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바람은 폭풍이 되어
사위를 은은하게 비추는 커다란 보름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어제 예고한 바와 같이 다시 도서관을 찾은 황제는 오늘도 짜증이 한가득해 보였다.
“진짜 오셨네요.”
비비안은 황제에게 붙잡힌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지금 막 책꽂이에 꽂아 넣으려고 했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 정리하는 데 방해되니 놓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율리안의 매끈한 이마에 빠직하고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짐이 온다 했으면 얌전히 카운터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작 너 같은 것을 찾으러 온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송구합니다만 폐하, 저 이래 봬도 일단 사서라서.”
“그 사서 일 오늘 마지막으로 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말대꾸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아 멱살은 잡지 마세요. 어제 대공 전하께 한 소리 들었다고요.”
황제가 또 스스럼없이 옷깃을 잡아채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든은 현자인 척 도서관을 들락날락할 때처럼 새벽에 비비안을 찾아왔는데, 하필 율리안이 옷깃을 구기다 못해 단추까지 뜯어놔서 곧바로 들키고 말았다.
“누가 이랬습니까?”
그는 순식간에 무서운 얼굴이 되어 무슨 일이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차마 황제 폐하께 멱살을 잡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친형한테 일러바치는 꼴이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고, 애초에 별것도 아닌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비비안은 대충 둘러댔다. 목이 답답해서 무의식중에 옷깃을 쥐고 잡아당기다가 단추까지 뜯어 버렸다고. 솔직히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었지만 그는 대충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또 멱살을 잡혔어!
“설마 형님께 짐의 얘기를 한 건 아니겠지?”
“폐하의 ‘폐’ 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율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비비안은 옷에 쓸려 따가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슬슬 쓸며 발돋움을 해 책을 마저 꽂아 넣었다. 책 수레에는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오늘분의 일은 거의 다 끝난 것이다.
오늘 황제가 온다고 선언하고 가 버린 탓에 밤에 시간을 비워 놓기 위해 초저녁부터 열심히 움직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자신이 카운터에 없어서 고작 몇 분 찾게 한 게 괘씸한 모양이었다.
‘거참, 알아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비안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율리안은 멀뚱히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팔짱에 짝다리까지 짚고 있는 거로 봐서 그녀가 뭘 하는지 지켜볼 심산인 듯했다.
‘뭐지. 어제처럼 당연히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낼 줄 알았더니.’
비비안은 뻘쭘하여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은 있어 보이는데 말을 꺼내길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인상 좀 봐라. 저러니까 카르델이 무서워하지. 잘생긴 얼굴을 저렇게밖에 못쓰다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 뒤 다시 묵묵히 책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리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모두 끝마쳤다.
비비안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것을 가장자리에 밀어 정리해 두고 수레까지 제자리에 돌려놓고 왔다. 그리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황제 앞에 서서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러다 하루가 다 가겠네 싶을 때쯤, 입술을 여닫길 반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네 말이 맞았어. 아무래도 조, 좋아하는 것 같아.”
율리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비비안이 보기에는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저러다 터지겠다.’
비비안은 그 사실을 지적해줄까 하다가 정말로 목이 달아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지금 보니 황제는 어제보다 퀭하고 초췌해 보였다. 고민하느라 잠도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존심이 하늘에 닿아 있는 황제가 저 말을 꺼낼 때까지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비비안은 상대가 누군지도 잊고 자지러지게 웃을 뻔했다.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으면서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굴고 있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너 지금 웃고 있지.”
“크, 크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아주 감동하여 저도 모르게.”
“거짓말도 아주 수준급이군.”
“제가 누구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지금까지의 네 모습을 되돌아보고 안전을 운운해라.”
율리안은 이제 비비안의 무례함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을 거의 반쯤 포기했다. 어차피 저건 죽이지도 못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율리안과 카르델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돌려줄 방법을 제시할 인물은 비비안이 유일했다.
사랑 타령하는 소설을 쓰는 걸 보니 그런 쪽에 해박한 듯 보이기도 했고, 또 카르델이 마음을 터놓고 좋아하는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고, 지금은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친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얌전해졌다. 표정은 여전히 험악했지만.
“역시 좋아, 아니 사랑하시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비비안은 웃음을 완벽히 그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집쟁이가 뜻밖에 순순히 인정하는 걸 보니 조금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단 표정부터 좀 풀어 보실래요?”
“짐의 표정이 뭐.”
“화나 보여요. 다정하게 웃어 보세요.”
“다정?”
율리안은 그녀의 요구대로 순순히 웃기는 했다. 씨익, 하고.
그런데 다정은커녕 상대방을 양껏 비웃는 살벌한 웃음이었다. 비비안은 유난히 한쪽 입꼬리만 삐딱하게 올라가는 특유의 웃음을 알고 있었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제의 상징처럼 알려졌다는 이유도 있었고, 그녀는 그것보다 에이든이 주로 저러고 웃었기 때문에 더욱 익숙했다.
형제는 웃음마저 닮는 것일까? 같은 웃음임에도 에이든이 마냥 멋있고 관능적으로 보였던 것에 비해, 율리안의 웃음은 그냥 얄미워 보였다.
왜지? 전에 봤을 때는 분명 한 떨기 꽃 같은 청년의 상큼한 미소처럼 보였건만, 왜 그새 못나졌지.
‘눈에 콩깍지가 끼고 빠지고의 차이인 건가.’
비비안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잠시 황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요리조리 뜯어봐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에이든을 닮아 참 잘생기긴 했다는 거.
아무튼, 황제였으니 백번 양보해서 다른 여자들한테는 뭘 해도 먹힌다고 쳐 보자. 아무리 그래도 카르델에게 호감도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동안 개처럼 굴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변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폐하. 입꼬리가 한쪽만 유난히 올라가 있어요! 균형을 유지하세요.”
“이게 한 거다.”
율리안이 입을 벌리자 유난히 올라간 입꼬리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 빛났다.
“음, 폐하. 잠깐 용안에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손은 씻었느냐?”
“아뇨?”
“야, 이게!”
비비안은 황제가 손 씻고 오라고 하기 전에 예고 없이 발돋움해 그의 반대쪽 입꼬리도 똑같이 올려 주었다. 그의 미간은 온 힘을 다해 구긴 종잇장처럼 꾸깃꾸깃해졌다.
“거참 가만히 좀 있으세요.”
그녀는 타박하는 말을 하며 반대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무자비한 손길에 율리안이 더욱 표정을 와락 구겼다가 이내 서서히 표정을 풀어냈다.
여전히 험악했지만 제법 미소 비슷한 게 만들어졌다.
“오 지금 거 좋았어요. 앞으로 좀 더 연습하시면 자연스러워질 거예요.”
“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게 가장 중요해요.”
사랑은 계속 표현해 주는 편이 좋았다. 널 온몸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나 넌 사랑받고 있다고 말이다.
특히나 카르델은 다정하다고 알려진 브론 공작을 좋아하고, 페르디의 소설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거로 봐서도 다정한 남자가 타입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황제는 웃는 표정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변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다.
다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종일관 웃으라는 게 아니라, 가끔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참기 힘들다는 듯 웃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하필 그런 타이밍에 입가에 썩은 미소가 피어올라 봤자 카르델은 오해밖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멱살을 잡아챈다거나 강제로 손목을 잡아끈다거나 하는 건 절대 하지 마세요. 협박도 절대 안 되고요. 상냥하게 대해 주세요.”
무심한 듯 다정하게 챙겨 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여성 독자들이 설레는 포인트 중 하나였지. 그리고 비비안이 에이든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 말고 짝하고 손뼉을 쳤다. 그래, 에이든처럼!
일단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카르델의 감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것. 싫어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절대 손을 대지도, 윽박지르지도 않는 것.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다음은 뭘 해야 하는 거지?”
