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새 친구
스윽- 스윽-.
빛만이 가득한 공간. 탑을 지키는 예언자는 그 안에 홀로 자리하고 있다.
빛 무더기를 그러모아 곱디곱게 자아낸 듯 흐드러진 백금발, 은가루를 흩뿌린 듯 은은히 빛나는 하얀 피부. 살포시 감긴 눈과 살짝 열린 다홍빛 입술과 나붓하게 모아 쥔 두 손. 그 모든 것이 꿈결처럼 아름답고도 고결하다.
그녀의 표정은 슬픈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한 것이 눈을 뗄 수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 고고한 구경꾼의 간절함이 닿은 곳으로 절로 마음이 향하게 만든다.
프란시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하단에 가문의 표식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제목은 뭐로 할까.”
이윽고 무언가가 떠오른 듯 프란시스가 붓을 움직였다. 이제 이걸 들고 그녀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면 된다.
루이스와 그녀의 비밀 정원은 지난 몇 년간 자연 아틀리에로 탈바꿈해 있었다.
“역시, 안 왔군.”
망아지 같은 사촌 동생은 재작년부터 수습 기사가 되었다. 기사가 될 생각은 없다면서 검은 좋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나한테 이기겠다고 했지.’
프란시스는 무엇을 해도 천재 소리를 듣는 아이였다. 15살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루이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승부욕을 보이는 아이였고.
‘다 짠 건데. 바보 루이스.’
여러 삼촌들과 이모들, 숙모와 프란시스의 합작이었다. 루이스는 프란시스에게 검으로 죽도록 맞은 뒤엔 프란시스를 더 열렬하게 따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갈았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보다는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뜸해졌고.
“그 덕에 마음껏 움직이는 것이지만.”
프란시스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이 아틀리에를 무척이나 귀히 여겼다.
“그림은 어째 해도 해도 모자라단 말이지.”
꽤나 훌륭한 취미가 되어 주고 있었다.
“아……훔.”
주문을 나직하게 외우며 프란시스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아지트 안에 감춰져 있던 아틀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중에서 머리를 맞댄 나무들 사이로 조명처럼 햇살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보존제를 바르고 레플레 잎으로 액자를 만들어 나무에 기대 놓거나 걸어 놓은 그림들이 곳곳에서 그녀를 반겼다.
프란시스는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져온 그림을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가 좋겠군.”
탁!
가지가 꺾여 튀어나온 곳에 빛의 숙녀가 자리한다. 비교적 햇빛이 많이 닿는 자리였다.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그림이 촉촉한 생기를 머금었다.
“…….”
사박거리는 잔디의 감촉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프란시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틀리에의 한구석에는 수수한 모양의 책상을 놓아두었다. 중앙과 달리 조금 낮은 곳의 틈으로 햇빛이 비치는 자리라 책을 읽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프란시스는 책상 앞에 털썩 앉아 그림과 함께 챙겨 온 책을 펼쳤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이런 책을 어디서 가져오시는 건지.”
부모님의 필체로 번역된 책은 오로지 프란시스에게만 허락되어 있었다.
“흥미롭단 말이지.”
전혀 새로운 세상. 아마도 가상의 국가이리라. 그곳은 프란시스가 알던 상식과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배울 점도 가득하고.’
솔직히 스승들에게 배울 것이 별로 없는 지금의 프란시스에게는 마른땅에 단비 같은 것이다.
“…….”
잠시 후 프란시스는 신비로운 경제학 서적에 몰입했다. 한동안 아틀리에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렇게 오늘도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부스럭.
“……? 누구야.”
즉시 책을 덮은 프란시스가 책을 나무 밑동에 자연스럽게 감추며 벌떡 일어났다.
퍼퍽 투둑 파슥.
덤불을 헤치는 건지, 무찌르는 건지 모를 소리가 이어지다가.
데구르르…… 풀썩.
풀썩, 하고. 낯선 두 인영이 나동그라졌다.
