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사는 도서관에서-5화 (5/13)

Chapter 5.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앗싸, 드디어 나도 연애한다!

새벽부터 출판사를 찾은 비비안은 사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동안 남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다고 놀려 먹던 망할 덴드로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연애라기보단 계약서 없는 계약 관계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연애하는 기분만 느끼면 되는 거지 뭐! 이게 다 완벽한 집필 활동을 위한 처절한 작가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비비안의 입술은 이것저것 떠벌리기도 전에 꾹 닫히고 말았다. 소파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던 덴드로가 부스스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슴팍에는 처음 보는 금발의 여자가 문어 빨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만약 다른 누가 저 장면을 포착했다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멀어지거나 얼굴을 붉히며 훔쳐보겠지만, 상대는 비비안이었다.

‘이것은 성교 후의 후희…….’

그녀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들어와 노트를 꺼내 들었다. 눈을 반쯤 뜨고 있던 덴드로는 잠기운에 취한 와중에도 어이없다는 듯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구지만 참 정떨어진다 너.”

“내가 할 소리거든. 공사 구분 안 할래? 회사에 여자를 끌어들이면 어떡해. 너 그러다 언젠가 칼 맞는다.”

“왜. 질투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 보니 아직 네가 잠이 덜 깼구나. 옷이나 입어.”

그때 그의 품에 안긴 여자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덴드로는 눈가를 둥글게 접으면서 끼를 부리듯 야하게 웃더니 여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 주었다.

얼씨구? 비비안은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노트를 들고 있는 비비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물론 저쪽에서 없는 사람 취급해 주는 편이 편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애정 행각을 부리는 두 남녀를 고스란히 메모로 남겨 놓은 비비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걸 언젠가 쓸 일이 있을까.

언젠가 양다리로 모자라 문어 다리를 걸치고 다니는 덴드로를 모티브로 쓸 날이 올지도 모르지. 물론 남자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로 말이다. 그녀는 노트를 주섬주섬 챙겨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근무시간이었다. 덴드로는 여자를 바래다준 뒤 다시 출판사로 돌아와 비비안 앞으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우려진 찻물을 홀짝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한 며칠 난리 치더니 노트는 찾았나 보네.”

“물론.”

비비안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위세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 연애하기로 했어.”

“너랑? 누군지 몰라도 정말 취향 독특하네.”

“뒤질래. 나 정도면 준수한 거지.”

비비안의 외모는 꽤 예쁘장한 편이었고, 그녀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친척들에게 지겹게 들은 소리가 그거였다. 얼굴은 예쁘구나. 시집은 잘 가겠어. 하도 많이 들은 덕분에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순결 서약 깨졌어도 결혼은 안 해야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걸 본인 입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건 또 얘기가 달랐다. 덴드로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원고를 주러 왔을 때와는 판이한 태도였다.

“그 남자, 네가 시도 때도 없이 노트 꺼내 든다는 건 알고 있어?”

“물론이지.”

“이야, 진짜 취향 이상한데.”

그거 변태 아닌가. 있는 그대로의 비비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라니. 그쪽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덴드로는 이 연애를 반대해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됐고. 연애 시작하면 뭐부터 해야 해?”

“왜 나한테 물어보시나. 천하의 페르디께서.”

“현실 연애는 잘 모르겠단 말이야. 빈정거리면 다음 원고 너 안 준다.”

“뭐든지 물어보시죠.”

덴드로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쓸었다. 역시 연애 초반이라면 데이트겠지.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대화를 나눠 보는 편이 좋았다.

물론 덴드로 본인은 연애의 정석을 그대로 밟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유혹하고 넘어오면 잠자리를 가지는 일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비안에게 순조롭게 원고를 넘겨받기 위해 그는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다 짜내어 데이트 루트를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 들었는데 봄 축제 기간 동안 중앙 정원 개방한다더라. 근처에 카페나 디저트 집도 있고. 너 돈 많으니까 연극이나 오페라, 발레 공연을 보는 것도 좋겠지. 밤이 되면 광장 분수대 앞에서 소원 동전 던져 넣고 키스라도 하는 건 어때.”

키스는 이미 해 봤지. 비비안은 그날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덴드로 네가 가르쳐 준 것치고 꽤 건전하네.”

