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질투를 부르는 나비의 날갯짓
드디어 완성이다. 비비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원고 마지막 줄 오른쪽 끝에 ‘Fin’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빛나는 세 글자를 감상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크으으, 쾌감!
드디어 작품을 완벽하게 끝냈다는 생각에 그녀는 손에 들린 깃펜을 바닥에 냅다 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직접 희생해가면서까지 이토록 하나하나 공을 들여 쓴 작품은 이제껏 없었으니까.
앞에서부터 봐도 뒤에서부터 봐도 완벽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담은 자신 작이다, 이 말이다. 그래, 영혼을 담은 작품!
짜릿한 기분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잠시 부르르 떨다가 몸을 침대 위에 던지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와하하!”
그녀는 적을 해치운 주인공처럼 웃어 대며 반듯하게 정리된 시트 위를 뒹굴다가 갑자기 하던 것을 뚝 하고 멈췄다. 갑자기 엄청난 허무와 박탈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완결이라니…….”
왠지 속이 허한 기분이 들자 웃음소리도 점점 잦아들더니 완전히 멎어 버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정을 너무 들였던 탓일까. 그동안 작업했던 원고들은 하나같이 완결이 나는 순간 덜렁 들고 무작정 출판사로 향했다. 그리고 덴드로에게 냅다 던져 두고 자유를 외치며 놀러 다니거나 곧바로 다음 작품 작업에 들어가고는 했다.
한마디로 한번 완결을 찍으면 다시는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설이란 창작의 고통이오, 완결이란 일상의 구속에서의 해방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뭔가 많이 달랐다. ‘나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주변에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기 때문일까, 뭐라고 할까 굉장히…….
에이든은 그녀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쉽습니까?”
“독심술을 하다니……?”
“그런 거 굳이 하지 않아도 압니다.”
“감이 좋으시네요.”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알아요.”
그는 비비안이 누워있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타고 사르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푸른 시선이 왠지 견디기 힘들어져 이를 악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이제 정말로 그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가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그때는 시녀와 대공이라는 까마득한 신분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대로 떠나고 나면 상사병 엇비슷한 게 걸려서 한동안 골골거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이상하게 기뻐 보였다. 드물게 예쁘게 호선을 그리는 눈가와 입매가 그랬다. 완결의 ‘완’ 자만 꺼내도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더니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것일까.
“왜,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귀여워서요.”
“귀……! 뭐 잘못 드셨어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갑자기 온몸이 간질거리고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으으…….”
이상한 신음을 흘린 그녀는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오르는 걸 느끼고 재빨리 베개 위에 파묻었다.
정사 중에 쾌감에 취해 흐트러진 얼굴이라든가, 흥분으로 달아오른 피부, 활짝 벌어진 다리 같은 건 스스럼없이 드러낸 주제에. 이상하게도 귀엽다는 말에 귓등까지 빨개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왜 갑자기 추파를…….”
그녀는 하던 말을 멈췄다가, 다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무래도 그런 말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보이는군요.”
에이든은 얼굴만 숨기고 있는 비비안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얄밉게 웃는 그를 흘겨보듯 응시했지만, 이내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치명적으로 잘생겼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잘생겨 보였다. 왜 더벅머리로 보일 수도 있는 어중간하게 자란 머리카락까지 이렇게 멋있느냔 말이다.
고개를 기울이거나 눈가를 나른하게 내리뜨는 습관. 정확한 발음으로 또렷하게 말하지만, 유난히 말끝이 늘어지는 나긋한 말투. 기품이 어린 동작,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심장을 못살게 굴어서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졌다.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빠진 거지?’
큰일 났다. 비비안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미련 때문에 미적거린 게 문제였다. 소재를 얻었으면 최대한 빨리 소설을 완성하고 떠났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언제나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는 건 건 돌이키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을 때뿐이었다.
대체 콩깍지는 어떻게 떼어 내는 거지? 더 잘생긴 남자를 만나면 되는 건가? 더 잘생긴 남자?
‘그래. 더 잘생긴 남자.’
더 잘생기고 다정하고 멋있고 온몸에 매력이 흐르며 절륜한. 비비안은 떨리는 시선을 눈꺼풀 아래에 감추며 미친 것처럼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이 저택에서 나가 열심히 일상에 치여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원고를 차례로 정리해서 송곳으로 구멍을 낸 뒤 끈으로 능숙하게 묶었다.
잠시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가볍게 훑어본 뒤 그것을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열심히 작업한 소설의 진액이 전부 여기 바로 이 종이에 녹아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제 완결이 났으니 계약대로 떠날게요.”
나름 각오하고 한 말이건만 그는 비비안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단지 잠시 싸늘하게 굳은 눈빛을 하다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계약은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네?”
“비비안의 소설이 완결이 났는지 아닌지는 관계없습니다.”
“엥? 아니 그게 무슨…….”
“잊으셨습니까? 기한은 제가 ‘만족할 만한’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비비안은 잠시 말문이 막혀 붕어처럼 입술만 여닫길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들의 계획은 이번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아닌 에이든이 만족할 수 있는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였다.
왜 나는 당연히 이번 소설을 그가 만족할 거라고 여겼던 거지?
잠시 당황해서 버벅거리던 그녀는 곧바로 그 해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야 지금 쓴 소설이 자신의 한계를 한 발짝 넘어선, 모든 변화의 시발점이 될 작품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소설이 별로라 한다면, 대체 그가 만족할 만한 소설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비비안은 얼굴이 서서히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저당 잡힌 거?’
대공의 마음은 얻지도 못하고 내킬 때까지 섹스만 하는 그런 이상한 관계로 계속 지내야 해? 그가 누군가를 연인이나 아내로 맞아도?
최악의 미래를 상상한 비비안은 이제 거의 울 지경이었다. 대공의 정부라니!
‘아냐. 너무 멀리 나갔잖아. 아직 에이든은 내 소설이 어떤지조차 얘기하지 않았는걸.’
게다가 대공이 구두 계약을 빌미로 자신을 정부로 평생 곁에 둘 거라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온 거람.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을 타이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과연 저 소설을 어떻게 평가할까.
흘낏거리며 에이든의 눈치를 살펴보니 묵묵히 원고를 살펴볼 뿐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돌변한 푸른 눈빛은 굉장히 진중해 보였다. 지금까지 함께 몸을 섞으며 지내던 사람과 같은 인물인가 의심하게 될 만큼.
그녀는 갑자기 깐깐한 문학 평론가를 눈앞에 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꺼낸 말은 그녀의 예상과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이제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향하는 겁니까?”
“음, 그렇겠죠. 이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잘됐군요. 함께 가죠.”
“엥? 내용은요?”
평가는? 비비안이 되물었으나 그는 그저 의뭉스럽게 웃으며 사용인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갑자기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있던 방에 스르르 나타났다. 그녀들은 두 손 가득 각양각색의 외출용 의상을 들고 있었다.
에이든의 옷뿐만 아니라 비비안의 체형에 딱 맞춰진 갖가지 드레스도 있었다. 하나같이 수도에서 유행하는 화사한 디자인이었다.
“아니 대체 저걸 언제?”
그녀는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수십 개쯤 띄우다가 며칠 전 자신의 담당 하녀가 그녀의 몸 치수를 재 가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옷을 선물 받으려나 어렴풋이 예상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한두 벌일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
어차피 조만간 떠날 텐데 이게 무슨 돈 낭비람. 설마 이게 다 선물인 걸까.
하녀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같은 장소에서 에이든과 비비안의 옷시중을 들었다. 이젠 서로 옷을 갈아입는 모습쯤 보여도 되는 관계로 인식된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레이스가 마치 꽃봉오리처럼 장식된 연한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예쁘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출판사를 같이 가자는 건 뭐고, 봄나들이 가기 딱 좋은 이 사랑스러운 드레스는 뭘까. 물론 드레스는 눈이 호강하다 못해 여주인공에게 입히고 싶을 정도로 예쁘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옷을 다 갈아입은 에이든은, 허리를 숙여 비비안의 치맛단을 살짝 들더니 입을 맞췄다. 꽃잎 모양을 본뜬 레이스 위에 새빨간 입술이 내려앉자 어쩐지 낯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갑자기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주세요! 그래서 제 소설이 어땠는데요?”
“출판사에 도착하면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말씀해 주신다면 상관없긴 하지만 대체 거길 왜 가고 싶어 하시는 거죠?”
“혹 제가 가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비비안은 그가 출판사에 가면 안 되는 이유를 딱히 찾지 못하고 말끝을 늘였다. 에이든은 이번 작품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원한다면야 언제든지 견학 정도는 시켜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목적이 뭐길래.
설마 이 소설에 공헌만큼의 인세 비율을 본인에게 떼어 달라고 할 리는 없고.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넘치잖아. 그가 그럴 성격도 아니고 말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 비비안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여태껏 한 번도 비비안과 같이 외출한 기억이 없어서요.”
그때 에이든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수상하다고 그를 의심하고 있었던 비비안은 내심 찔려서 어깨를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같이 외출한 기억이 없다는 둥 갑자기 이 시점에서 감성을 자극하다니.
비비안은 핑크빛으로 물든 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저런 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처럼.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려나.’
만족스럽게 웃는 그를 보고 비비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 *
“우리 작가님 왔어?”
덴드로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비비안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불알친구를 맞이하는 썩은 미소가 아닌, 출판사 간판 작가를 맞이하는 영업용 미소였다. 비비안은 그 반질반질한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어울리지도 않게 연인에게나 할 법한 사근사근한 말투를 들고 있으니 아까 먹은 음식이 올라올 것 같았다.
“장기 휴가 냈다며? 휴가 낼 정도로 이번 작품에 공들인 거지? 어유, 착해.”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건지는 몰라도 분명 완성된 원고의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놈이 저렇게 갑자기 살갑게 굴 리가 없지.
