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역사는 도서관에서
그들의 역사는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사실 이 ‘행위’에 대한 역사는 그전부터 계속되어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비안이 그들을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자고로 역사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겨지는 순간, 비로소 그 가치가 증명되는 것 아니겠는가.
‘맙소사.’
그대로 들고 있던 책을 뚝 떨어트릴 뻔했던 비비안은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황립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황궁 내부에 위치한 도서관은 거대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덕분에 책장 뒤에 숨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작은 체구를 가리고도 남았다.
혹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불쑥 걱정이 들었으나 비비안은 이내 그것을 쓸데없는 걱정으로 치부했다. 아니, 확신컨대 들키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기로 둘째 가라도 서러운 비비안이 아니었던가. 딱히 자랑할 거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녀는 자신을 숨기는 것에 굉장히 능숙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존재감을 완전히 지운 채 남들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정말 자랑이 아니었다.
“흐응, 흣, 아, 아아!”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굳이 신음을 숨기려고 하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들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간드러진 소리건만, 남자 쪽에서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종용하고 있었다.
“큿, 소리……. 더 내.”
“하으응!”
아니, 여기 사람 있는데요. 게다가 공공장소고요. 비비안은 입을 틀어막은 채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하지만 굳이 헛기침 소리를 낸다거나,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산통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거면 애초에 숨지도 않았을 거다.
‘우와. 실제로 하는 건 처음 봐.’
비비안은 짜릿한 기분에 입을 틀어막고 감탄하고 있었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남자와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순결한 몸이었다. 이와 관련된 정보는 늘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읽고, 쓰기만 했으니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하는 장면을 보는 건 결단코 처음이었다.
어째 막 성에 눈을 뜬 청소년 같은 반응이었지만, 그녀가 감탄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소재가 제 발로 찾아왔잖아?’
대체 누구일까. 이런 곳에서 저런 엄한 짓을 할 만한 자들이. 애초에 황립 도서관에 발을 들일 만한 자는 귀족 이상의 신분을 지녔거나, 황궁에서 직접 이용 허가권을 발급받은 이들이다. 아니면 현자의 탑의 현자들이라던가.
지체 높으실 게 분명한 분들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도서관에서 저런 야릇한 짓들이라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비비안은 좀 더 대담해져 보기로 했다. 책장에 책 몇 권을 빼낸 뒤 그 사이 구멍으로 그들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움직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땀에 젖은 매끈한 나신이었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피부는 어둠이 내려앉은 도서관 내부에서도 하얗게 빛이 났다. 가녀린 그녀의 등줄기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춤추는 무용수처럼 남자를 타고 있었다. 기승위였다.
호오. 비비안은 소리 없는 감탄을 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누가 볼지도 모르는 이런 공공적인 장소에서, 그것도 입히기도 벗기기도 까다롭다는 드레스를 벗었단 말이야? 아무래도 여간 뻔뻔한 이들이 아닌 것 같았다. 성욕에 눈이 먼 것인지, 아니면 들켜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사실 그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는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비비안은 늘 품 안에 넣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수첩과 휴대용 펜촉, 그리고 잉크를 꺼내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관능 소설의 거장 ‘페르디’.
아스티에 제국에서 그 위명을 들어 보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명망 높은 소설가. 필명 외에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페르디가 사실 황실 도서관의 야간 사서 비비안이라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본인도 절대 알릴 생각이 없었고.
그리고 그 ‘페르디’가 이런 장면을 앞두고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비비안은 당장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펜촉을 들었다. 그녀는 잉크를 콕 찍어 낸 뒤 조심스럽게 펜대를 놀리기 시작했다.
‘시기적절하기도 하지.’
사각사각. 저들에게 닿지 않을 소리가 작게 울렸다.
올해로 스물네 살이 되는 비비안은 지인들과 나누는 사소한 잡담마저 소재 일부로 보는, 뼛속 깊은 곳까지 작가였다.
‘이거 진짜 괜찮은 장면이 나올 것 같은데.’
비비안은 눈 사이를 좁히며 작은 구멍 사이로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단순히 여자가 남자 위를 타고 있는 기승위일 줄 알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는 가만히 있고, 아래에 깔린 남자가 계속해서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하게, 그리고 그 추삽질에는 점점 빠르게 속도가 붙었다.
아무래도 여자는 성적 관계에서 굉장히 수동적인 쪽에 속한 것 같았다. 아니면 남자 쪽에서 여자의 의사 따윈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거라든가.
‘둘 다인가?’
