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물 만난 물고기
“사서님.”
“헉!”
비비안이 기겁하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거대한 사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내는 그녀의 반응에 의아했는지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여느 때처럼 비비안이 카운터에서 엎드린 채로 곯아떨어져 있기에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웠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허공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손을 갈무리한 남자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네? 네? 아니요. 어, 그런가?”
비비안은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어벙하게 대답했다. 정신은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고 있었다.
“……꿈?”
제비꽃을 닮은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했다.
‘언제 잠들었지?’
창문 사이로 어스름하게 밝아져 오는 새벽빛이 보였다. 비비안은 자신이 잠들어 있을 때조차 생명줄처럼 꼭 쥐고 있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흥분과 설렘 그리고 불안과 경악으로 가득했던 어젯밤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를 본 것도 분명…….’
꿈이 아니다.
비비안은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듯 마주쳤던 황제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황제의 시선이 낙인처럼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내가 미쳤지.’
전에 없는 참신한 소재를 얻었다는 욕망에 눈이 멀었다. 요요한 달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
비비안은 남녀의 뜨거운 정사와 그것을 시뻘게진 눈으로 기록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까지는 막 나가지 않았을 텐데. 이게 전부 다 승부욕에 가차 없이 불을 지핀 출판사 사장 때문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검은 후드의 사내를 멍하니 응시했다. 매일 새벽,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도서관을 오는 현자 레이였다.
“무리라도 하신 모양입니다.”
레이가 비비안을 살피려는 듯 그녀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후드 사이에서 스치듯이 푸른 빛을 본 것 같았다.
비비안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비명을 꿀꺽 삼켰다.
황제와 같은 색의 눈동자였다.
푸른 눈. 갈색만큼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비안의 보라색 눈동자만큼 희귀한 색은 아니었다.
‘애초에 체격도 다르고.’
비비안은 직업병 때문인지 관찰력이 뛰어나고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분명 레이 쪽이 황제보다 더 키가 크고 다부진 느낌이었다.
온몸을 후드로 둘러싼다 해도 몸의 실루엣은 대강 보이기 마련이다.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몸은 아무리 봐도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였다.
하지만 이 순간 하필 황제를 떠올린 건 다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게다가 색채와 농도까지 너무 똑같기도 했고.
‘분명 황제와 눈이 마주쳤어.’
하지만 비비안의 관음이 거슬렸다면 진작 쫓아와서 목에 칼을 들이댔을 것이다. 황제의 손에 즉결처분당해도 그녀는 할 말이 없었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비비안은 죽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관대하게 넘어가 줄 정도로 황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뜻인 것이다.
‘휴, 어쨌든 살았네.’
비비안은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큼, 하고 헛기침을 해 준 뒤 입을 열었다.
“현자님 벽안이세요?”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레이는 코끝까지 오는 후드 자락을 손끝으로 당기며 제 얼굴을 더욱 단단하게 가렸다. 후드 안에는 얼굴 반을 가리는 흰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저렇게 꼭꼭 숨기지 않아도 어차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을 보이기 싫은 건가.’
참으로 수상쩍은 태도였지만 비비안은 그러려니 했다. 이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낯을 가리며 몸을 사리는 현자를 한두 명 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다짜고짜 꺼지라고 욕을 뱉거나 허공을 향해 뭐라 중얼거리는 현자들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더 없이 신사적인 편이었다.
‘낯을 가린다기보다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비비안의 관심을 꺼리는 부분에서는 다른 현자들과 똑같았다. 단지 ‘신경 꺼.’와 ‘부디 신경을 꺼 주십시오.’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비비안이 대출 리스트를 레이에게 내밀자 그는 유려한 글씨체로 ‘레이’라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소속인 ‘현자의 탑’을 적었다.
검은 후드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은 마디마디가 유려하고 고왔다. 하지만 동시에 거친 일을 하는 손처럼 핏줄이 유독 불거져 있었다.
‘검을 꽤 다루나?’
겉모습은 현자임이 분명한데 행동은 귀족적이고. 고전적이고 우아한 말투에 손은 검사처럼 투박하고.
‘뭐 저렇게 비밀이 많은지.’
레이는 작가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굳이 적극적으로 그의 정체를 파헤치려고 하지 않아도 관찰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 영감을 줬으니까.
