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철벽은 부숴야 제맛
“현자님! 아니 레이!”
축 처져서 한숨만 푹푹 내쉬던 비비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레이를 발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세상만사 해탈한 듯한 얼굴이 순식간에 봄날의 꽃처럼 활짝 만개했다.
평소보다 배는 살갑게 반기는 모습에 레이의 눈 사이가 잠시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레이는 비비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서 비비안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본인도 스스로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멍멍개같이 격하게 반응했다는 자각이 있었다.
“아뇨, 아무 일도.”
하지만 얼굴에 한가득 피어난 미소를 지우지는 않았다.
“큰일이라면, 하루 동안 레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는 것 정도가 있겠네요.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
레이는 침묵을 지켰다. 비비안은 할 말을 잃은 그가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마 지금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보였다면 ‘이 여자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제야 좀 진짜 현자 같네요.”
“그전까지는 현자 같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그럼요. 고매한 귀족처럼 느껴졌는걸.”
그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발음에서는 귀족 특유의 악센트가 느껴졌다. 동작에는 기품이 어려 있었고, 예의 바르며, 온몸에 여유가 흘렀고, 배려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담백했다.
무엇보다 예리한 경계, 상냥한 척 칼같이 선을 긋는 것도 수준급이었지. 사교계 진출을 노리는 게 아니고서야 자연스럽게 익히기 힘든 것들이었다.
“다른 현자님은 그렇게 노련하지 않아요.”
“글쎄요. 좋은 연이 닿아 정식으로 교육받기도 했고, 대체로 본연의 성정입니다.”
굳어져 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레이는 불시에 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비비안의 말을 받아쳤다. 속내를 감춘 여유로운 미소는 덤이었다.
“좋은 연이요? 궁금한데…….”
“…….”
그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큰 소리를 내며 그녀의 앞에 책을 내려놓았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 이상 멋대로 선을 침범하러 들지 말라는.
“대출해 주십시오.”
하지만 비비안은 경고를 무시했다.
“레이에 대한 건 뭐든 알고 싶은걸요.”
그간 억지로 붙들어 두던 고삐를 끊고 폭주하며 날뛰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들이댔다.
“알려 주세요. 뭐든, 배울게요.”
“…….”
“아니면 저에 대해 알려 드릴까요?”
“왜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레이가 그녀를 대놓고 경계할 정도로.
비비안은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레이는 자신이 기대하던 것처럼 마냥 다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하지만 그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 순간, 실망보다는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먼저 일었다.
“사람이 바뀐 것 같군요.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많은 일이 있었죠. 정말 긴 하루였어요.”
비비안은 하루 사이에 세상 모든 진리를 관철한 현자의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레이는 무슨 말을 꺼내려 입을 달싹이다 말고 그녀의 몰골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만.”
눈 밑이 시꺼멓다. 퀭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양 볼이 홀쭉했다.
비비안은 본인 작품에 한 번 제대로 빠지면 불면증에 시달리며 살이 급속도로 빠지고는 했다. 그것을 알 길이 없는 레이는 정말 그녀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지 진심으로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 혹시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누가 봐도 걱정할 몰골이었다.
“비비안. 지금 본인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뒤편에 있는 거울을 살피시고 다시 얘기하시죠.”
“제 모습이 좀 심한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레이가 진심으로 절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죠. 너무 기쁜걸요.”
“…….”
비비안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게 볼을 붉히며 얘기하자 레이는 잠시 표정 관리하는 것을 잊었다. 오늘따라 반응이 유별나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제비꽃을 닮은 신비로운 색감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전 오늘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평온해요.”
“의무실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전 지극히 건강해요!”
“그렇다면 마음의 문제이신 듯합니다.”
“그건 그래요. 제 불타는 마음을 레이가 송두리째 가져갔으니 문제가 생길 법도 하죠.”
“…….”
근무시간에 술이라도 진탕 퍼마신 게 아닐까. 아니면 설마 무슨 약이라도 한 건가. 레이는 이 여자를 의무실이 아니라 치안대로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짧게 고민했다.
“장난은 그쯤으로 충분한 것 같군요.”
하지만 레이는 그냥 책을 빌린 뒤 비비안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내려놓은 책 위로 자신의 손을 압박하듯 누른 뒤 무심함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비비안은 평소처럼 대출 리스트를 내밀기는커녕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에게 더욱 바짝 상체를 가까이하는 것 아닌가.
“까칠해지셨네요.”
“사서님, 본분은 잊지 말아 주시지요.”
“이런 거 싫어하는구나. 그럼 뭘 좋아해요?”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아픈 게 아니고 술도 약도 아니며 제정신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이는 비비안의 의중을 읽기 위해 빤히 쳐다봤지만, 그녀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대답 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의 말대로 비비안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집요하게 구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어제 만난 카르델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잠시 카르델이 비밀스럽게 털어놓았던 고민을 떠올렸다.
‘여전했지. 우리 둘 다 조금도 안 변했어.’
카르델이 두 남자와 엮이게 된 원인은 그녀의 가문인 ‘포르망디’에 있었다. 그녀는 자작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한평생 가문을 위해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브론 공작이 포르망디 영지에 우연히 들리게 되는데, 카르델을 발견하고는 계속 영지에 머무르며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브론 공작은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널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사교계의 꽃이라는 건, 아스티에 제국에서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수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유행의 선구자, 화제의 중심에 선 영애를 가리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황제에게 직접 꽃의 이명을 받은 영애는 아주 높은 확률로 황후가 되었다.
즉, 그 말은 ‘내가 널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포르망디 가문에서는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다며 카르델을 팔아넘기듯 수도로 보내 버렸다. 네가 황후가 되어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강압적으로 세뇌하면서.
그녀는 반강제로 사교계에 입성한 뒤 온갖 다사다난한 일은 다 겪다가, 결국 브론 공작이 약속한 대로 황제에게 직접 꽃의 이명을 받는다.
백합 영애.
비비안도 최근에 익히 들었던 이명이었다. 모두에게 본명 대신에 백합이라고 불려서 설마 그 사교계의 꽃이 카르델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도의 잘난 남자들을 손짓 하나로 호령하는 사교계의 꽃이 되는 건 영애들의 로망 아니겠는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카르델은 현재진행형으로 황제와 브론 공작 사이에 끼어 고통받고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결혼해야만 하는 남자 사이에서.
카르델은 예전부터 답답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 표현을 잘하지 못했다. 좋아도 웃고, 싫어도 웃고, 곤란해도 그저 웃을 뿐이고. 그런 타고난 상냥함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 사이에 끼여서 거절도 못 하고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결국 사랑하던 공작에게까지 증오를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카르델만 잘못했다는 말이 전혀 아니었다. 권위적이며 이기적인 남자만 꼬이는 게 어떻게 그녀의 잘못이란 말인가.
