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조선에서 온 무사(2)
* * *
“큭….”
팔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고 사방을 살폈다. 겉으로는 조용한 골목처럼 보이지만, 곧 날카로운 살기가 사방에서 느껴진다.
‘어림잡아 수십.’
비스듬이 내린 칼날을 따라 핏물이 흘러 뚝 떨어진다. 그것이 적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일제히 일영을 향해 쏟아지고, 결국 일영의 등에 수많은 칼날이 박히고 마는데….
“…라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일영은 태연하게 하품을 하며 생난리가 난 성 내부를 태연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닌자들은 무슨 일격에 수십명을 죽이고 도주하는 능력자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목숨은 하나이기에 조용히 침투해 목표를 죽인 후 도주하는 것이 정석이다. 실제로 닌자들은 암행복보다 평상복이나 하인복을 더 많이 입었을 정도니까.
일영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숙소 앞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검은 하늘 아래 일렁이는 횃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시 자러갈까.”
하급 사무라이들이 각자 집을 배정받지는 않기에, 그들은 모두 하나의 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일영이 깨어났을 땐 대부분의 사무라이가 다급히 성 곳곳으로 흩어진 후였다.
“이유야 뭐…어떻게든 공훈을 세우려는 거겠지.”
이미 암습이 발각된 순간부터 암살은 실패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때문에 남은 것은 암살을 하러 온 닌자들을 생포, 혹은 사살하는 것이겠지.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하급 사무라이들이 공훈을 위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일영은 나가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내가 가봐야 뭘 하겠어. 기껏해야 뒤처리나 하겠지.”
나고야 성 내부에 주둔하고 있는 사무라이만 해도 수백이고, 거기에 평민으로 이루어진 보병인 아시가루까지 합치면 사실상 일영이 할 일은 없다고 보는게 맞았다.
그러면 혹자는 다시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굳이 밖으로 나온 이유는 암살하러 온 닌자를 잡는 게 아니었다.
“끙차. 가 볼까.”
하급 사무라이의 숙소는 나고야 성 외곽의 언덕 즈음에 있었기에 대충 병력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영은 어느정도 원하는 모습으로 병력이 움직이자 곧바로 나막신을 끌고 언덕을 내려갔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근 2달간 아무런 생각 없이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기회가 생기질 않아서 그저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다.
“저쪽이다! 저쪽 담장을 넘었어!”
“놓치지 마라! 감히 당주님을 노린 버러지다!”
울창한 나무로 적절히 가려진 언덕을 내려가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무라이들과 보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아직 다 빠지진 않았나?”
일영은 혹시나 맞닥트릴 귀찮은 상황을 경계하며 길목을 조금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외곽 중의 외곽이라 길이라기보단 산 입구에 가까웠지만 괜히 구설수를 만드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끕….”
나무로 만들어진 나막신에 자갈과 흙이 들어와 무심코 인상을 찡그렸을 때, 그의 바로 뒤로 심상치 않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본능적으로 입을 막았는지, 귀가 조금만 덜 예민한 사람이었으면 그저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나 안타깝게도 일영은 귀가 매우 밝은 편에 속했다.
“…음.”
일영은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전혀 계산 밖인데.”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박!
단번에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일영은 곧바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돌렸고, 곧 허공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챙하고 울렸다.
“크윽…!”
“……!”
일영은 바로 코앞까지 드리워진 서늘한 칼날에 식은땀을 흘리며 곧바로 몸을 굴렸고, 곧 안개가 미약하게 걷히며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쿨럭.”
“음.”
그러자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팔은 총알이 박힌 듯 구멍에서 핏물이 꿀렁거리며 흘러내렸고, 등에는 화살이 2대나 박혀 있었다. 거기에 허벅지도 몇 번이나 베인 듯 오른발도 절뚝거리기까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항복할 생각은?”
일영은 손에 쥔 일본도를 비스듬이 쥐며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목소리가 아닌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는 비수였다.