여자의 골반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큰 손이 여자가 위아래로 움직이기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흐앙, 항! 하아, 시, 싫어!”
“하아, 싫어?”
순간 남자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그와 동시에 여자가 작게 흐윽, 신음을 흘리더니 어깨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남자가 멈추면서 그녀가 느끼는 부분을 제대로 자극하고 간 것 같았다. 여자의 눈물로 추정되는 것이 뚝뚝 남자의 탄탄한 배 위로 떨어졌다.
“네 위쪽은 날 거부하는데 아래쪽은 날 꽉꽉 물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는군. 어쩌라는 거지?”
“하앙!”
찰싹! 추삽질을 하면서 사내가 여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내려치자 그녀가 교성을 터트리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찰싹, 찰싹하는 찰진 소리가 도서관 내부에 울려 퍼졌고, 그럴 때마다 여자의 교성도 점점 높아졌다.
“싫다고, 다시 말해 봐.”
“읏…….”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해야지. 정말 싫다면 그만둘 테니까.”
남자는 배려하는 척 말했지만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여자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싫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보다 흐트러진 숨을 뱉느라 말을 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게다가 방금 행위로 여자가 어지간히도 조여 댔는지 남자가 참지 못하고 더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하,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아.”
남자의 숨소리도 덩달아 더욱 거칠어졌다.
“다 네가 자초한 거야.”
그리고 오싹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음습한 속삭임까지. 대사도 행위도 보통이 아니었다.
‘저런 건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보게 된 성관계부터 이럴 줄이야. 예상외로 세상에는 소설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성관계가 흔한 건지도 몰랐다.
‘……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런 거라면 여인들이 그렇게 관능 소설에 열광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관능 소설 같은 관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남자도 없고요. 전 관능 소설이 로맨스와 함께 판타지 장르로 분류돼야 한다고 봐요.
비비안은 지나가다 들은 부인들의 한탄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운이 좋았다는 결론밖에 나질 않았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펜을 놀렸다. 남자의 노련함과 여자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 안성맞춤이었다. 저 둘은 소설로 친다면 환상의 궁합, 환상의 짝이었다. 관능 소설 속의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으로 정말 딱 맞을 것 같은.
비비안은 지금 이 순간을 놓쳤으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라면서, 혹시 나중에 상황이 된다면 저 남자에게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고 말았다. 물론 인터뷰에 ‘인’ 자도 꺼내기 전에 변태 취급을 받고 목이 달아날 것 같으니 단지 생각에 그쳤지만 말이다.
하앗! 여자의 허리가 다시 휘어졌다. 낭창한 몸을 타고 땀 줄기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소재가 샘솟듯이 떠오른다. 비비안은 순간 감동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왜 진작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최근 슬럼프에 빠져서 소설을 한 글자도 적어 내려가지 못했던 답답한 체증이 한 번에 가시는 것 같았다.
‘관음증에 걸린 변태 같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소재를 얻기 위한 작가의 처절한 몸부림 아니겠는가.
‘저 사람들도, 야간 사서가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성인이라면 공중 질서를 지키지 못한 책임 정도는 스스로 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비비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죄책감을 덜어 냈다.
사실 그녀가 이런 대담한 짓을 하는 이유는 차기작을 이어 나갈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누군가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잠시 인상을 썼다.
* * *
“이게 내 한계야.”
책상 위에 냅다 원고를 내려놓은 비비안은 잔소리를 피하듯 등을 돌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간 도서관 사서 일에 더불어 며칠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서 그대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 밑에 검고 짙은 것을 달고서 불쌍한 척 울상도 지어 보았다. 그러나 말린코니아 출판사 사장이자, 페르디 전속 담당자인 덴드로는 휙휙 원고를 넘겨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페르디 작가님.”
답지 않게 목소리를 깔고 존칭까지 쓴다. 비비안은 배 째라는 식으로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 안 들려 안 들려. 지금 쓰러져서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문제점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덴드로는 탁 소리 나게 원고를 내려놓은 뒤 일부러 시선을 돌리며 귀를 막고 있는 비비안을 지긋이 응시했다. 깊은 한숨은 덤이었다.
“비비안, 네가 대단한 건 알고 있어. 여태까지 낸 3권의 책들이 제국을 통틀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잖아. 늘 감탄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 덕분에 출판사도 이렇게 번창할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의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비비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망하기 직전이었던 말린코니아 출판사가 수도 노른자 땅에 번듯한 건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 덕택이었으니까.
“하지만 4번째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하지 않겠냐. 물론 네 글이니까 구성과 전개는 더할 나위 없겠지만, ‘관능 소설’로서의 발전은 전혀 없다는 말이야.”