비비안은 살아 숨 쉬는 소재를 들여다보며 음흉하게 후후 웃었다. 어딘지 꿍꿍이가 가득해 보였지만, 여전히 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이 아이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레이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척 보기에도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비비안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레이가 손수건으로 비비안의 코 위를 가볍게 눌러 왔다.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향기가 콧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레이의 향이었다.
“코피 납니다.”
“응?”
의아하게 답하니 코맹맹이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이는 그런 비비안을 빤히 응시하다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역시 무리하신 모양입니다. 곧 퇴근 시간이실 테니 이만 돌아가 쉬는 게 어떻습니까.”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그런 것에 전혀 면역이 없는 비비안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코피가 난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코가 시큰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는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그녀는 긴장한 듯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가까운데…….’
얼굴을 비스듬히 틀어 시선을 피하기가 무섭게, 그는 비비안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고 담백하게 물러섰다. 미련 없이 깔끔하게.
비비안은 괜히 의식한 자신만 바보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렇지만. 음, 그러니까 현자님이 고른 책은 대출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럼 부탁합니다.”
레이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무실에서 사용인들에게 매주 한 번씩 피로 회복에 좋은 약물을 나눠 주고 있으니 마시면 수면의 질을 높이실 수 있을 겁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듯한 비비안에게 상냥한 친절을 베풀면서 말이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아무한테나 저러나?’
솔직히 말해 비비안은 살면서 타인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는 현자는 처음 보았다. 그런데도 형식적이고 다분히 연극적이라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배려해 주는 모습들이 더욱 견고한 벽을 치는 행동으로 보일 정도로.
평민 출신이라더니, 더없이 귀족적이었다.
‘까도 까도 양파 같을 것 같다.’
그런데도 까 보고 싶다.
다년간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석해 온 자료에 따르면, 저런 부류는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내면에 무슨 괴물을 품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거든.
‘음, 안 돼. 안 돼.’
비비안은 제 코가 석 자라는 현실을 되새기며, 괜스레 그를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됐고, 코피나 닦자. 비비안은 좋은 향기가 나는 손수건을 코에 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음?”
그녀는 레이가 대출하려는 책 표지를 보자마자 의아한 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로맨스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이 매일 밤 자기 전에 읽으면서 로맨스 소설 작가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던 소설. 로맨스계의 정석 책.
‘로, 로맨스?’
맙소사,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예의에 엇나간 행동임을 알면서도 책과 레이를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독서 취향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늘 장르도 분야도 전문성도 통일성 없게 책을 골랐다.
“어젠 <예술과 조각의 역사>를 빌려 가셨죠. 제국력 439년에 유행한 베로첼식 환조 기법에 대해서 논하는 거였던가요?”
비비안은 대출 확인증에 도장을 찍으며 물었다.
“그저께는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란 신학책을, 그전에는 <신은 이제 죽고 없다>라는 반종교 성향의 책을 빌리셨죠.”
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비비안을 잠시 빤히 응시했다. 가면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어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코끝으로 피식하고 작게 웃었다.
“섬세하시네요.”
“제 기억력이 좀 뛰어나죠.”
“흐음.”
레이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제게 관심이 많은 게 아니고요?’ 하고 묻는 듯했다.
‘그야 당연히 관심이 많으니까 하나하나 기억하지.’
이 도서관에 오고 가는 사람이 하루에 몇 명인데 개인이 대출하는 책이 뭔지 일일이 기억한단 말인가.
원래 꼭꼭 숨길수록 더 파헤쳐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였다. 레이가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니 괜히 시선이 가고 작은 습관까지 주의 깊게 살피며 관찰하게 되었다.
정곡을 찔린 비비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진리를 탐구하는 현자님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지식을 추구하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제가 로맨스 소설을 빌린 게 의아하신 모양이군요.”
여느 때처럼 정중하게 말을 돌리며 선을 긋고 떠날 줄 알았는데, 레이는 의외로 관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비비안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현자님께서 많고 많은 책 중에 제 인생 소설을 고르게 된 경위가 엄청 궁금하다고요!
“로맨스 소설은 저로서도 처음입니다.”
“계기가 있나요?”
비비안은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레이는 그녀의 적극적인 인터뷰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꾸했다.
“책을 읽는 이유야, 항상 같죠. 제게 결여된 지식이나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투영하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흥미가 생겨서 읽지 않나요?”
“흥미가 없진 않습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과 충동을 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으니까.”
“음…….”