“일단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든가 팔다리를 자른다든가 하는 물건 취급은 그만두세요.”
“그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는 걸 전 알지만요.”
비비안은 율리안이 카르델을 좋아하는 걸 뻔히 알았으니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그녀는 아마 아닐 것이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무서워서 덜덜 떨었겠지. 진짜 자신을 묶어 두기 위해 육체를 훼손하는 등의 잔인한 짓을 할까 봐 찍소리도 못하고 순순히 당해 왔을 것이다. 전에 그녀에게 직접 들은 얘기도 있었고, 황제와의 거칠었던 정사를 떠올려 봐도 뻔할 뻔 자였다.
“부드럽게 해주세요.”
“……섹스할 때 말인가?”
“섬세함도 필요하시겠네요.”
섹스가 뭐란 말인가. 섹스가.
그녀 본인은 절대 섬세함을 운운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카르델은 곱게 자라 궂은일 한번 해 본 적 없는 귀족 영애였다. 순종적이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면이 강한 만큼 부서지기 쉽고 여렸다.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다. 육체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해 달란 말이에요.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라서 구속할수록 점점 망가져요. 홀로 일어서 빛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고 응원하고 지지해 주세요.”
사교계의 귀부인들 대할 때만큼은 해 줬으면 좋겠다. 왜 남의 부인에겐 쓸데없이 친절하고 정작 좋아하는 사람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교육받지 못한 거면 차라리 이해하겠는데 그는 무려 황제였다. 예절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분명 다 익혀 왔을 것이다.
“폐하의 감정을 몰아붙이고 강요하면 안 돼요. 연애에 있어서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있거든요. 잊지 마세요. 예의를 지키며 담백하게.”
율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했다. 낮은 숨소리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탄이 섞여 있었다. 비비안은 그의 한숨 소리에 대답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원래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랍니다.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요.”
“일단 알았다. 노력은 해 보마.”
“어휘 선택이나 말투도 좀 더 유하게 돌려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
그때였다.
갑자기 지척에서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방이라서 문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건 필시 책꽂이를 두들겨 인기척을 내는 소리다. 비비안은 갑자기 음산한 한기를 느끼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얼른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황제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진 도서관 사서를 찾아온 길 잃은 어린양이겠거니 하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그곳에는 황제와 똑 닮은 삐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이든이 있었다.
“에, 에이든?!”
“형님!”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갈렸다. 비비안은 이 시간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와서 영락없이 당황한 모습이었고, 율리안은 해맑게 웃으며 에이든을 맞이했다. 순수한 소년 같은 미소를 보며 그녀는 말없이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그런 웃음을 카르델에게도 좀 지어 주지 그랬어요.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라더 콤플렉스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던 사람이 에이든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며 말했다.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요. 불과 며칠 전에 뵈었으니.”
그가 말하자 율리안은 마냥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이 이내 싸늘하게 굳은 눈빛, 어투로 말을 잇자 황제는 웃는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보라색 눈을 가진 사서를 찾으시더니, 결국 찾아오셨나 봅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전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찾았다니 그저 우연히 만났을 뿐입니다.”
율리안은 짝사랑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입이 찢어져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천하의 율리안이 짝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를 들키기 싫었고, 무엇보다 저 어딘가 나사 빠진 여자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 가장 들키기 싫었다.
어릴 때의 자신은 정말이지 어리숙해서, 조금이라도 의젓해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물론 지금은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고 딱히 애 취급을 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하필 이 일을 들킬 수는 없었다.
“우연히 만났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밤중에 도서관에서 그것도 수행원 없이 홀로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났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율리안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시도하자 비비안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그녀는 에이든이 언제부터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지 가늠하며 황제와 나눴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데?’
비비안은 에이든이 서 있었던 위치에서 그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가늠해 보았다. 아마 황제의 키와 덩치 때문에 그녀가 다 가려서 둘이 뭘 하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밤이라 어둡기도 하고. 둘이 가까이 붙어서 뭘 하는 건 보이지만 뭘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대화도 제대로 안 들렸을지도 모르고, 만약 이상하게 들었으면…….
“무슨 대화들 나누셨습니까?”
때마침 에이든이 책꽂이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며 물어 왔다.
큰일 났다. 황제와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도 안 되고 불쾌한 오해를 받아 버린 것 같다. 다른 남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저 바보 황제와 엮이다니!
비비안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 읍!”
하지만 이내 율리안에 의해 틀어막히고 말았다. 그녀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행동한 것이었다.
조용히 해라.
황제는 이를 악물고 비비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쓸데없는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뿐이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전에 없이 살벌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무섭다. 반대편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지었다.
비비안은 그 와중에 꿀꺽하고 목울대를 울리는 율리안을 보고 황당해서 뒷골이 땅겨 왔다.
‘아니 무서워할 거면 그냥 말하게 두라고!’
혼날까 봐 무서워서 잘못한 걸 끝까지 숨기는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애초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 망할 황제야!’
좀 놔주시죠! 그녀는 억센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황제만 아니었어도 손등을 꼬집고 뜯고 발로 차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황제였다. 옥체에 감히 상처를 냈다가는 황후라고 해도 처벌을 내릴 수 있는 하늘 아래 가장 높으신 그분 말이다.
비비안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반항하는 것을 멈췄다.
“별 얘긴 안 했습니다. 형님께서는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망했다……. 비비안은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졌다. 둔해 빠진 황제는 지금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그들이 나눈 대화를 숨기기에 급급해서, 다른 상황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발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 알량한 자존심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 줬으면 좋겠는데.
‘음?’
거기까지 생각한 비비안은 잠시 멈칫했다.
이상했다. 에이든이 오해한다면 오해하는 거지, 대체 그걸 왜 자신이 해명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황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오해를 받는 건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둘 사이 오고 간 대화를 밝히길 원하지 않는다면 입을 다무는 게 맞는 거다.
당연했다. 황제 폐하시니까. 눈치껏 굴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필사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니까. 한때는 연인의 계약으로 묶였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후원자와 후원받는 작가일 뿐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런 사이일 뿐이라고 계속 되뇌어도 당장 멋대로 입을 틀어막은 황제의 손가락을 떼어 낸 뒤, 에이든을 붙잡고 아니라고 오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부정해도, 부정해도 그를 잊고 다른 남자를 찾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질 뿐인 망할 마음 때문에.
“숨기실 이유가 없다면 듣고 싶군요. 무슨 말씀 나누셨습니까.”
그사이, 에이든은 흉악한 기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재차 물었다. 그답지 않게 꽤 집요했다. 명백한 소유욕을 담고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을 마주하자,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관계가 좋습니다.”
그렇게 말했으면서.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전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비비안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 틀어지고 틀어지기만 했다. 차라리 맨 처음, 소설에 눈이 멀어 그와 연인의 계약을 맺기 전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에이든은 이미 날 마음속에서 깔끔하게 정리한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미련을 완벽하게 끊어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정말 견디기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그를 잊게 될 테니까. 그런데 왜 이도 저도 아닌 채 헷갈리게 구는 걸까.
‘왜 날 후원한다고 했어요? 날 후원하게 되면 계속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보이는 반응은 소유욕 때문인 거예요? 아니면 질투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동생을 걱정하는 건가요.’
구질구질했다. 에이든은 이미 연인으로서 그들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후원자와 작가의 관계로 돌아섰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비비안의 마음은 여전히 미련이 철철 넘쳤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져서 정말 이걸로 만족하는 거냐고, 이대로 끝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는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등을 돌릴 것 같았으니까.
“그 얼굴 오랜만에 보는군요, 폐하.”
그때 에이든이 침묵을 가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율리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제 얼굴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끼는 책을 찢어 놓고 몰래 숨기고선 그런 얼굴을 하셨죠.”
