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마무리는 언제나 해피엔딩!
어린 시절 꿈을 꾸었다.
딱히 꿈을 자주 꾸는 건 아닌데. 그것도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자각하는 꿈은 또 처음이었다. 비비안은 아이처럼 작아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공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체로 안개에 가린 듯 흐릿했지만, 이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녀의 생일이었다. 빚더미에 하루하루를 허덕이던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성대한 생일잔치를 열었다. 다른 가문 귀족 영애들처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 재정 상황에 맞지 않는 사치였다.
악단을 부르고 스무 개가 넘는 선물 상자를 받았으며, 파티를 열어 황궁에서 일한 적이 있는 요리사를 초빙했다. 굉장히 화려하고 반짝거려 기쁘기보다는 어딘지 얹힌 듯 더부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홀로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분에 계속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어머니는 계속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유독 상냥하게 이것저것 챙겨 주던 어머니.
그리고 그날 밤 독이든 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치 제 몫을 다 했다는 듯이.
어머니의 시신을 가장 처음 발견한 것도 비비안이었다. 그날의 참상이 꿈속에서 다시 펼쳐졌다.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는 어머니. 테이블을 흥건하게 적시고도 넘쳐나,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물. 바닥에 떨어져 엉망진창으로 흩어진 유리 조각.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알코올 냄새, 그에 섞인 쇠 냄새.
지독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비비안도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 냄새가,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짙었다.
달려가서 그녀가 살아 있는지 확인을 해야 했으나 꿈쩍도 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코앞에 닥쳐 오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성 회로가 기능을 멈춰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내리기에 비비안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죽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어머니를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나절을 내내 그러고 있었다. 뇌리에 완벽하게 각인될 때까지 계속. 만약 술에 취한 아버지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계속 멍하니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그날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한때는 메르텐 백작이었던 사내는 자신의 부인을 붙잡고 하염없이 오열했다. 유리 조각을 깔고 바닥에 앉아 있는데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비비안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응시했다. 생명의 불이 완전히 꺼진 빈껍데기. 저건 더 이상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당시, 비비안은 슬픔보다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꿈이라니.’
꼼짝도 할 수 없는 게 마치 가위에 눌린 듯했다. 에이든에게 고백받은 다음 날 이런 꿈을 꿀 게 뭐람. 그녀가 이를 악물며 괴로움에 숨을 헐떡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잊고 있던 자신을 꾸짖기 위해 꿈에 나타난 것일까.
비비안은 아버지가 마차사고로 죽은 것이 ‘사고’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그만이 알겠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한들 정면에서 달려오는 마차를 피하지 않고 들이받았을 리가.
뭐 결국은 부모 둘에게 버림받았다는, 에이든의 말마따나 운이 나쁠 뿐인 흔한 이야기였다.
조금 특별한 건 홀로 남겨진 비비안이 자살의 연쇄에서 벗어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엔 아직 어린 나이여서 그랬던 걸까. 죽음에 동화되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진저리가 쳐져서 그런 걸까.
아무튼, 끝까지 버텼고 살았다.
백작 작위가 숙부에게 넘어가도, 온갖 학대를 받고 자라게 되어도,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뛰쳐나와 황궁에 들어가고 난 뒤에도 계속 살길을 찾았다. 그런데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그리고 에이든을 만났지.’
에이든을 떠올리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비비안은 그를 생각하며 본인도 모르는 새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에이든은 말했다.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어디에서든 있을 법한 얘기이고 특별할 것 없다고. 그런데 이제 비비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불행은 그녀의 인생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의 사람도 상황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비비안은 자신이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그 외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의미조차 없는 과거에 불과해.’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죽어 미동조차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어머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치 그 모습이 고통 없이 잠든 것만 같았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으아.”
비비안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뻐근했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숨소리를 고르고 있는데, 왠지 누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이든?”
“불행히도 전 대공 전하가 아닙니다.”
“누, 누구세요?”
처음 보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비비안은 무방비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처음 본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것이 그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 잠기운을 떨쳐 내지 못한 머리로 그의 새하얀 가운과 콧대에 걸쳐진 안경, 아니꼬운 시선을 차례로 응시하다가 ‘아.’ 하고 얼빠진 감탄사를 흘렸다.
“의원님이시군요.”
“뭐, 비슷합니다.”
“비슷한 건 또 뭐죠.”
“아뇨. 의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실제로 하는 일도 대부분 의원이니까요.”
대부분 의원은 또 뭐지. 킬릭스는 누가 들어도 수상한 말을 뱉은 뒤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의문이 아니라 확인이 어린 말이라 비비안은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아니, 전하께서는 밑에 응접실에 계십니다.”
“왜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더니.”
“그런 소리까지 하셨습니까? 젠장.”
“아니, 왜 욕을 하세요?”
비비안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킬릭스는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그동안 숙녀분 말 상대나 되어 주라며 절 여기에 두고 가시더군요. 어제 대공 전하와 어울려 준 게 실책이었습니다. 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고 오더니, 대체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저도 모르겠군요. 대체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
그는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 유감이 많은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한참을 투덜거리는 그의 하소연을 들으며 ‘혹시 연적인가.’ 하는 아직 제정신이 아닌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만큼 킬릭스는 에이든과 비비안이 이어진 것에 대해 굉장히 불만인 듯 보였다. 간간이 씹어 뱉듯 중얼거리는 ‘망할 커플’이라는 표현은 진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절했다.
“조언해 주고 응원해 준 제가 바보였죠. 아무튼, 어제는 잘 봤습니다. 그 창문의 하트와 바닥에 깔린 장미길이 아주 인상적이라 아마 대공 전하께서도 평생 기억하시리라 생각하는데.”
“윽.”
칭찬인 척 가장하고 말하고 있었지만, 명백히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 비비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박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어차피 고백할 거고 뭘 해도 부끄러울 거라면 그냥 미친 척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보자는 각오로 저지른 짓이었다. 하도 어이없어서 그도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변명하자면 비비안은 저택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선택의 폭이 좁았다. 에이든이 바라는 대로 음식과 와인을 준비하기에는 어차피 대공 저택의 사용인들이 만드는 건데, 자신이 생색내기엔 웃긴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책에 쪽지를 끼워 넣는 짓은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치스러움에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쪽이 오실 줄은 정말 모르고…….”
“킬릭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비비안이에요.”
“숙녀분을 그렇게 부르면 주인, 아니 전하께서 절 뒷산에 묻어 버릴걸요.”
그는 농담 같은 말을 진지하게 말한 뒤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든이 고작 이름 부르는 걸로 그렇게 쪼잔하게 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애초에 성이 없으니 이름 말고 부를 것도 없었다. 비비안은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하는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계속 에이든을 주인이라고 하시네요. 혹시 그쪽 분이신가요……?”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깡패니?
“23구역 조직 출신입니다. 의원 자격증은 확실히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23구역은 고만고만한 여러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매번 피 터지게 세력 다툼을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조직들을 통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암흑가의 주인이고.
비비안이 일반인으로서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었지만, 킬릭스가 그동안 어디서 뭘 해 왔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까 의원이냐고 물었을 때도 그런 모호한 답을 내놓았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 외에도 참 여러 가지 일을 할 테니까 말이다. 그 여러 가지 일이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윤리와 한참 떨어진 짓이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그 의원 자격증이라는 것도 혹시 위조 아닌가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닌데 왠지 그쪽 사람이라니까 의심스러웠다. 위조라고 해도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음, 그렇군요.”
그녀는 아직 에이든이 그 무법지대 보스라는 게 익숙하지 않아 떨떠름하게 답했다. 왠지 분위기가 급격하게 어색해지는 것 같았지만 뭐라고 꺼낼 말이 없었다. 그쪽 세계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걸.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킬릭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형수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네?!”
“난 깡패가 아니다.”
비비안이 놀라 빽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겠죠. 깡패가 아니라 위대하신 조직의 보스시겠죠.”
킬릭스가 심드렁하게 답했고, 에이든은 까분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고개를 돌리니 그는 어딜 잠시 나갔다 온 것 같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비비안은 그의 옷과 머리를 차례로 응시하다가 마지막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그가 등장하자 잠시 잊고 있었던 어제의 일과 조금 전의 꿈이 겹쳐졌다. 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어 그녀는 마치 안아 달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에이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와, 이젠 아주 대놓고…….”
누군가의 질린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어디 나갔다 왔어요. 곁에 없으니까 악몽을 꿨잖아요.”
비비안이 칭얼거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꿈을 악몽이라고 칭하는 건 정 없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행복했던 추억이 아니라 자살을 목격했던 순간을 꿈꿨는데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에이든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품 안에 들어가고도 남는 크고 단단한 몸은 그저 안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지가 되었다.
“그런 열렬한 고백을 나눴으면 적어도 자는 동안은 곁에 있어 주세요.”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순순히 사과한 뒤 그녀의 젖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주며 물었다.
“많이 무서웠습니까?”
걱정스러운 시선이었다. 비비안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의아한 듯 잠시 자신의 손바닥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무서웠나? 이불 속에 있었던 손은 따뜻했다. 이런 엇비슷한 꿈을 꾸고 난 다음엔 항상 덜덜 떨며 밤잠을 설쳤던 것에 비해 양호한 반응이었다.
비비안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어머니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마지막 순간은 뇌리에 각인되어 기억 속에서 더 끔찍하게, 잔인하게 변해 왔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꿈에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던 그 순간만큼은 정말 영원의 안식을 찾은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꿈은 그래 봤자 무의식의 반영이겠지. 하지만 비비안은 자기만족일 뿐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자신을 그렇게 버리고 갔다는 원망은 세월에 마모되어, 이젠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만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다.
