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여긴 어딜까(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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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기억하다니.
일영은 인상을 찡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로 비현실적인 광경을 응시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평상시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면 모를까, 각종 세계사나 역사를 덕후 수준으로 파는 그로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이내 그의 시선이 노부나가에게 역정을 내는 미부인에게 닿았다.
‘현실이라니. 이게.’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미부인의 입에서 노부나가라는 이름이 불리지 않았더라면 한참은 더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억울한 점도 있다.
원 역사대로 남자도 아닌데 어떻게 빠르게 눈치를 채겠는가. 그건 그거대로 미친 놈이다.
문득 소매가 손가락에 닿았다.
사박하는 거친 감촉에 시선을 내리자 일본 특유의 품이 넓고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뒤늦게 허리춤에 매여있는 두 자루의 일본도를 바라보곤 생각했다.
‘카타나, 와키자시.’
카나타는 주무장.
그보다 짧은 와키자시는 부무장이다.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허리에 매여있는 두 자루의 일본도를 손으로 쓸다가 무심결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펄럭거리는 오다 가문의 가문 깃발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걸 이제야 보다니.’
모과꽃의 형태를 띤 검은 문양은 오다 가문의 상징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황급히 승려들이 향을 걷어내고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향을 뿌린 대상은 한 명뿐이다.
다름이 아닌 오와리의 호랑이라 불렸으며 방계로 시작해 오와리를 집어삼킨 남자. 바로 오다 노부히데이리라.
그리고….
일영은 검은 단발과 함께 묘한 광기, 그리고 불안함을 머금은 오다 노부나가의 금빛 눈동자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여자가 되었냐는 건데.’
저 여자가 희대의 광인.
혹은 군략의 천재라고 평가받는 오다 노부나가라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스스로 미친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누차 얘기하듯 이건 현실이었다.
“후.”
일영은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눈두덩이를 쓸며 무심결 나오려던 욕지거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시발,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예?’
아직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무심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가 할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그를 괴롭혔다.
물론, 그마저도 곁에 서 있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긴 했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역사만 좋아했던 건 아니다.
웹소설, 웹툰, 나아가 영화나 드라마까지 섭렵하던 그였기에 이 세계가 대충은 어떤 세계인지 가늠은 가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가 싫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1. 눈을 떠보니 일본 전국시대인 센고쿠 시대다.
2. 오다 노부나가가 여자가 된 것으로 보아 다른 다이묘들도 성별이 바뀌었을 수 있다.
3. 그런데, 대충 살펴보니 나는 중신도 아닌 그저 자리를 채우는 하급 사무라이로 보인다.
…라는 현실을 어떻게 쉽게 인정하겠나.
만약 인정하게 되는 순간,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달리하거나 둘 중 하나일 듯싶었다. 그러나 그의 절망과 혼란이 섞인 푸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으니.
짜악!
갑작스럽게 사찰 내부를 울린 날카로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제단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 고개가 돌아간 노부나가와 미부인의 격노에 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일영은 날카롭게 울린 소리가 다름아닌 노부나가의 뺨을 때린 소리라는 걸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정작 뺨을 때린 미부인은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많은 가신이 네가 아닌 네 동생을 차기 당주로 충언했다. 그럼에도 당주 자리를 맡았으면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지…!”
아무리 친모라 하더라도 오와리,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땅의 당주가 된 그녀의 뺨을 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허나 누구도 미부인을 말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리지 않은 것이리라.
일영은 서서히 돌아오는 이성을 바탕으로 노부나가와 미부인을 훑으며 생각했다.
‘이때의 오다 노부나가는 능력과 인성을 비롯한 모든 걸 의심받고 있었지.’
괜히 이 당시 그, 아니 그녀의 별명이 오와리의 멍청이(??の大うつけ)가 아니다. 힐끔 시선을 돌려 노부나가의 뺨을 친 미부인의 정체를 가늠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어머니라면…. 도타 고젠인가.’
확실할 것이다.
후대에 여러모로 말이 많았던 여자니까.
“어머니.”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가신들 사이로 나긋한 목소리가 울린 것이.
“노여움을 푸세요. 비록 언니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패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오만함과 방자함으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와는 사뭇 대조되는, 평온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손에 쥔 부채를 촤악펼치며 입을 가리곤 말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말씀대로, 이젠 오다 가문의 당주인걸요.”
검은 단발과 복부에 길게 그어진 11자 복근이 도드라지는 노부나가가 마치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면, 여리여리한 몸매에 긴 흑발을 허리까지 늘이고 정갈한 예복을 갖춰 입은 단아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학과 같이 고고하며 기품이 흘렀다.
척 보기에도 확연히 다른 모습에 일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완전하게나마 당주 자리를 물려받은 그녀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형제…. 아니, 자매는 한 명밖에 없을테니까.
‘오다 노부유키.’
오다 가문의 둘째.
나아가, 이후 몇 번이나 당주를 차지하기 위해 모반을 일으키는 야망을 가진 남자이지만 이젠 여자가 되었으니 야망이 있는 여자라고 불러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무심결에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상식이 파괴되는구나.’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장례식 중앙에서 펼쳐지고 있는 때아닌 집안싸움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 있어서 일영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들은 없었다.
그때, 노부유키는 태연하게 부채로 살짝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의 결단은 쉬이 이해할 수가 없네. 이번엔 선을 넘었어. 언니.”
