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이상한 마탑의 알리샤
제인에게.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있죠? 아이들도 잘 있는지 궁금하네요.
콜린 소식을 들었어요. 새로운 신의 성자가 되었다고요.
대신관이 콜린을 많이 아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오히려 축하할 일인걸요.
성자라서 보통 신관보다 운신이 자유롭고, 새로운 신의 첫 아이인 만큼 인정도 받을 거거든요.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이해가 돼요. 저도 사실 이런저런 생각이 많거든요. 콜린은 아직 어리니까요. 그렇죠?
그러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제인이 콜린과 자주 볼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저는 언제나처럼 잘 지내고 있어요.
가끔 야외에서 잘 때도 있는데, 단도 있고 함께 다녀 주는 친구들-정령왕 분들 말이에요-이 있어서 마을에 머무를 때보다도 편해요.
무엇보다도 단이 해 주는 요리가 진미거든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제가 요리만큼은 정말이지 재주가 없어서…….
어쨌든!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마탑에 갔을 때의 이야기예요.
* * *
때는 초겨울. 알리샤와 다니엘이 결혼하기 전, 둘이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곳곳을 여행하면서 별별 신기한 일들을 다 겪었지만 마탑만큼 호기심이 생기는 곳은 없었다.
“시온이 마탑주로 있던 탑은 여기서 이사를 간 거였군요.”
“맞아요, 리샤. 오래전 일이지만요.”
“……오래되어서 그런가 뭔가 으스스하네요.”
알리샤가 살짝 팔을 쓸며 말하자 다니엘이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알리샤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알리샤는 그대로 폭 다니엘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로 옛 마탑의 입구에 섰다.
“리샤, 빙 돌아서 가는 게 안전한데요. 여기, 꼭 보고 싶어요?”
“마, 많이 위험할까요?”
그녀가 시무룩하게 묻자 다니엘이 웃음을 참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위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이 탑이 우리를 얼마나 경계하느냐에 따라 함정의 수준이 달라지거든요.”
“함정…….”
맙소사.
“전하고 있으면 문제없지만요. 다만, 많이 놀랄 수도 있어서요.”
“그럼 괜찮아요!”
놀랄 일뿐이라면야! 귀신이 나오더라도 단과 손잡고 있으면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갈까요, 단?”
알리샤가 씩씩하게 말하자, 다니엘이 눈을 살짝 휘며 그녀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탑의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다.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우리는 계단을 밟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서 젠을 딱 만나다니.”
-만나서 다행인 거다. 겁도 없이 여길 들어오다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젠의 등을 콕콕 찍어 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저도 있는걸요.”
다니엘이 느긋하게 말하자 젠이 외쳤다.
-그래도 여긴 위험한 곳이다! 사방에 파훼되지 않은 함정이 널려 있고 말이지.
나는 흥분한 젠을 다독이며 물었다.
“그런데 젠. 젠은 여기에 왜 온 거야?”
-찾을 것이 있어서.
“찾을 것?”
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봉인된 정령이 표시된 지도 말이다.
“응?”
“아.”
우리를 힐끔 본 젠이 날개를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왕들이 풀려났으니 다른 정령들도 풀어 줄 수 있게 된 거지. 다만, 지도가 있으면 더 빨리 풀어낼 수 있다.
“그렇구나.”
-특히 어린 정령들은 가능한 한 빨리 풀어 줘야 한다.
어딘가 근심 어린 목소리였다.
-문이 황금색인 다섯 개의 방을 뒤져야 하는데. ……못해도 일주일은 잡아야겠군.
“……젠은 왕인데도? 대체 어떤 함정들이길래.”
-정신 계열 마법들이 끼어있거든. 게다가 황금방은 안과 밖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아, 그래서 일주일이구나.”
나는 다니엘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젠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도와 드릴까요?”
-네 녀석이 어떻게.
“리샤와 힘을 모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로바인 왕가는 고대의 마법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겪은 일들은 끔찍했지만, 그 왕국의 왕족으로서의 지식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맞아. 다니엘도 그렇고, 나도 정신계열에는 강하니까.”
비록 실험과 일련의 일들의 후유증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돌아다니지 말고 안전한 곳에 가 있어.
