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그래도 아직 새벽
며칠 뒤 비비안은 한층 개운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개운하다 못해 깃털처럼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누가 자는 사이 씻긴 것인지 몸에서 꽃향기 비슷한 게 나는 것도 같았다.
“하, 이대로 천사가 되어 날아가면 어쩌지?”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이 퉁퉁 부은 것 같았다. 붕어 같은 눈을 하고서 잠시 멍하니 서 있자 까맣게 잠식되었던 정신이 순식간에 개었다. 맑아진 머리로 창밖을 내다보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저택 밖을 응시하다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제집처럼 느껴지는 손님방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마치 술에 취한 다음 날처럼 지난날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뭐 실수한 건 없겠지?’
이미 민폐를 끼칠 대로 끼친 것 같지만,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아팠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 에이든이 자처해서 수발을 들어 준 것 같은데 혹시 비몽사몽 하는 와중에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고백한 건 아닐까.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한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아니, 차라리 아픈 걸 핑계로 떠보듯 고백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모든 걸 비밀로 하는 그가 미워서 우리의 관계는 섹스뿐이냐고 몰아붙였으면서, 좋아한다고 자각하자마자 섹스하자고 유혹하다니 대체 무슨 정신머리인지 모르겠다.
그런 짓을 해 봤자 그들의 관계는 섹스뿐이라는 걸 긍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그녀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쓸어내렸다.
하지만 정말 두려웠다. 그의 입에서 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섹스든 뭐든 해서 그 순간만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비비안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피임 대용으로 받은 반지를 무슨 약혼반지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간직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조금 기대해도 될 것 같아.’
점점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은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전에 없이 최고로 팽창한 상태였다.
지금껏 보아 온 에이든의 태도는 도저히 호감 없는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드문드문 내비치는 소유욕을 봐도 그랬다. 그는 비비안이 다른 남자와 붙어 있을 때마다 살기를 뿌려 대고는 했다. 그게 단순히 자신의 섹스 파트너를 공유하기 싫어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질투인 건지는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비비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에이든이 마음이 전혀 없는 여자 때문에 감정 소모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라는 건 알았다.
또 마음에도 없는 여자의 병간호를 할 리가? 저택에 넘쳐나는 게 사용인들인데 그들에게 시키면 될 것을 굳이 대공씩이나 되시는 분이 손수 수발들어 줄 필요가 있겠는가. 보통 호감이 아니어서야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섹스도 굉장히 인내심 없는 듯하면서도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
‘오오, 그래. 그는 나를 꽤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비비안은 생각이 길어질수록 점점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부풀었다. 다만 좋아하는 정도가 다를 것 같은 게 문제지만, 원래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지 않은가. 이건 비비안이 율리안에게 잘란 듯이 해 준 말이기도 했다.
사랑한다고 확실히 자각했다. 그를 절대 놓치기 싫었다.
상처받더라도? 그래, 차라리 상처받더라도.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간 비비안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좋아, 꼬신다.”
“네?”
세숫물을 나르던 하녀 한 명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뭐야, 사람이 있었어?
비비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호호, 하고 웃다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세수했다. 분명 아까 전까진 없었는데 유령처럼 스르르 나타나다니. 하여튼 여긴 존재감 없애는 데 도가 튼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비비안은 자주 봐서 어느 정도 낯이 익은 하녀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그, 제가 여기 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죠?”
“아가씨께서 오신지 오늘로 딱 7일째입니다.”
오, 이런. 주말이 날아갔다고 아쉬워했는데 또 다른 주말이 왔다고 기뻐해야 하는 건지.
비비안은 기절하듯 앓는 동안 도서관에 무단으로 결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탈한 눈빛을 했다. 저번에 멋대로 장기 휴가를 낸 것도 그렇고 이제 이 정도면 모가지가 잘릴 만도 했다.
사실 에이든의 입김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잘리고도 남았겠지. 일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는데 괜히 애꿎은 주간 사서들한테 피해만 입힌 것 같았다.
이 정도 되면 그만두는 게 맞는 거겠지. 사실 도서관 사서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서 일이야 어디까지나 본업이 아닌 취미였고, 도망치듯 다시 복귀한 것도 에이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좋아한다는 자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명 다르지! 매우 다르다. 당연히 사서 일보다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먼저였다. 허무하게 놓치기 전에.
비비안은 다시 주먹을 불끈 쥐며 일생일대의 각오를 다졌다.
“저, 하녀님.”
“예? 예……?”
하녀님이라는 건 어느 나라 호칭인가. 지명을 받은 하녀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죠?”
“지금은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흐음, 매일 밤처럼 말이시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비비안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드레스 룸으로 다짜고짜 쳐들어가 활동하기 편한 옷을 골라 껴입기 시작했다.
‘오, 승마복도 있네.’
언제 이런 옷까지 준비해 주셨담. 세심도 하셔라. 그녀가 외출 준비라도 하는 듯 꼼지락대자 하녀가 화들짝 놀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방 밖을 뛰쳐나갔다.
비비안은 여성용 바지를 껴입다가 희한하다는 눈으로 그녀의 꽁무니를 눈으로 좇았다. 유령처럼 스르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밖에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줄도 아는구나.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하녀들이 우르르 난입했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안 됩니다!”
“왜요?”
“밖은 위험해요. 대공 전하의 허락이 없이는 나가실 수 없으십니다.”
뭐라. 예상도 못 했던 일이 가로막히자 비비안은 잠시 행동을 멈췄다.
계약 관계일 때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한밤중이라서 그런 건가.
밤길이 위험하긴 하지.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왠지 하얗게 질려 곤란한 얼굴을 하는 하녀들을 돌아보았다. 곤란한 듯했지만, 그녀들의 눈빛에는 그보다 단호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보통 손님에게 저렇게까지 하나? 어딜 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는 밤에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요.”