황제와 공작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도 난폭하게 구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으니, 상대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들어 먹을 리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런 놈들을……, 아니 그런 분들을 상종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취향은 존중해 줄 수 있었다. 나쁜 남자를 넘어선 나쁜 새끼가 좋은가 보지 뭐.
카르델은 브론 공작을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지만, 공작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황제와 얽히기 시작한 이후로 모든 것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고.
두 남녀의 잘잘못을 따지며 점수를 매기려는 게 아니다. 그냥 두 사람은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듯했고, 깊어진 감정의 골은 풀릴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헤어져.’
당시에 뱉지 못한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소설을 현실에 대입하면 아주 콩가루가 되는구나. 이게 비비안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마음을 숨겨 봤자 남는 건 하나도 없다.
애정을 충분하게 표현하지 않은 자의 말로가 어떤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미 틀어진 다음에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쳐 봤자 귀에 들어올 리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서로 상처밖에 남지 않는 애증 관계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레이와의 관계는 애증은커녕 안부라도 물어 주는 게 다행인 관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 바에야 장렬하게 까이더라도 일단 들이대고 볼 생각이었다.
‘주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레이에게 엑스트라 1로 기억되고 싶진 않아.’
비비안은 낯을 가리지 않는 뻔뻔한 성격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연애에 한정된 숙맥이기도 했고, 어차피 자신이 순결 서약을 맺은 상태로 마음이 통해 봤자 뭘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동정인 주제에 ‘에로스 없는 플라토닉은 연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편협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관능 소설 작가다운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레이가 상대라면 그 시시한 연애라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있으면 연애의 ‘연’ 자도 시작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레이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표현하고, 행동해야겠다. 이것이 연애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비비안이 카르델의 처지를 보고 느낀 점이었다. 친구를 반면교사로 삼아 버린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뭘 알고 이러시는 것 같진 않고…….”
음? 낮은 중얼거림에 이번에는 비비안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시선이라니. 마주쳐 본 적이 있어야 피할 것 아닌가.
그녀는 내심 속으로 ‘눈동자 색이 파란색이라는 것도 간신히 알아냈는데 말이지.’ 하고 투덜거렸다.
“저는 지금 현자님 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요.”
비비안은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그의 후드 안쪽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럽게 덧붙여 물었다.
“앞이 보이긴 해요?”
그러자 레이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로 대신 답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듯했다. 가소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아서 비비안은 그를 따라 헤헤하고 마주 웃었다.
“그럼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딱 하나만 말해 줘요. 지금 반납하시려는 로맨스 소설, 재밌게 읽으셨나요?”
비비안은 레이가 일전에 빌렸던 <신데렐라 스캔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목 그대로, 몰락 가문 출신의 여주인공이 사교계에 진출하여 공작의 정실부인 자리까지 오른다는 내용이었다.
<신데렐라 스캔들>은 그야말로 로맨스 소설계의 표본이자 교과서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내용 자체는 비비안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태어나 처음 접한 로맨스 소설인 만큼 의미가 아주 각별했다.
“재밌으려고 본 건 아닙니다만.”
“흥미가 없진 않다고 하셨잖아요.”
“제 상황에 참고가 될지 흥미가 동했을 뿐입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비비안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봄꽃을 닮은 연홍빛으로 물들어 있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아뇨. 제 남동생이 결혼하라고 끈질기게 굴어서.”
“아…….”
비비안은 알만하다는 듯, 짧게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흔히 있는 일이지.’
이번엔 혼자 착각한 게 부끄러웠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들썩이는 어깨와 흉부를 보니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레이는 순식간에 휙휙 변하는 비비안의 표정 변화가 흥미로웠는지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었다. 어쩐지 놀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로맨스 소설을?”
가족에게 결혼을 강요받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런 이유로 로맨스 소설을 빌리는 건 상당히 특이한 결정이었다.
“상황이 비슷해서?”
“신데렐라 스캔들이랑요?”
비비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이 책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 동생이란 분이요?”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형이 결혼해서 행복해지는 게 내 평생소원이야. 조카도 빨리 보고 싶고.’ 하고 투정을 부리는 귀여운 남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전에 조건이 맞는 상대를 구해야겠지만, 그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 되겠네요.”
“조건이 맞는 상대…….”
신데렐라 스캔들이라. 레이는 어쩌면 공작 가문의 여식과 혼인하길 원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평민 출신이라는 낙인이 출셋길을 다 막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의 행복을 빌어 줄 수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상당한 부자였지만, 동시에 사용인으로서 황궁에 평생 묶여 있어야 할 팔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이라면 언제든지 지원해 줄 수 있는데. 당신, 얼마면 돼요.’
비비안은 구질구질한 욕망을 입 밖에 내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러야만 했다.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 마음이 원한대로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고백도 못 했는데 실연당한 기분이 들어 속으로 끙끙 앓았다.
“하지만…….”
그때, 나른하게 말끝을 늘이던 그가 농도가 뚜렷한 입술을 달싹였다.
“별로 내키지는 않는군요. 전 사랑을 모르고 아무도 저와 혼인하고 싶지 않을 테니 여성분께나 제게나 강제적인 혼인이 되겠죠.”
제가 있는데요. 여기 시간 많고 돈 많고 당신에게 관심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비비안은 손을 번쩍 들면서 외치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제 손에 끼워진 순결 반지를 발견하고는 간질거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씨…… 나는 왜 행복할 수 없어.’
레이는 원치 않은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혼해야 하고, 연애하더라도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비비안과 어울리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비비안은 종신 계약을 맺어 황실과 결혼한 몸이었다. 그 계약을 깨트리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족뿐이었고.
‘황실이 내게 뭘 해 줬어!’
비비안은 속으로 울분을 터트리다가 심호흡을 하며 진정했다. 레이에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동생의 귀여운 투정이라고 해도 멋대로 인생에 관여하게 두진 마세요. 원치 않는 결혼을 하실 필요 없어요.”
비비안은 어젯밤 카르델의 사정을 듣고 난 뒤, 그녀에게도 같은 말을 해 줬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을 담은 조언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되든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말이에요.”
그녀는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레이는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들고 있던 책을 톡톡 두들겼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조언은 새겨듣겠습니다.”
“네!”
“그와 별개로 책을 대출해 주시지 않을 거라면 그냥 여기서 읽고 가겠습니다.”
“앗, 그럼 같이 읽어요!”
그러자 비비안이 카운터에 널브러져 있던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원래 기쁨은 나누면 두 배라잖아요. 레이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저도 좋아하니까 서로 좋아하는 것을 동시에 하게 되니 네 배의 기쁨!”
“비비안에게는 기쁨보다 휴식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귀찮게 하지 말고 퇴근이나 하라는 뜻이다.