뭐래. 연애 경험 한 번도 없으면서 건전 운운하기는. 덴드로는 닳고 닳아 세상만사 다 통달한 것처럼 거만하게 말하는 그녀를 황당하다는 듯 응시했다.

“넌 건전할 수밖에 없잖아.”

덴드로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강제로 순결해진 비비안의 운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 맞다. 그랬지.’

비비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왼손을 등 뒤로 숨겼다. 자신과 연애하는 상대가 황족에다가 흑의 대공이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암튼 네 전공 분야로 말해 봐. 소설에 참고가 될지도 모르잖아.”

“흠, 뭐 좋아.”

덴드로는 마치 큰 비밀을 알려 주듯 얼굴을 바짝 붙이고서 속삭였다.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데이트 조언보다는 사실 이쪽이 더 그의 적성과 맞았다.

“사실 궁합 못지않게 중요한 게 속궁합이지.”

“속궁합?”

그녀는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물었다.

“쿵짝이 잘 맞는다는 그거?”

“물론 그럴 때도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는 하지. 하지만 나 같은 완벽한 남자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쓸 수 있는 기술이거든. 상대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굴지 않는 한 속궁합 없이도 언제든지 맞춰 갈 수 있단다.”

“아 그러셔.”

결국 본인 자랑이냐. 자랑할 일도 참 없다. 비비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사람마다 각각 성기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 그런데 어쩌다가 칼과 칼집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있어. 그런 속궁합을 말하는 거야.”

덴드로는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그 사이에 반대쪽 손가락을 넣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 상스러운 행동에도 비비안은 딱히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눈을 깜빡였다.

“얼굴, 몸매, 테크닉 다 상관없을 정도로 죽여주는 상대가 있다니까. 내 몸과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넣는 상상만 해도 싸 버릴 것 같은 그런 상대가. 성격이 안 맞아서 관계 틀어지고 휘청거려도 절대 못 헤어지지 그런 여자랑은. 다시 없을 쾌감을 안겨 주거든.”

“그런 건 소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거 꼭 말해 주고 싶었는데 남자 성기가 무조건 크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너한테 맞는 게 중요하지.”

비비안은 아까보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연애하고 혹은 결혼을 하고 관계를 하는 사람 중에서 속궁합이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완벽하게 들어맞는 성기라니.

사람의 얼굴이 생긴 것도 다 제각각인데 어쩌면 평생을 가도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직접 합을 맞춰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웬일이야? 나랑 이런 얘기를 다 하고.”

데이트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영 건성으로 듣던 그녀가 갑자기 흥미진진한 태도를 보이자 덴드로가 그녀를 놀리듯이 말했다.

“남자도 없는데 이런 거 궁금해하면 네가 또 시비 걸 테니까 그렇지.”

분명 알아서 뭐 하냐고 빈정거리면서 놀려 댈 게 뻔했다.

“음란하기는. 작가님 진짜 이런 얘기 좋아한다.”

“여자든 남자든 인간은 다 잠재적 변태야. 갈고 닦으면 쾌락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비비안, 또 무슨 헛소릴 당당하게 하는 거야.”

“소설에서는 다 그러던걸.”

“그런 야설은 읽어도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니까.”

덴드로는 분명 누군가를 사육하거나 성노예로 만드는 종류의 소설을 읽은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소설에 영향받으니까 책 좀 가려서 읽으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남자가 질려서 도망가는 거 아니야?”

“언젠가 온전히 날 받아 줄 남자를 찾을 거거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어쩌고.”

비비안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에이든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긴 할 것이다. 하지만 연애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였고, 그가 앞으로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두게 될지도 미지수였다.

“별로 진지한 관계는 아닌데.”

관능 소설을 쓰고, 사실 소설 때문에 연애하고 싶었다고 솔직히 밝히고, 게다가 거기가 큰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비비안은 찬찬히 자신의 어록을 되짚어 보았다.

“음, 아니야. 취소. 날 온전히 받아 줄 남자는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혼자 살아야지 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역시 그렇지?’ 하고 깐죽거리는 덴드로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

“널 온전히 받아 줄 남자? 속궁합 맞는 남자 찾는 것만큼 힘들걸.”

비비안은 얄미운 덴드로를 뚱하니 응시하다가 네 성기가 작아서 속궁합에 열변을 토하는 것 아니냐고 반격했다. 갑작스럽게 남자의 자존심을 공격받은 그는 울컥해서 화를 냈다.