“어떻게…….”
여긴 지금 그녀의 푸른 힘과 마법으로 이중 보호막을 형성해 놓았는데. 부모님도 아니고, 그녀 또래의 소년들이 뚫고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당황한 프란시스의 상황과 별개로 소년들은 난리였다.
“으윽!”
“으페페펫! 프하! 익……!”
그리고 두 쌍의 눈동자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끔벅끔벅.
멍하니 서로 마주 보기만 하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게 그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 * *
“참. 단, 오늘 그 세 사람이 돌아온다고 했죠?”
알리샤가 다니엘과 차를 마시다 물었다.
“네, 리샤. 몇 년 만에 보겠네요.”
다니엘이 편하게 슬쩍 웃으며 답했다. 조금은 반가운 기색이었다.
“벌써 3년이나 흘렀네요.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안 보냈을 텐데 말이에요.”
“하하.”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가 카인의 아버지 문제로 조사차 여행을 떠난 것이 벌써 3년 전이었다. 연락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니는 곳이 워낙 험하고 외진 곳이라, 함부로 순간 이동 같은 걸 시도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얼굴 못 본 지 3년이나 되어 버린 것이다.
“시스 또래의 제자들을 받았다고 했죠?”
“맞아요. 궁금하네요.”
유진은 지금도 제인 남매를 개인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더는 제자를 안 받는다고 하더니.’
알리샤가 속으로 웃었다.
“유진과 너무 닮아서 아들로 오해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신기하지만, 카인 공의 후계자가 더 궁금해요, 저는.”
“하긴, 그래요.”
카인은 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눈의 반마족 아이를 후계자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얼른 보고 싶네요. 시스와 좋은 친구가 되면 더 좋고요.”
“아.”
알리샤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하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재미있겠는걸요.”
차를 마시면서도 알리샤의 한쪽 손을 무의식적으로 다정하게 잡아 보는 그가 귀여웠다. 알리샤는 그걸 힘껏 모른 척해 주었다.
그들은 세 아이가 이미 만났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프란시스는 불쑥 나타난 두 침입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침입자는 프란시스 또래의 소년들이었다. 하나는 새하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놈보다 다소 산만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생긴 것만큼은 어딘가 귀티가 흘렀다.
‘귀족?’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위화감이 있었다. 저 데굴데굴 굴러가는 산만한 눈동자라든가.
‘그럼 이쪽은.’
다른 한 놈은 흑발이 매우 눈에 띄었다. 프란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자마자 3년째 보지 못한 삼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삼촌들은 독신주의자들이었는데. 게다가 저놈들은 프란시스 또래로 보인다.
‘그렇지만 뭔가 느낌이…….’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은 굉장히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찬찬히 그쪽을 더 샅샅이 살펴보던 프란시스는 문득 그들의 자세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한 놈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고 있었고, 한 놈은 해탈한 표정으로……. 아주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계셨다.
‘어이가 없군.’
그리고 그들은 마치 여행자와 같은 복식을 하고 있었다.
‘수습 기사들인가?’
한 놈은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놈은…….
‘저건, 마법사?’
다시 보니 느껴지는 기운이 독특했다.
‘이건 어디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기운이다.’
마력이되 인간의 마력과 궤를 달리하는.
‘……마족. 기운의 정도를 봐서는 카인 삼촌처럼 반마족인 거군.’
프란시스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스스로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위엄 있는 카리스마를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 보지?’
‘나보고 뭘 어쩌라고.’
처음엔 여신인 줄 알았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자신들이 다른 세상에 온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이…….’
잠시 눈을 두었을 뿐인데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림들. 이야기나 신화 속의 내용들을 재현한 것 같은데, 생동감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넘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소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흑갈색의 풍성한 머릿결. 화가 나서 그런지 짙게 가라앉아 있는 보랏빛 눈동자. 고귀한 빛을 발하는 흰 피부와 우아한 선들. 분노한 낯빛에도 우아함과 묵직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들은 누구지?”
