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가 사랑할 때(5권) (6/15)

악녀가 사랑할 때 5권

사실 원고를 넘긴 이튿날, 나는 예정대로 엠마를 따로 불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언니가 아주 어렸을 적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하, 혹시…….”

“응. 나 전에 오래 아픈 뒤로 기억이 조금 혼란스러워서.”

몹시 놀란 듯했지만 엠마는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전하, 전하의 어머님께선 신기한 힘을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신기한 힘이라니?”

어린 시절을 말해 달라니까 뜬금없이 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응?”

어쩐지 엠마의 말이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나, 그녀가 말했다.

“전하의 어머님께서 궁에 무언가를 해 놓으셨는데, 그것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아, 리시안 바누스가 사술을 쓴다는 소문도 있었지. 마법은 아니지만 이상한 힘이라고, 그래서 더 무서운 악녀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나?’

엠마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그분이 계셨던 때에는, 궁에 들어가서 본 것의 기억이 궁을 나오면 흐릿해지고는 했습니다.”

“…….”

“그 당시, 전하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렇구나.”

하나는 분명해졌다. 이렇게 기억 조작을 해야 했을 정도로 철전하게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썼다는 이능. 그건 조금 걸리는 단어여서 마음에 담아 두기로 했었다.

“고마워, 알려 줘서.”

“전하…….”

한숨 섞인 부름에 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괜찮아. 전부, 괜찮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리 다짐하며. 그리고 그로부터 약 사흘이 지난 지금.

“오랜만입니다.”

나는 궁 어딘가에 있을 엠마에게 묻고 싶었다. 혹시 리시안 바누스가 썼다는 힘이, 푸른색이었느냐고.

푸른색. 마탑에서 언니가 썼던 힘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푸른 마나를 휘두르고 나타난 사람은 파란색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였다. 언니의 기억에서는 본 적이 없는.

“오랜만인데, 인사도 안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러나 저 묘하게 기계적인 말투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언니가 바누스가에 갔던 기억 속에서.

‘그 기억 속 남자보다는 덜 기계적이지만.’

그리고 저 푸르게 넘실거리는 마력과 ‘오랜만’이라는 인사말은……. 나는 누구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차갑게 말했다.

“인사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물론, 없죠. ……괜찮아요?”

곁에 서며 다니엘이 괜찮으냐고 작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살짝 웃어 준 뒤, 이쪽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왔지?”

“실은 놀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만.”

푸른 기운을 보란 듯이 더 강하게 뿜어내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냉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인형 같은 표정으로 대사를 읊었다.

“놀라기는커녕 영 쌀쌀맞으시군요.”

그래, 정말로 꼭 로봇이 대본을 읽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머리 위에서 싸늘한 물음이 던져졌다. 다니엘이 존대를 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글쎄요.”

남자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다니엘에게 답했다.

-주인.

그때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

-저것,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저 파란 불은…….

젠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마력이야.

마지막 말은 다니엘에게도 들리도록 말한 것 같았다.

-정령력도 아니고, 일반적인 마력도 아니고. 애초에 마력이 맞기는 한가.

다니엘이 얼굴을 굳혔다. 나는 그와 잠시 눈짓을 주고받다가 싸늘하게 남자에게 물었다.

“용건을 말해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남자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누가?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때 다니엘이 나직하게 웃었다.

“누구 맘대로.”

그는 불쾌해하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싸늘한 어조였다.

“제 주인의 명령입니다. 가시죠.”

묘하게 전하 소리를 붙이지 않는 것까지 기억 속에서 본 남자와 같았다.

‘바누스가에서 리샤 언니를 불렀다니. 왜 갑자기?’

생각해야 했다. 그간 극장에서도 그들을 방해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방해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불렀다는 건.

‘참았다가 터진 것?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니야.’

나는 기계적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감정적인 것을 조금도 모르는 느낌이다. 젠은 저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지켜보다가 터진 거야. 계기는 아마도.’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다.

‘에밀.’

2권이 이렇게까지 그들을 자극할 줄은 몰랐는데.

“찔린 거로군.”

중얼거리듯 뱉은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휘릭 돌았다.

* * *

북쪽 숲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누스령의 가장 큰 숲에는 특이하게도 딱 하나, 민가와 이어진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이곳의 영주, 바누스가의 본성이었다.

“……그래서.”

바누스 가문은 겉보기에는 늘 정적이 흐르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본성 심처는 더더욱.

“실패했다는 건가?”

그 얼어붙은 공간에 누군가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음 결정으로 가득한 공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오연하게 앉아 있는 자가 있었다.

단테 바누스. 그는 바누스의 수장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소식을 가져온 이를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푸른 기운이 잠시 맺혔다 사라졌다.

이윽고, 또 다른 누군가의 비명이 찢어지게 터져 나왔다.

“용서를! 용서를!”

몸을 뒤트는 남자는 단테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더 이상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비명은 곧 잦아들었다.

“잃기만 했어.”

이래서야…….

“꽃이 일찍 시들 것이 아닌가…….”

속삭이듯 느릿하게 혼잣말을 맺으며 단테가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금발이 언뜻 비치는 백금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매끈한 얼굴. 어둡고 칙칙한 회색 눈동자. 그의 눈빛은 어딘가 회칠한 무덤을 떠올리게 했다.

“황녀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 심어 둔 자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모든 일이 어그러진 상황에서도 그는 어느 정도 이상의 분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인형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황녀가 내게 덤빌 리가 없는데.”

황녀는 그에게 실험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도무지 황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황녀가 이 가문에 대한 것을 꽤 많이 알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황실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하지만 달라졌다면……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러나 며칠 후. 소식을 들고 온 이는 공포에 눌린 채로 단테에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리샤의 온갖 추측과 과장된 표현들로 점철된 ‘악역 가문’의 묘사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책은 그것을 가지고 온 자와 함께 재가 되었다.

* * *

세상에. 찔렸구나. 나는 샐샐 벌어지려는 입을 수습하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가지 않겠다면?”

“실패작을 처단하라고 하셨.”

“닥쳐.”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정색을 하고 일갈했다.

“……습니다.”

잠시 멈칫하고서 기묘한 표정으로 말을 맺은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남자의 두 손바닥을 합친 크기의 거울이었다.

다니엘과 함께 그를 경계하는데, 그 거울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금발에 잿빛 눈동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진 사내의 얼굴이었다.

-호오.

가만히 마주보고 있자, 거울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아직도 화가 나신 겁니까?

거울을 들고 있는 남자와 달리 기계적이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단번에 그의 정체를 추측해 냈다.

“단테 바누스.”

나직한 소리를 들었는지, 거울 속 사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처음 보는 것 같은 반응이군요?

일견 부드러워 보이는 말투와 달리 그는 무표정했다.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도 달고 다니고. 정령인가요?

다니엘을 곁눈질하는 모습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뒤로 뺄 듯이 손에 힘을 주었다. 다니엘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요. 좋습니다. 전하, 아무래도…….

그, 단테 바누스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나는 슬쩍 다니엘을 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결계. 다 무사. 그리고 한마디를 더 했다. 얼굴, 가림.

자기 얼굴을 가렸다는 건가? 그제야 완벽하게 마음을 놓은 내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단테 바누스가 말했다.

-전하가 제법 아끼던 그걸 죽여서, 그렇게 화가 난 건가요?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 거냔 말입니다.

제법 아끼던 것? 순간 강아지 리샤가 떠올랐지만 이내 부정했다. 강아지라면 곁에서 떼어 놓은 지 오래되었다. 뉘앙스가 뭔가 달랐다.

-그만하고, 예정이 바뀌었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바람꽃을 넘기세요.

그가 입꼬리를 기괴하게 비틀어 올리며 하는 말을 처음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차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단테는 지금, 죽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에 앞서 나는 깨달았다. 아, 그것이었구나.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희는 그것을 바랐구나. 여전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그것을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거다.”

-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울 속 단테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 주체를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리둥절해 보이기도 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세요, 전하. 근래 들어 황제가 전하를 지켜 주려고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설마 그걸 믿고 이러는 겁니까? 하, 지금 우리가…… 황실을 끝장낼 힘이 없어서 이러는 줄!

펑! 그러나 단테의 말이 이어지기 전 남자와 거울이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너는, 설마!

그러한 단말마를 끝으로 단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졌다.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며 다니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처소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네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정한, 그러나 분노 어려 있는 단호한 얼굴을. 그것은 아름다웠다. 아니, 사랑스러웠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그리고 살짝 뗀 뒤 답했다.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어진 내 말에 다니엘이 조금 가라앉은 낯을 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왜 그러는지 알아요. 황궁 안까지 저렇게 쉽게 들어오는 이들이니까 그러는 거죠?”

“잘 아네요.”

다니엘이 말했다.

“앞으로는 더 심할 거예요.”

그의 말대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지금은 아주 위험한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내가 위험한 것도 그렇지만…….’

내 주변도 이제 확실히 위험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떠나는 것이 답이 될까?

“지금은 안 돼요.”

단테가 지껄인 말 중 하나가 귀에 콕 박혔다. 그것은 귀중한 단서였다.

‘제법 아끼던 것. 죽어 버렸다는 그것.’

그것이 강아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몇 가지만 확인하고, 떠나겠어요.”

나는 실마리를 좇고 있는 중이니 하나도 허투루 지나갈 수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리샤.”

나를 물끄러미 보던 다니엘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다치면 안 돼요. 절대. 알죠?”

“그럼요.”

“……황녀궁 경계를, 새롭게 해 볼게요. 모조리 다.”

젠이 있으니까 사실 어지간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작중 가장 강한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그는 절대로 날 혼자 보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문득 단테가 한 말 중 또 걸리는 것이 떠올랐다. 그 황제가 나를, 아니 언니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리샤, 잠시만 젠과 있어 줄래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준비해 올 것이 있어요.”

“천천히 하세요, 단. 저는 그 동안.”

복잡한 마음으로 내가 말했다.

“폐하께 다녀올게요.”

“……그래요.”

다니엘은 빠르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홀연히 사라졌다.

저번 극장 사태 이후 처음으로 마법을 썼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마법.

바누스가의 남자가 다행히 누굴 죽이지는 않은 상태였다. 황녀궁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자 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으니 걱정 말고, 사람들이 오면 기다리라고 전해 주겠어?”

공교롭게도 전부 자리를 비웠던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들 놀랄 테니 말이다.

엠마와 록스를 포함한 노약자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나는 황제를 찾아갔다. 내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자마자 열리는 문을 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왔느냐.”

“폐하.”

나는 들어가 문이 닫히자마자 자리에도 앉지 않은 채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와 매우 다른 인상을 풍기는 황제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말해 보거라.”

“제게 잘해 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황제가 살짝 입을 벌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이제 와서.”

황제가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저는 떠날 겁니다.”

“……황, 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기한이 끝나 갑니다. 기한이 다 되면 나갈 겁니다.”

아무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멍하니 보고 있는 황제의 시선은 무거웠다.

나는 부연 설명을 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외로웠다고. 힘겨웠다고. 아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고. 그런 수많은 말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언니의 몫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지금 여기에 없지.’

언니가 여기 없다는 걸 저 사람이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저 사람이 미웠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원작의 인물’의 범위를 넘어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된 만큼. 이 현실이 내게 진정한 현실이 되어 간 만큼. 딱 그만큼 저 사람이 싫어졌다.

‘싫어하는 것조차 내 몫이 아니라고 여겨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야.’

그러나 그것도 마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를 보호하려는 행동을 한다고.’

단테가 협박으로 사용할 정도로 눈에 띄었단 말이지.

“그만둬 주세요.”

황제를 한참을 응시하다가 나는 한마디를 더했다.

“저를 위한다며 하시는 모든 것들을.”

어쩌면 그의 보호는 내 주위에 미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몇 가지만 해결하고 바로 궁을 떠날 것이다. 단서, 그리고 신관들과의 대화.

“황녀…….”

황제는 계속 나를 부르기만 했다. 부르다 입을 다물고, 그러다 또 입술을 떨며 뭔가 말할 것처럼 굴고. 그러다 그가 불렀다.

“……리, 샤.”

부르지 마세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솟았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저 못 들은 것처럼 멀뚱히 그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무의미해요.”

그에게 오라버니가 속해 있으니까 나는 그를 끊어 낸다. 이것은 황족인 오라버니를 향한 혹시 모를 위협을 예방하고자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황제는 순식간에 죽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설사 그 속에 든 마음이 무엇이든, 진심이라 해도 그것은 결국 언니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니, 무의미하지.

“받아들여 주실 거라고 믿어요.”

황제는 나를 잡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나는 피를 왕창 쏟았다.

“아…… 언니.”

벽에 기대어 서서 한탄하듯 언니를 불렀다. 그러나 언니를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잠시 서서 대강 피를 수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샤 님!”

유진이 하얗게 질린 채 한달음에 다가왔다.

“괜찮아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궁에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분하게 응수했다.

“다니엘에 대해서는 몰랐으니까요.”

꼭 다른 방향에서 안쪽을 면밀하게 살핀 것 같은 느낌. 헤레이스는 기절해 있었다는 마탑주 시온의 목덜미를 짤짤 흔들고 있었다.

“그 새끼들을 그냥! 야, 시온. 넌 뭐 없냐? 다 부수는 마법 같은 거 없냐고!”

“어, 억, 억, 없습!”

“쓸모없는 놈!”

저러다 사람 잡겠네. 나는 재빨리 다가가 헤레이스를 말린 뒤, 멀찍이서 이쪽을 보고 있는 다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주변을 보니 엠마와 록스, 리플리까지 와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불퉁한 얼굴로 살벌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던 헤레이스가 멈칫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저, 며칠 후에 떠나려고 해요.”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카인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내가 한 말에 대해 이해 자체를 못한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떠나서, 끝내려고요.”

강하고 불길한 적이니 더 빠르게 정리해야겠다. 이쪽을 더 파악할 시간을 주지 않고서. 게다가 바누스를 정리하는 것 말고도 나는 이해에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전하, 끝내신다니요?”

엠마가 떨며 물었다.

“말 그대로.”

이번에는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잘 마무리되면, 다들 무사하고 평화롭게 끝낼 수 있어요.”

그리고 망설이다가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음, 치료제도 짐작 가는 것이 생겨서.”

그새 뭘 했는지 피골이 상접해진 록스와 리플리가 눈을 크게 떴다.

“신이시여! 정말이십니까, 전하!”

“아아!”

“네, 그…… 그러니까 병도 해결하고 돌아올게요.”

그게 내가 아니라 언니일 가능성이 높지만. 게다가 돌아와서도 황궁 말고 다른 곳에 머물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돌아올 것이다. 적어도 저들 입장에서는, 지킨 약속이 되기를.

다니엘은 시종 나를 뚫어져라 볼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일부러 그쪽으로는 시선을 많이 주지 않았다. 그와는 함께 떠날 예정이니까. 궁금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후에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다 보는 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동그랗게 커진 사람들의 눈을 보며 일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혹시 정말 그렇게 된다면.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라고 속말을 건네며.

이튿날. 나는 젠과 함께 고요한 복도를 거닐었다. 엠마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어릴 적의 기억을 발판 삼아서.

끼이이. 오래된 문에서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여기가, 언니 방이구나.”

-언니라니?

“아니야. 아무것도.”

어릴 적에 언니가 썼다는 방.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구조에 나는 조금 감격했다. 킁, 실로 덕심을 자극하는 방이로군!

어쨌거나, 나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보여 주지 않은 것. 그것을 찾아야 한다.

“어?”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작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안에 사진을 넣을 수 있는. 나는 그걸 조심히 들어 뚜껑 부분을 밀어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

안에는 아주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어린 르페르샤 언니. 근데. 어째서.”

이상하게도 초상화는 절반이 잘려 있었다. 그리고.

“어, 잠깐. 이건…….”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아.”

-주인? 괜찮나!

“으. 응.”

멍하니 답하며 나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언니가 아니다.

‘언니는 이렇게 웃지 않아.’

아주 어릴 때부터의 언니를 보아 왔다. 그래. 언니는 이렇게 활짝 웃지 않는 아이였다.

‘똑같이 생겼어. 아니, 조금 다르지만 거의 비슷해. 하지만…….’

작은 사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초상화. 그 속에 있는 소녀는.

‘이 상처.’

나는 초상화 속 소녀의 이마를 건드려 보았다. 작은 그림인데도 보일 만큼 이마에는 눈에 띄는 상처가 나 있었다. 왜 처음 보았을 때 보지 못했나 싶을 만큼 또렷하게.

-주인?

젠의 부름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아, 응.”

-괜찮나? 그게 뭐기에.

밖으로 나와 있던 젠이 다가와 펜던트 안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꽤 고급 물건이군.

“응? 뭐가? ……이 펜던트?”

-그 그림도. 그림과 펜던트가 하나야. 그림을 끼워 넣은 뒤에 마법을 부여했다는 말이지.

“마법?”

젠이 날아올라 내 어깨에 사뿐히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온갖 보호 마법이 다 되어 있다. 정령이 들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공정령이 봉인되어 있는 물건은 정령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마도구라고 했었지. 그의 말에 펜던트를 조금 높이 들어 보았다.

“낡아 보이는데 그렇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려 나간 부분으로 자연히 시선이 갔다. 착각일까? 희미하게 누군가의 손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릴 때의 주인인가?

“글쎄.”

젠은 이 소녀의 상처가 보이지 않는 걸까? 결코 흉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상처인데 말이다.

-딱 봐도 주인인데.

“…….”

확신 어린 말에 뭐라 돌려줄 말이 없었다. 나는 상처 이야기를 하는 대신 펜던트의 뚜껑을 닫았다.

-가져가나?

“응.”

주머니에 그것만 넣고 나오는 길에 또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왜 이러지.’

관자놀이 부분을 두어 번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왔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리샤,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다니엘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웃으며 올려다보다가, 답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찾을 것도 있고.”

“그래요?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저와 다녀요.”

“알았어요, 단.”

나를 걱정하는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자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다니엘은 내 궁에 허가된 이들 외에는 그 어떤 마법적인 것도 침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방장 테오에게는 어떤 독이든 가려낼 수 있다는 도구를 쥐여 주었고, 젠은 좀 더 운신이 자유로워지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조치를 취했는데, 그 결과 황녀궁은 거의 요새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일기장.’

그건 이제 목걸이 안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있죠, 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뭐가요?”

“궁에 한 것들이나, 내 일기장에 한 것 말이에요.”

이런 게 가능했다면. 그럼 솔직히 말해서 원작의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봐야 했다. 내 물음에 그가 조금 의뭉스럽게 답했다.

“글쎄요, 리샤. 그저, 부족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부족하다뇨. 차고 넘치는 것 같은걸요.”

그가 말없이 웃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는 말해 주지 않을 건가.’

그 부분은 슬쩍 답을 피한다. 하긴, 쉽게 꺼낼 말이 아니었다. 그가 범상치 않은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사실 뻔하기도 하고.’

인공정령들이겠지. 그냥 원작과의 괴리감 때문에 물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시금 생각이 펜던트 쪽으로 뻗었다.

‘마법이 그렇게 걸려 있다니, 제대로 찾은 거겠지?’

언니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그러니까, 이 아이는 누구냐고 말이다.

‘아니지. 그건 조금 나중에.’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일단 이건 마탑주에게 맡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맹세를 하게 하고서.

“리샤?”

“음, 네?”

그렇게 멍하니 걷다 그를 돌아보니 그가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이마는 왜요? 혹시, 머리가 아파요?”

“이마, 아…….”

나도 모르게 초상화에서 보았던 상처 부위를 더듬고 있었던가 보다.

-주인, 오늘은 쉬는 게 어떤가?

그때 묵묵히 있던 젠이 내게 물었다. 다니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리샤. 오늘은 다른 건 하지 말고 쉬어요.”

그는 어쩐지 조금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신관들을 만나 봐야 하니까. 얼른 할 것을 마치고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 끝낼래요.”

“…….”

순간 다니엘이 멈칫했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답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나는 부러 더 씩씩하게 걸어 목적지로 향했다. 며칠간 황궁에 머무른다고 하는 그 신관들이 있는 곳으로.

* * *

옅은 백금발이 말갛게 빛나며 일렁였다. 다니엘은 기운을 차리고 밝은 걸음으로 앞서가는 리샤를 바라보았다. 뒷모습마저 눈에 띄게 마른 그녀는 점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불쾌한 생각이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꼭 금방이라도 그녀가 죽을 것 같은 표현이 아닌가.

“여긴가 봐요.”

신관들이 머무르는 곳에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의아할 만도 했다.

“귀하게 대접하실 줄 알았는데.”

순례를 다니고 있는 신관들은 존경받는다. 지위도 남다른 이들이었고, 그만큼 대우는 좋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머무는 숙소는 누가 봐도 낡은 궁이었다.

“그들이 청했다더군요.”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머무르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다니엘은 습관적인 미소를 그리며 그녀에게 답했다.

“이유가 뭐래요?”

돌아보는 그녀의 눈에 그가 담겼다. 다니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금 늦게 답했다.

“……에밀 때문인 것 같아요.”

“네에?”

동그래진 눈은 어딘가 천진했다. ……그늘이 없었다.

‘정말로, 병을 고칠 방법을 찾은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았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도 깨달았겠지.’

그는 가만히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보호하듯 섰다.

“에밀의 선행을 보고 각성을 했다고 하네요.”

마법 테러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아픔들을 보고 다녔어야 했다나.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에서 이런 처소를 달라고 했다고 해요.”

“어…… 그것 참 특이하네요.”

“특이하다라.”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안쪽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느낌의 남자는 다소 심술궂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범인들이 어찌 신께 속한 자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 전하이시니.”

다니엘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리샤를 바라보았다. 휘적휘적 다가오던 중년의 신관이 황녀를 유심히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녀 전하.”

신관은 다소 과장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건방진 눈길을 치우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리샤의 일을 망칠 것이다.

다니엘은 리샤를 돌아보았다. 무도회에서 보았던 모습이었다. 고고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황녀로서의 모습.

“누구시죠?”

“저는 파하스입니다. 보시다시피 신관입니다만.”

“그렇군요. 그런데 조금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파하스 신관님.”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순수한 의도를 특이하다고 폄하하시지 않았습니까?”

초면에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아까부터 걱정스럽던 리샤의 몸 상태를 신경 쓰면서 다니엘이 신관 쪽을 슬쩍 보았다.

그때 리샤가 말했다.

“폄하는 아니고, 의문스러웠을 뿐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저라면.”

신관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낡은 궁을 달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활동을 할 지원을 부탁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랍니다.”