“하, 작을 리가 있나. 아주 실하고 거대하거든! 그리고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모양이 중요하다고! 내 건 위로 휘어 있어서 여자들이 아주 죽…….”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는 저리 치워.”

덴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느냐고 흥분하다가 비비안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조용해졌다.

그 뒤로도 데이트 조언을 빙자한 그들의 음담패설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 * *

경험하지 않아도 충분히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것이 여태까지 비비안이 해 오던 일이기도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하지만 경험을 담은 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무심한 듯 섬세한 필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고작 키스 한 번 해 봤다고 그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지니 이젠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어느 부분을 건드렸을 때 온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발끝이 저릿했는지, 또 설왕설래뿐만 아니라 그의 손가락이 뒤통수를 그러쥘 때 두피가 얼마나 예민한 부위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비안은 그 황홀했던 기분을 습관처럼 기록해 보았고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상상하는 것과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고,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고로 비비안은 자신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덴드로와의 대화는 굉장히 쓸데없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비비안은 과연 대공 전하와 내 속궁합은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서로 통성명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망상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었고, 속궁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머릿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실은 키스하려다가 볼을 꼬집혔는데 말이지.’

비비안은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먼저 위협하듯 다가와 키스를 시작한 건 대공 쪽이었는데,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황홀한 테크닉을 구사하곤 뒤로 쏙 빠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비안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어째 굉장히 수심이 깊어 보였다.

잠시 후, 에이든은 대놓고 푹 한숨을 내쉬고선 다음엔 편지로 직접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겨 놓고 떠나 버렸다.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비비안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먼저 몸을 달아오르게 한 게 누군데!’

다정한 남자는 개뿔 대공 전하는 나쁜 남자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서운한 것과는 별개로 드디어 에이든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그와 연인의 계약을 맺은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야 겨우 서로 시간이 맞는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비비안도 부족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에이든도 황제의 끊임없는 구애를 뿌리치느라 바빴기 때문에 전처럼 도서관을 들락날락할 여유가 없었다.

에이든이 직접 도서관을 찾아오지 못하니까 대공 저까지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를 기다리고 다시 답장을 보내는 일부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같은 수도 내에 있어도 파발꾼을 통해 편지를 보내면 짧아도 이틀에서 사흘은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과 연락할 땐 이렇게 답장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굴지는 않았다. 역시 표면적인 연인이라도 연인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긴장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연애는 실전이지. 비비안은 편지지에 적힌 깔끔하고 단정한 필기체를 다시금 되새기다가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볼은 첫 데이트라는 기대감에 의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래서 혼자 사는 게 편해도 다들 결혼을 하는구나.’

만나는 날까지 기다리기 속 터지니까 말이다. 비비안은 이상한 결론을 내리며 관계자 외엔 출입을 금하는 방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쥐색 드레스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예쁜 크림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옅게 화장도 했다. 외모를 가꾸는 일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비비안이 부산스럽게 구니 오고 가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아는 체를 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데이트? 애인 생겼어?”

종신 계약을 맺은 사용인들은 순결 서약을 맺어야 하지만, 적어도 연애 금지 조항은 없었다. 덴드로의 말마따나 능력이 된다면 몰래몰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 나무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당당하게 떠벌리고 다닐 일도 아니었지만.

‘덴드로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다들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내심 뜨끔한 비비안이 대충 얼버무려도 그들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녀는 준비하는 내내 떫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음흉한 눈초리를 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 참 남 일에 관심들 많으시네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비비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저리 가라는 듯 휙휙 손짓했다.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새 어느새 정각이 되었다. 야간 사서 일의 시작이었다.

* * *

“오랜만입니다, 비비안.”

여느 때처럼 6시 정각이 되자 황실 도서관을 찾은 에이든은 엎드려 잠들어 있는 비비안을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후드와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냈다.

“대공 전……. 아니, 레이. 말씀 편하게 하세요.”

“때가 되면 알아서 고치겠습니다. 지금은 이게 편하군요.”

“뭐 정 그러시다면…….”

비비안은 말끝을 길게 늘이면서 황급히 등을 돌려 눈곱을 떼어 냈다. 그녀는 잠이 덜 깨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털어내며 그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나름 첫 연애라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제 저택입니다.”