야간 사서였으니까.
“익숙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밤거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만 골라서 범죄에 노출되겠습니까? 재난은 언제 누군가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이지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런 말을 하시나요.”
안전 과민증인가. 비비안은 내가 왜 이런 거로 논쟁을 벌여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같은 재난이 닥쳐도 밤거리가 익숙한 편이 더 빠져나오기 쉽지 않겠어요?”
“병석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그러십니까. 아침이 되면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감기몸살에 뭐 병석까지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었던 후드를 다시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몰래 다녀오려고 하는 건데 아침이 되어 움직이면 에이든도 당연히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녀들의 반응을 보니 지금 몰래 움직인다고 해도 전부 에이든의 귀에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럼 의미가 없었다.
사용인들의 협조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비비안은 먼저 조언을 구하고 입을 맞춰 놓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건 비밀인데요. 크흠, 비밀 얘기니까 문 좀 닫아 주실래요?”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부끄러웠다. 게다가 비밀이라는 말에 반응하기라도 한 건지 하녀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궁금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어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비비안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헛기침하다가 드레스룸을 빠져나와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유령 같은 존재감의 하녀들이 졸졸 쫓아 나와 그녀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저는 대공 전하께 고백할 겁니다!”
“네?”
“어머.”
민망함을 무릅쓰고 비장하게 외쳤더니 그녀들이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한꺼번에 말하니까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매우 시끄러웠다.
‘이런 얘기 좋아하는 걸 봐서 역시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네. 암살자 꿈나무인 줄 알았는데.’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런 반응은 아니었다.
비비안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기울이다가, 조용히 하라는 듯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크흠, 그래서 조언도 구하고 필요한 선물이라도 구할 겸 해서 나가려고 한 거예요.”
“선물이라니 무엇을…….”
“꽃다발과 반지요?”
“…….”
그들은 침묵했다. 연애를 글로 배운 비비안도 그게 무슨 의미에서의 침묵인지 알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으신가요?”
그때 화려한 금발이 인상적인 하녀가 말했다.
“가주님께서 직접 고백하실 때까지 기다리심이 어떠신지요.”
당연히 그가 언젠가 고백할 거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에이든을 오래 보아 온 사용인들도 그렇게 느낄 정도면 꽤 가능성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거겠지? 역시 그쪽이 봐도 대공 전하께서 절 좋아하는 것 같죠? 일방이 아닌 쌍방?
단순한 말치레일지도 모르는데 자꾸 실실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비비안은 자꾸 바보처럼 헤벌쭉 웃으려는 얼굴 근육을 다잡았다.
어차피 쌍방이 아닌 일방이라도 고백하고 귀찮아할 때까지 들이댈 생각이었다. 처음에 에이든이 현자인 줄 알고 계속 치근덕댔던 그때처럼 말이다.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하고 틀어지면 굉장히 억울할 것 같았으니까.
“전하께서 언제 고백하시는데요?”
“그, 그건 저도 잘…….”
“그럼 언제 고백하실 줄 알고 고백하실 때까지 기다린답니까.”
“그야 먼저 고백하는 건 보통 남성분들이니까 아마 생각해두신 게 있지 않으실까요? 아가씨께서도 차라리 가주님의 고백을 유도하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고백받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 딴 년이 채가면 어쩌려고!
“굳이 성별로 역할을 나눌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여자는 먼저 고백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미 처음부터 ‘보통’이 아닌 일로 엮인 사이였으니, 에이든도 반쯤 해탈해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사회 통념적인 사상을 따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비비안은 누가 먼저 고백하든 일단 그를 쟁취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꽃다발도 반지도 준비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본인이 산 반지로 그를 빼도 박도 못하게 묶어 버리고 구속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임자 있으니 건드리지 마시오’ 하는 일종의 표식을 그의 몸에 남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고백하셨다간 사교계에서 흠 잡힐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사교계라니. 그녀는 별나라 얘기를 듣는 눈빛을 하고선 말했다.
“전 귀족 영애가 아닌데요.”
“언젠가는 안주인이 되실 것 아닌가요.”
비비안은 하녀들의 설레발이 자신보다 더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안주인까지야. 물론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랄 정도로 양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인 자신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고백을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전하께서 내일 당장 제게 고백할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리지 마세요. 반지가 없으면 꽃반지라도 만들어서 끼워 줘야겠으니까.”
거절당하면 다음 날 또 고백해야지.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러면 언젠가 귀찮고 지겨워서라도 받아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비비안은 자신의 결심을 꺾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하녀들은 어쩐지 더더욱 눈을 반짝였다. 살짝 상기된 볼을 하고서 그녀를 흘끔거리기까지 했다. 다들 비비안에게 감화되기라도 한듯한 표정들이었다.
“도와드릴게요, 아가씨!”
“저도요!”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비비안은 왠지 사이비 교리를 설파한 교주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아무튼, 이건 협조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몰래 나가는 건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잘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다시 헛기침한 뒤 의욕에 불타는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아시는 분?”
* * *
“쯧, 이걸 소설이라고.”
율리안은 혀를 차며 읽고 있던 책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사랑은 꽃잎을 타고>라는 제목의 책은 표지부터 꽃잎이 음각된 분홍색이었다. 꺼림칙하고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읽는 내내 목덜미에 돋아 있던 소름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 정신 나간 여자는 이걸 읽어 보긴 하고 추천해 준 것인지 의문이었다.
작품성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개연성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그 여자가 쓴 소설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고……?”
율리안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행동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죽을병 걸려서 쓰러지고, 부모의 반대의 무릅쓰고 주위에 온갖 민폐를 다 끼치며 불꽃같이 사랑하다가, 결국 사랑의 도피를 하고, 석양을 바라보며 사랑을 맹세하다가, 지금 죽는다고 해도 다음 생에서도 널 사랑한다고 하다니.