다니엘이 슥 입꼬리를 올렸다. 다짜고짜 시험해대려고 하는 고약한 늙은이에게는 괜찮은 답이었으니까. 순간적으로 이채를 띠는 신관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니엘이 속으로 혀를 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 보지 않은 이의 치기 어린 생각이니, 별 의미는 없습니다.”

분위기를 살짝 느슨하게 하며 잇는 말에 신관이 움찔했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다라. 다니엘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리샤가 에밀인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끙. 그것 참, 옳은 말씀입니다.”

잠시 후, 신관이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요.”

가볍게 응수하며 리샤가 스스럼없이 웃었다. 그런 리샤를 물끄러미 보던 신관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군요. 보통 신관을 찾는 이들은 큰 문제가 있어 지혜를 구하러 오니까요. 영리하신 분이 굳이 여기에 오신 것은.”

어색하게 두르고 있던 퉁명스러운 기색을 벗어던진 신관은 어딘가 정갈하고 청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가 지나가듯이, 툭 말했다.

“역시, ‘그녀’의 죽음 때문입니까?”

그녀의 죽음? 다니엘은 리샤가 순간 숨을 들이켜는 것을 느꼈다.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신관이 한 것인지, 어느새 그들 주위에 방음막이 쳐져 있었다.

‘당사자 앞에서 그녀라고 하다니.’

순례 행렬의 신관들은 유독 성향이 이러했다. 나쁘지 않지만 조금 괴상하기도 했다.

“맞아요.”

리샤가 조그맣게 답했다.

“그 속에 든 것이 문제이시면, 별다른 것을 얻어 가지는 못하실 겁니다만. 답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데에 그만한 이들은 없었다. 다니엘이 눈에 이채를 띠며 그를 보았다.

‘리샤가 한사코 말하지 않고 혼자 품고 가려 하는 것.’

어쩌면 그것에 대한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므로.

‘나는.’

그녀는 기어코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고 있으니. 다니엘이 눈을 내리깔고 어제의 어딘가 이상했던 그녀를 떠올렸다.

‘당신을 그렇게 두지 않아요.’

이윽고 신관이 말을 이었다.

“예. 그저 순리라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신관의 눈이 심유하게 빛났다.

“그저 받아들이십시오.”

리샤는 꽤 오랫동안 답하지 못했다.

다니엘은 살며시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로 크게 상심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았, 어요.”

역시, 신관은 싫다. 참으로 눈치 없는 인간들이라.

“리샤, 돌아갈까요?”

“네.”

병을 고칠 단서. 아마도 그녀는 그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신관에게서는 기대하던 것을 얻지 못한 거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리샤의 얼굴은 참담했다. 채 숨기지 못한 잠깐의 얼굴을 다니엘은 놓치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럼요.”

그러나 역시나 그녀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녀는 알까? 괜찮다고 하는 그녀를, 떠나겠다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는 그녀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는 걸.’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미 그리 둘 생각이 없었지만, 그뿐 아니라 리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조급해서 병을 고칠 방도를 찾았다는 리샤의 말에 순간 혹했지만.’

그러나 돌아가면 아마도. 다니엘은 다른 이들이 어제 이후 한 명도 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진도, 카인도, 헤레이스도. 멀리 있던 이비엔 경은 어떻게 알았는지 다니엘에게 오늘 안에 궁으로 올 수 있는 방편을 알아봐 달라고 연락해 왔다.

‘지금쯤 도착했겠군.’

거의 온종일 리샤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고 있겠지. 다니엘은 돌아갔을 때의 궁 분위기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왜요?”

가만히 보는 다니엘에게 리샤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뒤 젠을 툭 건드렸다.

-……?

귀찮은 눈으로 그를 돌아본 젠에게 다니엘이 눈짓으로 리샤를 가리켰다. 젠이 리샤를 보았다가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보고는 수욱 하고 천처럼 펴졌다.

“어?”

놀라워하는 리샤에게 다니엘이 말했다.

“앉아서 가요, 리샤.”

신관들이 있는 곳까지는 꽤 거리가 되어서, 오고 가는 것이 벅찰 것이었다. 힘들 텐데 그런 티는 조금도 내지 않는다.

‘스스로의 상태에는 한결같이 무관심하니.’

다니엘은 씁쓸해지는 마음을 감추고 리샤를 젠의 위로 올려 주었다.

“세상에!”

리샤의 눈이 부드럽게 반짝였다. 그것이 예뻐서, 다니엘이 덩달아 입매를 휘었다.

“젠, 힘들지 않아?”

-문제없다.

“유연해지고, 단단해졌으니 걱정 마요, 리샤.”

젠이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허공을 가르며 낮게 날았다.

리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다며 젠을 쓰다듬는 그녀는 창백하고, 아름다웠다.

다니엘은 묵묵히 그 옆에 따라붙어서 궁에 함께 이르렀다. 가는 동안 리샤는 무언가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편안한 모습으로 폭탄을 터뜨리고는 했던지라 조금 불안했지만 괜찮다. 어떤 결론이든 그는 그녀와 함께일 테니.

“어, 다들 같이 있었어요?”

역시나 이비엔 경도 도착해 있었다. 주요 멤버가 응접실에 자연스럽게 다 모여 있으니 꽉 찬 느낌이었다.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바깥쪽으로 빠졌다.

“이비엔 경까지? 세상에.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전하.”

평소처럼 밝게 말하는 리샤를 향해 모두 애써 미소를 그렸다. 다니엘이 짐작한 그대로, 그들은 어제의 리샤를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잘 마무리되면, 다들 무사하고 평화롭게 끝낼 수 있어요.’

그 말을 곱씹을수록 싸한 불안감이 그들의 마음을 잠식했다.

‘지금까지 전하께서 그토록 단호하게 움직인 것은 전부…….’

스스로를 희생하며 사람을 구하실 때뿐이었음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는지.

“리샤 님,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여기가 아니라 방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이비엔과 엠마의 걱정 어린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황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한눈에 모두의 얼굴을 보기엔 여기가 더 좋은걸요. 엠마,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황녀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 창백해 보였다.

유진이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간 궁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돌아올 답이 두려워서.’

또 희생하실 생각이시냐고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정말로…… 병을 고칠 방도를 찾으신 것이 확실한지도.

‘아니, 어쩌면 고개를 끄덕일 것을 보는 게 두려워서, 일지도.’

유진은 사실 꽤 막말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매이는 바가 없는 편이어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지체하는 법이 없었다. 사실 그것은 정도가 다를 뿐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못했다.

‘우리에게서, 서서히 멀어지시려고, 이러시는 것은 아니냐고.’

그러면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정작 그녀는……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하려 하는 것은 아니냐고.

카인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너무 가능성이 있어서.’

가정이 아니라 사실 같아서.

“정말요? 그 영애들이 사업을?”

“네. 마르시엔 영애는 공연을 주관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으니,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요.”

“그것도 사업이죠. 잘하실 것 같아요.”

흐뭇하게 미소 짓는 황녀를 보며 다른 이들은 그녀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차를 마시고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단 랭턴 영애가 의외네요. 출판업이라니. ……근데 그거 혹시.”

“네. 에밀 님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매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전하.”

“으음, 이비엔 경이 괜찮다면 그런 거죠.”

이비엔 경이니 회포를 푸는 대화를 멀쩡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었다. 공통 주제가 있고, 그녀가 매우 냉철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하.”

“네?”

“전해 듣기로, 전하께서 며칠 후에 궁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보라색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옅게 휘어졌다.

“맞아요. 그랬죠.”

“궁 밖으로 가신다면, 상단을 이용하시는 것이 수월하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다들 숨을 죽였다. 자연스러운 제안인데도 어쩐지 불안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바로 연락할게요.”

……애매한 말이었다. 그래서 완곡한 거절로 들렸다.

“야, 저건 연락 안 한다는 말 아니야?”

“그렇지요.”

구석에서 헤레이스와 마탑주 시온이 수군거렸다. 카인이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이 함께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이들은 치솟는 불안감을 없애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병도 해결하고 돌아올게요.’

그 말을 할 때, 전하께선 드물게도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혹하여 희망을 품는 이들을 보며 그녀가 짓던 표정은.

‘이별을, 고하는 표정이었어.’

다니엘은 그때 리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었다. 그는 요동 없는 모습으로 리샤의 모든 움직임, 표정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 이상을 눈치챘고, 그래서…….

‘찰나간의 희망을 품을 수 없었지.’

그녀는 저 말을 한 뒤 한참을, 그들 전부를 눈에 담고서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라파엘리스를 고칠 방도. 그건 정말로 모든 병을 낫게 하는 트로얀의 열매를 찾는 것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영혼이 갈아엎어지거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낫는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니까. 다니엘은 그녀를 잃을 생각이 없었다.

그때 리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볼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요. 내일 떠나도 될 것 같기는 해요.”

망설이는 어조로 하는 말에 모두 굳어 버렸다.

“오라버니를 뵙고 가야 하니까 며칠 더 있다 갈 수도 있지만요. 우리 제인들도 한번 봐야 하고.”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닌지.”

결국 이비엔 경이 말리는 말을 했다.

“분명히 그 가문은 강하지만, 전하, 저희 쪽이 확실하게 이길 것입니다.”

“그렇겠죠.”

그리고 황녀는 잠시 뒤 말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예요. 시간이…….”

아. 시간을 언급한 순간, 이비엔은 말을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귀하고 아까워서요.”

아무 근심이 없는 것처럼 황녀가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경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있게 되어서.”

담소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황녀가 아픔을 참는 듯 멈칫하는 것이 세 번을 넘어가기 전에 그들은 흩어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이 닫히기 전, 그들은 리샤가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정말, 떠날 수 있겠어.”

체력이 달려서 내 사람들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펜던트도 신경이 쓰였고, 신관과의 대화 때문에 좀 시무룩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에 내 사람들을 마주하니 선명해졌다.

“……이제 정말, 떠날 수 있겠어.”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여러 가지를 생각하니까 우울해지고, 무력해지고, 어려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단순해지자!’

하나씩 끝내기로. 그래서 아주 확실하게 난장판을 만들고 오기로 결심했다.

“오오.”

바누스가에 깽판을 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힘이 솟았다.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였다.

“젠, 며칠 뒤에 나갈 건데 하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싶은 거라니?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보고 싶은 거라든가, 먹고 싶은…… 음, 먹을 수는 없구나. 그럼 다른 거라도 좋아.”

-……갑자기 왜?

“여행이잖아. 단이랑 셋이서 여행하기로 했던 거 기억해?”

-그랬지.

“여행도 하고 일도 끝내고.”

우리 같이 깽판도 치고!

“그러는 거지.”

젠이 수욱 나와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뭔가 한심해하는 것 같아서 변명하듯 말했다.

“전부 제대로 끝낼 거야. 걱정 마!”

물론 사전 조사를 먼저 확실히 끝내야 가능하겠지만.

-끝이라.

젠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손등에 독수리 부리를 가볍게 콕 박더니 말없이 사라졌다.

“…….”

기,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다니엘이 강하게 만들어 줬다고 들어서 어느 정도로 깽판을 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나는 어색하게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떠나는 것은 내 생각보다 더 미뤄졌다. 내 체력 회복이 더뎠고, 내 사람들도 말리지 못한 내 고집을 리니와 아린이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충 보낼 수는 없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걸 어떻게 이겨?

‘잘됐지, 뭐. 오라버니에게 사전조사를 부탁해서 난 편해졌으니까.’

탑주 시온을 열심히 써먹으라고 던져주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아침에 또 한바탕 피를 쏟았다.

“……다니엘.”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니엘을 불렀다. 여전히 의미 모를 구멍들만 남기고 점점 세세해지는 기억들은, 슬슬 시간대가 지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기억은.

‘로바인.’

그의 왕국 로바인. 이번 기억에서는 그곳이 나왔다.

“아…….”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언니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불타는 왕궁이 보였을 뿐.

“리샤.”

따스한 손길이 이마에 얹어졌다.

“괜찮아요?”

그의 눈동자는 흑갈색이다. 그것은 붉기도 했고, 무덤의 비석처럼 잿빛이 되기도 했다. 푸른 눈을 한 그는 본 적이 없었다.

“단.”

“네, 리샤.”

그런 그를 보았다. 불타는 왕궁. 그리고 도망치는 한 무리 속에서 푸른 눈을 일렁이며 로브를 깊게 눌러쓰던 남자. 분명히 그였다.

“……꿈에서 당신을 봤는데.”

멍하니 말하는데 상체가 살짝 들렸다. 그가 나를 조금 일으켜 앉히고서 물을 주었다. 적당히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가만히 보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말해요, 리샤.”

따스한 갈색 눈 위로 서글픈 푸른색이 덧씌워진다.

‘로바인 왕국을 멸망시킨 건.’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황가가 아니라…….’

바누스가의 마법사를 보았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바누스가였어. 하지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해?’

그것이 꿈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기억이다.

‘왜 언니가 나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게 언니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로바인 왕국의 멸망이 바누스가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언니가 알고 있었다는 것.

‘심지어 현장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이제야 기억을 찾았다는 말이 되게 우스울 것 같다. 의기소침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마음을 다졌다.

‘알려야지.’

말하기도 어렵지만 감추는 것은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바누스가였어요.”

“네?”

“기억이, 지금 나서……. 로바인 왕국이요.”

다니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가만히 나를 보다가 한 손으로 내가 덮고 있는 이불 위를 두어 번 도닥였다. 안심하라고 하는 것 같은 도닥거림에 나는 다시 입을 뗐다.

“……그 끝에, 바누스가가 연관되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은 황가가 한 것이 될 거라며 배를 잡고 웃던 불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거기가 배후였어요. 황가에 뒤집어씌운다고 했어요.”

“리샤.”

나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뜬금없고 근거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알지만, 달리 더 유연하게 말할 방도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떤 말을 들었는지 정확하게 말해 줄래요?”

그러나 놀랍게도 다니엘은 매우 유하게 물어 왔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나를 보는 부드러운 눈빛은 변함이 없어서 나는 조금은 안도했다.

“……아무도 모르겠지. 중앙 천막 안에 황제가 없다는 것을.”

“좋아요. 그리고요?”

“하나의 소생에는 하나의 희생이 따르는 법. 그리고, 순리를 따라, 영원해질 날을 위하여. 이러고 크게 웃었어요.”

“그거 참.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군요.”

그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단?”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듣던 말이에요.”

잠시 그는 먼 곳을 보는 눈을 했다. 그리고 나를 진지하게 마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리샤, 황제가 가담하지 않은 건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쟁 전이든, 후든, 무언가 정리가 되었으니 저런 사칭 행위가 묻힌 거겠죠. 그러니 연관은 되어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확실한 건 중심에 바누스가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외에도 내가 기억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가만히 듣던 그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국은 로바인 왕국을 노리고 있었어요. 불법적인 실험을 했기 때문이었죠. 마법 테러에 대해 강경한 국가이니, 정령이든 마법이든 인공적인 실험을 경계했거든요.”

그가 부드럽게 그러나 작고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바누스가가 연관되었다면 말이 달라지죠.”

“특별한 마력에 관심이 많았다던데, 그 때문인가요?”

“……맞아요.”

그는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오라버니에게 가기 전 우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바누스가의 만행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았다.

“가설이 하나 있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던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뭔데요?”

“푸른색은 예로부터 영혼을 상징하는 것 알아요?”

“몰랐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우리의 계약서 뒷면에 정리한 만행들을 손끝으로 톡톡 짚어 가기 시작했다.

“모두 얼핏 보면 특별한 마력을 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결과물이 푸른색 마나라면 이들의 관심은 마력이 아니라 영혼이었다는 말이 돼요.”

“아…….”

“그리고.”

라파엘리스. 라파엘리스에 걸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푸른 꽃이 핀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꽃이라고 했다. 덧없이 진 청춘의 한이 서린 꽃이라고.

“……바람꽃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요.”

다니엘은 아주 나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말하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살피다가 생각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언니가 그 병에 걸리게 하고는 실험체 대하듯 했다.

“바람꽃이…….”

그 꽃을 입에 올린 것만으로도 어쩐지 울컥했다. 나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마력과 관계가 있는가 봐요.”

“…….”

다니엘은 그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온화해서, 마주할수록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사소하지만 감정적으로 무언가 깨달아지는 순간이.

그와 마주한 것만으로 괜찮아진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네 하고. 마치 지나가는 생각인 것처럼.

나는 작게 미소를 그렸다. 그제야 그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영혼과, 아니, 어쩌면 ‘영생’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잠깐. 영생이요?”

“리샤, 그는 이미 꽤 오래 살았을 거예요.”

나는 당혹스러워 그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오빠라고 알고 있는데요?”

“아니에요.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지만, 그의 나이는 그보다는 많거든요.”

그가 기억하기로는 그렇다고 했다. 그도 혼혈 정령으로서 수명이 긴 편이니 정확한 기억일 것이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저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잠시 후 느긋하게 미소를 그리며 내게 말했다.

“늙은이가 욕심이 과하네요.”

아주 가소롭다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조금 황당하게 그를 보다가 생각했다. 그런 괴물이라면 뭔가 아주 크고 강한 한 방을 먹여야겠구나, 하고.

“마력, 바람꽃, 영혼…… 영생. 단, 이 사이를 연결하는 뭔가가 있겠죠?”

그걸 부수면 되겠네? 기억으로 보니 과학자 실험실 같은 느낌도 있던데. 실험실 같은 곳을 모조리 다 꽈과광……!

“그렇겠죠. 그런데 리샤.”

그때 단이 날 불렀다.

“네?”

“떠나는 거, 확정이에요?”

별다를 것 없는 어조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젠이랑 단이랑 셋이 여행도 하고요.”

물론 좀 급한 여행길이 되겠지만 말이다. 돌아올 때 ‘내’가 남아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래요, 우리 여행 약속을 했었죠. 그러면요…….”

다니엘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약속했던 것들 다 지키면, 떠나려는 거예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떠난다의 어조가 미묘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흐르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여행 약속 지키고 나서라면, 돌아오기로 약속했는걸요. 그 약속도 지킨다면,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게 되는 거죠. 안 그래요?”

음. 지금은 바누스가 폭파 말고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니 눈앞의 일을 생각해요, 우리.”

그는 변함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묘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럴까요.”

분명히 온화한데 짐승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종이 위를 톡 쳤다. 많던 글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눈앞의 일은 구체적으로 뭐죠?”

“조금 넓게는 바누스가를 테러하는 거고요.”

“……네?”

그가 멈칫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리샤가, 테러를.”

“……그게 웃겨요?”

“헤레이스가 들었다면, 사흘을 내리 웃었을 거예요.”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잠시 후, 그가 웃음기 남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좁게는요? 당장 할 일은?”

“지금 당장은 오라버니에게 가는 거죠. 다들 기다릴 거예요. 늦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가 빙긋 웃으며 내 옆에 섰다. 실은 오라버니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었다.

‘황궁에서 있었던 리시안 바누스와 관련된 것들.’

그리고 밖에 남아 있는 리시안 바누스의 행적들을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바누스가에 들키지 않는 범위에서 말이지.’

천문학적인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내 재력으로 받쳐 줄 테니 안 들키게 움직여 달라고.

‘시온을 활용하라고 해서 그런가? 냉큼 수락했었지.’

그리고 사흘쯤 지났나. 갑자기 오늘 우리 사람들까지 모아서 함께 보자고 했다. 할 말이 있다고. 머릿속으로 어떻게 바누스가를 테러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모두가 모인 곳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거기엔 내 사람들과 수시로 호기심에 목숨을 거는 마탑주 시온, 그리고 오라버니가 있었다.

“늦었네요. 죄송해요.”

“괜찮으니 어서 와, 누이.”

오라버니가 희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부탁했던 것, 끝냈으니까.”

이윽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니, 회의가 아니라 오라버니 혼자 말하고 진행하는 발표회 같았다.

왜냐하면.

“……따라서 지금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선대 황후인 리시안 바누스는 황녀를 꾸준히 외가에 보냈다는 결론이 나오지.”

다들 내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 누이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뱀처럼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문득 이게 내가 공교로운 오해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바누스의 만행을 다 알고도 묵인했다거나 하는?

“……거기서 있었던 일을 물으신다면.”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진 없.”

우리 언니에게 그런 불명예를 남길 수는 없지! 나는 최선을 다해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실험실에 갔었어요.”

“는…… 뭐?”

오라버니의 눈이 희번득해졌다. 아이고, 살기를 뿜을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언니가 동조자가 아닌 피해자였다는 것을 말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 불의 마법사도 거기서 본 것이었고요.”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단어로 말해야지.

“뭘 하는 곳이었지?”

“여러 가지를요.”

그들의 실험으로 탄생한 것 같은 이들의 기계적인 음성이 떠올랐다. 거북함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들이에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뚫어지겠네, 으아.

“거기엔 사람 같지 않은 이들이 많아요. 사실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제가 지금 기억이 온전한 상황은 아니라서…….”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 도망을 쳤지만, 어…….”

잘 잇던 말을 멈춘 것은, 순전히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언니가 이상한 검은 인간에게 쫓기는 기억을 보았을 때.

‘그때 분명, 기억들이 부분부분 비어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 그 빈 부분들이 어쩌면.’

펜던트로 이어지는 생각의 가지가 뻗으려던 찰나.

“리샤?”

다니엘이 나를 불렀다. 정신이 들고 그를 보자 그가 굳은 얼굴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를 보며 가지각색의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이비엔 경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유진은 충격 받은 얼굴로 눈에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카인은 나를 뚫어져라 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화라도 난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아니, 고요하다기보다는 베일 듯이 차갑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말없이 내 눈가에 손을 댔다.

“……어?”

맹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지, 싶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울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언니의 몸이!

“아.”

아, 언니. ……언니? 마음속으로 불러 보았지만 당장 만날 수 없을 것은 자명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이상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니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리고 나를 보며 꼭 어린아이처럼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 이거는, 어…… 아니에요. 이게,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말을, 말걸! 설명할수록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그냥 손을 들었다.

‘상황이 꼭 무슨 심한 일을 당해서 트라우마 자극이 된 것 같네…….’

그냥 기억 문제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이 중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다니엘뿐인 것 같았다.

“어?”

그러다가 다니엘이 조금 전까지 짚고 있었던 탁자의 모서리에 시선이 닿았다. 조개껍질 모양으로 커다란 홈이 패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깨끗하게 녹아 버린 모양이었다.

“…….”

철 아닌가, 이 탁자? 나는 다니엘 쪽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황궁에 있을 때는요.”

화제를 돌리자. 무난하게 연결되면서 좋은 화제는 황궁 생활이었다.

“…….”

근데 잘못한 것 같다. 새삼 경악스러웠다. 우리 언니 인생에 볕이 든 적은 정말이지 그 강아지 리샤를 만났을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서.

“됐어. 말하지 마.”