덴드로는 완고를 넘겨주는 시기만 되면 갑자기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절해지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역시 우리 작가님이 최고라며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작가님 정말 수고하셨어요. 아주 세상에서 제일 예뻐 죽겠어.”
여, 역겨워…….
비비안은 기겁하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가 휴가 낸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마리한테 전해 들었는데.”
“마리이? 너 설마 마리한테까지 손댔어?!”
비비안은 제법 친하게 지냈던 주간 사서를 떠올리며 꽥 소리를 질렀다.
좀 수다스럽고 입이 가볍긴 하지만 거짓말 못 하는 착한 언니였는데 설마 저 나쁜 놈의 마수가 거기까지 뻗쳤을 줄이야.
비비안은 얼굴을 팍 찡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삼켰다. 뭐라고 한다고 들어먹을 놈도 아닌 데다가 현재 그녀는 누군가에게 조언할 처지도 아니었다.
“상처 주지 마라, 진짜.”
그녀의 반응을 보고 덴드로는 어이없다는 듯 매끈한 눈썹을 추켜세웠다.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발정 난 개.”
“야, 취급이 너무하잖아!”
그는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 내가 좀 너무했지.”
비비안은 저자세로 나오는 덴드로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웃기는 놈이었다.
‘어휴, 하필 저걸 불알친구라고 내가 여태까지 만나고 있다니.’
그것도 출판사 사장과 작가라는 관계로 말이다. 이젠 좀 그만 만나고 싶은데 지겹게도 이어온 인연이 용케도 아직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달갑진 않았지만, 죽고 없는 가족보다 더 끈끈한 유대로 엮여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 작가님 내가 믿고 있는 거 알지…… 누구세요?”
덴드로가 아부를 떨다 말고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뒤에서 있는 줄도 모르고 서 있던 사내가 갑자기 비비안의 어깨를 바짝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반쯤 열리다 만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후드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얼굴이고 뭐고 전혀 보이지도 않았지만, 왠지 후드로는 숨겨지지 않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엄청난 돈 냄새도 맡아졌다.
“우리?”
덴드로가 놀라 잠시 굳어진 사이 에이든이 빈정거리듯 되물었다.
‘귀족?’
그의 억양을 듣고 단박에 상대의 신분을 파악한 덴드로는 놀란 얼굴로 잠시 비비안 쪽을 흘끗거렸다.
‘우리’라는 표현을 기분 나빠하는 걸 보니, 정황상 비비안이 전에 말했던 그 취향 이상한 애인인 것 같았다.
‘설마 귀족일 줄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야, 우리 작가님 능력 좋은데? 그는 태평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이든이 후드로 온통 무장하고 있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도서관에 매일 찾아오는 후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남잔 귀족이 아니라 현자라고 했는데. 게다가 멋대로 노트를 훔쳐 가서 비비안이 몇 날 며칠 상심에 잠겨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귀족? 현자? 도둑? 대체 정체가 뭐야?’
비비안이 여기까지 직접 데려왔으니 페르디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는 주어진 단서로 이것저것 추측을 해 보다가 결국 포기했다. 어디서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일단 정체 같은 건 둘째 문제였다.
그림처럼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던 덴드로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저 검은 사내가 아까부터 살벌한 살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열렬하게 쳐다보는지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솔직히 좀 무서웠다.
‘딱 봐도 내가 너무 완벽하게 잘생겨서 견제하고 있네. 저런 여자 손톱의 때만큼도 관심 없는데. 하여튼 이놈의 외모는 왜 이렇게 잘 빠져서 날 피곤하게 만드는지…….’
그는 비비안이 들으면 말없이 표정으로 욕할 법한 소리를 속으로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누구시라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재수 없게 말했다.
덴드로는 자신이 비비안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걸 밝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누구든 걸려 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범위 내에서. 그는 타고난 말발과 외모로 엄청난 인맥과 여성 편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자든 귀족이든 누가 와도 절대적으로 무사할 자신이 있었다. 현자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이거나 하급 귀족 출신이었고, 비비안에게 꼬인 귀족이라면 기껏 해 봐야 자작 이하겠지.
절대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을걸.
“혹시 전에 우리 작가님 괴롭혔다던 그분 아니야?”
그러자 비비안이 답했다.
“무슨 소리야?”
“아니 있잖아. 노트 훔쳐 갔다는 그분.”
“음…….”
“괴롭힌 거 맞지. 그것 때문에 우리 작가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게다가 왠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아서 굳이 ‘우리’라는 호칭을 계속 강조했다.
“우리 작가님이 잠도 못 자고 노트에 적힌 내용을 기억하느라 끙끙 앓는데 얼마나 보기 안쓰럽던지. 우리 작가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뭐라도 다 해 주고 싶었다니까? 우리 작가님을 내가 얼마나 아끼는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작가님.”
우리 작가님…….
덴드로가 깝죽거릴수록 후드 속에 감춰진 에이든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언뜻 드러난 턱은 마치 이를 악문 것처럼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거의 안겨 있다시피 서 있던 비비안은 갑자기 섬뜩한 오한을 느꼈다.
그녀는 어쩐지 점점 불안해져서 에이든을 변호하듯 말했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야.”
“지났다고 없던 일이 돼? 아이디어 노트는 말이야, 우리 작가님한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거잖아.”
그런데 덴드로는 목숨이 중한지를 모르고 계속해서 가벼운 입을 나불거렸다.
그때 끝없이 이어지던 덴드로의 말을 중간에 뚝 끊고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둘이 무슨 사이지?”
그러자 비비안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불알…… 아니, 소꿉친구죠. 아주 어릴 때부터 만났던.”
“어릴 때부터 이어진 아주 각별한 인연이죠.”
각별한 인연이라는 표현에 그녀의 표정이 다시 한번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입으로 똥을 싸고 있네.
아니 대체 갑자기 왜 저래? 아무리 원고가 고파도 그렇지 저건 너무 오버 아닌가.
“야, 각별함은 무슨…….”
덴드로는 비비안의 말을 뚝 끊고 물었다.
“그럼 그쪽은 누구시죠? 애인?”
“애인은 아니야.”
덴드로의 말에 비비안이 칼처럼 답하자, 에이든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들 듯 박혔다.
애인이 아니라니. 아닐 수가 없었다. 비비안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녀는 분명 연인이 생겼다며 자랑을 하러 왔었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던 모양인데.’
관계를 확실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어중간하게 사귀다가 서로 뭔가 틀어져서 오해라도 하는 건가? 정확한 사정 같은 건 알 길이 없었지만.
‘애인이 아니긴 개뿔이. 너나 저쪽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미련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나, 애인이 아니라는 말에 곧바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남자나.
덴드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살피고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남녀가 쌍으로 사이좋게 쌍으로 삽질하고 있네.
‘비비안이라면 분명 연애 도중에 상처받을까 두려워 껍질 안에 숨다가 한 번쯤 크게 틀어질 줄 알았지.’
덴드로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지만, 오지랖 넓게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저 꺼림칙한 남자 좋은 일 시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척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연애하다 보면 서로 오해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거지. 그런 경험이 있어야 더 성숙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겠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대충 앉으라고 한 뒤 주방에서 세 명분의 차를 우려낸 뒤, 그것을 내오며 다시 얼굴 만연에 영업용 미소를 꽃피웠다.
공손하게 내민 두 손의 의도는 명확했다.
“진짜 속 보인다.”
비비안은 그것을 질린 듯이 보다가 먹고 떨어지라는 듯 원고를 내밀었다.
덴드로는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굴던 태도는 어느새 벗어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진중하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원고가 아주 빠른 속도로 초중반 부까지 넘겨졌을 때, 그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하고 이채를 띠었다.
설득력 있게 물 흐르듯 이어지는 내용,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복선, 딱딱 들어맞는 퍼즐들……. 그리고 관능 소설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완벽한 ‘정사’까지.
첫 경험의 두려움, 번뇌, 고통, 쾌감까지 모든 게 담겨 있어서 보는 사람까지 바짝 긴장하거나 흥분하게 만들었다.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페르디의 필력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건 더 볼 것도 없네.”
흥할 소설이었다. 덴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말할 수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가져왔던 원고보다 정성과 시간과 노력 자체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지? 신의 계시라도 받았어?”
실력이 느는 속도가 달걀이 하루 만에 부화해서 병아리를 건너뛰고 닭이 되는 수준이었다.
“순결 서약 때문에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했을 텐데 여기까지 해냈다니.”
덴드로의 경악과 감탄이 섞인 중얼거림에 비비안은 잠시 흠칫 굳은 채 에이든을 흘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덴드로에게는 아직도 흑의 대공이 순결 서약을 깨트려 줬다는 얘기를 따로 하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
에이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침묵을 지켰다. 비비안은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와, 진짜 이래서 내가 페르디 작가님을 좋아한다니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 조금의 조언을 보태면 늘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오지. 천재야, 천재. 타고났어. 정말. 완벽해. 최고야.”
건물이라도 하나 세울까? 이 시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괴물, 덴드로는 비비안을 번쩍 안아 들고 뽀뽀를 퍼붓기라도 할 기세로 흥분했다.
갑자기 그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찬사를 퍼붓자 비비안은 불쾌하고 역겨우면서도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하나도 안 꼴린다는 발언 때문에 발끈해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막상 최고라 극찬을 하니 으쓱해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썼다면 그렇게까지 완벽한 관능 소설을 완성해 내지는 못했을 테지만.
하지만 저렇게까지 확신을 하고 말할 정도면 이번 작품은 정말 만족스럽다는 거겠지. 그녀는 소설의 완벽함이 곧 에이든과의 이별을 뜻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업계 최고의 출판사 사장의 안목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그날 그녀의 목은 쉬었다>야.”