‘저는 행복해요, 어머니.’
자신의 인생의 돌이켜 봤을 때 불행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밑바닥에 처박히다가도 숨 쉴 구멍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었고, 죽을 것 같이 괴롭다가도 위로해 줄 누군가를 찾아내길 마련이었다.
그녀에겐 동화가 그러했고, 제 손으로 창조한 소설이라는 세계가 그러했으며, 덴드로가 그러했다. 그리고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암흑가의 주인 에이든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이젠 마음의 짐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행복한 추억만 기억해도 되는 거겠죠?’
왠지 어머니께서 그러길 바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득 차오르는 것 같은 충만감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구멍 나 빈 구석이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것 같았다. 과분한 행복이었다.
그녀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 이제 더는 무섭지 않을 꿈인 것 같아요.”
“귀여운 소리 하기는.”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대놓고 ‘이야, 행복한 결말에 화가 나는걸.’ 하고 중얼거리는 의원에게 저리 꺼지라는 듯 손짓했다.
킬리안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두 남녀가 서로 삽질을 할 때는 한심해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더니, 막상 이어지니까 눈꼴 시려서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신경 쓰지 말라면서 그녀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하고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포근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동안 혼자 바보같이 고민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에이든은 언제 제게 말을 놓으실 생각이에요?”
“흠, 글쎄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정중한 척하면서 또 가끔 말 놓는 거 알아요?”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만…….”
에이든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끝을 늘였다. 본인의 말투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원래 그다지 의식하고 말하는 편이 아니었다.
비비안은 어리광부리듯 그의 가슴팍에 볼을 문지르면서 키득거렸다.
“존대가 편하다니 좋네요. 존중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가 갑자기 존대를 그만두는 건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지만 주로 화가 났거나 혹은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였다.
가끔은 갑작스러운 그의 하대가 무섭기도 했지만, 여유를 잃어버릴 정도로 흥분한 건가 싶어 그 말투가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지금은 이대로 놔두기로 했다. 평소에 연인으로 존중받는 느낌이 좋기도 했고, 밤에는 더 섹시해지니까.
비비안은 사소한 즐거움을 위하여 그 사실을 함구하기로 했다.
“존중이라…….”
“존중받는 사랑이란 좋죠. 처음과 같이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 같아서.”
“가끔 비비안을 보면 속이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는데요.”
뜬금없이 대놓고 널 보면 속이 답답하단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그런가. 비비안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 없이 대답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합니다. 판단력은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졌고, 저는 이미 천지 분간 못 하는 머저리가 되었거든요.”
비비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비슷한 말을 율리안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카르델이나 에이든 앞에 서면 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그때 뭐라고 답했더라. 그만큼 좋아하는 거라고 답했던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대답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민망함에 온몸을 비비 꼬았다.
“뭐든, 비비안이 기뻐한다면 해 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어떤 것이든.”
“저, 저도요! 해,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뜸 답하고 말았다. 이 상황이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 정도로 부끄럽긴 했지만, 동시에 그의 감정에 깊이 동화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에이든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지분거리는 움직임이었다.
“제가 비비안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뭐, 그건 각오했어요. 말릴 생각도 없고, 그냥 끌어안기로 했거든요.”
“계속 그렇게 귀엽게 굴면 더 존중해 드리기 힘듭니다.”
에이든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훅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비비안은 제가 너무 들이댔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가, 욕정을 꾹 참고 있는 벽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의 붉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서로의 마음마저 확인한 마당에 굳이 참을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아니, 참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무릎을 세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첫 키스를 주고받는 소년 소녀처럼 마냥 설렜던 어제와 자극과는 또 달랐다. 간질거리는 것과 또 다른 저릿함이 가슴께를 두드렸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제 손을 붙잡고 있었던 에이든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삼키듯 빨아들였다가 곧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말투부터 명백하게 흥분하고 있었지만, 그는 억지로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비비안은 불퉁한 표정으로 반쯤 선 그의 중심을 흘낏 훔쳐보았다.
본인도 하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으면서 내숭은. 그녀는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발로 그의 것을 스치듯 문질렀다. 서툴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발밑에서 서서히 크기를 키우는 게 느껴졌다.
“하여튼 무드 없기는.”
“그냥 포기하시죠.”
저도 할 만큼 했거든요? 비비안은 개구쟁이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이든은 발갛게 달아오른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장난질을 하는 다리를 붙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갑자기 서로의 상체와 하체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치맛자락은 말려 올라가고 바로 속옷 밑에서 폭발하기 직전처럼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내다가 돌연 허리를 쳐올렸다. 비비안이 놀라 굳어지는 사이,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노골적인 소리에 비비안이 얼굴을 붉혔다.
그의 입술은 달콤한 살 내음을 쫓아 굶주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중심은 당장 박아 넣고 싶다는 듯 흉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간헐적으로 움찔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히 끌어안고서, 새하얀 피부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새겨질 때까지 빨고 깨물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참을 지분거리다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비안이 집사까지 끌어들여서 장난을 치는 바람에 늦어졌습니다.”
그는 비비안의 손을 떼어 내더니 그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말했다. 대체 욕구까지 꾹 눌러 참아 가면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했더니. 그녀는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처음에는 전에 가져갔던 피임 마법이 걸린 반지인 줄 알았다. 에이든이 그때처럼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전혀 다른 반지였다.
아마 다이아몬드로 추정되는 투명한 결정들이 모여 꽃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이거…….”
비비안이 샹들리에 불빛에 오색 가지 빛깔로 번쩍이는 보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디자인의 피임 마법이 걸린 반지? 그럴 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건넨 꽃반지에 대한 보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까 응접실에서 사람을 만난다고 했던 것도 이 반지랑 관련이 있는 걸까.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반지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진작 끼워 버리고 싶었는데.”
반지를 받아 달라는 간절한 청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마치 짐승이 자신이 영역을 표시한 것처럼, 그리고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 새긴 것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놓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새겨 놓은 흔적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잠시 그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응시하던 비비안은 결국 풋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쩜 생각하는 게 저랑 똑같나 싶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마치 그게 불만이라는 듯 장난스럽게 물었다.
“진작이면 언제부터 말씀하시는 거예요?”
“피임 반지를 끼고 있을 때부터. 음, 돌이켜 보면 끼워 줬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제 의견은? 존중은 어디 갔죠?”
“이건 양보 못 합니다.”
존중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제 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헤어진다거나 도망간다거나 하는 의견은 입 밖에 내기도 전에 기각이었다. 먼저 사랑한다고 속삭인 건 그대였지. 그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참. 이거 억울하네요. 저도 내 것이라는 흔적을 어딘가에 새기고 싶은데.”
비비안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갑자기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이빨로 꽉 깨물었다.
에이든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눈가를 찌푸리다가 제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선연한 이빨 자국이 만져지고 손에 붉은 핏물이 묻어났다. 그는 잠시 그것을 응시하다가 붉은 피를 혀로 훔쳐 가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성적인 어필로 그보다 우위를 점하는 건 아직 먼 예기인듯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돼, 됐네요. 저도 그냥 반지나 목걸이 같은 걸로 드릴 거예요.”
“그건 이미 받았습니다만.”
엥? 준거라고는 그에게 받은 꽃다발로 엮은 그녀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했다.
“비비안이 준 반지에 보존마법을 걸 생각입니다.”
“꽃?”
“작고 새하얀 꽃.”
“아, 안개꽃.”
비비안은 마땅한 게 없어 꽃줄기로 엮은 반지를 떠올리고는 작게 신음했다. 그런 어린 애가 줄 법한 선물에 보존마법을 걸다니, 참 돈도 많다 싶었다.
심지어 직접 꽃을 꺾어다 준 것도 아니고 그에게 받은 꽃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건 보존해 달라고 준 게 아닌데.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줬으면 더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고작 그걸 받고 기뻐하는 그를 보니 뭘 줘도 저런 얼굴일 것 같아 맥이 빠졌다.
하긴 제국의 대공인 사람에게 세상에 가장 비싼 보석을 가져다 바쳐도 별 감흥이 없겠지. 비비안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얼핏 핏줄이 돋아난 목덜미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그녀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움찔 떨리는 살결을 지켜보는 게 꽤 즐거웠다.
“꽃집에서 일하는 언니한테 들은 얘기인데 하얀 안개꽃 꽃말 중 하나는 죽음이래요.”
“살벌하군.”
“보통 사랑에 관련된 꽃말을 가진 꽃들과 섞어서 꽃다발을 만들죠. 그럼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저는 그냥 안개꽃만 엮어 드렸지만.”
“그럼 제게 죽음을 준겁니까?”
“그렇게 되긴 하죠?”
어차피 꽃말도 결국 의미 부여일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에이든은 그녀가 말한 꽃말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죽음. 영원의 안식. 잠시 생각에 잠겨 흐음, 하고 말꼬리를 늘이던 그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마치 낙인을 찍어 내듯, 축축하고 음습한 혀가 귀를 집요하게 애무했다. 추삽질 하듯 귓구멍을 들락거리는 혀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그의 물건이 전보다 더 크기를 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살벌하다면서 안개꽃의 어느 부분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비비안은 코끝으로 신음을 뱉으며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흣.”
“기꺼이 비비안의 죽음을 받아 가도록 하죠.”
“…….”
사신이 할 법한 소리 아닌가. 죽음을 받아가다니.
흑의 대공, 암흑가의 주인은 사랑을 속삭이는 표현까지 남달랐다.
“영원히, 죽음까지 함께하게 될 겁니다. 신을 믿진 않지만, 존재한다면 그대의 영혼까지도.”