“관능 소설의 본질은 ‘행위’보다는 ‘감정’이거든?”
“맞는 말이긴 한데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뭐!”
덴드로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린 영애들이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은 수많은 유명 작가들을 배출했고 매일 시장에서 쏟아지고 있어. 너는 관능 소설이라는 차별화된 장르로 새로운 시장을 노리는 거잖아.”
정말 맞는 말만 해서 짜증 났다. 비비안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애써 감추며 작게 꿍얼거렸다.
“내 앞에서 관능을 논하다니…….”
이 세상에는 페르디가 혜성처럼 나타나기 전까지 관능 소설, 즉 ‘로맨스와 에로스를 결합한 소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색욕을 다룬 소설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그저 행위를 중시하는 소설이었다. 관계만 가지면 그만인 종류의 야한 소설 말이다.
즉, ‘관능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를 최초로 만든 것이 바로 ‘페르디’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비비안인 것이다. 소설 한 장르의 창시자, 어찌 보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저 운과 실력으로 관능 소설이 유행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비비안이 시대적인 흐름을 잘 읽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백 년 동안 절대적인 황권이 자리 잡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신전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마녀사냥 제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면서 ‘쾌락을 좇는 행위는 죄악’이라든지, ‘여성은 남성보다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금욕만이 구원받을 길’이라는 신전의 주장이 헛소리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아스티에 제국에도 덩달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재산’에 불과했던 여성의 지위가 급속도로 높아진 것이다. 이제 귀족 영애가 익혀야 할 기본 소양이 글을 읽을 줄 알고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기회의 폭이 넓어져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글을 가르쳐 주는 시설들이 늘어났다.
그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비비안이 여성 타깃의 성인 소설책을 내자 그녀는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전례 없는 신흥 졸부가 되어 평생 놀고먹어도 남아돌 정도의 부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관능 소설의 창시자 앞에서 관능을 논한 덴드로의 작태에 기가 막힐 수밖에.
하지만 덴드로는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것도 더 노골적으로 쿡 찔러서.
“여태까지 나온 섹스 묘사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무려 관능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뭐라고!”
“성적인 긴장감이라곤 개뿔도 없어.”
“개, 개뿔도 없을 것까지는!”
“막말로 하나도 안 꼴린다고!”
이 인간이 말이면 단 줄 아나!
비비안은 혈압이 올랐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어느 정도 동감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부분도 많았다.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의 한계라는 게 있잖아!”
비비안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금반지를 가리키며 울분을 터트렸다. 보석 주변에는 황가의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그녀가 순결 서약을 맺었고, 황실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비비안은 한때 메르텐 백작가의 하나뿐인 여식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백작이지, 이름뿐인 귀족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떼기 이전부터 가세는 기울고 있었으며, 빚은 걷잡을 수 없이 쌓여 가더니,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작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숙부에게 넘어갔다.
친척들에게 구박받으며 얹혀살던 비비안은 열네 살이 되었을 즈음에 스스로 운명을 정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녀는 성인이 되면 자신이 결혼 시장에 내몰려 비싼 값에 팔리게 될 거라고 직감했다. 친척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비비안의 가치는, 어머니를 닮아 눈에 띄게 예쁘장한 외모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비비안은 가문에서 말하는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빨리 버리기로 했다.
시녀가 되는 것.
황궁에서는 일반 사용인과 종신 계약을 맺는 사용인이 따로 있었다. 그녀가 ‘사용인 종신 계약’을 맺으면 결혼을 포기하고 순결을 맹세한 뒤 청춘을 다 바쳐 일해야 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기꺼이 종신 계약을 맺었다. 사용인으로서 황실에 소속되면 더는 메르텐 가문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결혼 장사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비비안 일생일대의 결의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자료를 참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직접 경험할 수는 없잖아.”
이 반지는 소유자가 순결을 지키지 못할 시 중앙에 박힌 보석이 깨지면서 곧바로 연락이 가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뭐, 나도 네 사정 다 알긴 하지…….”
덴드로 또한 비비안의 반지를 내려다보며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무한한 가능성이 계약 하나에 가로막혀 썩히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사실 연애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여기까지 해낸 게 대단하기까지 했다. 전부 비비안이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발품을 팔며 자문을 구한, 피땀 섞인 결과물이었다.
“연애라도 해 보는 건 어때?”
“나보고 죽으라고?”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황실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보수의 성전 같은 곳이었다. 시녀든 시종이든 황실과 종신 계약을 맺었으면 순결을 잃는 순간 바로 끝이었다. 황실 능멸 죄로 처형이었으니까.