사랑 외에 모든 인생을 말아먹은 꼴이었다. 이 인간들에겐 사랑 못 하면 죽는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율리안은 이딴 게 사랑이면 그는 평생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행동 일부분이 소설 속 남자주인공의 행동 일부와 일치한다는 것을 말이다.
비비안이 산처럼 쌓아 준 소설들을 읽어 보니 그녀가 율리안의 증상을 듣고 나자마자 짝사랑이라고 단언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보통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옆에 있으면 눈에 밟히고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든지, 그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소라도 지어 주면 좋아서 그날 온종일 기분이 좋다든지.
곁에 없으면 자꾸 생각나고 같은 핑계를 대서라도 같이 있고 싶어지고, 다른 남자와 엮이기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고. 제멋대로 안 돼서 짜증이 나다가도 그녀가 슬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율리안의 증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주인공의 행동들은 각각 달랐지만, 그 근본은 다 같았다. 사랑. 그건 사랑에 단단히 빠진 인간들이 주로 하는 행동인 모양이었다.
‘이걸 참고하고 따라 하라니.’
율리안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 끄트머리를 잡았다.
설마 저 정신 나간 스토리를 따라 하라는 건 아닐 테고, 행동이나 말투, 태도를 참고하라는 거겠지. 그도 알고는 있었다. 남자주인공들이 하는 대사나 신사적인 행동 또한 익숙했고 대외적으로 보이던 모습이었다. 따로 익힐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카르델의 얼굴만 보면 자꾸 속이 끓고 쓰려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는 다시 책장을 팔랑거리며 처음부터 읽어 보았다. 여자주인공의 저택 테라스 앞으로 한밤중에 찾아가 창문에 돌을 던져 그녀를 깨우고 밀어를 속삭인다……. 탐탁지 않았지만 이게 지금 시간상 가장 할 만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끔 하는 일 중 하나였고.
밀어를 속삭이는 대신 몸을 취했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만날 때도 됐지.’
율리안은 욱하는 성질 좀 죽이느라 한동안 카르델을 피해 왔지만, 솔직히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인내심의 한계가 와서 더 이상 참고 기다리기 힘들어졌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지금 깨어 있지 않는다면 자는 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오기라도 해야겠다.
그는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처소 밖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는데, 스쳐 지나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하얀 재킷과 크리스탈로 된 투명한 커프스 버튼이라니, 가뜩이나 머리도 피부도 새하얗기만 한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유약해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옷차림을 뜯어보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둘이 아녔다.
“형님은 검은 옷이 잘 어울리셨지.”
그리고 굉장히 남자답고 멋있었다. 같은 형제임에도 체격도 더 크고 분위기도 있고.
율리안은 거울 앞을 서성거리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한밤중에 시녀들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최대한 짙은 색 옷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하지만 정작 입어 보고 나니 짙은 색 옷은 흰 얼굴을 더더욱 희게 떠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남색 재킷과 라파스 라줄리가 물방울무늬로 박혀 있는 커프스 버튼을 달아 본 뒤에 다시 거울을 응시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찬양해마지않는 외모가 오늘따라 굉장히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카르델의 취향은 어떻지?’
아무리 잘생겼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한들 그녀의 눈에 잘생겨 보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율리안은 뒤늦게서야 그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비안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그랬을 것이다.
그는 브론 공작이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염색해 볼까…….”
그가 은발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리자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움찔 떨었다.
신이 내린 축복의 상징이라고 알려진 저 찬란하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물들일 생각을 하다니! 그녀들의 표정은 신성모독이라도 받은 듯이 일그러졌지만, 율리안은 나름 진지했다.
하지만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는 한숨을 삼키며 시녀들을 물린 뒤 카르델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르델은 깨어 있었다.
“폐, 폐하.”
그리고 율리안을 보자마자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무슨 파렴치한이라도 마주친 듯한 표정이었다.
명백히 불청객을 맞이하는 모습이라 그녀를 오랜만에 봐서 내심 들떠 있었던 그의 기분은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틈만 나면 거울을 보고 연습했던 효과가 있었던 건지 그린듯한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좋아,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율리안은 ‘뭘 그렇게 떠나? 죄지은 거라도 있나 보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얼른 삼켜 내고 다른 말을 떠올렸다.
카르델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려니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덕분에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로 민망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지난 일은 사과하지. 짐이 잘못했다.”
그의 뜬금없는 말에 카르델은 못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슨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황제가 무려 사과를 입에 담았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안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려 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오래 닿자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죽을 맛이었다.
그는 이게 생각했던 것보다 못해 먹을 짓이라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그녀의 품에 책을 안겨 주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다행히 카르델은 그가 건네준 책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책등에 새겨진 제목을 보고 멈칫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걸…….”
율리안이 멋대로 가져가 사인을 찢어 먹었던 페르디의 신작 소설이었다.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건데 어떻게……,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
“아무 짓도 안 했다.”
“그, 그럼 혹시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안 했어. 대체 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황제는 굉장히 뻔뻔했다.
카르델은 율리안의 의중을 살피듯 가늘게 뜬 눈을 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심조심 첫 장을 펼쳐 보자 지난번과 다름없는 내용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이건 분명 페르디의, 아니 비비안의 필체였다.
“이걸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작가에게 직접 부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나.”
그러니까 황제가 비비안을 찾아가 아직 출간 전의 소설을 한 권 뽑아 달라고 직접 부탁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인까지 챙겨 왔다는 뜻이었다.
카르델은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사한 거죠?”
“멀쩡해.”
율리안은 슬쩍 인상을 구기며 지난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주말이 지나고 도서관으로 찾아갔더니 아예 야간 사서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사해 보니 에이든이 또 장기간 쉴 수 있도록 뒤치다꺼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본업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일을 무슨 애들 장난으로 알고 있는 건지.