이렇게까지 살벌한 프러포즈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프러포즈가 맞는 건가? 살인 예고는 아니겠지?’
비비안은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단지 그의 고백이 두근두근 설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는 흔들다리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제 심장을 움켜쥐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에게 영혼까지 저당 잡힌 것 같았다.
‘꼭 해야 할 일’을 마친 에이든은 이제 용건이 끝난 것인지, 그녀의 치마 속으로 능숙하게 손을 미끄러트렸다.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러워서 비비안은 제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돌연 그의 어깨를 붙잡고 무게를 실어 그를 뒤로 넘어트렸다. 그리고 도발적인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이왕 죽음을 함께할 거면 침대 위에서가 좋아요.”
“…….”
에이든은 제 위에 올라탄 비비안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부드럽게 영원처럼 죽여 줘요.”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속옷 안에 자리 잡은 손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돌기를 꾹 누르고 동시에 꽃잎을 벌렸다. 벌써 축축하게 젖은 꿀물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읏, 하…….”
비비안의 산호색 입술 사이로 작게 헐떡이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늘 묘한 기분을 들게 했던 요요한 자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혹하듯 노골적인 빛을 띠던 것이 서서히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쾌감으로 차오르는 야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에이든의 눈빛이 마치 홀린 것처럼 혼탁하게 흐려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기꺼이.”
비비안의 얼굴을 아래로, 더 아래로 당긴 그는 죽음까지 삼켜 버릴 듯이 키스했다.
* * *
페르디의 원고를 훑어본 덴드로의 표정이 묘해졌다. 거진 반년 만에 나온 신작이었다.
그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에이든과 원고를 번갈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소설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비비안의 재능은 눈앞에 있으면 뽀뽀를 퍼붓고 싶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웃는 날이 되겠지만.
그녀가 날개를 달 수 있도록 조언해 준 건 덴드로였고, 이제 그녀는 하늘보다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할 일만 남았다. 그가 새로 받은 원고는 그녀가 날개를 펼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그 내용이 어딘가 익숙해서, 그는 읽는 내내 에이든을 흘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주인공이 소설가인 것부터 대충 눈치챘다. 아무리 봐도 이건 흑의 대공과 비비안 자신을 소재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이 대공이 아니라 실력 있는 음악가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악명이 높다는 점에서는 완벽하게 같았다. 그는 갖은 누명을 쓰고 핍박받아 집구석에서 술만 마시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다가 우연히 여자주인공을 만난다. 여자주인공 또한 글의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와중 남자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의 망가진 정신과 폐인 같은 모습을 보고 초반에는 그저 소설의 소재를 위해 접근하게 되지만, 그의 비밀을 깊이 알게 될수록 점점 더 사랑하게 되고, 영혼까지 끌어안고 싶어지게 된다. 그 결과 남자주인공은 그녀 덕분에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고 사랑을 알게 되어 완전히 구원받아 다시 태어난다. 연애도 성공하고, 음악가로서도 성공을 거두는 그런 이야기였다.
현실의 두 사람과 다른 듯 비슷한 것이 영향을 받은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사실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작가가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건 흔히 있는 얘기니까. 게다가 내용이 듣도 보도 못했다 싶을 정도로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까칠하고 난폭하지만 상처받은 남자를 치유하는 건 어디든 있을 법한 소재였기 때문에 눈치 빠른 덴드로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리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흑의 대공이 이렇게 미화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비비안.’
덴드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에이든은 악당이었다. 사연 있는 악당 같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완성된 악. 어릴 때부터 꾸준히 악명을 쌓아 온, 성악설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는 남자!
‘뭐 그건 둘째치고…….’
문제는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부분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세세했다는 것이다. 전작부터 그런 낌새를 느끼긴 했지만, 이번 건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마치 비비안과 에이든의 정사를 훔쳐보는 것 같은 민망한 기분에 사로잡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화제성은 보장되겠군.
“이것 참, 캐릭터가 흔한 듯하면서도 독특한데 남자주인공이 존대와 반말을 섞어 쓰는 부분이 특히 여심을 자극하네요. 정력도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참 대단…….”
거기까지 중얼거렸던 덴드로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왠지 남자주인공을 칭찬해도 눈앞에 있는 사내를 칭찬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공 전하께서 실제로 이러십니까?’ 하는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애써 삼켜 내었다.
에이든은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다 읽었습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네요. 몇 문장만 좀 손보고 이대로 출간하죠.”
하지만 제목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 달라고 해야지.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니 미친 것 아닌가. 이건 그녀의 신간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기겁하고 피해 갈 끔찍한 타이틀이었다.
‘왜 작가님의 작명 센스는 날이 갈수록 나아지긴커녕 심해지는 것일까.’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이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입매를 굳혔다. 사무실에는 비비안 대신 그녀를 대신해 원고를 전달하러 온 에이든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있었다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했겠지만, 없으니 덴드로는 뻘쭘함에 뒷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런데 우리 비비안은 무슨 일로…….”
“우리?”
“……죄송합니다. 이건 입에 붙어서 저도 모르게.”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도발하기 위해 ‘우리’를 난발했던 저번과 다르게 이번은 진짜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닌 지라 ‘우리 애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하고 걱정스럽게 묻는 부모처럼 굴어 버리고 만 것이다.
덴드로가 제 입을 탁 때리며 사과하자, 에이든은 관대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런, 평생 입이 붙어 있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는 게 좋아.”
“허억.”
표정과는 달리 전혀 관대하지 못한 말이었으므로 덴드로는 알아서 몸을 사려야만 했다.
“페르디 작가님은 무슨 일로 못 오시는 겁니까?”
“일어나질 못하더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원고를 전해 줘야 한다길래.”
“어디 아픈 겁니까?”
“아침까지는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지.”
“음, 그, 그렇군요.”
의미심장한 발언에 덴드로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관록이 관록인지라 단박에 알아듣고 말았다.
‘미친, 설마 소설이 사실이었어?’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과장일 것이다. 그 소설이 현실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괴물 아닌가. 짐승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덴드로.”
“허억!”
에이든이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덴드로는 기겁하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답했다.
“예, 예?!”
말인지 비명인지 모를 얼빠진 답이었다. 그는 그 흑의 대공이 자신의 이름을 육성으로 담았다는 사실에 심장이 입 밖에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물론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긴 하지만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차라리 ‘야’, ‘너’가 나을 정도였다.
“그대가 비비안에게 본인이 제국 최고로 절륜하다 떠들고 다녔다는데.”
“그, 그건.”
“헛소문은 그만 퍼트렸으면 좋겠군.”
“…….”
덴드로는 억울해서 조금 울컥하고 말았다. 밤부터 아침까지 해대는 괴물을 무슨 수로 이겨!
“그대가 절륜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비비안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아서 말이지. 광폭의 기사 로베르트 경의 물건이 제국에서 가장 크다는 소리를 지껄인 것도 그대인가? 아주 별별 불쾌한 소리가 다 나오던데.”
“제가 그랬나요? 그때 술에 취하기라도 했나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하하!”
“둘이 같이 술도 마셨나?”
“그, 그럴 리가요! 그만큼 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뱉은 말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그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웃음으로 때우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오늘도 덴드로의 임기응변은 빛을 발했고, 에이든은 잠시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봐준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필사적으로 허둥대는 꼴이 꽤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참 여러모로 신경에 거슬렸지만, 비비안과 만나기도 전의 일로 트집 잡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하지만 그는 살벌하게 웃으며 협박을 날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불알친구라는 명목으로, 혹시나 이 불쌍한 친구가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비비안이 없으면 이 출판사, 망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보는데.”
“에이,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후원금 잘 받아먹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원래 그렇게 의심이 없나?”
“……예? 아니, 잠깐. 설마.”
“난 원래 책을 좋아해. 언젠가 비비안을 위한 선물로 출판사를 만들어 줄 생각도 있어. 힘들여서 여기까지 키웠을 텐데 하루아침에 타인의 손에 넘어가는 꼴은 보기 싫을 거야. 그렇지?”
흑의 대공의 서슬 퍼런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한 덴드로는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열한 수작 같은 걸 부리지 않아도 원한다면 출판사 하나쯤은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망하게 할 수 있는 게 대공이었다. 덴드로는 알 리가 없겠지만, 심지어 대공은 암흑가의 주인이기까지 했다. 지금의 협박은 부드럽고 상냥한 편에 속한 것이다.
물론 협박을 하는 당사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비비안이 슬퍼하며 자신을 원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사실까지 당당하게 고백한 뒤인데 그녀의 미움을 사고 경계심을 강화할 만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착한 척만 해도 모자랄 마당에.
하지만 중요한 건 덴드로는 그 사실을 몰랐고, 또 협박이 아주 잘 먹혔다는 거다. 에이든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앞으로도 비비안을 잘 부탁하지.”
“네. 맡겨 주십시오.”
“누가 맡긴다고 했나?”
“전하…….”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요. 또 대답 한 번 잘못했다고 살벌한 눈빛을 하는 에이든 때문에 덴드로는 한 10년은 늙는 기분이었다.
다 됐고, 그냥 날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 * *
“이상해.”
율리안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툭 하고 내뱉었다. 그의 집게손가락은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든은 그의 옆에 놓인 찻잔이 정신 사나운 손가락과 같이 덜거덕거리는 것을 응시하다가 황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덮으며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전부 말입니다.”
그러자 율리안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제가 운이 지나치게 좋은 줄 알았습니다. 뭘 해도 일이 잘 풀리니까요.”
“폐하께서 운이 좋으시긴 하죠.”
“사실 그동안 고민이라고 해 봐야 꼬장꼬장한 원로 귀족들이 황후를 들이라고 시끄럽게 구는 것과 형님께서 영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의 문제들이었고.”