……잘 보니까 허리춤에 검도 차고 있었다. 어, 어쩐지 커다란 위기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프란시스는 적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에게 배운 암살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두 소년들에게는 불행한 사실이었지만.
“그러니까.”
단검 몇 개로 제압된 꼬맹이들을 느릿하게 훑으며 프란시스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제 책 읽는 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이 집에 들어온 스승들 몰래 도시 구경을 나가려다가 걸려서, 도망치는 중이라고?”
두 소년은 얼이 빠져 있었다.
‘검이 안 보였어.’
‘저건 진짜다.’
“대답.”
‘……개멋있어.’
이구동성으로 속으로 외치며 두 소년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년들을 물끄러미 보던 프란시스가 물었다.
“너희 스승들이 정문으로 들어왔나?”
“네, 네!”
여신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언가, 욕하기 직전의 분위기였다.
“……스승들 이름이 뭐지?”
둘은 멈칫했다. 스승들 이름을 함부로 말해도 되는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저 소녀, 이 집에 사는 것 같았으니까.
“제 스승은 유진 드 볼턴 경이십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또렷한 목소리로 백발 소년이 답했다.
“제 스승은 카인 님이십니다.”
“……그렇군.”
여신님은 정확히 두 번 움찔했다. 그리고 미묘하게 안도한 기색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소년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여신님이 그들의 스승들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럼 죽을 염려는 없겠, 지?’
여신님의 살벌한 기운이 한풀 꺾여서 그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체 모를 속박도 풀어 주시면 좋을 텐데.’
카인의 후계자인 흑발 소년이 속으로 한탄했다.
“헤레…… 돌아왔나?”
옆의 바보는 날아온 단검의 궤적에 정신이 팔려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그들은 지금 알 수 없는 은은한 빛에 사지가 묶여 있었다. 흑발 소년은 이 은은한 빛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삼촌 제자가 없는 게 어디야.”
그렇게 중얼거린 프란시스가 그들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나붓한 손짓 한 번에, 단검과 은은한 빛을 수거했다.
‘와. 쩔어.’
‘어마어마하군.’
경이로운 심정으로 두 소년은 그 즉시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시큰둥한 눈길로 응시하던 프란시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긴 내 공간이다. 그리고 너흰 허락받지 못했지. 손님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무례는 무례. 나가라.”
“저, 누님, 제발.”
“누님?”
“힉!”
“친한 척하지 말고.”
나가. 프란시스가 차게 미소 지으며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발 소년은 순간 느낀 살기에 놀라면서도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너 뭐 하냐.’
흑발 소년이 식은 눈으로 친구에게 눈치를 주었다. 알아서 기어도 모자랄 판에 기어오르다니. 저 여신님은 아무리 봐도 그들보다 한 수 위였으니 말이다.
‘폭주를 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건 아직 자유롭게 조절할 수가 없으니.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걸 동원해도 못 이길 것 같았다.
‘그런데 누님은 무슨. 미친놈아. 보내 줄 때 가자고.’
누님이 아니라 여신님이다. 이것저것 셈하는 것과 별개로, 저 사람은 지금, 로힘에게 그냥 여신님이었다. 그런 여신님께 첫 만남으로서 너무 안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별로였다. 스승들과 아는 사이라면, 후에 제대로 차려입고 보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었다.
“그, 그럼 통성명이라도!”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친구는 직진밖에 모르는 놈이었다.
“…….”
여신님의 기색이 심상찮았다. 물끄러미 친구를 보는 눈빛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는 심정이 절절히 전해졌다.
머리를 짚은 흑발 소년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앉기로 했다.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도 여신님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역시. 마력까지 우아하신 여신님이었다.
지켜보던 프란시스는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머리를 굴리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에서는 그녀의 미친 댕댕이 사촌 동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틀리에를 감추기엔 늦었으니. 게다가 삼촌들 보면 어차피 다시 봐야 할 테고.’