혼자 심각해져 있는데 오라버니가 어딘가 한숨 어린 말투로 말했다.

“……충분히 알았으니.”

어디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멀뚱히 황태자 쪽을 보았다가 불길이 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쳐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유진과, 다음으로는 카인과, 다음으로는 이비엔 경, 그다음으로는 헤레이스까지.

‘좀, 과한데!’

폭력을 겪었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아까 말한 것도 우리 언니가 직접 겪은 거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본 것을 말한 것뿐인데. 내가 이만큼 사랑받나 보다 하려다가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니엘의 온화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던 그대로 고개를 돌려 오라버니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수상한 행적은 전부 파악됐네요. 큰 도움이 됐어요, 오라버니.”

“……그래?”

살벌한 눈길이 무섭지 않았다. 왜 다니엘이 웃는 것에 더 식겁한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네, 약점 위치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제 그쪽에 정령왕의 마법들을 때려 박아 줘야지. 다니엘 쪽 탁자의 모양이 그새 또 달라져 있는 것을 외면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오라버니는 잠시 후 손을 흔들었다.

“가 봐. 자료는 저 인간이 가지고 가면 될 테고.”

“네. 그럼.”

혹시라도 지금 무슨 오해를 했다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더더욱 바누스가를 경계할 것 아닌가 해서. 어쨌거나 정말로 다 끝났다. 그러니.

“단.”

다니엘과 돌아 나오는 길.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일, 떠나기로 해요.”

“……그래요. 테러, 해야죠.”

온화하기보다는 눈이 쨍할 만큼 화려하게 미소 지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태자 라빌로프가 리샤의 일로 뭉치는 멤버들을 모으고 그 말을 꺼낸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리샤가 기억하는 것 중 조금이면 되었다. 그게 리시안 바누스의 행적을 드러내 줄 단서일 테니까.

짐작이라도 한 듯 누이가 말했다.

“실험실에 갔었어요.”

그런데 짐작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실험실이라니.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들이에요.”

이 세상에서 마법 테러가 저주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반인륜적인 행태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실험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 때문에. 그런데 그런 자리에, 어린 황녀가 갔었단다.

‘무슨 일을 겪었느냐고, 굳이 물어야 알까.’

기억까지 온전치 못한 상태인 황녀. 아니. ……죽어 가는 황녀.

라빌로프가 이를 악물었다.

“거기엔 사람 같지 않은 이들이 많아요. 사실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제가 지금 기억이 온전한 상황은 아니라서…….”

더듬더듬 말을 잇는 누이에게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러니까, 어떤 생각까지 했냐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똑똑히 들어 두어서 훗날. ……그래. 훗날. 그녀가 못 갚는다면 대신 그 원수를 갚아 주려고 했었다.

“그러다 도망을 쳤지만, 어…….”

그러나 그러다가 누이가. 그 아이가 울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누이는 그 다니엘과 함께 방을 나갔고, 그 뒤는. 그저 솟는 감정이, 분노가 너무 커서 오히려 침묵만이 흘렀다.

버텼구나. 그 억겁 같았을 시간을. 얼마나 울었을까.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게다가 지금까지도, 바누스 가에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바누스. 감히.’

그리고 그토록 고통받은 이 사람을.

‘……기어코, 잃어야 하나.’

그 날, 그들은 한참 만에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떠난다는 그녀의 말에 전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피워 올렸다.

리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도, 향하지도 않을. 잘 벼려진 미소를.

떠나는 날이 확정되었다.

“리샤 님,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넣어야겠지요?”

“중간에 아프시면 어쩌지요? 사실 비상용으로 시온 님이 연락 구슬 챙겨주셨는데 이게 일회용이래요. 몇 개 넣으면 좋을까요?”

리니와 아린, 그리고 다른 시녀들이 잔뜩 수심 어린 표정으로 종알거렸다. 나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 다니엘도 있는걸.”

지금 넣으려는 것들의 대부분을 빼라고 하는 동시에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이었다. 멈칫하던 그들이 울상이 되었다.

“전하, 이렇게 급하게…….”

아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리니도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저 흐뭇해서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나 대신 우리 언니가 돌아오더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어제 남몰래 나를 찾아왔던 신관을 떠올렸다.

‘파하스라고 했었지? 대신관이었을 줄이야.’

처음 만났을 때 속을 읽혀 신기하긴 했었지. 늦은 시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온 중년의 신관은 내게 독대를 청했다.

‘여긴 경비가 삼엄하군요.’

그는 다니엘이 감시하고 있는 방향을 한 차례 의미심장하게 본 뒤 내게 말했다.

‘혹시나 싶어 말하려고 왔습니다.’

‘무엇을요?’

‘그 영혼에게 희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요.’

그가 가리키는 것은 우리 언니였다.

‘여러 번 순리를 거스른 영혼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겁니다.’

순리를 거슬렀다, 라.

‘그것도 여러 번.’

대체 무슨 말일까? ……혹시, 나를 이 몸에 데려온 것과 관련이 있을까?

‘설사 그릇을 찾는다고 해도, 그녀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는 그릇을 언급했다. 나는 찔끔했다. 여행 가는 길에 뭔가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저런 말을 하지?

‘뭐, 그래도 굳이 뭔가를 하시겠다면, 하나는 명심하셔야 합니다.’

신관이 알 만하다는 듯 말했다.

‘명심할 점, 말해 주세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치룰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또한.’

그의 심유한 눈동자에 일순 묘한 빛이 돌았다.

‘당신 또한,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 또한 마지막이라니.

‘난 어차피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말할까? 내 속의 언니의 영혼은 느끼면서, 내가 한 번 죽었던 영혼이라는 건 모르는 걸까?

‘그렇군요.’

다만 의문스러움보다도 나는 희망을 느꼈다.

‘명심할게요. 고마워요.’

바꿔 말하면, 대가를 치른다면 내가 하려는 일로 언니에게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는 길에 언니를 위해 하려는 것은 하나였다.

‘아리엘이 원작의 외전에서 찾아다녔던 여러 물건들.’

신기한 힘이 있었던 그것들. 작중 최약체인 아리엘에게 외전에서 주어졌던 것들 말이다.

‘분명히 그것들 다 모은 이유가…… 7개를 다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 때문이었지?’

여의주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뜬금없는 이유로 외전이 진행되었었다.

‘소원.’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게 무엇이든 나는 언니의 그릇을 소원으로 빌 것이다. 뭐, 원작 덕에 모으는 건 금방일 테고. 그때 리니가 나를 불렀다.

“……전하?”

“아.”

고맙다고 해 놓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냥, 다들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뜻이야.”

진지한 어조로, 그러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너희도 전해 들었을 것 아니니. 병도 고치고 돌아올 거야.”

게다가 단도 있으니.

“내 첫 여행은 성공적일 거야.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까.”

생긋 웃으며 말하자 그들도 천천히, 조금은 밝게 마주 웃어 주었다. 착하기도 하지.

“참, 그리고 다 잠깐 모여 볼래?”

나는 손뼉을 치며 내 방 안에 있던 이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이건…….”

“선물!”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다들 웃으며 받으면서도 표정이 조금 이상했지만 좋아하는 모습에 안심했다.

그날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괜히 감상적이 되어서 코끝이 찡하기도 했지만 나는 금세 툭 털어 버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다녔다.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기도 했다. 어제 기억을 찾았는데 최대한 쉬고 있어서 그런지 후유증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생각보다 다들 편안하게 내가 떠나는 걸 받아들여 주었다.

‘황제도 그렇고.’

나한테 잘해 주지 말라고 선을 그은 후 처음 만난 황제는, 단과 함께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는 말에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두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

먼저 리시안 바누스. 리시안 바누스가 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악녀라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만 전했다.’

자다가 죽었다고. 평온한 죽음이었다고, 전달만 받았단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어머니 는.’

후궁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국가에 속한 마법사로서의 한계와 태생적인 신분의 한계로 별로 돋보이지 못했다는 여인. 그녀는 비참하게 죽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오라버니도 이건 모른다.

‘그녀를 죽인 것은 바누스가였다.’

그리 말하던 황제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그저 알았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당일. 묘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는 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힘차게 출발했다. 바누스가를 때려 부수기 위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 * *

황녀가 궁을 떠났다. 궁이 텅 빈 것 같았다. 궁인들은 특히나 그 빈자리를 느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네.”

얼마간 뒷모습이 보이다가 단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 황녀의 잔영을 좇으며 시종 하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

황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궁인들 입가에 있던 미소가 점점 흐려졌다.

리니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리니를 달래는 아린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

“각자 자리로 가세요. 전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조금의 차이도 느끼지 않으실 수 있도록.”

엠마가 그렇게 말하며 궁인들을 흩었다. 그러면서도 씁쓸함을 못내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궁인들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리샤와 늘 함께 있던 이들을 돌아보았다. 아이릭 공작과 볼턴 경. 헤레이스와 제인 남매. 이비엔 경과 황태자까지.

소름끼치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샤 님을 배웅하던 그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보며 서늘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도 잠시, 하나둘 그들이 사라졌다.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이.

“…….”

엠마는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마도 저들은 리샤 님을 정말로 떠나보낼 생각은 없는 거겠지.’

리샤님은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그녀가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정말로 병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봐야 어쩔 수 없는 것. 엠마는 조금은 서둘러 움직였다. 할 일이 많았다.

“이 궁에 주인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돌아오신 리샤 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그러니 정말로, 다시 뵐 수 있기를.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리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지도를 보고 있는데 다니엘이 물었다.

“음? 뭔데요?”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요.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해서.”

여상스러운 어조였지만 어딘가 날카로웠다. 단의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하며 내가 슬쩍 눈을 피했다.

“사실 그 테러라는 말도.”

말을 잇지 않는 그를 내가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서 답했다.

“나답지 않다는 말이죠?”

“음. 맞아요. 조금 그런 느낌이네요.”

그가 느릿한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당신은 늘 그랬지만, 리샤. 혹시 지금 무리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

나는 순간 하려던 말도 잊고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있죠,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요.”

“네? 네.”

“그 사람은 바누스가 때문에, 악인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죽었어요.”

악녀. 그 사람은 그 선택지 말고는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 못한 것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악녀로 죽기를 선택한 언니. 나는 언니가 그들에게 복수하고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만든 악녀의 허울을 쓰고서 그들을 부숴야지. 그리고 행복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러니까, 악녀로서 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네.”

그들이 멋대로 만든 그 굴레. 언니가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그저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 굴레로.

“악녀로서, 그들을 부술 거예요.”

그리고 우리 언니는 그 굴레를 벗어던질 것이다.

‘진짜 악인은 그들인 것이 드러날 테니까.’

그것까지가 내 복수였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지만,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을 없애고 싶어요.”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다니엘은 악녀라, 하고 몇 번을 되뇌었다.

“그 사람이 많이 소중한가 봐요.”

“네.”

절로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묘한 표정을 했다. 그것은 안심한 듯도 하고,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결국 그는 별다른 말없이 수긍했다. 나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 딱 이 정도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염색해 준 검은 머리를 애매한 기분으로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현재 수도 외곽의 민가에 들어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푹 잔 뒤, 또 피를 토하고서 언니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여행을 한다고 했죠? 가고 싶은 곳은 있어요, 리샤?”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많아요. 그리고 꼭 찾아야 할 것들도 있고요.”

나는 조금 전의 이상한 분위기를 털어 내며 답했다.

“찾아야 할 것들?”

“아, 약은 아니고요.”

병이 고쳐지는 것은 나중에 적당하게 혼자 행동하면서 해결하면 되고! 지금은…….

“그럼요?”

무려 여주인공에게 주어졌던 버프들을 싹쓸이할 때였다. 다 모은 뒤의 소원이 목표이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들이 있으면 바누스가를 때려 부수는 것이 한결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누스가가 영생을 목표로 연구를 한다고 했지.’

그래서 이능을 가진 이들을 사냥했었다고.

‘로바인 왕국을 멸망시킨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능이 위협이 되거나, 적어도 방해는 된다는 말이잖아?’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아리엘에게 준 힘은…… 전설에나 나오는 힘들이니까.’

다만 그것들을 찾을 단서들은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단서들이었다. 그걸로 힘을 찾아낸 원작의 오라버니와 아리엘이 신기할 지경이다.

‘여주 남주 버프인가.’

덕분에 난 편해졌지만.

‘후다닥 다 가져 버려야지.’

다니엘과 젠은 든든하지만 동시에 내 소중한 이들이니까 나 스스로가 강해지는 게 필요했다.

‘그것들이 있으면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겠지?’

그 뭣 같은 실험실이 흔적도 남지 않도록 부숴버려야지! 히히.

-……주인, 혹시 피곤한가?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나를 보고 젠이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아냐. 얼른 먹고 출발해야지.”

“천천히 먹어요.”

그렇게 우리는 사기템을 얻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이 단서로, 여길 찾아내요?”

네 번째 사기템인 불의 검을 쥐고서 내가 멍하니 물었다.

“신기해요.”

“음…… 전 그 단서를 알고 있는 리샤가 더 신기한걸요.”

다니엘이 어딘가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제가 없었어도 리샤는 찾아냈을 거예요. 그렇죠?”

하여간 눈치가 빠르다. 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래도 단 멋져요.”

나는 그냥 원작의 기억나는 것들을 말해 줬을 뿐인데, 아니,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가만히 듣던 다니엘이 답을 찾아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한 개씩 사기템을 찾아내는 중이었다.

“2주 정도는 잡아야 할 줄 알았는데.”

“더 있는 거죠? 몇 개예요?”

“다 해서 일곱 개이기는 한데…….”

심지어 그는 이 사기템들을 얻을 때 마주하는 장애물들도 쓱싹 지워 버리다시피 했다. 슝슝 날아다니니 거리도 장애가 되지 않고, 이젠 정령으로서의 힘을 자제할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여담이지만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는 힘을 쓸 때도 눈 색이 변한다. 그리고 흑갈색으로 눈 색을 위장하지 않는 그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그가 내 호위 기사가 되기 전처럼.

“검 무겁지 않아요, 리샤?”

여전히 부드럽지만. 이 사람은 아주 강하고 범상치 않은 사람이구나 하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괜찮아요. 그건 괜찮은데.”

살짝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사기템들, 어쩌면 별로 의미 없는 거 아닐까?’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이 사람 더 사기적인 거 아냐?

“쉬었다가 가죠.”

지금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건 오로지 하나. 내 몸 상태뿐이었다.

“…….”

“왜요?”

“아뇨. 그냥.”

내가 너무 약해서?

……아니, 아니다. 이건 언니 몸인걸! 곧 나을 몸이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나흘 만에 모은 4개의 사기템들을 눈에 담았다. 물의 귀걸이, 불의 검, 땅의 주머니, 바람의 피리.

“다 봉인구네요.”

“네?”

지켜보던 다니엘이 말했다. 그런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내가 의아하게 묻자, 답은 젠에게서 나왔다.

-역시…… 주인,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엥?”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 보려던 차에 이상한 말이 들렸다.

정령이라니.

“이 정도로 기운이 흐릿하면, 정령만 느낄 수 있어요.”

-너무 흐릿해서 긴가민가했지만.

“모아 놓으니 바로 알겠네요.”

-점점 기운이 살아나고 있군. 내 영향인가?

둘의 대화를 멍하니 듣다가 나는 뒤늦게 말했다.

“정령이 봉인되어 있다고요?”

아리엘에게 주어졌던 여주 버프 아이템들이 정령이라고? 다 모으면 소원 들어주는 여의주가 아니라……?

“……그럼 소원은.”

“소원이요?”

-그게 무슨.

망연하게 중얼거리자 둘이 동시에 반응했다. 방금 ‘그게 무슨.’이라고 했어, 젠이. 어, 맙소사. 안 되는데!

“리샤, 소원이라뇨?”

나는 그를 멍하니 보다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다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잠깐 좀.”

결국 나는 혼자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서서 최대한 조용하게 한숨을 쉬었다.

“…….”

혼자가 되어서야 막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신관에게 희망이 없다고 부정당했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손끝이 떨렸다.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목이 가장 아팠다.

“아냐. 의미 없지 않을 거야.”

아니. 눈가가 가장 아렸다.

“……괜찮아. 아직은.”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가능하면 언니를 소리 내어 부르지 않도록.

* * *

“…….”

-…….

리샤가 그렇게 나간 뒤, 남은 이들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다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샤가 나가며 닫힌 문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도, 젠도 보았다. 무너져 내리던 그녀의 눈빛을.

-소원이라니. 무슨 말이었지?

젠이 당혹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설마 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답 없이 그녀가 있을 방향만 바라보았다. 문에 기대어, 떨리는 한숨을 쉬는 기척을. 소리 내지 않으려 하는 긴장감과 그럼에도 감춰지지 않는 한숨 사이의 흐느낌을.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저도 모르게 꾹 쥔 주먹이 그의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봐.

조금 후, 문 밖에서 머뭇거리던 리샤가 끝내 들어오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그녀를 시야에서 놓칠 둘이 아니었다. 그녀가 듣지 못하는 상황이 오자, 젠이 곧바로 단을 불렀다. 그리고 답이 없는 그에게 말했다.

-연락은 왔나?

한참 만에 다니엘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고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무수한 영상구슬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구슬 속에 담긴 소식들이.

‘아카데미 쪽 바누스가의 끄나풀도 확보했습니다.’

‘폭탄도 찾았어. 이야, 수도 전역에 깔려 있던데? 심문하는 보람이 있었어.’

‘에밀이 르페르샤 황녀 전하라는 소문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경로 안전 확인 끝났습니다.’

‘경로 안전 확인 끝났습니다.’

쌓인 알림들이 가득 쏟아졌다. 다니엘의 수하들이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은 주로 리샤의 사람들이 맡았다.

지금 바누스가는 사방에서 공격받는 상황이었다. 황가뿐 아니라 제국 내에 바누스가와 연관되지 않은 모든 세력들이 바누스가를 향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조용하게. 리샤는 모르게.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무사히 가질 수 있도록. 차근히 진행 중이었다.

‘그녀의 병에 대해서도.’

다니엘이 전적으로 맡은 것은 그 부분이었다. 라파엘리스의 치료.

‘볼턴 경과 아이릭 공작의 마력이 단서가 되어주었지.’

이제 남은 희망은 그뿐이었다. 인공정령들만큼 마력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거기다 마탑주도 손을 보태고 있다.

그 결과.

‘트로얀의 열매.’

놀랍게도 그것의 실마리를 잡은 상태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줄 생각으로 참았으면서, 결국 함께 있어 줘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찾았다던, 병을 고칠 방도가…… 전설을 믿는 것이었나.’

귀신같이 전설 속 물건들의 단서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 홀로 심도 있게 조사한 것 같았다.

‘아니, 전설을 조사한 것이 아니겠지.’

병에 대해 조사하면서 다른 방향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 전설 쪽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망을 보았겠지.’

겨우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녀의 상황이 절망적이라서.

‘전설의 물건들을 다 모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줄 만한 그 전설에 매달린 거야.’

다니엘은 슬픔을 넘어서 비참하기까지 했다. 화가 났다.

‘리샤. 당신은.’

그녀가 강해서 꿋꿋하게 견뎌 낸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말로, 정말로 완벽하게. 견디는 것 말고는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차이는 컸다.

“…….”

그는 그녀가 그렇게 도망치듯 자리를 뜨게 만든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리샤를 발견했다.

“단?”

눈가가 옅게 붉어진 채로 그녀는 또 선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났다.

“아! 마침 잘 왔어요. 저 생각한 게 있는데…… 단?”

그는 그대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아! 피 쏟은 거 들켰나 봐!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은데.’

사실 방금 해결이 조금 되었으니까 말이다. 실은 어디까지 생각했냐면, 영혼을 없애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가 영혼인 건 확실하니까.’

내가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이 몸에 자리 잡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그때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한바탕 혼자 피를 쏟고, 서둘러 정리를 했다. 그리고 웃었다.

“바누스가.”

그 미친 인간들이!

“이능을 사냥한 이유가, 있었구나.”

요즘에는 무작위로 채워지는 언니의 기억들. 그중 오늘 치 기억은 그것이었다. 이능은 마법과 신성력 외의 모든 특별한 힘을 말한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이능은 전부 정령의 힘이었다.

‘자연의 힘.’

그리고 그들은 언니에게 이능이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조치를 취했다.

‘리시안 바누스도 어쩌면…… 희생된 것일지도.’

이젠 리시안 바누스에 대한 소문까지도 의심스러웠다.

“근데…… 이것들, 대놓고 ‘실험체’가 되라고 압박까지 했네?”

어린 언니에게 그들이 요구한 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다. 언니는 자신이 라파엘리스에 걸릴 것을 수락했다.

“압박당해서 말이지. 뭔가 약점을 잡혔던 것 같은데. 그걸 모르겠네.”

창백하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협박의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뭐 하는 인간들이지, 대체?”

아니, 뭘 원하는지는 알지만 문제는 그 목적인 영생을 위해 무슨 짓들을, 얼마나 해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로바인 왕국을 멸망시킨 것까지 포함해서, 어쩐지 파도, 파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니가 당한 것도 지금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것 같아.’

나는 발견한 이후로 늘 걸고 다니는 펜던트를 나도 모르게 꼬옥 쥐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막힌 기억에 희망이 있었다.

“다행이다. ……반쯤은 사실이어서.”

지금 찾고 있는 보물들을 다 모으면 소원은 몰라도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봉인되어 있다고 했지? ……정령을 깨워야 해.”

젠처럼 만들어야 한다. 신관은 언니의 영혼이 순리를 너무 거슬렀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순리를 따르게 하면 되잖아.’

오늘 기억 속에서, 나는 언니에 대한 그들의 기록을 봤다. 그 기록지에는 언니가 정령의 힘을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진짜 정령은 본능적으로 순리를 거스른 것들을 정화시킨다.”

없애는 게 아니라 정화시킨다고.

“그래서, 대신관이 그런 희망을 준 거였구나.”

언니는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지불되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이든.’

그때였다. 다니엘이 날 따라 나온 것은. 나는 다니엘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내가 소원을 빌려고 했다는 것을 들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어린애 같아 보였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기분은 나아졌기에 웃으며 그를 불렀는데.

“……단? 왜 그래요.”

그의 품에서 나오려고 하는 척 꼼지락거렸지만 사실 그냥 있고 싶었다. 그에게 폭 안겨 있는 것이 그냥 너무 좋았다. 품에서 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태양을 닮은 것 같기도 한, 그런 향이.

“……괜찮을 거예요, 리샤.”

“네?”

품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켜다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를 보고 싶었지만 안은 힘이 세서 그럴 수가 없었다.

“뭐가요?”

부드럽게 묻자 그가 잠시 침묵했다.