“그렇습니까.”
에이든이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찻잔을 들어 올리자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걸 지나쳐 이 정도면 신의 가호를 받는 수준이란 말입니다.”
“폐하가 아니십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신의 아들이 가호를 받는 게 뭐 그리 이상하다고.”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도 딱히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 말에 에이든은 눈썹을 까딱이며 되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카르델의 일로 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스스로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만큼 율리안은 능력이 뛰어난 성군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치게 운이 좋을 뿐이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어질다는 평을 들을 때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주변에서 치켜세우고 세뇌한다고 한들 아닌 건 아니었다.
‘전지전능한 신의 가호라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누가 내 뒤를 봐주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율리안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인생이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할 정도였다.
“그 이야긴 나중에 하죠. 답답해도 뭐 알 길이 없으니. 제게 불리한 일도 아니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브론 공작이 카르델을 순순히 포기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여성 편력이 대단한 이라 들었습니다.”
아까부터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에이든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뭐 그런 걸 신경 쓰느냐는 듯 차향만 음미하고 있으니 고민을 상담하고자 했던 율리안은 답답할 지경이었다.
“브론 공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긴 하죠.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순순히 물러설 작자가 아니니까 하는 말입니다. 카르델의 마음이 약한 점을 이용해서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모를까.”
율리안은 마치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것 또한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카르델은 브론 공작을 더 먼저 만났고, 그를 좋아한 세월이 더 길었다.
만약 공작 쪽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포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매달린다면 황제는 그와 둘 중 하나가 죽어 나갈 때까지 피 터지게 싸웠을 것이다.
그는 브론 공작의 반들반들한 상판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카르델을 공작의 품으로 돌려보낼 일은 없을 거라고, 접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 엄포를 놓으니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라더군요.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증인 앞에서 서약까지 맺었습니다.”
“잘됐군요.”
“아니, 이상하잖습니까. 전 공작을 적으로 돌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더 이용가치가 높은 건수라도 물게 된 것인지…….”
그 탐욕스러운 인사가 황제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은 여자를 쉬이 보내 줬을까. 오히려 그녀를 이용하는 쪽이 버리는 것보다 이용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진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게다가 요즘 이상한 소문까지 돌더군요.”
“이상한 소문?”
“그러니까 이건 극비 사항인데…….”
“어머, 폐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명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율리안은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카르델 때문에 본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까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상냥하고 애정이 가득 담긴 어투로 황제를 불렀고, 그는 들리자마자 그쪽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훈련받은 개와 같은 모습이었다. 에이든은 조금 흐뭇한 기분으로 그 둘을 응시했다.
이걸로 더 이상 저 둘이 비비안을 귀찮게 구는 일은 없겠지, 하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다.
“여긴 어쩐 일이지?”
“꽃이 예쁘게 피어서 정원이라도 산책할까 하다가 이런 곳에서 폐하를 뵙네요.”
카르델은 예전의 기가 죽었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행복해 보였다. 그동안 율리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때 카르델의 시선이 검은색 일색인 사내에게 닿았다.
“아, 대공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의 대공과 마주하면 대개 저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카르델은 이내 에이든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형님이자 비비안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서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대공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사르르 녹여 버리는 카르델의 꽃 같은 웃음에도 그는 찬바람 쌩쌩 날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며 회답했다.
예의를 밥 말아 먹은 태도였지만 여기서 그런 것을 따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둘만의 세계에 빠져 이쪽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따 뵐게요, 폐하.”
수줍게 얼굴을 붉힌 금발의 여인은 황제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정원을 벗어났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분홍빛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하늘거렸다.
율리안은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걷는 카르델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응시하다가 그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원래도 총명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배는 더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하아.”
율리안은 낮은 숨을 토해 내며 괜히 제 옆에 피어난 장미의 꽃잎을 하나씩 뜯었다. 그리고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대더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황홀하게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
대체 무슨 의미로 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으로 현재 봄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외치는 모습이었다. 사실 본인도 스스로 뭔 짓을 하는 건지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해도 백치 같은 꼴을 하고 다니는 건 곤란했다.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겉보기에는 완벽한 황제 같아야지. 황제가 사랑놀음에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돌면 큰일이지 않은가.
“폐하.”
짐짓 엄한 목소리에 율리안은 그제야 정신을 되찾았다.
“크흠,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요.”
“알고 계시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
그렇게 단박에 답할 정도로 꼴불견이었던 건가.
“잠깐 차 한잔 하고자 들렸던 것이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냥 가 버리고 싶을 정도로 꼴불견이었던 것인가!
율리안은 존경하는 형님께 못 볼 꼴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황제는 실없이 풀어진 입매를 애써 다잡으며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율리안은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연인 때문에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다시 화제에 올렸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 들어 보시죠. 브론 공작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은 아주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있는 것이…….”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에이든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형님!”
그는 흘낏 뒤를 돌아보더니 카르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손짓했다. 마치 얼른 뒤따라 가 보라는 듯이 말이다.
아직 물러가라는 답도 안 했는데 먼저 가 버리다니. 그래도 명색의 황제인 율리안은 투덜거렸지만,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비비안 덕분인 건지, 대공이 예전처럼 여기저기를 방랑하거나 영지로 돌아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만사가 귀찮은 듯 보였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은 하고 있으니 다행이지 않겠는가.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황제는 에이든이 방구석 폐인에서 벗어났다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율리안은 형님의 집착이 책에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명복을 빌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이든이 한 가지에 몰두하면 미친 듯이 그것에만 빠져 산다는 것을 율리안도 알고, 대공 저 사용인들도 알았고, 또 암흑가 사람들이나 킬릭스도 알았다.
황제는 잠시 몸도 영혼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듯 보였던 비비안과 집착과 소유욕이 일반인을 월등히 뛰어넘는 에이든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로 고생 좀 하겠군.
율리안은 에이든의 말대로 카르델의 뒤를 쫓아 달렸다.
갑자기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보좌관만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폐하! 폐하아!!”
안 그래도 서류만 들여다보느라 새하얬던 보좌관의 피부가 이젠 거의 귀신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 다급한 일이 있구나 싶었다.
율리안은 쯧 혀를 차며 카르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방향을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방금 봤는데도 눈앞에 없으면 영 불안했다.
“폐…… 허억……!”
“쯧쯧, 그거 뛰고 헐떡이는 건가? 체력 좀 기르라고 진작 말했거늘. 뭔데 이리 소란이냐.”
한참 숨을 고르던 보좌관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반역의 꼬리를 잡았어요!”
“……뭐라고?”
“아니 꼬리를 잡았다기보다는 제 발로 걸어들어 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율리안이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모반의 냄새를 맡기는 했지만, 아직 심증의 단계였을 뿐이었다. 제대로 조사하기도 전에 반역의 꼬리를 잡았다는 소리도 놀라운데 제 발로 걸어들어 왔다니, 브론 공작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보좌관이 빠르게 자초지종을 읊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황제의 얼굴은 점점 더 얼빠진 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사정을 다 듣고 난 율리안은 정말 심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짐은 정말 신의 가호라도 받고 있는 건가?”
* * *
브론 공작과 그에 가담한 귀족들의 모반 혐의가 입증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가 마약 사업에 손을 대 수많은 자본금을 끌어모으고, 반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병을 키우고 무기를 사들인 것이 발각된 것이다.
진실은 화살처럼 쏜살같이 밝혀졌다.
발각된 경위를 들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역에 가담한 귀족 중 하나가 마약에 중독되어 시뻘건 눈을 하고서 황궁 행정실 본부에 출입한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품에 여분의 마약을 가지고 있었다.
“레슬리 메르텐?”
율리안은 눈썹을 까딱이며 되물었다.
레슬리. 메르텐 백작의 첫째 아들이자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마약을 주입하고 출근했다던 그 정신 나간 귀족의 이름이 상당이 귀에 익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가문의 이름이.
‘비비안의 가문이군.’
비비안은 메르텐이라는 이름을 버리기 위해서 사용인 종신 계약을 맺고 황궁에 들어왔다. 율리안은 우연이라기엔 참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반역죄는 무조건 연좌제가 적용되니까.
만약 비비안이 가문을 버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같이 반역죄로 묶여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율리안은 비비안이 아주 운 좋게 죽음을 피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녀가 억울하게 처형당해 죽어 버리면 카르델이 슬퍼했을 테니까.
‘아니, 그 전에 내가 형님 손에 죽겠지만.’
그는 갑자기 등골을 오싹하게 내달리는 한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비비안의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감식관에 따르면 메르텐 영식은 약을 이것저것 섞어 과다하게 복용했으며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합니다. 대체 왜 그 상태로 검열이 철저한 본궁으로 향한 것인지, 애초에 그 상태로 어떻게 황궁까지 온 건지 아무도 모른다더군요.”
율리안이 생각에 잠긴 사이, 보좌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세한 정황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이게 과연 현실인가 싶었다.
제국에서 마약은 불법이었다. 물론 귀족들이 암암리에 하는 것을 단속할 방법은 없지만 대놓고 황궁에 반입하는 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는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마약의 출처를 추적하는 와중에 브론 공작의 반역까지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다.
심증이 아무리 깊어도 분명 브론 공작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작은 절대 꼬리를 밟힐 여지 같은 건 만들어 두지 않는, 뱀과 같은 작자였으니까.