“크윽!”
그 찰나의 순간 날아온 비수를 피한 일영은 입술을 짓씹으며 곧바로 앞으로 내달렸고, 닌자 역시 곧바로 검을 쥐고 그대로 마주 달렸다.
그러나.
“흐읍!”
“어, 어라?”
당장이라도 검을 맞댈 것처럼 달려오던 닌자는 상처를 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일영의 검을 피하고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대의 목적이 도주라는 걸 깨달은 그였으나, 이미 너무 멀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흐읍!”
콰아아앙!
“크억!”
미성이 섞인 기합과 함께 닌자가 막 넘으려던 나무 벽이 산산이 조각났고, 이내 한 사무라이가 푸른 빛을 띠는 긴 창을 늘어뜨리며 마치 섬광처럼 쇄도했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닌자는 다급히 몸을 굴려 품에서 무언가 꺼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늦은 후였다.
서걱!
짧고 간결한.
그러나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섬뜩한 피육음이 허공에 울렸고, 곧 닌자의 육신이 허물어지며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데구르르.
이윽고 머리는 천천히 일영의 발끝에 닿았고, 일영은 치미는 토를 애써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어쩐지 너무 쉽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본의 아니게 전공을 가로챈 게 되어버렸잖아?”
그때, 그의 귓가에 보이시한 목소리가 꽂혔다.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발 끝에 닿는 머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들었다.
휘리릭척!
거대한 창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려지며 이내 바닥에 찍힌다. 그와 동시에 창날에 붙어있던 핏물은 마치 부채꼴처럼 허공으로 비산했고, 곧 서서히 걷히는 달빛 아래로 사무라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그래도 고의는 아니었으니까 봐 줄 거지?”
보기 드문 회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곱게 묶어 올려 건강미가 넘치는 목선이 드러나고, 머리와 같은 회색 눈에는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더해진다. 거기에 척 보기에도 여성 무장임을 드러내듯 유려한 굴곡을 자랑하는 갑주는 둘째 치더라도 일영이 놀란 부분은 다른 게 아닌 그녀의 압도적인 발육이었다.
“…무슨 가슴이.”
“응?”
다행히 그녀는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으나, 일영은 거의 수박과 맞먹는 압도적인 폭유에 싹 도는 군침을 애써 삼켰다.
물론 발밑에 시체가 있는데 이런 생각하는 게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남자인데.
“음? 근데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그때, 그녀는 나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일영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고자 한 걸음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창에 비친 달빛이 창에 각인된 글자를 스쳐 지나갔다
『세키노 가네사다(??)』
“…저 창은.”
그제야 일영은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 글자가 각인된 창을 들고 다니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모리 요시나리.”
“어…날 아네?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한 건가. 그런데….”
모리 요시나리.
이후 벌어질 모반과 숱한 전장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끝까지 따르는 충신이자 무장.
“넌 누구야? 사무라이라면 웬만해선 거의 다 아는데.”
“저는…음.”
어느새 거의 근접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영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조선에서 온 낭인이자 현재 오다 가문에 고용된 하급 사무라이. 백일영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억.
요시나리는 순박한 얼굴로 웃으며 창을 일영의 목에 겨누고 말했다.
“그래서, 하급 사무라이가 가문의 중신들이 거처하는 거주지로 향하던 까닭은?”
“……하하.”
일영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촉에 식은땀을 흘리며, 둘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닌자의 머리통을 노려보곤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려는 데 왜 공격해선…!’
되도록 조용히, 은밀하게 가고 있었는데 어이가 없게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윽.
“자, 잠시만요. 너무 가까운 거 아닙니까?”
“대답해. 조선에서 온 낭인. 만약 셋을 셀 동안 대답하지 않으면….”
씨익.
“그 순간, 머리 위가 허전해질 거야.”
바로 앞에 순박하게 웃으며 단번에 목을 베어버리는 여자가 서 있었으니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