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파랑새
아기의 꿈에 무지개가 떴다. 작고 영롱하게 노래하는 파랑새들이 무지개를 넘나들며 아이를 불렀다. 아기는 눈을 떴다.
“프란시스!”
다가와 포근하게 안아 주는 여인을 프란시스가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부, 아브으.”
“아이구, 기분이 좋아요? 우리 시스가 그랬어요? 아우, 예뻐.”
“으브.”
까르륵 웃어 버리는 아기는 사랑스러웠다.
“우리 프란시스, 맘마 먹을까요?”
“브아! 아부.”
다니엘은 그 장면을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기적이에요.’
마음에 수없이 담고 담았다가 한 번 흘려보내며 비우는 말이었다. 그는 행복했다.
“리샤.”
어느새 프란시스의 식사가 끝나고 트림도 끝나 있었다.
“먼저 먹고 있어도 되는데.”
“그럴 순 없어요.”
미안한 기색의 알리샤에게 다가가며 다니엘이 부드럽게 답했다.
“그러면 분명 제가 아무것도 못 먹을 테니.”
“……못 말려요. 정말.”
다니엘은 그저 좋아서 웃었다. 그는 반대의 상황에서는 알리샤도 그럴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프란시스는 그러한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말도 못하던 갓난아기 시절에도 프란시스는 부모님 사이의 공기를 몹시 좋아했다. 기분이 좋아 온몸으로 웃으면 따스하게 닿아 오는 부모님의 시선이 참으로 좋았다.
“후에…….”
누가 저 모빌 좀 내 쪽으로 돌려 줘. 검은 말이 보고 싶어!
프란시스는 말보다 생각이 몇 배로 빠르게 트인 아이였다. 잘 울지도 않고, 잘 웃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상당히 씩씩한 아이였다.
“아빠, 엄마. 이고 봐요. 얼음이 안 녹아요!”
나이에 비해 매우 또렷한 발음. 거기다 대화 능력이 또래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의 부모님은 프란시스를 천재라고 하거나, 앞으로 무엇이 되라고 하거나 하지 않았다.
“시스. 우리 아가.”
그들은 그저 어느 때든지 프란시스를 사랑해 줄 뿐이었다.
“저기 별이 혹시 보이나요?”
“아! 네, 엄마!”
변함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보아 주며.
“저걸 이렇……게 이으면, 쨘. 곰이 된답니다.”
프란시스는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아이였지만 솔직한 아이였다.
“신기해요.”
초롱초롱 빛나는 프란시스의 눈동자가 별 같았다.
알리샤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프란시스는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강한 부모님을 몹시 동경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했다.
프란시스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주 평탄하게. 뿌듯하게. 그러니까.
“핡. 시스 누니임!”
“저리 꺼.”
“시, 시스……?”
“……가렴. 가렴이라고 하려고 했어요, 엄마.”
망아지 같은 사촌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루이스 라빈 트리엘은 라빌로프 황제와 아리엘 황후의 아들이었다. 금빛이 도는 하늘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뽀얀 피부까지. 루이스는 아리엘 황후를 쏙 빼닮아 청순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이제 막 10살이 된 소년은 오랜만에 본 사촌 누이를 너무나 좋아했다.
“누이, 이게 얼마만이에요!”
하늘색 눈동자가 살짝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겨우 일주일 만이거든?”
“무려 일주일! 누이. 제가 누이 보고 싶어서 그림도 그렸어요. 매일 한 장씩. 보실래요?”
“사양하지.”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말투도, 시큰둥한 표정도 전부 좋았다. 루이스는 누이를 보며 맹하게 배시시 웃었다.
“하아.”
프란시스는 식은 눈으로 루이스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작게 웃은 알리샤가 손뼉을 한 번 쳐서 시선을 모은 뒤 말했다.
“일단 들어갈까요?”
“네, 어머니.”
“네! 고모!”
루이스가 프란시스의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 들어갔다.
‘시스도 참. 귀찮아하면서도 굳이 손을 뿌리치지는 않는다니까.’
아마도 둘이 신나게 놀고 들어올 것이다.
알리샤가 프란시스를 보며 숨죽여 웃었다.
“너 왜 자꾸 오는 거야?”
알리샤의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프란시스가 물었다. 이 망아지 같은 동생은 사고뭉치로 유명했다. 저 천사 같은 얼굴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에이, 사고 안 쳐요.”
그녀에게는 고분고분하고 망아지보다는 강아지처럼 구는 사촌이었지만.
“그저께 수도 어린애들을 모아서 전쟁을 했다지?”
“…….”