만약 마약 사업 건으로 문제가 생겼을 시, 반역 사실이 들통나기 전에 몰래 발을 뺄 수 있도록 조처해 뒀겠지. 뻔했다. 마약은 어디까지나 단기간에 막대한 자본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브론 공작도 레슬리 메르텐이 섞어 마신 약이 자백제처럼 작용하리란 걸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슬리는 약에 취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고했고 정계에서 한 가닥 하는 귀족들을 끌어들였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반역에 가담한 귀족들은 기겁하며 공작을 도마 위에 올려놨고 그의 계획은 불붙은 기름처럼 밝혀졌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 계획하고 함정을 파 놓은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제점이라면, 누가 이런 일을 자처해서 도운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신께서 도우셨군요. 역시 폐하께서는 그분의 아들이십니다.”
가문 대대로 황제를 보좌해 온 보좌관은 유독 충심이 깊었다. 그는 이번 일에 진심으로 감명했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어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경애를 표했다.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율리안은 떨떠름할 따름이었다. 공들여 씨 뿌리는 사람은 분명 어딘가 따로 있는데 거둬들이는 건 항상 자신이었다. 왠지 전부터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닌 것 같다.
“마약의 출처는 어떻게, 밝혀냈나?”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또?”
율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되물으며 이마를 짚었다. 마법을 사용해도 곧바로 탐지되는 세상인데 그렇게 신출귀몰하게 마약을 유통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암흑가의 주인.
율리안은 주인이란 이명을 달고 이 나라의 주인을 농락하는 악의 우두머리를 떠올리고는 이를 갈았다.
“계속 추적해.”
아직은 모든 게 베일로 싸여 있었지만 언젠가 희미하게 남은 흔적이라도 찾아내 꼭 소탕해 내고 말 것이다.
* * *
“왔어요?”
비비안은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 오후쯤이 되어서야 찾아온 에이든을 보고 볼을 부풀렸다.
‘덴드로에게 가서 원고만 전해 달라고 했더니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람.’
그녀는 그의 시선을 일부러 무시하며 누가 보면 원고를 직접 만들어서 온 줄 알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기다렸습니까?”
“전혀요. 그냥 누워만 있으려니 심심해서 그랬지.”
사실 기다릴 것도 없었다. 새벽까지 시달리느라 한두 시간 전에 겨우겨우 눈을 떴으니까. 하지만 왠지 곁에 그가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 드는 탓에 다시 잠드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람의 온기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습관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아차 했는지 고개를 팩 돌렸다.
에이든은 그녀를 달래듯이 볼을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잠시 확인할 일이 있어서 갔다 왔습니다.”
“어…… 그 암흑의 일인가요?”
“암흑의 일은 또 뭡니까.”
그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최근에는 비비안이 하는 말이라면 별것도 아닌 말로 꽃 같은 미소를 뿌려 대는 것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싶었다.
실없는 사람이 다 됐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다가가기 힘든 위압감과 살벌한 분위기, 악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때론 저렇게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는 얼굴을 했다. 그게 너무 황홀할 정도로 잘생겨서 비비안은 가끔 그를 넋을 놓은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에이든 본인은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자각이 없는 듯했지만.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평소에 하는 일이었죠.”
“폐하의 뒤를 봐주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뭐 됐어요. 저도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싫으니까요. 카르델 볼 면목도 없고.”
그쪽 사정이라면 갑자기 일이 생겨도 할 말이 없지. 일하느라 늦었다는데 왜 늦었냐고 투정 부릴 정도로 경우 없지는 않았다.
비비안은 사과하는 그에게 그만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치 안아 달라는 듯한 움직임에 에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강하게 마주 안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요.”
안 그렇게 생겨서 에이든은 여전히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보고 싶었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말들이 어려웠다.
‘그래도 정식으로 연인이 된 후로는 가끔 미친 척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비비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에이든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니 아예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었다.
“읍!”
동시에 달큼한 숨결이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마치 깃털이 닿은 것 같은 간질간질한 감촉에 비비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언제 상냥하게 굴었느냐는 듯 난폭한 혀가 입안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그가 혀를 감고 강하게 흡입하기 시작하자 예민해진 몸에 다시 오싹한 감각이 스멀스멀 퍼져갔다.
원래도 욕망을 잘 참는 편이 아니었지만, 최근 에이든은 그 정도가 심했는데 원인은 비비안 때문이었다. 마감이 다가오자 그녀가 폐인 같은 몰골로 서재에 처박혀 글만 써 댔기 때문이었다.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오늘 하루는 전부 제게 반납하세요.”
비비안의 마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인내와 자제심이 완전히 사라진 에이든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쪽쪽 거린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던 것 같은데.
퉁퉁 부은 입술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이러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비비안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마치 잡아먹을 듯이 집요하고 질척거리는 그와의 키스가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좀 힘들게 굴더라도 그와 교감하는 일은 늘 새롭고 소중했다. 키스를 나눌수록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 지을수록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요즘은 하루하루 행복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혀가 입천장을 스치자 그녀는 팔에 힘을 더욱 바짝 쥐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목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흐읏, 에이든 잠깐…….”
이럴 줄 알았다. 에이든의 키스는 대체로 담백함보다는 노골적으로 음란했기 때문에 키스가 섹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비비안은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복하사란 말을 아시나요. 이러다가 정말 죽거나 끙끙 앓느라고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민다고 밀릴 사람이었으면 애초부터 이런 고생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그녀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랫배와 허리를 움켜쥐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달콤한 신음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에이든은 혹시 자신이 안 좋은 곳을 건드리기라도 한 건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윽, 진짜 아파요…….”
“그, 그렇게 아파? 의원을 부를까?”
당황한다. 비비안은 놀라서 허둥거리는 그를 보고 삐죽거리는 입술을 다잡았다. 여기서 귀엽다고 웃으면 망하는 거다.
그녀는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표정을 관리한 뒤, 아파 죽겠다는 얼굴을 하며 서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과장이긴 했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엄살은 아니었다.
“의원은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비비안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아랫배를 꼭 붙잡은 채 울상을 지었다.
의원이라니. 킬릭스를 이 자리에 부른다면 그는 뱁새눈을 하며 ‘더러운 커플’ 하고 중얼거릴 게 뻔했다.
어차피 이 통증은 의원이 온다고 해서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관이나 마법사를 부른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성관계를 격하게 한 후유증 때문에 그들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실 에이든은 아파하는 비비안을 위해 정말로 신관이나 마법사를 부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런 고급 인력에게 민망한 부탁을 어떻게 하고, 또 그들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게다가 치료를 받았다간 또 같은 일로 끙끙 앓게 되는 일이 반복될 게 뻔했다.
차라리 더디게 낫더라도 좀 쉬는 게 낫지.
“네, 그러니까 오늘은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 얘기나 해요.”
그 말에 에이든이 걱정하던 것을 멈추고 표정을 평소대로 되돌렸다.
“흐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얘기?”
“음…… 일상적인.”
“그런 건 매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매일 하고 있거든요? 비비안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애써 삼켜 냈다.
“일상적인, 음. 소설 얘기?”
“그건 당신에게만 일상인 겁니다.”
“그 반지 아직도 하고 있네요. 제가 새 걸로 사 드린다니까.”
그녀는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보존마법이 걸린 꽃은 마치 새것처럼 싱싱했고, 이리저리 비틀어도 절대 상하거나 모양이 망가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민망했다. 꽃반지를 끼고 다니는 대공이라니.
그러자 에이든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비비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제게 맡기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로맨틱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부디 처음에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침대에서 죽여 달라는 당돌한 말까지. 전 비비안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입니다만.”
“아니 도가 지나치잖아요! 그렇다고 진짜 죽을 때까지 하면 어떡해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습니다.”
비비안이 흥분에서 외치자, 에이든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본인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듯 뻔뻔했기에 그녀는 울컥하고 말았다. 하지만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왠지 이채를 띠는 새파란 눈과 시선을 맞추니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엄살이군.”
엄살인가요? 도 아니라 확신이었다.
사실 그동안 수없이 비비안과 몸을 섞어 본 에이든은 그녀의 성감대는 물론 체력과 정력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히 무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끙끙 앓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아, 아픈 건 사실이거든요?!”
“물론 저도 압니다. 하지만 소설 때문에 한동안 저를 버려 둬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결과적으로 제 탓이니 비비안에게 미안해서 직접 치료하려고 마법 물품을 구해 왔는데.”
“어? 정말요?”
비비안이 눈을 반짝였다. 치료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인가?
“이건 기대할 수밖에 없네요. 보여 주세요!”
피임 마법이 걸린 반지 이후로 처음 보는 아티펙트라 너무 궁금했다. 게다가 치료 마법이라니. 분명 저택 한 채는 호가하는 파괴적인 가격일 게 뻔했다.
지금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신관이나 마법사가 없어도 곧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치료 마법이 걸린 목걸이와 크림과 젤이 있기에 젤을 가져왔습니다.”
대체 왜죠?
비비안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묻지 않아도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젤……?”
“크림은 끈적거릴 것 같아서.”
“…….”
아니 바로 그 앞에 목걸이라는 선택지가 있잖아.
“그럼 지금 바로 치료해 드리죠.”
에이든이 품속에서 유리통을 꺼내더니 뽁 하고 마개를 뽑았다. 그의 안 주머니에서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았다. 비비안은 제 팔자를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치료 목걸이든 크림이든 젤이든 결국 결론은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럼 치료만 해요.”
그녀는 얌전히 누워 의미 없는 소리를 했다.
“어차피 제 말은 듣지 않을 테지만 말이라도 해 둘게요.”
그러자 에이든이 그녀의 입술에 새처럼 쪽쪽 입을 맞추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무릎을 세워 다리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아 젤을 손가락에 쏟아 냈다. 잠시 점도를 확인하듯 손가락을 문지르던 에이든이 천천히 그녀의 음부에 젤을 바르기 시작했다.