레이는 성가셔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 화를 내거나 꺼지라고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질색했다면 비비안은 포기하고 물러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여전히 돌려 말하면서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역시 다정하잖아.’
그렇기에 비비안은 더욱 레이를 놓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해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책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현자의 뒤를 쫓으며 그녀는 더욱 굳게 결심을 다졌다.
* * *
레이는 집중한 듯 책 속에 시선을 완전히 고정한 채였다. 비비안은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면 레이는 굳이 도서관까지 직접 찾아오지 않으셔도 책을 구하실 수 있을 텐데.”
비비안은 그렇게 말문을 열면서 종자를 시키면 되지 왜 수고롭게 여기까지 오느냐고 물었다. 내심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건 아닌지 기대를 품으면서 말이다.
“비비안은 도서관의 냄새를 아시겠죠.”
도서관의 냄새라…….
“낡은 책의 냄새. 낙엽 냄새. 퀴퀴한 곰팡이와 먼지 냄새…… 그런 것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표현력이 좋으십니다.”
그야 당연하죠. 작가니까.
비비안은 레이의 상습적인 칭찬에 우쭐해졌다.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기분이 좋은걸!
“그 냄새를 좋아합니다.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들의 틈에서 헤매다 보면 마치 보석을 채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아, 뭔지 알아요. 제가 그래서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도서관으로 배정받으려고 진짜 노력했잖아요.”
황실 도서관은 원하는 책을 찾아다니는 것조차도 꽤 노동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묘미는 바로 그 웅장함에 있었다. 방황하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보물 같은 책을 찾아내는 것. 마치 작은 모험을 떠나는 듯해 두근두근했다.
책이란 그녀를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는 인도자였고.
“역시 뭘 좀 아시네요.”
매일같이 도서관을 찾을 때부터 취미가 맞을 줄 알았다. 비비안은 레이와 공통점을 찾았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제 꿈은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절판된 책들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뭐……, 저도 황궁 밖을 벗어날 수 없는 제 처지를 아니까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지만.”
어째 마무리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비비안은 갑자기 축 처지려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거 재밌어요? 철학책이잖아요.”
철학책은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개인적인 취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발언이었다. 그러자 레이는 능숙하게 책장을 넘기며 대꾸했다.
“별로 책의 취향을 타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지식을 충당하고 사고하기 위한 독서니까요.”
“와…… 도서관의 책을 다 읽으실 기세네요.”
“웬만한 건 다 읽었습니다.”
“……네?”
비비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서관은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수백, 수천, 수만을 넘어서 수십만 권의 책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면 하루에 한 권씩 치더라도 200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다.
머릿속으로 간단히 계산을 마친 비비안은 마치 편식하는 아이를 바라보듯 레이를 보며 히죽 웃고 말았다.
“충분히 취향 타시네요.”
“…….”
자리를 잡고 앉은 이후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럼 제가 레이의 지식과 사고의 깊이를 더해 드릴 새로운 책을 하나 추천해 드릴까요?”
비비안은 도서관 사서로서 그에게 흥미로운 책을 소개해 줘야겠다는 의지로 가득 찼다. 이건 어쩌면 무뚝뚝하고 타인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현자님에게 점수를 딸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럼, 부디.”
새로운 책이란 말에 흥미가 동한 것일까. 레이는 기꺼이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전에 로맨스 소설 빌려 가셨잖아요. 재밌게 읽으셨다면 이 책도 추천해요.”
비비안은 연애 조언뿐만 아니라 취향의 소설을 타인에게 영업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녀는 레이에게 새로운 로맨스 소설을 추천해줌으로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잠재되어 있던 그의 연애 감성을 깨우고자 했다.
“같은 로맨스라도 조금씩 장르가 다르거든요. 예를 들면 이 소설은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떨기 꽃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과 세상의 가장 짙은 어둠이 존재하는 곳에서의 영혼의 결합을 다룬……. 어, 어라.”
비비안은 한창 소녀의 고난과 성장 그리고 첫사랑을 다룬 마음이 따듯해지는 소설책의 줄거리에 관해 설명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얘기하던 도중 무언가 싸한 위화감을 느꼈다.
신나게 떠들던 줄거리와 책의 표지가 들어맞지 않았다.
뭔가 일이 단단히 틀어질 것 같은 본능적인 불안감. 그녀는 신이 나서 떠들던 입을 잠시 뚝 하고 멈췄다.
‘잠깐. 지금 들고 있는 책의 표지 어딘가 익숙한데.’
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감! 비비안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불에 닿은 듯 화들짝 놀라서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책의 제목을 읽어 나가자, 맞은편에서 레이의 나른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망막 속의 음란> 말입니까?”
“아, 아,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망막 속의 음란>.
이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제목의 소설은 아스티에 제국 여인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관능 소설의 첫걸음이었다. 즉, 비비안의 소설이었다.
‘대체 왜 이게 여기에!’
당장에라도 바닥에 패대기치며 나 몰라라 하고 싶었지만, 레이의 시선은 이미 쏘아지듯 그녀에게 박혀 있었다. 후드에 가려 눈이 보이지조차 않는데 마치 뚫리는 듯한 시선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제가 책을 착각하고 잘못 가져왔나 보네요.”
이건 사실이었다. 비비안이 미쳤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관능 소설을 읽겠다고 가져오겠는가. 그것도 본인이 쓴 소설을!
이 책은 순전히 이번에 낼 신작이 최대한 전작들과 겹치지 않도록 확인하기 위해 가져온 것뿐이었다. 설마 누가 볼까 싶어 카운터에 아무렇게나 놔두었는데, 지금 읽는 소설책과 헷갈려서 들고 왔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실수입니다. 방금 일은 없었던 거예요. 잊어 주세요.”
당황한 비비안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기억 조작을 시도했다.
“흐음.”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잊으려고 할수록 더 또렷하게 생각나는 게 사람 심리입니다.”
“…….”
“착각하고 가져왔다고 한들 당신의 책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죠.”
“제, 제 책이긴 합니다만.”
여러 가지 의미로 본인 책이었다. 괜히 제 발 저린 그녀가 어깨를 움찔 떨자 그가 은근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영혼의 결합이라…….”
“아, 아무래도 누가 마음대로 가져다 놓은 거 같은데요? 저는 모르는 일인걸요.”
“본인 책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비비안이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화려한 색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약점 잡았다 이거인가. 쫓아낼 구실이 생겼다는 표정이 틀림없다! 그녀가 울상을 짓는 사이 레이는 손을 뻗으며 말했다.
“비비안이 그렇게까지 추천하는 책이라면 제가 한번 봐야겠군요.”
비비안은 최대한 힘을 꽉 주며 필사적으로 책을 사수하려 했으나,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책을 낚아채고 태연하게 의자에 다시 걸터앉았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였다.