왠지 바람맞은 꼴이라 황제의 심기는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카르델과 멀쩡히 대화하고 있는 것도 다 그녀 덕분이었기에 거기에 관해서는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잘살고 있으니 네가 걱정할 건 전혀 없어.”
“아는 사이였던 건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
“…….”
“…….”
멀쩡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희롱하고 또 질투 섞인 모욕의 말을 내뱉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율리안은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쩔쩔매고 있었지만, 카르델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책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눈치였다.
내가 저 책만도 못하다는 건가.
율리안은 하다 하다 책에게까지 질투를 하며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카르델이 책을 덮으며 고개를 번쩍 들자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행복으로 물든 연둣빛 눈동자와 정확히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에 숨겨진 그의 귓등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율리안이 쿵쿵거리는 심장을 향해 닥치라고 속으로 외칠 때쯤 카르델이 물었다.
“손에 들고 계신 건 무엇인가요?”
그녀는 등 뒤에 감춘 그의 왼손을 응시했다. 뭔가 새하얀 귀 두 개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네, 네가 좋아한다고 하길래.”
그는 얼떨결에 말을 더듬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데요?”
율리안은 첫사랑에 빠진 수줍은 시골 소년처럼 손바닥만 한 토끼 인형을 내밀었다.
그리고 속으로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아무리 그래도 인형은 좀 아니잖아.’
카르델의 떨림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가 내민 인형을 받아 들었다.
조, 좋아하는 건가? 율리안은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뭔 다 큰 성인이 봉제 인형 따위를 좋아하느냐 싶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요정과 동물 친구들 그런 엇비슷한 거.
율리안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아했죠. 한 열 살 때까지는.”
“…….”
역시 그렇겠지.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비비안을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역시 그 정신 나간 여자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워낙 설득력 있는 헛소리를 잘해서 이번에도 제대로 속아 버리고 말았다.
율리안은 대체 비비안에게 어떤 벌을 줘야 잘 줬다고 소문이 날까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비비안이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폐하, 지금 뭐 하십니까.’ 하고 한심하다는 눈빛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카르델이 말을 이었다.
“이 인형 폐하를 닮았네요.”
“짐이 그 천 쪼가리를 닮았다고?”
율리안은 불쾌한 듯이 말했지만, 표정은 이미 봄 햇살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눈이었다. 카르델은 시선을 들어 그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기 힘들었는데 오늘따라 그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골적인 욕구를 담고 달아오르곤 하던 눈동자가 오늘은 그저 아름다운 푸른 빛을 띄울 뿐이었다.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처럼 잠잠했다. 다짜고짜 사과라고 책과 인형을 내미는 게 조금 어린 애 같기도 하고, 귀여워서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인데 말이다. 그토록 심한 짓을 당해 왔는데. 카르델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왠지 그래도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새하얗고 큰 눈이 닮았어요.”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는군.”
“음, 저는 토끼 좋아하는데.”
좋아한다는 말에 율리안이 입을 꾹 다문 채 대꾸 없이 잠잠했다. 미쳐 날뛰지 않고 얼굴에 미미한 홍조를 띤 채 얌전히 서 있으니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름다운 천사 같았다.
그의 흉부가 들썩이고 푸른 눈동자를 깜빡일 때마다 그제야 저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스러운 새하얀 머리카락과 가을 하늘을 담은듯한 푸른 눈동자. 저 등에 새하얀 날개가 달려있다고 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을 정도로 선량한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두고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카르델도 그를 처음 마주친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자신을 구원하러 내려오신 천사님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율리안은 그 천사 같은 외모를 하고서, 그녀를 가차 없이 짓밟았지만.
‘대체 그동안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원망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를 두고 멋대로 환상을 품은 것만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루아침에 뒤바뀔 감정이 절대 아니었다.
카르델은 갑자기 얌전해진 그가 조금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처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맙, 그, 그래.”
율리안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을 더듬었다.
총체적인 난관이었다. 아니, 그냥 총체적으로 죽고 싶었다.
분명 상상 속에서의 자신은 이러지 않았는데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인형을 내밀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당황하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율리안이 그동안 멋대로 그녀를 휘두르던 행동을 빼내자, 남은 건 짝사랑에 푹 빠져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얼간이 같은 사내였다.
심장은 쿵쿵거리다 못해 뇌까지 울릴 지경이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해 죽을 것 같은 데다가, 카르델은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그냥 그저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자신을 세뇌할 땐 몰랐는데, 한번 사랑에 빠졌다고 자각하고 나니 이제는 엘프로 보일 지경이었다.
뭘 믿고 저렇게 예쁘지? 하고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면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그는 봉우리 진 꽃잎이 갑자기 만개하듯이 환한 미소를 그렸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카르델은 토끼를 좋아하고, 토끼는 하얗고 나도 하얗다. 고로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하고 본인 멋대로 판단을 내린 끝에, 얼굴이 불타오를 듯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약한 짐승인 토끼와 자신이 닮았다는 소리가 이제는 칭찬이다 못해 고백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그, 그대도…….”
“…….”
“그, 그대는 그러니까 요, 요…….”
요정을 닮았다.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카르델은 갑자기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울 것처럼 일그러졌던 입매가 일자로 굳어지자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처음 보는 그녀의 표정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폐하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충분히 자지 못해 조금 피곤합니다.”
“피곤해?”
“네. 양해를 구해도 괜찮겠습니까.”
“어, 음, 그렇군.”
피곤하면 자야지. 그는 넋 나간 목소리로 답하며 뻣뻣해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지금쯤 ‘흐응, 숙면에는 섹스만 한 게 없지. 잠자리는 짐이 데워 주마.’라든가 ‘굳이 말을 돌려서 자극할 필요 없어. 순진한 척하기는.’ 하고 지껄였겠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율리안은 눈보라에 파묻혀 조난된 사람처럼 새하얘진 머리를 붙들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잘 자라는 말도 없었다. 생전 처음 축객령을 내린 카르델은 정중한 말로 황제를 내쫓고 문을 닫았다.