“그, 그건 어릴 때가 아닙니까!”
“그랬죠.”
황제는 그가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을 들먹이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에이든이 붉은 입술로 오싹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정색하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소름 돋을 수 있는 건가.
“그때 제가 한 말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멋대로 착각하기 전에 말씀해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젠 감히 훈계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시니, 착각에 사로잡히면 제가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비비안은 창백하게 질린 율리안의 안색을 살피며 생각했다. 저러다가 울겠다.
형님 형님하고 지나치게 따르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작은 엄포에도 지나치게 겁을 먹는 것을 보면 엄한 형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황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우상으로 삼고 존경하고 있거나.
“폐하. 비비안을 놓아주십시오.”
에이든은 아무리 자신을 낮춰도 숨길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지배자의 마지막 배려, 혹은 경고가 담긴 나지막한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지금 자신의 동생이 황제라는 걸 자각하고 있기는 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니, 비비안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대공이 황제보다 더 황제 같았다.
사실 조금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비안은 에이든과 얼음처럼 굳어 버린 황제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율리안은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을 최악 중의 최악으로, 바닥까지 끌어내릴지 고심하기라도 한 듯 보였다.
‘후, 어쩔 수 없나…….’
기다리다 못한 비비안은 결국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율리안의 손바닥을 날름 핥아 버렸다. 그렇게 버둥거릴 때는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니, 혀가 닿자마자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후다닥 멀어졌다.
찝찝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 너 감히!”
그녀는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며 대충대충 변명했다.
“폐하의 귀하신 옥체에 미천한 제 몸이 계속 닿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비비안의 영혼 없는 중얼거림에 율리안은 더 씩씩거리며 흥분했지만,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고는 이내 얌전해졌다. 형님 앞에서 형님이 사랑하는 여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델과 에이든에 관련된 일에 유독 이성을 잃는 그였지만, 황제는 황제였다. 단박에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형님의 여자에겐 상냥하게.
정확히 말해서 ‘(형님의 앞에선) 형님의 여자에겐 상냥하게’ 였지만.
“크흠,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그 말에 비비안은 질린 표정을 지었고, 에이든은 더욱더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다음?
“송구합니다. 늘 조심하겠습니다.”
“말은 잘하…… 아니, 그대는 말도 잘하는군.”
율리안은 허허롭게 웃은 뒤 정말 책을 빌리러 왔을 뿐이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비비안에게는 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을 뿐이라고 말한 뒤 눈짓을 주었다.
“그렇지?”
그는 눈알을 부라리며 되물었다. 알아서 능력껏 얼버무리라는 뜻이다. 비비안은 황제의 명치를 세게 쳐서 기절시키는 불경한 상상을 하다가 한숨을 삼키며 맞장구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찾으시는 책이 있습니다. 마침 새로 들어온 것도 있고.”
“오, 그게 정말인가.”
“네. 폐하께 지금 꼭 필요한 유익한 책이니 가서 꼭 읽어 보세요.”
그렇게 말한 비비안은 이내 다정한 남자주인공이 나오는 로맨스 소설을 무작위로 뽑아 수레에 담기 시작했다.
예전에 에이든은 책을 빌리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책을 읽는 이유는, 자신에게 제게 결여된 지식이나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투영하기 위해서라고.
일일이 설명하기엔 아는 게 지나치게 없으니 모범이 되는 책을 추천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물론 황제가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 감을 익히는 게 중요했다. 작은 요소라도 좋으니 개미 뒷다리만큼이라도 닮아 보려고 노력을 한다면 그걸로 됐다.
율리안은 그녀가 골라 주는 책들의 제목을 확인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이 한 변명 때문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그저 묵묵히 책을 받아들였다.
‘과연 저 책들을 읽으실까?’
비비안은 책이 산처럼 쌓인 수레를 이끌고 사라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진짜 없어 보였다. 저렇게 된 건 순전히 수행원도, 사용인도 없이 덜렁 몸만 온 그의 탓이었지만 말이다.
‘으음.’
볼이 따끔거렸다. 비비안은 집요할 정도로 그녀에게 콕 박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느끼고는 진땀을 뺐다. 이러다가 얼굴에 구멍이 나겠다.
“그래서…… 이게 무슨 상황인 겁니까?”
에이든이 물었다. 역시나 율리안의 어설픈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비비안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노골적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 읽혔다.
폐하께서 설마 여길 계속 들락날락할 생각이냐고. 대체 이 야밤에 남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고, 앞으로 여기서 뭘 할 작정이냐고.
“말해요. 부탁이니까.”
굉장히 간절하게 들렸기에 비비안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든 본인도 꽤 혼란스러워 보였다. 흔들리는 눈빛은 음습했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것처럼 괴로워 보였다.
질투인 걸까. 비비안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왜요……?’
물어볼 뻔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비참한 기대였다.
‘그럴 리도 없는데. 나 참.’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헛다리를 짚으며 기대는 하지 않을 거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죄송하지만 폐하의 명이시니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네요.”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어차피 이뤄질 리도 없는 헛된 희망과 망상은 종이처럼 곱게 접어 땅속 깊은 곳에 묻어 두는 것이다. 굳이 나서서 파헤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정말 조언을 구하셨을 뿐이에요. 별다른 일 없었어요. 정말요.”
“그런데 왜 숨기시는 겁니까?”
“음, 높으신 분께서 저 같은 도서관 사서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게 창피하신 모양이죠, 뭐.”
“…….”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황제의 명에 입을 다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했지만 지독히도 맘에 들지 않았다. 에이든은 그녀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더는 캐묻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 * *
그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율리안은 이후로도 정말 뻔질나게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 그것도 비비안의 근무시간만 골라서 찾아갔다. 주로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뜨는 밤중에.
에이든은 밤마다 하던 일들도 다 때려치우고 그런 황제의 은밀한 움직임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뭘 하는 건지 신경 쓰여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율리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상담할 이가 비비안밖에 없어 그런 거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에이든은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황제가 도서관 사서에게 한눈에 홀딱 반해서 쫓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정무를 보느라 부족한 시간을 할애하여 지극정성을 다할 리는 없었다. 평소에 여자에겐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보라색 눈을 가진 도서관 사서에 관해 묻는 것부터 그랬다.
사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율리안이 비비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게 설명되니까.
하지만 최근 황제가 포르망디 자작 영애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소문은,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
만약 비비안에게 물었다면 ‘그건 카르델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예요.’라고 친절하게 답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이 가득한 에이든은 침묵을 택했고 그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그날도 밤은 찾아왔다.
주말을 맞이하기 직전의 밤이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비비안은 약속대로 대공저로 향해야만 했다. 워낙 익숙해져 버린 탓에 그의 저택이 집보다 더 집처럼 느껴진 지 오래였지만 비비안은 오히려 걱정과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다.
‘이제 연인도 섹스 파트너도 뭣도 아닌 후원 작가일 뿐인데, 그와 몸을 섞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저택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야 한다니.’
버틸 수 있을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어쩐지 목 끝이 간질거려 침을 꿀꺽 삼켰다.
율리안은 그날도 어김없이 비비안을 만나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그녀를 마치 10년은 함께한 친구처럼 허물없이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갑 중의 갑인 황제님께서 답답한 속 좀 털어놓고 위로받고 홀가분해지고 싶다는데 비비안이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요즘 형님이 날 피하는 거 같아.”
“피한다고요?”
그녀는 새로 들어온 책에 번호표를 붙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피하는 정도가 아니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싫어할 만하죠.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하니까요.”
“짝사랑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죽어도 싫어.”
“그럼 계속 미움받으실 수밖에.”
“그것도 싫어.”
이런 떼쟁이 애새끼 같으니.
비비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거 같다?”
