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히라테 가(家) (1)
* * *
“자.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네가 수상하지 않다는 것만 밝히면 되니까.”
요시나리는 그렇게 말하며 짐짓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목에 창이 닿아있는 일영의 입장으로선 차라리 대놓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더한 위협이었다.
‘…상황이 꼬여도 너무 단단히 꼬여버렸는데.’
당장 핑계를 댈 이유는 많았다. 눈앞에서 목이 베어진 닌자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거나, 혹은 길을 잃었다거나.
그러나 일영이 그 말을 바로 내뱉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짜고짜 목에 창을 댄다는 건….’
일영은 시선을 내려 목에 거의 맞닿아있는 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온다는 건 이미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나.”
그때,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나지막이 열리고 짧고 간결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둘.”
‘어쩔 수 없나.’
남들의 이목을 피해서 ‘그’를 만나러 간다는 선택지는 이미 요시나리에게 들킴으로써 파토가 났다. 일단은 그녀의 의심을 풀고 복귀하는 게 우선일 듯싶었다.
“셋. 그럼….”
“저는 지금….”
이윽고 요시나리와 일영의 입에 동시에 열렸고, 서로가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그때였다.
“멈추시지요. 모리 공.”
다시금 달빛이 구름에 잡아먹혀 어둠이 자리한 공간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미성과 보이시한 음성이 미묘하게 섞인 요시나리와 달리 청아한 울림이 가득한 목소리에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곧 요시나리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우에몬?”
무장의 복장을 한 요시나리와 달리 정갈하게 갖춰 입은 기모노와 딱 일자로 떨어지는 단발은 척 보기에도 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듯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체구가 워낙 작아 묘한 위화감을 주긴 했지만 말이다.
“우에몬이라면…?”
일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나 다행히 요시나리는 듣지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시나리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히라테 공의 딸인 당신이 어째서 이 야밤에 이곳을?”
‘우에몬…. 그런가.’
그녀의 이름을 듣자 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에몬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모든 남자 무장이나 다이묘들이 여자가 되진 않았으나, 이젠 어떤 이가 여자가 되었어도 놀라지 않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때, 우에몬이 말했다.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은 물음입니다. 모리 공. 오와리의 주인이신 당주께서 암습 위험에 노출된 현재, 가문을 지탱하는 무장인 당신이 어째서 이런 외곽에 있는 것인지요.”
“그, 그건….”
우에몬의 물음은 도저히 소녀의 그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에 요시나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일영을 발견하고 말했다.
“닌자를 쫓던 도중 수상한 이를 발견했습니다. 하급 사무라이. 그것도 조선 출신인 이 자가 야밤에 이런 외곽을 혼자 거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순간, 구구절절한 요시나리의 말이 내뱉어지는 그때 우에몬과 일영의 눈이 맞닿았다. 그리고 우에몬은 의미심장한 눈웃음과 함께 이내 요시나리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럼 걱정치 않으셔도 되겠군요. 저 무사님은 현 당주의 수석 고문이자 후견인이신 저희 아버지께서 정식으로 초청한 손님이시니까요.”
“…뭐, 뭐라고요?”
요시나리는 우에몬의 말에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영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말을 내뱉은 우에몬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히 일영의 목에 겨눠진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조선에 관심이 많아, 마침 조선 출신이신 일영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리 공께서 히라테 가(家)의 손님께 이런 무례를 보이실 줄은 몰랐군요.”
“아, 아니. 이, 이건!”
그제야 요시나리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깨닫고 황급히 일영의 목에서 창을 거뒀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행동은 모리 가(家)의 의사표현이라고 이해해도 되는 거겠죠?”
척 보기에도 적잖이 당황한 그녀의 모습에, 우에몬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어…그, 그러니까. 제, 제가 그런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일영은 당황을 넘어서 식은땀을 흘리는 요시나리의 모습과 자신에게 은근한 눈빛을 던지는 우에몬을 번갈아 바라보곤, 이내 피식 웃으며 일본도를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거의 울기 직전인 요시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뭐 대충 용건은 이거였습니다만….”
“그, 그럼 처음부터 말을 하면….”
그러자 요시나리는 억울하다는 듯 일영에게 말했으나, 정작 답한 것은 일영이 아닌 우에몬이었다.
“하급 사무라이에, 그것도 조선 출신인 일영님이 가문의 중신에게 초대를 받았다면 시기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아버지께서 조용히 부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만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기에 피차 난처한 상황이 된 것이겠지요.”
물론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허점이 드러나는 핑계였으나, 안타깝게도 요시나리는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우에몬은 그렇게 말하며 요시나리와 일영의 발치에 쓰러진 시체를 힐끔 바라보곤, 요시나리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아버님의 객을 모셔가도 괜찮을까요.”
“어…예. 예.”
요시나리는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영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켰고, 일영은 그런 요시나리의 모습에 웃음을 애써 참으며 우에몬을 향해 걸었다.
“그럼 이만. 가시지요.”
일영이 우에몬의 곁에 서자 그녀는 요시나리를 향해 간소한 예를 차리며 일영을 안내했다.
그렇게 우에몬과 일영은 바로 떠나자 홀로 남은 요시나리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저, 저게 어떻게 애냐고….”
**
한편, 일영은 또 다른 의미로 어색함에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가문의 중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건지, 하급 사무라이들이 머무는 숙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전각들이 자리한 길목을 지나고 있던 이유도 있었지만…제일 큰 이유는 주변을 둘러싼 무사들 때문이었다.
‘어쩐지 호위가 안 보인다 했다.’
아무리 영토, 그것도 심장부나 다름이 없는 성안이라고는 해도 암습이 있던 새벽에 유력 가문의 소녀가 홀로 다닌다는 건 어폐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우에몬이 홀로 나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우에몬을 따라 무너진 나무 벽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풀렸으니, 나무 벽 뒤로 열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모두 믿을만한 이들입니다. 자. 가시지요.”
그녀는 순간 당황한 일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앞서 그를 안내했다. 그리고 자연히 무사들은 우에몬과 일영을 감싸는 진형을 펼친게 바로 지금이었다.
‘숨 막혀 죽을 거 같네.’
일영은 척 보기에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사들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명치쯤 오는 키를 가진 우에몬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다 왔습니다.”
슬슬 언제쯤 도착하냐고 물으려던 그의 귓가에 우에몬의 목소리가 울렸고, 일영은 고개를 들어 곧 나타난 거대한 집을 바라보았다.
‘이게 나고야 성에서 머무는 저택이라니. 거참.’
먼발치에서 바라본 적은 많았지만, 바로 앞에서. 그것도 정문에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여기가….”
“예.”
끼이익.
우에몬은 서서히 열리는 문과 함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 당주이신 오다 노부나가의 대부이자 후견인이며, 현재는 수석 고문이신 저희 아버지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