차갑고 질척거리는 촉감에 비비안이 움찔 놀랐다. 밤새 시달리던 그곳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치료 마법이 걸린 젤이 녹아들기도 전에 부기가 빠지고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은밀한 수풀을 벌리고 그 속에 젤을 바른 손가락을 침입시켰다. 전체적으로 펴 바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비비안이 내벽을 바짝 조이며 신음을 흘리자 집요하게 그곳만 건드렸다. 그녀는 침대보를 움켜쥐며 파르르 떨었다.
“흐응, 아……! 꾹꾹 누르지 마요!”
“물기가 있어야 치료가 수월해지지.”
“그런 치료 처음 듣는…… 으응!”
역시나 반박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반년 동안 꽤 자란 머리카락이 사르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단정한 이목구비가 노골적인 흥분에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빼는 것도 웃기지. 비비안은 이미 완전히 넘어갔으면서 마지못해 넘어가 준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든이 밝히는 만큼 당연히 비비안도 밝혔다. 뭐, 여러 의미로 천생연분이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든 에이든은 흐려진 자색 눈동자에서 무언의 허락을 읽었다.
“흠, 이거면 깊은 곳까지 치료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바지를 내려 이미 한계까지 커져 껄떡거리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 위에 젤을 부었다. 안 그래도 흉물스러운 것이 질척거리는 젤까지 더해지자 여러 의미로 위험해 보였다.
그는 순식간에 준비를 끝마치고 그녀의 위에 올라타 새하얀 어깨에 쪽쪽 입을 맞췄다. 비비안은 귀두 끝이 꽃잎 사이를 파고들려고 하자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직 충분히 풀어지지도 않았는데 치료 마법이 걸린 젤 때문인지 통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탄력 있게 쭉쭉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와 맺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비비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의 질 입구에 닿은 물건이 그가 밀어 넣는 대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쑥쑥 들어왔다. 원래도 속궁합이 찰떡같이 잘 맞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그게 지나칠 정도였다.
“하아응……! 자, 잠깐. 에이든 이, 학……!”
고작 밀어 넣었을 뿐인데 온몸이 뒤틀렸다.
그가 일부러 성감대를 꾹꾹 누르며 들어올 때마다 비비안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파들파들 떨어댔다. 감각이란 감각이 전부 그곳에 몰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연신 신음을 뱉으며 우는소리를 했다. 벌써 식은땀까지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건 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치료된 것 같습니까.”
“흐으으…….”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군요.”
“하앙!”
그가 여유 없는 표정으로 말하더니 허리를 쳐올렸다. 그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애액과 젤로 뒤섞인 내부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질을 가득 채운 젤 때문에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갈 땐 부드럽게 열리고, 빼낼 땐 바짝 조여 내벽까지 딸려올 것 같았다. 질척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비비안은 신음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얼굴을 가렸다.
“하아! 아앗! 흐으응! 아!”
에이든은 단호하게 그 손을 치워 내며 안절부절못하며 신음을 뱉어 내는 통통한 입술에 질척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혀를 쯉쯉 소리가 날 때까지 빨고 이로 깨물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추삽질은 멈출 줄을 몰라서, 그녀는 그의 입술에 억눌린 신음을 뱉어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신없는 움직임에 침대가 출렁이고 이미 한 번 간 시트가 다시 젖어 들었다.
폭풍우를 만난 듯 순식간에 차올라 넘실거리던 쾌감이 이내 흘러넘쳤다.
비비안은 머리가 하얗게 비워 가는 것을 느끼며 그를 꽉 끌어안은 채 내벽을 힘껏 조였다. 그녀의 음부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그의 물건을 오물거리며 물어댔고 에이든은 낮은 신음을 뱉으며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를 더 심하게 몰아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하아…… 비비안.”
그는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번쩍 들어 마주 안은 뒤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네?”
이미 한 번 절정을 느낀 비비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에는 흘러내리지 못한 물기가 한가득하였다. 에이든은 어쩐지 고생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져서, 체력을 보강할 수 있는 음식에 더욱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들었다면 원인을 생각하라고 쏘아붙였겠지만.
그는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등을 토닥거렸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자는 말이 생각났다.
“이번에 새로 쓴 원고, 행복한 결말이었잖습니까.”
“제 소설은 언제나 그렇죠.”
“저는 비비안에게 행복한 결말입니까?”
“왜 시작이 아니고 결말이죠?”
“처음도 마지막도 저일 테니까요.”
“나 참.”
비비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야…….”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답하려다가 에이든이 지금껏 보내 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불길함으로 낙인찍혀 어둠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불행밖에 없었던 삶에서 그게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자라 왔을 아이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한순간에 고아가 되어 거리로 내쳐졌던 그날의 슬픔.
“전 지금 제 삶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걸요.”
서로에게 추억조차 되지 못하는 괴로움이었고 불행이었지만, 하지만 분명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행복했다. 밑바닥에 떨어졌을 땐 사방이 깜깜했지만 영원은 아니었고, 그래도 살아갔고, 그래서 만날 수 있었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이었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저도 지금 누구보다 가장 행복합니다.”
행복한 결말이었다.
외전
비비안은 에이든에게 직접 한 가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늘, 메르텐 백작과 그의 식솔들의 처형일이 결정되었다고. 그들은 브론 공작과 함께 줄줄이 참수형으로 죽을 예정이었다.
비비안은 이제 그들은 생판 남이니 전혀 신경 쓸 것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착잡했다.
‘그러게 왜 반역에 가담해서…….’
동정하지는 않았다. 자업자득이었으니까. 그리고 비비안은 자신을 핍박한 사람까지 포용할 줄 아는 성녀가 아니었다.
다만 한때는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틀로 묶였던 자들이었으니까. 차마 ‘죽어도 싼 짓을 하긴 했지. 하하, 아주 잘 죽었다!’ 하고 통쾌해하면서 웃을 수는 없었다.
‘근데 내가 분명 사고 칠 줄 알았다.’
그녀의 숙부인 메르텐 백작은 사업 수완이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자였다. 하지만 권력욕과 야망이 끝도 없이 크다는 게 흠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배다른 형제의 그늘에 가려진 채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탓일까. 그의 욕심은 끝도 없었고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비비안마저 이용하려고 들었다.
문제는 그의 식솔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성정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문득 메르텐 저택의 다락방 창고에 갇혀 생활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메르텐 백작이 비비안에게 명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부르기 전까진 쥐 죽은 듯이 있을 것. 둘째, 가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백작 부인은 비비안을 보고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더니 이렇게 말했다.
“호, 제법 반반하군. 마치 요정 같구나.”
그녀는 ‘네 보라색 눈동자는 신비롭고 희귀성이 있지.’ 하고 덧붙여서 말했다. 비비안은 어렸지만, 그 말이 절대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네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 거다. 내가 널 쫓아내지 않는 유일한 이유니까.”
그것은 백작 부인의 명령이었다.
그 자리에서 비비안의 가치를 정해 버린 것이다. 원하지도 않던 아이를 억지로 떠맡게 되었으니, 위세 높은 귀족가에 시집이라도 보내 극심한 피해를 본 보상을 받으려고.
“네 부모가 죽었다고 왜 우리 가족이 널 떠맡아야 하는데?”
메르텐 가문의 장남 레슬리는 갑자기 저택에 눌러앉은 비비안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리고 온갖 모욕과 욕설, 폭력을 일삼았다.
사용인들조차 눈살을 찌푸리고, 보다 못한 백작 부인이 그를 말릴 정도였다.
“얼굴은 건들지 마라. 언젠가 비싸게 팔릴 텐데 흉이라도 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그에 반해 차녀인 헬리아는 레슬리보다 좀 더 교묘하고 영악한 방식을 사용했다. 백작 부인은 물론 사용인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한 은밀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비비안을 괴롭혔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창고로 유인해 며칠 동안 가둬 놓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비비안이 가문 밖을 벗어나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그녀가 열네 살이 되는 해에 일어났다.
“비비안.”
백작은 그날따라 비비안을 매질하라 명하지 않았고, 일을 시킨 게 아니라 예쁘게 치장시켰으며,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이분은 파우라 후작 각하시다. 앞으로 우리 메르텐 가문과 좋은 연을 맺게 되실 테지.”
그리고 어떤 배 나온 중년의 남성 앞에 그녀를 억지로 끌어다 놓았다. 어린 비비안은 파우라 후작이 끈적한 시선으로 자신을 훑어보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은 비릿하게 웃으며 비비안의 등을 떠밀었다.
파후라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비비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은근하게 겹치자,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비비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파우라 후작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는 시체를 보면 흥분하는 성벽으로 아주 유명했다.
그 시절 비비안은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앞으로 어떤 절망적인 미래가 펼쳐질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메르텐 백작은 파우라 후작에게 비비안을 팔아 치우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도망쳤지.’
스스로 가문을 버리고 나와 기꺼이 손가락에 순결 반지를 꼈다.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짧게 회상한 비비안은 잠시 ‘음…….’ 하고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 정도면 죽어도 싸다고 웃어도 되지 않나?
‘적어도 난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못된 친척들의 처형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비비안.”
누군가가 나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이든이 바짝 얼굴을 붙이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비비안은 그제야 에이든이 자신을 걱정하는지도 모른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가을 하늘을 닮은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괜찮은 것은 물론, 아무렇지도 않았다.
딱히 감정이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원망도 분노도 증오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비비안에게 있어서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는 데 시간 낭비를 했다.
“저랑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처형 얘기는 별로 흥미도 없고요.”
그녀는 그렇게 운을 떼며 에이든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따스해서 이대로 영원히 손안에 꼭 쥐고 싶었다.