그래서 통성명까지는 해 주기로 했다.
“프란시스.”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프란시스 님.”
백발 머리 소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브라임입니다.”
이브라임은 살짝 탄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희게 웃는 얼굴이 몹시 무해해 보였다.
프란시스는 그를 가만히 눈에 담은 뒤 고개를 끄덕이고 흑발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는 로힘, 입니다.”
차분한 어조로 흑발 소년이 말했다. 어조와 달리 붉은 눈이 일순 강렬하게 일렁였다.
프란시스는 조금 더 길게 로힘이라는 소년을 응시하다가 마찬가지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들에게 무심히 말했다.
“그대들 스승과 나는 친분이 있으니, 오늘의 무례는 두 삼촌들을 보아 넘어가 주겠어.”
어느새 군기가 잡힌 두 사람이 ‘네!’ 하고 답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아.”
프란시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미소였지만 두 사람은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사람이다. 여신님은.
“그럼 됐다. 같이 돌아가지.”
그들은 멍하니 그들을 찾고 있는 스승들에게 혼나러 돌아가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프란시스의 아틀리에는 스르륵 변모했다. 텅 빈 아지트로 변모한 곳에 따스한 어둠이 스며들었다.
“나이는?”
“15살입니다!”
“같습니다.”
“아, 같네.”
가는 길에 그들은 나이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편하게 해. 아까 일은 끝난 일이니.”
“네, 아니, 응.”
“어, 잠깐.”
멍하니 답하는 이브라임과 달리 로힘은 무언가를 그제야 떠올리고 창백해졌다.
“……우리 지금.”
“아주 잠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걸 못 지키는 거냐.”
로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프란시스가 은은하게 웃으며 다가가자 유진이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시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다시 뵈어 기뻐요.”
“저도 너무나 반갑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오세요.”
프, 프란시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브라임과 로힘이 애타는 눈길로 들어가는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어억.
“그럼, 꼬맹이들은 날 좀 볼까. 대공 저에서 첫인상만이라도 망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천천히 돌아본 곳에는, 저승사자 같은 유진이 시리게 웃고 있었다. 둘은 시무룩하게 항복을 외쳤다.
유진이 도망친 제자와 카인의 후계자를 찾아 나서기 전.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는 대공 부부를 깜짝 방문했다.
“세상에.”
알리샤가 탄성을 지르며 세 사람을 반겼다. 다니엘은 알 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리샤!”
헤레이스가 외쳤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여행이었거든!”
“왜요?”
3년 전, 카인 혼자서 마지막 뱀파이어의 족적을 밟아 본다고 떠나려는 걸 모두가 말렸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헤레이스는 몹시 들떠 있었다.
“힘들었어요, 헤레이스?”
“하아. 그게 말이지.”
다니엘 말로는 친구와 여행한다는 것에 들뜬 것이라고 했는데. 헤레이스는 다니엘 말고는 친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녀온 지금, 어째 돌아와서 너무 기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맘대로 못 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못 하는 건 너무 짜증나는 일이야…….”
“말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리샤 님, 저치가 하고 싶어 한 일의 대부분은 감옥에 갇혀야 하는 일들이었거든요.”
“아.”
“헤레이스…….”
알리샤와 다니엘이 헤레이스를 보며 대번에 납득한 얼굴을 했다. 헤레이스는 시무룩하던 연기를 때려치우고 사납게 유진을 노려보았다.
“뭐, 다 막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을 얻기도 했고요.”
피식 웃으며 유진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요? 그 제자들?”
“예. 리샤 님.”
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헤레이스가 ‘홧김에 건드린 함정’에서 제 후계자를 발견했고, 헤레이스가 ‘사고 치고 도망치는 걸 잡다가’ 유진의 막내 제자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그래, 내 덕분이지. 전부!”