“아무래도 작가님의 모든 문학적 재능은 작명 센스를 비껴간 것 같아.”
“<두 개의 밤>은 어때?”
“제목만 빼면 최고의 역작이지 않을까.”
“아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에이든은 갑자기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최고의 역작이라……. 그대는 페르디의 역량이 그 정도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뭐요? 애인도 아니신 분은 갑자기 무슨 참견이신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덴드로는 원고를 탁 덮으며 곧바로 받아쳤다. 그러자 후드 밑에 드러난 붉은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서서히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쥐에게 꼬리를 물린 호랑이의, 비웃음이 담긴 나지막한 울음 같았다.
고작 보이는 건 그것밖에 없었지만 비비안은 히익 하고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당장 덴드로의 망할 주둥이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아니, 그렇게 처세 좋고 분위기 파악 잘하는 놈이 왜 오늘따라 저렇게 눈치 없는 척 구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괜히 중간에 끼인 꼴이 되어 재빨리 외쳤다.
“야!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에이, 아니, 레이가 날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흐응, 어떻게?”
두 사람 관계도 못 하잖아. 그는 검은 후드의 사내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순결을 지키면서 어디까지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
덴드로는 그녀의 소설에서 남자주인공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절륜한 남자라고 묘사되어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 모든 정사의 조언이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거라면…….
“허세 좀 부릴 줄 아시네.”
그 말을 듣고 비비안은 자신의 출판사 사장이 진심으로 살해당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틀린 건 아니지만.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분이란다.”
“호오.”
작게 감탄사를 흘린 덴드로는 다시 봤다는 시선으로 검은 사내를 돌아보았다.
‘뭐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시길래. 문화 대신이라도 되시나?’
그가 다시 한껏 빈정거릴 마음으로 가득 찼던 그때 에이든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서서히 벗어 냈다. 그러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대단한 미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살벌함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웬만한 아름다움은 눈에도 차지 않는 덴드로의 심미안에도 충분히 ‘잘생겼다’라고 할 만한 남자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가 거울을 통해 봐 왔던 금발의 미남과 비교조차 안 될 수준이었다.
그런 위압적인 외모에 살기까지 더해지자, 마치 저승의 왕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악’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저 사태일 것 같았다.
아, 잘못 건드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덴드로는 본능으로 깨달았다.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그는 꿀꺽 목울대를 울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덜덜 떨리는 시선이 악마에게 물려받기라도 한 듯 새까만 머리카락을 방황했다.
그러다가 에이든과 시선이 딱 마주치자 덴드로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바짝 붙이며 삿대질을 했다. 아앗!
“흐, 흐, 흑의 대공?!”
“무례하군.”
미친! 흑의 대공 맞잖아! 제국의 악몽!
덴드로는 재빨리 손가락을 접고 마치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
‘비비안 네가 제정신이냐?’
내가 연애를 하라고는 했지만 그 상대가 흑의 대공이라니. 지금껏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흑의 대공이랑 위험한 관계를 맺었단 말이야?
“잠깐, 그럼 순결 서약도…….”
“진작에 깨졌지.”
비비안은 측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친절히 답해 주었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해 줄 것을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호흡을 멈춘 덴드로는 그대로 숨이 멎어서 죽을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페르디의 숨겨진 애인이 사실은 제국의 황제였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지금 설마 그 흑의 대공한테 허세를 부린다고 빈정거리고 도발한 것도 모자라서, 경쟁자로 견제받고 있는 건가?
덴드로는 그냥 질투심을 유발해서 둘이 잘 이어 주려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대로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대가 이 출판사의 사장인가?”
“무, 물론입죠. 전하.”
“각별한 인연이라고 했던가.”
“가, 각별이랄까. 너무 각별해서 여자로도 보이지도 않는 그런 거죠.”
동성 친구, 아니 가족과 다를 바가 없죠. 친동생 같아요. 하하.
덴드로의 필사적인 웃음소리가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찬 사무실을 가득 울렸다. 그는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덜덜 떨어댔다. 이 상황을 자초한 게 자신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슬퍼져 그냥 울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도 모자라 비석을 세운 뒤 땅속에 들어가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포개어 누워 버렸구나. 이제 묻힐 일만 남았다.
그 흑의 대공은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동물원 원숭이 재롱 보는 눈빛이나 하고 있고.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그냥 나대지 말고 처음부터 넙죽 엎드릴걸.
비비안이 물어 온 취향 이상한 애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흑의 대공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어떻게든 에이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덴드로의 머리가 뺑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그럼 전하께서는 페르디의 이번 소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물론 아니지.”
피식 웃은 그가 뜨거운 김을 풀풀 풍기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대가 그녀의 실력을 고작 이 정도에 한계 지어 버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어. 그렇지 않은가?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를 배출해 낸 그대의 안목이 이 정도라니 조금 실망할 뻔했는데.”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우리 작가님……!”
“우리?”
“……아니, 그, 페르디 작가님은 우주보다 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신 분이시죠.”
비비안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에이든이 갑자기 하대를 사용하는 것부터 평소답지 않아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라는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하대를 쓰는 게 맞지만, 그동안 하도 당연하다는 듯이 존대를 들어왔기 때문인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뭐라고 할까, 그동안 알고 있던 에이든 같지가 않았다. 서재를 어슬렁거리는 무기력하고 나른한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정말 대공 같았다. 대공 맞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물론이죠! 하하.”
“제목은 최대한 작가의 의견을 반영해 줬으면 좋겠는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출판사가 작가의 표현 의지를 반할 수는 없죠.”
야, 아까는 애인도 아닌 분이 무슨 참견이냐고 하더니 태도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비비안은 잠시 차게 식은 눈빛으로 덴드로를 째려보다가 에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체를 드러내셔도 되는 거예요?”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성가셔지는 게 싫었을 뿐이었죠.”
“그 말은 성가심을 무릅쓰고 할 말이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별건 아닙니다. 정식으로 페르디의 후원자가 될 생각이었거든요.”
“네?!”
그녀는 상대의 귀 바로 옆에 입술을 대고 있다는 것도 잊고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고막이 쨍하고 울리자, 에이든은 슬쩍 인상을 썼다. 그는 잠시 비비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볼을 꾹 꼬집어 늘렸다. 토끼처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리는 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비비안은 한쪽 볼이 잡힌 채 다 새는 발음으로 외쳤다.
“대체 왜요?!”
“비비안의 소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짓말은 하기 싫었으니까요.”
아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거짓말을 하기 싫은 거랑 후원자가 되는 거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요?”
비비안은 그에게 닦달하듯 물었다. 후원 같은 귀찮은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자처해서 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에이든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커녕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소리나 듣게 되었다.
“절 왜 후원해요? 지금껏 누구도 후원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언제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할 뿐이니까요.”
최초이자 최고로 만들어 드리겠다, 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까지 후원자 없이도 잘만 글 써 왔고…….”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도 유명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비비안이 거절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싫은 겁니까?”
“그럴 리가요!”
덴드로는 사랑싸움을 하는 두 닭들을 보고 꼴값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러고도 애인이 아니라고 말하다니 진짜 바보들 아닌가.’
무슨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데 본인들만 자각이 없다니 웃기지 않는가. 하지만 역시나 그는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 생각이 개미 뒷다리만큼도 없었다.
‘어디 계속 삽질이나 해 보라지.’
그는 풀풀 날리는 닭털을 거둬 내듯 손을 휘휘 저은 뒤 영업용 미소를 띄웠다.
눈꼴 시린 건 눈꼴 시린 거고,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야, 대공 전하의 안목에 감탄했습니다. 세상에는 날고 기는 천재들이 넘쳐나지만, 페르디의 가능성이란 하늘의 별보다 넘쳐나죠. 좋은 선택이십니다. 전하의 후원이라면 든든하죠.”
덴드로까지 자연스럽게 합세하자 비비안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제 와서 후원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저기요? 듣고 있어요?”
그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구두 계약이었던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정식으로 계약 서류까지 교환하는 모양이었다.
페르디 후원 계약은 마치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홀로 덩그러니 놓인 채로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대공 전하의 치명적인 마성을 뿌리치고 벗어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젠 정식으로 후원하는 작가가 되다니?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이면 전처럼 틈만 나면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무려 후원자이니까 그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언제든지 달려가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를 절대 좋아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니, 세상에 그건 무슨 신종 고문이지?’
그들의 계약은 끝났다.
다만, 또 다른 계약으로 엮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 * *
지이잉―
“읏, 핫.”
브론 공작은 온몸을 잘게 떨며 뒤트는 카르델을 감상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마법으로 인한 진동이 울릴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동자가 애처로울 정도로 흔들렸다.
“이제…… 그만…… 흣.”
“겨우 2시간이 지났을 뿐입니다. 약한 소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브론 공작은 그녀의 간절한 애원을 무시하며 다시 들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차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기구의 상단부가 한계까지 눌려 안쪽을 자극했다. 카르델은 저릿한 압박감에 참지 못하고 허리를 움찔 튕기며 경련했다. 높은 구두를 신은 채, 그녀는 스스로 들썩이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었다.
“흐응, 아앗……!”
“쉿. 조용히. 마부가 듣습니다.”
공작의 말대로 2시간째였다. 브론 공작의 저택에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카르델은 얕지만 잦은 간격으로 찾아오는 마른 절정을 끊임없이 느끼며 괴로워했다. 안쪽이 따갑고 얼얼할 정도로 열이 올라 고문같이 느껴졌다.
“제, 제발 빼 주세요…….”
“빼고 싶다면 빼십시오. 감당하실 수 있다면.”
브론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카르델의 다리를 끌어당겨 멋대로 그녀의 치마를 들쳤다. 허벅지를 가볍게 쓸어 보니 뜨겁고 투명한 물이 묻어나왔다.