그는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며 멍청한 얼굴을 했다. 완전히 단절된 공간은 마치 닫혀 버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주인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개처럼 초조하게 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이게 뭐지? 전보다 더 상황이 나빠졌잖아.
하지만 아무리 둔하기 짝이 없는 황제라도 자신이 이 상황을 자초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나마 비비안의 조언으로 그에게 향했을 증오를 하루라도 빨리 막은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율리안은 닫힌 문을 차마 열지도 못하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렸다.
* * *
톡, 톡, 톡.
유려한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새까만 가면을 두드렸다. 비록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이었지만 정적을 가르고 울리는 소리는 상대방의 온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닐.”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사내가 나른한 말투로 상대를 불렀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낮고 느릿했다. 마법으로 변조된 목소리는 귓속을 파고들어 상대의 고막을 갉작거렸다.
“…….”
하지만 닐은 꿀꺽 목울대를 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하는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날 때부터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자라 웬만큼 이름난 위험한 이들은 다 상대해 봤다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사내는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천적을 마주한 짐승처럼, 매번 식은땀이 날 정도로 원초적인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닐은 헛숨을 들이켰다가 겨우 한마디를 토해 낼 수 있었다.
“네, 주인.”
23구역, 통칭 암흑가의 주인은 사실 악마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닐은 문득 헛소리로 치부했던 소문이 뜬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이 들었다.
악마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마와 계약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이 갔다.
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밝히는 은빛 촛대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있었다. 끊임없이 위태롭게 일렁이는 주홍빛이 마치 소환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새까만 후드에 가면까지 뒤집어쓴 사내는 암흑 밑에서 태어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둠에 녹아 있었다.
잠시 권태로운 눈길로 촛불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음울한 노랫가락 같기도 한 어투였다.
“오는 동안 굴러다니는 쓰레기 주워서 기절시켜 뒀으니 알아서 처리해.”
“네? 왜 직접 하지 않으시고…….”
“닐.”
그가 경고하듯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닐이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없는 동안 구역 청소는 제대로 해 놓으라고 했을 텐데? 너 몇 살이지?”
“스, 스물다섯…….”
“그 나이 먹고 청소도 제대로 못 하면 목숨 정돈 내놓을 줄 알아야지.”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사과했지만 닐은 억울했다. 암흑가의 주인은 늘 적도 원한도 많았다. 최근 몇 년간 암살 길드의 최고 수요도 아마 그였을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길드원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웬만한 암살 길드에서 23구역에 관련된 의뢰는 받아 주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아무튼,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상천외한 루트로 나타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미리 알고 치워 놓는단 말인가.
그래도 예전에는 본인 스스로 순식간에 해결하고는 했는데, 그는 최근 들어서 성인군자처럼 굴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목숨을 노리는 자가 나타나면 최대한 기절시킨 뒤 수하들에게 처리하라고 시키더니, 이제는 알아서 청소하라고 터무니없는 명령을 하기까지 했다.
살인을 꺼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 암흑가의 주인이, 꺼려? 살인을?’
닐은 자신이 떠올린 가정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수많은 이들의 피를 뿌려 제국의 무법지대라고도 불리는 이 23구역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최고 권위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생명을 앗아가는 일 정도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살인이 그를 이 자리에 서 있게 했으니까.
사실 그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수십 명의 장정을 처리하는 모습은, 그의 수하인 닐이 봐도 경외보다는 공포가 먼저 들게 했다. 주인은 명실상부한 피에 굶주린 살인귀였다.
하지만 닐의 어처구니없는 가설은 어느 정도는 들어맞은 듯했다. 그는 살인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몸에 배어날 피 냄새를 꺼리고 있었다.
주인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피 냄새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거든.”
닐은 ‘대체 누가?’ 하고 되물을 담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3구역에서 유일하게 주인에게 대들고 거친 조언을 아낌없이 퍼부을 수 있는 것은 야매 의사 킬릭스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으니 닐은 주인이 알아서 입을 열 때까지 닥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피 냄새는 몸이 아니라 영혼에 배는 거라 지워지지 않는다더군.”
그는 마치 성서 구절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한 뒤 피식 웃었다.
“그러니 나 대신에 지옥에 떨어져 줘, 닐.”
“…….”
닐은 어이가 없었다. 악마가 지옥을 꺼리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앞으로도 내 구역 헤집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으면 알아서 정리해. 말 전해 두고.”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도, 돈줄을 쥐고 있는 것도 결국 주인이었다. 닐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생각했다. 직접 지옥행 티켓까지 끊어 주시니 이것 참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어차피 죽으면 다 같이 사이좋게 지옥에 갈 텐데.’
닐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답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주인께서 안 계시는 동안 개 한 마리가 찾아왔던데요.”
“혈통은?”
“브론 가문이요.”
“번견이로군.”
브론 공작의 갈색 머리카락을 떠올린 사내가 입매를 비스듬히 비틀었다.
브론 가문은 말로는 중립이라지만 결국 저 혼자 고고한 떠돌이 개였다. 그간 황제의 편에도 귀족의 편에도 서지 않고 혼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크고 작은 귀족들을 영업해 흡수하더니 어느샌가 위협적으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직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라 놔두고 있었는데.’
길을 잃어 잘못 흘러들어 온 건 아닐 테고, 설마 반역이라도 꿈꾸고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고매하신 공작 나리께서 23구역까지 흘러들어 온 연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암흑가의 주인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아아, 그래서 백합 영애를 손수 만들어 냈군.’