“착각이십니다.”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자 율리안은 짜증 난다는 얼굴로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겼다. 딱히 아픈 건 아니고 두피가 가볍게 당길 정도라 비비안은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솔직히 좀 성가셨지만, 다짜고짜 멱살을 잡던 때보다는 많이 유해졌기 때문에 이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비밀로 한 것도 아니지. 적당히 둘러댔잖아.”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율리안이 말을 정정했다.
“아니, 솔직히 짐도 그딴 어설픈 변명은 믿을 것 같지가 않군.”
“그렇죠?”
“바보가 된 거 같아.”
율리안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비비안은 당신은 이미 더할 나위 없는 바보라고 그에게 꼭 전해 주고 싶었다.
“형님 앞에서도 그렇고 카르델 앞에서도 그래. 그들 앞에 서면 마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야.”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겠죠.”
“흐음.”
그는 턱을 괴며 머리를 기울였다.
“그럼 너도 꽤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폭탄 같은 발언을 던졌다. 비비안의 손에 들려 있던 번호표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소, 소름이……. 그녀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고, 율리안도 그녀의 반응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냐. 하여튼 사람 열 받게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여자였다.
“그대는 짐을 되는대로 무시하고 있는 듯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인 곳에서 이러지는 않는다.”
그건 그렇겠지. 비비안은 설마 황제씩이나 되는 이가 밖에서도 저렇게 얼빠진 모습을 보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율리안은 진작 ‘바보 황제’로 낙인찍혀 개나 소나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황제의 가면을 쓰지 않은 이유는 아마 첫 만남부터 형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트집 잡기에 급급했기 때문이겠지.
“이상하게 넌 굉장히 편하거든.”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형님과 엮여 있어서 편하게 느껴지시는 거겠죠.”
“하긴, 어차피 넌 대공비가 될 테니.”
“대, 대공비라니…….”
이번에는 비비안이 양 볼을 수줍게 물들기 시작했다. 볼부터 시작해서 귓등, 귓불 목덜미까지 삶은 문어처럼 서서히 새빨개지기 시작하자 율리안이 피식하고 그녀를 비웃었다.
비비안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는 거냐고 서둘러 해명하려고 했지만, 해명하는 순간 자신의 목은 뎅겅 하고 잘려 바닥을 구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고 얌전해지기로 했다. 대공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 카르델이 황후가 된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짐에게 조언할 처지인가. 어째 둘 사이 관계가 지지부진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누구 덕분인데요.”
“짐 때문이라고?”
“밤마다 찾아오면 이상한 오해를 받기 딱 좋잖아요.”
비비안은 대충 둘러대었다. 사실은 두 사람 사이가 후원자와 작가 외에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므로 당연히 진행될 관계가 없을 뿐이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망할 황제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는 건 사실이기에 불만을 토해 내듯 말했더니, 율리안은 뜻밖에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당연히 떼쟁이처럼 싫다고만 할 줄 알았더니.
“요즘 들어 형님께서 날이 선 듯 보였던 이유가 그것 때문인 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율리안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슬쩍 비비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나와 너라니. 세상에 이렇게까지 불쾌한 오해를 받아 본 건 처음이다.”
비비안이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할 소리입니다만.
“형님의 연애 사업을 방해할 수는 없지. 말할 테면 말해라.”
“네……? 정말 괜찮아요?”
“평생 원망 듣는 것보단 잠깐 창피한 게 낫겠지.”
아니, 그렇게 쉽게 말할 거라면 처음부터 숨기려고 하지 말라고!
비비안은 울컥했으나 동시에 에이든과 관련되자마자 자존심을 접고 순순히 포기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중증 브라더 콤플렉스로군.
율리안은 품속에서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지.”
“주말이니 틈틈이 제가 골라 드린 책 꼭 읽어 보세요.”
“……노력은 하겠다.”
그는 제목부터 표지까지 핑크빛으로 가득했던 책들을 떠올리고 마지못해 답했다.
비비안은 떠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다시 번호표 붙이기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황제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다 빼앗겼기 때문에 조금씩 쌓인 일이 산더미였다.
그녀는 종이에 풀칠하다 말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이제 곧 신작 출간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용에 관한 건 카르델에게도 허락받았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황제에게도 직접 허락받으니 남은 건 인쇄 작업뿐이었다.
표지와 내지의 재질과 디자인을 일일이 신경 쓰랴, 곁에서 감독하랴 낮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도 쌓이고 피로도 쌓여서 지금 꽤나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태였다.
기지개를 켜며 졸음을 떨쳐 내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뭐지? 이 야밤에.’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소리가 들렸다. 아직 율리안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비비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레 도서관 입구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음성이었기에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에이든?”
그녀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상대를 불렀다. 동시에 말소리가 뚝 하고 그쳤다.
후드를 둘러쓰고 있던 두 남자 중 한 명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와 딱 시선이 마주쳤고, 비비안은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자비 없이 날카로운 이빨로 목덜미를 물린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당연히 흥건한 피나 이빨 자국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허공에 어중간하게 뻗어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비키세요. 다칩니다.”
문틈 사이로 황제의 당황한 듯한 시선이 언뜻 비쳤지만, 문은 에이든이 힘주어 닫은 반동으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두 공간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비비안은 험악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해의 시작은 굉장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처음에는 비비안이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장난스럽게 던진, 언제든지 다른 남자를 구할 수 있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시작이었다.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오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언동. 세상 모든 것을 소설의 소재 외로는 보지 않는 가벼운 태도. 좀만 자극하면 곧바로 내주는 쉬운 몸. 마음을 나누는 연인 사이가 부담스러웠는지, 곧바로 섹스 파트너 제안한 것은 그의 불안에 기름을 지핀 꼴이었다.
불씨는 활활 타올랐다. 일렁이는 불꽃은 그의 이성마저 홀랑 삼켜 버릴 듯했다.
‘빌어먹을.’
에이든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녀가 출판사 사장인 덴드로와 허물없이 대하는 모습은 불쾌했지만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대체, 하필이면 황제 폐하까지 엮이다니.
그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고 넘기기엔 비비안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이었다. 적어도 남자관계에서는 그랬다.
대체,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이든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거친 손길로 턱을 잡아 올렸다. 갑자기 고개가 꺾인 비비안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입술을 겹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폭력 같은 키스였다. 제법 키스에 능숙해진 그녀가 헐떡이다가 등을 주먹으로 내려칠 정도로, 게걸스럽게 탐하고 또 탐했다. 혀뿌리까지 삼켜버릴 듯이 빨아들이고, 입안 전체를 샅샅이 헤집고, 자국을 내듯 혀나 입술을 깨물어 댔다.
작은 입술이 반항하듯 고개를 틀면 악착같이 쫓아가서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물러서면 더욱 깊고 농밀하게 혀를 비볐다. 그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손을 결박하듯 붙잡아 머리 위로 올린 뒤, 무릎을 다리 사이로 넣어 그녀의 음부를 자극했다.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듯 위아래로 쓸며 꾹꾹 누르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몰아친 강렬한 자극 때문에 비비안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후으읍……!”
그만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그녀의 거부마저 입안으로 전부 삼켜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자신의 흔적으로 새기고 싶었다. 비비안은 늘 언제 헤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히 등을 돌릴 것처럼 굴었으니까.
성적인 쾌락에 유독 약하니 몸으로 길들이면 적어도 제 곁을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섹스 파트너 핑계나 대며 마음을 전혀 내주질 않으니 몸을 섞을수록 허무해질 뿐이었다. 속이 텅텅 빈 껍데기를 끌어안은 것처럼.
에이든은 그녀의 타액을 남김없이 삼키며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렸다.
어떻게 해야 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후원을 핑계로 평생 곁에 붙여 둘 생각을 해 봤지만, 그 정도로는 애가 타서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드는 걸 보기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대체 뭘, 어떻게.
