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모리 요시나리(2)
* * *
“…척 보기에도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 왜 자꾸 존댓말 하냐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일영은 잠깐 귀를 의심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나, 취했네.”
아무래도 근 2달간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취할 만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시나리가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
“왜 대답 안 해? 응?”
있구나. 젠장.
일영은 척 보기에도 적잖이 취한 요시나리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언제 푼 건지, 포니테일을 유지해주던 끈은 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일영은 애써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 때문이었다.
“모리 공. 죄송한데 그 옷 좀….”
가뜩이나 가슴이 얼굴과 비슷할 정도로 큰 그녀다. 평소엔 갑옷으로 가려서 그나마 덜 했지만 술을 마시고 몸이 달아오른 탓에 답답했는지 그 커다란 가슴이 적나라하게 탁자 위에 걸쳐져 있었다.
때문에 일영은 진심으로 눈을 둘 곳을 두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게 요시나리를 자극했다는 점이다.
“…대답해! 대답 하라구!”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땡깡을 부리듯 연신 그를 재촉했고, 그제야 일영은 그녀가 물은 질문을 떠올리고 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존대를 해야죠. 전 직위도 없고 거기에 조선에서 넘어온 낭인에 불과한데….”
그의 말은 지극히 정설이었다. 애초에 전국시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일영과 요시나리가 한 자리에 앉아 술잔을 마주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일영이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그게 뭐? 어차피 개판인 세상인데!”
술이 거하게 취한 사람에게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어차피 곧 출세할 거 아니야? 그럼 지금부터 친구 하면 좋잖아. 안 그래?”
거기에 요시나리의 입장도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영은 이번 전투에서 전략을 지시하고 직접 노부토모의 목을 벰으로써 전공을 아주 든든하게 쌓았다.
이미 대략적인 승전보가 나고야 성으로 향했으니 돌아간다면 일영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
‘물론 오다 노부나가가 먼저 고안한 3열 사격법을 베낀 거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능력을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마 노부나가가 ‘내가 생각만 하던 방법을 네가 어찌 알았지? 수상하군. 할복해라.’라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지금 이런 고민보단 요시나리를 어떻게 말리는 게 먼저였다.
“모리 공. 일단 진정하고 제 얘기를….”
잘 얘기하면 알아는 먹겠지.
그러나 곧 일영은 모리 요시나리의 술버릇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장장 30여분의 언쟁 끝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반말할게. 됐지?”
“히. 그래!”
요시나리는 일영이 항복한 것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만족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기에 일영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크.”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알코올이 식도를 스쳐 위장으로 꽂힌다. 곧 후끈한 알코올 향기가 입에서 은은하게 퍼진 후 코를 찌른다.
앞에는 미녀가 있고, 좋은 술과 좋은 안주가 있다니. 이건 이거대로 좋지 않을까.
일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주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시나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기분은 왜 안 좋았던 건데?”
가볍게 던진 물음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가볍지 않았다.
요시나리는 일영의 물음에 순간 표정이 굳어졌고,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
“뭐가?”
척 보기에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그녀가 기분이 나쁠 일이 뭐가 있지.
물론 그도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전장의 흥분에 몸을 맡기고 상대를 죽이는 것도 좆같았고, 할아버지 뻘의 목을 직접 창대에 끼우고 환호성을 내지른 것도 좆같았다.
그래도,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그때, 요시나리가 말했다.
“…아까 할복했던 가신들을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이라면…아.”
그랬나. 그랬구나.
그제야 일영은 눈앞에 있는 회색 포니테일의 미녀가 아닌, 원 역사의 모리 요시나리가 가진 과거를 떠올리고 침음성을 흘렸다.
원래 모리 가문은 오와리 국의 오다 가문이 아닌 바로 옆의 미노 국의 도키 가문을 모시던 가문이었다. 허나 ‘미노의 살무사’라고 불린 사이토 도산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킨 후에는 고향인 오와리 국으로 돌아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된 것이다.
‘그게 아마 1554년 초반이었지.’
지금 시기상으로 따지면 1554년 후반이니까, 요시나리는 가문을 잃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옛날 생각이라는 건…역시 그거겠지.’
일영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요시나리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그거. 맞아. 가문을 지탱하던 중신들이 직접 할복하는 걸 눈앞에서 봤거든. 하핫….”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노부나가를 믿고 따르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는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번 전공은 출세에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웃기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일 땐 짙은 혈향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미쳐 날뛰었는데, 막상 당연히 해야 하는 멸문 과정에서 기분이 더러워졌다니…바보 같아.”
네가 보기에도 참으로 모순적인 감정이 아니냐. 요시나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다 짜증나. 차라리 전장에서 죽지. 끌려와 놓고는 당연하다는 듯 배를 가르는 노인네들도, 그 모습을 보고도 살려달라고 하는 병신같은 무사들도.”