비비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매우 점잖은 태도로 <망막 속의 음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페르디 소설이었군요. 요즘 워낙에 유명하다 보니 저도 몇 번 필명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자신의 작품을,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읽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초기작을! 지금도 떠올리면 밤중에 이불을 차게 만들 정도의 흑역사를!
비비안은 이미 죽어 있었다. 사인은 수치였다.
레이는 책 내용을 가볍게 훑었다. 문장만 가볍게 쭉 훑어보는데도, 유려한 문체에 내용 자체도 꽤 감각적으로 잘 쓴 게 한눈에 보였다.
과연 자극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뜬 소설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들 정도였다.
레이로서는 상당히 후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는 괜히 짓궂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책을 읽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책장만 넘기자, 비비안은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줘!’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절로 어깨가 움찔 떨렸다. 쥐구멍을 찾던 비비안은 이내 근무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다는 걸 떠올렸다. 원래 비비안은 야간 도서관 사서였고, 지금 시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순전히 레이에게 치근덕대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본인 근무시간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퇴, 퇴근 시간이네요!”
추가 근무는 있을 수 없다!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별인사도 없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홀로 남겨진 레이는 놀란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결국 귀엽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과했나.’
계속 귀찮게 굴기에 살짝 놀리려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허둥거리며 도망가 버릴 줄은 몰랐다. 비비안은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카운터에 놓인 자신의 짐을 챙겨 빛의 속도로 도서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반응 한번 참 극단적이고 엉뚱하다.
‘의외군.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책을 앞뒤로 돌려 보다가 도서관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 * *
사고 한번 거하게 쳤다.
“노트를 도서관에 두고 왔어…….”
비비안은 무덤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피폐한 몰골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방은 이미 폭풍이 한차례 뒤집어엎고 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페르디의 아이디어 노트. 소설의 플롯, 다양한 체위, 야릇한 대사, 장소, 상황, 분위기까지 모두 적혀 있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노트에는 도서관에서 지켜봤던 격렬한 정사까지도 모두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쓰려고 해도 그때의 느낌은 절대 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목숨보다 소중한 노트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나는 대체 뭐가 문제야. 비비안은 한탄하고 또 자책했다.
‘이래서 작가라는 족속들이란…….’
그녀는 한 가지에 집중하거나 사로잡히면 시야가 좁아져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면, 원고를 하는 중에는 누가 옆에서 떠들어 대도 몰랐다. 먹지 않고 자지도 않고 씻지도 않은 채 성에 찰 때까지 소설을 집필했다.
‘이번엔 레이에게 정신이 팔렸었나 보네.’
최근에 그의 수수께끼 같은 매력에 홀려 다른 건 다 뒤로 미뤄 뒀던 건 사실이었다. 애초에 소설 소재로서 그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데 주객전도가 따로 없었다.
설마 아이디어 노트를 어디다 잃어버릴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을 줄은.
‘하지만 내 행동반경은 뻔하지.’
숙소에 없다면 분명 출판사나 도서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길을 가다가 흘리는 멍청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비안은 방을 헤집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 * *
머리 위에 비스듬하게 쓰인 왕관을 벗자 새하얀 은발이 샹들리에 불빛에 찬란하게 빛났다.
아스티에 제국의 황제, 율리안 베르나르도 프란츠 아스티에.
그는 바닥에 왕관을 내팽개치듯 던지고 왕좌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러자 수족들이 재빨리 다가와 왕관을 단상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율리안은 미간을 구기며 성가시다는 듯 그들을 물렸다.
귀족회의의 내용은 미사여구만 달라질 뿐 어전회의와 한결같이 같은 소리뿐이었다.
황후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 둘 셈이냐, 후계자 문제는 어떻게 할 셈이냐, 그리고 대공을 여전히 저렇게 둘 셈이냐.
대신들과 귀족들은 짜고 친 소리를 주고받으며 황후 후보자로 본인들의 딸자식을 언급해 댔다. 타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신들이 오면 가장 먼저 자국의 공주 초상화부터 내밀었으니.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율리안은 스스로 혈통 좋은 종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워 낼 수가 없었다.
“후…….”
방금 막 아크라 왕국에서 혼사가 들어온 참이었다. 무시할 수 없었다. 아크라 왕국은 대제국을 잇는 항로의 요충지이자, 훗날 전쟁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완충국이자, 항구를 중심으로 성장한 주요 우방국이었다.
‘아직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들이 지참금으로 들고 온 제안도 아주 파격적이었다. 혼인 상대인 공주도 소문난 미인이었고.
그녀는 날 때부터 부군에게 헌신할 수 있도록 순종적으로 키워졌고, 타국의 이방인이니 제국에서 정치적으로 마찰할 세력을 키우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보나 손은 없는 거래.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공주를 황후로 맞아야겠지.’
하지만 율리안은 대화가 오가는 내내, 한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꿀처럼 윤기가 흐르는 금발, 한 번 코를 묻으면 그대로 씹어 삼키고 싶어지는 묘한 향기, 생기 없는 녹색 눈동자.
그래.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오로지 기만의 빛을 띠는 그 빌어먹을 눈동자.
‘망할 계집.’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뻣뻣하게 굳은 몸은 요염함의 ‘요’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은 계속해서 율리안의 신경을 건드렸다. 폐하, 하고 처연하게 달싹이던 붉은 입술이 계속 아른거렸다.
요부인 척, 유혹하기 위해 천박하게 다가오다가도 곧 울먹이며 연약한 짐승처럼 떠는 모순적인 태도도.
짜증이 났다. 고작 자작가의 영애일 뿐인데 머리 어딘가 깊숙이 박혀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임 기능이 있는 아티펙트나 주문도 없이 그녀와 관계를 맺는 경솔함까지 보이고 말았다. 카르델의 배후에는 브론 공작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불구하고.
차라리 평범한 자작가의 영애였다면 임신을 시키고 후궁 자리를 던져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녀는 브론 공작의 여자였다.
‘사교계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을 자처했다던가. 하, 웃기지도 않는군.’
율리안은 아직도 연회 때 정원 구석에서 보았던 그들의 난잡한 정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싫다고 반항하는 카르델을 억지로 누르고 난폭하게 허리를 놀리던 모습은 황제가 서 있던 테라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브론 공작은 보라는 듯이 카르델을 황제 앞에서 범했고, 황제는 그 뻔한 수작을 읽었음에도 결국엔 그녀에게 끌리고 말았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흥미였다. 눈에 보이는 공작의 저급한 수에 코웃음이 나올 뿐인. 그러다가 찰나의 충동으로 여자를 취하고 버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꼬일 대로 꼬였다.
카르델, 그 어리석고 순진한 아가씨는 아직도 브론 공작이 속삭였던 거짓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다. 혀에 꿀을 바른 듯 설탕 발림을 하는 그에게 넘어가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후.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로군.’