“……무엇이든. 전부 다.”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답했다.

“자, 그럼 보물찾기를 계속해 보죠.”

“계속이요?”

“네.”

그에게 훌쩍 안겨 돌아가자 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주었다. 투명한 구슬들을 삼키면서. 뭐냐고 물어도 장난감이라고만 하더라.

-몇 개 더 할 생각인가, 주인?

“이제 세 개 더 남았어.”

“오늘은 쉬고, 내일 시작해요.”

“그럴게요.”

피토 토했겠다, 그럴 생각이었다.

“아, 그 전에, 여기 이 정령들 봉인 다 풀어도 될까요?”

봉인을 안 풀어도 정화하는 힘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풀어야 한다면 안전해야 했다.

“풀고 싶어요?”

“가능하다면요.”

“그럼 풀죠.”

다니엘이 너무나 편안하게 답했다. 젠도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았다. 이윽고 다니엘과 젠의 도움으로 나는 네 사기템의 정령들을 다 풀어 줄 수 있었다.

“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푸른 불꽃이 훅 타오르고, 투명하고 검은 물이 용처럼 사위를 감쌌다. 불과 물로 어두워진 중에 노란 흙이 빛을 내며 별 가루처럼 은은하게 날렸다.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들과는 아직 직접적으로 대화를 할 수 없을 거다.

젠과 달리 형체가 없는 정령들은 고요한 울림으로 나를 불렀다.

“안녕…… 하세요.”

젠과 달리 계약한 대상들도 아니니까 일단 말을 높였다. 정령들이 다시 울림으로 답했다. 그 울림은 지진 같은 흔들림이 아니라, 내 심장께를 쿵 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나와 다니엘, 젠의 소개를 했다. 다니엘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마주보기만 했다.

젠이 말했다.

-풀어 준 답례로 무엇이든 돕겠다고 하는데, 주인?

“고마운 말씀이에요.”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럼, 제가 어딜 좀 폭파시킬 때 도와주실래요?”

“……리샤, 이런 거 세 개를 더 찾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힘이 많아야 더 안전하게 끝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그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는 다시 정령들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

-…….

“…….”

젠이 그들의 말을 전해 주지 않고 입을 다물자 이상한 침묵이 돌았다. 그것도 잠시, 젠이 말했다.

-그게 전부냐고 묻는데?

“전부라고 답해 주세요. 아, 앞으로 세 분 더 모실 거라고도요.”

-……그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는군.

“서로에게 좋다니 잘됐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정령들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들은 본래 그들이 갇혔던 물건이 아닌, 내가 들고 있던 젠의 일기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또 피를 토했다. 3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밀려오는 기억에 당혹스러웠지만, 일단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리고.

“…….”

기억의 곳곳에 아직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텅 빈 그 자리들은 그 외의 자리가 촘촘히 채워질수록 두드러졌었다. 나는 당연히 이제 그 자리가 채워질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오늘은 언니의 19살 기억. 원작이 시작되기 전, 내가 빙의한 시기의 기억이었다.

“몸의 기억이라고 했는데.”

건국제 시기의 기억. 그때 난 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시기의 다른 기억이 밀려 들어왔고. 이는 기억 속에서는 원작이 그대로 흐를 것임을 의미했다. 원작에 대해서는 언니가 그 인생을 살았는지, 아니면 그냥 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 확실해졌다.

원작도 언니의 기억이라면. 그럼 언니는 회귀를 한 건가? 왜일까. 그 순간에 신관의 말이 떠오른 것은. 언니가 거스른 순리라는 거, 혹시 이거예요? 날 불러온 것만이 아니라……?

“……언니?”

뒤늦게 언니를 불러 보았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리샤, 잠을 못 잤어요?”

“아뇨, 실연을 당했어요.”

“저는 리샤를 버린 적이 없는데요.”

빙긋 웃는 다니엘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혀를 차며 기운 없이 답했다.

“그게, 꿈을 꿨나 봐요.”

그래, 꿈. 꿈에서 언니를 만났다. 다짜고짜 내게 꿀밤을 주며 나타난 언니는 정령들의 영혼 정화에 대해 묻자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마지못한 듯 답을 주었다.

[그래. 그건…… 맞다. 용케 그런 걸 알아냈구나.]

하고. ……언니가 기억 보여 주는 거 아닌가? 의아해하며 기억에서 봤다고 답하자, 언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원작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또한, 언니의 기억이 맞다고. 그리고 그 답을 한 뒤 쌩 사라져 버렸다.

‘음, 그래. 놀랄 일까지는 아닌가? 나도 불러온 언니니까. ……힝. 근데 차인 기분이야. 언니 진짜 너무 싸늘하잖아요! 그냥 다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잠시 시무룩하게 있던 나는 말없이 다니엘을 보았다.

“……단?”

“네, 리샤.”

평온한 어조로 답하는 그를 말끄러미 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러니까, 실연.

‘근데 버린 적이 없다고.’

묘한 표정으로 양탄자 모양의 젠의 위에 앉아 있다가 다시 다니엘를 보며 물었다.

“방금 아주 자연스럽게 음, 우리 사귄다고 한 거 같은데.”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그가 멈칫하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 은은하게 웃었다.

“아닌가요?”

“맞, 맞죠!”

그냥 뭔가, 대놓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는데, 이게 자의로 멈춰지지가 않았다.

‘악, 왜 이래!’

다니엘의 입가의 미소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하나 남았네요.”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 다니엘이 말했다. 평온한 어조에 심통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네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그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가볍게 볼에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갈 길을 갔다. 그리고 사기템을 하나 더 손에 넣은 뒤 멍하니 말했다.

“뭐야…… 너무 좋아…….”

“하.”

그가 갑자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보며 접힌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발꿈치를 들어 올리자, 그가 나를 안으며 몸을 숙여 주었다.

-흠.

젠의 묘한 끙끙거림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그렇게 마지막 사기템까지 모두 모은 날 밤. 나는 기억을 보고 있었다.

“언니.”

안타까이 불러 보았지만 기억 속 언니는 듣지 못했다. 원작에서의 언니를 기억으로 보게 되니, 사건의 흐름만 같은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아리엘을 싫어한 거 아니었어요?”

아리엘을 보며 서 있는 언니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책 없이 천진하고 민폐를 거리낌 없이 끼치면서 모든 이들에게 사랑스럽다는 소리를 듣는 아리엘. 자신이 왜 사랑받는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 소녀. 그런 아리엘 랭턴을 바라보는 언니의 눈빛은.

“왜 그렇게.”

아리엘 자체를 향한 증오라기에는 과한 아픔. 그리고 슬픔이 들어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해요?”

그녀는 아리엘을 보면서 아리엘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확신했다.

“누굴 생각하고 있어요?”

엠마? 아니면, 리시안 바누스? 그도 아니면 황제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에 어울리는 대상이 누가 있더라.

“언니에게, 그런 대상이 있었나…….”

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다 아닐 것이다. 그저 그리워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토록 아프게 그리워하는 느낌이라면. 내가 아는 한 누구도 해당되지 않았다. 기억은 한참을 이어졌다.

‘마치 내게 원작의 내용을 다 보여 줄 것처럼.’

모든 의문을 감추고서 나는 원작의 일들을 언니의 입장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사람 말은 양쪽 입장에서 다 들어 봐야 하나 봐요.”

원작은 굳이 말하자면 남주와 여주 입장이었다. 그것은 언니의 입장에서는 사뭇 다른 성격의 일들이었고.

여러 사건들이 스쳐 간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언니도, 수를 쓰는 언니도, 광기가 순간순간 엿보이게 된 언니도. 사람들의 가시에 개의치 않으면서도, 그 가시가 자신을 죽일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언니가 거기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야.’

어쩔 때는 그녀가 그 사실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왜지? 의도한 일이라서?”

원작은 내 의문과 상관없이 흘렀다. 지금까지와 달리 이 기억엔 빈 곳이 없었다. 그것이 쭉 흘러 종착 지점에 이르렀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 언니는 악행을 했다. 하고, 또 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걸 원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움직이기도 했고, 때로는 슬퍼하며, 때로는 분노하며 움직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녀를 안타까이 여기며 찾아온 아리엘에게 말했다.

“나는 황녀다. 날 때부터 그러했고, 죽을 때에도 황녀로 죽겠지.”

후회의 기미는 없었다.

“영애,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나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나를 악녀라 불렀다.”

과거 어느 날엔가, 나는 이 장면을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영애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겠지.”

그녀의 슬픔과 처절함, 우아함에 열광했었다.

“그러나 병자로 죽는 것보다는 악녀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말로 악녀가 되어 주기로 했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대를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어.”

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내가 가슴 아픈 것과 상관없이, 그녀의 오롯한 생각이 참을 수 없이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나를 병자로 기억하지 않겠지.”

문득, 후둑 하고.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그대는 내게 어떠한 영향도 끼친 적이 없으니. 나는 내 선택으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에 후회는 없다.”

나는 바닥을 점점이 적시는 눈물을 서둘러 닦아 냈다. 오로지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을 응시하며 언니가 황홀하게 미소 지었다.

“단 한 점도.”

그렇게 꿈이 끝났다.

* * *

바누스의 본성에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가장 어두운 자들이 모인 자리에 그들의 수장이 들어섰다.

“앉아.”

무심히 흘러나온 말에 꼿꼿하게 서서 고개들만 푹 숙이고 있던 이들이 한 호흡으로 착석했다.

“어떻게 흐르고 있지?”

매끄럽고 우아한 어조로 단테 바누스가 물었다. 그의 백색에 가까운 백금발이 얼어붙은 인상을 더욱 차갑게 보이게 했다. 그것을 감히 마주 보지도 못하면서 누군가가 보고했다.

“델타 지방에 심은 이들이 사라졌습니다. 순차적으로, 전국적으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불의 검이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파훼하고 가져간 듯한데……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일곱 봉인이 전부 풀렸습니다. 이쪽에서 조사한 바, 황실과 공작가, 자유 기사와 수도의 두 길드장이 나선 것으로 확인되어…….”

“그래서?”

서늘한 음성이 떨리는 보고의 홍수를 갈랐다.

“그, 그것이.”

“확인되어, 그다음은?”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그 무거운 침묵을 가르고 대범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황녀의 짓입니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아이에게 아무래도…… 충격이 부족했던 모양이야.”

아주 한참 후에야 흘러나온 말에 모인 이들이 긴장했다.

“감히.”

이를 가는 듯하던 단테의 음성은 이내 잠잠하게 우아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을까?

다 된 일에 초를 쳐도 정도가 있다. 황녀를 라파엘리스로 죽이는 것은 그들에게도 실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성공했고, 이제 결과만이 남아 있었다.

“바람꽃. 그것이 답이거늘.”

단테 바누스는 영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왔지만 완전한 것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곧 끝이다.

“……더 큰 절망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그것을 고민하는 단테의 눈에 숨길 수 없는 희열과 분노가 넘실거렸다.

“우선은 실패한 자들의 본을 보여야겠지?”

이윽고, 쿵 하고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단테 외에 그곳에서 살아 나온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 * *

우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나흘을 내리 기억을 찾은 것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피를 너무 흘려서.

“힝. 어지러워.”

나는 골골 앓다가 마지막 기억을 보았다. 그게 언니의 원작 기억 다음의 기억이었다.

“놀랍지는 않네.”

엄청 놀란 주제에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러니까, 언니는 정말로 회귀했다. 죽음의 끝에서, 원작의 시작 지점으로. 거기까지 보고 난 뒤 나는 기억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았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말이다.

‘이게 언니의 기억이라면.’

오히려 언니는, 기억 속에 나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언니가 본 것이 기억에 남아 있어야 언니의 기억인 거 아닐까? 왜 꼭.”

……꼭, 누가 언니를 지켜본 것 같은 기억만 있을까?

“…….”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날은 그 생각에 빠져서 거의 온종일 멍하니 보냈다.

“안 되겠네요, 리샤. 이 마을에 며칠 더 묵죠.”

어느 마을에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그가 무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신경이 쓰여 묻자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요?”

“네. 정령에 대해서요.”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싱긋 웃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얼마 후 편히 둘러앉은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요, 리샤. 아무래도 리샤에게 이능이 있는 것 같아요.”

“네?”

언니의 기억 문제에 대해 뭔가 갈피가 잡힐 것 같던 차였다. 그래서 거기에 정신이 쏠려 있었는데 그런 중에도 그의 말에 나는 놀랐다.

“이능이라면, 오라버니의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그런 힘 말이에요?”

그거라면 바누스가가 한때 사냥했던 그 이능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맞아요. 그것도 이능 중 가장 드물게 타고나는…… 정령 친화력이에요.”

다니엘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정령친화력? 그게 이능 중 하나라는 것도 나는 몰랐는데.

“젠은 우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봉인을 풀어 준 정령들을 보면서 확신했어요.”

-일리가 있군.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뭔가 이상했어.

젠도 알 수 없는 말로 동조했다.

“저한테, 그러니까, 정령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이능이 있다는 말이에요?”

“정확히는 끌어당기는 힘이죠.”

그가 조금 묘한 얼굴로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혹하는 힘이라고 해야겠고요.”

“유, 유혹.”

내가 묘한 얼굴로 그를 보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좋은 거라고 봐요. 다만.”

“다만……?”

“사람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친화력을 타고날 수 없으니, 그게 문제죠.”

“무슨 말이에요?”

“리샤, 리샤의 영혼은 어쩌면 라파엘리스에 걸리기 전부터…….”

거기까지 말을 잇다가 그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우리가 머물던 여관방의 문이 부서져 버렸다.

“꼬리를 드러낸 건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다니엘이 나를 안고 속삭였다.

“리샤, 잠깐만 눈을 감고 있어요.”

“단, 저도.”

“아마 지금 리샤는 힘이 불안정할 테니까요.”

힘이 불안정해?

-저 놈 말대로 하자, 주인.

“……알았어.”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배신자! 배신자를 처단한다!”

“닥쳐라.”

잠시 후, 알 수 없는 고성이 오가고, 누군가의 단말마가 허공을 울렸다.

“끝이 멀지 않았건만! 아악!”

사위가 조용해졌다. 우리는 민가를 벗어난 숲 어딘가에 우두커니 선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까 하려던 말, 뭐였어요?”

라파엘리스에 걸리기 전부터 내 영혼이 어땠다는 것일까? 차분하게 그에게 물었다.

“친화력을 타고나려면, 영혼에 빈자리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답했다.

“빈자리요?”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거죠.”

그의 눈이 새카맣게 빛났다.

“……정령은 그 빈자리에 깃들어요.”

나는 잠시 그가 혼혈 정령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각하기 전, 그의 말이 이어졌다.

“문제는, 리샤. 리샤에게 지금 역대 가장 많은 수의 정령이 깃들었다는 거죠.”

-그것도 다 정령왕들이니.

젠이 혼잣말을 하듯 거들었다.

총 일곱. 불과 물, 땅과 바람, 빛과 어둠과 공허의 정령이 내게 깃들었다. 정확히는 일기장 안에 들어온 것이지만, 그것도 나에게 깃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젠의 머루 같은 눈동자가 말갛게 반짝였다.

-그 정도로 영혼에 빈자리가 커지는 건 이상해. 친화력을 타고난 이들도 기형적인 수준일 뿐 이렇게 빈자리가 크지는 않거든.

“…….”

-……주인은 꼭, 일부러 잘라낸 것처럼 비어 있어.

일부러 잘라낸 것처럼. 이상하게도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젠이 조금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군. 빈자리가 채워졌으니…… 고통은 덜하겠지.

그렇게 말하고 젠은 자취를 감추었다. 일기장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

나는 다니엘의 얼굴에 습관처럼 머무르고 있는 옅은 미소를 바라보았다.

“젠의 말이 맞아요. 잘된 일이니, 걱정 말아요, 리샤.”

“그럴까요?”

그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난 그저.”

그리고 작게 그가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리샤, 저를 떠나지만 말아요.”

“아.”

“그거면 돼요.”

내 반응을 눈에 담으며 그가 다소 짙게 미소 지었다.

나는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정령들이 언니의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바누스가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 * *

다니엘은 무표정하게 전방을 바라보았다. 정령의 힘을 모두 얻고서 바누스가로 향하는 길. 그들은 지속적으로 습격을 당하고 있었다.

우웅! 지각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리샤가 손짓을 했다. 땅이 꿈틀대며 달려드는 이들의 암수를 막아 냈다.

“마법이네요.”

“마법. 그렇군요. 이제 차이를 알 것 같아요.”

몸도 좋지 않으면서. 리샤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하며 식은땀을 훔쳤다.

바누스가의 습격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정상적으로 강했고, 또 이상했다. 민가에서 습격당한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냥 날아가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주 곳곳에서 사고를 치고 있었네요.”

사고. 그렇다. 가는 곳마다 달려드는 습격을 물리치다 보니 바누스가가 얼마나 제국 곳곳에 파고들어 있는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본거지를 기습하는 것은 어차피 행로가 드러나서 불가능해졌으니, 그들은 아예 바누스가의 뿌리를 뽑으며 전진하기로 했다.

‘리샤가…… 정령들의 힘을 다루는 연습을 하겠다고 했고.’

마법과 정령의 힘은 상반된다. 그의 왕국도 그것 때문에 바누스에게 당한 것 아닐까. 다니엘은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뒤처리를 맡아 주어서 고마워요.”

리샤가 그의 수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의 얼굴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처리한 바누스의 끄나풀들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도로 연행되었다.

다니엘과 헤레이스의 수하들은 신이 나서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바누스가를 철전하게 박멸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유진, 카인, 헤레이스, 이비엔 경 그리고 그 외 많은 이들이 열심히 색출하는 중이었다. 전부 르페르샤 황녀의 이름을 걸고서.

“단, 사람들 눈빛이 이상해요.”

다가오는 리샤를 맞이하며 다니엘이 빙긋 웃었다.

“소문이란 그런 거니까요.”

그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소문을 타면 극단적으로 부풀려지며 빠르게 퍼진다. 리샤가 묘한 표정을 하다가 한숨을 폭 쉬었다.

“알지만 역시 이상해요.”

그녀는 자신의 소문이 거의 성녀에 준하게 되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자잘한 일들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도 있으니.’

솔직히 말해서 황태자보다도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황녀 열풍’이라면서 신이 나 있었다. 차마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지켜만 보는 이들 눈에 어린 것은 경외감이었다.

‘정령을 다루는 건 마법보다 화려하기도 하고.’

소문에 불이 붙은 데에는 그 화려함과 리샤의 지혜로운 판결 일화 같은 것들이 톡톡한 영향을 미쳤다.

“거짓은 없으니 익숙해지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음, 네……. 그러네요.”

그녀가 아는 소문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묘한 얼굴로 수긍했다. 찝찝해하는 것은 아마 자신을 보는 눈빛들이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다니엘은 모른 척했다. 그런 것을 말해도 그녀가 기뻐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지금도 저리 씁쓸해하고 있으니.’

다니엘이 말을 돌렸다.

“이제 진짜 코앞이네요.”

“바누스가 정문으로 걸어 들어갈 줄은……. 전 기습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정문으로 쳐들어가는 게 더 재밌을 거예요.”

“재미…….”

그녀의 어이없어 하는 눈빛에 다니엘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리샤의 눈에 살짝 깃털 같은 입맞춤을 한 뒤, 슬쩍 바누스의 영지 입구를 바라보았다.

“다치지만 말아요, 리샤.”

서늘한 빛이 어린 눈은 흙빛이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듯하던 그의 시선은 리샤를 바라보며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만 무사하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녀는 미소 지을 뿐 뚜렷하게 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가 죽을 것처럼 피를 토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을.

“컥……. 으, 윽.”

“리샤!”

리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 * *

빛만이 가득한 공간.

[……더는 보여 줄 게 없군.]

백금빛 머리카락이 한 차례 살랑였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허공의 한 부분에 영상처럼 떠 있는 광경이 담기고 있었다.

[이 이상은, 사족이지.]

르페르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어.]

허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못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영상 속 ‘그 아이’의 눈이 감겼다. 몸이 한층 흐려진 르페르샤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 아이는 아마도 끝까지 모를,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 * *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시린 겨울, 어둔 감옥 안에 비친 한 줄기 햇살을 보고 떠올린 질문이었다.

“…….”

소녀는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답을 손에 쥘 수 있었다.

* * *

그 가문의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곳엔 소란스러운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단 한 사람을 향해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언행을 신중하게 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이 바누스가에서 섬길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 단테 바누스만이 모두의 주인이었으므로.

“아니지. 열 살이 넘도록 살아 있다면, 그때 이름을 주도록 하마.”

리시안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단테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어떤 것도 머릿속에 적립되지 않은 시절에도, 그녀는 단테의 절대적인 권력에 대해서만은 인지하고 있었다.

리시안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그의 미소가 짙어지자마자 넙죽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한껏 꺾은 복종의 표현이었다.

흐뭇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눈치가 빠른 아이로구나.”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리시안은 이때 자신이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누스의 직계로 태어난 아이들 중 단테에게 복종을 표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다. 그 후 리시안은 차갑고 텅 비어 있는 곳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도 일종의 동료 같은 느낌이었을 뿐 가족의 정 같은 것을 경험해 본 바가 없었다.

“살아남으면, 이름을 주신다고 했으니 최선을 다해 보거라, 아이야.”

“네, 아버지.”

그녀가 사는 곳은 감옥을 닮아 있었다. 다소 큼지막한 쇠창살 사이로 새어 드는 빛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전부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무엇을 주어도 삼켜 냈고, 무슨 짓을 당해도 죽지 않았다.

“생각하지 말고, 느끼지 말아라.”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지가 바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최고 미덕이었다. 다만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깊은 밤이 되면 리시안은 그 무지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리시안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푸른색의 섬뜩한 마력이었다.

“사라진다.”

달빛이 드리운 자리에 그 마력을 대면, 마력은 그 자리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렸다. 검은 웅덩이 같은 그림자가 부자연스럽게 자리한다. 그렇게 글자도 만들어 보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가 하는 유일한 놀이가 그것이었다.

그런 놀이를 하다가 리시안이 문득 중얼거렸다.

“나도, 사라지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그녀도 사라지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누스에 남아 있는 직계는 많지 않았다. 손이 귀한 집안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오래 살아남기를 허락받은 이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허락한 이도 그 하나였지만.

“언제쯤, 먹힐까?”

아버지가 사라진 것은 작년이었다. 리시안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연구실로 향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진정한 영생을 위하여!’

희열이 넘치던 그의 마지막 외침을 리시안은 똑똑히 기억했다. 아무도 리시안에게 사라진 이들이 먹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리시안은 그것을 먹혔다고 표현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랬기 때문이다.