“한시가 급하다며.”
젠이 움찔했다. 순간 계단이 끝나고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다른 분들은 바쁘셔?”
-그래. 이제 슬슬 바빠져야 하니까.
바누스 가가 정령을 유난히 경계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것은 정령들이 이 세상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 그런 힘을 억지로 봉인해 놓은 것이, 바누스 가였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한가하지 않다.
“그럼 시간을 아껴야겠네.”
갈림길을 노려보다가 젠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저쪽을 맡을게.”
-좋아. 부탁하지. 나는 이쪽으로 혼자 가겠어.
나와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젠을 배웅해 주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대로 땅이 꺼져 버렸다.
“앗!”
“이런.”
다행히 다니엘이 힘을 사용해 우리는 떨어지는 통로 아래에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기, 첫 번째 방이에요.”
그가 나를 살피며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황금색의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첫 번째 방에 들어서자 온갖 금은보화가 우리를 반겼다.
“이렇게 번쩍이는데, 뭔가 찝찝하네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다니엘이 답했다.
“전부 저주가 깃든 물건들이니까요.”
“으, 그렇군요.”
“만지지만 않으면 될 거예요.”
우리는 조심스럽게 나가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문에는 종잇조각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 조각을 챙긴 뒤 우리는 방을 나왔다.
두 번째 방은 위아래가 바뀌어 있는 곳이었다.
“헉.”
“절 잡아요, 리샤.”
문을 열었을 때는 천사들이 뛰어놀 것 같았던 공간이, 우리가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불구덩이 지옥으로 변했다. 거기다 위아래가 바뀌니까…….
“눈 감아요.”
순간적으로 치솟던 불안감은 다니엘의 평온한 목소리에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감고 나를 안다시피 한 채로 허공을 거꾸로 걷는 다니엘을 느꼈다.
“끝났어요.”
“아…….”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 싶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빙긋 웃었다.
나는 그의 턱에 쪽 입을 맞추고서 그를 꼬옥 안았다. 그가 아늑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꽉 안아 주었다.
“아마 우리가 온 쪽에 방이 세 개 있었나 보네요.”
다시 걸음을 옮긴 뒤 마주한 것은 세 번째 황금 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니엘이 곤란해 보였다.
“왜 그래요?”
“정신 계열 마법이 매우 강하게 걸려 있는 방이라서요. 생각보다 더 큰 마법이에요.”
“어떤 건데요?”
“우리가 아는 한 가장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으로 환경을 바꾸는 마법. 이 방은 대마법사가 만든 것 같아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다니엘이 답했다.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금세 나왔다.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새로운 것은 대부분 경험해 보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음. 죽을 정도의 위험인 거예요?”
“다행히도, 그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에요. 그 환상에 갇혀서 나올 수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리샤에겐 제가 있잖아요.”
다니엘도 예상했다는 듯 술술 답해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 볼래요.”
“좋아요.”
그리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놀랍게도 방의 내부는…….
“이건.”
서울 한복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 * *
“가만있자. 제인은 서울이 어딘지 모르겠구나. 음, 그럼 뭐라고 설명하지?”
편지를 쓰다 말고 고민하던 알리샤는 발치를 간질이는 고양이 코코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다시 편지를 이어 갔다.
“제가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답니다…….”
* * *
“여긴. 서울?”
“서울? 리샤, 아는 곳이에요?”
“전에 제가 있던 곳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서요.”
그에게는 여행하면서 대부분의 사실을 말한 터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왜 이게 정신 공격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다니엘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고대에 거울의 방이라고 불리던 마법 같은데…… 이 마법은 가장 멀고 편한 곳을 비춘다고 해요.”
가장 편한 곳을 비추고서, 벗어나고 싶지 않게 자극한다고.
“보통 사람들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요.”
다니엘은 그렇게 설명한 뒤, 할 말이 남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근데 가장 멀고 편한 곳이라면, 여기가 맞네요.”
나는 그를 의아하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여기가, 리샤에게 가장 편해요?”
묘한 어조에 돌아보니 다니엘이 어딘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닫고 말을 더했다.
