책임은 나와 나의 가문이 지면 되는 것이니.”
“…맙소사.”
소름이 돋았다.
‘이러니 오다 노부나가를 위해 할복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이번만큼은 일영 역시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일영을 임관하고자 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치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문을 걸고 일영을 거둔 것이다.
히라테 마사히데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친 일영은 곧 피식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히라테…아니. 양부(?? : 양아버지).”
그는 성큼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으로 할복을 막은 노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당신의 목숨을 살린 그 순간부터. 저도 오다 가문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
어찌보면 오만한 말이었으나, 히라테 마사히데는 그저 잔잔히 미소지으며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히카게.”
“…허. 그러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적응이 되는 이름은 아니었으나, 일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따랐다.
‘아버지. 라고는 인정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꽤 인정할 만한 어른 정도로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영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고, 어느새 히라테 가(家)의 정문에 도착한 일영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셨어요. 아버지. 그리고….”
칼로 벤 듯 정갈한 단발이 천천히 고개를 숙임에 따라 마치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작은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풍이 풍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호칭이 내뱉어지자.
“처음 뵙겠습니다. 오라버니.”
일영은 당혹감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다 살다. 여동생까지 생길 줄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