그는 물이 흐르기 시작한 발원지로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여전히 요란하게 진동하는 기구의 겉면을 둥글게 덧그리다가, 붙잡고 느긋하게 돌렸다. 그러자 물기 젖은 가녀린 신음과 함께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읏, 하앙, 흑…….”
카르델은 다리를 이리저리 움찔거리며 허벅지를 비볐다. 못 견디겠다는 듯이.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란다는 듯이.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장관이로군.”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옷차림을 다시 정돈해 준 뒤 말했다. 카르델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 서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 허락도 없이 질질 흘린 건 봐 드리지요.”
“…….”
“곧 도착하겠군요. 곧장 폐하께 가십시오.”
브론 공작이 명령했고, 카르델로서는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암리에 유행한다는 기구를 억지로 꽂아 넣고 그녀를 강제로 달아오르게 만든 뒤 황제에게 보내려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일 땐 언제고 사내를 유혹하는 법을 알려 주더니, 황제에게 보낼 땐 언제고 갑자기 창녀라고 모욕하며 그녀의 진심을 짓밟았다.
이제 브론 공작은 그녀의 사랑 고백에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고 요부는 요부답게 굴라며 억지로 황제에게 보내려고 했다.
‘이게 다 내 잘못인 거야? 내가, 황제를 유혹해서? 그래서 각하께서 완전히 변해 버린 걸까?’
사랑, 한다고 했잖아요.
아직은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날 신부로 맞아 주겠다고.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그의 사랑을 원하는지.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그냥 모든 것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카르델은 매번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밤중에 몰래 고향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 채 영지로 돌아가면 가문의 누구도 그녀를 반겨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분명 쫓겨날 것이다.
‘각하의 곁을 벗어날 수가…….’
이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기분. 그렇다고 비비안의 조언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나 버릴 용기는 없었다. 한평생 가문의 멸시를 받으며 혼자서 먹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비비안이 보고 싶어.’
숨 막히는 현실이 다시금 서늘하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카르델은 눈물을 떨구며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는 품 안의 책을 꼭 끌어안았다.
* * *
“하.”
율리안은 황궁을 찾은 카르델의 모습을 보자마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턱선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붉게 상기된 눈가와 뺨, 잔뜩 구겨진 치맛자락, 그리고 제대로 땅을 딛지 못하고 후들거리는 다리. 지나가다 보더라도 절정에 몇 번이고 달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좋게좋게 대하고 싶어도 항상 저러는군.’
관심을 끌려는 의도였다면 성공했다. 그는 카르델의 처참한 꼴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5월 초순이 되면 사교계 시즌에 맞춰 각국에서 귀족들이 수도로 몰려들었다. 고위급 귀족부터 하위 귀족까지. 작위가 있는 세습 귀족이라면 연줄의 연줄, 그 연줄의 연줄을 대어 어떻게든 이 자리에 초대받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보는 눈들이 많았다. 물어뜯기 위해 항상 이를 드러내고 있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이.
율리안은 지체할 것 없이 겉옷을 벗어 카르델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리고 놀란 그녀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손목을 잡아끌고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향했다.
“폐, 폐하!”
황제의 돌발행동에 수하들이 놀라 뒤쫓아오자 그는 손짓으로 그들을 물리고 빈방에 카르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그 꼴을 하고선 아주 잘도 돌아다니는군. 이러고도 네가 요부가 아니라고?”
율리안은 잔뜩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리며 바들바들 떠는 카르델을 보다가 한숨을 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어떻게든 화를 삭이고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삼킬 수가 없었다.
“그대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짐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차라리 똑똑히 말해.”
황제의 짧디짧은 인내심은 금세 한계에 달했다. 그는 위협하는 듯한 음성과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섰다.
카르델은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을 치며 벽 쪽에 바짝 등을 붙였다. 하지만 슬슬 한계에 달한 걸까. 그녀는 밭은 숨을 뱉으며 비틀거렸다. 무릎이 꺾이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뭐야, 왜 갑자기…… 술이라도 한 건가?”
율리안은 얼떨결에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카르델을 부축하며 그녀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감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나서야 온몸이 열에 들뜬 것처럼 뜨겁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정말 아픈 거였나?’
그렇다면 혼자 멋대로 지레짐작해서 아픈 사람을 몰아세우며 날뛴 꼴이었다.
율리안은 낭패 어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카르델을 살폈다. 하지만 아픈 것과 착각했을 리가 없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제 밑에서 신음을 내지르는 모습은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그러자 카르델이 녹아들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녹진하게 젖은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는 순간, 율리안은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촉촉하게 일렁이는 녹색 눈동자에서 도무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율리안은 새빨개진 얼굴로 카르델을 홀린 듯이 응시하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새가 모이를 쪼듯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점점 짙어졌다. 그는 그녀를 단단하게 감싸 안고 집요할 정도로 입안을 탐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해진 카르델은 눈물을 떨구며 정신없이 신음을 뱉었다.
“흡, 우웅, 흐읏…….”
율리안은 간절히 애원하듯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입술을 떼어 냈다. 그는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훑다가, 이내 낮은 숨을 토해 내며 그녀의 목을 야금야금 깨물었다. 카르델의 눈물방울이 툭 하고 그의 볼에 닿았다가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아 제발 그만…… 하아앙!”
기구가 또 예민한 곳을 스쳤다. 그녀는 황제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꺾었다. 서늘한 한기가 발끝에 몰리고 허리가 잘게 떨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제야 율리안은 카르델이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키스하고 깨물었다고 절정에 달할 정도로 민감한 몸은 아니었으니까.
“공작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했나?”
생각이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설마 네게 강제로 약이라도…….”
제국에서는 치료의 목적이 아닌 마약의 사용과 유통이 철저하게 불법이었다. 율리안이 당장 브론 공작을 감방에 처넣어 버릴 기세로 묻자 카르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흐, 으…….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돌아 버리기 전에 솔직하게 말해.”
그는 분노를 꾹꾹 삼키며 답하다가 갑자기 눈 사이를 가늘게 좁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르델에게서 위잉, 하고 신경을 갉작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정신없이 뛰어 대는 심장 때문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던 것이다.
‘진동 소리?’
율리안은 소리의 근원지가 그녀의 음부 언저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미간 사이를 좁혔다.
뒤늦게, 모든 정황을 눈치챘다.
“하, 아주 화려하게들 노는군.”
그는 뒤틀린 심기만큼 입술을 삐딱하게 끌어올리며 잔인하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을 뻗어 카르델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너무 축축하게 젖어 비틀면 빨래처럼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았다.
진동하는 딱딱한 기구가 만져졌다. 이 지경이 될 정도로 방치됐다면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상상하기만 해도 이가 절로 갈렸다.
“이런 취향이었나? 섭섭하군. 진작 말해 줬으면 충분히 맞춰 줬을 텐데.”
율리안은 괴짜로 유명한 대마법사 카실이 성인용품을 새로 발명하겠다면서 후원금을 요구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가 획기적인 사업안이라며 흥분하며 설명해 줄 때도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나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그 헛소리를 받아 준 것도 단순히 그가 제국에서 가장 마법 실력이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기구를 진상 받았을 때도, 카실의 마법 성인용품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 전 세계에 수출되어도 사용하기는커녕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안은 계속 진동하는 성기 모형이 전혀 필요 없었다. 그딴 것보다는 제 물건이 더 카르델을 만족하게 할 수 있었다.
대체 멀쩡히 달린 남자에게 굳이 저런 걸 발명해서 가져다 바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 괴짜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싶기도 했다. 아니면 자신을 조롱하거나.
이런 식으로 이용될 줄 알았다면 진작 카실을 풍기문란죄로 처벌해 버렸을 것이다.
“흐으, 읏. 폐, 폐하. 제발…….”
“싫어.”
가녀린 손목은 한 손으로 붙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꼼짝도 못 하게 만들 수 있었다. 버둥거릴수록 그의 손이 족쇄처럼 점점 옥죄자, 카르델은 결국 낮게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율리안은 눈물로 그렁그렁한 풀잎 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카르델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간절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밑에서 쾌감에 젖어 울부짖을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다. 자신을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안달 난 눈빛. 미칠 것 같은 표정.
“말해 봐. 네가 날 원한다고. 엉망진창으로 박아 달라고.”
그는 움찔거리는 허벅지 안쪽을 희롱하듯 손가락으로 훑으며 빈정거렸다. 자신의 앞에선 늘 싫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주제에, 공작을 위해서는 민망한 물건도 기꺼이 사용하는 모습에 속에서 살기가 끓어올랐다.
“얼마나 간단해. 박아 주세요, 그 한마디면 되는 거야.”
율리안은 카르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눈꽃처럼 반짝이는 은발이 사르르 흩어져 내리고, 흉흉하게 빛나는 연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소유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오로지 눈앞의 여자를 영원히 제 곁에 묶어 두고 싶다는 충동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흩어진 그녀의 금발을 대신 쓸어 넘겨 준 뒤 눈물로 얼룩진 눈을 보며 입매를 뒤틀었다.
“내가 네 취향에 다 맞춰 주고 있잖아, 지금.”
“하으으으……!”
율리안은 그녀 안에서 계속 부르르 진동하는 물건을 아주 느릿하게 빼냈다. 카르델의 눈가가 고통을 참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이내 질끈 감겼다.
그는 그것을 완전히 빼낸 후에 다시 느릿하게 넣었다가 빼길 반복했다. 손으로 기구를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 물건이 내벽에 쫙 달라붙어 물었다가 풀리는 게 손끝을 타고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물건을 집어넣은 것처럼 생생하게.
오히려 율리안 본인이 점점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애액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넘쳐 허벅지를 적시다 못해 흐트러져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진하게 물들였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에 다시 입술을 훑었다.