비비안은 황당한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소파에 축 늘어져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건성으로 대꾸하는 그녀에게 덴드로는 힘주어 강조했다.
“섹스는 못 해도 다들 몰래몰래 연애 정도는 할걸?”
“꼭 해 봐야만 아는 게 아니야.”
“하지만 해 봐야 아는 것들도 있지.”
“씨…….”
덴드로는 ‘말한다고 네가 알겠냐. 경험도 없으면서’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비안은 자존심에 제대로 금이 가고 말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이 있었고, 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3개의 작품 모두 출판되는 그 즉시 완판이었으며, 끊임없이 증쇄 요청이 들어왔다. 지금도 그 열기는 식기는커녕 뜨겁기만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업적을 경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성적 긴장감은 개뿔도 모르는 작가’로 매도하다니.
비비안이 뚱한 얼굴을 하자 덴드로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였어도, 현재 상대방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끊임없이 안겨 주는 복덩이 같은 존재였다.
혹시 마음이 상해서 다른 출판사와 전속 계약하겠다고 훌쩍 떠나 버리면 곤란했다. 자극을 주고 싶은 거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하듯 재빨리 덧붙였다.
“사실 지금 네가 가져온 원고를 그대로 출판해도 상관없어. 아무렴 유명세만 따지면 지금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잖아.”
출판사에서는 페르디의 신작이 이번에도 대박을 터트릴 걸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화제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작가의 생명은 짧다는 것만 알아 둬. 앞으로도 계속 글 쓸 거잖아.”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작가로서 오로지 외길만 판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관능 소설이 시들해졌을 때, 자신의 소설을 복제했다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테니까.
“적당히 해 봐, 적당히. 난 작가님 믿으니까.”
페르디 작가님은 지금 장안의 화제! 참신하고 혁신적인 유행의 선도자! 제국 소설계의 새로운 희망!
비비안은 갑자기 굽실거리며 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는 그를 뱁새눈을 뜨고 흘겨보았다. 채찍질했으니 이제 당근을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살짝 조언하자면 지금 남자주인공은 심심할 정도로 담백해. 더 노골적인 변태가 되어도 좋잖아.”
“변태가 되라고?”
물론 인간이 변태라고 해서 나쁠 건 없었지만, 그래도 비비안은 환상을 파는 관능 소설 작가였다. 남주가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로맨틱해도 모자랄 마당에 변태라니.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덴드로는 뭘 모른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아무나 밝히는 변태로 쓰라는 뜻이 아니야. 남들에겐 무심하고 차가워도 여자주인공 한정으로 내면의 짐승을 모조리 다 꺼내는 놈으로 써 달라는 거지.”
“내면의 짐승이라…….”
“네 소설을 비유하자면 혀가 아릴 정도로 달고 풋내나는 레몬 사탕 같아.”
그 말에 비비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비비안의 소설은 자신에게 연인이 생겼을 때 서로 어떻게 사랑을 나누고 싶은지 망상을 부풀어 적어 놓은 것들이었으니까.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사람을 만나, 애틋하게 서로를 원하고, 눈빛만 마주쳐도 입가에 미소가 어리고, 또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지는 첫사랑 같은 거 말이다.
“좀 더 뜨겁게 타오르란 말이야. 시선만 얽혀도 혀를 섞고, 이성이 마비되어서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재가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도로?”
“섹스하는 거지.”
“……잘 모르겠는데.”
덴드로는 섹스의 신을 섬기는 섹스 전도사처럼 아무튼 섹스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관능 소설이 상큼하기만 해선 시시하지. 좀 질척거리기도 하고 더럽게 끈적거리기도 하란 말이야. 침실에서 시작했으면 욕실에서도 해 주고 계단에서 하고 응접실에서 하고…….”
그 뒤로는 입에 담기도 힘든 음담패설뿐이었다. 관능 소설의 창시자인 비비안조차 ‘그게 짐승이지 인간인가’하고 무심코 생각해 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폭주하는 덴드로를 진정시키며 그의 길고 장황한 섹스 예찬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요약하자면 남주가 너무 담백하니 좀 더 절륜하게 쓰라는 뜻이지?”
말이 쉬워서 절륜이지 막상 쓰려고 하니 막막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뒷말을 뱉지 못했다.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로서의 프라이드가! 또 저 주둥이에서 ‘넌 경험도 없는데 뭘 알겠냐’는 말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도와줄까? 난 업계 탑이라는 말린코니아 출판사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도록 독자의 니즈를 맞추기 위해 여러 영애와 부인들의 의견을 자문해 왔지. 물론 몸의 대화로…….”