비비안은 ‘저 말뜻을 내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연애와 관련된 감정을 느낀 적 없어서,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어 단서 좀 얻어 보겠단 말로 들렸으니까.
사랑 그거 정말 어렵지. 스물네 살이나 먹었는데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요. 남들은 쉽게 하고 있는 연애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관능 소설 작가인데.
만약 사랑이 이론으로 되는 문제였으면 그녀는 이미 사랑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었을 것이다. 비비안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턱을 괴었다.
“하지만 제가 경험자로서 충고드리는데, 전 로맨스 소설 독자 14년 차임에도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요.”
“그렇습니까. 유감입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고요.”
“이런,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셨군요.”
레이는 상대와의 대화에 경청할 줄 알고 맞장구까지 잘 쳐 줬다. 비비안은 그의 얼굴도 알지 못했지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감정 이전에 몸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면 되지 않을까요?”
“몸이라…….”
“머리로 정의 내리지 못한 것을 몸이 먼저 알고 있을 때가 있잖아요.”
의외라는 듯, 나른하게 말끝을 늘이던 그가 농도가 뚜렷한 입술을 달싹였다.
“새겨듣죠.”
유난히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요염하게만 보였다. 비비안은 긴장한 듯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급히 책을 들어 레이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책을 받아 들다가 서로의 손끝이 스치듯이 닿았다. 비비안은 움찔 떨면서 손가락을 움츠렸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작업 멘트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저기, 곧 업무시간도 끝나는데 저와 함께 차라도 한잔? 최근 로맨스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은데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볼까요? 제가 그쪽으로는 꽤 정평 난 전문가인데…….
‘너무 들이대는 것 같잖아.’
글 쓸 때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튀어나오던 노련한 대사가 이 순간에는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정도로 부담스럽게 변질될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비비안은 말을 골랐다.
“비비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이 늦었군요.”
레이는 실례했다고 덧붙이면서 말했다. 이미 아실 것 같지만 전 레이입니다, 하고.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레이는 책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매일 이렇게 한 권씩 책을 빌리고 도서관을 떠났다.
“손 닿았네…….”
레이의 뒷모습을 보며 비비안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손가락 끝을 문질러도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비비안은 그대로 손을 올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다 연애나 하라며 얄밉게 깐죽거리던 덴드로 때문이었다. 원래는 독특한 소설 소재로서 레이에게 호감과 흥미를 느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완벽하게 남자로서 의식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사실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연애…….’
작가님 소설은 레몬 사탕 같아요.
비비안은 덴드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꿀꺽 삼켰다.
혀끝에 단맛이 감돌았다.
“됐다. 내 팔자에 연애는 무슨…….”
비비안은 황제의 은밀한 정사를 지켜보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나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지났다는 걸 확인하고 노트를 챙겨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제 다시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황제는 여러 의미에서 성군이었다.
‘절륜하신 분.’
제게 이렇게까지 영감을 주시다니. 비비안은 노트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참신한 소재를 얻게 해 준 황제의 어진 인품에 탄복했다.
좋아, 이왕 새로운 자료가 생겼겠다, 그냥 처음부터 다 갈아엎고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가 볼까!
비비안은 소설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줄거리와 구성들을 짜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쓸 생각을 하니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지만 이왕 고치는 것 더욱 완벽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어차피 지금 당장 돈에 궁한 것도 아니니 시간은 많았다.
‘덴드로, 네놈이 감히 하나도 꼴리지 않는다고 했겠다…….’
그런데 과연 이번 소설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소설만으로 가 버리게 해 주지.’
질질 싸게 해 줄 테다. 비비안은 누가 들으면 기겁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수첩을 잘 갈무리해서 숨겨 놓은 뒤 책 수레를 끌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는 한밤중이라고 해도 사서가 해야 할 일은 전부 정해져 있었다. 쌓여 있는 책들을 전부 제자리에 돌려 놓아야 하고, 새로 들어오는 책들을 분류해서 목록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이미 주간 사서들이 해 놓은 걸 정리하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사실, 이만한 한직이 없지.’
밤에 도서관을 찾는 자는 밤낮이 뒤바뀐 현자들 정도였다. 황실 도서관에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서적도 거의 다 갖춰져 있었고, 낮 동안은 자유로웠으며, 남는 시간 동안 다른 작업을 할 수도 있었다.
단점이라면 밤에도 활동하고 낮에도 활동하는 날이면 피로감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거였다. 비비안이 꾸벅꾸벅 졸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책을 순서대로 정렬하고 있을 때였다.