“네? 대공 전하의 저택이요?”

“화려하진 않지만 아담하고 괜찮은 곳이죠.”

마차 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후드를 벗은 그가 말했다.

그는 혹시 멀미하지는 않느냐고 친절하게 물어본 뒤에, 조금 짧은 기장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위해 후드로 다리를 덮어 주었다. 평소라면 친절하다고 감탄했을 사소한 배려를 뒤로하고 그녀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대공의 저택이라니. 남녀 사이에 이론만 빠삭한 그녀의 머릿속으로 짧은 찰나 수많은 망상이 뛰놀았다.

아니 연애하자고 하자마자 다짜고짜 저택으로 초대라니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물론 난 좋지만.’

비비안은 살짝 볼을 붉히며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언제는 키스를 대놓고 피하며 골치 아파하더니 저택으로 직접 초대한 거로 보아 그렇게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불순한 연애를 하자고 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의미의 불순함이었던 거라면 더더욱 좋습니다.

그럼 설마 지금이야말로 속궁합을 맞춰 볼 때인가.

음흉한 망상이 날개를 펼칠 무렵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잠깐, 그 흑의 대공의 저택에 가는 건데 이렇게 방심해도 돼? 저택에 데려가서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애초에 그런 흑의 대공에게 교제를 청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비비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성욕을 못 참아 신세 망친 사람 얘기는 여럿 들었는데 그게 나였다니.

‘사실, 없는 소문이라면 애초에 황위를 빼앗기지 않았겠지. 분명 뭔가 있어.’

정말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 비비안은 외면했던 진실을 떠올리곤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잡념을 쫓아내듯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잠자코 책을 읽고 있던 에이든이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뭐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민망한 표정으로 작게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비비안은 소문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분명 느꼈다. 에이든은 자신과 같은 심각한 책 마니아라는 것을 말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은 질 좋은 작품을 보기 위해 몸까지 내어주면서 연애 계약을 맺지는 않는다. 아니, 거기까지 나갈 필요 없이 애초에 작가에게 당신이 최초이자 최고가 되길 바란다고 열변을 토하지 않는다.

지금껏 관찰해온 결과 에이든은 책을 읽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딘지 무기력하고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서관에 매일같이 출석을 찍는 동안에 책을 제외한 모든 것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정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개인주의가 강하고 고양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굳이 나서서 귀찮은 악행을 자행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비비안이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자 에이든이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혹시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음, 뭐…….”

그녀는 그가 나름 신경 써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눈을 굴렸다. 여기서 솔직하게 새삼 당신이 수상해졌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덴드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대충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첫 연애라서 나름대로 데이트 코스를 짰거든요.”

비록 이야기는 데이트 코스로 시작해서 음담패설로 끝났지만. 그러자 에이든이 답했다.

“미처 배려하지 못했군요.”

“괜찮아요! 전 실내에서 하는 놀이를 더 좋아하니까!”

“…….”

그는 이제 슬슬 비비안의 난데없는 발언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흔한 편이 아니라 후드 없이 돌아다니거나 우연히 벗겨지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는 합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거나, 목숨을 구걸하거나, 다짜고짜 덤벼들거나…….”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요.”

“웬만하면 밖에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그 정도면 밖으로 나가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길 만도 했다. 물론 흑의 대공에 관한 소문들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만약 소문이 전부 사실인데 저런 말을 한다면 그건 적반하장이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비비안은 에이든의 말을 듣고 잠시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상황을 상상했는지 굉장히 성가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고.”

“네?”

“피곤할 것 아닙니까. 야간 사서도 모자라 집필 활동까지 해야 하니 밤낮이 바뀌어 있겠죠. 돌아다니기보단 제 저택에서 푹 쉬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멋대로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찾아올 때마다 카운터에 엎어져서 잠들어 있기는 했다. 비비안은 그의 말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지금쯤이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생활이 불규칙하고 밤낮이 수시로 바뀌긴 하지만 대부분은 야행성이었으니까. 밤이 되어야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비비안은 그의 세심한 배려에 내심 서운했던 것이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대공 전하.”

“레이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 아명이니까요.”

“아명이셨어요?”

황족의 아명을 막 불러도 되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던 비비안은 계약 관계라도 어차피 연인인데 뭐 어떨까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본인도 별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고 말이다.