“우리 결혼 언제 해요?”
비비안은 그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잔망스러운 시선에 그녀가 큰 충격을 받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던 에이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황제 폐하께서 부탁하신 대로…….”
그는 비비안의 볼을 어르듯 살살 쓰다듬은 뒤 말했다.
“폐하보다 먼저, 가장 성대하게 올릴 겁니다.”
분명 그렇게는 말 안 했을 것 같은데.
황제보다 먼저, 그리고 더 성대한 결혼식이라니. 비비안은 율리안이 억울해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 잠시 지긋이 에이든을 쳐다보다가, 이내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에이든이 참한 여인을 구해 오기 전까지 국혼을 미룰 거라고 말 하셨죠?”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굳이 참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조건을 붙이고, 연애인지 결혼인지 확실히 명시하지 않은 건 황제의 실책이었다. 발랑 까진 비비안은 참한 것과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 이제 카르델과 결혼하고 싶어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결혼은 좀 더 느긋하게 해야 될 것 같네요.”
제가 참해지려면 아마 50년쯤은 더 기다려야 할 테니까.
비비안은 그렇게 덧붙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에이든을 위아래로 훑으며 마치 진수성찬을 앞둔 것처럼 입맛을 다신 뒤 능숙하게 입술을 겹쳐 왔다.
에이든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그녀의 키스에 응하며 생각했다.
결혼, 영원히 못 할지도 모르겠는데.
* * *
“네게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주려 한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였다. 카르델과의 점심 약속을 끝마치고 잠시 황궁을 찾은 비비안은, 우연히 마주친 율리안의 은근한 한마디에 의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폐하의 저의가 궁금하네요.”
“저의라니…… 이게 점점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지.”
율리안은 투덜거렸으나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는지 다짜고짜 용건부터 던졌다.
“네 소설에 환장하는 괴짜 하나 있어. 널 만나게 해 주는 조건으로 받은 게 있으니 적당히 상대나 해 주다가 와.”
“아니, 뭐라고요?”
날 만나게 해 주는 조건이라니. 날 멋대로 거래 조건으로 내걸고 팔아넘겼단 말이야?
비비안은 황제의 뻔뻔함에 기가 질렸다. 그녀는 한때 종신 계약으로 인해 황궁에 소속된 소유물의 신세였으나, 현재는 언젠가 발렌타인 대공과 결혼식을 올릴 예비 신부이자 약혼자였다.
정확한 호칭을 사용하자면 황제 본인의 형수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가 황제이니 깍듯하게 대접해 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존중받을 수는 없는 거냔 말이다.
“페르디는 신비주의입니다. 제 정체는 비밀이거든요?”
“걱정할 거 없다. 입은 무거운 놈이니까.”
입이 가벼운 건 폐하이신 것 같아요. 비비안은 까칠하게 받아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동안 황제가 얼마나 타인의 입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배려심이 생긴 줄 알았더니, 전부 카르델 한정이었단 말인가.
‘두고 봐라, 내가 카르델에게 다 일러 주지.’
아, 설마 에이든과 비비안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카르델과 결혼하면 안 된다고 장난쳤었는데 그때 일로 아직 뚱해 있는 건가?
거, 세상 살다 보면 놀림당할 수도 있지 사람이 왜 이리 쪼잔하단 말인가.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다행히 마감이 끝난 직후였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비비안은 남는 시간을 때울 용도로 율리안이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마탑이었다.
* * *
“작가님, 작가님은 정말 최고예요. 제 인생의 유일무이한 축복,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내 뮤즈…….”
“저기, 일단 좀 진정하시고…….”
비비안은 진땀을 빼며 말했다. 남자는 주절거리던 것을 멈추더니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손수 따랐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극도로 긴장한 모양새였다. 누가 보면 황제에게 진상품이라도 바치는 줄 알겠다.
율리안의 ‘네 소설에 환장했다’라는 표현은 아주 정확했다. 남자는 여태까지 페르디의 정체를 밝힌 사람 중에서 가장 반응이 격했다. 언뜻 광기마저 엿보이는 것 같았다.
대마법사, 카실. 제국이 인정한 가장 마법 실력이 뛰어난 국보급 인재이며, 자신의 재능을 이런 식으로 낭비할 수 없다며 어느 날 돌연 성인용품을 개발하기 시작한 괴짜. 그는 여러 의미로 참 유명인사였다.
이런 거물이 자신의 팬일 줄은. 그것도 골수팬. 비비안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서로 형식적인 안부 인사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카실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는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작가님 소설에서 부족한 건 딱 한 가지입니다.”
“그, 그게 뭐죠?”
비비안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조롱하기 위한 지적이 아니라 진정한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로 긴장이 됐다.
“왜 도구를 사용하지 않죠?”
“……네?”
도구요? 그녀는 요지를 파악할 수 없어 멍하니 되물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 적응하고 큰 발전을 이룩한 건 전부 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할 줄 알아서였죠. 도구는 생존과 욕구의 필수품입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성인용품 말하는 거 맞지?’
저렇게 장황한 예시까지 들어 가며 열변을 토하는 이유가 성인용품을 권장하기 위해서라는 게 좀 그랬다. 비비안은 자신이 아무리 뻔뻔해도 이 사람보단 아닐 거라며 잠시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에 고개를 숙여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관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마땅히 그런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비비안에게 에이든은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절륜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도구 같은 건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윤활제 정도지만 그건 도구 축에도 못 드는 기본 준비물 아닌가.
에이든의 사랑을 듬뿍 받아 욕구 불만이 생길 틈조차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들으니 궁금하기는 했다.
“잘됐네요! 역시 작가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비비안이 흥미를 내비치자 카실은 화색을 띠며 그녀를 마법 연구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디디자, 상상도 못 할 세계가 펼쳐졌다. 그야말로 타락과 향락의 성지였다.
비비안은 목줄과 채찍을 슬쩍 만져 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이건 이렇게 묶는 겁니다. 남성용이죠.”
“방치용?”
“묶어 놓고 방치해도 좋고, 탈진할 때까지 괴롭혀도 좋고.”
“다 좋지만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취향이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 이 남자 나랑 꽤 잘 맞는데?
두 사람은 잠시 허공에서 시선을 맞부딪혔다. 어쩐지 체통 없이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카실이 내내 울부짖었던 운명이라는 걸 조금 느끼고 말았다. 영혼의 반쪽을 만난 기분이었다. 로맨틱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카실이었을 것 같았다. 외동이었음에도, 그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쌍둥이라 하면 믿어 버릴 것 같았다.
“작가님, 이것을 보시죠.”
카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털 뭉텅이를 내밀었다. 비비안은 얼떨결에 그가 주는 것을 받아들고 그 물건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털이 아니라 꼬리였다. 진짜 짐승의 꼬리를 떼어온 것 같은 부드러운 꼬리 모형. 모형의 끝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방울 모양의 유리가 달려 있었다. 생김새가 마치 둔탁한 화살촉 같기도 했다.
“선물입니다.”
“이게 뭔가요?”
하지만 의아한 것도 잠시, 비비안은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물건의 용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승의 꼬리는 엉덩이에 달려 있지…….
“확실히 좀 용기가 필요하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가 챙겨 주는 용품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천하의 페르디가 뭘 부끄러워하십니까? 사람들은 성적 쾌락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요. 성인인데 뭐 어떻답니까. 범죄인 것도 아닌데 다양하게 즐길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다 섹스를 대단하고 신성한 의식인 것처럼 묘사해 놓은 신전 놈들의 영향…….”
비비안은 카실의 일장 연설을 한 귀로 흘리며 그가 소개해 주었던 용품들을 한차례 훑었다.
‘써 볼까?’
곧 에이든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비비안은 거의 매일같이 마탑을 찾았다. 한 가지에 완전히 꽂히면 주변에 신경을 덜 쓰고 몰두하는 버릇이 도진 것이다. 그녀의 최근 관심사는 카실의 흥미로운 성적 지식과 그가 개발한 새로운 도구였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역시 세상은 넓고 소재는 많았다.
그녀는 카실을 만날 때마다 그가 사용하라고 준 도구를 야금야금 챙겨 모아 두었다.
그리고 사용하기로 정한 날은 에이든의 생일, 오늘이었다.
“이게 정말 들어가긴 하나.”
비비안은 팔짱을 낀 채 착잡한 표정으로 여우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크기 자체는 그렇게 큰 게 아니었지만 애널에 넣어야 한다는 게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그곳은 배출하는 곳이지 삽입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깜짝 이벤트의 계획은 이랬다.
에이든이 밤 산책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 여우 꼬리를 무사히 달고, 속이 비치는 야한 속옷을 걸친 후에 그 위에 항상 입던 평범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다음은 뭐…… 에이든이 알아서 일사천리로 진행 시킬 것이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든 혼자서 넣어야 한다는 건데.’
찢어지면 어쩌지? 비비안은 젤을 최대한 꾹 짜서 유리 플러그 위에 치덕치덕 발랐다. 일단 안을 풀어 줘야 한다는데 혼자서 애널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끙끙거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막막했다.
남자든 여자든 기분이 죽여 줄 거라는 카실의 설탕 발림에 홀랑 넘어가긴 했는데. 막상 하려고 보니 의심스러웠다. 생각만큼 별로 좋지 않으면 대마법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좋아…… 한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침실에 문고리가 돌아가면서 벌컥 열렸다.
망할 타이밍! 비비안은 비명을 삼키며 치맛자락을 필사적으로 내리고 들고 있던 애널 플러그를 등 뒤로 숨겼다. 전광석화 같은 빠르기였다.
“오, 오, 오셨어요?”