“푸른색.”

몰래 보았던 그 장면들. 사람의 영혼이 뽑히면, 푸른빛이 사위를 감싼다. 안개처럼. 때로는 번개처럼. 그것이 바로 영혼이었다.

영혼은 푸른색이었다. 달빛조차 지워 버리는 이 힘은 어쩌면.

“전부 그를 위해 영혼을 포기했지. ……그런데 왜?”

리시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는 기뻐했는데, 그녀는 기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종류의 감정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째서.”

그저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보고 배워 갈수록 모든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뿐.

“하지만.”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리시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감옥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아침.

“너는 리시안이다. 리시안 바누스.”

단테 바누스가 고아한 몸짓으로 손짓했다. 다가간 그녀의 무감정한 표정을 찬찬히 살피다가 그가 말했다.

“내가 너를 부르면, 너는 내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네 생의 의미이니. 알았느냐?”

“…….”

생의 의미.

“대답을 해라.”

지금까지와 달리 그녀는 입을 열고 소리를 냈다.

“네. 가주님.”

생의 의미. 그것을 또 한 번 되뇌며. 그녀는 익숙하게 복종했다.

“아주 좋구나.”

그날, 그녀는 자신이 열 살이 되었음을 알았다.

시간이 흘렀다.

“리시안, 너는 아이를 낳아야 해.”

어느 날 들킨 푸른 힘 덕에 리시안은 ‘영애’라고 불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모든 바누스가 했던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음 제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타인의 영혼이나 이능을 빼앗아 제 수명을 늘리는 괴물이 말했다.

“너는 특별하니, 특별한 힘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황가의 핏줄과 섞인다든가 해서 말이다.”

“……네, 가주님.”

리시안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돌아 나오는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녀에게 단 한 번이지만 밖으로 향할 수 있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사실 명령의 내용은 상당히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리시안은 황태자의 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그와 몸을 섞어, 황가의 피와 바누스의 피가 섞인 후손을 내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한 임무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나가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궁금하다.”

마침내 혼자 너른 세상으로 나왔을 때, 리시안은 맑은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주지 않는다면?”

이 영혼을 그에게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그녀 자신의 생각보다는 영특했다. 딱히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격정적인 분노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

하지만 길들여진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약간의 혼란이 남았을 뿐.

세상은 너무나 눈부셨다. 그리고 그 세상은 리시안에게 지속적으로 말했다. 너는 이상하다고.

그녀에게는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세상에서는 이상한 것이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부정적인 것 같았다.

리시안은 가만히 세상을 관찰했다. 온갖 것들을 관찰하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에 박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이었다.

“예뻐.”

그러한 표현은 세상에 나오고서야 배웠다. 아직 이해가 되지는 않는 느낌이었지만 어쩐지 이럴 때에 쓰는 표현 같았다.

“안녕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그건 아니야. 틀려.”

점차 리시안은 말이 늘었다. 감정적인 표현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능숙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사람의 감정은 흥미로웠다.

……예뻤다.

“리시안?”

그들도, 참 예뻤다. 특히 그 붉은 머리의 여성은 더더욱.

“예쁜 이름이네요. 난 카라예요.”

마법은 영혼의 힘, 이를테면 신성력이나 정령력과 공존하지 못한다. 그것은 굉장히 자연을 거스르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출내기 마법사 여성은 이상했다.

‘신성력을 가득 가지고 있어.’

신기한 눈으로 카라를 보다가 리시안은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따뜻했다. 어쩌면 그날,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그로부터 얼마 후, 리시안은 바누스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생의 의미가 전부 그 곳에 있었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세상이 알려 준 사실이었다. 그녀 스스로 얻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 깨달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목숨까지 걸고 이런 계약을 한다고? 대체 뭘 바라서.”

“그래요, 리시안. 이건, 솔직히 절 위해 그러는 거죠? 위험해요.”

“아니다.”

생을 걸고 계약했다.

“나는 자유를 바라는 것이니.”

“이건 오히려 계약에 구속되는 것 아닌가? 무슨 자유가!”

“내게는 자유다. 너희에게는 좋은 일일 텐데, 왜 망설이지?”

생을 걸고, 아이들을 낳았다.

“너는 르페르샤. 그리고…….”

그리고.

“너는, 알리샤로 하자.”

리시안은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 * *

너희는 자유롭기를.

마땅히 누려야 했던 것들을 누리기를.

그리하여, 행복하기를.

* * *

리시안 바누스는 오래 살지 못했다. 사실 아이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죽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이른 죽음이었다.

“엠마.”

리시안 바누스가 믿는 사람은 엠마 한 명뿐이었다. 리시안은 엠마의 마음을 믿었다.

“떠나지 마라.”

그저 그것이면 충분했다. 정신 마법과 비슷하지만 그것과 달리 안전한 방식으로, 리시안은 엠마에게 그 명령을 심었다.

엠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리시안이 제 영혼을 조각내 두른 막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이들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엠마가 감정적으로 아이들과 교류를 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그녀를 아이들의 방패로 삼고 싶은 게 아니니까.

“그저, 곁에 있어 줘.”

황제에게도 그것을 바라서, 리시안에 관련된 기억들을 손보았다. 엮이지는 말고, 그저 곁에 있어 주면 된다고 여겨서.

“끝까지, 지켜봐 주어라.”

리시안으로서는 그것이 굉장히 큰 것을 남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리시안은 쌍둥이 여자아이들을 낳았다. 한 아이는 리시안을 닮았고, 한 아이는 이능을 가진 자를 꽤 배출해 온 황가의 피를 짙게 이었다.

리시안을 닮은 아이는 영혼의 힘을 쓸 수 있었다. 잠결에도 푸른 힘을 손끝에서 내다 마는 아이는 강한 아이였다. 그리고 황가의 피를 짙게 이은 아이는.

“약하구나.”

덤덤한 듯 애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아이는 타고난 이능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정령력 쪽인 것 같지만.

“……하지만 그들에게 들키면.”

사냥당할 것이다. 카라가 당한 것처럼. 카라는 목숨만 잃고 영혼까지 빼앗기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너는 빼앗기고, 또 빼앗기겠지.”

어느 쪽이나 바누스에서 탐을 낼 만한 아이들이었지만, 이능을 가진 아이가 더 위험했다.

“어느 아이든, 주지 않아.”

쌍둥이가 태어난 것 자체를 감추었으니, 얼마간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바누스는 눈독을 들일 생각도 못하다가, 어느 날 아이들의 존재를 깨달을 것이다.

“……아이가 둘이라면, 필시 하나는 가져가려 하겠지.”

그녀는 고민 끝에 아이들이 쓸 수 있는 것을 하나 남겨 두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더 오래 함께 있는 것보다, 자신과 달리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좋다고 여겼다.

“이게 옳아. 맞아. 그런데.”

아이들의 발을 두 손에 쥐어 보았다.

“르페르샤. 알리샤.”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리시안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는 깊은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많이, 하염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한 가장 귀한 것들로 남겨 주었으니, 위험하더라도 아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괜찮아.”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먼 훗날 아이들이 하는 말을 닮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알리샤.

르페르샤는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한 번쯤 불러 보고 싶을 때면, 조금 웃고 말았다. 생전에도, 지금도. 그건 그녀에게 그런 이름이었다. 부르고자 하면 미소가 나오는데, 정작 불러도 답이 없는 이름.

[…….]

‘그 아이’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옅은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 * *

“언니?”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멍하니 불렀다. 방금 언니가 날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게도.

“리샤, 왜 그래요?”

-언니라니?

바누스의 코앞에서 내가 거의 죽을 것처럼 피를 토하면서 우리는 발이 묶였다.

‘이번엔 기억을 보지 못했어.’

언니의 회귀까지는 확신을 했다. 그래서 뭔가 더 단서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꼭 언니가 기억을 못 보게 막아 놓았을 때처럼.’

시무룩해지려는데 문득 다니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대는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잘생겼다.”

“…….”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그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은 없는데.”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보다 언니라뇨?”

“음, 그냥.”

어쨌거나 3일 안에, 다시 피 토하기 전에 바누스가를 부숴야겠다. 남은 것은 그 후에 생각하면 되겠지.

“그냥 나온 말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접으며 답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잘생겼다는 말도, 그냥 나온 말이에요?”

“네. 저도 모르게.”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오늘은 가 볼까요?”

“괜찮겠어요?”

“그럼요!”

드디어 바누스가를 정령으로 부수는 것이다! 신이 나서 방긋 웃고 있자, 젠과 다니엘이 함께 한숨을 쉬었다. ……여행하면서 저 둘이 꽤 친해진 것 같다.

“그래요. 그럼.”

그러나 다니엘도 침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처럼 나른하게 웃는 것을 보면.

‘그에게도 바누스는 원수니까.’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바누스가의 정문이 쿠르릉 소리와 함께 땅 아래로 묻혔다.

“…….”

“…….”

-…….

순식간의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 연이어 쿠르릉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높은 담이 동시에 내려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핫! 생각보다 손속이 과하게 나가는군!

다니엘이 옆에서 살짝 어깨를 떨었다. 잠시 후, 눈가를 슬쩍 닦은 다니엘이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다니는 건 안 되는 거 알죠?”

“그거야 알죠.”

젠이 나를 태우고 몸을 띄웠다. 느껴지기로, 그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곱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웃네요.”

“정령들이요?”

“네. 그, 기쁜 것보단 화도 난 것 같고 그래요. 통쾌해하고 있어요.”

“아하. 그렇다면…….”

다니엘이 어딘가 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지간히 더러운 곳인가 보군요.”

-그래. 느껴지는군.

젠이 뚱하게 말했다.

-대놓고 영혼을 가지고 놀고 있어. 이만한 곳은 또 처음이야. 아니, 처음은 아닌가……?

“무슨 말이야?”

-오래 전에 우리를 봉인한 자들이 있었지.

음? 우리라면, 젠을 포함한 정령왕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젠은 그 이상 그것에 대해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한쪽의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을 뿐.

-저기부터 가지, 주인.

회백색의 건물은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케 하는 형태였다. 매우 크고 웅장한 건물은 어딘가 불길했다.

“기분 나쁜 곳이네.”

콰카캉! 화륵! 우리 일곱 정령들이 열심히 밑에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마 인명 피해는 없을 것이다. 진짜 정령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니까.

“덕분에 다른 곳은 손댈 필요 없을 것 같으니, 가 보자.”

내 말에 젠과 다니엘이 허공을 날아 그 건물로 향했다.

그때였다. 끼이- 하고 이명이 들렸다.

“윽.”

나는 멈칫하며 머리를 짚었다.

이건, 언니다. 확실했다. 꼭 그때 같았다. 대극장에 가기 전에, 내게 경고하듯 고통을 주었을 때처럼. 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피 토할 때는 굉장히 아팠지. 아니, 고통도 고통이지만…….’

일단 어지러웠다.

“리샤.”

다니엘이 단단하게 나를 잡아 주었다.

-주인? 역시 돌아가는 게!

“음, 아니야.”

또 토혈을 하고 말았다. 나는 엉망이 된 입가를 대강 닦아 내며 정면을 똑바로 보았다. 언니가 막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구나. ……그렇다면.

“저기에, 그가 있을 거예요.”

그, 단테 바누스가.

“그를 끝내야 비로소 모든 게 끝나는 거잖아요.”

둘은 잠시 대꾸가 없었다.

“좋아요. 가죠.”

-…….

다니엘은 나를 막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다만 잊지 말아요, 리샤. 나는.”

그저 다시 그 말을 했을 뿐.

“당신만 무사하다면, 무엇이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는 그의 복수조차 내 안전보다 아래로 두고 있다는 것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가 미련 없이 정면을 보았다.

잠시 후. 우리는 한 괴물을 마주했다.

황태자가 칼을 뽑았다.

“모든 그림자들은 들어라.”

황가의 늑대들이 그의 뒤에 소리 없이 부복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공신 가문, 아니, 반역자 바누스를 지운다.”

별일 아닌 것처럼 나온 말이었으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응축된 살기는 대단했다. 늑대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감히 황녀를 장난감 취급한 희대의 강아지들을 향해, 라빌로프가 눈을 번뜩였다.

가일 후작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보다가 다시 제 일로 눈을 돌렸다.

‘끝났군.’

바누스와 관련된 자는 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처단될 것이다. 황제가 승인한 반역자의 말로란 그런 것이다.

‘역사에 다시없을 정도로 뒤를 샅샅이 뒤졌으니.’

유진 볼턴은 공인된 최고의 기사로서 자유 기사들에게 한 번의 명령권을 발휘할 수 있다.

그냥 기사도 아니고 모든 곳에서 인정받는 자유 기사들이 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들은 지혜로웠고, 강했다. 바누스가가 양지에서 움직이던 것들 중 그들에게 털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그 공작…… 솔직히 괴물 같았지.’

마법 테러 집단을 맡은 것은 아이릭 공작이었다. 각종 키메라들과 마물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무력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물도 아니고 마족의 혼혈이었다니. 허.’

그는 뱀파이어의 혼혈이라는 것을 그냥 드러내 놓고 다니며 샅샅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가일 후작이 정리하는 서류들. 그것은 르페르샤 황녀의 소문에 깊게 가담했던 가문들의 반역 증거들이었다.

‘없는 걸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게 더 기막힐 노릇이군. 헤레이스라는 그놈이 ‘그’ 정보 길드장이었다니. 어쩐지 황태자 전하가 기어오르는 걸 두고 보시더라니.’

가일 후작은 한숨을 쉬면서도 황녀를 음해한 가문들의 자료를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 이비엔 경도.’

황녀가 허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에밀이 르페르샤 황녀라는 소문이 은밀하고도 빠르게 번졌다. 이젠 모두가 쉬쉬하는 공인된 사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리엘 영애가 그 소문을 듣고 기절했었지.’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광신도가 되었다.

“쩝.”

아마사의 일부터 에밀의 이름으로 한 일들 전부가 맞물려서, 이번엔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성스러운 르페르샤 황녀의 소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실 성스럽다기보다는…….’

들려오는 소문들을 떠올린 후작의 손이 잠시 멈췄다.

‘큰 도시부터 작은 마을까지.’

어느 곳에서든 르페르샤 황녀의 미담이 퍼지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별로 그녀의 정체를 감춰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피아 영애와 아리엘 영애가 베아트리스 소프 대회의 일까지 열심히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게다가 쓰는 힘까지 그렇게 눈에 띄니.

‘미담만이 아니지.’

문제가 생겼을 때 너무나 빠르게 몹시 현명한 방안을 내어놓는다고 한다. 사실 리샤로서는 한국에서 들은 것들이 있어 빨리빨리 처리하려 한 행동들이었지만, 가일 후작이나 다른 이들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뭐 문제 있어?”

곳곳의 소식을 검토하고 있던 라빌로프가 물었다. 왜 손을 놀리고 있느냐는 말이다. 가일 후작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소문?”

“자애로우신 황녀님이 진정한 군주의 재목이라고 하던데요.”

“아, 그거. 그게 뭐?”

별일 아닌 듯한 태도에 가일 후작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라빌로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내 누이가 유능하긴 하지. 이제 다들 알아보는군.”

“…….”

“아름답다고도 한다지? 이제야 알아보다니 그간 눈들이 망가졌던 것이지.”

착각일까. 몹시 뿌듯해 보였다.

“군주라. 그래, 근데 겨우 그 정도라니, 부족해. 소문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해야겠어.”

가일 후작이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황태자를 보았다.

“뭐지?”

불쾌하게 묻는 모양이 어이가 없었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 하시죠, 전하.”

“……?”

라빌로프가 이상하게 후작을 본 뒤 다시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서류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심각하게 말했다.

“그 치료제에 대해서는 소식 없나? 다니엘이란 자가 조사한다고 했는데.”

“없습니다.”

“굼뜨군.”

사실 록스와 의궁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혁신적이고 빠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가일 후작이 또 황태자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황녀 전하께 방도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 소식 덕에 가일 후작도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그런데 왜 저럴까?

“그 방법이라는 것이 안 통하면? 만에 하나 말이다. 허술하게 굴면 안 되지. ……그나저나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이런.”

“…….”

이를 가는 황태자를 보며 가일 후작은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사이, 다른 이들은 조금씩 리샤와 다니엘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언제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을 혼자 보낼 리가 없었다. 하물며 바누스가를 직접 상대하러 가신다는데.

“유진.”

“야, 이쪽!”

바누스 영지의 다른 쪽 입구에 카인과 여장한 헤레이스가 서 있었다.

유진은 헤레이스의 여장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일할 때는 종종 저런다고 했으니.’

무력이 갖춰진 이들은 다니엘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렇게 합류하기 위해서.

“리샤 님은?”

인사도 생략하고 묻는 말에 카인이 답했다.

“들어가셨다.”

“그럼 곧이군.”

“시온 녀석도 온댔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만치서 골골거리며 마탑주 시온이 등장했다.

“헥…… 다들, 빨리 오셨군요.”

“그랬지. 넌 참 늦게 왔네?”

“텔레포트를 이렇게 연속으로 쓰는 마법사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 어쨌든 구름 불러와.”

헤레이스가 천사같이 웃으며 요구했다. 정말 알아들은 것이 맞는 걸까! 시온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얼른. 이동은 네가 담당한다며.”

그나마 좀 정중한 유진이나 카인이 좀 쉬라고 해 주지 않을까 했으나,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뭐 하십니까?”

“…….”

어서 하라고 눈짓하는 둘에 시온이 허허 웃으며 죽을힘을 다해 태운 사람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구름을 불러왔다. 신이 난 기색으로 달려드는 헤레이스부터, 구름을 하나씩 꿰찬 그들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아이고, 저 괴물들. 제국을 횡단하고도 끄떡없다니.”

시온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구름을 작게 만들어 날아올랐다.

“구, 구경이라도 해볼까.”

그리고 바누스의 무너진 담 더미를 넘었을 때, 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맙소사.”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불과 물과 바람, 땅, 빛, 어둠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쿠릉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잔해들 속에서 죽은 이들이 없는 것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 힘은 뭐지?”

무력화된 이들을 앞서 간 세 사람이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어딘가로 향하기 전, 시온과 헤레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희열이 가득한 눈에 시온이 배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꼬륵 기절해 버렸다.

* * *

정말로 사람이 악하면 외모와 상관없이 괴물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나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그 말을 떠올렸다.

“어서 오세요, 황녀.”

꽤나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창백한 인상의 남자는 그 자체로 섬뜩하며 기괴했다.

“그리고 왕자. 우리도 구면이지요?”

징그러울 정도로 간드러지는 말투로 단테 바누스가 말했다.

나도, 다니엘도 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슬픈데요. 그나저나.”

그가 온화한 척하는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고서 섬뜩하게 얼굴을 구겼다.

“지금 이리 온 것은, 고이 내게 꽃을 바치러 온 것이겠지요, 황녀?”

“하아.”

내가 한심하다는 듯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그래요. 고민이 많았나 보죠. 이해는 안 되지만. 어쨌든 이리 왔으니, 마지막으로 차 한잔 어떻습니까?”

“왜 그랬지?”

헛소리를 듣다가 내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단테 바누스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뭘 말이죠?”

우리 언니에게, 왜 그랬어. 아무 답도 들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묻고 싶었지만.

“사람을 사냥하고, 사람을 실험체로 삼고…… 영생이 그토록 좋아 보이나?”

단테 바누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그 몰골을 하고서, 영원히 살고 싶은 건가?”

“흐음. 황녀. 주제넘은 말을…….”

“더없이 추하군.”

나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매우 안쓰러운 것을 보듯.

“…….”

촛불이 꺼지듯 훅 하고 그의 얼굴에서 가짜 미소가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그는 흉악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말로 하려 했더니, 안 되겠네요.”

“그건 그쪽이 선택할 일이 아닐 텐데.”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내가 웃으며 그에게 동의했다. 그러자 단테 바누스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일까? 왜 저러지?”

동시에 새파란 힘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언니에게서 봤던 거랑 달라.’

그 힘은, 어둡고 칙칙한 빛깔이었다. 본능적으로 저것에 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피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섬뜩한 중얼거림과 파란 힘의 공격이 이어졌다. 점차 힘의 강도와 범위가 커지고 있었다.

“리샤!”

미처 피하지 못한 나를 안고 다니엘이 몸을 피했다. 그의 검은 힘이 파란 힘을 대적하고 있었다.

단테가 잠시 놀란 눈으로 보는 것이 보였다. 잠시 이쪽을 응시하던 그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큭.”

그와 동시에 파란 힘이 구렁이처럼 형태를 가지고 힘껏 내리쳐졌다.

한 번, 두 번……. 횟수가 이어질수록 다니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정령의 힘을 쓰려 했지만 젠이 순간 나를 저지했다.

-아직 아니다, 주인.

이를 가는 음성에 나는 바깥에 생각이 미쳤다. 다 부수고 있었던 정령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때, 다니엘의 검은 힘이 약해진 틈에 다시 한 번 푸른 힘이 떨어져 내렸다.

“으쌰!”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괜찮습니까?”

“저자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를 보고 있는데, 다니엘이 말했다.

“늦었군요.”

“밖에 정리할 것이 좀 있어서.”

짠 거였어? 나는 안도감과 황당함이 교차된 심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좋아, 주인. 지금이다.

불과 바람, 땅.

물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정령왕들은 어쩐지 몹시 분노한 것 같았다. 사위가 캄캄해졌고, 빛이 리샤와 다니엘, 젠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의 칼날이 단테에게 닿으려던 찰나.

“그래! 설마 네 ‘동생’ 때문이냐?”

괴물이 찢어지는 음성으로 외쳤다.

“잠깐. 뭐라고?”

……동생이라니?

내가 당황하며 정령왕들을 멈추자, 단테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잊은 건가?”

조금씩 그가 입술을 실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소를 터뜨렸다.

“네 유일한 혈육에 대한 기억을 말이다! 잊은 것이었어!”

“그게, 무슨.”

심장이 쿵쿵 뛰었다. 리샤. 르페르샤 언니의, 혈육……?

“네 쌍둥이 동생 말이다.”

그는 정령왕들이 다가간 것뿐인데도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비명처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손으로 죽인, 그 아이 말이다! 으하하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앞의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다니엘이 나를 불렀다.

“리샤.”

그리고 그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아 왔다. 나는 그 온기에 정신을 차렸다.

“더 듣지 말아요.”

덤덤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어차피 단테는 입까지 뭉개져 더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만 지르고 있었다.

나는 다니엘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가라앉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단테 바누스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괴성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아마도 죽지는 않겠지만 그리 길게 숨이 붙어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토록, 허망하게.’

순식간에 끝이 날 줄은.

‘내가 바란 것이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다.