이렇게 거슬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호기심 따위는 갖지 않는 건데. 차라리 그 여자를 아무도 넘보지 못하도록 곁에 묶어 두고 싶었지만 그건 공작만 좋아할 일이었다.
‘끊어 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어.’
율리안은 확실히 카르델에게 욕정하고 있었으나, 공작의 손에 놀아날 정도로 절실하게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굳게 믿으면서도 결국 옥좌 손잡이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표정 한번 살벌하십니다.”
그때였다. 냉기를 뚝뚝 흘리며 조소하던 황제의 표정은, 문을 열고 들어선 한 사내의 말에 순식간에 깨어졌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채, 알현실을 흙발로 짓밟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입술 끝에 물려 있는 궐련에서 붉은 잿가루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대, 대공 전하!”
갑작스러운 대공의 등장에, 사용인들 모두가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전하!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막무가내로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음?”
잠시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인 대공은 희뿌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뱉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 이 에이든이 제국을 밝히는 빛의 보호자 되시는 분을 알현하기 청합니다. 물론 허락해 주시겠지요.”
일단 쳐들어가고 나중에 통보하는 건 대관절 어느 나라 예절이랍니까!
‘저 개망나니…….’
알현실 앞을 지키던 문지기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욕설을 삼키며 울상을 지었다. 율리안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눈을 떴다.
“형님?”
에이든 발렌타인 대공. 황제의 하나뿐인 형제.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자.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에이든은 눈가에 닿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형제가 아니라 쌍둥이처럼 똑 닮았었다. 비슷한 외모 때문에 그들을 나란히 세워 두면 머리카락 색이 유독 대비되었고, 과거의 그들은 각각 ‘흑과 백’으로 불렸었다.
청렴하고 사생활이 깨끗하며 늘 노력하는 ‘백의 황자’. 그리고 입에 담기 힘든 망나니짓만 자처하고 돌아다니는 황실의 수치 ‘흑의 황자’.
두 사람이 너무 닮았기 때문일까, 극과 극을 달리는 그들의 행실은 계속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제2황자였던 백의 황자가 제1황자인 흑의 황자를 제치고 황태자로 즉위할 때까지 말이다.
율리안은 선대 황제가 승하하자 제국의 황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그게 전 대륙에 표면적으로 알려진 소문이었다.
여전히 흑이라는 별칭을 달고 다니는 에이든은 이제 흑의 대공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의 추문은 아직도 잔상처럼 그의 뒤를 쫓고 있었고, 본인 또한 그 소문을 없애는 데 조금도 노력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문 위에 새로운 소문을 덧붙여 아스티에 제국의 악몽과 같은 취급을 당하는 데에 한몫했다. 이젠 우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어서 뚝 그치지 않으면 ‘흑의 대공’이 널 붙잡아 간다, 하고 겁을 줄 정도였다.
“형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시치미 떼시긴.”
에이든은 황제와 똑같은 색채의 서늘한 벽안을 둥글게 휘며 대꾸했다.
“폐하께서 친히 절 여기까지 유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유인? 하, 유인이라…….”
어느덧 장성한 그들의 외모는 언뜻 보면 닮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굉장히 달랐다. 황제의 외모는 화려함과 반짝임에 가까웠고 대공의 외모는 어둠과 퇴폐에 더 가까웠다.
율리안이 신이라고 칭송받곤 한다면, 에이든은 마왕 내지는 악마라고 불렸다. 이젠 머리 색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황자로 태어난 두 형제의 위치가 양지와 음지로 나뉜 것처럼, 그들을 따라다니는 소문이 외모마저 뒤바꿔 버린 것만 같았다.
율리안은 에이든의 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한 피부와 짙은 눈가, 그리고 윤곽이 뚜렷한 화려한 얼굴을 샅샅이 살피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소문에 걸맞은 모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황제는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채 물었다.
“제가 형님을 어떻게 유인했다는 겁니까?”
그 말에 에이든은 품 안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한 장씩 떨어트렸다. 어떻게든 대공의 위세를 빌고자 하는 가문의 문양과 그 가문 영애들의 초상화가 새겨진 청혼서였다.
청혼서는 전부 다 황제가 직접 골라서 전달한 대공비 후보였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말이다.
에이든은 차곡차곡 쌓인 종이 위에 짧아진 궐련을 던졌다. 그러자 새하얀 연기는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어 종이를 활활 태웠다.
“가문에서 금지옥엽으로 곱게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영애들이 절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불, 불이야!”
“어서 물을 가져와!”
에이든은 본인 때문에 소란이 일어도 여유롭게 또 다른 장초를 꺼내며 ‘저와 결혼이라니. 그녀들이 가엾지도 않으신지.’ 하고 덧붙여 말했다.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린 가증스러운 표정은 덤이었다.
율리안은 입에 문 궐련 끝에 불꽃을 태우는 에이든을 보고 한숨을 뱉었다.
몇 달 전, 율리안은 에이든에게 청혼서를 보내도 답신이 오지 않자 더 강경한 수를 쓰기로 했다.
시마르 백작과 작당하고 백작의 셋째 여식을 다짜고짜 발렌타인 영지로 보내 버린 것이다. 핑계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시마르 영애를 위한 요양이었지만, 목적은 확실했다.
어떻게든 두 남녀가 눈이 맞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마음이 없더라도 황제의 뜻이 그 정도로 확고하니 못 이기는 척 혼사를 추진하라는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무언의 협박에 넘어가기는커녕 시마르 영애가 발렌타인 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시마르 영애는 졸지에 진정한 의미의 요양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녀는 대공과 말 한마디도 섞어 보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지내다가 얼마 전 자택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뒤로 계속 소식이 끊겼던 에이든이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유유자적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되니 황제도 점점 오기가 생겼다.
“시마르 영애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 겁니까?”
“얼굴도 뵌 적 없습니다만.”
“누구든 형님의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혼사를 추진하겠습니다.”
“흥미 없습니다.”
“정 힘드시면 참한 여자와 연애라도 해 보라고 제가 간곡히 부탁드렸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싫습니다.”
에이든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감정이나 욕구에 둔한 편이었다. 평범한 연애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황족과 귀족 대부분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에이든은 결이 달랐다. 대화를 주고받으면 그가 마치 교묘하게 인간 흉내를 내는 괴물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괴물이라기보단 벼려진 검 같군.’
날카로운 검날이 눈앞에 번뜩이면 기겁하고 덜덜 떨며 피하듯이, 혹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며 자비를 구하듯이.
‘선황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변하셨던가. 아니, 그 전부터 서서히 달라지셨지만.’
율리안은 그런 에이든이 안타까웠다. 한때 형님 아우 하며 장난도 많이 치고 웃고 떠들던 나날들이 이젠 까마득한 꿈결처럼 느껴졌다.