어차피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가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네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설령 황제 폐하라고 해도 죽여 버릴 것만 같은데.
‘내가 점점 미쳐가는 모양이군.’
율리안은 에이든의 하나뿐인 혈육이었으며 꼭 필요한 존재였다. 고작 질투심 때문에 그를 죽여 버린다는 건 여태까지 계획하고 쌓아 온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한 번도 탐낸 적 없었던 자리였는데…….’
에이든이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뜨자 눈물을 눈가에 매단 채 파르르 떨리는 연갈색 속눈썹이 보였다. 순간 모든 사고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소리, 새하얗게 질린 피부.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몸, 그리고 연한 보랏빛 눈동자에 명백하게 담긴 공포.
잠깐 그의 손에 힘이 느슨해진 사이에 비비안이 손을 뿌리치고 온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쳐 냈다. 에이든은 처음에는 꼼짝도 하지 않다가 결국 굳어진 얼굴로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완전히 그녀를 놓아준 뒤 잠시 창가 쪽을 응시했다. 심호흡하듯 느리게 들썩이는 어깨가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비비안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벽에 기대 겨우 몸을 지탱하며 숨을 고르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에이든이 밤마다 어딜 나가는지 물어봤다가 그가 입을 다무는 바람에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때도 서로를 밀어내고 헛돌다가 결국 섹스로 얼버무렸지.
비비안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어차피 그 정도 관계인 것이다.
비비안은 에이든을 믿지 못하고, 에이든도 비비안을 믿지 못한다. 그러다가 또 서로 살을 맞대고 없던 일로 하게? 이게 섹스 파트너가 아니면 뭔데?
“그러고 보니 밤에는 늘 어디를 나가셨죠. 오늘은 피 냄새가 안 나네요.”
“……최근에는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대체 밤마다 뭘 하고 돌아다니시는 거예요? 에이든,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다지 비비안이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닐 겁니다.”
“하, 거봐요.”
그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이든은 비비안이 몸이 동하면 아무 남자나 놀아나는 가벼운 여자라 의심하는 눈치였고, 비비안은 에이든이 민간인도 죽일 수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아직도 잠겨진 채 방치된 그의 저택 지하가 꺼림칙했다.
“진실을 말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해요. 서로가요. 그러다가 섹스로 때우는 관계라고요.”
믿지 못하는데 진실 같은 게 무슨 소용일까. 황제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 냈지만 어쩐지 전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젖어 버린 아래가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은밀하게 벌어진 꽃잎 사이에서 지끈거리는 동통이 느껴졌다. 에이든이 주는 자극에 익숙해진 몸은 그가 얼른 그 안을 엉망진창으로 쑤셔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음란한 몸이라는 에이든의 말이 맞았다. 그에게 박히는 상상만 해도 발끝이 저리면서 절정에 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와중에 진짜…….’
몸이 동하다니 정말 미친 것 아닌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와 여기서 몸을 섞어 버릴까 하는 충동마저 들었다.
미쳤네. 비비안은 자신이 카르델에게 나쁜 남자를 넘어선 나쁜 새끼를 좋아한다고 뭐라고 할 처지가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쪽이 더했으니까.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턱을 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제 몸이 그렇게 좋으셨어요? 그냥 다 덮어 두고 섹스하고 싶을 정도로?”
“비비안.”
“그러니까 제가 속궁합 맞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되기 전에 확실하게 관계 정리해 두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게 뭐예요, 진짜.”
그녀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말을 뱉었다.
“그래서 우린 지금 뭐예요? 연인도 끝났고 섹스 파트너도 끝났어요. 아니면 불순한 후원 관계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거 괜찮네요. 그걸 소재로 한 관능 소설은 아직 없으니까.”
“비비안.”
“뭐! 왜 자꾸 불러요!”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울지 마십시오.”
“…….”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이든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지만, 비비안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엉겁결에 한 행동이라 본인이 더 놀라서 움찔 떨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상처받은 어린 짐승처럼 구는 그녀가 더욱 걱정되었는지, 다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토닥이며 등을 쓸어 주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끌어안아요…….”
비비안은 당황한 목소리로 훌쩍였다. 뭐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눈물이 도통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키스를 당해서? 그에게 아무에게나 다리 벌리는 창녀 취급을 받아서? 말하지 않아도 믿어 주지 않아서? 아니면 그가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숨기기만 해서?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하나의 이유에 대한 부수적인 감정들에 지나지 않았다. 비비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에이든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 그를 사랑한다. 다른 남자 같은 건 이미 들어갈 틈도 없이 에이든이라는 사람 하나로 꽉 차 버리고 말았다. 부정하고 밀어내는 것조차 소용없을 정도로 더는 손쓸 새도 없이 빠져 버린 뒤였다.
소설을 완성하고 저택을 빠져나가면 에이든은 잊어버리고 새 남자를 찾자고 생각했지만, 지금껏 그 사실도 잊고 있지 않았는가. 별로 그러고 싶은 의욕조차 들지 않았고 꽤 괜찮은 남자가 눈앞을 지나가도 오히려 에이든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었다. 이미 늦었다고.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고이 접어 땅속에 묻은 마음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고, 꺼낼 생각조차 않았는데. 에이든이 멋대로 파헤치고 헤집어 버린 꼴이었다.
깨닫고 나자 오열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비비비안은 일정하게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 때문에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숨넘어갈 듯 헐떡이던 숨소리도, 간헐적으로 덜덜 떨리던 어깨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울음은 완벽하게 그쳤지만, 눈물에는 영혼의 단짝이 있었다.
‘빌어먹을 콧물.’
비비안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계속 훌쩍이며 코 먹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지 오래였지만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에이든은 그녀가 아직도 울고 있다고 착각한 건지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코끝이 찡해져 올 정도로 다정한 손길로.
“비비안이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사람 착각하게 하는 데 도가 튼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은 단 한 번도 연애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섹스에는 능숙한 것으로 보아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껏 상대해 온 다른 여자도 이렇게 대한 걸까. 수없이 몸을 섞고, 상냥하게 대해 주고, 관심 있는 척 소유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멋대로 착각하게 하지만 자신의 비밀이나 진심을 한 터럭이라도 드러내지 않는…….
‘그리고 나는 그런 여자 중 하나일 뿐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비안은 새삼 울컥하고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이쪽은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망했네.’
비비안은 눈물을 닦아 내는 척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상처받을 게 두려워 예전부터 부정해 왔던 감정이었다. 확인사살까지 받으니 머릿속이 완전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빨리 잊어버리고 새 사람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하, 개뿔 될 리가 없지.’
이제 자기 자신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도 더는 소용이 없었다.
‘진짜 좋아해. 사랑해.’
한번 깨닫고 나자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어.’
인정했다. 비비안은 지금 열병을 앓는 것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감정을 자각하고 완전히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크기를 키웠다. 지금껏 어떻게 이걸 부정하고 살았나 싶었을 정도로 마음은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 갔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벅차올라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뭐야, 나 진짜 사랑하나 봐.
쿵쿵 뛰는 심장은 태양 아래 지글지글 달궈진 여름날의 자갈들처럼 뜨거웠다.
사랑. 비비안은 익숙하지 않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소리 없이 몇 번이나 굴려 보았다. 사랑, 사랑이라니. 창피하고 낯간지럽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품에 새빨개진 얼굴을 묻었다.
진짜 사랑해. 진짜, 진짜.
명색이 작가였다. 그것도 로맨스를 주로 다루는 관능 소설 작가.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고작 떠오르는 단어가 ‘사랑’과 ‘진짜’, ‘매우’, ‘무지’, ‘많이’ 같은 수식어밖에 없었다.
‘뭐야? 어떡하지?’
감정은 자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만 하고, 머릿속은 갑자기 새하얀 백지가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작 제 감정에 대해선 어찌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였다.