말해, 당장. 박아 달라고.
마침내 신음밖에 내지 못하던 입이 열리자 율리안은 갈증으로 바짝 마른 목울대를 울렸다.
그리고 카르델은 그런 황제의 배를 퍽하고 걷어찼다.
“흑. 흐윽, 시, 싫어. 당장 빼…….”
“…….”
“당장 빼! 당장 빼라고! 허어엉!”
“…….”
카르델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기는커녕 결국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은 쾌감도 도를 넘으면 그저 고통일 뿐이었다. 절정에 절정을 오간 탓에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역치를 한참 전에 넘어 끔찍하게 잔인한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런 카르델의 심정을 알 길이 없는 율리안은 황당해졌다. 힘없는 발로 차였다고 해도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울 뿐이었지만, 걷어차였다는 사실만으로 어이가 없어 잠시 넋을 놓았다.
잠시 후, 충격에서 벗어난 그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하…….”
율리안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짜증조차 안 났다. 황제를 걷어차다니. 지금 당장 즉결처분당해도 할 말 없는 죄를 저질러 놓고 뭘 잘했다고 우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딴 걸 넣고 온 건 너야.”
카르델은 그를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 댔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버둥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감히 브론 공작과 손을 잡고 황제를 능멸하려 들기에 위협적으로 군 적은 있었어도 강제로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겁간당하는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가엾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율리안은 유난히 투명한 피부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대로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다가도 힘을 주기도 전에 풀어 버렸다. 거슬려 죽겠는데 마음이 쓰인다. 애초에 거슬린다고 느낀 것 자체가 계속 온 신경이 그녀에게 쏠리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인지.
“……됐으니까 돌아가 쉬어라.”
율리안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손에 쥐고 있던 기구를 버리듯 바닥에 팽개쳤다. 진득하게 젖어 요란하게 진동하던 물건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카르델은 그의 난폭한 행동에 놀라 울음을 잠시 뚝 그치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안색이 사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기구로부터 해방되고 나자 정신이 서서히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에게 멋대로 말을 낮추고 발길질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자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흐윽, 히끅!”
그 꼴을 보니 율리안은 또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저 얼굴을 보이지 않을 때는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은 건지. 그리고 싫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저 미운 입이 죽도록 거슬리면서도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건지.
이렇게 자신을 괴롭게 할 거면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다가도, 그러면 그녀를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당한 만큼 괴롭히고 싶었지만, 갑자기 저렇게 울음을 터트리자 얼간이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새하얘졌다. 백치가 된 것처럼.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놓아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잡다한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여 눈빛, 표정, 행동할 것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본인도 굉장히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겁에 잔뜩 질린 카르델의 눈에 그런 게 보일 리 없었다. 그녀는 단지 황급히 옷을 추스르며 재빨리 침대 이불을 끌어 올릴 뿐이었다.
매번 몸을 섞어도 카르델의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다. 이따금 섹스 도중에 브론 공작의 이름을 부를 때면 속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왜 짐을 봐 주지 않는 거지? 팔다리를 잘라 새장 안에 가둬 놓으면 그제야 좀 봐 줄까.
수도 없이 죽이고 싶다가도, 살리고 싶은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그는 새까맣게 타올랐다.
율리안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쉽게 얻어 왔던 황제에게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카르델이란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은 엉망진창 망가트려서라도 손에 넣고 말겠다는 파괴욕까지 불러일으켰다.
조금, 음침하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은 주섬주섬 제 짐을 챙기는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건 뭐지?”
율리안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가죽표지로 장식된 책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카르델이 처음부터 품에 꼭 안고 있던 책이었다. 대체 무슨 책이기에 이 와중에도 저렇게 애지중지 챙기는지 잠깐 의문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훌쩍훌쩍 흐느끼던 카르델이 온몸을 긴장시키며 책을 바짝 끌어안았다. 마치 둘도 없이 소중한 물건을 강도에게서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했던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오른 건 당연한 절차였다. 이젠 하다 하다 단순한 물음까지 거부 받다니.
“이리 내, 당장.”
“아, 아무것도 아녜요.”
“짐을 걷어찬 책임을 묻길 원하는 건가?”
율리안은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모든 행동이 거슬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책이든,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책이든, 황제가 달라고 하면 줘야 하는 게 곧 제국의 법이었다.
그가 곧 법이었다. 감히 황제의 말에 토를 다는 건 전 제국을 다 뒤지더라도 저 정신 나간 여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며 생각했다.
‘저렇게 백지장처럼 새하얘지는 걸 봐서 그것도 빌어먹을 브론 공작이 준 건가 보지?’
카르델에게서 강제로 책을 빼앗아 오는 건 아기의 젖병을 빼앗아 오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또 어리석은 판단을 하려는 모양인데.”
하지만 율리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순순히 저 책을 제 손에 쥐여 줄 때까지 살살 기다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하던 카르델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소설책이에요.”
“소설? 고작 소설일 뿐인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길 이유가 어디 있지?”
“…….”
“금서라고 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 이리 내.”
불법이라도 눈감아주겠다는 엄청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고민에 잠겼다. 황제의 성격상 한 번 고집부린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받아 내려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실랑이하다가 책에 흠집이 날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황제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라도 트집을 잡을 것 같은데 불똥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만약 이게 평범한 소설책이라면 카르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건네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말처럼 금서라서 이렇게 망설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이건 아직 출간조차 되지 않은 관능 소설책으로, 며칠 전 비비안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었다.
“나 사실 페르디야.”
14년 만에 재회한 친구가 엄청난 사실을 고백했다. 무려 자신이 그 ‘페르디’라고 말이다.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
모를 리가 없었다. 페르디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했고, 그의 주옥같은 소설은 제국 전역에 퍼져 대부분의 귀족 영애의 손을 거쳐 갔다.
카르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페르디 소설에 열광하는 골수 독자 중 한 명이었다.
페르디의 소설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 계기를 꼽자면, 한결같이 다정하게 묘사되는 남자주인공을 들 수 있겠다. 그렇게 매너 좋고, 여자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배려심 깊고, 정중하고 또 신중하며,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 한없이 다정한, 그런 남자의 끝없는 애정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페르디는 늘 작중에서 카르델이 마음속에 품어오던 이상형만을 그렸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환상과 꿈을 품으며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작품을 쓴 작가님이 사실 비비안이었다니!
카르델은 너무 놀라 할 말도 잊고 멍하니 굳어졌다. 넋이 나간 그녀를 보며 비비안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품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신작인데 딱 한 권, 책으로 만들었어.”
“어, 어째서?”
“당연히 너 주려고.”
비비안은 특별히 아주 값비싼 가죽과 질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며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정본!
갑자기 이게 무슨 조화인 걸까. 내가 꿈을 꾸나? 카르델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얼떨떨한 와중에도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다. 비비안은 그녀에게 책을 꼭 안겨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 사실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무슨 일이야? 아니, 뭐든 말해 봐.”
“이 책의 모델이 너야.”
그 말을 남긴 비비안은 그동안 그녀가 본 것들을 차분히 읊어 주었다.
카르델은 이미 한 번 도서관에서 들킨 전적이 있었기에 두 번의 정사 모두 그녀에게 보였다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페르디의 차기 작품의 모델이 나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뮤즈가 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비비안이 사실 페르디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놀라 버리고 말았다.
“변명 같지만, 카르델이 연상될 정도로 노골적으로 참고해서 쓰지는 않았어. 최대한 영향을 받은 정도에서 그치려고 노력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인 네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 건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출간하기 전에 너에게 직접 만나러 온 거야. 비비안은 덧붙여 설명했다.
혹시 그녀가 충격을 받을까 봐 불쾌해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허락? 나한테?”
“응. 네가 기분 나빠한다면 그만둘게.”
카르델은 모델이고 뭐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존경해 오던 화가가 네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전혀, 기분 나쁠 리가 없다. 하지만 비비안이 읽어 보라고 하도 단호하게 말하기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펼쳐 보았다.
어쩐지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카르델은 성서를 접하는 신도처럼 차분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조금 격하고 난폭한 내용이 평소의 페르디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려한 문체는 여전했고, 탄탄한 구성과 감정선 또한 완벽했으며, 무엇보다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진정한 ‘관능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날 지칭하는 단어도 없고…… 제삼자가 보면 절대 모를 거야.”
카르델은 마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비안이 그녀에게서 따온 건 오로지 성격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뿐이었다. 황제 폐하와 브론 공작이 복잡하게 엮여 있는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세세한 에피소드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본인이라고 해도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사실 카르델은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페르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포용할 생각이 한가득하였다. 그녀는 흥분으로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서 무조건 괜찮다, 기쁘다고 말했다.
“대신 사인 부탁해도 돼?”
비비안은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사인을 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카르델에게, 라고 써 줘.”
“뭐? ……어어, 그래.”
“하트도 그려 줘.”
“으응.”
카르델이 이렇게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에 비비안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하게 변했다. 항상 처연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으니까.
비비안은 요구대로 사인을 전부 끝마친 뒤 내밀었다.
“꼼꼼히 읽어 보고 다시 연락해. 기다릴게.”
카르델은 알았다고 답한 뒤 그날 이후 책을 애지중지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다. 하필이면 오늘 책을 품에 안고 온 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황궁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황제 폐하나 공작 각하에게 보여 줘서는 안 돼. 알겠지?”
“그분들에겐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알게 뭐람.”
“…….”
“난 세상에서 카르델이 가장 소중한걸.”