대대적으로 무법지대를 지배하고 수면 위에 모습을 나타낸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접촉해 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기는 했다.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잘됐군. 약속을 잡도록 하지.”
그는 최근 심심한지 계속 자신의 것을 탐내는 황제를 떠올리며 말했다. 괜히 쓸데없이 주변에 한눈팔지 못하도록 팔자에도 없던 큐피드 노릇이나 좀 해 볼 생각이었다.
* * *
비비안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저택 서재로 향했다. 대공 전하께서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다들 입을 모아 책이라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그야 책이겠지.’
에이든이 병적일 정도로 책이 좋아한다는 건 비비안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녀들에게 원했던 답은 비비안이 알지 못하는 그의 은밀한 취향이나 취미 같은 거였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도 좋았다. 정말 작고 사소한 힌트라도 알고 싶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자신의 감정은 자각했는데,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전하의 취미는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없고 딱히 선호하는 음식이 없으십니다. 황궁 요리사가 만든 요리부터 길거리 싸구려 음식까지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세요.”
음식에 대해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비안도 지금껏 그가 음식을 가리는 건 보지 못했다. 대신 그 덩치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엄청나게 먹는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질보다 양인 유형인 듯했다.
‘곤란한데…….’
그렇다고 아무거나 잔뜩 차려 놓고 배 터지게 양껏 드세요,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에게 독서를 제외한 사소한 취미 같은 건 없었다. 승마나 사냥을 즐긴다거나, 남몰래 꽃꽂이의 취미를 숨겨 왔다는 반전도 없었다.
그의 취미는 첫째도 책 읽기이고 둘째도 책 읽기, 셋째도 책 읽기였다. 저택에 있는 동안 에이든이 하는 일은 밤에 돌아다니느라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에 일도 안 하는 황금 백수라고 놀려 대긴 했는데 이렇게 시시하게 시간을 죽이며 노는 귀족, 아니 황족은 처음 보았다. 한미한 가문의 귀족 영식도 이보다는 더 방탕하게 놀 것 같았다.
에이든은 비밀이 참 많았다. 밤마다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제쳐 두고서라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적었다.
‘혹시 의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걸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연기를 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낮에 밖에 돌아다니는 것조차 성가셔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시중을 드는 사용인 앞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까지 철저히 자신을 숨겼을까?
음, 확실히 이건 아닌 것 같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비비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게다가 사용인들도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고. 비비안이 그와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기만 해도 입을 꾹 다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비쳤으니 말이다.
‘사용인들이 유령처럼 다니는 것도 수상하고.’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게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으니 하녀들을 통해 비밀을 캐내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비밀을 캐내기 위한 모든 단서는 그의 ‘밤 나들이’에 귀결되었다.
취미 생활이나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는 다 밤에 돌아다니면서 풀어 버리고 저택은 수면과 휴식을 취하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지도.
‘설마 취미가 살육은 아니겠죠.’
비비안은 그가 피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돌아와 자신의 피 냄새는 아니라고 말했던 때를 떠올렸다. 사실 고백하기 전에 먼저 그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 미래를 생각해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입을 꾹 닫아 버리는 그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 수밖에. 아니 믿어야만 했다.
오다가 습격을 당했다거나, 암살자가 나타났다거나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런 이유라면 밤마다 나갈 이유가 없겠지만.
“어휴…… 나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가 흑의 대공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인이 되어 달라 당돌하게 제안했던 때부터 이렇게 틀어질 걸 예상했었어야 했다.
어차피 다 자업자득이었다. 그가 진짜 위험한 사람이었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
비비안은 쓸데없이 복잡해진 머리를 털어 내며 서재로 향했다.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책이라면, 책 사이에 쪽지를 끼워 넣는 식으로 작은 이벤트라도 할 생각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다짜고짜 고백부터 하고 싶었는데, 전에 그렇게 덤벼들었다가 무드 없다는 소리나 들어먹지 않았는가. 아닌 척하면서도 의외로 그런 걸 좋아하는 걸지도.
그러니까 전에 뭐랬더라. 스테이크를 썰고, 장미 목욕을 하고, 와인을 마시며…….
거기까지 생각한 비비안은 팔뚝에 돋아오른 소름을 쓸어내리며 부르르 떨었다. 그런 건 관능 소설에서 쓰는 것만으로도 아주 지긋지긋했다. 모로 가든 결국 고백하는 건 다름이 없는데 왜 굳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서로의 몸만 탐하는 관계를 이어갔으니, 이런 게 오히려 색다르게 흥미를 줄지도 모르지.
좋아, 이왕 하기로 한 거 온 힘을 다해 봉사해주지.
비비안은 씩씩한 개선장군처럼 걸어 들어가 책들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대공 저의 서재는 도서관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책의 바다였다. 인문, 과학, 정치, 종교, 마법, 금서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책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흐음…… 고백하려면 역시 로맨스가 좋으려나.’
그에게 로맨스 소설책 제목들이 나열된 쪽지를 건네고, 책 각각 메모를 하나씩 넣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쪽지에 적혀 있는 책 순서대로 찾아보다가 메모를 발견하겠지.
굉장히 낯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비비안은 메모를 다 찾아낸 에이든이 자신을 어떤 한심한 눈빛으로 볼까 상상하자, 어쩐지 결심이 조금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꽃다발과 반지를 건네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은데.’
크읏, 안된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비비안은 얼른 주머니에 챙겨 두었던 메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로맨스 소설책에 끼워 넣으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건너편에 있는 동화책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종류의 책들이 다 있었지만 설마 동화도 있었을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놀란 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책을 다 가리지 않고 읽는다고 했던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아 넣으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엄지공주, 개구리 왕자, 백설 공주, 라푼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작은 책장에 정리된 동화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손때가 많이 타고 종이는 누렇게 변색하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들을 계속 보관해온 걸까? 하지만 두께로 보아 이건 아동용으로 각색된 게 아니라 원작이었다.