“아, 그런 의미의 편함이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여기는 ‘몸이 편한’ 곳이라는 말이죠.”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는 당장이라도 나를 들고 방을 부수고 튈 것 같은 다니엘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긴 정말 오랜만에 보네.’
생각해 보면 늘 조금은 붕 떠 있는 느낌이었던 곳.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는 했다.
‘도서관이라 더 그런 것 같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지역 도서관이었다. 물론 시설도 깔끔해서 다니엘에게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알려 주기에도 적절했고.
이윽고 우리는 구립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것이기 때문인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쏴아-. 마법도 아닌데 손짓 한 번에 시원하고 맑은 물이 터져 나왔다.
“여긴…….”
여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다니엘이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냈다.
“온수도 나오네요. 아까 그 저절로 움직이는 문도 그렇고…… 마법은 정말로 아닌데. 정령의 힘도 느껴지지 않고. 아니, 애초에 여긴 비춰진 세상인데.”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깨끗한 거울을 다소 낯설게 응시하는 다니엘을 이끌었다.
“여긴 휴식 공간이에요.”
내 기억보다 좀 더 완벽해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주로 아이들이 머물러요.”
폭신한 러그가 넓게 깔려 있고, 더 폭신한 색색의 쿠션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다니엘이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기린 인형을 주워들었다.
“이건 설마, 그…… 동물인가요?”
“네. 인형이죠.”
인형도 귀엽고, 신기해하는 그도 귀여웠다. 웃으며 알려 주자 그가 나를 가만히 보더니 옅은 미소를 그렸다.
“리샤, 당신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했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요. 아이들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히 따뜻한 눈빛을 하거든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그냥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음, 저쪽도 가 봐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이건 뭔가요?”
“안마 의자예요. 앉아 봐요, 단.”
다니엘은 내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음, 편안하네요.”
몸에 딱 맞는 안마 의자에 만족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누르고 가장 약한 강도로 설정했다.
“어!”
그답지 않게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재밌었다.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신기함과 만족감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안마인 거군요.”
“그래요.”
나는 즐겁게 웃으며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15분이 끝난 뒤에 의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신기하네요.”
굳이 전기에 대해서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씨익 웃고는 다른 곳으로 그를 끌고 갔다.
“여기는 사실 도서관이에요.”
“이 건물 전체가 말이에요?”
“네. 지금 본 것들은 기본적인 편의 시설들이고요.”
편의 시설이라는 말을 몇 번 되뇌던 다니엘은 어느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책이 있는 곳으로 갈래요?”
“좋아요.”
그의 얼굴이 몹시 이지적인 느낌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부셔라. 나는 그와 함께 세 층의 서고로 향했다.
“…….”
그는 매우 흥미로운 눈빛으로 서고 곳곳을 누볐다.
“읽을 수 있어요?”
“네. 그런 마법이 있거든요.”
“다행이에요.”
읽을 수 있는 책은 많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이라도 펼쳐 본 책들만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아쉽네.’
떨어지지는 않으면서 우리는 서고를 둘러보았다. 나는 약간의 향수에 젖어서. 그리고 그는.
“……이곳, 굉장하군요.”
들어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니엘이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사회/윤리 서고였다. 들고 있는 책은 고등학교 기본서였고.
“정말 다른 세상이네요.”
“몸이 편한 세상이라는 거 이해가 되죠?”
“……네. 여러 가지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가 이윽고 어딘가 근심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리샤, 우리가 시간을 지체해서…… 이제 나가야 할 것 같네요.”
“그럼 나가요.”
내가 흔쾌히 답하자 그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머무르고 싶어 할까 걱정한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이 싫어요, 단.”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뱉고 보니 진심이었다.
“편하지만, 내 자리는 아니었거든요.”
“…….”
그는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 부근에 가만히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어 그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가 부드러운 얼굴로 내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미련이 없기에, 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지도 조각을 모은 뒤, 우리는 뻥 뚫린 길을 따라 걸었다.
역시, 이 세상이 좋다. 그리 생각하며 젠이 기다리는 곳에 이르렀다.
-늦었군.
“우리 쪽에 방이 하나 더 많았잖아. 자, 여기.”
-……고맙다, 리샤.
다섯 조각을 잇자 작은 지도가 완성되었다.