거드름을 피우며 뿌듯해하던 헤레이스가 뒤늦게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알리샤와 다니엘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렇게 해후를 나누고 있을 무렵, 데려온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유진이 발견했다. 그리고 헤레이스는 그걸 노렸다는 듯 남몰래 씨익 웃었다. 정신을 빼놓은 사이에 애들이 성 밖으로 튄 것이다.
“헤레이스 덕분에 아이들이 늘 좋은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말을 안 듣는다거나, 기척 없이 사라지는 거라거나…….”
유진이 살짝 웃으며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번엔 도둑질까지 가르쳐 주려는 걸 막느라, 제가…… 하아.”
카인이 말없이 유진의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려 주었다. 헤레이스는 억울해하며 외쳤다.
“도둑질이 아니라 염탐! 염탐이야!”
“…….”
“둘 다 정보 길드원으로 쓰면 손색이 없는데. 아쉽다니까?”
아무리 시선을 잠깐 끌어 주었어도 그렇지, 기척을 이렇게 감쪽같이 감춰 내는 건 범상치 않았다.
헤레이스는 아이들에게 속으로 열심히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꿀밤을 맞았다.
“이, 내 나이가 몇인데!”
“사람은 그대로잖습니까.”
유진은 온갖 말썽의 뒷수습을 3년간 하면서 때로는 말보다 꿀밤이라는 것을 체득한 터였다. 헤레이스가 서러운 표정으로 알리샤와 다니엘 사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알리샤는 다니엘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헤레이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헤레이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좋네요.”
다니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자 헤레이스가 몹시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뭔가 얻었나요?”
다니엘이 카인에게 물었다.
“마지막 뱀파이어에 대해서.”
“네. 얻었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족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본래도 숨어 살던 소수 종족이었지만 이렇게 흔적도 남지 않게 사라지는 것은 왜일까. 아버지인 뱀파이어의 왕의 흔적을 찾으면서 카인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마계라고 하더군요.”
“마계…….”
“제 아버지도, 그렇게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다만 아멜롯 라펠테른은 스스로 시기를 최대한 늦추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 하지만 겨우 다시 만난 연인은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오래 전 전생의 기억을 여러 개 되찾고서, 연인은 큰 혼란에 빠졌다.
뱀파이어의 왕은 반려를 위해 미뤘던 마계행을 택했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할 수 있었기에 카인은 차분하게 알아낸 것들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라펠테른 성의 함정에서 로힘을 발견했습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혼혈 마족 아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버려졌다고 한다.
“아직 그 아이는 모르지만 제 아버지의 수하의 혈육인 것 같습니다.”
바람 마족이 아멜롯 라펠테른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사실, 라펠테른 성이 카인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몰랐을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트로얀의 열매가 마족과 관련된 열매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열매가 나타났을 때마다 검은 머리 사람이 보였다는 것은, 의미 있는 정보였어.’
어쩌면 다니엘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구현해 낸 트로얀의 열매도 카인의 마나가 있었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임을.
‘트로얀의 열매에 대한 건, 후에 다니엘 님에게 따로 말해야겠군.’
카인은 생각 끝에 그렇게 결정했다. 알리샤에게 르페르샤를 떠올리게 하는 그때의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고 싶었으니까.
‘이제 괜찮으신 걸까.’
10년하고도 몇 해가 더 흘렀다. 시간이 그리움을 희석해 주었을까? 물을 수는 없겠지만.
“그랬군요. 피곤하겠어요. 조금 쉬고, 같이 식사하죠.”
다니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애정 깊은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도망친 꼬맹이들을 데려와 보겠습니다.”
“아, 시스는? 우리 예쁜 시스!”
“시스는 아마 정원에 있을 텐데. 이따가 같이 봐요.”
“응!”
물을 수는 없으나 알리샤는 행복해 보였다. 카인은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럼 저는 돌아온 아이들의 훈련 준비를…….”
유진이 소소하게 꿀밤으로 사고 치는 것을 막는다면, 카인은 사고를 실컷 치게 한 뒤 지옥 훈련을 베푸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 부부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탈출을 하다니. 점점 헤레이스를 닮아 가는 두 꼬맹이들을 걱정하며 카인이 칼을 갈았다.