“흐윽!”
안쪽에서 분명 전에도 들어 본 적 있었던 것 같은 여자의 신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늘은 더욱 짙은 어둠을 품고 있었고, 오늘은 달빛조차 잔뜩 낀 구름에 가려 어둡고 음산한 날이었다. 하지만 다른 날임이 분명한데, 일주일 전 그녀를 창작욕으로 불태우게 했던 그날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아니, 똑같은 소리가 났다.
분명 그때 그 여자의 신음이었다. 이렇게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끓일 정도로 간드러진 소리가 흔할 리가 없었다.
비비안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 또 왔잖아!
‘설마 황제 폐하도?’
대체 왜 멀쩡한 황궁을 놔두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도서관을 계속 찾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의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이색 체험이라도 원하는 걸까. 설마 황제가 도서관을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이유가, 사실 현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은밀한 성생활을 즐기기 위해서인가?
‘몰랐다. 그딴 이유일 줄은…….’
정말 고마운 취미 생활이로군.
하지만 아무리 모험을 즐기는 대담무쌍한 비비안이라고 해도, 황제 폐하의 은밀한 정사를 두 번이나 훔쳐볼 배짱은 없었다. 이번에도 들키면 정말로 목이 달아날 테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쉬운 일이었지만, 목숨보다 아쉬운 건 아니었다. 비비안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에 몰래 훔쳐보았던 곳보다 더욱 가까운 곳에서 신음이 들려서 등골이 오싹했다. 자칫 잘못하면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거의 몸을 일으켰을 때쯤, 바닥을 긁는 듯이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 이 자리에서 폐하께서 당신을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떠하셨습니까? 원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깔려 창녀처럼 굴려지는 기분이.”
찔꺽거리며 거칠게 추삽질하는 소리가 여자의 자지러질 듯한 신음에 묻혔다. 비비안은 사내의 목소리가 그때 들었던 황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 멈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말투도 달랐다. 존대라는 것은 보통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건데, 정작 내용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모욕적이기 그지없으니까.
잠깐, 이게 말로만 듣던 삼각관계?
‘궁금하게!’
상대가 황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자, 비비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들은 누구이고, 서로 어떤 관계인지. 자꾸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소설의 소재가 될 정사뿐만 아니라, 저들의 사정까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 호기심이 문제였다.
“하, 하윽! 사,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으윽, 아!”
황제 때와 다른 점이라면, 여자가 무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반응도 호응도 더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헐떡거리며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남자의 테크닉이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의 접촉이 전부 자극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 창녀의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흐윽.”
“사방팔방 웃음을 팔고 다닌 이 저급한 몸뚱이가 말하는 사랑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주 가차 없는 막말이었다. 그것도 연인에게 속삭이듯이 달콤한 음성으로 하니까 더 잔인하게 들렸다. 그런데 누가 들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들의 대화에서, 비비안은 기민하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돈 냄새였다.
‘분명 대박 날 거야…….’
지금 제국에서는 ‘낮과 밤이 다른 남자’가 대표적인 이상형으로 뽑히고 있었다. 그 유행을 불러온 건 브론 공작이었는데, 그와 한 번이라도 잠자리를 가져 본 여인은 그의 매력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한다고 들었다.
황제가 낮에도 오만하고 밤에도 오만하다면, 저 사내는 낮에는 다정하고 밤에는 사정없이 거칠 것 같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내가 저 사람들을 모티브로 신작을 쓴다면 분명 그렇게 쓸 거야.’
황제와 저 남자. 둘 다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각자 상반된 매력을 가졌다. 그리고 모름지기 다다익선이라고 했다. 둘 다 등장시키면 독자들이 관능 소설에서 바라는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고도 남지 않을까?
‘그러니까, 양손의 꽃…… 아니, 양손의 야수인 거지.’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비비안은 품 안에 간직한 노트와 펜, 그리고 잉크를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여기서 펜을 사각사각 놀렸다가는 얼마 안 가서 들키고 말 것이다.
그녀는 안타까움에 울상을 짓다가, 아쉬운 대로 그들의 모습을 눈에라도 담아 두기로 했다.
‘저 사람들이 누군지 알기라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궁금해 죽겠다. 과연 황제를 경쟁자로 두고도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황제와 관계를 했음에도 사랑 고백은 다른 남자에게 하는 저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여인은!