하지만 태연하게 반응하지는 못했다. 누가 들어도 당혹과 ‘왜 하필 지금 오셨어요?’ 하는 불만이 뒤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비비안은 낭패 어린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에이든은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느른한 동작이었으나 집요한 시선은 그녀에게 박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대충 물건을 수습하려고 했던 비비안은 더욱 곤란해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원래 계획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유혹하는 요망한 여우가 될 예정이었는데 도중에 들켜 버리다니. 지금 등 뒤에 애널 플러그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그건 여우가 아니라 단순히 변태가 되는 것 아닌가.
“최근 외출이 잦아지셨더군요.”
“아…… 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질린 상태라 반응이 늦고 말았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에이든이 물었다. 비비안 제외하고는 세상만사 아무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의 이변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챈 것이다. 아니, 싸늘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료조사요?”
새로운 소설의 마감을 마친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비비안은 아직 신작이 출간되지도 않았는데, 신작의 신작을 위한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그동안 나름대로 참고 있었다. 비비안은 최근 들어 잦아진 마감 때문에 이리저리 신경 쓸 일이 많아 예민해져 있었으니까. 전처럼 그녀의 안에 한계까지 파묻으며 엉망진창으로 울리고 싶었지만, 욕망은 욕망에 그쳤다.
남은 인생을 평생 함께하게 될 사람을 최대한 배려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남은 일이 어느 정도 수습된 지금 시점에서 갑자기 외출이 잦아지더니, 그 이유가 자료조사 때문이라니.
관능 소설 작가의 자료조사라고 해 봐야…… 불쾌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에이든은 삽시간에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더니 비비안의 어깨 너머로 손을 짚었다.
어? 하는 사이에 그녀는 뒤에 여우 꼬리를 숨긴 채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위에서는 에이든이 그녀를 덮치듯이 누르고 있었다.
“비비안의 교육은 제 전담입니다. 지도교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동하다니 불량한 학생이군요.”
그는 눈매를 반쯤 접으며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귓가에 달라붙은 야한 숨소리에 심장이 저릿해져 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사이 능숙하게 혀가 그녀의 입술을 침범했다. 부드럽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질척한 키스였다. 뜨거운 덩어리가 점막 구석구석을 훑고 누를 때마다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때, 에이든의 손이 입맞춤에 넋을 놓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덧그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팔을 타고 내려가더니 뒷짐 지고 있는 손에 들린 것을 뺏어 갔다.
“앗! 잠깐!”
비비안이 뒤늦게 소리쳤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황망하게 굳었다. 에이든도 설마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게 이런 물건일 줄 짐작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흐음…… 이게 뭔가요.”
“여, 여우 목도리?”
“여우 목도리에 젤은 왜 이렇게 듬뿍 바르셨습니까.”
“…….”
알면서 굳이 묻고 있네.
비비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허둥대다 말고 눈 사이를 가늘게 좁혔다. 아무래도 여우 꼬리는 자신보다 에이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마탑의 카실과 안면이 생겼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특이한 물건을 받아 오셨군요.”
“에이든이 오늘 생일이니까. 축하해 주려고 그런 거였다고요.”
깜짝 이벤트는 다 물 건너갔지만요. 비비안은 덧붙여 말하며 몸을 늘어트렸다. 일주일 전부터 비장하게 계획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비안은 절 아직 잘 모르시는군요.”
그런데 에이든은 그 말을 듣고 위에서 내려오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자리 잡고 그녀의 발을 들어 올렸다. 쪽 하고 발등 위에 가벼이 입을 맞춘 그는 아킬레스건을 잘근 씹으며 사정의 여운을 즐기는 듯한 나긋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전 차려진 밥상보다 직접 사냥해 먹는 걸 좋아합니다.”
마치, 지금 생포된 비비안을 요리해 먹겠다는 말로 들렸다.
“왜 또 이렇게 되는 걸까요.”
“뭘 기대하신 겁니까?”
“제 유혹에 이성을 잃고 흐트러진 에이든이요.”
항상 색기를 흘리며 유혹하는 건 에이든이었고, 그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는 건 비비안이었다. 이번에는 정신 못 차리는 그를 손에 쥐고 휘둘러 보고 싶었는데 말아먹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에이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비비안을 만난 순간부터 전 단 한순간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미 취해 있는 걸 여기서 어떻게 더 취하라는 말인가. 그는 눈을 깜빡였다. 달아오른 눈가 위로 지독한 갈증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지금도 비비안만 보면 개처럼 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딱딱하게 솟구친 물건을 그녀의 허벅지에 비비며 말했다. 천박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덤덤했다. 이미 훨씬 전에 체념하고 인정했던 사실이기에.
에이든, 그의 삶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비비안의 몫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에이든은 비비안이 침대 위에 던져 놓았던 젤을 손에 가득 짜냈다. 그리고 그녀의 둔부를 활짝 벌리고 굳게 닫혀 있는 구멍에 조금씩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비비안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물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가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내부를 늘리고 있었으니까. 질척이는 소리가 늘어날수록 기이한 간지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썩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야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질과 클리토리스를 애무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됐다.
아니, 오히려 불쾌한 것에 가까웠다.
‘설마 카실이 날 속인 건가?’
자지러지게 좋을 거라고 멋대로 상상한 비비안이 배신감을 느낄 때쯤이었다. 마침내 플러그가 완전히 내부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좋은 건지도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야해.”
이게 뭐지? 혼란스러워하던 비비안은 에이든의 한마디에 시선을 들었다. 짙어진 눈동자는 심해처럼 깊어 보인다. 작정하고 홀리려는 듯, 말끝을 늘이며 달싹이는 붉은 입술을 보자 노랫소리로 사람을 홀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던 세이렌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 사이에 파묻었다.
“아……!”
개처럼 발정했다는 에이든의 발언은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여유를 부리지 않고 도톰하게 솟아오른 작고 붉은 과실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젤로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 두 개를 단박에 쑤셔 넣었다. 빠르게 넣었다가 빼길 반복하며 둥글게 굽혀서 윗벽을 강하게 문질렀다.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으, 아! 너무 빨라! 하앙!”
처음부터 절정이었다. 노련한 애무에 허리를 들썩이다 말고 비비안은 파드득 떨었다. 그리고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흠칫 굳어졌다. 그녀가 흥분하기 시작하자 애널을 틀어막은 단단한 유리가 질 내부를 압박했다. 하반신에 열이 오르고 안쪽이 벌어질수록 압박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애매한 감각은 한순간에 쾌감으로 질주했다.
비비안은 허리를 꺾으며 왈칵 애액을 토해 냈다. 에이든은 들으라는 듯, 노골적으로 민망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흘린 물을 전부 빨아 마셨다.
“하, 정말 야해 빠져서는.”
그는 잘게 경련하는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들어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공중에 살짝 띄운 채로 단박에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동시에 낮은 숨을 토해 냈다. 녹진하게 풀어 주면 벨벳처럼 부드럽고 맞춘 듯이 딱 들어맞던 내부가, 오늘은 너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빠듯하게 들어갔다.
“흐으, 아, 으……!”
비비안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잠시 눈빛을 흐리던 에이든이 본능을 좇아 허리를 흔들었다. 근육이 땅길 만큼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귀두로 그녀의 성감대를 짓눌렀다. 속을 후벼 파이는 것 같았다. 가장 깊은 곳을 꿰뚫릴 때마다 모든 구멍이 빈틈없이 채워진 기분이 생경했다. 조금 아픈가 싶을 때쯤이면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쾌감이 몰아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그는 속도를 늦추지도, 멈추지도 않은 채 인정사정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클리토리스가 까슬한 음모에 부딪혀 더욱 통통하게 크기를 키웠다. 그럴 때마다 비비안은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미쳐 버릴 것 같다. 이대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아 그녀는 입을 벌려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 응, 흣, 아으, 윽, 하악!”
빠르게 긁고 지나가는 박자에 맞춰 신음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전신이 딸려 올 만큼 뒤로 물렸다가 허리가 들썩일 만큼 강하게 올려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백치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온몸에 피란 피는 다 빨려 나간 듯이 오싹했다. 곧 다가오는 다른 절정을 느끼고는 비비안은 필사적으로 에이든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흐, 흐으…… 우는소리를 하면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얼굴, 보여 줘.”
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 에이든은 그대로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 깨물면서 말했다. 동시에 그가 비비안의 몸 깊숙이 자신을 파묻었다.
“……!”
비비안은 침을 흘리며 발끝을 세운 채 허공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허공을 치솟다가 바닥에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부유감에 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에이든은 가혹하게 몰아붙이던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녀는 절정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느리고 부드럽게 바뀐 리듬에 따라 조금씩 허리를 맞췄다.
“왜 그렇게 흥분했어요…….”
“이성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원한다기에 참지 않았을 뿐인데.”
에이든은 사실은 늘 이러고 싶었다며 말갛게 웃어 보였다. 너무, 진심으로 즐거워 보여서 비비안은 투덜거릴 생각도 못 했다.
“더 있죠?”
“네?”
“장난감 말입니다.”
에이든은 눈가를 곱게 접으며 ‘겨울에 먹으려고 도토리를 잔뜩 땅에 파묻는 다람쥐처럼 받아 오시던데.’ 하고 말했다. 도화색이 짙은 눈가가 장난기와 욕망을 담고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곧 겨울입니다, 비비안.”
“그, 그게 뭐요.”
“열심히 모아 온 도토리들 다 꺼내 봐요.”
다 먹여 드릴게.
에이든은 멋대로 선언하더니 비비안의 엉덩이 사이로 튀어나온 여우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이르게 찾아온 어느 겨울의 관능적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