“그럼 레이. 레이와 연관된 소문은 사실인가요?”

“글쎄요.”

또 대답을 회피한다. 알려지면 곤란한 건가. 비비안은 눈가를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소설에 도움이 된다면 황제 폐하의 정사를 몰래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서 노트에 메모까지 하는 강심장이었다. 어차피 대공과의 연애도 결론적으론 소설에 써먹기 위해 하는 것이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심정이었다.

게다가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따라온 마당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의 소굴에 발을 들이게 된 이상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쪽으로는 잡아먹어도 되지만!

“아, 거의 다 와 가는군요.”

비비안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에이든가 차창 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비비안이 시선을 돌렸다. 정말 그의 말대로 저택 하나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저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성 꼭대기에 공주를 납치해 가둬 놓고, 용이 감시를 하는 마녀의 성 같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네요.”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배경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비비안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본심을 부드럽게 돌려 말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기서 지금 당장 마왕 같은 게 소환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에이든이 답했다.

“어릴 때부터 저런 저택을 가지는 게 꿈이었죠.”

“대체 왜죠.”

“아무도 쉬이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요.”

비비안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저 허허롭게 웃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대공 전하의 대인기피증은 심각한 지경인 것 같았다. 진짜 고양이 같잖아.

“어릴 때도 책 좋아하셨어요?”

“동화를 자주 읽었죠.”

“의외네요. 레이는 어릴 때도 전문 서적 같은 거 읽었을 것 같은데.”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으니까요.”

“네?”

비비안이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되묻자, 에이든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별로 입을 열고 싶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눈치껏 알아서 말을 돌렸다.

“저도 동화 좋아했죠. 마녀에게 납치된 공주님이 탑 꼭대기에 갇혀 왕자님을 기다린다거나 하는 동화들. 생각해 보면 제게 처음 소설의 길을 열어 준 건 동화였네요.”

“비비안도 어릴 땐 보통의 아이였군요.”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대공 전하.”

그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물었다. 에이든은 이번에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제 이런 성적 호기심이 레이가 찬사 해 마지않는 최고의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를 탄생시킨 겁니다. 좀 더 칭찬해도 좋아요!”

“대단하시군요.”

에이든은 무심한 얼굴로 영혼 없는 칭찬 한마디를 툭 뱉었다. 비비안은 자신을 후원해 준다고 할 때와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그의 태도에 가슴이 아파졌다.

그때도 저 무심한 눈깔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열과 성의를 다해 당신을 최고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의 열의는 어디를 간 건가요! 이미 다 잡은 물고기라 이건가!

비비안이 울상을 짓자 그는 결국 한숨을 뱉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동화인 겁니까.”

“음, 생각해 보면 그렇네요.”

비비안이 여덟 살일 무렵, 귀족이라는 직위만 겨우 붙들고 있던 아버지가 돈을 끌어모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귀도 얇고 멍청하면서 행동력은 빠른 사람이었다.

그 후 2년간 사업이 제법 잘 되는 듯싶었지만, 비비안이 열 살이 되는 날 하루 아침에 그는 전 재산을 날려 버렸다. 다른 대륙을 건너던 가문 소유의 배가 태풍을 만나 모조리 침몰해 버린 것이다.

고귀하게 태어나 허례허식을 즐기며 살아왔던 어머니는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버지는 술에 취해 걷다가 마차에 치여 세상을 하직했다. 작위는 서자였던 아버지의 남동생에게 넘어갔다. 비비안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힘들었던 시절 그녀는 다락방에서 동화를 보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 분명 순수하게 시작했던 그 동기가 어째서 관능 소설 작가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는 동화를 읽으면서 자신도 저 공주님처럼 누가 구해 주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저를 구한 건 저 자신이었지만요.”

비비안은 대가 없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본 적 없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때 얻은 교훈은,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단단해져야 하고 현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새에 입을 달싹였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펜을 드는 것일지도 몰라요. 펜과 잉크는 저에게 있어서 일종의 방패인 셈 일지도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제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 있죠.”

가만히 침묵하며 듣던 에이든이 잠시 눈을 나른하게 내리뜨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좌석을 톡톡 하고 두들겼다.

“기우로군요. 제게도 동화는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앗, 정말요?”