‘내가 황제 폐하보다 못한 바보였다니.’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지? 망할 덴드로의 조언은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에게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상처받는 건 싫었다. 그래서 지금껏 에이든을 어떻게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마음을 접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해 버렸다면 또 얘기가 달랐다. 이렇게 되면 그와 사이가 틀어져 영영 헤어지는 게 더한 공포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억지로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비비안은 다 덮어놓고 좋아한다고 고백할 뻔했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고 해도 지금이 고백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비비안은 여전히 자신을 위로하듯 토닥이는 손길을 떼어 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와 전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뜬금없는 고백이었던 모양이다. 에이든은 잠시 놀란 듯 그녀는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다정한 빛을 띠던 시선이 약간이지만 차갑게 굳어졌다. 애써 참고 넘어가려고 했던 사실을 다시 헤집어낸 탓이다.
비비안은 따끔거리는 심장 위를 움켜쥐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폐하와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에이든은 조금 전 복도에서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를 완전히 놓아주었다. 따듯했던 그의 체온이 떨어지자 그와 닿았던 부분에 싸늘한 냉기가 어렸다.
비비안은 마치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 놓은 아이처럼 더더욱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야 정말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녀는 고개까지 휙휙 저어가며 온몸으로 부정하다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렇군요.”
안 믿는 눈치였다.
“연애 상담을 하셔서 전 조언을 드렸을 뿐이라고요.”
“연애 상담?”
“뭐 저도 그쪽으론 경험이 없긴 하지만, 제가 폐하께서 반하신 분의 절친한 친구니까요.”
“그걸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폐하께서 부끄러우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뭘 말해도 그렇단다. 에이든이 이번에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순순히 답하자 비비안은 더욱 애가 타기 시작했다.
‘헉, 설마 아직도 안 믿는 건가?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대체 날 얼마나 발랑 까진 사람으로 봤으면!’
물론 오해받아도 할 말 없을 정도로 굴긴 했지만 이쯤 되니 점점 오기가 생겼다. 그가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의향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것보다 에이든의 말이 더 빨랐다.
“아니요, 더는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요.”
“그런데 표정이…….”
표정? 그게 밖으로 드러났나.
에이든은 감정 하나 갈무리하는 게 안 되나 싶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는 잠시 눈꺼풀 아래에 푸른 눈동자를 감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그것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싸늘했던 눈빛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심하게 돌아갔다.
“폐하께서도 충분히 설명해 주셨고…… 오해하지 않습니다.”
의심을 한 건 감정에 치우쳐서였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비비안과 율리안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성을 되찾은 상태였고.
하지만 어찌 됐든 허물없이 대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라는 건 확실했다. 굉장히 살가워 보였으니까.
‘고작 얼마나 만났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황제가 가장 신경에 거슬렸을 뿐, 도서관을 찾는 이들이나, 아니면 그곳에서 일하거나, 하다못해 우연히 길거리에 마주치는 누구든 다 탐탁지 않았다.
온갖 핑계를 다 붙여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매일같이 품에 안고 내 것이라는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오늘 그녀가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의 인내심은 지금 바닥에 닿아 있었다.
비비안이 음란한 게 아니었다. 불안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지나치게 매력적일 뿐이었다.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온갖 벌레들이 다 꼬여 들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친동생을 벌레와 같은 선상에 놓아둔 채, 썩어 들어가는 제 속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비비안의 말을 듣고 전 후원자이자, 섹스 파트너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녀가 누구랑 만나는지 따질 위치가 전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다짜고짜 고백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모든 걸 꼭꼭 숨기는 비밀이 많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도망갈까. 정체를 캐물을까. 모든 걸 듣고 나서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녀를 해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데. 다시 계약 연애 제안이라도 해 볼까.
‘아니, 일단 여기선 참고 저택으로 가야겠지. 도망가지 않게 천천히…….’
에이든이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비비안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의 입에서 ‘섹스 파트너’라는 표현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마치 날카롭게 잘 벼려진 얼음으로 심장을 관통당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애초에 저 단어를 먼저 사용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리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지만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걸까.
에이든의 목소리를 한 환청이 들려왔다.
너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뿌린 씨앗이 가시덩굴이 되어 제 몸을 옭아매었다. 완전히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흐를 것 같아, 비비안은 이가 여린 살을 파고들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샘은 조금만 자극이 가도 금세 눈가에 일렁일렁 시야를 뿌옇게 물들였다.
에이든은 뒤늦게 그런 그녀를 발견했다.
“그러다 입술 상합니다.”
그는 얼른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살살 문질러 이 사이에서 빼내었다. 이미 안쪽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어 있었다.
그때였다.
에이든이 일단 비비안을 진정시키고 저택으로 데려갈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깨가 콱 눌렸다. 주위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고, 눈앞에 있는 건 비비안밖에 없었다. 에이든은 얼떨결에 그녀가 누르고 끌어당기는 대로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왠지 평소보다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이 입술 위에 내려앉았고 살짝 비린 피 맛이 느껴졌다.
비비안이 막무가내로 입술을 꾹 눌렀다. 살짝 벌어진 틈을 타고 혀가 멋대로 침입했다. 그리고 에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젠 제법 능숙하게 입속을 누비고 다녔다. 그녀가 입천장에 동그랗게 움푹 팬 곳을 꾹 누를 때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튈 정도였다.
왜 갑자기 키스를…… 울 정도로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잠깐, 비비안 우읍…….”
황급히 입술을 떼어내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다시 틀어막히고 말았다. 마치 그가 꺼낼 말이 두렵기라도 한 듯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처음에는 놀라 굳어졌던 에이든도 어느새 몸이 달아올라 그녀의 키스에 응했다. 먼저 들이미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주도권이 에이든에게 넘어가자 담백하게 시작한 입맞춤은 순식간에 농밀해졌다. 날뛴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곳저곳을 누비고 집요하게 찌르고 문질러 댔다. 입이 한껏 벌어져 턱이 아플 정도였다. 비비안은 코로 숨을 쉬는데도 호흡이 모자라 헐떡여야만 했다.
하지만 괴로워도 전처럼 그의 등을 내리치지 않은 채 어떻게든 버텼다. 그보다 머릿속을 하얗게 비운 건 저릿한 쾌감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완전히 자각했기 때문일까, 입 전체가 하나의 성감대가 된 것처럼 그가 어디를 건드리든 몸이 움찔 떨렸다.
커다란 손바닥이 비비안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찌릿한 통증에 그녀가 코끝으로 여린 신음을 뱉자, 손길은 조금씩 부드러워져 어느새 도톰하게 솟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볐다. 옷 위로 도드라진 돌기가 그의 손놀림에 따라 이리저리 꺾였다.
“으응! 하…….”
손버릇 참 나빴다.
‘애초에 내가 이렇게 만든 것 같지만.’
처음에는 그녀를 피하고 거절하더니 한 번 합을 맞춘 이후로 살짝 틈만 보이면 달려들지 않던가. 그게 참 기쁘면서도 서글픈 기분이었다.
그래. 다른 건 어찌 되었든 적어도 그의 몸을 최고로 만족하게 하는 건 자신이었다. 소유욕을 불태우게 할 정도로 말이다. 그게 어떻게든 사랑으로 뒤바뀔 수는 없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옷 위로 유두를 꼬집듯이 괴롭히던 그가 입가에 흐른 타액을 핥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반쯤 몽롱하게 풀려 탁해진 눈동자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하아……. 더 만져 줘요.”
“비비안.”
낮게 탁 뱉어진 그의 목소리에서 으르렁거리는 흉포한 맹수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그냥요. 에이든을 원해요.”
마치 그게 사랑 고백처럼 느껴져 그가 눈가를 찌푸렸다. 심장에 좋지 않았다.