“심지어 네가 악당을 했다고.”
아주 잠깐 움찔했던 루이스가 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누님. 검도 배워 본 적 없는 애들인데,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그런 애들만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던데. 귀족 애들만 골라서 팬 건 뭐야?”
“그거야, 걔네가 자꾸 뵈기 싫게 굴었는걸요.”
루이스가 볼을 부풀렸다.
‘하여간 소문이 빠르다니까.’
처음에는 조금만 모아서 놀려고 했었다.
‘마왕 군대와 왕국군 사이의 전쟁! 얼마나 재밌어?’
알리샤 고모가 쓴 책 중에 마왕과 사랑에 빠진 공주와 사실은 못된 악당이었던 왕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요즘 이야기 따라하는 게 유행인데.’
거기서 루이스는 악당 왕자 역을 맡았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그 역할이 제일 싸움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놈들이.’
애들이 그렇게 모일 줄은 몰랐지. 거기다 귀족 애들도 끼어 있었고.
콧대 높은 것들이라, 전쟁이 영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귀족이니까 좋은 역을 다 가져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걔네도 다른 애들 때렸어요, 누님. 나쁜 애들이에요.”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패?”
“…….”
루이스가 슬쩍 눈을 피했다. 악당 왕자는 마왕이고 뭐고 책의 주요 인물들 중 남자애들은 모조리 기절시켰다.
“그……렇잖아도 아버지한테 엄청 혼났다고요.”
원래 왕자는 꽤 멋들어지게 죽어야 하는 인물인데, 그걸 못 해 보고 말았다. 그것도 참 아쉬웠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하는 루이스를 프란시스가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너 지금 근신 기간일 텐데. 저번 근신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연장된 거지? 대체 왜 근신 기간에 자꾸 여길 오느냐고 묻는 거다.”
“헤헤.”
그야 심심한 건 죽어도 못 참으니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말하면 누님에게 멱살 잡혀서 텔레포트 진에 내동댕이쳐질 것이 분명했다.
“웃지 말고.”
“누님 보고 싶.”
“말고.”
누님이 살벌하게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루이스는 빠르게 마음을 바꿨다.
“……정령도 보고 싶고, 여기선 한 번도 장난을 못 쳤으니까요.”
“당장 우리 성에서 나가.”
눈으로 욕하며 프란시스가 황궁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 누니임.”
“치워라.”
프란시스가 10살, 루이스가 8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말겠지.’
프란시스는 거머리처럼 팔에 달라붙은 생명체를 무시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루이스가 떨어졌다.
“누님, 우리 아지트로 가요?”
함께 정원 한구석으로 향하며 루이스가 물었다. 프란시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드러난 곳은 정원 한 구석에 수풀과 나무들로 가려진 작은 공간이었다. 두 아이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프란시스와 루이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했다. 어른들 몰래 만든 아지트를 공유할 만큼은.
“와아!”
루이스가 안쪽으로 달려갔다. 프란시스는 픽 웃으며 고운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푸르고 청명한 기운이 폭죽처럼 허공에서 터졌다.
“와! 별!”
별 가루가 루이스에게 우수수 떨어졌다. 루이스가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좋아서 방방 뛰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님이 최고예요! 최고!”
프란시스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르페르샤 황녀의 힘을 물려받았다. 알리샤의 딸이기 때문인지 정령들과 부딪히지도 않는다.
12살의 그녀는 그 힘을 매우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지트에서 할 일은 많았다. 둘은 그곳에서는 흙장난도 자유롭게 했고, 별일 아닌 일에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거나 웃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시간이 흐른 것을 자각한 프란시스가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더 놀래요.”
루이스가 생떼를 부릴 기미가 보인다. 프란시스는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넌 여기 있어라.”
루이스가 멈칫했다.
“난 돌아가서 아버지가 해 주신 사과 파이를 먹을 테니.”
“헉.”
미련 없이 돌아서는 프란시스를 루이스가 흔들리는 눈으로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사과 파이! 고모부가 사과 파이를 해 놓으셨다고요?”
“그래.”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루이스에게 프란시스가 픽 웃으며 답했다.
‘역시, 이게 잘 통해.’
아버지 다니엘의 사과 파이는 일품이니까.
“같이 가요, 누니임!”
아마 곧 황후 마마가 아들의 가출을 끝내러 달려오실 것이다. 그 전에 마지막 만찬 정도는 베풀어 주자.
“많이 먹으렴.”
“네! 누님, 너무 좋아요!”
오늘만 사는 녀석. 프란시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시각. 프란시스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아리엘 황후가 리샤를 보고 반쯤 뛰어오고 있었다.