혼인해서 평생 부대끼고 살 여자라도 생기면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그냥 아무나 잡고 사귀십시오!”
“사람의 감정을 농락하고 기만하는 건 취향이 아닙니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
율리안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신념 뚜렷한 개망나니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손을 휘저어 시녀와 시종들을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든은 제게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황제에게 보답하듯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물론 제 딴에 부드러움이었지, 보는 사람에 따라 저도 모르게 낯을 붉히게 하는 야릇한 미소였다.
대공만 보면 부리나케 도망가던 이들마저도 망연하게 서서 시선을 고정하게 만드는.
“형님께선 온갖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시지만, 유일하게 여자 문제는 깨끗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러니 그 부분을 이용하면 제국에 퍼진 형님의 악명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에이든은 빨아들인 연기와 함께 낮은 음성을 흘리며 황제를 응시했다. 어리석은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계속 고집을 부리신다면 저도 강경한 수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수 말입니까?”
“다음 어전회의 때 형님께서 참한 여인을 데려올 때까지 국혼을 미룰 거라고 선언할 겁니다.”
그 말에, 대화를 나누는 내내 느긋하던 대공의 미간에 마침내 금이 갔다.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대를 이을 후사가 없어 황실이 무너지고 제국이 무너지면 전부 형님께서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때 대공의 안색을 살피던 황제의 측근은 흠칫하고 놀랐다. 순간 에이든의 푸른 눈동자에 명백한 살의가 떠오른 탓이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대공의 생각이 읽히는 듯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율리안을 찬찬히 훑는 시선은 마치 지옥의 낙인을 찍으려는 악마 같았다.
선대 때부터 대를 이어 황제를 보필해 온 측근은 알고 있었다. 에이든이 반역을 꿈꾸지 않는 이유는, 그가 권력과 명예가 아닌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율리안이 지금까지 죽지 않고 무사히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연유였다.
“…….”
에이든은 노골적인 살기를 담았음에도 겉보기에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잔잔했다.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기물 같은 눈빛이었다.
그것이 대공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살인마저도 숨 쉬듯 자연스럽다는 것. 황제의 측근이 마른 침을 삼키자 에이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 그러시다면 폐하의 뜻대로 해 드리지요. 이해관계가 맞는 좋은 상대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는 예를 다하는 것처럼 가슴께에 손을 얹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앞으로 쏟아졌다.
율리안은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도 그만 철 좀 드셔야지요. 정착하실 때도 됐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방금 죽을 뻔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의 측근은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 * *
“이게 누구야.”
비비안은 맞은 편에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낮에는 웬만하면 황궁을 돌아다니기 싫은 거였는데.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도망친 개새끼 아니야?”
그는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사용하며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레슬리 메르텐. 메르텐 백작가 장자. 숙부의 첫째 아들이었다.
레슬리가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정계에 진출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하지만 술중독과 도박 중독에 빠져 살던 한량 꼴통이 정말 황궁을 드나들 줄은 몰랐지.
비비안은 레슬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또 따라붙는다. 무식하게 커다란 몸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비비안이 표정을 지운 싸늘한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자 ‘이제 어쩔 거지?’ 하고 눈썹을 까딱였다.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비비안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달싹였다.
“멍멍.”
“…….”
“왈왈. 크르릉.”
“……미쳤나?”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짖다가 개라서 인간의 말은 할 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레슬리는 비비안이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하고 굳어서 벌벌 떨 거라고 예상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가 아직도 열 살 꼬맹이로 보이나.’
비비안은 이제 다락방에 홀로 웅크려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한 업계의 정상에 오른 능력자였지.
“멍멍?”
그녀는 뚱한 얼굴로 개소리를 마무리 짓고는 아예 등을 돌렸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붙잡혔다.
“하하, 못 보던 새에 새로운 재롱이라도 배웠나 봐? 이젠 짖을 줄도 아나 보네?”
아무래도 비비안을 완전히 짓밟을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꺼지라는 말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같은 개의 언어로 했으니 알아들으셔야지요.”
“뭐, 개?”
“제가 개라면 같은 개의 핏줄인 그쪽도 개 아닌가.”
“하, 여기서 개는 너 한 마리뿐이다. 메르텐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황실 개를 자처한 너!”
그놈의 메르텐, 메르텐.
능력이 없으니 내세울 게 핏줄밖에 없는가 보다. 저 남자에게서 가문의 이름을 빼면 남는 게 뭘까. 비비안은 레슬리가 백작가에서 내쫓기면 바로 거지 신세로 전락해서 굶어 죽을 거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이건 네 목줄이냐?”
레슬리가 순결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비안은 몸을 뒤로 물리며 그의 손이 제게 닿기도 전에 찰싹 쳐 냈다. 동시에 질 나쁜 잔인함이 그의 눈동자 위를 긁고 지나갔다.
맞는다.
손찌검을 예감한 비비안은, 그가 멱살을 잡아채기 전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말씀대로 전 목줄 찬 황실의 소유물이라서요. 제게 흠집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십니까?”
황궁에서 그냥 사용인과 종신 계약을 맺은 사용인은 염연히 달랐다. 종신 계약을 맺으면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는 대신에 철저하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누구도 함부로 손을 올릴 수도 없었고, 감히 억지로 취할 수도 없었다.
‘황족은 예외긴 하지만.’
어쨌든 백작가 영식이라도 함부로 손을 올릴 수 없었다. 메르텐 백작이 제아무리 아들을 아낀다고 해도 황실 소유의 시녀에게 손찌검한 사고까지 수습하긴 힘들 것이다.
“겁먹기는. 내가 뭘 했다고 벌써 이빨을 드러내는 건지 모르겠군.”
협박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레슬리는 똥 묻은 개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겁을 먹은 건 오히려 본인 같았다.
“버릇 나쁜 개를 길들이는 방법에 꼭 폭력만 있는 건 아니지. 기대하고 있어라. 다음에 보면 네발로 기면서 용서를 구걸하게 될 테니까.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두고 보지.”
레슬리는 삼류 양아치로 등장하는 엑스트라나 할 법한 대사를 뱉더니 그녀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너무 뻔한 반응이라 소설에서조차 써먹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별것도 아닌 놈.’
어차피 아무 짓도 못 할 거라는 거 다 안다. 비비안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어깨를 털어 낸 뒤, 다시 도서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먼발치에서 레이가 관찰하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는 여느 때처럼 새까만 후드 자락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후드 차림 때문에 더 눈에 띄었다.
“레이에게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 버렸네요.”
비비안은 그에게 다가가면서 뻘쭘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벽에 기대어선 채 잠시 말이 없던 레이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움직임을 그대로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가족이 멋대로 인생에 관여하게 두지 말라고 하셨던가요. 그런 조언을 한 이유 알 만하군요.”