‘상대가 무려 정령왕들이었으니까.’

정령왕들의 분노는 거대했고, 강력했다. 내가 한 것은 없다시피 했다.

그래, 바누스가에 복수를 마침내…….

“…….”

다니엘이 나를 품에 안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허공에 붕 뜬 느낌. 내 등을 부드럽게 도닥이는 손길마저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동생. 언니에게 동생이 있었다고?

‘게다가.’

……언니의 손으로 죽였다니. 복수를 끝냈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요, 단.”

“…….”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나를 놓아주었다.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도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 어린 눈빛이 뒤늦게 느껴졌다. 그들도 들었겠지. 단테 바누스의 단말마를. 그러나 그로 인한 혼란에 먹힐 때가 아니었다.

“끄어어…….”

단테 바누스의 몰락을 눈에 새기면서 나는 젠에게 말했다.

“젠, 정령왕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알려 줄래?”

대체 왜, 저자에게 정령이 저토록 큰 타격이 된 것일까? 잠시의 침묵 후, 젠이 답했다.

-그의 영혼은 몸을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썩었더군. 그것도, 타인의 영혼을 밧줄 삼아서.

“그렇구나. 그렇다면.”

-그래. 지금 저들은 ‘정화’시키고 있는 것뿐이다.

정화하여, 제자리로 가도록.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까 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이 많다. 하지만 ‘동생’에 대해서는 언니에게 후에 물어볼 일이었다.

‘지금은 언니의 생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우선이야.’

정화는 과연, 언니를 살려 줄 수 있는 수단인지. 단테를 보았다. 그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저 상태인데 숨이 붙어 있네?”

헤레이스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한참 걸릴 겁니다. 정화가 끝나려면.”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그와 맞잡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면, 그 시간 동안.”

그리고 조금 후, 단테에게서 어떤 위협도 감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네 사람에게 부탁했다.

“네 분에게 연구 자료들을 부탁해도 될까요?”

“혼자, 여기에 있으려고요?”

“젠이 있고, 정령왕 분들도 계시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다니엘은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보다가 덤덤하게 답했다.

“알았어요.”

“……기꺼이.”

유진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네 사람이 사라졌다. 아마도 바깥 연구실이 몰려 있는 건물들로 향했겠지.

“이제 말해도 괜찮아, 젠.”

난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한참 만에 젠이 마치 의자처럼 나를 감싼 뒤 안전해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주인, 저기서 주인의 영혼 조각이 발견되었다.

“그렇구나.”

나는 아찔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울 것 같은 심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제자리를 찾는 영혼의 조각들 중에……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가지다.

“…….”

하나가 아니라 둘. 단테의 영생에 이용된 영혼의 조각이, 이쪽으로 향한다.

나는 마탑주 시온이 나를 보자마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이 세상의 영혼이라고 했었지.’

저 두 가지 조각 중 한 가지는 내 것인 거겠지.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다른 영혼들은 정화하면 사라질 조각들이지만 저 두 가지는 달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 조각이라서 그런 거지?”

-그렇다. 다른 하나는 한 조각뿐이지만.

언니의 영혼의 조각은 다행히도 아주 조금만 떼였었나 보다.

“그러면, 젠.”

수많은 생각에 앞서 내가 물은 것은 하나였다.

“그 조각이 원래의 영혼과 합쳐질 수 있을까?”

젠은 답했다.

-본래 영혼이 금기를 범하지 않았다면 가능하다.

“……그 본체의 영혼을 정화해도?”

-주인, 주인의 안에 있는 영혼, 느껴진다.

“응?”

갑자기 말을 돌리는 젠에 의문을 표했다. 젠이 낮게 속삭였다.

-주인이 아닌 다른 영혼.

“…….”

-알아챈 건 나와 저들뿐일 거다, 주인. 하지만 설마 했는데.

망설이는 어조로 젠이 물었다.

-그 영혼을 정화하려는 건가?

“……응.”

-안 된다.

“왜?”

-두 영혼 중 먼저 온전해지는 영혼이 그 몸을 차지하게 될 테니까.

“……내가 상관없다면?”

-그 영혼이 그 몸을 차지하면 그 즉시 죽을 테니, 상관이 있지.

순간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아니야. 나는 매달리듯 물었다.

“그럼, 그러면, 젠. 내 영혼이 온전해지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야?”

-사라지지.

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입을 열지 못하고서 망연히 있었다.

“그렇구나.”

열없이 한 마디를 겨우 뱉었다.

다니엘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손으로 펜던트를 쥐고 있었다. 절박하게, 온 힘을 다해서.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일까?

“리샤?”

돌아온 다니엘이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다른 셋에게 맡겨 버리고 다가왔다. 그에게 안긴 채로 나는 헐떡거렸다.

“뭐야? 왜 그래?”

“리샤 님?”

당혹스러워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니엘은 몸을 잠시 굳혔다가 말없이 단단하게 나를 받쳐 안아 주었다. 울어야 할 것 같은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헉. 흐으.”

희망은 사라졌다.

* * *

그날, 바누스 성의 수많은 이들이 연행되었다.

“…….”

정화가 끝난 단테 바누스는 놀랍게도 심하게 늙은 노인의 외양을 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보다 작은 체구에 주름으로 가득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또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도로 연행되었다.

웅성웅성.

바누스 영지에서 알게 모르게 제왕 같은 그들에게 수탈당하던 영지민들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하늘 위의 세상처럼 멀고 두렵게 여겨졌던 바누스 성이 일거에 사라져 버렸다.

리샤가 맨 처음에 높은 담부터 땅 아래로 묻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모든 위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염색한 흑발을 물결처럼 흩날리며 황녀는 정령들을 움직였다.

“여신께서 현신하신 것 같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우시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황녀 전하. 수많은 음해와 역경에도 그 빛나는 기상만큼은 무너지지 않으셨다고 한다. 점점 죽어 가는 상황에서조차.

“…….”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안타까움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황녀 방향을 바라본다. 그런 사람이 온 제국에 가득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나?”

누군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바깥을 다 정리한 뒤에도 안쪽으로 사라진 황녀 일행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황녀가 허공에 나타났다.

“아! 황녀 전하시다!”

단테 바누스까지 연행되었으니 이제 그녀만 무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를 반겼다.

“헉!”

그런 사람들의 눈앞에서, 황녀는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그녀 곁의 누군가가 그녀를 받아 들었다.

공기가 불안정하게 술렁였다. 혼혈 정령의 폭주는 리샤의 숨이 붙어 있어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방금 죽을 위기가 지나간 줄도 모르고 그저 황녀를 걱정하기 바빴다.

죽어 가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탄식이 제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황녀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황녀가 눈을 뜸과 동시에, 제국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에 휩싸였다.

* * *

“걱정 마, 리샤. 나는 널 절대로 죽게 놔두지 않아.”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어린 소녀의 다부진 목소리.

그것은 언니가 주는 기억도, 환청도 아니었다. ‘내’ 기억이었다.

* * *

언니의 기억에 빈 곳이 있다는 것은 늘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다.

이제, 언니의 생존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지금에야, 나는 그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몸은 집중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이 잠깐 들었을 때, 얼핏 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트로얀의…… 듣지 않…….”

“……다른 수는.”

“그러다 잘못…… 리샤?”

다니엘이 나를 부른다. 그에 답을 해 주지 못하고 나는 다시 스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인지 무엇인지 모를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했다.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잖아.’

병이 낫고, 내 영혼이 몸과 하나가 되기까지.

‘그럼 언니도 남은 시간 동안은 볼 수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왜, 피를 토해도 기억이 들어오지 않을까?

“……말한 거랑 다르잖아요.”

중얼거려 보아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나는 언니가 준 기억들을 필사적으로 되새겨 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깨어날 수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가 빈자리를 더욱 꼼꼼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이거, 이 빈자리.

“……풀어야 해.”

보여 주지 않은 일자를 살펴보자. 풀 수 있나? 풀 수 있을까?

“아니야. 풀어야 해.”

손끝에서 어느 순간부터 일렁이던 빛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왔다. 그것은 희디흰 빛이었다.

이윽고, 빈자리들이 차례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쌍둥이.”

두 소녀의 맞잡은 손을.

* * *

“혈액 보충제를 삼키지를 못하십니다!”

“이대로라면!”

록스와 리플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황녀는 울컥울컥 피를 토했다. 눈처럼 하얗게 질린 작은 얼굴 주변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젠장!”

조급해진 헤레이스가 주먹을 쥐며 외쳤다.

“야! 트로얀의 열매 이거 확실해? 다니엘 자식 제대로 만들어 낸 거 맞냐고!”

확실하다면, 왜 그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 리샤에게는 듣지 않는단 말인가!

“……헤레이스, 다니엘은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왜!”

유진의 음울한 대꾸에 더 성질이 뻗쳤다. 헤레이스를 말리며 카인이 말했다.

“……어떤 병이든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에는, 전제 조건이 있는데.”

“뭘 또 조건까지 있어!”

“영혼.”

카인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차마 리샤를 바라보지 못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기록을 보니, 리샤 님의 영혼 상태는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러 계시더군.”

이 상태라면 어떤 약이든 소용없는 것이다.

‘라파엘리스에 걸린 것뿐이었다면 트로얀의 열매로 해결되었을 텐데.’

생을 이어 갈 최소한의 영혼 상태가 충족되지 않아서…….

“이게 뭐야! 뭐 이렇게……!”

헤레이스가 성질을 냈다. 그러나 그 거친 목소리와 달리 표정에는 불안만이 가득했다.

“지금, 이 말은 말입니다, 헤레이스.”

그때 카인의 설명을 말없이 듣던 유진이 어딘가 떨리는 목소리로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라파엘리스가 주는 고통, 그 이상의 고통에…….”

헤레이스가 입을 꾹 다물고 유진을 떨리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시달리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주, 아주 많이 어릴 때부터요.”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였으나 지금 여기서 유진의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록스와 리플리를 돕던 아린과 리니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리샤의 피를 닦아 주는 그네들의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비켜요.”

무거운 침묵을 가른 것은 다니엘이었다. 잠시 사라졌다가 어느새 나타난 그가 흠칫 놀라는 사람들을 헤치고 리샤의 주변에 무언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건…….”

헤레이스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인공 정령의 핵들이죠. 일시적으로 국한된 곳의 시간을 멈출 수 있어요.”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 담긴 바는 컸다. 인공 정령의 핵은 그 정령의 심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잃으면 인공 정령은 생명력을 잃는다. 진짜 정령의 기운이 담긴 것이기도 했고, 큰 정령 마법을 탁월한 수준으로 발휘하게 해 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거 네 거 아니야?”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져온 것들에서 그의 기운만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난 안 죽어요.”

다니엘이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혼혈 정령이기에 인공정령의 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 그건 알지. 너 이거…….”

다른 이들은 몰라도 헤레이스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쓰는 힘 중에도 인공정령의 힘이 있으니까.

이 핵들에는 다니엘의 힘의 근원들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다니엘은 제 수명을 나눠 담은 셈이었다.

“리샤에게는.”

더 말을 이으려는 헤레이스에게 다니엘이 말했다.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에요.”

헤레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유진과 카인,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다니엘을 지켜보았다.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고, 푸르고, 붉은 빛들은 전부 서글픈 잿빛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하루가 꼬박 걸려 다니엘은 정령 마법을 완성했다. 리샤의 신체 시간을 멈추는 것으로 일단 시간을 번 것이다.

“찾아낼 겁니다. 방법을.”

의식이 끝난 뒤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야 할 거야.”

답한 이는 언제부턴가 문가에 기대서서 안쪽을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였다.

“무조건, 살린다.”

그는 누이를 이렇게 잃을 생각이 없었다. 그도, 여기 없는 이들도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니엘 옆에 서서 리샤를 바라보았다.

“누이.”

말을 걸어 보아도 누이는 밝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바누스가의 기록물들.’

그대로 황태자는 말을 잇지 않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누이.’

처음엔 가일 후작과 함께 빠르게 정리하려고 했었지만 지금 그곳의 기록물들은 황태자 혼자서 확인하고 있었다. 범인은 알아볼 수 없게 기록되어 있는 그것들에, 극비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녀들이라고 해야겠지.

‘어떤 일을 겪은 것인지.’

그로서도 한동안 황망함에 잠겨 있었을 정도의 일이었다.

‘누이.’

아마도, 그의 앞에 있는 누이는 또 다른 누이일 거라는 것.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이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로지 누이들에게만 이 비밀을 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서 깨어나서, 이야기를 하자. 그 어떤 의도도 없다. 그저 그는 무엇이든,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저도 모르게 망연한 눈길로 누이의 새하얀 얼굴을 보다가 라빌로프가 몸을 돌렸다.

“도울 것이 있으면 지체 없이 말하도록.”

그리고 그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상태의 다니엘을 불렀다.

“자네는 날 따라와. 줄 것이 있으니.”

바누스가의 연구. 필요하다면 그 결과물을 이용해서라도 리샤를 살릴 것이다. 그러나 신중해야 했다.

그 결과, 라빌로프는 다니엘 한 사람과만 연구 일지를 공유하고 연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 판단은 옳았다.

* * *

르페르샤 황녀는 커다란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긴.]

새어 나온 소리는 벽 너머로는 닿지 못했다. 벽 너머, 웅크리고 앉아서 저를 부르는 아이에게.

[……하고자 하면 다가갈 수 있지만.]

그녀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1년 걸릴 일을 정령왕들까지 동원해서 단축을 시켰으니.]

본래는 그녀의 영혼으로 저 아이의 빈자리를 메울 생각이었는데, 복수를 한다고 하더니 자기 영혼 조각을 알아서 되찾았다. 되찾아서 자기 일기장에 봉인해 둔 것은 어이가 없었지만.

[멍청하게도, 찾았으면 바로 합칠 것이지.]

그러나 그리 한 이유가 그녀임을 알아서.

[…….]

르페르샤는 픽 웃고 말았다.

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유리벽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많이 흐려진 손. 그 손끝이 아이의 실루엣을 따라 다정하게 움직였다.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이리 볼 날이. 그녀는 그래서 한번 불러 보았다.

[알리샤.]

수없이 많은 회귀 끝에, 겨우 찾은 제 ‘동생’의 이름을.

* * *

언제나 함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애는 잘 웃는 아이였다.

아주 어릴 적에 함께 잠자리에 들 때면 마주 보고 누운 채 이유 없이 깔깔거리고는 했다. 왜 웃느냐고 물으면 그냥 좋다고 답하고는 하던. 그 실없던 아이가. ……늘 그리웠다.

“언니! 언니, 또 언제 와?”

“네가 건강해지면.”

알리샤.

동생은 그녀와 많이 달랐다. 그녀와 달리 알리샤는 천진했고, 감정 변화의 폭이 큰 편이었다. 영특한 편이었지만 르페르샤와는 조금 다른 방면이 특기였고, 결정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럼 한참 뒤에 보겠네.”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르페르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아이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본다면 르페르샤가 귀찮아한다고 여길 만한 모습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르페르샤는 알리샤를 사랑했다.

“금방 볼 거다.”

서툰 손길이 느릿하게 알리샤의 정수리에 닿았다. 고양이처럼 눈을 반쯤 감고 그 손길을 받아들인 알리샤가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그리고 서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냐. 오래 걸릴 거야…….”

“알리샤.”

“그래도 괜찮아.”

아이는 늘 쉽게 시무룩해지고, 또 쉽게 괜찮아지고는 했다.

“리샤 언니.”

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아이를 한 번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르페르샤는 어디를 가든 멈춰 서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는 아이였지만, 알리샤를 외가에 두고 나올 때만큼은 달랐다. 한 번쯤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어릴 때의 그들은 그랬다.

“…….”

막 말이 텄을 때 어머니 없이 자라던 아이들을 찾아온 외가의 사람들.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그들을 아이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알리샤가 몸이 많이 약했기 때문이다.

르페르샤는 건강했고 누구의 도움 없어도 살 수 있었지만 알리샤는 달랐기에. 황실의 기본적인 지원만으로는 부족했다. 한 사람분의 지원만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갇혀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리샤. 건강해지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건강해지도록 도와준다고 했었다. 외가는 르페르샤도 간간히 챙겨 주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매년.

결국 르페르샤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1년? 아니면, 3년쯤?’

어리석게도, 믿어 버렸다.

‘……다 나으면,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될 테지.’

르페르샤는 무심하게, 그러나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리샤에게 많이 가르쳐 주고 이야기도 해 줘야지.’

그래서 책을 읽었다. 무작위로 읽지는 않았다. 르페르샤가 받는 선물을 알리샤도 똑같이 받는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하나뿐인 형제를,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사랑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했을 텐데.”

“생각보다 알리샤 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기계적인 말투로 외가의 수족이 답했다.

르페르샤가 알리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고 있었다. 그렇다고 알리샤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지?”

르페르샤가 참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을 열었다 해도, 믿게 되었다고 해도. 결국 그녀에게 가족은 알리샤뿐이었다. 따져야 했다.

“르페르샤 황녀 전하.”

그들은 알리샤에게는 전하를 붙이지 않는다.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과한 의심은 의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무슨 말이지? 나는 정당한 질문을 했다. 당장 알리샤를 내 앞에 보여.”

“곤란하군요. 현재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알리샤를 만날 수 없다. 그래도 딱 한 번. 한 번은 넘어갔다.

“……다음에 다시 오지.”

생각보다 르페르샤는 그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어쩌면 가족이라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아이였으니까.

그해에 강아지를 받고서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우리’의 애칭을 붙여 주었다.

“리샤.”

사랑스럽고 천진한 작은 강아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아지가 그리 어여뻐 보였던 것은. 외로워서였을까. 그리워서였을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알리샤는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왜 이런 것을 당하고 있어.”

결국 참지 못하고 숨어들어 발견한 사실. 알리샤는 힘도, 영혼도 전부 빼앗기고 있었다.

“그 괴물에게……!”

왜 너를 빼앗기고 있는 거지. 그러나 직접 물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그 아이가 그녀를 만날 때는 언제나처럼 새하얗게 웃고 있어서.

“언니, 오늘은 오래 있네?”

“……그래.”

“헤헤. 좋다.”

방실 웃으며 르페르샤를 끌어안는 아이는, 너무 작고 말라 있었다.

떨리는 숨을 뱉자 아이가 의아하게 르페르샤를 보았다. 맑은 보랏빛 눈에 금세 걱정이 어린다. 르페르샤는 부러 웃는 시늉을 했다.

“언니?”

알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파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지금 웃은 거야?”

놀리듯 신나게 웃는 것을 가볍게 흘겨 주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알리샤를 빼낼 힘이 없었다. 허물어지는 표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토록 막막한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했다. 르페르샤가 쉽게 숨어들 수 있었던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잘 가, 언니.”

알리샤는 한참을 웃고 떠든 뒤에 손을 흔들었다. 또 언제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말갛게 웃으며 조심해서 가라고 했을 뿐. 그 후로 르페르샤는 알리샤를 보지 못했다.

참을 수 없어 그들에게 갔다. 르페르샤가 외가를 방문할 때는 엠마가 리시안 바누스의 허락을 가장하며 도와주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한 사실을 잊고는 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들까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되었지?’

자매가 꿈꿔 온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큰 것을 꿈꿀 수 없었다. 그저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어쩌면, 나이가 들어 힘이 생기면. 인적이 드문 어느 평화로운 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고 싶었다. 굉장히 어릴 때부터 둘은 그런 것을 그림으로 그리며 마주 보고 웃고는 했었다.

겨우 그것을 바랐었다. 그게 이리 어려울 필요는 없지 않나? 왜.

“돌아가시지요.”

“…….”

르페르샤는 그들에게, 결국 자신을 팔았다. 그녀는 매우 영특했으나, 황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울 리가 없었으니까.

르페르샤 황녀는 악녀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황제라고 다르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선택을 하지. 그러니.”

그들이 알리샤만을 건드린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 나름대로는 황족을 건드렸다는 화살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금방 죽을 것 같은 알리샤만 있으면 르페르샤는 아쉬운 대로 놔두어도 좋다고.

“그 아이에게 하는 것의 절반은 내게로 돌려.”

어리석은 결정이라는 것을, 르페르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대체 그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르페르샤는 그때 자신이 그 외에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르페르샤에게는 라파엘리스의 실험이 배분되었다.

‘살아 있어.’

그래도 그 결정을 한 덕에 겨우 그 아이를 만났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아이를. 그래도, 살아 있는 아이를.

‘집에 가자, 알리샤.’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 말을, 르페르샤는 끝내 하지 못했다.

르페르샤는 그렇게 시작된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그녀의 선택과 그 후의 무수한 일들을.

[어머니의 막을 내 힘으로 거둔 것도 그 무렵이었지.]

그 막에 어머니의 기억과 어머니의 파편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르페르샤가 영혼을 조각내어 사용하는 마법을 할 수 있게 했다.

[대체 왜 그것들만 남기셨을까.]

알고 있다. 그들의 어머니인 리시안 바누스도 결국 혼자 해결하는 길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감추고, 힘을 남기는 것에 그쳤다는 것을.

[…….]

18살이 되었을 때까지, 알리샤는 살아 있었다. 알리샤를 그만큼 살려 놓은 것은 르페르샤였다.

어머니가 남긴 힘으로 아이의 영혼을 붙들었다. 영혼의 푸른 힘은 사용처가 무궁무진했으니까. 적어도 르페르샤가 어머니의 힘으로 알리샤를 붙들어 놓는 한, 알리샤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조금 더 버틸 거라고 해야 하나.’

어머니의 일기 같은 기억과 그녀의 힘을 흡수한 뒤에 르페르샤는 알게 되었다. 알리샤의 영혼이 이미 많이 조각나 있다는 것을.

‘타의에 의해서.’

얼마 안 남은 조각마저 빼앗기면 알리샤의 영혼을 붙들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몸도…… 너무 상했어.”

알리샤와 르페르샤의 외모는 거의 같았지만 하나는 완전히 달랐다. 머리색만은, 가진 능력의 영향을 받아서 달랐던 것이다. 르페르샤의 머리는 백금발이었지만, 알리샤의 머리는 흑발이었다.

“헤헤. 난 언니랑 비슷해져서…… 괜찮은 거 같아.”

“……실없는 소리를.”

알리샤의 흑발이 뿌옇게 빛바랜 회색이 되어 있었다.

“은발이라고 해 주지. 너무해!”

“아닌 건 아닌 거야.”

“힝. 언니님. 나한테 상냥하게 좀 대해 줘!”

나이가 들어도, 아주 가끔 만날 때 알리샤는 그 어릴 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성격을 보여 주었다. 반쯤은 꾸며 낸 것이기 때문이리라. 어느새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까. 타박하면서도 르페르샤는 받아 준다. 그러면서도 살핀다. 죽어 가는 동생을.