“꺅, 리샤! 오랜만이에요!”
* * *
“어서 오세요, 아리엘.”
역시, 루이스는 어머니를 쏙 빼닮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알리샤가 아리엘 황후를 반겼다.
“으, 죄송해요, 리샤. 우리 망아지가 또 쳐들어왔죠?”
리샤를 한 번 꼬옥 안은 뒤, 아리엘이 눈썹 끝을 추욱 늘어뜨리며 물었다.
“애들은 지금 정원에서 놀고 있어요.”
알리샤는 숨죽여 웃고서 답했다.
“다음엔 오라버니랑 아리엘도 함께 쳐들어오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오셨어요?”
다니엘이 빙그레 웃으며 나와 아리엘을 반겼다. 알리샤의 말에 배시시 웃던 아리엘이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다니엘.”
“다음에 다 같이 오시면 사과 파이 말고 진짜 만찬을 준비할 게요.”
조금 전 알리샤의 말을 들었는지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리엘이 상기된 표정으로 탄성을 지르며 외쳤다.
“좋아요! 좋고말고요!”
아마 라빌로프는 다른 건 몰라도 여기에 가자고 하면 기꺼이 엉덩이를 의자에서 뗄 것이 분명했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그냥 지금 부를게요. 우리 아들도 정신 차리게 할 겸.”
아리엘은 즉시 라빌로프를 호출했다. 물론, 라빌로프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달려왔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눌 무렵, 아이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님, 그래서 내가요……. 해서, 콜린 형을…… 아팠지만 재밌었어요!”
“그 사람 그러다 울면 어쩌려고. 제인 씨가 널 가만히 안 둘걸?”
“사실 그 뒤에 들켜서 지금까지 제인 누님은 피해 다녀요.”
“……자랑이야?”
아리엘이 포옥 한숨을 쉬었다. 아들은 그녀를 정말 꼭 닮았는데, 어릴 때의 그녀만큼 천방지축이면서 머리가 돌아가는 건 제 아빠를 닮았다. 라빌로프와 아리엘의 성격이 섞여 망아지가 탄생할 줄은…….
“그리고 또요. 제가요.”
“그래.”
타박을 그렇게 들어도 루이스는 프란시스를 몹시 좋아했다. 소란스러운 것은 루이스뿐이었지만, 프란시스도 평소보다 목소리가 은근히 높아져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즐거운 거겠지.
가까워지는 대화를 들으며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웃었다.
“흐엑!”
신나게 조잘거리던 루이스가 하얗게 질렸다. 프란시스는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파이도 못 먹고 끌려가겠군.’
아리엘 외숙모뿐 아니라 라빌로프 삼촌까지 오실 줄이야.
루이스는 아리엘 외숙모가 보일 때만 해도 그냥 안절부절 못하기만 하더니,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라빌로프 삼촌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라빌로프 삼촌이 무섭기는 하겠지.
‘이번엔 단단히 잡기로 하신 모양이야.’
다 자업자득이었다. 프란시스는 약 3초간의 애도를 끝내고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삼촌, 외숙모.”
“오랜만이구나.”
“시스!”
아리엘이 팔랑팔랑 다가와 프란시스를 가볍게 안아 주며 볼을 비볐다. 라빌로프가 픽 웃으며 프란시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프란시스는 그녀를 안은 아리엘이 그대로 한쪽 손을 뻗어 루이스의 볼을 잡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에에……. 아파요!”
“아프라고 꼬집는 거예요, 황자!”
“힝.”
“정말! 누굴 닮아 이러는지!”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소녀 같은 아리엘이 불퉁한 소리로 외쳤다. 프란시스는 루이스를 아리엘에게 넘긴 뒤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알리샤가 애정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프란시스를 안아 주었다.
“뭐 하고 놀았어요, 시스?”
“푸른 힘을 보여 주었어요, 어머니.”
루이스에게는 최근에야 보여 주기 시작한 힘이었다. 처음 보여 주었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정령을 볼 때만큼 좋아하던 루이스였다.
프란시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상기된 얼굴에 알리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프란시스는 기본적으로 다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아이였다. 하지만 부모님과 있을 때는 풀린 표정을 하고는 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아이.
“오! 루이스가 좋아했겠네요.”
“그랬어요.”
속살거리는 모녀의 대화가 이어졌다.
‘행복하다.’
다니엘은 그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행복해.’
아리엘에게 혼나는 루이스를 구경하던 라빌로프가 그런 그를 보고 웃고 말았다.
“자네도 참 많이 변했어.”
다니엘이 그를 힐끔 보았다.