아까는 울며 거부하더니 이제는 차라리 몸이라도 섞자는 분위기다.
‘하, 원하는 대로 불순한 후원 관계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면 새로운 소재라도 원하는 모양이로군.’
빈정거리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서럽게 눈물을 떨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차마 뱉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에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울어도 괜찮아요. 여기서 에이든을 밀어내는 게 더 슬플 것 같거든요.”
“그 말이 제 귀에 어떻게 들리시는지 아십니까.”
아까부터 계속 대화가 헛돌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바로잡지 못했다. 바로 잡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차라리 시작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지독하게 후회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에이든 마음대로 해요.”
꿀이 떨어질 듯한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간신이 붙들어 둔 인내심의 한계를 또다시 시험받았고, 에이든은 정해진 순례처럼 완벽한 패배자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등 너머로 짚고 있던 벽을 움켜쥐듯 까득 손톱을 갈았다. 가슴을 움켜쥐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를 문질렀다. 서서히 밑으로 내려오는 손길에 비비안은 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하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애무에도 다리가 풀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서 있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하아…….”
비비안의 뜨거운 숨결에 그의 행동은 더욱 거침없어졌다. 그가 바짝 끌어안자 맞닿은 아랫배 언저리에서 단단해진 그의 물건이 꿈틀거리며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달아오른 열기가 겹겹이 쌓인 옷자락 위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고서 울리고 싶지 않다느니 말했다는 게 신기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자제심이라는 게 없는 줄 알았더니.
비비안이 도발하듯 아랫배로 그의 앞섶을 꾹 누르며 문지르자 그가 이를 가는 듯한 낮은 신음을 뱉었다.
섬뜩한 기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이 그녀의 몸을 빙 돌려 양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벽을 단단히 짚게 했다. 인내심을 조절하던 장치가 완전히 부서지기라도 한 듯 그의 행동은 성급했다.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 씹으며 엉덩이 위로 뜨거운 것을 비벼 오자 비비안이 몸을 움찔 떨었다. 완전히 겹쳐진 몸이 마치 보아뱀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삼켜진 기분이었다. 그는 달래듯 자신이 상처 낸 곳을 부드럽게 핥아 왔다.
비비안이 일할 때 입는 옷은 드레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철저히 실용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코르셋조차 없었다. 드레스 아래에는 간신히 걸친 속치마와 속바지, 속옷이 다였다.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치맛자락과 속치마를 한꺼번에 끌어 올렸다. 옷이 두꺼운 재질도 아니고 속치마가 풍성하지도 않아 딱히 걸리적거릴 것은 없었다. 그는 이대로 박을 것처럼 뽀얗게 드러난 그녀의 엉덩이 위로 허릿짓을 했다.
딱히 힘이 실리지도 않은 가벼운 페팅이었지만 비비안은 머리끝까지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쳐올릴 때마다 다리 사이가 움찔거렸다. 성감대를 대놓고 누르고 자극하는 것 또한 아니었는데 애액으로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벽에 가까스로 기댄 채 윽, 흐윽 하고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완전히 길들어 버린 몸은 그가 유사 성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했고 쾌감에 달아올랐다.
“으윽, 하아.”
에이든이 밑바닥을 긁는 듯한 신음을 귓가에 흘렸다. 비비안은 오싹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다리 사이를 비볐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퍽퍽 서로의 몸이 맞닿는 둔탁한 소리, 차가운 공기 중에 섞인 거친 숨소리. 섹스는 촉각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여겼는데, 소리의 자극도 만만치 않았다. 그와 겹쳐진 몸이 너무 뜨거웠다. 완전히 벗은 맨살이 아닌, 옷자락이 사각대는 소리가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읍?!”
그때 갑자기 에이든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쉿.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순간 다른 의미에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 보니 여기는 도서관이었고, 자신은 도서관 사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기 위해선 꼭 사서가 필요할 테고, 이곳을 방문한 손님이라면 당연히 사서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텐데. 아무리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들었다지만 여기서 일을 치를 줄이야.
비비안은 뒤늦게 사태의 위험성을 깨닫고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는 긴장 때문에 오돌토돌 돋아 오른 그녀의 살결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며 바지를 끌어 내렸다. 비비안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숨죽이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 오른 그의 성기가 툭 하고 엉덩이를 찌르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인기척이 느껴진다면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당장 하던 짓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카운터로 달려가도 모자란 판에.
비비안은 그의 손이 속옷 사이를 파고들자 소리를 낼 뻔했다가 가까스로 혀를 깨물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지만, 이 민망한 꼴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다.
그녀는 개미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잠깐 멈춰 봐요.”
“못 참겠습니다.”
아니 뭘 못 참아! 짐승도 아니고!
애초에 유혹한 건 비비안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같은 공간에 사람이 있는데 신경 쓰지 말고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뜻하지 않게 전혀 닮은 데가 없는 것 같았던 형제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고 말았다. 성욕에 눈이 뒤집히면 앞뒤 안 가린다는 거 말이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그에게 타박하는 말을 하려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물건이 귀두부터 빠듯하게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큰 그의 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준비된 건 아니었다. 이렇게 그가 성급하게 삽입부터 하고 보는 건 처음이었다.
비비안은 입구가 빡빡하게 당기는 기분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고, 그의 팔이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단단히 붙잡았다.
키 차이 때문에 발끝으로 서서 한참 숨을 골랐다.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절대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긴장 때문에 내벽이 더욱 좁아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내며 그녀를 달래듯 솟아오른 돌기를 대놓고 문지르고 손가락 아래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박힌 채로 앞으로는 애무 당하는데 당해 낼 재간이 있을까.
‘앗 거길 그렇게 만지면……!’
비비안은 멋대로 신음을 뱉으려는 입을 가까스로 막은 채 파들파들 떨었다. 들어갈 틈 없이 바짝 조였던 안쪽이 뻐끔거리며 벌어지는 틈을 타고 기둥이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까끌까끌한 음모가 닿을 때까지 그는 애무하고 밀어 넣고, 애무하고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평소보다 물기가 없었기 때문인지 불거진 그의 핏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기둥 끝까지 들어갔을 때쯤에 비비안은 벌써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었다.
“흐으으…….”
비비안은 제 손등에 얼굴을 마부 비비며 흐느꼈다. 에이든은 빠듯한 압박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멈춘 채 그녀의 귓가에 자꾸만 낮은 숨을 토해 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안쪽이 긴장으로 바짝 조여 왔고 그의 물건도 내부에서 서서히 크기를 키웠다.
마치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빠지면서 식은땀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몽롱하여 술이라도 진탕 마신 것 같았다. 예민해진 신경이 누군가의 발소리를 잡아챘다.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발걸음 소리는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긴장하고 말았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갈 때쯤, 한계를 모르고 크기를 키워 가던 그의 것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은 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느릿하고, 정신을 조각조각 끊어 놓을 정도로 애타게. 그리고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깊은 안쪽을 넘어선 곳을 단단한 끝이 꾹 누르듯이 문지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
뇌가 과열되다 못해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신음이 튀어나오는 대신에 안쪽에서 팽창하던 무언가가 왈칵하고 흘러내렸다. 애액은 속옷을 적시고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치마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마치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바닥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제발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를 빌었다. 넣자마자 가 버리다니. 수치심에 죽어 버릴 지경이었지만, 그보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절정의 끝까지 완전히 닿지 못해 갈증이 일었다.
서서히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는 반대편을 향해 멀어졌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 행위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기절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계까지 크기를 키운 물건이 거세게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헤매던 어린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큿, 하아. 너무 조여서 집어 삼켜지는 줄 알았어.”