호기심과 목숨의 위협 사이에서 의미 없이 저울질을 반복했지만, 이미 답은 그녀 안에서 정해져 있었다.
‘상대가 황제인 것도 아닌데, 정당하게 자격을 받고 일하는 도서관 사서를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일 때문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았다 한다면 그녀를 책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저들도 지금 시각에 사서가 일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도 저러는 거다.
참새 보고 방앗간을 그냥 지나쳐 가라고 강요하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비비안은 불가항력에 저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책장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여자의 드레스는 거의 찢어발겨 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흐트러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엉망진창이었다. 꾹 감긴 그녀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방울져 굴러떨어졌다.
“하아, 폐하의 밑에서도 이런 얼굴을 하고, 신음을 내지르면서, 느끼셨습니까?”
“흐윽, 윽. 아아아아!”
눈물 섞인 신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깊은 쾌감의 늪에 완전히 절여 있는 듯한 소리였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거센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정도의 그런 쾌감.
세에상에……. 비비안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지켜보기만 했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해졌다.
‘저 장면을 글로 표현한다면…….’
역시 이런 광경을 보고 멀뚱히 있는 건 너무 아까웠다. 비비안은 참지 못하고 쾌감에 절어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는 것 같은 남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깃펜을 들어 올렸다. 반짝하고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가득 담고 빛났다.
“하앙! 그만, 그만……!”
사내는 잔 경련을 일으키는 여인을 양팔 안에 가두었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하나로 단정하게 내려 묶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어라?
그것을 본 비비안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하나로 내려 묶은 고동색 머리카락이라면 브론 공작의 상징이 아니던가.
브론 공작이 영애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자, 한때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머리를 길러 하나로 내려 묶는 것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저기 있는 사내가 유행에 편승하는 자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눈썰미가 좋았고, 그녀에게 저 실루엣은 어딘가 익숙했다.
‘설마 본인?’
사내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저 단단해 보이는 턱선과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라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브론 공작 본인이 맞았다.
‘세상에, 맙소사.’
좌측에 황제 폐하를 끼고, 우측에는 브론 공작을 끼며 양다리를 걸치는 영애라고? 이게 현실이라고? 비비안은 ‘나도 모르는 새에 로맨스 책 속에 빙의해 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소설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인물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마치 소설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위험천만한 연애를 즐기는 영애에게 감탄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와…… 나라면 절대 못 한다.’
관능 소설에는 최고였지만 현실 남자로서는 최악이었다. 소설이라면 모를까, 현실이라면 분명 고래 싸움에 끼여 등 터진 새우 꼴밖에 나지 않을 테니까.
지금 바로 저 영애처럼.
“윽, 하……. 그렇게 조이면서 재촉하지 마십시오. 아무 사내에게나 안겨도 반응은 한결같군요. 타고나신 모양입니다.”
‘부, 불쌍해.’
비비안은 부럽기는커녕 측은한 감정이 가슴 안에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와 넘실거렸다. 소설이라면 그저 즐겼겠지만, 현실이라면 시궁창이 아닌가. 아무리 황제와 공작이라도 저건 좀 아니었다.
사랑한다고 외쳐도 창녀라는 둥, 저급한 몸뚱이라는 둥, 아무 사내에게나 안긴다는 둥, 어떻게든 상대방을 상처 주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
‘진심이라는 걸 알고도 저러는 거다.’
악질이고 최악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뱉어도 되는 건 아니지. 저들에게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브론 공작이라도 혀로 상대의 진심을 짓밟을 자격은 없다. 대체 제국 사람들은 저런 남자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신분이 비천하다 하더라도 나만을 바라봐 주는 토끼 같은 남편이랑 한평생 사는 게 행복한 법이지. 돈은 없어도 괜찮아. 내가 먹여 살리면 되니까. 그녀는 다시금 현실의 진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남자 최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덕분에 소설 소재는 얻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브론 공작을 남자주인공. 황제 폐하는 서브 남주로 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여자주인공은 천사같이 착하고 말수가 적으며 주관이 없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타입이 적절할 듯하다. 그렇게 해야 끝까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휘둘릴 테니까.
하지만 관능 소설 주인공이니만큼 성적인 매력은 하늘을 찌르는 천부적인 매력의 소유자.
좋아. 이 조합, 완벽하다!