비비안은 사인할 때 카르델이 요구했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때는 마냥 들뜨고 기쁘기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 아닌가. 카르델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페르디의 팬이었기에 비비안이 뭘 하든 상관없이 좋았지만, 황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만약 그가 흥미를 느끼고 이걸 읽기라도 한다면, 그러다가 이 소설 속 ‘대공’의 모델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건 다 내 탓이야.’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읽을 연이 전혀 없는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제의 심기는 더더욱 불편해질 뿐이라는 거였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그는 결국 최후의 협박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아니라 네 아비의 목을 쳐야 그것을 내줄 테냐?”
바로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카르델은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책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밤?”
율리안을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읊은 뒤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쳐 읽었다. 그 조심성 없는 손길에 카르델의 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누구는 보기도 아까워서 조심조심 펼쳐 읽었는데 애액이 묻어 미끌미끌한 손으로 책을 저렇게 만지다니. 하지만 가문을 약점으로 쥐고 있는 그에게 따질 처지가 전혀 되지 못했기에 그녀는 초조하게 눈동자만 굴릴 뿐이었다.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대충 휙휙 넘기는 것 같으면서도 책장을 넘길수록 구겨지는 표정을 한 거로 보아 제대로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르델은 굉장히 불안한 상황을 직감하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공’이 자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을. 카르델이 여자주인공인 ‘아이리스’고, 브론 공작이 ‘백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
“……네가 쓴 건가? 아, 그럴 리가 없지.”
브론 공작과 붙어먹느라 바쁜 네가 언제 시간이 나서. 그는 빈정거리듯 말한 뒤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아하, 알겠다. 네가 말했구나. 그렇지?”
율리안은 책표지에 ‘페르디’라고 적힌 작가 필명을 확인하더니 가장 앞면을 펼쳐 보았다. 화려한 필체로 적힌 사인 밑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카르델에게♡’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미간을 종잇장처럼 와락 구기더니, 책의 첫 페이지를 망설임 없이 찢어 낸 뒤 물었다.
“설마 남자인 건 아니겠지.”
카르델은 찢겨 나간 종이를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찌, 찢었…….”
페르디에게 직접 건네받은 유일한 사인본이 순식간에 훼손됐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두 남자 사이에서 온갖 짓은 다 당해 봤지만, 진심으로 상대를 패고 싶었던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괜찮아. 비비안에게 나중에 다시 사인해 달라고 하면 되니까.’
카르델은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율리안을 향한 원망 어린 시선을 도저히 거둘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실망했다. 그래도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브론 공작보다는 인간적인 분일 거라고 멋대로 기대했는데, 그렇게 당해 놓고도 학습능력이 없는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여자면 어떻고 또 남자면 어떻죠?”
“말해.”
율리안은 살벌한 말투와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꿀 같은 금발을 쓸어 넘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가 돌연 눈빛을 달리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뒤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어 뱉듯이 말했다. 끓어오르는 살기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분출해 내듯이.
카르델은 처음으로 느끼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분노는 서서히 체념으로 번졌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르델은 실낱같은 희망마저 완전히 사그라든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눈물에 젖은 얼굴도 서글프게 들썩이는 어깨도 전과 같았지만 서늘한 시선만큼은 순간 덜컹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건 율리안 쪽이었다.
“갑자기 말을 돌리는군. 짐이 분명…….”
“여자입니다.”
“…….”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셨을까요.”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너…….”
“피곤하네요. 이만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음성은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무심했다.
카르델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율리안이 힘없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그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해 거절하며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붙잡지 못했다. 강제로 돌아 세우지도 못했다.
홀로 남겨진 황제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멍하니 서 있었다.
* * *
율리안은 책과 책의 틈 사이로 보았던 제비꽃 눈동자를 떠올렸다.
암살이나 습격을 막기 위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동체 시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덕분에 사방이 아무리 어두워도 제법 선명하게 사물을 볼 수 있었다.
그날 도서관에서 황제와 카르델을 몰래 훔쳐보던 같잖은 시선까지도 분명 똑똑하게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한계까지 치켜떠진 눈이 그가 목격한 전부였지만 꽤 인상에 남았다. 그 여자는 얼간이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고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민한 황제만 잡아낼 수 있는 요란함이었지만 말이다.
누군지는 몰랐지만,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시간대에 도서관에 남아 있는 이라면 야간 사서밖에 없었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사서라면 당연히 알아서 몸을 사릴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율리안은 그 후로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 아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카르델이 다시 상기시켜 주지만 않았어도.
설마 그걸 소설로 공공연하게 퍼트릴 줄이야.
‘황궁에 발을 들이기 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않았단 말인가? 보고도 보지 않은 척, 들려도 듣지 않은 척. 이건 기본 상식이 아닌가?’
심지어 비비안이 그냥 시녀가 아닌 종신 계약을 맺은 사용인이라는 점에서 율리안은 더 어이가 없었다.
요즘 황궁에는 왜 이렇게 개념을 상실한 것들이 많은지. 황실에 입은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는단 말인가.
세계적인 작가고 나발이고, 그냥 잡아다가 황제를 능멸한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카르델이 슬퍼하며 실의에 잠길 게 뻔했지만 율리안은 그런 섬세한 배려심을 발휘할 인성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비비안을 조사하자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원래는 메르텐 백작 가의 유일한 여식이었단 말이지…….”
그녀의 삶이 순탄하게 풀렸다면 지금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교육받고 있거나, 이미 가주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빚에 쪼들리다가 마차에 치여 죽어 버린 전대 메르텐 백작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사실 이건 별로 놀라운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귀족 출신임에도 가문을 버리고 종신 계약을 맺은 여자의 과거가 평범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보다 율리안을 가장 경악하게 했던 건 그녀가 에이든이 직접 후원하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유일하게.
“형님께서 활자 중독에 걸린 거로 모자라 이젠 작가까지 후원하고 다니시나?”
꽤 이름 날린 유명한 작가라더니. 이렇게 되면 죽일 수가 없지 않은가.
율리안은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보좌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발렌타인 대공의 권한으로 장기 휴가를 얻어 냈다고 하더군요. 대공께서도 곧바로 영지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수도 내 저택에서 비비안 메르텐과 함께 머물렀다고 합니다.”
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그렇게까지 해 준단 말인가. 아무리 활자에 미친 형님이라도 그건 도를 넘는 호의였다.
‘애인이라도 되는 건가?’
에이, 설마. 형님께서도 여자 보는 눈이 있지.
그 순간이었다. 율리안은 머지않은 과거에 자신이 ‘아무나 붙잡고 사귀십시오!’ 하고 에이든을 붙잡고 닦달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붙잡으면 어떡합니까!’
율리안이 말한 ‘아무나’는 ‘명문가 출신의 귀족이며 참하고 현명하며 사려 깊어야 한다.’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비비안은 명문가 출신이기는 했으나 가문의 이름을 버렸고 그 외의 조건에 하나같이 들어맞지 않았다.
아니, 어디 들어맞지 않는다 뿐인가. 정확하게 반대 아닌가!
율리안은 아주 격렬하게 둘 사이를 반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간섭하는 것도 좀 모양이 빠졌다. 애초에 아무나 데려오라고 한 건 본인이었으니까.
황제는 그날로 대공을 황궁으로 불러내어 넌지시 물었다.
“형님, 도서관 사서 중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을 아십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리고 그는 그날 처음으로 야차처럼 일그러지는 에이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가 형님의 애인이냐는 말은 꺼낼 수조차 없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에이든이 되물었고, 율리안은 침묵했다. 신경 쓰인다는 한마디만 꺼냈다가는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이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는 섣불리 비비안을 건들 수 없어지자, 어떻게든 그 여자의 상판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책밖에 모르는 순진한 형님과 제 할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어리숙한 카르델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제 소설 소재로 써먹는단 말인가.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를 넘었다. 이미 율리안의 머릿속에서 비비안은 꼬리가 백만 개쯤 달린 여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황제는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곧바로 몰래 도서관을 찾았다.
“좋은 밤입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여자를 굉장히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당연히 비비안은 상대방이 무려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방긋거리는 대외적인 미소를 보이며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냐고 상냥한 말을 던질 뿐.
“너 같은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군. 형님께 조금도 어울리지 않잖아. 얼간이 같은 게.”
하지만 이어지는 율리안의 말에 그녀의 표정에 빠직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칙칙한 갈색 머리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에, 외모까지 볼품이 없군. 보라색 눈은 제법 특이하다만 그뿐이고. 대체 형님을 어떻게 꾀어낸 거지?”
아니, 이 인간은 뭐길래 다짜고짜 시비야!
조금 전까지 비비안은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에이든에게 사정사정한 끝에 겨우 황실 도서관 야간 사서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말에는 그의 저택에서 보내는 조건이었다.
비비안은 사실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원래 작가든 화가든 음악가든 후원받는 입장이라면 후원자의 자택에서 머무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다. 평일에는 자유롭게 풀어 준다는 걸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직장에 복귀한 건데.’
그녀는 여전히 에이든과의 묘한 관계를 신경이 쓰고 있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중이었다. 괜히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 머리만 아플 뿐이었으니까.
그냥 미친 듯이 일만 하자는 생각으로 의욕에 가득 차 있었는데.
‘……뭐, 얼간이? 외모조차 볼품없어?’
난데없는 비난에 비비안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참고 또 참았다. 세 번 참으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다.
황실 도서관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높으신 분들이었다. 말 한마디로 제국을 뒤흔든다는 현자이거나, 황궁을 드나들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위급 귀족. 괜히 이상한 도발에 말려들어 발끈했다가는 이쪽만 손해였다.
비비안은 냉정하게 돌아와 무례한 사내가 뱉은 말을 종합해 상황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너 같은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누군가 비비안을 좋아고 있다는 뜻이었고, ‘형님께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 누군가는 저 남자의 형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가 날 흠모하고 있었단 말이야?’
대체 누구인지 짐작도 안 갔다. 신경이 예민하디 예민한 현자들은 그녀에게 까칠하게 굴지 못해 안달이었고, 귀족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만약 그들 중 비비안을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다는 게 좀 부럽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한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저 남자 혹시…… 브라더 콤플렉스?’