원작은 애들이 보기엔 좀 그렇지 않나.
비비안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꼬마 에이든이 진지한 얼굴로 동화책을 읽는 것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왠지 어린 시절에도 간섭받길 싫어하는 애늙은이일 것 같았다.
그녀는 책 제목을 쭉 훑다가 어느 책 한 권에 시선을 멈췄다.
‘푸른 수염’
전부터 에이든이 끊임없이 운운했던 그 동화였다.
비비안은 마치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 동화책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책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이 없었다. 마치 텅 빈 상자처럼 말이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 바닥에 빠르게 낙하하는 게 보였다.
“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힌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러 번 튀어 올랐다가 멈췄다.
열쇠였다.
“…….”
비비안은 동화책 중간 부분이 뻥 뚫려있는 것과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번갈아 응시했다.
이, 이게 뭐지. 왜 열쇠가 동화책 안에 보관되어 있는지 무엇을 위한 열쇠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왠지 불길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허리를 굽혀 열쇠를 집었다. 크기로 봐선 작은 서랍장이나 옷장 열쇠가 아니라 문을 따는 용도인 것 같았다.
순간 강한 추측, 아니 확신이 머리를 강렬하게 쳤다.
푸른 수염, 열쇠, 그리고 비밀로 쌓인 지하실.
세 가지의 키워드가 동시에 연상되는 건 그녀가 예민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에이든은 분명 조금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한가지 동화를 언급했다.
푸른 수염. 그게 그저 겁주려는 의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치 떠보듯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힌트를 던져 왔던 것은 아닐까.
“대체 왜 이런 짓을…….”
비비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이건 분명 지하실 열쇠였다. 애초에 자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실 열쇠조차 건네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열쇠 꾸러미를 건네지 않은 게 아니라, 계속 여기에 숨겨 두고 있었다. 어디 한번 열어 볼 테면 열어 보라는 듯이. 그렇지 않고서야 찾으려고 작정한다면 누구든 찾을 수 있는 곳에 보란 듯이 열쇠가 숨겨져 있을 리가 없었다.
비비안이 언제 이 열쇠를 발견할지는 에이든도 몰랐겠지. 그는 푸른 수염처럼 대놓고 열쇠 꾸러미를 맡기지 않았으니까. 푸른 수염이 한 행동이 지금부터 널 시험해 보겠다는 선언이라면, 에이든이 한 행동은 이러고도 날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지독한 조롱이자 도발이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서라도, 너는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
어둠 속에 잠겨 맹수 같은 푸른 눈을 빛내는 그의 환상을 본 것만 같았다.
“하하.”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웃는 입과 다르게 얼굴은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열쇠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번에는 그의 비밀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말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이 순간에 흔들리는 자신이 우스웠고, 시험에 들게 하는 에이든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영영 숨겨 두지.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곧 에이든이 올 것이다. 일주일 내내 앓았다가 겨우 일어났으니 바로 자신을 찾겠지.
비비안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열쇠를 움켜쥐다가 이내 그것을 다시 책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 있었던 자리에 돌려놓았지만, 열쇠의 존재는 그녀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
앞으로, 앞으로 그저 기계적으로 나아가던 비비안은 어느 순간 걸음을 뚝 하고 멈췄다.
잠시 그 상태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서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게 된 목적은 뚜렷했다.
아무래도 호기심으로 죽은 고양이가 될 날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 * *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다른 주일이 찾아와도 율리안의 애정 공세는 계속되었다. 아침마다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괜히 카르델이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알짱거렸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녀는 황제가 등장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사리고는 했지만, 언젠가부터 슬슬 이 낯설기 짝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카르델은 괜히 정원의 장식용 돌을 퍽퍽 차고 있는 율리안을 응시했다. 늘 저쪽에서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먼저 아는 척을 하고는 했는데 오늘은 우연히 먼저 발견하고 말았다.
“후…….”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한숨을 코끝으로 작게 뱉어 냈다.
이번 장난은 꽤 오래간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대체 이번에는 날 어떻게 괴롭히려고 저러시나 하고 대놓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아마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살살 구슬린 다음에 더 큰 뒤통수를 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공작 각하께서 그랬던 것처럼.’
카르델은 브론 공작에게 한두 번 데어 본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게 비정상적인 변화라는 것을 알았다. 황제가 잘해 준다고 해서 경계 없이 다가가 헤헤 웃을 정도로 속이 없지도 않았고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더할수록 카르델은 ‘왜?’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곁에서 지켜봐도 그의 음험한 속내는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냥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며 들이대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연유로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걸까.
만약 폐하께서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줬다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카르델은 ‘처음’을 떠올렸다. 첫 남자, 첫 순정, 첫사랑, 첫키스, 혹은 섹스까지. 브론 공작은 그녀의 처음을 모조리 가져갔다. 늘 동경하던 다정한 미소로 다가와, 송두리째 흔들고 마음마저 갈가리 찢어 놓고 떠나갔다. 하지만 처음 그가 보였던 상냥한 모습은 뇌리에 각인되어 그를 마주칠 때마다 잔상처럼 떠나지 않았다.
사랑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람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다.
그 누구보다 다정했던 브론 공작은 지금 그녀를 가지고 노는 장난감 취급했다. 카르델은 그의 태도가 돌변한 순간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그저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겠지.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 주고 배려해 주던 착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내일이 오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악몽을 꾸지 않았느냐고 속삭여 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카르델도 알았다. 황제에게 관심을 받은 순간, 자신은 버려졌다는 것을.
브론 공작은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카르델을 포르망디 영지에서 데려온 것이었다. 황제를 유혹해서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고, 약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카르델이 브론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격하게 부정했고, 그리고 나서는 알고서도 모르는 척 자신의 감정을 뒤쫓기에 급급했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지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서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비비안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각하의 말을 진실로 믿으며 귀를 틀어막고 살았겠지.’
