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모리 요시나리(1)
* * *
오다 노부토모를 따라 야습을 나선 병력은 무려 2,000명에 달했지만, 그중 태반인 1,000명은 성안의 장정들을 동원한 징집병에 불과했다.
때문에, 일영은 모리 요시나리에게 말해 그들을 모두 무장해제를 시킨 후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기요스 성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사, 살려주세요!”
“끄아아아악!”
이미 기요스 성의 주된 병력과 가신들은 평원에서 죽거나, 무장해제를 당한 후였기에 그들은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붉은 핏물을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남김없이 죽여라!”
당연히 일영과 요시나리가 살육에 미친 이들은 아니었에, 그들의 칼이 향한 곳은 오다 본가에 종사하던 가신들과 그 식솔들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주하는 이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인 후, 요시나리는 평원 밖에서 사로잡은 약 300여명의 사무라이와 곧바로 죽이기엔 껄끄러운 중신들을 데려와 기요스 성의 연병장에 무릎 꿇렸다.
처억.
“결정해.”
모리 요시나리는 먼저 중신들 10여명을 무릎 꿇리곤 그 앞에 앉아 푸른 빛이 도는 창을 보란 듯이 세우곤 말했다.
“본가의 중신이라는 명예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본가의 멸문을 인정하고 노부나가님을 따를 것인지.”
일영은 그런 그녀의 뒤에 서서 모리 요시나리를 바라보았다. 왜일까. 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이 묘하게 씁쓸해 보이는 것은.
‘…괜한 걱정인가. 헛.’
문득 실소가 터져나왔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들어 아직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쓸었다. 가면엔 지난 새벽을 기억하라는 듯 깊은 상처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때, 일영과 요시나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늙은 중신 중 한명이 체념한 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할복하겠소.”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생포 당한 모든 중신은 할복을 택했다.
‘아마, 이미 예상을 한 거겠지.’
투항한다고 해도, 살아남기 힘드리라는 것을 말이다. 오다 본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언젠간 반드시 지워야 할 적이었으니까.
“소원대로.”
모리 요시나리는 이전의 순박한 얼굴이 아닌 싸늘한 얼굴로 사무라이들에게 눈짓했고, 그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동요 없이 곧바로 검을 쥐었다.
스릉.
핏물이 채 마르지 않은 검들이 서슬퍼런 울림과 함께 뽑히고, 가신들은 체념과 두려움이 가득한 손길로 앞에 놓인 단도를 집어 천천히 복부로 가져댔다. 그리고.
푸욱!
“커헉!”
“끅…끄윽…!”
정확히 왼쪽 복부를 찌른 후, 치솟는 생존 욕구를 애써 억누르듯 오른쪽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흐읍!”
서걱툭.
뒤에 서 있던 사무라이들은 곧바로 목을 베어냄으로써 고통을 줄여주고, 명예를 지켜준다.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할복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로 오다 가문의 본가였던 야마토노카미 오다 가문이 멸문했다.
이제 남은 것은 300여명의 사무라이들이었다. 모리 요시나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때 가장 직급이 높은 한 사무라이가 곧바로 고개를 바닥에 쳐박으며 외쳤다.
“노, 노부나가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어차피 저들도 투항을 권하지 않았는가. 때문에 투항하면 살 수 있으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평소였다면 말이다.
“쯧.”
저들의 눈에는 중신들이 바보로 보인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죽음의 두려움에 티끌 만한 희망이라도 잡아보려 발악하는 것일까.
“…명예에 대한 감각조차 없는 것들.”
어느쪽이던, 모리 요시나리의 눈엔 한없이 한심한 바보들로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음을 왜 모르는 걸까.
“모두 죽여버려.”
“자, 잠깐…!”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미친 듯이 모리 요시나리를 향해 외쳤으나 그녀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성 내부로 들어갔다.
한편, 일영은 온몸이 묶인 채로 미친 듯 소리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머잖아 저들의 비명이 가득 찰 텐데. 굳이 그걸 보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성안으로 들어가자 모리 가문의 사무라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가주께서 제일 상층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직책조차 없는 일영에게 그들이 존대를 하는 게 정상적이진 않았으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문의 중신인 히라테와 야밤에 만날 정도로 친밀(?)하며, 거기에 지난 평원 전투의 전략을 일영이 고안하지 않았던가. 확실히 하극상의 시대는 이런 점이 좋았다.
능력이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가치가 있어지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각을 오르자, 곧 요시나리가 부른 상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상층과 그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영은 별로 개의치 않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머잖아, 기요스 성이 훤히 보이는 거대한 창문의 앞에 앉아있는 모리 요시나리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사실 기요스 성까지 오는데도 큰 대화나 사건은 없었던 터라 모리 요시나리에 대해선 잘 아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웃으며 암살자의 목을 베고, 엄청난 무력에 비해 의외로 순박한 사람이라는 거?
‘거기에 압도적인 가슴은 덤이고 말이지.’
그때, 일영의 기척을 느낀 요시나리의 포니테일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린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왔어?”
“예.”
확실히 느꼈다. 그녀는 지금 전장의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일영은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곁에 서서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투는 이겼고, 당주님의 명도 나름 완벽하게 수행했는데요.”
그의 말은 정설이었다.
그녀는 명령받은 대로 완벽하게 수행했고, 기분이 찝찝할 일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떤 부분이 걸리길래 이러는 걸까.
“으음…백일영. 맞지?”
“예.”
요시나리는 익숙치 않은 그의 이름을 곱씹다가, 곧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잖아, 술이나 한잔 할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일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곧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그러죠.”
**
술판을 벌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있는 상층은 다름아닌 오다 노부토모가 사용하던 곳이여서 기요스 성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고, 요시나리의 명을 받은 사무라이들이 시녀들에게 명령해 곧 술과 썩 먹음직한 안주들이 방 안에 채워졌다.
덕분에 2달간 술은커녕 즐겨 피우던 담배도 입에 대지 못했던 일영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으니.
“우으….”
“어, 음. 모리 공?”
“으에? 나?”
바로 모리 요시나리의 주량이 아주 약하다는 점이었다.
“…더워.”
일영은 채 한 병을 비우기도 전에 볼에 홍조를 띄우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요시나리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
그때, 요시나리는 정말로 더웠는지 입고있던 갑옷을 대충 풀어 던져버리곤, 가슴을 가린 옷섬을 거칠게 풀었다.
“푸흡!”
덕분에 가뜩이나 풍만했던 가슴이 더욱 도드라짐과 동시에 묘한 붉은 핏기가 도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기에, 일영은 자꾸만 고개를 드는 제3의 다리를 억지로 찍어 누르는 것에 온 신경을 다해야 했다.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말도 없이 마시기도 뭐한데….’
그는 술을 홀짝이며 부채질하는 요시나리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애초에 술을 먹자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그런데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취해버리니 결국 일영이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진 않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야.”
“네?”
흘려들어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곧 요시나리의 불만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뭐 실수했나?’
라고 생각해봤지만, 조금 전 내뱉은 말이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을 텐데.
“너.”
그러나 곧 돌아온 답은.
일영에게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너. 몇 살이야?”
“예?”
“…척 보기에도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 왜 자꾸 존댓말하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