자신의 남자 형제를 좋아하다 못해 심하면 광적으로 사랑하고 집착하기까지 한다는? 그렇지 않고서야 다짜고짜 나타나 저런 질투가 가득 담긴 의미심장한 말을 할 리가.
비비안의 분노는 어느새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색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율리안은 왠지 모를 불쾌함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마치 자기는 다 이해한다는 듯한 저 자애로운 눈빛은 뭐란 말인가.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혈육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때로는 그게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을 수도 있는 거고. 사실 저는 외동딸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핏줄은 물론 성별까지 넘어선 사랑의 형태도…….”
“잠깐, 잠깐만.”
그는 비비안의 헛소리를 중간에 끊어 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오히려 되물었다.
“형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트집을 놓을 정도로 형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당신이 방금 한 발언은 분명 질투하는 사람의…….”
“아니다!”
율리안은 기가 막혀 차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버럭 성질을 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황제인 그에게 지금껏 저딴 소리를 지껄인 이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있어도 그렇지!’
그는 형님의 여자 취향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율리안은 쓰고 있던 후드 모자를 뜯어내듯 거칠게 벗었다.
“…….”
비비안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넙죽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폐하의 깊고 두터운 우애에 탄복하였사옵니다.”
“이미 늦었어. 이게 지금 장난하나.”
그래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대가 황제라는 걸 파악하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 보니 눈치는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비비안을 보고 신경질 가득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죽일 수도 없고.”
그래도 짜증이 풀리지 않는지 주먹으로 카운터를 쾅 소리 나게 내리치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 듯했다. 그는 씨근덕거리며 제 새하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맙소사. 저 성질머리.’
황제가 다혈질이라니. 대체 저렇게 짧은 인내심으로 여태까지 어떻게 성군 소리를 듣고 살았단 말인가. 비비안은 부들부들 떨리는 율리안의 주먹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절 죽이실 건가요?”
“당장 죽이고는 싶다만.”
살기 가득한 표정만 봐도 그럴 것 같았다.
비비안은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머리를 팽팽 돌리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두뇌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죽이고 싶은데 죽이지 못한다는 건 그럴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형님인 에이든 때문일 게 뻔했다. 황제는 지금 대공이 비비안을 좋아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대단한 착각을!
하지만 비비안이 바보도 아니고 여기서 진실을 말해서 스스로 사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절 죽이면 대공 전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걸요!”
“하, 뻔뻔하기도 하군.”
“그리고 전 카르델의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 제가 죽으면 카르델이…….”
“시끄러워.”
“네. 제가 좀 시끄러웠네요.”
비비안은 재빨리 꼬리를 내리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키지 마라’ 하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거 사실이 아니라 대단한 착각인데요, 폐하.
‘물론 착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묻고 싶었는데, 입을 열어 봤자 또다시 닥치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입을 지퍼로 채운 것처럼 꾹 다문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렀다. 황제는 여전히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분명 에이든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살벌함이 아주 남달랐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칼날이 스치는 것처럼 오싹오싹해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밤.”
“헉!”
율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차기작 제목을 읊자 그녀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 그걸 어떻게……?”
“읽었다.”
“허어억!”
“기겁하는 걸 보니 찔리는 게 많나 보군.”
아니 그걸 어떻게 읽어? 그 원고는 아직 출간 전이었다. 유일하게 책으로 딱 한 권만 만든 건 카르델에게 몰래 건네줬는데 그게 들키지 않고서야 황제가 ‘두 개의 밤’을 알 리가 없었다.
‘들켰구나!’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가 페르디라는 사실을 전제로 말하는 것 봐라. 여기서 아무리 부정을 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손에 잡히듯 뻔했다.
차라리 페르디의 다른 소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살 떨리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황제를 소재로 써서 서브로 묘사한 소설을 들키고 말았으니 운이 나빠도 어쩜 이렇게 나쁠까 싶었다.
비비안은 하늘을 부여잡고 울고 싶어졌다. 황제 폐하라면 분명 영원히 내 소설을 읽을 일이 없다고 확신했는데! 왜 요즘 들어 자꾸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로 펼쳐진단 말인가!
비비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에이든 때문에 죽이지 못한다고 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줄 테고, 지금 당장 그 소설을 폐기하라고 하려나?’
내 자식 같은 원고를! 그렇게 애정을 가득 담아 써냈건만!
물론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목숨보다 소중한 건 아니었지만.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지 어쩌겠는가. 최악의 경우에는 몇 달간의 노력을 허공에 날려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뱉은 말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왜 아이리스가 백작과 이어지는 거지?”
“……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당장 대공과 이어지게 바꿔.”
아니 잠깐 뭐라고요?
비비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대로 작동을 하는 건지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 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얼빠진 행동을 반복해도 그녀의 청각은 멀쩡했으며 저런 헛소리를 뱉는 황제의 눈빛도 더없이 진지했다. 대체 왜.
“짐을 모델로 했으면 당연히 대공과 이어지게 했었어야지 장난하나?”
“고, 고정하시어요.”
율리안이 다시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재빨리 항복의 의사로 양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아니 그러니까, 화가 나 보였던 이유가 단순히 소설 속에 여주가 자신의 분신과 이어지지 않아서 그런 거였어? 고작 그런 얘기를 하러 오밤중에 몰래 나를 찾아왔다고?’
이딴 어이없는 결론 외에는 나질 않잖아!
비비안은 내심 품고 있던 황제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부서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무엄하다며 제국의 황제를 모욕했다는 죄목을 댈 줄 알았다.
물론 그의 친형인 흑의 대공과 카르델 때문에 선뜻 벌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설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하러 몸소 도서관까지 찾아올 줄이야.
누가 봐도 트집 잡고 행패 부리러 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마땅히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그렇게 쉬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몸일 줄은 몰랐다…….’
청렴결백하고 사생활이 깨끗하며 늘 노력하는 백의 황제.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도 노련한 귀족들을 쥐락펴락하며 무리 없이 제국을 이끌어가는 걸 보면 솔직히 존경심도 일었다.
지금의 제국이 태평성대나 부국강병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선대 황제 때보다 백성들은 오히려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잘생기고 똑똑하며 어진 황제란 제국의 자부심이자 상징이었다. 아마 모든 제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황제의 위엄은 어디에 버리신 거죠. 두뇌를 얻고 위엄을 잃으신 건가.
‘폐하께선 생각보다 더 바보였어. 성질 못 참고 씩씩거리실 때부터 알 것 같았지만.’
그녀는 지금 당장 즉결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황당한 건 둘째 치고, 비비안은 율리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여자주인공인 아이리스가 대공이랑 이어지게 하려면 그냥 아예 다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고치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원고를 폐기하면 폐기했지.
이번에도 겨우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해 새롭게 고친 거였다. 그것도 스스로 만족한, 완벽하다는 평을 내린 그런 작품. 여기서 결말을 또 바꾸는 바에야 차라리 새로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비비안은 예상외로 자신의 원고가 구제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리고 비비안은 목숨이 보장받는 한 도박에 능했다. 아무리 상대가 황제라 해도, 널 죽이지 못한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였으니 두려움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고칠 수 없습니다.”
“허? 방금 뭐라 했느냐?”
“차라리 제 목을 치십시오.”
그래, 이 대사도 언젠가 꼭 써 보고 싶었는데!
비비안은 상황도 잊고 조금 설레는 눈빛을 하다가, 율리안이 찌릿 노려보자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에이든 방패가 막강하다고 해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형님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 모양이다만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내가 널 죽였다는 걸 형님께서 모르면 될 일 아닌가.”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자 비비안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폐하, 소설은 소설일 뿐이잖습니까. 중요한 건 현실이지요.”
율리안이 순간 미간을 팍 구겼다. 마치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들은 아이 같은 표정이라 비비안은 다시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좌우간 폐하께서 한 입으로 두말할 것 같지는 않네.’
그가 지금도 비비안을 향해 살기를 피워 냈지만, 인내심의 한계의 한계까지 발휘하며 꾹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실?”
율리안은 탐탁지 않은 기운을 팍팍 풍기며 되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카르델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아직 출간 전인 원고까지 따로 책으로 만들어서 선물해 줄 정도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성가시게 굴지 말고 정확히 말해.”
“그러니까 폐하를 도와드릴 수 있다는 뜻이지요. 저는 카르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답니다. 취향, 취미, 좋아하는 음식이나 동물 같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비비안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카르델에 대해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몰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최근에 재회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열 살 때였으니까. 그런 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전부터 페르디의 작품을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카르델의 엄청난 호감과 신뢰를 얻게 된 비비안이었다.
“어때요. 이쪽이 훨씬 낫죠?”
마치 속살거리며 유혹하는 뱀과 같은 모습이라 율리안은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눈치가 빠른 사람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조금의 틈만 보이면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약삭빠른 하이에나는 끔찍이도 싫어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은 굉장히 불쾌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음침하게 숨어서 남을 몰래 훔쳐보기나 하는 여자에게 말이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무슨 약점을 잡았기에 이곳에 있지도 않은 카르델을 언급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녀가 에이든을 운운하면서 절대 결말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면, 율리안은 순순히 물러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갑자기 카르델의 이름이 나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협박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 자리에 없다는 이유로 멋대로 지껄이는 건가?
“그게 짐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에이, 다 아시면서.”
비비안은 음흉한 시선을 던지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아주 매섭게 손이 내쳐지고 말았다.
형제가 아주 쌍으로 사교성을 밥 말아 먹었다.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맞아 화끈거리는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입술을 불퉁하게 부풀렸다.
“무례하군.”