“뭐가 이렇게 살벌해요? 아직 애들이잖아요?”
“……보통 애들이 아니라서요. 폭주라도 하면 큰일이라…….”
“포, 폭주요?”
“그런 게 있어. 사실 오늘 카인이 여기서 제발 하루만 얌전하게 있으라고 했거든? 근데 탈출을 했지! 짜식들. 역시 날 닮았어.”
“…….”
다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향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대공가의 식구들은 지옥 훈련을 엿보고 입을 떡 벌렸다.
“평소에는 평범한데 둘 다 폭주하면 종족이 달라집니다.”
둘 다 귀가 뾰족해진 상태로 카인과 싸우고 있었다. 이성을 찾으면 끝나는 훈련이란다. 자유자재로 저 상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본인들도 안정을 찾겠지요.”
“그러네요. 그리고 저 상태면 겨뤄 볼 만하겠어요, 삼촌.”
시스의 담담한 대꾸에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까?”
시스의 경이로운 재능은 이종족의 피가 섞인 재능도 넘볼 수 없을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스. 아까 보니 시스에게는 덤비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시스에게 완전히 빠진 눈빛들이었으니.
‘뭐랬더라. 저 여신님이 그 대공님들의 딸이라고요? 랬나?’
귀여운 막내 제자가 아연실색하며 외쳤었다. 로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고. 시스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릴 듯 말 듯 하며 중얼거렸다.
“그럴까요?”
“……네. 그럴 겁니다.”
“루이스를 불러와야겠네요.”
하긴, 이성을 잃게 하는 데에는 루이스가 특효약이었다. 유진이 식은땀을 흘렸다.
‘음. 생각해 보니 이번 대 아이들은 하나같이 엄청나군.’
시스보다는 못해도 루이스도 천재였다. 황제의 아들이 호위도 없이 마음대로 수도를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0년. 어쩌면 5년일지도.’
유진은 아이들이 그를 따라잡을 순간이 너무나 기대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했다.
‘넷이 모이면 사고를 칠 것 같은데.’
프란시스는 사고를 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했다. 뭐든 안전하게 할 줄도 알고, 세상을 지혜롭게 보기도 하고. 걱정이 없다. 다만 거기에 루이스가 더해지면. 아니, 거기다 저 애들도 같이 있으면?
“……그, 시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아이들이 뭔가 하려고 한다면 분명히 헤레이스가 발 벗고 도와줄 테지. 그러면 그냥 사고 치는 수준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시스는 유진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또 슬쩍 웃고 말았다. 거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란시스는 손짓 한 번에 날아온 루이스와 이브라임, 로힘과 함께…….
“어머, 시스가 여행을 간대요. 루이스도? 용케 오라버니네가 허락을 했군요.”
“시스가 있어서 그렇겠죠?”
“헤레이스도 도와준다고 하고요.”
“좋은 경험이겠네요, 리샤.”
“두 분, 태평하시군요. 지금 저만 불안한 겁니까?”
가출, 아니 여행을 떠났다.
“너무 걱정 말아요, 유진.”
“시스 혼자만 갔다면 오히려 걱정이 됐을 텐데. 다른 아이들도 같이 가고 헤레이스도 함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 아닐까요?
유진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꿀꺽 삼키고 한숨만 쉬었다. 머리로는 그도 납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스라면 지킬 사람이 있을 때 더더욱 안전하게 움직일 것이었다.
“시스는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줄 알거든요.”
씨익 웃는 부부를 보고 유진은 안심했다.
“알겠습니다.”
저건 벌써 뭔가 조치를 취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프란시스 일행은 대공 부부만 빼고 모두가 기함할 일들만 골라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친구들과 동료들을 얻고, 누구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던 길을 택했다. 대제로 손꼽히는 프란시스 대제는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