“짜증나. 짜증난다고. 애초에 이런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것도…쓸데도 없이 가슴만 커서 창을 휘두를 때 걸리는 것도…마음 놓고 얘기할 상대도 없어서 널 붙잡고 이런 얘기하는 것도 다 짜증나.”
요시나리는 아예 머리를 탁자에 처박고 중얼거렸고, 일영은 손에 쥔 술잔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의외였다.
이런 생각도 할 줄 아는 여자였구나.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호탕하고, 살인에 별다른 감각도 없으며, 술도 잘 먹을 것 같았는데.
‘…아직 이 세상을 현실로 안 보고 있었나.’
나름 이 세상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동양인이 자연적으로 가질 수 없는 회색이나 다른 휘황찬란한 머리카락을 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장들이나 다이묘들이 여자로 TS가 된 것도 모두 적응하고 현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어딘가 비현실적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사람이라기보단 하나의 캐릭터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뭐,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응?”
일영은 나지막이 입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러자 요시나리는 탁자 기대 불그스름하게 자국이 남은 이마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괜찮냐.’ ‘난 다 공감한다.’ 이런 말을 해줄 수도 있지만, 그러긴 싫고.”
서서히 해가 지고, 주황빛으로 잔잔히 빛나는 황혼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일영은 황혼에 잡아먹히듯 반짝이는 기요스 성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요시나리에게 말했다.
“그냥, 즐기면서 살아. 과거에 마모되지 말고. 가뜩이나 좆같은 세상인데, 기분까지 우울하면 얼마나 개 같아.”
이건 요시나리에게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일영. 그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목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미칠 뻔한게 몇 번인가.
이딴 세상에 처박은 누군가에게 욕을 내뱉기도 했고, 절망에 몇날 며칠이고 악몽에도 시달렸다. 그리고 지은 결론이었다.
일영은 피식 웃으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요시나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짜증나면 차라리 울어. 그리고 털어버리고 당당하게 웃어. 그러면 된 거야.”
그 순간.
요시나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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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짜증나면 차라리 울어. 그리고 털어버리고 당당하게 웃어. 그러면 된 거야.”
일영의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귀에 꽂힌다. 그러자 여태까지 술기운에 반쯤 잠겨있던 요시나리의 정신이 단번에 깨어난다.
‘내,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아무래도 술에 취해서 절제력을 잃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히라테 공과 야밤에 만났던 사람이라지만 결국 조선의 무사가 아닌가.
거기에 친분이라기엔 차라리 악연에 가까운 일을 겪은 사이다. 물론 일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남자에게 술에 취해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이불을 걷어차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잔잔히 창가로 비친 황혼이 일영을 반쯤 걸치고 탁자를 비췄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일영을 바라본 그녀는 곧 멍한 눈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일영은 잘생긴 편에 속했다.
거기에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데다가 갑옷을 벗고 창가에 앉아 옷이 당겨져 묘하게 드러난 몸의 굴곡 역시 탄탄했다.
‘미쳤나봐.’
요시나리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젖는 아래쪽의 감촉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술을 마셔서 가뜩이나 외로웠던 몸이 더욱 미쳐 날뛰는 게 분명했다.
‘이, 일단 술자리를 끝내야….’
그녀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를 불러 자리를 파(?)한 후에 혼자 해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요시나리는 세상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말았으니.
그건 바로.
“어, 어라?”
챙그랑!
“요시나리!”
술에 취하면 몸이 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요시나리는 탁자를 짚고 일어나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반동으로 탁자는 한번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술병이 한번 허공을 날아 그대로 요시나리의 앞에 떨어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챙그랑!
도자기가 깨짐과 동시에 청명한 울림이 방 안을 채웠고, 당황한 일영은 다급히 탁자를 넘어 그녀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폈다.
“괜찮아?”
일영은 혹여 자잘한 조각이 튀진 않았나 주변을 살폈고, 그 자상한 모습은 가뜩이나 술기운에 발정한 요시나리의 마지막 선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척.
그녀의 얇은 손이 일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압았고, 일영이 차마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츄릅.
요시나리는 그의 어깨를 당겨 곧바로 입술을 맞췄다.
연한 핑크색을 가진 살덩이가 검은 공간에서 서로 가볍게 몸을 비빈다.
이윽고 입을 완전히 열어 일영의 혀를 잡아먹을 듯이 저돌적으로 들어온 혀는 한참이나 일영의 입안을 휘저었다.
초옥. 츄릅.
두 남녀의 입에선 달달한 술내음과 함께 서로의 갈구로 만들어진 야릇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탐했을까.
이내 서서히 멀어진 둘은 완전히 어두워진 밖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내.
일영은 피식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시작한 거다. 요시나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