“폐하만 할까요.”
말투만 부드럽지 여전히 라빌로프를 높여 대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족이 될 수 있었겠지.’
라빌로프가 유쾌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나보다 더하지. 자네, 애처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헛웃음만 나온다니까.”
다니엘이 이상한 눈으로 라빌로프를 보았다.
“왜? 뭐?”
라빌로프가 슬쩍 성질내며 묻자 다니엘이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돈 남 말 하시네요.”
“뭐?”
저건 또 무슨 말인지.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쓰는 알리샤와 다니엘이라 라빌로프가 찜찜하게 물었다.
물론 다니엘은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잠시 서로를 이상하게 보던 두 남자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귀찮은 일이 가득해.”
“즉위하신 지 2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그 소립니까?”
선황제는 2년 전, 간소하게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났다. 아주 가끔 자식들을 찾기는 하지만 대부분 어디에 있는지만 서신으로 알려오고 있었다.
‘자신도 뭔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잠시 그를 떠올리던 다니엘이 물었다.
“……그때 그 생각, 변치 않으셨나요?”
“응.”
바로 알아들은 라빌로프가 답했다. 둘은 프란시스를 보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확신하게 되더군. 다음 대 황제는 저 아이가 될 거야.”
씩 웃으며 하는 말에 다니엘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걸 결정하는 건 폐하가 아니라 우리 시스입니다.”
“물론 그렇지. 그런데 확언하는데, 아마 저 애는 황위를 택할 거야.”
다니엘이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라빌로프는 조금 심술궂게 미소 지었다.
“해 보니까 알겠거든. 황태자 때 상상하던 거랑 달라. 저 아이는 이 자리를 꽤나 행복하게 수행할 성격이라고.”
“폐하 아들이 뭐라고 안 합니까?”
다니엘의 말에 라빌로프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잖아도 아들에게 물어봤었다. 혹시 황위에 마음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라빌로프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자기는 아빠처럼 일중독자로 살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
다니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라빌로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일중독자의 길을 우리 따님은 걸어도 된다는 건가?
“너무 그러지 말라고.”
어릴 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기를 수시로 풀풀 날리던 황제가 꽤 시무룩하게 말했다.
“자네 딸한텐 내 아들도 있고, 걔네들도 있고, 우리도 있잖나.”
아마 일중독자 소리를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할 때 루이스가 라빌로프를 얼마나 불쌍하게 보던지! 그 눈빛을 떠올리니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같지 않을 거야…….”
“어쨌거나, 먼일이죠.”
“그래. 먼일이지.”
앞으로 일복만 넘치게 된 라빌로프가 한탄하며 답했다. 다니엘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프란시스는 한밤중에 조심조심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대공저 옥상의 작은 다락방이었다.
“…….”
끼익.
작은 울음을 토하는 문을 달래듯 닫은 뒤 프란시스가 다락방의 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셨다. 마법을 걸어 두어 먼지가 쌓이지는 않지만 다락방 특유의 고요히 잠든 공기는 그대로였다. 그것은 조금 눅눅한 듯도 하고 오래된 달빛을 꽁꽁 쌓아 놓은 듯도 했다.
“……좋다.”
이곳은 루이스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부모님은 가끔 초대해 드렸지만.’
프란시스는 자유로이 걸어 익숙한 손길로 모포를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벌러덩 드러누워 또 크게 숨을 쉬었다.
“후.”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어머니에게 들은 별을 노래하는 곡조가 휘파람으로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이제 14살이 되는 프란시스는 길고 풍성한 흑갈색 머리카락에 현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어린 숙녀였다.
부모님도 어마어마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프란시스의 미모는 그 사이에서도 축복이라 할 만했다. 둘의 장점만 골라 최상의 조화를 이루며 빚어낸 모습이었으니까. 정작 그녀 자신은 그 독보적인 외모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모포 위에 부드러이 물결치며 흐드러졌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의 곡선을 따라 달빛이 어려 있었다.
한참을 숨만 몰아쉬고 있던 프란시스는 몸을 굴려 엎드렸다. 그리고 손이 바로 닿는 곳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흰 고래와 파랑새.’
어릴 적 프란시스가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종종 즐겨 보는 동화였다.
“…….”
프란시스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서 책에 빠져들었다.
어느 바다에 고래가 하나 살고 있었다. 그 고래는 하얀 몸을 가진 특별한 고래였다. 고래는 아주 어릴 때 가족들과 헤어져 외딴 바다에 던져진 외톨이였다.
-산을 넘을 수 있다면.