그는 마치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레이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건가?’
비비안은 핏빛 입술 위에 드리워진 냉소가 자책이라고 넘겨짚은 뒤,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마음 상해할 것 없다면서 말갛게 웃었다.
“저딴 놈…… 아니, 메르텐 영식 정도야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친척입니까?”
“친척이었죠. 이젠 남이고. 그런데 여전히 제 인생에서 꺼져 줄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치워 드릴 수 있습니다.”
레이가 한쪽 팔을 벽에 지탱하며 몸을 비비안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삐뚤어진 입술 끝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치워? 비비안은 벽을 짚은 레이의 흰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수로요?”
“원한다는 한마디만 하신다면.”
“그게 뭐예요.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신가.”
비비안은 실없는 소리를 하는 레이 때문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의 것과 견주어도 될 정도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말을 뱉을 때마다 늘씬한 근육이 붙은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지면서 손목에 골이 움푹 패었다.
“그래서, 원해요?”
닿을 듯 말 듯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비비안은 마침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답답한 후드와 흰 가면 때문에 유난히 붉은 입술만 도드라져 보였다.
입술 한번 더럽게 예뻤다.
‘원합니다…….’
저 그린듯한 모양새에 장미 꽃잎처럼 붉고 탐스러우며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한 입술…….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건 그림의 떡이다. 운 좋게 그의 호감을 사서 연애를 하게 된다고 해도 절대 맛볼 수 없는 거야. 만약 맛볼 수 있다면 그건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만찬이겠지.
비비안은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다독이니 피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숨소리조차 관능적인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플라토닉 러브가 가당키나 한가. 필사적으로 악마의 유혹을 견디는 성직자도 아니고.
하지만 현실은 참혹한 법이다. 비비안은 종교에 귀의한 심정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큼, 됐어요. 왜 레이가 그런 수고를 들여요?”
그녀는 헛기침하며 슬슬 자리를 옆으로 비켰다. 저 색기 넘치는 남자가 자꾸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영식이 황실 눈에 닿지 않는 수단을 통해 은밀하게 접근해 온다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네?”
비비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비비안의 삶을 발밑에서부터 천천히 무너트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르나 봅니다.”
아, 메르텐 영식은 지능이 떨어져서 그 방법조차 모를 것 같지만. 레이는 신랄하게 덧붙였다.
“족쇄가 채워져 도망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워도 죽지도 못하는 피 말리는 삶,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따끔거리는 시선이 비비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살 떨리는 협박이란 말인가. 당황해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비비안은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혼란을 지우고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표현 한번 살벌하시네요.”
“걱정?”
“제가 귀족 영식에게 위험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던 거죠?”
그녀의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살벌하게까지 느껴졌던 분위기도 조금씩 풀어졌다. 제대로 정곡을 찌른 걸까.
“거슬리긴 하네요.”
한숨을 내쉰 레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무래도 원하게 된 것 같습니다.”
“네, 네? 뭐를요?”
“비비안을요.”
그 말에 애써 경건하게 다스린 마음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비비안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인 채 입술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가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 예?”
“저와 연애라도 하고 싶으십니까?”
“그……! 그건…….”
비비안은 똑 부러지게 말할 땐 언제고, 말끝을 어물어물 흐렸다. 눈 뜬 채로 기절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긴, 비비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심각하게 티가 나기는 했다. 이론에는 업계 탑이라 할 정도로 빠삭해도 경험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본인한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다니.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비비안은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꾹 움켜쥐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현자님, 생각보다 당돌하시군요.”
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할 소리를.”
“제 수작을 이미 눈치채셨다니 어쩔 수가 없군요. 넘어와 주실 건가요?”
“제게서 뭘 원하십니까?”
“연애요.”
“연애를 통해 뭘 원하시는데요?”
아이 어르듯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비비안은 그대로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는 그녀가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연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취할 이득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귀신인가? 비비안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들의 나눈 대화 중에 어느 부분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이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 티가 난 건 그렇다고 쳐도, 그 속에 흑심이 있다는 것까지 간파하다니.
역시 양파일 거라고 예상했던 대로 보통은 아닌 남자였다.
“원하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사서님을 핍박한 가문의 복수?”
“엥, 아뇨!”
복수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가끔 밤중에 이불을 걷어차며 울화통을 터트리긴 하지만 비비안은 지금 삶이 더 재밌었다. 솔직히 말해서 복수한답시고 마음 쓰면서 시간 낭비하기가 더 싫었다.
“재력을 원하십니까?”
“돈 필요 없어요.”
썩어 넘치게 많았다.
“명예? 권력?”
“세상에 그것만큼 책임져야 할 것 많고 귀찮은 게 어디 있는데요.”
그녀가 필명으로 본명이 아닌 페르디라는 가명으로 작가 활동을 한 건 사생활을 잃고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현자님과 연애한다고 해서 복수도 이루고 돈, 명예, 권력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속물적인 거 하나도 안 바라요. 순수하게 현자님을 바란답니다.”
비비안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사실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이상형에 상당히 부합하는 그와 연애경험이 필요했다. 더 정확히는 실감 나는 연애 묘사를 위한 경험이 필요한 거지만.
“제 마음은 필요합니까?”
“현자님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까지는 안 바라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비비안, 그러니까 여주의 관점에서 묘사해야 할 감정과 성적인 욕망이었다. 남주의 심리 묘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건 현실적인 것보다 환상으로 덮어 두는 편이 더 멋있을 테니까.
“그럼 제 몸을 바란다는 겁니까?”
그게 말이 그렇게 되네.
연애를 핑계로 몸을 바라다니. 비비안은 스스로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거 보세요. 저는 족쇄가 채워진 안전한 짐승입니다.”
비비안은 아주 솔직하게 자신을 짐승이라 칭하며 반지를 재차 보였다.
“손만 잡는 것이 제게 허용된 최대한의 접촉이겠죠. 덮치지 않아요.”
“…….”
“다 됐고 몸만 오시면 제가 책임지고 먹여 살려 드릴 수도 있어요.”
검은 속내를 숨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마음을 다해 말했다.
“마음에 드네요.”
그러자 레이가 턱을 문지르던 손을 입술 쪽으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도톰한 붉은 선을 덧그리는 유려한 손가락은 저명한 화가의 손길 같았다.
어쩜 저렇게 턱선과 입술이 예술작품인지, 그의 작은 습관마저 숨죽인 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서로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군요.”
난 지금보다 더 솔직해질 수가 없는데? 레이가 평소처럼 일정 거리를 지키면서 담백하게 떨어지자, 비비안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렇게 방심하기가 무섭게 불쑥 그의 손이 다가와 비비안의 왼손을 덮었다. 단지 겹쳐졌을 뿐인데 비비안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다.