비비안이 되물었으나, 에이든은 역시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비주의 같으니라고. 그녀는 왠지 아쉬운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리다 말고, 잠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저런 흉흉한 저택에 갇혀 사는 레이 공주님을 제가 키스로 깨우면 되는 건가요?”

비비안이 눈을 꼭 감으면서 입술을 내밀자 에이든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면서 답했다.

“전 공주를 고립된 탑에 가두는 마녀 쪽입니다만.”

“그럼 어린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동화는 뭔데요?”

“푸른 수염?”

왜 많고 많은 동화중에 하필이면 잔혹 동화일까. 비비안은 방금 그가 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가늠해 보다가, 진담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좌석 끝쪽으로 몸을 옮기며 잔뜩 경계했다.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한쪽만 해 줬으면 좋겠다!

‘이런 쪽의 위협은 조금이나마 먹히는 건가.’

에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어느새 마차는 저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마차는 오래가지 않아 멈췄다.

수도 중심부에 있어 마땅한 대공 저택은, 중심부에서 벗어난 외각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저택 앞에서 일렬로 고개를 숙이며 대기하고 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발렌타인 대공국의 성이 아닌 수도의 타운 하우스일 뿐인데도 사용인의 수가 수백에 달하는 것 같았다.

그 옛날 백작 가문 여식이었다 하더라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비비안에게는 그리 익숙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연미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마차 문을 열며 예를 차렸다. 딱딱하게 경직한 모습이었다. 물론 집사가 대공에게 극도로 예를 차려야 하겠지만, 극도로 긴장하는 기색의 집사를 비비안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채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에이든이 마차 밖에서 붙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비비안은 낯선 환경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몸을 사렸다.

“잡아먹지 않습니다.”

비비안의 표정이 절로 불퉁해졌다. 남을 겁에 질리게 할 소리를 대수롭지도 않게 툭 던져 놓고서 혼자 여유를 차리고 있는 모습이 얄미웠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은 동화가 ‘푸른 수염’이라니 겁먹을 만하잖아. 사람을 악의 소굴같이 생긴 저택으로 초대해 놓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의도는 악의적인 장난 말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하도 얄미워 저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다른 의미로 잡아먹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에이든은 비비안이 멀쩡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비비안은 씩씩하게 마차 위에서 뛰어내려 그의 등 뒤를 짧은 다리로 졸졸 쫓아가며 울상을 지었다.

“매정하시네!”

대공이 성큼성큼 앞질러 가고, 그 뒤를 비비안이 쫓고, 그 뒤를 집사가 황급히 쫓는 이상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가까스로 에이든의 뒤에 따라붙은 그녀는 집사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만 들리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다리 길이의 차이로 뛰다시피 걸어야 했기 때문에, 거친 호흡 소리까지 섞여 참으로 야릇하게 들려오는 말이었다.

“직접 몸으로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건 레이였잖아요?”

“…….”

그리고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헤헤 웃어 버리고 마는 그녀를 에이든은 착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원래 반대 아닌가? 왜 자신이 이 신경 줄 굵고 발랑 까진 여자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저 여자는 저 순수한 얼굴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든단 말인가.

에이든은 지식과 호기심만 넘쳐나고 실제로는 아무 경험도 없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정말 알지 못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에이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비비안을 배려한 것인지 전보다 확연히 느려진 속도로 말이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제 옆을 쫄래쫄래 쫓아오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일까.’

비비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특별히 외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비비안은 홀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란 돔과 이오니아식 원기둥은 고대 신전처럼 우아했다. 그리고 대리석마다 새겨진 아름다운 마블링은, 마치 실내에도 눈이 내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곳곳마다 조화롭게 전시된 미술품들은 그 가치를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화려하고 고전적인 외견과 다르게, 분위기는 왠지 어둡고 싸했다. 사용인들 전부 발걸음 소리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유령처럼 다녀?’

비비안은 인기척 없이 스르륵 나타났다가 스르륵 사라지는 그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놀랍고 신기했다. 지금 당장 암살자로 전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저택 주인부터 사용인까지 이렇게 완벽하게 조화로울 수가 있지.’

비비안은 실례인 생각을 하며 응접실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살짝 달곰하면서도 입에 착 감기는 맛이 그녀의 입맛에 꼭 맞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별로 배가 고프진 않은데요.”