“하아! 아! 잠깐, 너무 빨라! 하앙! 아앗!”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보다 그가 더욱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깊은 곳을 찌를 때마다 신음보다 헉, 하고 들이쉬는 헛숨이 더 많았다. 애를 태울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였던 게 까마득하게 먼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물기에 젖은 소리가 예민한 신경을 쿡쿡 찔러 댔다.
벽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거센 추삽질로 마찰된 엉덩이가 마치 누군가에게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집요할 정도로 그녀가 느끼는 부위만 찌르는 터라 비비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아, 잠까……! 하아아앙!!”
팔팔 끓는 물에 완전히 익어 버린 해산물이 이런 기분일까. 육신은 고된 노동에 축축 늘어지는데 정신만 따로 하늘에 두고 온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제대로 된 지지대가 못 되는 쓸모없는 벽을 손톱으로 긁어 대다가 다시 한번 비틀거렸다. 에이든이 그녀를 부축하는 척 다시 한번 클리토리스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집요하게 문질러 댔다.
“너무 젖었잖아. 갈 때 어떻게 하려고 그래?”
“흐읏, 아! 이건, 흐응! 하아아! 그, 흐핫!”
팔과 다리에 점점 힘이 풀려 이대로 벽에 머리 박고 죽겠다 싶을 때쯤, 에이든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 본 채로 허벅지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어린아이를 든 것처럼 가뿐하게 들어 올려졌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지고 그의 검은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비비안은 혼탁해진 두 눈을 깜빡이며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등에 차갑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단단히 지탱한 그의 손이 느껴진다 싶을 때쯤 다시 한번 그의 것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비비안은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으, 하…….”
너무 깊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과 마주쳤다. 이성을 놓아 버린 짐승 같은 시선과 짐승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는 그녀를 들어 올리고도 힘들지 않은지 그녀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면서 동시에 허리를 쳐올렸다. 한계까지 들어간 단단한 귀두 끝이 거칠게 안쪽을 헤집고 찌르다가 빠져나간다. 푹푹 찔리는 것이 마치 꼬챙이에 꿰이는 느낌이었다.
비비안은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가 그의 옷자락을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아, 흐아! 너무, 흑! 깊어요! 하아앙!!”
비비안은 고개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메말라 갈라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애처로웠다. 막무가내로 튀어나오는 신음은 이게 진정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울먹이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들자 질척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의 혀가 정신없이 파고들어 입안을, 정신을, 심장을 틀어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억눌린 신음이 그의 입술과 맞물린 채 윽윽 하고 삼켜졌다.
혼자 절정에 올라 축 늘어질 때마다 그가 그녀를 깨웠다. 어떨 땐 목덜미에 자국을 냈고, 어떨 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쳤으며, 어떨 땐 숨 막히도록 키스를 퍼붓기도 했다.
뜨거운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 같았다. 그와의 행위가 그랬고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이 그랬다.
에이든과 도서관에서 세운 역사는 황제 때와는 다르게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가 타고 갈증이 일며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두려웠다.
비비안은 그가 사정하는 몇 번 동안이나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를 목을 끌어안았다.
* * *
그날 밤부터 비비안은 앓아눕고 말았다.
에이든과 약속했던 주말이었기에 곧바로 그녀는 그의 저택으로 옮겨졌다.
첫사랑의 열병은 당연히 아니었고, 단순히 불규칙한 생활과 과로로 인한 몸살이었다.
밥도 귀찮다고 잘 챙겨 먹지 않아서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열이 오른 비비안은 골골대면서 정신을 놓았다가 차리기를 반복했다. 그간 수면이 부족했던 탓에 눈뜨고 밥을 챙겨 먹고 약을 먹은 뒤에는 다시 침대에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누가 옆에서 끊임없이 간호를 해 주었다. 몸이 열에 뜨겁게 달아오르면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왠지 알몸을 보이는 게 민망해 그녀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웅얼거리면 마치 나비가 내려앉듯 부드럽게 이마부터 볼까지 쪽쪽 키스를 해 주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이불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나한테 이런 병시중을 들며 어린애 어르듯 해 줄 사람이 있었던가?
‘아, 그래. 있었지.’
과거형이었다. 왠지 그리운 기분에 코끝이 울컥해졌다. 비비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열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어리광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머니, 어머니하고.
꿈인가? 열에 들뜬 얼굴로 눈을 뜨면 가끔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히기도 했다. 코끝에는 청량한 향기가 스치고, 가끔 누군가의 숨결과 새까만 머리카락이 살결을 간질였다.
음, 꿈인가 보다. 비비안은 생각했다.
“아니 반지를 계속 끼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까맣게 암전되었던 정신이 서서히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드문드문 누가 혼나는 소리를 들었다. 열 때문에 청각에 이상이라도 생겼는지 물에서 잠겨 듣는 듯 멍멍했지만 들리긴 들렸다.
반지? 그 단어에 반응한 건 단순히 찔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는 열에 들뜬 머리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실눈을 떴다. 눈알까지 열이 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눈앞에 시야는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두 사람의 새까만 인영이 있었는데, 한쪽은 아마도 에이든인 것 같았다.
‘다른 한쪽은 옷차림으로 봐서 의원인가.’
새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반지는 필요할 때만 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요. 생식 기능을 억지로 틀어막는 건데 얼마나 몸에 부담이 가겠습니까? 자칫하면 불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
“아니면 주인께서 끼고 계시던가요. 대체 왜 숙녀분께 부담을 주시는 겁니까?”
“강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관한 건 사실이지.”
에이든은 한숨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상한 벌레가 꼬이니까.”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 물러가 있어.”
에이든은 귀찮은 벌레를 쫓아내듯 휙휙 손을 휘저었다. 의원은 한참 잔소리하듯 투덜거렸지만,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명을 따라 순순히 물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 한 명이 새하얀 천을 들고 들어왔다. 대체 뭐지. 비비안은 아직도 띵한 머리를 붙들고 눈을 깜빡였다. 아직 내리지 않은 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녀가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냈다. 어차피 알몸이었기에 옷을 벗길 필요는 없었다. 능숙한 손길로 새하얀 천을 이리 휙, 저리 휙 감았다. 탐스럽던 그녀의 알궁둥이가 새하얀 천에 가려졌고 비비안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시녀의 손이 비비안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려고 하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사실 이 반지의 효능은 피임을 제외하고도 또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월경을 일시적으로 없애 주는 것. 달마다 생리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반지를 쉽사리 빼낼 수가 없었다.
생리통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강렬한 유혹이었다. 에이든에게 받은 유일한 선물 같은 거라 반지만 보면 그가 생각나 빼낼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비비안, 착하지? 잠시 빼놓으마.”
“시, 싫어……!”
시녀가 곤란한 얼굴을 하자, 뒤에 서 있던 에이든이 다가와 비비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반항했지만, 애초에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비비안은 결국 손에 힘을 풀었다.
“으윽……!”
다리 사이로 생리혈이 쏟아지는 익숙한 감각과 함께, 그동안 잊고 살았던 끔찍한 고통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지난달에 미뤄 두었던 고통까지 한꺼번에 찾아오는 듯했다. 자궁은 혼자 설레발을 치며 만든 집을 때려 부수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정신이 다시 아득해졌다. 생리통에 몸살까지 더해지자 차라리 이대로 딱 기절하고 싶었다.
‘그냥 차라리 배를 도려내고 싶다.’
잔인한 충동이 일었다. 누가 몸에 피란 피는 다 뽑아낸 듯 힘이 없었고, 이대로 딱 잠들 듯이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비비안이 평생 흘릴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울자, 에이든은 진통제를 제 입에 넣은 뒤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린 뒤 입을 맞췄다. 트고 갈라진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맞닿은 입술이 열 때문인지 물 때문인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물과 약이 넘어와도 타는 듯한 갈증이 계속되어 몇 번이고 그와 혀를 섞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뒤로 의식을 가위로 뚝 자른 것처럼 완전히 암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