저 무지개가 다리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래는 산 너머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게다가 불행히도, 하얀 고래는 사람이 버린 마법 물품 쓰레기 때문에 병들어 있었다.
-나는 죽을 거야.
고래는 아름다운 소리로 구슬프게 울었다.
-무서워.
고래는 정처 없이 이동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름다운 목소리구나.
파랑새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파랑새는 짙푸른 여름 하늘의 빛깔과 가을의 청명한 하늘빛을 모두 가진 예쁜 새였다. 하얀 고래는 울던 것도 잊고 파랑새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나는 파랑새야.
푸른 하늘을 오려 낸 듯한 날개가 우아하게 펄럭였다.
-나는, 나는 고래야.
하얀 고래는 우물거리다 덧붙였다.
-하얀 고래.
파랑새가 악기 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자주 만나게 되었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것은 비밀인데.
어느 날 파랑새가 말했다.
-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새란다.
하얀 고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파랑새를 보았다.
-정말?
-응. 작은 소원만 이루어 주지만.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그러니 소원을 들어줄게, 고래야.
파랑새에게 하얀 고래는 절박하게 소원을 빌었다.
-산 너머에 내 소식을 전해 줘.
가족에게 닿고 싶었다. 파랑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날아올랐다.
-산 너머의 고래들에게 말이지? 좋아.
파랑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약도 없이, 떠나 버렸다. 하얀 고래는 파랑새가 떠난 자리를 맴돌고 또 맴돌았다. 그러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 소원을 빌었을까.
파랑새는 병을 낫게 해 줄 수도, 고래를 산 너머로 데려가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래 곁에 남아 줄 수는 있었는데.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끝까지 혼자일 거라는 것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고래는 파랑새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나 파랑새는 오지 않았다.”
어릴 적의 프란시스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눈물이 났다.
‘울어요, 시스?’
그리 묻는 어머니께 답했었다.
‘마음이 아파요, 어머니.’
어머니는 그때 프란시스를 꼬옥 안아 주었었다. 프란시스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때를 떠올렸다. 잠시 멈추었던 책장이 다시 넘어갔다.
“하얀 고래는…….”
하얀 고래는 어찌된 일인지 해가 지나도 살아 있었다. 고래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점점 아픔이 없어지지?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래가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을 때, 하얀 토끼가 한 마리가 다가와 하얀 고래에게 말했다.
-네가 하얀 고래구나. 파랑새에게 부탁받았어. 너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던데.
-뭐라고, 뭐라고 했는데?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그러더라.
하얀 고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파랑새는 사실 소원을 들어주는 새가 아니었다. 그 새가 할 줄 아는 것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새는 고래 친구를 위해 힘을 다했다. 다만 고래가 너무 커서 힘을 다해도 모자랐던 것이다.
-자기 몫까지 오래오래 살아 달라고 했어. 네가 건강해진 뒤에 말을 전하라고 해서 지금 전하는 거야. 그럼.
말을 마친 토끼가 멀어졌다. 고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무 희망도 없고 생이 무의미하기까지 했던 예전과 달리.
고래는 꿋꿋해졌다. 이제는 울지 않고, 정말로 아름답게 노래했다.
파랑새에게 똑같이 구해졌었다는 하얀 토끼와도 친구가 되었고,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물속 생물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동화책 마지막 장은 별이 된 하얀 고래와 파랑새가 만나 어울려 노는 모습이었다.
프란시스는 설핏 미소 지었다. 어린 날의 프란시스는 어쩐지 파랑새가 떠났을 때보다 결말에서 더 많이 울었다. 너무 서럽게 펑펑 울어서 어머니가 당황했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움은 가슴 아픈 감정이지만 어쩌면 행복의 필수 요소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지는 것처럼. 비가 오기 때문에 비 갠 뒤의 맑은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프란시스는 책을 다 읽어 준 뒤 어머니가 해 주신 말씀도 떠올렸다.
펑펑 울면서, 프란시스가 말했었다.
‘어머니, 저는 파랑새가 되고 싶어요.’
‘그렇군요. 왜요?’
‘바보 같고, 아름다워서요…….’
아주 어린 아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시스가 파랑새가 되어도, 파랑새처럼 떠날 일은 없을 거예요.’
‘왜요?’
‘시스에게는 시스의 파랑새가 가득하잖아요.’
귀에 보드랍게 내려앉던 다정한 목소리. 펑펑 울고 난 뒤라 졸음이 밀려오는 중에도 어머니의 말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니 함께 끝까지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는 프란시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었다.
프란시스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자야지.’
초가을의 밤은 무언가를 덮지 않아도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잠든 아이를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