에이든이 인간 따윈 귀찮다며 유유자적 지붕 위를 누비는 나른한 고양이라면, 율리안은 매사에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앙칼진 고양이었다.
까칠하시긴. 아니 연애 사업 도와주겠다는데도 왜 이렇게 싫어하시는 거람.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이런 걸까.
‘그래도 속이 새까매 보이는 브론 공작보다는 황제 쪽이 갱생의 여지가 있어 보여서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황제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도와주지 않는 한 영영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카르델은 몸도 마음도 브론 공작에게서 쉬이 벗어날 수 없어 보였으니까.
황제 본인도 그걸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에 비비안의 소설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소설을 다시 쓰라고 할 게 아니라 현실에서 그녀와 접점을 만들 기회를 얻어야지.
‘명색에 황제라는 사람이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나보다 답답하다니.’
비비안은 생각했다.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제가 이 분야의 전문가니까. 상담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이어가던 그녀는 율리안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끝을 흐렸다. 황제는 정말로 비비안이 하는 말의 갈피를 붙잡지 못하고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무슨 분야?”
“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에둘러 말하는 건 작가의 특성인가?”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본인이 카르델을 좋아한다는 자각조차 없단 말이야?’
아니, 브론 공작을 모티브로 한 백작이랑 여자주인공과 이어진다는 사실조차 못 견디게 화가 나서 여기까지 오신 분이?
비비안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폐하, 그…… 카르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브론 공작에게 놀아나는 장난감 주제에 계속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여자.”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을 날렸던 백의 황자였다. 그런데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절망스러울 정도로 둔감하다니.
비비안은 하도 답답해 제 가슴을 치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가 정말 카르델을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그의 형인 에이든처럼, 율리안도 카르델에게 소유욕을 느끼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이것 참 복잡한 문제로군. 그녀는 턱을 쓸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르델을 보면 가슴이 막 두근거리면서도 목구멍이 콱 막힌 듯 답답하지 않으세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황제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마치 독심술가 보듯 했다. 하나의 커다란 제국의 수장이면서 저 순진한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도 그에게 이런 조언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걸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걸 배워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나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녀에게 느낀 감정을 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폐하께 도움을 드릴 수도 있어요. 모든 혼란에 대한 처방이 될지도 모르죠.”
“영문을 모르겠군. 그걸 말해서 짐이 얻는 게 있는 건가?”
“밑져 봐야 본전이잖아요.”
본전? 율리안은 그렇게 되물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아 봤자 소설 소재로밖에 쓰지 않을 것 같은 정신 나간 여자가 뭐라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비비안이 싫으면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카르델에게 온몸으로 거부당해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였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상처 난 틈을 파고들어 오는 그녀의 유혹은 아주 달콤했다.
“……너 진짜 신경에 거슬리는군.”
“헉, 저는 좋아하지 마시고요.”
“대체 뭐라는 거야.”
그녀는 정말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굴고 있었다. 저 당당한 태도를 보니 율리안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고 해결안을 얻고 싶어졌다.
자존심을 세우기엔, 율리안은 솔직히 아주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자라왔으며, 살아왔다. 그래도 꾸중하는 이가 없었고, 오히려 그렇게 교육받았으며,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다.
빨리 카르델이라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건 매우 강렬한 욕구였다.
“짐은…….”
그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간 카르델에게 느낀 감정을 털어놓았다.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막상 보게 되면 또 죽을 듯이 괴롭고, 괴로워서 그냥 죽이고 싶다가도, 결국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나날들의 연속.
“이야.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역시 심각한 병인가?”
“병…… 아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비비안은 가끔 심장이 뜯기는 것 같다며 심각하게 말하는 율리안을 황당하게 응시했다. 나름 로맨틱한 말을 의원에게 진단받는 것처럼 말하다니.
“폐하께서는 카르델을 사랑하고 계신 겁니다. 그것도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 푹 빠지셨어요.”
“흥, 결국 그 말인가. 사랑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사랑? 하.
율리안은 비비안의 답을 듣고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비웃기는커녕 입꼬리조차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이상하게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순간 누군가가 강하게 심장을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헛소리라고 여겼던 비비안의 말에 노골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라고요?”
“아니, 아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마치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그럴 리가 없어. 브론 공작이 내게 무슨 수작을…….”
“부정하셔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러는 사이 현실도 소설처럼 결말이 날지도 몰라요?”
비비안은 정말 그래도 상관없느냐는 듯 물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진짜 바보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손끝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황제를 응시했다. 자신의 감정에 좀 심각하게 둔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제였다. 아마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그 모든 감정이 사랑이라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비비안은 카르델의 짝으로 브론 공작보다 황제 쪽을 더 응원하고 싶었다.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공작보다야 차라리 감정 표현에 솔직한 황제가 나았다. 절절하게 사랑 고백을 하는 여자에게 창녀라니 뭐라니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지지할 수 있을 리가.
황제는 눈에 거슬리면 살벌하고 무섭게 굴기는 하지만, 직접 만나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질 못한 거다.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행동을 모르고 하는 것과 알고도 하는 건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한 번쯤 기회를 줘도 나쁘지 않았지만, 후자는 그냥 상종 못 할 나쁜 놈일 뿐이었다. 만약 저 모습이 연기가 아니라면 율리안은 전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잘 길들이면 한 여자에게 순종하는 충견이 될 재능이 말이다.
비비안은 황제를 상대로 엄청 무례한 생각을 하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예전에는 카르델이 누구랑 이어지든 간에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취향을 존중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카르델은 소설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확률보다 파멸하게 될 확률이 더 높았다. 예정된 불행을 모른 척 지나치는 건, 그녀의 친구 된 도리로서 할 짓이 못됐다.
물론 황제를 소설 소재로 한 번 더 써먹고 싶단 생각이 조금, 아주 조금은 있었다.
‘나쁜 남자 길들이기’ 같은.
그때 율리안이 갑자기 벗고 있던 후드 모자를 도로 뒤집어썼다. 후드 자락을 꾹 쥐고 있는 그의 창백한 손은 핏줄과 뼈마디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는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할 뿐이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런 것일 리가 없어.”
“왜죠?”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거라면 대체 누가 사랑 따위를 하고 싶겠어.”
“그럼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짐은 절대 할 일 없는 것.”
“…….”
비비안은 속으로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폐하의 교육을 담당한 놈 누구냐. 당장 나와서 머리 박아라.
“감정이 있다면 사랑을 모를 리가 없어요. 사랑해서 아프신 거예요. 보답 받지 못하니까요.”
일방적인 짝사랑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칠까 봐 일부러 상처가 될 말을 서슴없이 하고, 내가 상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또 내가 상처받고. 상대 또한 내 말에 상처를 받아 서서히 멀어지고.
상대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가도, 내 모든 걸 다 퍼 주고 희생하고 싶다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상대를 보면 원망스럽고 슬프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다른 누군가와의 행복을 빌어 줘야 할 상황이 오면 결국 무너져 내리는 그런 짝사랑.
“곁에 묶어 둘 수도 떠날 수도 없어 정처 없이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비비안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며 열심히 떠벌리다가 끝내 에이든을 떠올리고는 우울한 얼굴을 했다. 로맨스 소설 작가로서 머리로 알고 있던 짝사랑의 정의를 읊었을 뿐인데 이렇게 절절히 공감이 갈건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아직 저 정도는 아니야.’
그녀는 아직 발 뺄 수 있다고 애써 속으로 중얼거린 뒤 고개를 가볍게 털어 냈다.
“……그런 거라고요.”
그녀의 설명을 들은 율리안은 명백하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네 엉터리 소설 얘기인가?”
“짝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 짐은 짝사랑 따윈 하지 않는다!”
비비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황제를 보며 생각했다.
‘보다 보니 귀엽네.’
처음에는 괜한 말로 트집 잡는 게 짜증만 났는데, 계속 보다 보니 속이 뻔히 보이는 데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남동생 같았다. 그것도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철딱서니 없는 남동생.
무려 황제 폐하시니까 자존심이 높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날 벗어나려고 하면 억지로 팔다리를 잘라 묶어두면 그만이야. 그 정도의 일이라고!”
음, 그러니까 어린 남자아이를 다룰 때는 어떻게 했더라. 일단 사탕으로 꾀어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이니 일단 짝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짐은 그 여자에 대한 감정 따위는 조금도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이제 카르델의 감정이 폐하를 향하게 할 차례입니다. 제 소설을 읽으셨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갈등이 있기에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장면이 더욱 아름다운 거예요. 폐하께서는 그간 충분히 갈등을 겪었으니 이제 행복한 결말로 향하는 과정을 그려 낼 차례네요. 그렇죠?”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율리안이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온화한 누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행복한 결말’이라는 말을 듣자 더는 반박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거다. 인정하기 굉장히 불쾌했지만, 자신은 저 뱀 같은 여자한테 혹하고 있었다.
비비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자, 폐하. 시나리오는 전문가에게 맡겨 주시죠!”
왠지 즐거워하는 것 같은데.
황제는 그 씩씩한 표정을 빤히 응시하다가 갑자기 불쑥 팔을 뻗어 멱살을 잡아챘다. 비비안은 화들짝 놀라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황제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너.”
“네?”
“내일도 오마.”
“네?”
“거절은 미리 거절하지.”
대답할 새도 없었다. 율리안은 그녀의 멱살을 거칠게 놓은 뒤에 마치 도망을 치듯 등을 보이며 재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벗어났다.
등장만큼 빠른 퇴장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모든 걸 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비안은 율리안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하여튼 성질머리…….”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잔뜩 구겨진 드레스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열심히 가르쳐보고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카르델을 데리고 튀는 편이 좋겠다. 지금 같은 막무가내의 태도로는 절대 마음이 여린 카르델의 곁을 허락할 수 없었다.
비비안은 자신이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넘겨짚었던 율리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