어느 날, 그러니까…… 알리샤가 대화 중에 코피를 후둑 쏟았을 때였을 것이다.

“억. 이건 언니, 사실 언니의 미모가 너무 찬란해서 나온 거야!”

“…….”

“사실 자주 보면 내 코가 버티질 못할지도 모르지! 어휴.”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졌다. 르페르샤는 가까스로 뜨거운 무언가를 참아 내고서 타박했다.

“웃기는 소리.”

“언니를 웃기다니. 나도 많이 발전했구나. 몹시 뿌듯한걸.”

“씻고 오기나 해, 알리샤.”

“네네!”

그날, 르페르샤는 알리샤의 영혼을 잡고 있던 힘을 거두었다. 그녀는 알리샤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어 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제는 그녀도 전처럼 건강하지 못해서, 전처럼 단단하게 잡아 줄 수 없었지만.

“괜찮아, 알리샤.”

괜찮을 거야. 우리 알리샤. 그런 말을 끊임없이 되뇌며.

“무섭지 않을 거야.”

보내 주었다. 먼 곳으로.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조각내었다. 그것은 죽은 어머니의 힘보다 훨씬 강력했다. 알리샤를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게 해 준 그 순간을 바누스가에 들켰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르페르샤는 처음으로 그들을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가 울었다. 우는 법을 몰라 알리샤를 떠올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아이도 도무지 울지 않는 아이였다. 늘 웃으면서, 아무 근심이 없는 것처럼. 세상이 아름다운 것처럼.

“알고, 있어.”

……르페르샤의 세상이 아름답기를 바라서, 그래서 그 아이가 그리 웃어 주었다는 것을.

“내가, 알아. 알리샤.”

나도 그랬다. 나도 네가 조금은 편안하기를 바라서 퉁명스럽게 대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대했다.

그리 대할 때 안심하는 네가 때로는 밉기도 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르페르샤는 속울음을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 알리샤는 소설의 원작으로 알고 있을 그 시간을 지낸 뒤, 차가운 감옥에 갇힐 때까지.

그렇게 처음, 악녀로 죽었을 때. 르페르샤는 생전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미쳤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동생을 한번 보고 오자고.

그 때, 알리샤를 보냈던 날, 르페르샤는 영혼의 조각을 하나 떼어, 책을 만들었었다. 그 책은 알리샤와 르페르샤가 서로를 언제든 볼 수 있는 통로이자, 알리샤를 그쪽 세상에 붙들어둘 수 있는 매개체였다. 알리샤는 꿈에서나 르페르샤를 보고 잊게 되겠지만.

서로의 책에는 상대의 인생이 담긴다. 다만 르페르샤는 알리샤가 이쪽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알리샤의 책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시점으로 기록이 되도록 만들었었다.

[아리엘 랭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사랑받던 그 소녀의 시점으로. 때로는 르페르샤에게 대책 없이 천진하게 굴던 그리운 동생을 떠올리게 했던 소녀. ……그래서 참 싫었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죽일 각오로 달려들 수는 없었던.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다시 태어나서도, 가볍게 굴고, 그러는구나.]

살아서는 한 번도 그 책을 펴보지 않았다. 죽은 뒤에야,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르페르샤는 알리샤의 생을 들여다보았다.

살아가는 아이가 보였다.

[여전히, 정도 많고.]

그녀의 무덤에 핀 바람꽃을 바누스가에서 집어 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가에 앉아 그녀는 한동안 알리샤의 새 인생을 지켜보며 지냈다. 알리샤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 지내는 건가.]

한 가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가족들은 너를 사랑하고 화목한데, 어째서.]

이상하게도, 알리샤는 때로 매우 먼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는 했다. 마치 꿈에서 본 것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들 은연중 네가 초연한 얼굴로 어딘가를 보는 것을 무서워했다.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데도 그런 알리샤를 보니 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 하염없이 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회귀를 결정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저게 무슨.]

그녀는 사람의 운명을 단편적으로나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눈에, 알리샤의 불행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알리샤는 곧 강도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잊힌다. 그제야 르페르샤는 깨달았다. 알리샤는 저기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도에게 죽을 날이 멀지 않았잖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알리샤.]

르페르샤는 움직였다.

* * *

유리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르페르샤는 다소 놀란 눈으로 무너지는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언니?”

[……너. 어떻게.]

“정령왕들이 도와줬어요. ‘나를 닮은 영혼’을 찾아달라고 했거든요.”

르페르샤는 제 주위에 몰려 있는 정령의 기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깐. 나를, 닮은?

[너.]

“단서가 이렇게 많았는데 아직도 몰랐을까 봐요? 그런데 언니.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따가 이야기하기로 해요. 더 급한 게 있잖아요?”

르페르샤는 말문이 막혔다. 배시시 웃으며 ‘알리샤’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범위는 끝난 것 같아서요.”

[허…….]

르페르샤는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헤실헤실 웃는 알리샤는 그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리샤는 몰랐을 것이다. 르페르샤와 만날 때, 알리샤의 모습은 스스로의 생각과 달리 흑발이었다는 것을.

‘무심코 넘겼겠지. 익숙해서.’

그대로 건강하게 자랐다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언니, 지금 제가 언니 생각이 다 들리거든요.”

[뭐?]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르페르샤가 되물었다. 불쾌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지그시 노려보는데 알리샤는 그저 좋다고 웃기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뭘.]

“내가 강도로 죽을 운명이었다면서요. 그래서 뭘 했냐고요.”

착각일까. 알리샤의 이마에 살짝 혈관이 불거진 것 같았다.

찝찝한 얼굴로 알리샤의 기색을 살피며 르페르샤가 느릿하게 답했다.

[불러들였지.]

“제가요, 언니,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착각이 아니었구나. 상냥하지만 확실히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어릴 때는 르페르샤에게 화 한 번 낸 적이 없었는데.

르페르샤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 일기장에 제 조각만 챙기지 않은 거 아시죠?”

[……?]

“언니 것도 챙겼거든요.”

언니 영혼을 구하면 그냥 둘 다 죽는다고 했는데도.

“제가 같이 죽는 미친 짓 하기 전에, 자세히 말해 주세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알리샤가 말했다.

르페르샤는 황당해졌다가 어이가 없어졌다.

“자꾸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네?”

[그건.]

“하나 더. 언니는 알고 있죠? 둘 다 사는 방법을. 그것도 말해주세요.”

[……대체 왜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거지?]

“그런 거 모른다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진짜 아는가보네요.”

그리고 종내에는 왜인지, 조금 웃고 말았다. 알리샤의 은근히 편해진 말투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자신은 곧 사라질 것이다. ‘르페르샤’로서의 생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소멸까지는 아니지만.’

문득, 열 받는다며 영혼의 책을 북북 찢어버렸던 알리샤를 떠올렸다. 덕분에 동생을 여기로 불러들일 수 있었지.

‘게다가, 나는 악녀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웬걸. 덕질이라고 했나? 아무튼 그런 예측 못한 호감을 잔뜩 보여 주었었다. 그것이 르페르샤에게 한 줌 남아 있던 삶에 대한 앙금을 씻어 주었었다.

‘그래, 한 번쯤은.’

말해 주어도 좋을 것이다. 네가 내 인생에 얼마나 큰 빛이었는지.

[하.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윽고 정령왕들을 일별하고서, 르페르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부분은 이미 해결되었다.]

* * *

“……이미 해결되었다고요?”

그러니까, 둘 다 사는 것 말하는 것 맞지? ……어라?

멍하니 묻자 언니가 조금 묘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요?”

[……정령은, 비틀린 것을 바로잡는 힘이 있지.]

나는 말끄러미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사실 지금 내가 상황에 확실하게 적응을 한 상태는 아니었다. 언니와 내가 쌍둥이였다든가, 그러니 내가 원래 이곳의 사람이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기억이 완벽한 것도 아니니.’

편안하게 받아들일 일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내 혼란은 잠시 뒤로 미뤄 두는 것이다. 우선은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정령들이라면, 저한테 깃든 정령왕 분들 말하시는 거죠?”

[그래.]

“저한테 깃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그분들이 뭘 어떻게 해결하신 거예요?”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조르듯 물었다.

“오히려 지금 언니가 너무 흐릿해서, 그분들 때문에 언니가 사라지는 건가 싶어서 불안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언니?”

날 가만히 보던 언니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내가 말을 멈추자, 그제야 그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모습은 어머니의 힘으로 유지하고 있던 것이니, 흐릿해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

어머니. 어딘가 낯선 단어였다.

[본래는 형체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흐릿해지기만 한 것은 정령왕들 덕분이지.]

나는 언니를 보다가 언니의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일곱 정령의 기운이 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니를 찾아 달라고 했을 때 바로 찾아낸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미 보호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왜?

[본래는, 네가 기억을 다 찾으면 소멸될 예정이었다.]

“……소멸이요?”

믿을 수 없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니, 그, 저를 위해서 평생 살았다면서요. 그런데…….”

도저히 평소처럼 말이 나가지 않는다. 나는 언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놓고 아예, 소멸할 작정이었다고요?”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언니 말만 믿고 1년을 그냥 보냈다면.

“…….”

끔찍한 기분에 망연히 보고 있는데 문득 머리에 손이 닿았다. 언니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쓸어 주는 것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한참을 날 물끄러미 보던 언니가 무언가 망설이는 얼굴을 했다.

[그랬지.]

그러더니 꽤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서툴게 말했다.

[……미안하다.]

그제야 숨이 거칠게 쉬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언니를 덕질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모든 것을 잊은 채로도, 언니를 알아본 것이었구나, 하고.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내가 언니의 생각을 들은 것처럼 언니도 지금 내 생각을 듣는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언니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상태인데요?”

[소멸하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지.]

“그렇구나…….”

결국 지금 나와 직접 마주칠 수는 없는 것이구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은 무슨!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군?]

“아니에요. 잘되었네요. 그냥 좀 억울해서요. ……복수도 했는데, 남는 건 없네요.”

[흐음.]

문득 언니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꽤 시원해 보이는 미소였다.

“……언니?”

[나라면 못했을 거야.]

“네?”

[그런 복수는 생각도 못 했거든.]

그러더니 언니가 느릿하게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살짝 맞대었다.

[역시 내 동생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울음이 갑자기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 보는 언니의 시선이 부드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생이라 불러 준 것 때문일까.

이상할 정도로 온화하고, 애정이 어린 친근한 시선이었다. 언니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다가 그제야 실감했던 것 같다. 내가 언니 동생이라고.

언니가 생각한 것들 말고는 우리 사이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 눈가를 쓸어 주는 손길은 어딘가 익숙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눈물이 많아졌구나.]

나는 말없이 언니를 부둥켜안았다.

* * *

황녀궁은 가라앉아 있었다. 벌써 한 달째 르페르샤 황녀가 깨어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단테 바누스가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비엔 경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니, 당장 그 인간을 처리해 버리는 게 어떨까, 요정님?”

아리엘이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리엘은 리샤의 안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살벌해지고는 했다. 그런 아리엘의 모습에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빌로프가 답했다.

“뽑아낼 것도 더 없으니 그래도 되겠지. 그럴까, 아리엘?”

“응!”

라빌로프가 칼을 슬쩍 빼어 들었다. 가일 후작이 둘을 보다가 익숙한 동작으로 위장약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리샤 님의 몫입니다.”

유진이 못 말리는 황태자 커플을 저지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수척해져 있었다.

“……깨어나시면, 말입니다.”

“오래도 자네.”

헤레이스가 유진의 어깨를 한 번 툭 친 뒤 불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저 말없이 리샤를 눈에 담았다.

‘트로얀의 열매가 통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다니엘은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된 거지?’

그는 힐끔 황태자 쪽을 보았다.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라빌로프와 눈이 마주쳤다. 라빌로프가 냉랭한 시선으로 묻고 있었다. 무언가 알아냈느냐고.

다니엘은 그가 며칠 전 공유해 준 문서들을 떠올렸다.

‘바누스가의 연구 일지. 그것은…….’

결론은 내려졌다. 빠짐없이 수거했는데도 문서들에는 겉핥기식의 정보만 가득했다. 무언가 빠진 정보들.

“뭔가, 놓쳤군.”

작게 중얼거린 소리였지만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진지하게 다니엘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다니엘이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 경?”

아리엘과 함께 병문안을 온 소피아 영애가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뭔가 알아냈나?”

“글쎄요.”

만고의 만병통치약도 통하지 않는 상태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문제는.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알아볼 것?”

“황태자 전하. 그 서류들, 공개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라빌로프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서류가 의미하는 것을 알아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시는 겁니까?”

리샤가 겪은 실험들에 대해서 말이다. 카인이 묻자 라빌로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으로 하지.”

다니엘은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한데, 알아볼 것이라니?”

라빌로프가 살짝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묻자 다니엘이 말했다.

“트로얀의 열매를 찾아내는 데에는 네 가지가 주요한 역할을 했죠. 희귀한 빛과 어둠의 마나, 정령력 그리고…….”

‘병자’의 영혼.

“영혼? 그것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다니엘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그걸 알아보러 가는 거예요.”

그 무언가에 신경을 빼앗긴 것 같은 어조에 다들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

‘뭔가, 알아낸 것 같기는 한데.’

다니엘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이들 중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제 모두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저 암살 길드장 정도가 아니었다. 절대 현실에 나타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트로얀의 열매를 재현해 낸 사람이다.

‘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번졌다. 다니엘은 그런 시선들에는 신경을 끄고서 그대로 몸을 숙여 리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느릿하고도, 정중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더없이 애틋한.

“다녀올게요, 리샤.”

못마땅하게 꿈틀대는 황태자의 살기를 깔끔하게 무시하고서 다니엘의 신영이 사라졌다.

* * *

멍하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언니가 말했다.

[그가 움직이는구나.]

“……?”

의아하게 바라보자 언니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요?”

[다니엘 로바인.]

어딘가 못마땅한 어조였다. 그 표정 위로 순간 오라버니가 겹쳐져서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뭐?

……다니엘!

“단이 뭘 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나 지금 현실에서는 정신을 잃은 상태겠구나.

[글쎄.]

언니가 묘한 어조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제 지켜봐야지. ……이곳까지 이르는지.]

우리 동생을 위해, 제대로 정답에 이르는지.

“네? 방금 잘 안 들렸어요.”

[아무것도.]

나직하게 말하며 언니가 내 머리를 몇 번 토닥여 주었다. 한쪽 입꼬리를 심술궂게 비죽 올린 채로.

* * *

다니엘은 속도를 높였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옛 로바인 왕국의 터. 그는 그곳에 리샤의 일기장을 들고 가고 있었다.

“젠.”

리샤가 쓰러진 후부터 젠은 답이 없었다. 아니. 아예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착각일까?’

그는 잠시 리샤의 일기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럴 리 없지.’

어마어마하게 깃들었던 정령왕들의 기운들까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대장님.”

부하의 부름에 다니엘이 무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부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장의 상태가…….’

마치 폭풍 전야 같았다.

다니엘 로바인은 마지막 혼혈 정령이다. 인간과 정령이 섞인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과정들을 지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들을 지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부터가, 괴물이라는 의미였다.

‘괴물이라 여기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로바인의 마지막 왕족. 그들의 유일한 주군인 동시에 다니엘은 이 무리의 대장이요, 소중한 가족이었다.

“꼭,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까?”

그래서 부하는 다니엘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불타 버린 땅입니다.”

영생을 바란 바누스가와 달리 로바인 왕국은 인간 모두를 위해 그 모든 실험을 했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든 부하가 생각하기에 바누스와 로바인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들이었다.

“……가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겠습니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 그들이 사랑했던 그러나 딱 그만큼 증오했던 모국은, 그런 곳이었다.

‘특히, 대장님에게는.’

인공 정령의 선택을 받기 위해 훈련을 하거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거나 했던 무리의 사람들과도 다르다. 다니엘 로바인은 아직도 그곳에 대해 꿈을 꾼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악몽일 것이었다.

“저희끼리 다녀오는 방법도 있고요, 대장.”

다른 부하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리는 르페르샤 황녀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황녀와 다니엘이 운명처럼 가까워진 것을 보았다.

‘그분을 사랑하신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던 그들의 대장이.

르페르샤 황녀는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장을 해치면서까지 그녀를 위할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다니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미소만 보아도 거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전부터 참 고집이 센 분이라니까.”

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니엘 들으라는 것이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

다니엘이 골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애초에 병이 든 영혼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상황이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르페르샤의 영혼에 생긴 문제가……. 지금껏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방향이라는 말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그는 겉핥기식으로 남겨져 있었던 바누스가의 문서들을 떠올렸다.

‘내게 귀한 사람은, 아마도…….’

확인이 필요하다.

“리샤의 머리색 말이에요.”

한참을 허공을 가르며 전진하다가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부하들이 귀를 기울였다.

“네, 대장.”

“염색이 빠지지 않고 있죠?”

황녀 전하가 깨어나지 못하신다는 사실에 가려져서 많이 퍼지지는 않은 사실이었다.

“그렇죠. 신기한 일입니다, 대장.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신기한 일이죠.”

르페르샤 황녀는 바누스가를 무찌를 때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염색이 이상하게도 그 후로 빠지지 않고 있었다.

“변함없이, 검은색이라.”

새로 나는 머리마저 검은색이다. 슬슬 다른 사람들도 그 이상을 눈치챌 때가 되었다.

“깨어나시면 당황하실 수 있으니 백금색으로 다시 물들여 놓을까요?”

부하가 고민하다가 물었다. 다니엘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네?”

리샤를 위한 배려에 필요 없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부하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머리색은.”

힐끔 본 다니엘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때로는, 타고난 마력의 영향을 받아 색이 변하기도 하죠.”

그러니 필요 없다.

“이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니 다들 지금 할 일에만 집중하세요.”

“……네!”

다정한 어조는 리샤 곁의 사람들과 달리 조금 개운하게까지 느껴졌다. 부하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렁차게 답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니엘이 왜요?”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그 일이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설명해 달라고 했던가? 해 주지. 아주 자세하게.]

위험하지 않다고 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강도로 죽을 운명이라 다시 불러들였지. 매개는 책이었다.]

“설마, 그 원작이요?”

[그래. 정확히는…….]

“음. 네. 진짜 있었던 일이죠.”

[그 책은 너와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널 그곳에 붙들어 두는 힘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런데 찢어졌지.]

본래 이곳의 영혼이기에 그런 매개물이 필요했다고 한다.

“아, 너무 결말이 짜증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덕분에 이쪽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니 말했다.

“좋아요.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건 그러려니 할게요.”

언니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요? 그 대가가 뭐였어요? 그냥 불러올 수 있었다고 하지 말고요.”

[그야 내 영혼의 힘이었지. 나는 시간도 돌렸고, 영혼을 차원 이동시키는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 소멸하는 것이 마땅했고.]

“……왕님들 감사합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납죽 숙여 정령왕들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 그런 게 가능하다니 거의 신 아니에요?”

우리 언니, 진짜 여신이네! 내 생각을 들었는지 언니가 나를 차게 식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힝.

[……영혼의 힘은 본래 이렇게 쓸 수 없는 힘이야.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그렇군요.”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최대한 적응하려 애썼다.

이어지는 대화는 소소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언니의 일이 최선의 방향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나는 어렵사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옆에 앉아 있는 언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있잖아요. 언니.”

[눈치가 빠르군. 나쁘지 않아…….]

“네?”

[하지만 여기까지 닿을 수 있을지.]

무언가 묘한 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제 궁금한 것이 생겼어?]

의아했지만 나는 일단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그럼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없는 거네요?”

[……뭐?]

지금 몇 달이 지났더라? 언제나처럼 나는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했다.

언니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잉, 그럼 뭐가 중요해요?”

[글쎄. 예를 들면.]

언니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참 지났는데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라든가.]

“아하.”

[……기억의 빈자리들이라든가.]

“오, 그건 묻고 싶기는 하네요.”

[그런데 왜 묻지 않지?]

“언니가 말하고 싶으면 말해요.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요. 우리 뭐든 하자는 거예요.”

추억! 추억을 만들어요, 언니!

[지금, 나와 놀자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언니가 물었다. 흡사 괴상한 생물을 목도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거죠!”

배시시 웃으며 손뼉을 쳤다. 언니와의 시간은 이제 더더욱 얼마 남지 않았는걸.

‘여기에 한참 있는 것에 대해선 짐작 가는 부분도 있고.’

언니가 말한 정령의 영혼 정화 말이다.

‘정화가 다 끝났다고 하지는 않았지.’

아주 조금씩 흐려졌던 언니의 몸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건 지금 복구가 되는 중이라는 말 아닐까?

‘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줘야지.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기억 부분은 차차 물어보면 될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넉살만 배워 왔구나.]

한숨 어린 언니의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다니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어딘가로 떠난 사이, 황태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바누스가를 직접 수색하며 놓친 것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말이 점검이지, 사실은 남은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과격한 수색이었다. 그리고 결국 발견했다.

“이건.”

단테가 끝까지 실토하지 않은 것들. 그것은…….

“……알리샤라고.”

처음 찾아냈던 서류들은 대부분 르페르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것도 끔찍했고,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했었으나. 그러나 지금 찾아낸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었다.

“헉, 큭, 전하!”

“전하, 진정하십시오.”

가일 후작의 만류에도 라빌로프는 살기 어린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알리샤. 그것은 최근에 이름만 알게 된 또 다른 동생의 이름이었다.

이 서류들의 중심에는 알리샤가 있었다. 알리샤…… 그 아이가 당했던 실험들이.

“하.”

이름밖에 모르는 동생인데, 그 아이가 당한 일들에 설명할 수 없는 분기가 치밀었다.

그래, 어쩌면. 그 아이가 겪은 일들의 이면에서, 르페르샤와 알리샤가 어떻게 서로를 위했는지가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라빌로프는 그들의 오라버니였으므로.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아귀힘에 서류가 구깃구깃해졌다.

“…….”

그는 주변을 모조리 물리고, 보통 사람은 들어올 수도 없는 깊이의 지하에서 발견한 서류들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몇 번이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어린 알리샤가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리샤의 영혼을 한 주먹씩 삼키며 단테가 환희에 찼던 것. 그리고.

“그래서 밖에는 르페르샤의 일지들만 있었던 거군.”

어딘가 시간대가 너무 비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최근 문서였던 것이다.

“……알리샤가, 르페르샤의 눈앞에서 죽었다고.”

르페르샤가 알리샤를 죽였다는 기록은 걸러 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물만 살펴봐도 르페르샤와 알리샤는 끈끈했다. 그러니, 알리샤를 죽인 것은.

“이…….”