“그럼 케이크로 하죠.”

에이든이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조각 케이크 하나가 비비안 앞에 놓였다.

그녀는 케이크를 보자 갑자기 식욕이 돋아 의식하지 못한 새 그것을 거의 흡입하듯이 먹었다. 많이 달지 않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그녀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대공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진정이 좀 되셨습니까?”

“흥분한 적도 없거든요.”

흥분한 적도 없는 상태가 저 지경이라면 흥분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에이든은 그런 눈빛으로 비비안을 지긋이 응시했다.

“제가 음식에 뭘 넣을 줄 알고 그렇게 넙죽 받아먹습니까.”

“음, 레이라면 귀찮아서 그런 일 안 하실 것 같은데요.”

“…….”

에이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밌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역시 작가라서 그런지 비비안은 남다른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치곤 푸른 수염 얘기에 굉장히 겁을 먹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 그건 역시 흑의 대공이라서?”

“그 흑의 대공에게 고백한 건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

“놀리지 마시죠. 저도 헷갈리니까.”

소문이 어디 그냥 소문인가. 흑의 대공 본인은 지금 제국 전체에 떠도는 소문들이 얼마나 흉악한지 모른단 말인가.

잠시 투덜거리던 비비안은 순해 보이는 눈매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에이든의 푸른 눈동자에는 약간의 혼란, 무심함, 그리고 읽을 수 없는 잡다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살기는 없었다. 비비안은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어떤 눈빛을 하는지 아주 절절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제 감을 믿고 싶네요.”

“제가 연기하는 거면 어쩌려고.”

“그럼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하겠죠, 뭐.”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원래 한번 결정을 내리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 성미였고, 이미 이 저택으로 오면서까지 수많은 고뇌 끝에 내린 결론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비비안의 대답을 들은 에이든이 하하, 하고 어딘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늘 기상천외한 답만 들려주는군요.”

“그래서 싫어요?”

“싫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말이죠.”

“아니 그게 왜 불행이죠!”

그녀가 울컥해서 소리 지르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차를 따르던 하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볼 정도로 말이다. 귀신같이 스르르 나타났다가 스르르 사라지는 존재가 놀랄 정도면 그만큼 보기 드문 광경인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헤 입을 벌리며 그의 웃는 얼굴을 관찰했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은 정말 몇 번을 봐도 사내다운 색기로 가득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에이든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택 지하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나왔다. 동화나 옛날이야기 속에 꼭 등장하고는 하는 그 ‘금기’가.

비비안은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하하 경직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감을 믿는다고 외친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세뇌를 받다시피 들어온 흑의 대공 괴담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장난치시는 거죠?”

“전혀요.”

“왜, 왜요?”

“제 개인적인 공간이니까요.”

에이든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고 이번에 비비안은 시선뿐만 아니라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놀리는 것이었는지, 그가 웃음을 꾹 눌러 참는 표정을 하다가 이내 다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놀리지 마세요!”

비비안은 덜컹거리는 심장을 움켜쥐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때리고 싶었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스릴러 장르의 소설 내용을 상상했단 말이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뒤따르는 사람이 착한 척을 하다가 ‘사실 난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연쇄 살인마였다’라고 고백했다고 쳐 보자. 듣는 쪽이 거의 심장마비에 걸릴 강도의 짓궂은 장난이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제 공간에 남이 헤집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건 사실입니다.”

외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그가 덧붙여 말했다.

비비안은 민망함이 밀려옴과 동시에 안도 또한 밀려왔다. 역시 저택 지하에 여자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거나 하는 건 잔혹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인 거겠지? 흑의 대공은 소문과 다르다고 굳게 믿으려고 할 때마다 소문의 장본인이 계속 저울질하니 성질이 났다.

“그놈의 푸른 수염!”

“그러게 참 겁도 없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저택까지 따라옵니까.”

“네? 아니 저택까지 부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조금은 의심해 달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럴까 걱정되는군요.”

그는 대충 손을 휘저어 사용인들을 물린 다음에 비비안을 타박하듯이 말했다.

“순순히 따라온 쪽도 사심 있을 거라 생각 안 해 봤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도 아니고 무려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인데 말이다.

비비안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대놓고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날 다른 쪽으로 잡아먹어도 된다고 말한 시점에서, 그녀의 있는지도 몰랐던 내숭은 망했다고 봐도 좋았다.