본래 당주가 된 그녀에게 하기엔 정치적인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노부나가가 보인 행동 때문에 노부유키의 말은 꽤 정당한 충언으로 비춰졌다.
그래, 적어도 겉으론 말이다.
허나 그 순간.
노부나가의 비릿한 입꼬리가 씨익올라가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열어 말했다.
“…노부유키.”
손에 쥔 화승총이 한 바퀴를 빙돌며 이윽고 노부유키에게 겨눠졌다. 비록 심지에 불은 붙이지 않았으나 그 자체로도 위협적인 그 모습에 공기가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노부나가는 말했다.
“네가, 이해할 수 없으면 어쩔 건데?”
동시에 두 형제…. 아니, 자매의 어머니인 도타 고젠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노, 노부나가!”
비록 사무라이들이 소위 조총이라 불리는 저 서양 무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기는 무기다. 절대 동생에게 겨눌만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훗.”
그러나, 정작 노부나가에게 겁박아닌 겁박을 당하게 된 노부유키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오히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곧 노부나가의 총구가 정확히 노부유키의 심장에 겨눠지고, 그녀는 눈매를 곱게 올리며 답했다.
“그러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답은 실로 모호했다.
허나, 그 안에 담긴 저의가 역심에 가까운 것임을 이 자리의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일영도 어느샌가 자매들의 말다툼을 지긋이 응시하며 꿀꺽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패도(??)를 걷는 오다 노부나가가 저토록 속내를 드러내는 노부유키에게 무슨 대답을 할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답을 할까.
아니, 답이 굳이 입으로 내뱉는 말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원 역사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해골에 금박을 입혀 술잔으로 쓴 노부나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서 노부유키를 벨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역사는…?’
만약 노부나가가 남자였다면 이런 만약에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별마저 바뀌어버린 세상 속에서 역사가 바뀌지 않으리란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인 것이다.
“…허.”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비웃음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노부유키. 다만….”
순간, 그녀의 시선이 노부유키를 떠나 장례식에 모인 모두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모두는 직감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녀가 답하는 것이 비단 노부유키가 아닌 가신 모두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인정할 수가 없다면.”
비릿한 웃음이 머금어진다.
나아가, 그녀의 서늘한그러나 어딘가 외로운 목소리가 사찰 안을 울렸으니.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그것은, 실로 오만한 선전 포고였다.
*
노부나가는 그 말을 뱉은 직후 곧바로 사찰을 나섰다. 그러자 사찰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들 역시 일제히 사찰을 떠났다.
허나, 정작 일영은 노부나가가 떠난 방향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실제로 보니 가슴이 뛰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을 제쳐두더라도,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장례식을 겪은 가신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심지어 그조차도 내심 어느 부분은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저들과 그에겐 다른 점이 있었다.
일영은 앞으로 그녀가 어떤 길을 걸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저 사내…. 아니, 여자는 장차 열도를 진동시킨다. 뿐인가. 이후 일본을 지배하는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주군이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말은 많았다.
원래부터 광인이었다는 설과 시대적인 한계와 계속된 암습과 긴 전쟁으로 망가진 것이라는 설까지.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피와 살육으로 가득 차리라는 것. 또한, 결국 혼노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라는 것까지.
때문에, 무심결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런 세계에 갑자기 떨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일상 속에서 살다가, 비 일상으로 끌려왔다.
현대인 백일영은 사라지고, 어쩌면 평생은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장차 본연의 능력만으로도 열도를 거머쥘 이가 스쳐 지나갔다.
순간, 일영의 눈에 광채가 흘렀다.
전국시대.
일본 말로는 센고쿠 시대.
이른바 하극상의 시대이자, 사무라이들이 득세하며 일본의 역사를 거론할 때 절대 빼놓을 수가 없는 난세.
그런 세상에서 오다 노부나가라는 끈은 뭐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일영이 잡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동아줄 중에 하나다.
때문에, 그는 머잖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존을 추구하자.
살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멈춰있을 수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으니까.
그는 어느새 정해진 목표를 뇌리에 각인시키며, 펄럭거리는 모과꽃 깃발을 묵묵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일단 노부나가에게 어떻게든 접근해봐야겠지.’
생존의 추구.
그러기 위해선, 일단 노부나가가 미치지 않게 해야하는 것이다.
*
“어이, 일영.”
“어.”
그래, 분명 그런 결심을 품었었다.
일영은 흐르는 땀을 무명천으로 대충 닦으며,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카타나를 허리에 납검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휘이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오다 가문 특유의 노란 깃발을 지나자 비로소 두 눈 가득 찬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벌써 2달 전인가?’
이 말 같지도 않은 세상에 떨어진 게 벌써 2달하고도 일주일이 넘었다. 분명 노부나가에게 접근해서 겸사겸사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였지만….
누가 그랬지 않은가. 현실은 빌어먹을 시궁창이라고.
“얼른 와!”
“그래, 그래. 간다.”
그리 질이 좋지 않은 허름한 옷에 일본 특유의 검은 죽립 진가사를 쓴 일영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나막신을 끌어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함께 교대하는 사무라이가 곁에 와서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아, 이름은 왜 이러냐고?
순간 일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조선인이면 조선으로 보내주던가. 시발.’
일본으로 넘어온 조선 낭인이어서 그렇단다.
그래, 지금 일영은.
가문의 중신은커녕, 오다 가문의 널리고 널린 하급 사무라이…. 소위 낭인이 되어 구르고 있었다.
아, 집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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