“네가 난잡하게 놀든 말든 관심도 없지만 내 소설을 더럽히지는 말아 줄래?”
순진한 영애들을 구워삶은 것도 모자라 유부녀까지 건드리다니. 비비안은 잠시 이 남자를 풍기문란죄로 경비대에 신고하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연애라도 해.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게 될 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우 같은 눈웃음을 보였다.
* * *
비비안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 뒤로 글은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나 붙잡고 당당하게 고백할 배짱이 부족했던 비비안은 도서관 사서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바로 저들을 발견한 것이다. 비비안은 속으로 유레카를 다시 한번 외쳤다. 소재의 신과 성애의 신이 그녀에게 내려와 친히 가호를 내렸으니까.
정사를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을 묘사하는 손놀림은 거침이 없다. 비비안의 자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맹수의 것처럼 번뜩였다.
‘장소 좋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서로 살을 맞대는 남녀. 그래, 어쩌면 자신의 소설에서 부족했던 건 이런 자극들일지도 몰랐다.
비비안이 자신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되짚으며 앞으로의 보안 방향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으음?’
그런데 저 가녀린 뒷모습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적어도 귀족의 신분이고 상당히 가녀린 체격의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비비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빛에 옆얼굴의 실루엣이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어딘지 익숙하단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금발의 영애가 어디 한둘일까. 연회장에 가면 3초마다 한 번 마주치는 게 가녀린 금발의 미인일 것이다.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마주친 적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하앙, 학! 윽! 읏! 흐으응!”
그들의 행위는 어느새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남자의 행위는 점점 거칠어졌다. 아래에서 쳐올리며 그녀의 허리를 양팔의 힘으로 제멋대로 휘두르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지 낮게 으르렁거리며 사나운 소리를 냈다.
곧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올라탄 여자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아래로 깔아 누르면서 남자는 허리를 미친것처럼 쳐올렸다. 애초부터 그는 신사다움과 상당히 멀어 보였지만, 이젠 흡사 짐승 같은 충동에 잠식당한 듯 보였다.
그제야 제대로 남자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단정하게 잘린 결 좋은 은발 머리였다. 첫눈이 내린 새하얀 설원처럼 투명하게 부서지는 은빛은 잠시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감탄하는 것도 잠시, 비비안은 저 찬연한 색채를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슬러 가니 좀 더 또렷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10년 전, 황태자 즉위식이었던 그날이었다.
온 제국민의 앞에서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올리던 앳된 얼굴. 찬란하게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 둥그렇게 휘어지던 옅은 벽안. 그리고 신이 내린 축복의 상징이라고도 불렸던 찬란한 빛깔의 은발. 기품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오만해 보였던 몸짓.
황제 폐하였다.
‘황제 폐하?!’
설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열심히 노트를 휘갈기던 비비안의 손이 그대로 뚝 멈췄다. 10년 전, 비비안이 어렸던 만큼,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소년은 어느새 사내 냄새를 물씬 풍길 정도로 자라 있었다.
황제는 눈을 간질이는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동시에 날카롭게 빛나는 벽안이 드러났다.
아 맙소사. 분명 그가 맞았다.
“하, 흐윽, 폐하! 제, 제발, 하으으응!”
“허억, 제발, 뭐. 짐이 어떻게 해 주길 바라지, 응?”
“하응, 학, 아응! 죽, 죽을 것 같, 학!”
삐딱한 웃음. 한쪽 입꼬리만 유난히 올라가는 미소가 즉위식에서 본 소년 황제를 떠올리게 했다. 그의 허리짓은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더더욱 빠르게 그 속도를 올렸다. 여자가 점점 뒤로 밀려가 책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제 욕망을 좇아가기에 급급한, 배려 없고 거친 행동이었다.
맙소사. 폐하의 처소에서 밤마다 여인들이 죽어 나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런 의미에서의 죽음일 줄이야. 그런 쓸데없는 정보까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망할.’
곧 행위가 끝날 것처럼 보였기에 비비안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빨리 도망가야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라면 들키는 순간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산통을 깼다간 숨통이 끊어질 것이다.
비비안은 뽑아서 바닥에 둔 책을 고이 제 위치에 넣어둔 뒤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떠나기 직전 마지막 책을 꽂아 넣은 순간, 비비안은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사내의 푸른 눈과 잠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니, 마주쳤다.
시리도록 푸른색이 달빛에 반사되어 형형하게 번뜩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