“당분간은 못 보겠네?”
-그래.
사시사철 겨울인 극지방은 우리 둘만 가기로 했다.
-리샤, 빨간 녀석이 이걸 전해 주라고 했다.
그때 어쩐지 떠나기를 망설이던 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연인에게 필요한 거라고 하더군.
젠이 빨간 녀석이라고 부르는 이는 불의 정령왕이었다. 얼마 전부터는 나와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정령왕.
“연인에게 필요한 거라고?”
정말 솔직히 말해서 뭔지 보기 전부터 조금 민망했다. 그야, 연인에게 필요하다고 하면 보통은 그, 그런 쪽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음, 그런 쪽으로 뭘 받는 건 별로인데.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어…….”
“음.”
다니엘과 나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불의 정령왕이 준 것은.
“……이게 뭘까요?”
“씨앗 같은데요?”
다니엘마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젠을 빤히 보자 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집이다.
“……?”
“……?”
-어디에서든 머물 곳이 갖춰져야 한다고 하던데.
“엄…… 그건, 음. 그래. 그러네.”
“심는 건가요?”
-그래. 땅에 심으면 집이 자란다. 인간들의 별장이라고 하더군.
나는 손에 놓인 씨앗 다섯 개를 보다가 활짝 웃었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줘.”
-그러지.
한숨을 쉬며 젠이 단을 힐끔 보았다.
젠이 떠난 뒤 우리는 마탑을 조금 더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황금 문의 방에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책들을 열심히 보았다.
다니엘은 이쪽 세상의 사상들에 관심이 많았다. 수학에도, 인문학에도, 아니 사실 보이는 모든 학문에 흥미를 보였다.
씨앗은 매우 유용했다. 마탑 어디에든 씨앗을 하나 놓고 무엇이든 덮어 주면 그 자리에 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씨앗으로 수거도 가능했다.
우리는 그 옛 마탑에서 한 달가량을 머물렀다.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면서 아직 말하지 않았던 것들도 자연스럽게 터놓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떠날까요?”
“그래요, 리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채로 답했다.
그 길로 마탑을 빠져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가장 추운 지방에 이르렀다.
아리엘과 오라버니의 결혼식 초대장을 받은 것은 씨앗 별장을 만들고 지낸 지 열흘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리샤 님!”
겨울의 신부 아리엘은 눈의 요정 같았다.
“언제 오셨어요! 알았다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한껏 흥분해서 와다다 달려온 아리엘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면이 있고 자기 세상이 확실한 성격은 변함없었다. 다만 어린 티를 벗은 느낌이었다. 소피아나 이비엔 경과도 잘 맞는 것 같고, 그들에게 영향도 받은 것 같았다.
“아아, 눈의 여왕님이 축복해 주시면 너무나 행복할 거예요!”
……이런 점은 그대로이지만. 나는 그저 허허롭게 웃다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폭 안아 주었다.
“행복하게 살아요, 아리엘 영애. 가족이 되어서 기뻐요.”
오라버니에게는 먼저 들렀다 온 참이었다. 아리엘은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그녀를 놓아주고 살피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영애?”
“헤헤. 좋아서요. 전 어머니가 안 계셔서. 어, 감사드려요.”
답지 않게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는 아리엘을 가만히 보다가 언니가 내게 해 줬던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다독여 주었다. 이마에 입을 맞춰 주자 아리엘은 황홀한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여간. 웃음을 꾹 참고서 신부 준비실을 나왔다.
“날 좋다.”
바쁘다던 정령왕들도 작은 새나 동물의 형태를 갖추어 찾아왔다. 그들을 반기며 나는 다니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겨울이지만 햇살이 부드러운 날이었다.
오라버니가 아리엘의 면사포를 살짝 걷고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둘 다 잔뜩 긴장한 것이 보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졌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잘 사실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친구에서 연인이 되어 있었다는 둘의 편지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벌써 우리 오라버니가 장가를 가시네요.”
다니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잔잔하고 다정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내 머리에서 꽃잎을 떼어 주었다. 특별한 말이 없어도 그 순간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그가 벅차게 좋았다.
결혼식이 파한 뒤 우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