남주는 겉으로 매우 친절한 척 구는 사람이지만, 사실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으며 타인을 믿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소설 초반에 남주는 여주에게 매우 못되게 군다. 하지만 여주가 남주를 포기할 때쯤에서야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후회하지만 그들의 사이는 이미 꼬일 대로 꼬인 뒤이다.
처절하게 후회하고, 그녀에게 빌면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남주를 계속 외면하던 여주는, 그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처절한 과거사를 듣고 나서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몸도 맞고 마음도 맞고 행복한 결말!
비비안은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순식간에 짜낸 뒤에 노트에 적어 냈다. 노트 위에서 휘날리는 깃펜이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제국의 일인자 이인자를 다투는 권력자들 사이에서의 양다리. 엄청난 배덕. 이게 바로 덴드로가 말하는, 비비안의 소설을 관능적으로 발전시키는 첫걸음일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꼴리는’ 관계 묘사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나, 나도 할 수 있어! 그깟 경험 좀 없어도 본 것을 그대로 묘사하면…….’
환하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불안하게 변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들의 행위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여인의 위에서 격렬하게 허리를 놀리던 공작이 어느 순간 낮게 신음 뱉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여인 또한 브론 공작의 목을 끌어안으며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하아윽-!!”
“큭, 하아.”
동시에 가는 거 쉬운 일 아니라던데.
공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앞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머리카락에 끈덕진 액체가 묻었는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는 바닥에 흐트러진 채 가늘게 떨고 있는 여인을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관계가 끝남과 동시에 성욕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신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후회를 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관계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듯 말이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애액이 묻은 손을 완벽하게 닦아 냈다.
“이제 다시는 그 역겨운 입으로 사랑을 담지 마십시오.”
옷이 찢어진 채 바르르 떨고 있는 여인의 위로 손수건을 쓰레기 버리듯 떨어트린 사내가 등을 돌려 사라졌다.
‘와…….’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재기 불능일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고 떠났다. 그래도 공과 사가 철저한 이성적인 사람이라 사과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더니.
정황상 저 여자가 양다리를 걸치다가 들통난 것 같긴 하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일단 대화부터 시도하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지! 대놓고 보복하듯이 화풀이하고 가 버리다니.
상대는 황제니까 서로 합의해서 관계한 게 아니라 억지로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상처 주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면 아무리 그를 사랑하던 여자라도 다 도망갈 것이다. 만약 저 말을 듣고도 계속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심각한 마조히스트겠지! 이미 떠나간 뒤에는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고!
‘이 후회 남주의 정석 같으니.’
남성용 구두 소리가 정적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둔탁하게 울렸다. 비비안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이 되어서야 몸의 긴장을 풀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지만 너무 긴장을 풀어 버린 게 문제였다. 브론 공작은 떠났지만 사건의 중심에 선 여자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누, 누구세요?”
들켰다…….
비비안은 낭패 어린 얼굴을 하다가 금발의 여인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여자는 옷을 추스르다 말고 몸을 흠칫 떨면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당황한 것 같았다. 물론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쯤 옷을 헐벗은 상태였으니 당황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그, 그러니까 저는…….”
처음으로 정면에서 제대로 마주 본 얼굴이었다. 비비안은 서둘러 변명의 말을 떠올리다가, 넋을 잃고 그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과연 황제와 공작을 양옆에 끼고 있는 여인답게 매우 아름다웠다.
조금 흐트러졌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블론드.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물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눈꼬리는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었고 볼과 눈 밑이 붉은빛을 띠어 묘하게 가학심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요염한 요부 같았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트리고 싶어지는 그런 얼굴이라고 할까.
비비안은 순식간에 납득했다. 여자인 자신도 넋을 빼놓고 감탄할 정도인데 남자라면 오죽할까. 과연 경국지색이란 이런 미모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 여인이 바로 황제, 그리고 공작과 쿵덕쿵덕 장단을 맞추던 그 여인임이 틀림없었지만……. 비비안이 놀란 것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르델?”
카르델. 포르망디 자작 가문의 영애.
비비안은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기 전에 자주 만나서 놀곤 했던 어린 시절 친구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성숙한 아가씨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카르델이 물기가 어려 있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가늘고 여린 목소리였다.
“비비안? 정말 비비안 맞아?”
“그러는 카르델이야말로 정말 카르델이야?”
“어째서 이곳에…….”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맙소사. 이게 대체 몇 년 만인 건지 모르겠다. 열 살 때 본 게 마지막이니까, 14년 만인 건가?
