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히라테 가(家) (4)
* * *
히라테 마사히데는 일단 병력을 물린 후, 울상이 되어 어쩔 줄 몰라하는 요시나리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구려. 모리 공.”
“그, 그게….”
척 보기에도 힐난과 실망이 담긴 마사히데의 목소리에 요시나리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그리곤 이내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히, 히라테 공께서…하급 사무라이를 찾으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저, 저는 이런 일인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이건 진실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저 백일영이라는 조선 낭인과 히라테 마사히데 사이에서 무언가 중요한 대화가 오가리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진 상태로 온 것이니 말이다.
‘후우…어찌 이리도 노부나가를 닮았는가.’
비록 노부나가에 대한 충심으로 한 일이라지만, 히라테 마사히데 입장으로선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같은 파벌에 있고, 또 충심에서 한 일이라지만 어찌 되었든 요시나리는 무려 현 오다 가문의 당주인 노부나가의 사범이자 수석 고문을 염탐한 것이 된다.
만약 이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다면, 요시나리의 목숨은 어찌 부지 시킨다 해도 결국 파벌의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는다.
거기에 하필 들은 얘기도 얘기고 말이다.
문득, 마사히데는 쩔쩔매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시나리의 곁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일영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죽을 뻔했거늘.’
마사히데는 같잖은 위협이나 하려고 그를 부른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그를 고문해 정보를 캔 후 죽이려 했다.
그것을 일영이 모를리는 없을 터.
헌데 그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중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복을 하지 말라. 노부나가를 위해.’
참으로 건방진 소리임과 동시에.
참으로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아직 그녀를 위해 할복하려는 생각을 그 누구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부터 자신을 잘 알던 친우도 아닌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 그것을 어찌 간파했단 말인가.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그 전에 일단 요시나리를 돌려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그였으나, 곧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후….”
“…소, 송구합니다아!”
요시나리는 아예 무릎을 꿇고 거의 고개를 조아리다시피 그에게 사죄하고 있었다.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모리 가문은 불과 얼마 전에 오다 가문으로 투신한 가문이다. 때문에 충성심은 높으나 가문의 격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고.
그렇기에 가문의 중신인 마사히데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건 자칫하면 가문이 멸문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인 것이다.
허나, 마사히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불쌍히, 또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사히데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서툴고 모자라지만, 앞으로 노부나가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모실 충신이다.’
이런 말을 스스로 하면 부끄럽지만, 히라테 마사히데는 자신이 사람을 보는 눈이 꽤 있다고 자신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간단한 질책을 끝으로 그녀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요시나리.”
“…예.”
“이번 일은 가문의 일로 키울 생각이 없네. 다만 앞으로는 주의를 하라는 의미에서….”
순간, 마사히데가 모리라는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설교를 시작하자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라테 공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스릉.
“응?”
일영은 갑작스럽게 허리에 매인 부무장인 와키자시를 뽑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사히데가 좋게 넘어가는 분위기인데 왜 갑자기…?
“…자, 잠깐. 요시나.”
뒤늦게 요시나리가 와키자시를 뽑아든 것을 확인한 마사히데가 그녀를 다급히 말리려 했으나, 이미 요시나리의 귀에 두 남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가문에 폐를 끼칠 순 없어.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노쇠하셨지만, 모리라는 성만 이어진다면 내 목숨 하나쯤은…!’
순간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중신 히라테 공의 대화를 엿들었고, 또 들키기까지 했으니 이 죄는 응당 목숨으로 갚는 것이 옳을 터.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요시나리 씨? 저기요?!”
물론 그 순간에도 두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천천히 와키자시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고, 곧 배를 향해 드리웠다.
하지만 그녀가 막 힘을 주고 눈을 감으려던 그때, 죽음의 결심으로 막혀있던 귓가가 뚫리며 다급한 일영의 목소리가 꽂혔다.
“으아아! 봐준다잖아! 야!”
“에?”
그제야 요시나리는 고개를 들어 마사히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일영이 그 사이 그녀의 손에서 와키자시를 뺏어 뒤로 던진 후에야 요시나리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꼴깝을 떨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게. 요시나리.”
당연히, 요시나리는 또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도게자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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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곧 시녀들이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작은 다과상을 가져와 그들의 앞에 놓았다.
조금 전 일영에게 한 태도를 생각하면 너무나 빠른 태세변환이었으나 일영도, 마사히데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요시나리는 여전히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부끄러움에 몸부림치고 있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다과로 나온 군것질거리들을 우물거리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그렇게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사히데였다.
“그럼, 이만 모리 공은 돌아가 보게. 오늘 일은 입단속을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일영과 할 얘기는 요시나리가 들을 얘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일영은 도자기 잔에 남아있던 녹차를 단번에 털어 넣고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요시나리의 손을 턱 붙잡았다.
“어, 어?”
갑작스러운 일영의 돌발행동에 요시나리는 막 무릎을 펼치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영은 굳어버린 그녀를 다시 앉히곤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사히데에게 말했다.
“어차피 엿들었으니, 같이 들어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만.”
“흐음.”
그의 말에 마사히데는 잠시 요시나리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녀가 어디부터 들었든 마지막 말을 들어버린 시점부터 의미가 없어진다. 때문에 요시나리는 얼떨결에 두 남자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말해보게. 왜 내가 할복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사히데였다.
그는 감정이 쉬이 비치지 않는 눈으로 일영을 바라보며 물었고, 일영은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글쎄요. 히라테 공께선 노부나가가 어떤 군주로 보이십니까?”
“어떤 군주라면….”
일영의 말에 마사히데는 잠시 고민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나열했다. 하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할 수가 없군.”
“히, 히라테 공?”
당연히 요시나리는 당황했지만, 일영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렇죠. 아버지의 장례에 향을 뿌리고, 지금도 2달째 저택에서 칩거하시며 술이나 마시고 계실테니까요.”
일영의 신랄한 말에 마사히데와 요시나리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곧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영의 말이 진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사히데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일영은 곧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난세를 끝낼 사람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죠.”
“…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마사히데는 물론이고 곁에서 듣던 요시나리도 ‘그건 좀…’하는 눈빛으로 볼 정도니 말 다했지 뭐.
때문에, 마사히데는 조금 노기를 담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하게나. 괜한 말로 시간이나 끌 생각은 하지 말고 말이야.”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불안함과 모자람, 나아가 폭력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대화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뿐이리라.
“답이라….”
일영은 덥수룩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민했다. 지금 당면한 과제는 히라테에게 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는 것.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말하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믿어줄지는 다른 문제지만.
‘그래.’
이내 일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을 바라보는 마사히데에게 말했다.
“그 답은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네놈!”
“일단은 믿음을 쌓는 게 먼저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그러나 그 순간.
일영은 그의 말을 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곧 시바 성을 가진 남자가 당주 님을 찾아올 겁니다. 다음 얘기는 그 이후로 하시죠.”
“…뭐?”
일영은 그 말을 남긴 채 곧바로 히라테 가의 저택을 떠났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요시나리가 무례한 그를 잡아 꿇리려는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마사히데의 만류로 저지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모든 이들이 근무를 떠난 빈 숙소에 찾아온 마사히데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끄응차.”
그의 말에 일영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고, 곧 뒤를 돌아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좀 믿음이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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