“절 여기까지 데려와서 그럴 생각 전혀 없었다고 말씀하실 건 아니죠?”

“비비안.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는 말끝을 늘이며 기품있는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비비안을 저택까지 초대한 이유는 아까 충분히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음? 그거 전하의 내숭 아니었나요? ‘손만 잡고 잘게’ 같은…….”

“……아닙니다.”

아닌 모양이다. 비비안은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뭐, 사실 오늘 당장 거사를 치르지 않아도 그녀는 딱히 상관없었다. 갑자기 저택에 초대받아서 기대에 부풀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연인의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 기간이 완벽한 소설을 쓰기 전까지이니까 그 전에 어떻게든 경험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럼 정석대로 단계를 찬찬히 밟을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미 저택에 초대받은 시점에서 정석은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게다가 에이든은 사람 많고 복작거리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 데이트도 물 건너갔고, 비비안은 밤낮이 바뀐 야행성이니 낮 동안 정신을 빼놓고 있을 게 뻔했다.

그들이 맺을 연인의 관계란 잠자리밖에 떠오르지 않는 건 비단 비비안이 음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정답은 둘 중 하나였다.

‘손만 잡고 잘게’이거나 ‘푸른 수염’이거나. 후자의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역시 전자라고 하자. 비비안은 속으로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처음에는 비비안을 위협해서 발언을 철회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철회할 리가 없잖아요!”

비비안은 한숨을 삼켰다. 역시 계속 툭툭 건드리듯이 틈만 나면 그녀를 밀어내는 행동은 위협인 모양이었다. 에이든의 의도는 ‘이래도 겁 안 먹어? 내가 안 무서워?’인 모양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계약 조건으로 몸을 운운하셨으면 얌전히 제게 몸을 제게 맡기시지요.”

비비안이 뻔뻔하게 요구했다. 테크닉 죽이는 퇴폐 미남이 황홀한 키스를 하며 몸으로 가르쳐주겠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푸른 수염 발언은 좀 무서웠지만 말이다.

“비비안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간과한 제 불찰이었습니다.”

“…….”

비비안은 에이든 안의 자신의 이미지가 대체 어떻게 자리 잡은 건지 불안해졌다.

“약속은 약속이니, 저택에 당신을 위해 작업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편한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마치자 비비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깐만요. 설마 저택에 부른 이유가…….”

“계약대로 먼저 글을 쓰시지요. 작가님.”

비비안은 한탄했다. 가둬 놓고 글만 쓰게 하려고 자신을 불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성향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손만 잡고 잘게’도, ‘푸른 수염’도 아닌 ‘글노예’라니!

분명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키스에 정신이 팔린 게 천추의 한이었다.

“제 목적은 결국 비비안을 최고의 작가로 만드는 거니까 앞으로 제 저택에서 작업하시죠.”

“저, 저는 도서관 사서인데요? 이렇게 되면 무단결근…….”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대공 전하이시죠. 비비안은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에이든이 본인 선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고 애원해도 과로사로 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만 나오던 휴가를 이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니. 심지어 장기 휴가였다.

이게 바로 권력의 맛!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이런 연인이 세상에 어디 있죠!”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절 글노예로 길들이실 생각인 건가요?”

그 말에 에이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언제든지 밖으로 나가셔도 좋습니다. 장소만 제공해 드린다는 뜻이지요.”

괜히 지레 겁을 먹었던 비비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 활동을 하게 된 이후로 마감 공포증 같은 게 생겨 버려서 순간 그가 자신을 가둬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고양이 같은 에이든은 장소는 마련해 줄 테니 이용하든 말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했다. 본인은 별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듯이 들려왔다.

“그럼 제가 작업하는 동안 제 연인은 어디서 뭘 하는 거죠? 조언자인가요?”

“글쎄요. 소설은 제가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비비안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에이든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마치 유혹하듯 웃었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러 오십시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가르쳐 드리겠다는 건, 역시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몸으로 알려 주는 그거? 비비안은 손바닥 뒤집듯이 표정을 바꾸며 의욕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모르겠다고 선생님께 질문하면 되는 것 같았다. 저번에 가르쳐준 키스도 벌써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녀의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까르륵.

그렇게 비비안의 저택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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