비비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카르델의 옷을 추슬러 준 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내, 내가 일어날게. ……꺅!”
카르델은 수치스러웠는지 허둥대며 비비안을 밀어내려 하다가 발을 헛디뎠다.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넘어질 뻔한 그녀를 얼떨결에 품에 안았다.
비비안은 다리를 타고 주륵 흘러내리는 정액 섞인 애액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음’하고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시간 끌어도 괜찮겠어? 알다시피, 황실 도서관은 야간에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지금 당장 사람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카르델은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버둥거리며 반항하던 것을 멈췄다. 비비안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찢어진 옷차림을 한 채로 도서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느니 차라리 소꿉친구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침묵을 지키던 카르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다 본 거지?”
“으음. 본의 아니게. 사실 그날 이후로 여기 야간 사서로 일하고 있었거든.”
“그, 그렇구나.”
어디 봤다 뿐일까. 참신한 소재가 생겼다고 좋아 날뛰다가 노트에 자세히 묘사해서 적어 두기까지 했다.
‘얘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냥 성도착증 걸린 변태인 줄 알았는데. 대체 이 순진한 아가씨에게 14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비비안도 그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조리 다 겪었듯이,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엄청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르델이 본인 의지로 황제와 공작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리가 없을 테니까.
아니면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설마 그 새 연애관이 파격적이다 못해 파멸적으로 변한 것인가?
등 뒤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느껴졌다. 비비안은 그것을 모르는 척 쾌활한 목소리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실 도서관 안쪽에 옷이랑 속옷 몇 벌도 있어.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도서관 내부에서 며칠 죽치고 안 갈 때가 있거든.”
이건 비밀이지만 카르델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거야. 비비안은 은밀하게 속삭이며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카르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귀족 영애로서 자라 온 어린 시절 친구가 책을 읽기 위해 이런 궁상맞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운 모양이었다.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난 그야말로 ‘없는 책’이 없으니까.”
비비안에게 구할 수 없는 책이란 없었다. 황실 도서관 책들 외에도 비밀리에 구한 금서들까지 모조리 다 가지고 있었다. 물론 금서들은 개인 소장이었다. 수백 권에 달하는 그 책들을 들키는 순간, 황실 소유인 비비안의 목은 뎅강 하고 날아가고 말 것이다.
뭐, 그만큼 제국에 유통되는 모든 책을 섭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전하네, 비비안은.”
카르델은 못 말리겠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가, 비비안이 듣지 못할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비비안은 씁쓸하게 웃는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 지역에 발을 들였다. 이곳은 이를테면 그녀의 안식처이자 성지였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비밀의 장소.
비비안은 문을 꼼꼼히 잠근 뒤에 지하로 가는 통로의 뚜껑을 열고 안쪽으로 카르델을 안내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도서관에도 이런 은밀한 장소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비안은 궁금한 게 많았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먼저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비비안에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듯, 카르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여기 앉아 있어.”
직원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자 카르델은 잠시 움찔 몸을 떨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 밑으로 보이는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게 꽤 힘들어 보였다.
아.
“잠시만 기다려 봐.”
비비안은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더니 깨끗한 천 조각과 물통, 그리고 약통을 가져왔다.
“거기 걸터앉아서 치마 좀 걷어 볼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전혀 민망한 기색 없이 드레스를 올리라고 하니 카르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보통은 ‘그동안 잘 지냈어?’ 하는 평범한 안부 인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잠깐 내가 할게.”
그녀는 치마를 필사적으로 붙잡아 내렸다.
“안 보이잖아. 여기 거울도 없는데.”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그냥 이 위에 옷만 갈아입을게. 마, 마차를 부르면 되고.”
“통신구 가지고 있어?”
“아니…… 지금 없긴 한데…….”
카르델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불타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고.
‘공공장소인 도서관에서 더한 짓도 했으면서 뭘 이제 와서 쑥스러워하는 걸까.’
비비안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한때 친구였긴 했지만 이젠 신분의 격차가 생겼으니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혼자 뒤처리하는 거 익숙하지 않잖아?”
괜히 서럽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난 이제 황궁에 완전히 종속된 사용인이야. 시녀에게 시중받는다고 편하게 생각해. 아가씨.”
“어떻게 그래. 비비안은 내 친구인걸.”
“친구라면 더더욱 부끄러워할 필요 없지.”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비비안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
“아니, 그래도. 자, 잠깐, 비비안?”
