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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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여성의 체취는 대부분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만약 같은 남자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술냄새를 풍겼다면 일영은 눈살을 찡그리며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 색정적이고 야릇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요시나리는 순간 일영과 노부나가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일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선 원숭이. 진짜 기분 묘하네.’
보통 현대의 한국에서 일본을 까는 보편적인 표현 중 하나가 뭔가. 바로 일본인들을 원숭이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일본인한테 당하니 묘한 기분이 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좋은데 뭐 그리 원숭이에 꽂혔는지.
물론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내뱉어지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당주님.”
일영은 턱 끝에서 느껴지는 노부나가의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에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그리곤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채 30cm가 조금 넘는 거리에서 시선을 맞댄 두 남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상반된 감정을 가진다.
노부나가는 일영의 검은 눈에 담긴 여유에 흥미를 가졌고, 일영은 노부나가의 금색 눈에 담긴 묘한 광기와 씁쓸함에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았을까.
“자.”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일영의 턱에서 손을 뗀 노부나가는 씨익 미소지으며 일영을 등졌고, 그 순간 팔꿈치 부근에 걸쳐진 검은 도포가 마치 그림자처럼 펄럭였다.
“언제까지 서 있을 텐가. 이 좋은 날에 말이야.”
그리고 순간 그녀는 고개를 조금 틀어 일영과 요시나리의 뒤에 한 사무라이가 소중히 안고 있는 목함을 바라보며, 광기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 좋은 볼거리가 들어왔는데.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지.”
좋은 볼거리.
그 말에 중신 몇몇은 침음성을 애써 참아내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부나가를 바라보았고, 일영 역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노부나가는 노부나가인가.’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은 노부토모의 목이 담긴 목함을 바라보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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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나름 귀하다는 술들은 모조리 꺼내져 중신들의 식탁에 놓아 졌고, 인근 유곽에서 차출된 유녀들은 능숙하게 가신들의 곁에 앉아 술을 따르고 교태를 부렸다.
“하하하핫!”
“그래, 더 따라 보거라.”
유녀들이 이런 자리에 차출되는 것은 연례행사나 다름이 없기에 그녀들은 능숙하게 중신들의 분위기를 띄웠다.
당연히 여성 무장들의 곁에도 유곽에서 보내온 남자들이 붙었으나 그들 중 태반은 거절당해 시종 노릇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어음.”
“…….”
또한, 일영과 마사히데의 곁에 앉은 유녀들 역시 두 남자의 분위기에 눌려 어색하게 앉아 있었고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즐겁게 놀고 마시는 중신들과는 달리 묵묵히 유녀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실 뿐, 별다른 터치나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에는 애교를 부리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려던 유녀들도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흘렀을까.
히라테 마사히데는 곁에 앉아 흥겨운 연회를 바라보는 일영에게 말했다.
“아직도 답은 하지 않을 생각인가.”
술잔을 기울여 뜨겁게 데운 술을 조금 입에 머금은 마사히데가 묻는 것은 하나였다.
어떻게 할복에 대해 눈치를 챘는가. 그것에 대해 마사히데는 묻고 있었다.
일영은 그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예언입니다.”
“…….”
그러자 곧바로 마사히데는 일영을 흘기며 미간을 좁혔고, 일영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농담입니다. 조선에선 먹히는데.”
“여기선 아니지.”
“…뭐, 안타깝네요.”
일영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비웠고, 곧 곁에 있던 유녀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솔직히 반쯤은 도박이었습니다. 평소 마사히데님의 소문과 오다 가문이 처한 대외적, 내외적인 상황을 조합해보며 추측했죠. 마사히데라는 거물이 어떻게 행동할까.”
일영은 찰랑거리는 잔을 부드럽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가신이라면 충언으로 그녀를 보좌하거나, 혹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는데에 급급하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닙니다.”
히라테 마사히데.
여러모로 말이 많은 인물 중 한 명이었으나, 적어도 이 세상에서 일영이 보고 들은 마사히데의 행적은 단 하나로 요약이 가능하다.