그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손가락으로 약지 위에 끼워진 은색 반지를 덧그리며 말했다.
“한동안 바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조만간 도서관에서 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는 오늘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갑자기 사무적으로 돌변해서 품속의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그럼 도서관에서 다시 뵙죠.’ 하고 답하며 계약 성립을 뜻하는 악수를 청할 뻔했다.
‘……그래서 방금 나눴던 대화는 대체 뭐였던 거야?’
혼란스러워할 때쯤 그가 덧붙였다.
“단둘이서. 은밀하게.”
작게 속삭인 레이는 부드럽게 맞잡은 손을 미끄러트려 그녀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느긋하게 쓸었다. 비비안은 손가락을 꾹 말아쥐었다. 작은 접촉일뿐이었는데 그와 살갗이 닿지 않는 곳까지 찌릿하게 전율이 일었다.
비비안은 넋을 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음…….”
아무것도 없었다.
비비안은 카운터 책상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으나 노트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떨어트렸나 해서 마구잡이로 바닥을 더듬었다.
손에 먼지만 잔뜩 묻어났다.
“무슨 일이야?”
그때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주시하던 마리가 다가와서 물었다. 주간 사서 중 비비안과 가장 친한 사람이었다.
“여기 노트 같은 거 없었어요?”
“그런 게 있었으면 챙겨 뒀지.”
숙소에도 없고 도서관에도 없다면 그럼 남은 건 출판사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출판사에도 노트를 두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비비안은 점점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출판사엔 노트가 없을 것 같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내가 노트를 마지막으로 본 게 도서관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애써 호흡을 고르며 침착하게 행동하던 비비안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노트를 홀랑 주워 갔거나 노트를 읽은 뒤 비비안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훔쳐 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에게 실수로 페르디의 <망막 속의 음란>을 보여 주기 전에 노트를 살폈던 것 같았다.
‘분명 카운터에 놔뒀던 것 같아.’
그때 마리가 어쩐지 조금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막 출근했을 때 시꺼먼 후드를 쓴 현자님 한 분이 카운터 앞에 서 있는 걸 보기는 했어.”
설마.
비비안이 서서히 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끼익, 목 관절에서 기름칠이 덜 된 고철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금방 티가 났다. 지금 하는 말은 진실이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거짓말할 이유도 전혀 없고.
‘레이가?’
비비안은 새벽이 되면 찾아와 그녀를 깨워 주는 실루엣을 떠올렸다. 매끈한 턱선과 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짓궂은 면모가 있긴 하지만 상냥한 말만 할 줄 아는.
그는 타인의 좋은 면을 먼저 봐 줄 줄 알고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방식이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화가 나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그런 다정한 사람이었다.
지금 설마 레이에게 노트를 도둑맞았단 말인가? 비비안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가 가져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마지막 단서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발 아니길 바라고 있었지만.’
만약 정말로 노트를 가져간 게 레이라면, 그 노트의 중요성을 몰랐다 하더라도 엄연한 도둑질이었다.
‘하지만 레이가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망막 속의 음란>도 사라진 뒤였다. 그건 도서관 책이 아니라 초판본으로, 비비안이 직접 페르디의 사인까지 해 둔 것이었다.
그녀가 도망쳐 버렸으니 레이로서는 책을 가져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혹시 그가 소설과 노트를 대조해 본다면, 비비안이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였다는 사실을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웬만한 눈썰미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레이라면…….’
그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되짚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과 페르디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이가 알아차렸다고?
‘그럼 도서관에서 만나자는 건 뭔데?’
그러고 보니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지금까지 내내 그녀의 관심을 철벽으로 쳐 내던 그가 갑자기 연애하고 싶냐고 묻더니 도서관으로 불러내다니. 뭔가 낌새가 이상하잖아.
비비안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계속 나쁜 쪽으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예를 들면 비비안이 페르디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연애를 미끼로 불러내서, 노트를 가지고 협박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돼.’
비비안은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빠르게 도서관 밖을 벗어나 현자의 탑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는 겉모습부터 칙칙한 검은 현자의 탑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입구부터 막히고 말았다.
‘아, 맞다.’
현자의 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황실 도서관보다 더 출입이 엄격했다.
“무슨 용무입니까?”
문지기로 보이는 병사가 도서관 사서 복을 입고 있는 비비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비비안은 자신이 성급했다는 사실에 반성하며, 병사가 자신을 쫓아내기 전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임기응변에 나름대로 능한 편이라 입에 침을 바르지 않아도 거짓말이 쑥쑥 튀어나왔다.
“황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비비안이라고 합니다. 현자의 탑 소속이신 레이 님께서 맡겨 주신 자료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자료라면 제가 직접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굉장히 중요한 극비 자료이기 때문에 레이 님께서 직접 전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말씀만 좀 전해 주세요.”
병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비비안을 살폈지만, 그녀는 뻔뻔한 얼굴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만 전해 주겠다며 탑 내부로 들어갔다.
비비안은 레이가 이곳에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현자들은 도서관, 탑, 학기 중이라면 아카데미, 이렇게 세 가지 루트 외에 다른 곳에 머무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귀족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레이는 일전에 자신이 평민 출신이라고 비비안에게 밝힌 바가 있었다.
하지만 한참 뒤,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한 병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현자의 탑에 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현자는 없습니다.”
그는 비비안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쏘아붙이듯 말했다.
“제법 머리를 쓰신 모양이지만 좀 더 그럴듯한 수법을 떠올리셔야겠군요.”
“네?”
“비비안 사서님. 용건 없으면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 시각 이후 정당한 출입증 없이 모습을 보이면 무력을 행사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레이가 없다니?”
레이가 현재 부재중이라는 것도 아니고 레이라는 현자 자체가 없다니. 말도 안 된다. 비비안은 황당함에 한동안 문지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결국 철문 밖까지 쫓겨나고 말았다.
“하.”
그녀는 한참 동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현자의 탑에 레이라는 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태까지 현자의 탑을 소속으로 밝히고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던 사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뭐야 이게…….”
사실, 레이는 확실히 수상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는 구석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현자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차라리 노련한 귀족이라고 하면 모를까.
하지만 귀족이라면 굳이 현자 분장을 하면서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는 않을 터였다. 귀족이 정체를 숨길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사기꾼!’
맙소사. 그동안 호감을 품었던 사내가 사실 신분을 위장한 사기꾼이었다니.
‘그럼 여태껏 서로 나눈 대화도 모두 거짓말이고, 그가 보여 준 모습들도 다 연기였단 말이야?’
지금 정체도 모를 남자에게 마음을 농락당한 것도 모자라, 작가에겐 생명이나 다름없는 노트까지 빼앗겼다고? 비비안은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그만 뒷골을 잡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