비비안이 그녀를 의자에 앉게 한 뒤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들추자 밑단이 빼곡하게 레이스로 가득한 속치마가 드러났다.
카르델의 저항은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보다 더욱 미미했다.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는 게 무언으로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어렸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귀족 영애답지 않게 순진하고 주위에 휘둘리기만 하고…….’
감정을 읽는 데 둔한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과연 어떨까. 그동안 황제와 공작이 이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 왔을지 불 보듯 뻔했다.
애초에 그녀의 위치 또한 의문이었다.
황제 또는 공작의 애인? 장난감?
전자라면 자작 가문 영애인 그녀를 연애 상대로 진지하게 생각할지 의문이었지만, 후자라면 그녀의 친구로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이런 위험천만한 연애는 이제 그만두라고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남의 인생에 간섭할 정도로 비비안은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거의 매일 마주치는 출판사 사장 덴드로의 복잡한 연애 사정도 그저 방관할 뿐이었으니.
비비안은 천을 물로 적신 뒤 흔적을 깨끗하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속옷을 입지 않은 건 못 본 것으로 치기로 했다. 아마도 공작이 찢거나 했겠지. 게다가 질 입구가 약간 부어 있었다. 피를 흘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와, 진짜 아프겠다.’
대체 얼마나 짐승처럼 달려든 거냐. 비비안은 안타깝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린 뒤 손가락으로 약을 찍어 조심스럽게 발라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몹쓸 직업병 때문에 의식하지 않아도 소설 전개와 애무 방법 따위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남주는 여주를 거칠게 다룰 때는 언제고 다시 다정하게 돌아와 부드럽기 짝이 없는 손길로 여주를 욕실로 이끄는 거다.
누구보다 다정하게. 그리고 그녀가 다정함에 취해 방심하는 사이, 씻겨 주는 것을 핑계로 손장난만으로 가 버리게 만드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거지. 그리고 다시 한번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격렬하게…….
“으응.”
“아, 미안.”
사람 앞두고서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버릇은 영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비비안은 온화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내려 주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흐트러진 머리까지 깔끔하게 빗겨 주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머리를 빗겨 주는 내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비비안 특유의 여유와 느긋함 때문에, 카르델도 조금씩 긴장을 풀고 몸을 늘어트렸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그 물음에 비비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된 정황인지 네가 섹스 도중에 나눈 대화만 들어 봐도 대충 알 것 같긴 해.’
하지만 개인적인 일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깊숙이 파고드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해 봤자 상대도 본인도 불편해질 뿐이었다.
“묻지 않아. 그냥 네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릴게.”
“…….”
“언제든 말해. 괴로운 고민이든, 즐거운 추억이든, 그냥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괜찮아. 이야기 듣는 건 언제나 좋아하거든.”
그야, 소설 소재가 될 테니까.
“자, 다 됐다.”
비비안은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준 뒤, 어디서 들고 왔는지 알 수 없는 새 드레스는 물론 속옷까지 건넸다.
카르델은 옷을 받아들며 얼떨떨해했다.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챙겨 두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감용 여분 옷이야.’
마감 때가 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바빠지니까. 그리고 출판사에서 원고 내놓으라고 황실 도서관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비비안은 말하지 못할 뒷사정을 은폐하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카르델이 그녀를 따라 작게 웃었다. 어딘지 허탈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예전부터 그래 왔듯, 비비안에게는 예상치 못한 엉뚱함으로 사람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으니까.
“말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들어 줄 수 있니?”
“물론이지.”
그러자 비비안은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꾸했다. 싫어하면 억지로 캐묻지 않겠지만 본인이 말하고 싶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게, 실은 남자 문제인데…….”
그건 나도 보면 안단다.
“그거 알아? 내가 이 황궁에서 이어 준 커플만 해도 수십 쌍일걸.”
비비안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으스대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 말은 절대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비비안은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연애경험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문적이라, 입소문을 타고 연애 상담을 하러 찾아오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본인과 관련되기만 하면 어리숙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의사가 제 병 못 고친다는 말도 있듯이, 원래 세상일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편하게 말해.”
카르델은 드레스 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우울한 표정으로 한탄하듯 말을 꺼냈다.
“나 때문에 황제 폐하와 공작 각하께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 같아.”
그것참 여자주인공 같은 고민이로구나.
비비안은 별을 가득 담은 밤하늘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