‘충신.’
그는 오다 가문을 섬긴 이래 출중한 능력과 충성심을 끝없이 증명해서 결국 노부히데의 치세에도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노부나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은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에게도 딸이 있지만, 마사히데에게 노부나가는 마음으로 낳은 딸이자 평생을 바쳐 충성한 가문의 후계자였다.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당주에 오른 이상 모든 행적엔 가문의 이름이 붙고 책임은 온전히 그녀에게 쏠린다고.”
그런 자리다.
끝없이 투쟁하고 증명해야 비로소 존속할 수 있는 자리.
“허어….”
마사히데는 술을 손에 쥐고도 입에 담지 못하고 그저 미약한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 늙어서 마음을 들킨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장난처럼 스쳤던 예언이 진실이란 말인가.
마사히데는 혼란스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미약한 기대를 품고 일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영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 방법이 극단적이라도 말이죠.”
“…….”
극단적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도 씁쓸하게 들려오는 것인지. 마사히데는 술잔을 기울여 마시곤 미온한 술내음을 후. 뱉고 답했다.
“…필요한 일이다. 저 아이는 아직 어리고 불안정하니까.”
히라테 마사히데는 고개를 들어 요시나리와 즐겁게 대화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노부나가를 눈에 담았다. 비록 육체는 어엿한 여인으로 자랐으나 마사히데의 눈에는 아직 어리게 보일 뿐이었다.
“만약, 이토록 나라가 어지럽지 않다면 네 말대로 곁에서 평생을 보좌하는 것을 택했겠지.”
대부님으로, 사부님으로, 나아가 중신들의 수장으로 남아 그녀를 보좌하여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안온(?? : 조용하고 편안)하지 않았다.
수십 년 전 벌어진 오닌의 난으로 쇼군의 권력은 땅에 떨어졌고, 천황은 그보다 더 전부터 쇼군의 꼭두각시 신세였다.
이미 막부는 통제력을 잃어 온 열도에서 일어난 군벌들이 교토로 진군하기 위해 미친 듯이 힘을 키우는 형국이 아닌가.
“남들은 저 아이를 멍청이라니, 가문을 말아먹을 탕녀라느니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알아. 저 아이는 계기만 있다면 충분히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다.”
“계기…입니까.”
히라테 마사히데의 말은 지극히 믿음에 의거한 개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래를 아는 일영이 듣기엔 한없이 놀라운 소리의 연속이었다.
‘미래를 보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노부나가를 보아왔다고 해도 저런 믿음을 가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보통의 가신이 저런 말을 한다면 입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짜로 할복까지 하는데 어떻게 그러겠는가.
더욱이 히라테 마사히데의 죽음은 충분한 ‘계기’가 되어주었다. 실제로 노부나가는 그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아 세이슈 사(???)라는 절을 짓고 본격적인 전국 통일의 대업을 시작하니 말이다.
다만, 그게 지극히 잔인하고 무자비한 패도였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일영은 그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곧 나지막이 입을 열어 말했다.
“굳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계기를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히라테 마사히데의 선택은 아예 틀리지 않았다. 원래는 2년 후에나 할복을 하긴 하지만 결국 그는 할복으로써 노부나가에게 큰 계기가 되어주니 말이다.
그러나 일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순간, 일영과 마사히데의 시선이 드물게 환하게 웃고 떠드는 노부나가의 얼굴에 꽂혔다.
“그렇게 아끼고 믿는 당주께서, 정말로 열도를 제패하는 모습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노부나가는 시선을 느꼈는지 마사히데와 일영을 번갈아 바라보곤 입가에 댄 술병을 탁. 하고 내려놓고 홍조를 띤 볼이 도드라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녀의 말에 순간 가신들의 시선이 일영과 마사히데에게 향했고, 노부나가는 붉은 입술에 한 방울 맺힌 술을 혀로 할짝거리며 말했다.
“하마터면 큰 공훈을 세운 사무라이와 아버지같은 대부님을 홀대할 뻔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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