이미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어져 버린 관계였다. 상처받고 또 상처받으며 브론 공작의 마음이 떠난 게 제 탓이라고 혼자 자책했을 것이다.
카르델은 비비안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묘사되었던 브론 공작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다시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사람의 감정에 가격을 매겨 저울질하는 지극히 계산적인 인간이었다.
소설의 특유의 비현실적인 요소를 쏙 빼면 그게 바로 현실의 브론 공작이었다. 비비안은 직접 만나 보지도 않은 브론 공작을 카르델보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나만…… 바보였어. 그래, 나만.’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에 가득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넘실거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 내려고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불행하기만 한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폐하.”
카르델은 율리안 앞으로 성큼 다가가 다짜고짜 말했다.
“흡, 흐윽, 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그는 수풀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카르델 때문에 놀라 잠시 뻣뻣하게 굳어졌다. 굉장히 당황한 것 같았다. 이마를 덮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정말 토끼 같았다.
“왜, 왜 우는 거지? 혹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것…….”
“대답해 주세요, 제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안절부절못하는 손이 그녀 주위를 배회했다.
“뭐든지 답해 주마.”
율리안은 소매로 어설프게 그녀의 눈가를 벅벅 닦으며 말했다. 거친 손길에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카르델은 그마저도 서러워서 더욱 눈물을 떨구며 훌쩍였다.
이미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그를 본능으로 밀어냈다.
“왜 갑자기 제게 관심을 보이시는 거죠? 새로운 놀이인가요?”
“짐은…….”
“이런, 이런 짓궂은 놀이는 견디기 힘듭니다. 폐하. 제발 그만둬 주세요.”
“…….”
“차라리 그냥 전처럼 계속 저를 욕하고 짓밟으세요. 제가, 제가…….”
기대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끝을 흐렸다.
먼저 왜 이러는지 대답해 달라 할 때는 언제고 그녀는 제멋대로 판단을 내린 뒤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애처롭게 덜덜 떨려 왔다. 상처받기 전에 미리 자처해서 자신의 상처를 후벼 파고 헤집어 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목소리였다. 신기루가 되어 흩어질 듯 가냘팠다.
율리안은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비안을 통해 자신이 지금껏 카르델에게 해 온 짓이 얼마나 상종 못 할 쓰레기 같았는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착각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대가 놀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알겠어.”
지금껏 누구도 황제의 방만함을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유일하게 그를 타이를 수 있는 에이든은 세상만사에 무심해서 본인과 상관없다고 여기는 순간 철저하게 방관했다. 눈앞에서 살인이 일어나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갈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 칼을 쥐고 있는 게 제 혈육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랑을 모르는 황제는 계속 엇나가기만 했다.
만약 비비안이 없었다면 율리안은 자신의 감정을 영원히 깨달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져서, 그가 죽기 바랄 지경이 되고 난 뒤가 되었겠지.
율리안은 그 여자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놀이가 아니다. 절대 놀이가 아니었어. 짐이 무지해서 그것조차 몰랐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너를 싸구려 창부 취급하며 함부로 대했어. 미안하다는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정말 그대에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
“카르델.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을 테니 짐을 욕해도 좋고 때려도 좋아. 제발 부탁이니 밀어내지만 말아 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애원했다. 그녀가 이대로 등을 돌려 사라질까 봐 애가 타 바싹 목이 말라 왔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목울대를 울리다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녹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왜…… 왜냐고? 그, 그대를, 젠장.”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자신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어떻게든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는 발악이었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이 그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카르델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율리안의 표정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응시했다.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걸 바보같이 이제야 알아 버렸으니까.”
덥석 믿어 버리기에,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았다.
“각하께서도 처음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누구보다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속삭였지요. 카르델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율리안은 그녀가 말하는 ‘각하’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브론 공작. 그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뱀 같은 새끼. 잔잔한 파도처럼 조금씩 일렁이던 연푸른 눈동자가 잔혹한 살기에 휩싸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믿을 수 없다는 뜻이군.”
“…….”
그렇다면 널 포기하겠다는 뜻인 줄 알고 카르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처럼 돌변하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학습된 공포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고, 이렇게 되기를 바란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렇다면 매일 말해 줄게. 그대가 질릴 때까지, 하루라도 빼놓지 않고.”
율리안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비비안의 세뇌 끝에 익숙해진 말을 꺼냈다.
이런 로맨스 소설 같은 대사를 입에 담을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눈앞의 사랑스러운 이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는 민망함에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주먹을 꾹 쥐며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사랑한다고 매일 말해 줄게.”
비비안은 그에게 알려 주었다.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상처받은 그녀를 끝까지 기다려 주라고.
자업자득이니 속죄하고 영혼까지 품어 줄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를 말라고. 또 그녀가 만족스러운 답을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절대 원망할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율리안은 대답했다. 원망할 생각도, 멈출 생각도, 미안하지만 놓을 생각도 없다고.
“짐의 얼굴만 봐도 그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절절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줄게.”
“…….”
“기다리는 건 내 몫이니까 카르델, 너는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카르델은 율리안의 대답을 듣고도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절절한 고백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진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기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도 깊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사는 확실하게 전하고 싶었다.
카르델은 이대로 계절이 지나 사교계 시즌이 끝나면, 다시 브론 공작의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열네 살에 스스로 가문을 벗어났던 비비안처럼.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녀 또한 선택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폐하, 황궁에서 지내게 해 주세요.”
“그래…… 뭐?”
무슨 부탁이든 선뜻 들어주려 했던 율리안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갑자기 황궁에서 지내게 해달라니. 절대 그녀의 입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속으로 장담했던 말이었다.
카르델은 그의 의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브론 공작과 포르망디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