‘동생’이라는 존재가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동생들은…… 하나는 이미 죽었고, 하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자료들을 손수 거두었다.

‘아버지.’

그러려니 하고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 그가 다소 황제를 막 대하기도 하는 것 또한 사랑받는 자의 특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이 이토록 고통을 받았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는 황제를 떠올렸다.

‘그런데.’

왠지 떨리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도 이들의 고통에 일조했다는 것.

라빌로프의 섬뜩한 표정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더는 무언가를 부수지 못하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모든 서류들은 라빌로프와 가일 후작의 손에 정리되어 황제에게로 향했다. 정리를 했음에도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황제는 만사를 제쳐 두고 모조리 읽었다.

“이, 이게…….”

차마 사실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아무도 아이들을 돌봐 주지 않아서,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살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 아이들을 이용했는지까지 너무나 상세하게 기록된 기록물 너머로…….

처절했을 아이들의 상황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한 아이의 그림이 서류 사이에 꽂혀 있었다. 거울을 보기 싫어하는 알리샤를 위해 르페르샤가 종종 그려 주었다던 알리샤의 초상화였다.

아이가 그렸다기에는 너무나 수준 높은 그 그림을, 황제가 떨리는 손으로 쓸어 보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딸아이였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구나.’

한쪽은 백금발, 한쪽은 검은 머리였던 건가. ……활짝 웃는 아이였구나.

“…….”

저기 가득한 끔찍한 실험들과 아이의 미소가 오버랩 되자, 황제는 참을 수 없어졌다. 동생의 죽음을 목도한 르페르샤를 떠올리면 피가 식었다.

“……그 아이가, 알리샤의 눈을 감겨 주었다고.”

그러고는 끔찍한 라파엘리스 실험에 이용되었다.

“리샤. 내 너를 차갑, 다고.”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사람 같지, 않다고. 배척했다.”

르페르샤가 밝아지고, 그리고 그에게 무심해진 뒤에야…… 그가 르페르샤를 돌아봤으며.

“그런데 그게 대체, 뭐가 잘못이었단 말인가.”

홀로 고통받고, 결국 죽음에 이른 뒤에야 알리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르페르샤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으리라.

“……아아.”

리샤. 그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황제는 황망한 심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 * *

다니엘은 젠이 잠들어 있음을 확신했다. 또한 정령왕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것도.

“대장님! 여기 찾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 버린 로바인의 터. 그중 수도 왕궁의 터는 가장 오랫동안 타올랐던 곳이었다.

“이게 남아 있었네요.”

그러나 절대로 타지 않을 것들이,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바누스가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이.’

다니엘은 부하가 건넨 돌을 받아 들었다. 그저 그런 돌멩이로 보이지만 정령과 연결된 이들은 느낄 수 있는 기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정령석은 전부 파괴되었다고 들었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특별하니까요.”

다니엘이 그것을 손에 쥐자 조금씩 돌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부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돌의 빛은 온갖 색이 다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온갖 빛깔들이 더 많이 새어 나오다가 종국에는 검은 일렁임으로 화했다.

‘정령은 영혼과 가장 밀접한 존재지.’

그리고 정령의 축복이 깃든 정령석은 영혼과 마주할 수 있게 해 준다. 지금은 아마도 다니엘만 알고 있을 정보였다.

‘바누스가에서는 감지도 할 수 없었을 물건이지.’

아마도 두 개 정도는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더 찾아 주세요.”

다니엘이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멀어지는 부하를 일별하고 다니엘이 돌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샤.”

그는 아주 딱 들어맞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가설이 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보고 싶어요.”

이 정령석 세 개를 전부 찾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비록 그의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그게 대수인가.

타인의 앞에서는 결코 드러내지 않아 온 짙은 그리움이 그의 눈에 깊게 어려 있었다.

* * *

리샤가 또 피를 토했다. 이제는 피를 토하는 날, 숨이 멎어 버릴까 봐 매번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다니엘 이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헤레이스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슬슬 불안감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그놈만 믿었는데.”

“2주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 헤레이스……?”

“헤레이스?”

똑같이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던 유진과 카인이 흠칫했다.

“이씨!”

헤레이스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눈가를 거칠게 훔쳤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은 면이 다분한 사이코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헤레이스가 훌쩍임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 되자 유진과 카인이 그 모습을 착잡하게 응시했다.

“이게 다 뭐야. 막 화가 나는데…… 이상해.”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웅얼거리는 헤레이스에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황궁 전체가, 아니 나라 전체가 황녀의 완쾌를 기원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운의 황녀에 대해서도.’

카인의 낯이 흐려졌다.

얼마 전, 황실이 알리샤 황녀에 대해 공표했다. 그녀가 존재했음을. 그리고 덧없이 졌음을.

‘그, 슬픔을, 당신은 홀로 견디며 사셨습니까.’

리샤를 보며 유진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검인데.”

허한 어조로.

“……이리 누워만 계시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리샤 님.”

헤레이스의 킁킁거리는 훌쩍임과 카인의 말없는 탄식이 이어졌다.

“이런, 헤레이스.”

그때였다.

“우는 거예요?”

살살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멈칫한 세 사람이 이상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울지 마세요.”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다니엘이 서 있었다. 그는 헤레이스를 한 번 본 뒤 부드러운 눈길로 리샤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이제 괜찮을 테니.”

“너! 뭐야!”

헤레이스가 언제 울었냐는 듯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데!”

“미안해요.”

다정한 얼굴로 다니엘이 응수했다. 그는 손에 든 세 개의 돌을 리샤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뭐 하는 겁니까?”

“그건 뭐지?”

유진의 의문과 카인의 의심쩍은 물음에 다니엘은 그저 지켜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묘하게 떠나기 전보다 여유로워진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선사해서 세 사람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검은 빛이 돌에서 짙게 새어 나오고, 그 세 빛줄기가 다니엘에게로 향한 순간에.

풀썩.

“……!”

다니엘의 몸이 허물어졌기 때문이었다. 리샤의 한쪽 손을 단단하게 쥐고서.

* * *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언니가 들어 주는 쪽이었다. 내가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언니가 말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슬슬 올 때가 됐구나.]

“네?”

잘 대화하다가 언니가 뜬금없이 말했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언니가 말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하나만 묻자. 너, 그 다니엘이란 자를 사랑해?]

“헉.”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런 질문을 할 줄은.

“흠흠. 네.”

[그래. 그렇군.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혼혈 정령에게 그 정도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다가갔으니. 하지만.]

“언니?”

[친화력으로 인한 끌림은 처음에나 영향력이 있지, 이렇게까지는 아니거든.]

연애 상담도 해 주는 것인가! 나는 조금 흥분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단을 보고 크게 끌린 것에 친화력이 영향을 미쳤다는 거예요?”

[감정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친화력만으로 끌렸다면 첫 만남에 몸을 섞고 끝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지.]

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러니까 감정적인 게 아니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영혼 상태인데도. 아휴!

[……음흉한 얼굴이구나.]

“아이, 참! 언니도.”

언니가 날 가는 눈으로 보다 픽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그와는 여러모로 잘 맞을 거라는 의미이니, 좋은 일이지.]

내가 배시시 웃자, 날 빤히 보던 언니가 반쯤 중얼거리듯 물었다.

[……누군가와 그런 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건 어떤 기분이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언니에게 답했다.

“좀 우스운 표현이지만, 음.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예상을 벗어난 답이군.]

“그냥 그만큼 그 사람이 제게 짙게 남는다는 거죠. 매순간.”

[……행복해?]

“그런 것 같아요.”

[그런가.]

잠시 온화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구나. 행복한가.]

혼자 중얼거리던 언니가 나와 맞잡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내가 처음, 너에게 한 말 기억하나?]

“처음에, 아, 살 수 있다?”

[자유롭게 살라고.]

처음 언니를 꿈에서 만났을 때 1년간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깨어나기 직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사실, 1년까지는 필요 없었어.]

언니의 생각이 흘러들어온다.

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기억들을 나누었다고. 한편으론 아픈 기억들은 돌려주고 싶지 않아서, 고민했다고. 알리샤, 네 새 인생에는 기쁨만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지금까지 준 기억들은 네가 바누스가에서 나를 지켜보았던 기억들이다. 거기서 너는 나를 볼 수 있었다고 하더군. ……아픈 기억들은 뺀 것이지.]

망설이는 어조였다. 나는 함부로 괜찮으니 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사실 네가 몸에 완벽하게 자리를 잡으려면 네 모든 기억을 가져야 한다.]

“언니와의 기억도 빠져 있는 거예요?”

[……네 아픈 기억과 따로 뗄 수가 없었다.]

“그랬구나.”

[지금은 정령왕들이 너를 지탱해 주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언니는 원치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무엇이든 나는 저 기억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아프다는 기억들 속에 언니와의 기억도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 저는 곱씹지 않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나는 한참 후에 언니에게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저는 제가 좋아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결정을 해요.”

[확실히 그랬지.]

“그러니까 주세요.”

언니는 한참을 답하지 않다가 내가 조르듯 잡은 손을 흔들자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어요? 역시, 절 잘 알아요!”

[그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니까.]

나는 기억들이 펼쳐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았다.

“…….”

[…….]

어딘가 먼 곳을 힐끔 본 언니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리샤.]

이야기하면서 조금 익숙해진 호칭이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울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언니의 마음이 더 잘 와 닿았기 때문이리라.

[이제, 충분하다.]

“언니?”

나는 매우 선명해진 언니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나는 말이지.]

그러자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내 삶의 그 모든 선택들을.]

“…….”

[후회하지 않아.]

너는 내게 빛이었다. ……언니의 생각이 들려왔다.

[나는 늘 캄캄한 곳에 머물렀다. 거기서 먼 곳의 빛을 바라보며 살았어.]

작은 집을 짓고, 내 유일한 가족과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나는 요리를 배우고 싶었다. 너는 덤벙거려서 요리는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약했던 너이니, 잘 먹이면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아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셈해 보았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깊이 알아 갈 용기가 없었다. 아무도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때도 우리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는…….

[너는 유일하게, 내 곁에 있던 빛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부질없어진 꿈이었으나. 그 덧없는 꿈마저 나에게는 너무 소중했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 네가 행복하기를.

[이게 마지막이다, 알리샤.]

……동시에 들려오는 언니의 말과 생각들. 거기에, 내가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언니가 말을 이었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 정령왕들의 정화는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래. 언니의 몸이 선명해지면서 나도 선명해졌다. 나는 내가 흐릿했다는 것도 몰랐는데.

“내 딸로…… 태어나요, 언니.”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이었다. 언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더라도 가까이, 가장 가까이로 와요. 알았죠?”

[생각해 보지.]

언니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그가 도착했구나.]

“네?”

[쉽게 만나게 하기는 싫고, 어쩐다.]

“단이 여기로 온다고요? 아니, 언니……?”

언니는 픽 웃더니 조금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귀한 동생을 데려가다니.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겠지.]

그때였다.

“리샤!”

“……!”

나는 정말로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묘한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자, 알리샤. 깨어날 때다.]

“리샤 언니, 잠깐만.”

[생각보다 빠르게 길이 생겼어. 인정해 주지.]

언니가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바라보았다.

“리샤!”

[내 동생을, 잘 부탁하네.]

순간 시야가 암전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황녀가 눈을 떴다. 동시에, 다니엘도 깨어났다.

“…….”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리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손에는 펜던트를 꼭 쥐고서.

다니엘은 가만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의 품에서 기다렸다는 듯 리샤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 언니가.”

“네.”

“언니가.”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리샤가 흐느꼈다.

“다시, 볼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단.”

“그래요, 리샤.”

다니엘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리샤의 몸이 완벽하게 건강해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리샤와 그를 정령석의 길로 튕겨 내던 영혼을 떠올렸다.

‘그녀가 르페르샤 황녀였군.’

기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리샤, 알리샤뿐이었으나.

‘편히 쉬시길.’

마음으로나마 르페르샤 황녀의 부탁에 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 흐느끼는 소리마저 달콤할 만큼…….

“……그리웠어요.”

그리웠으니까. 한탄하듯 흘러나온 말은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하자마자 그와 눈을 맞춘 리샤의 눈에 작은 당혹감이 어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리샤.”

리샤는 한참을 그를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주인! 괜찮은 건가? 왕들에게 듣기는 했는데, 나는 여기 매여 있어서 주인에게 갈 수가 없었다.

눈치 없이 끼어든 한 정령왕 덕에 둘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리샤예요.”

리샤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밝혔다.

“알리샤. 알리샤 륜 트리엘.”

한국의 일이나, 언니가 범한 금기와 관련된 것들은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히 해야 했다.

“언니가 나를, 지켜 주었어요.”

차갑고 냉정하던 르페르샤 황녀. 그 후의 달라진 모습은 알리샤였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 둘 다 인정받아야 했다.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 누구도 없던 사람이 될 수는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래? 내 동생은 둘이었군.”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사람들은 납득했다. 황태자의 심드렁한 반응에 어이없게 그를 보기도 잠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리샤 님, 저는 당신의 기사입니다. ……또한, 1황녀 전하에 대한 오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유진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들에게 알리샤는 그저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황제가 알리샤를 찾아왔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결국 오고야 말았다. 황제는 황녀의 방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생각했다.

‘그 아이는 원하지 않을 테지.’

아이는 그를 보는 것도, 그와 대화하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황녀의 궁으로 행차하기 직전까지도 망설였다. 어쩌면 평생 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결국 회피이니.’

황제는 마침내 인정했다.

그래, 그는 르페르샤와 알리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처음, 황녀가 자신의 병에 대해 알리며 떠나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때의 황녀는 알리샤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사무치게 되었을 뿐이다.

‘르페르샤는, 그때 이미 없었구나. 그리고.’

알리샤.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을…… 내 아이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르페르샤를 향한 아픔과 알리샤를 향한 아픔이 한꺼번에 덮친 지금에서야, 그는 이곳을 찾았다.

‘후회하면서도 단 한 번도 아이를 찾아와 보지 않았다.’

그것은 회피였다. 아이의 원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혼자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꿨어야 했다.’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아이를 안아 주러 달려왔어야 했다. 아니, 그는 상처를 두려워할 자격도 없었다.

“폐하.”

“…….”

동행한 기사가 그를 불렀다. 그가 방문한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그를 맞이하지도,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말없이 주위를 물렸다. 이윽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초라하게 떨리는 손이 보였다.

문이 열리고, 아이가 보였다. 긴 흑발과 상냥한 보랏빛 눈동자가 차례로 드러났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이가 알리샤구나.’

익숙하다. 머리색이 달라졌는데도, 그는 이 어딘가 상냥한 눈빛을 한 아이가 익숙했다. 어쩌면 어린 날의 찬기 도는 르페르샤보다도 더.

아.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입을 벌렸다.

‘어찌 몰라보았나.’

그는 르페르샤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무심했던 것이다.

그는 알았어야 했다. 이미 르페르샤가 사라졌다는 것을. 르페르샤가 사라지고 알리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오셨어요?”

맑은 소리가 그의 상념을 갈랐다.

“……그래.”

한참 만에 나온 답은 초라했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해야 했다.

“다 나았다고 들었다.”

하필 나온 말이 그 말이었다. 지금 아이에게 ‘나았다.’는 말이 적절한가. 이 아이가 알리샤라면, 아이는 나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이 아닐까.

아이가 말없이 고요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이게 병은 없어요.”

아이가 한참 만에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어딘가 서러운 얼굴로. 그리고 이어 물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황제는 눈앞의 아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잃었던 기억을 전부 찾았다고 했다는 보고를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조금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기억을 되찾았기에.’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르페르샤와 달리 알리샤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그러나 지금, 알리샤는 매우 서늘했다.

“오라버니께서 이미 저와 관련된 보고를 마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말투는 부드러우나 날카로웠다. 황제는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알리샤를 보고만 있었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보아야 했다.”

“무엇을요?”

“너를.”

아이야. 너를 보러 왔다. 나는 너희를 본 적이 없었다. 볼 수 있었을 때에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너도, 르페르샤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러 왔다. 그런 그에게 아이는 말간 표정으로 차분하게 물었다.

“왜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은 것이냐.”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알리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이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이걸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폐하께선 저를 보실 필요가 없으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

황제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말에 머릿속을 떠돌던 모든 말들이 막혀버렸다.

“그런 표정을 하실 이유도 없으세요.”

아이는 설핏 웃었다가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을 뿐이니.”

가슴이 콱 찢어질 듯 아파 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얘야.”

저도 모르게 탄식하듯 알리샤를 불렀다. 차마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고서. 그러나 아이는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여 부채감이 있으시다면, 폐하께서 저와 해 주신 약조를 지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약조…….”

“자유롭게 해 주시는 거요.”

“……아.”

그는 그것을 처음 요구했을 때 보았던 황녀의 담담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었다.

“아, 제 연인에 대한 면죄부도 함께 주시면 좋겠고요. 제국에서 당당한 신분을 가진 것은 아니니까요.”

지금이라고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겠지. 그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는 심호흡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사 이 자리를 달라 해도 주겠다.”

알리샤가 몹시 낯선 눈으로 그를 한번 보았다. 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아이야.”

아이가 입을 열기 전에 그가 터뜨리듯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희를 버렸어.”

알리샤가 움찔했다. 엷은 가면이 깨진 느낌이었다.

“내 고통이 더 중해서, 그리 했다.”

카라를 잃은 뒤 바누스가를 증오했다. 상실감, 분노, 그런 감정들이 뒤섞였다. 그런 중에 오로지 카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만이 그에게 기쁨이었다.

“외면했다.”

바누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황제의 무심함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마음대로 황녀들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없었을 것이다.

“……맞아요.”

그리 고백하는 그에게 알리샤가 말했다. 평온한 가면이 깨진 채로, 그러나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폐하는 그랬어요. 무심했죠.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알리샤가 말하기 시작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가 하는 말을 들었다.

“끝까지 버려두셨어요. 그래도 된다고 여기셨죠. 그런데.”

알리샤의 눈이 순간 서늘하게 반짝였다.

“지금 달라지신 이유는 뭘까요?”

“…….”

“언니가, 아팠다는 걸 알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실험이 아니었으면 평생 우리에게 당신은 무관심했을 거예요. 그렇죠?”

맞는 말이었다. 또한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알리샤가 아니었다면. 찬기 도는 성격의 르페르샤 그대로였다면. 그는 여전히 무관심했을 것이다.

“폐하. 혹시…….”

알리샤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제게 용서를 구하러 오셨습니까?”

그랬나. 황제는 생각했다. 용서를 구하고 싶었나.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앞뒤 재지 않고 달려오게 된 것은 분명 뒤늦게 가진 애정에 기반된 행동이었으나.

‘분명히, 기대했다.’

용서받을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기대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르페르샤가 아니라 알리샤라면 그를 용서해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우습게도.

“폐하. 우리는, 용서를 하고 말고를 할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착하고 영리한 이 아이는 그런 그의 속내도 꿰뚫어 본 듯했다.

아이는 그다지 크게 동요하는 것 같지도 않은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용서 못 한다고 그를 원망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았다. 황제는 암담하게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제게는 애초에 가족이 언니뿐이었거든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잔향처럼 슬픔이 어려 있었다.

“……폐하께서 관심을 줄 수 있었던 황녀는 언니였는데, 언니는, 이제 없잖아요.”

황제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

알리샤는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용서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잖아. 왜 내게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다들.’

반성한다는 말에는 그저 살짝 웃어 주었다. 그러냐고. 그렇게 되었느냐고. 그러나 결코 용서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정말 용서를 구해야 할 언니는 이미 없는데.’

언제나처럼 그늘 없고 말간 얼굴로 알리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 오겠네.”

정말로 그녀와는 상관없는, 황제의 흐느낌을 뒤로하고서. 그녀는 온전해진 그녀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대부분은 언니의 모습이었다.

바누스가에서 수정구슬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언니의 모습. 그리고 한국에서 환생했을 때 꿈에서 보았던, 원작 시기의 언니의 모습.

‘전과 달리 기쁘지 않아.’

언니를 봐도 그립기만 해서.

‘아쉽고, 아쉬워서.’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밉다. 그러나 그걸 표하는 것 자체가 아까웠다. 그는 참으로 염치없게도,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진심이든 아니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말아야지.’

우리 언니 가슴에 평생 못을 박는 데에 일조했으니. 지금의 그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벌이 될 것이다.

“폐하.”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나는 언니가 원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다시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살아갈 거예요.”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기도 했다.

“폐하께선 평생 용서받으실 수는 없겠지만요. 저는 그와 별개로, 힘껏 살아갈 거예요.”

기억과 아픔에 매여서 제자리걸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알리샤로서의 기억이 온전해지자,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언니였는데.

‘하지만 지지 않아야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언니가 그렇게 말한 건, 언니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었을 테니까.’

나는 황제에게 재차 말했다.

“더 많이 행복해질 거예요.”

어쩌면, 그가 정말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면, 내 이 말은 그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황제는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려무나.”

나는 비로소 조금 그에게 웃어 주었다.

“돌아가서 쉬세요, 폐하.”

그렇게만 말하고 나는 누워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자리를 피해 주었던 다니엘이 다가왔는지, 그의 향기가 났다. 나는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가 언니를 향해 마음에 걸릴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고마웠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

그는 내가 진정할 때까지 말없이 나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잔잔한 키스가 이어졌다.

* * *

황녀가 눈을 떴다는 반가운 소식이 제국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이 이어졌다. 황가에서 두 황녀에 대해 공표했던 것이다.

“살아남으신 분이 그러면 르페르샤 황녀 전하가 아니라 알리샤 황녀 전하이신 건가?”

알리샤 황녀의 이른 죽음을 공표했던 황실은 이내 그것을 정정했다. 르페르샤 황녀의 몸에 알리샤 황녀가 들어갔다는 것은 감추었지만, 살아남은 알리샤 황녀가 자신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은 공개를 했던 것이다.

“한 분은, 라파엘리스로 돌아가셨고, 한 분은 돌아가신 분의 복수를 하셨다는 건가.”

“그럴 수가.”

그리고 또 하나.

“라파엘리스가 그런 병이었다니…….”

라파엘리스의 실체에 대해 알려지자,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르페르샤 황녀의 소문을 입에 담지 않은 사람은 적었다. 듣고 넘어간 사람보다 퍼 나르며 부풀린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위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였음을 몰랐다. 아니, 과연 몰랐을까.

“아니. ……소문이 누군가에게 죽을 정도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걸.”

비단 라파엘리스가 아니었어도 소문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일상의 자극을 위해, 또는 나 하나쯤이야 하는 얕은 생각을 하며 그들은 소문에 휘둘렸다.

그 결과 사람이 죽었다. 그들의 말은 병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고, 칼이 되어 사람을 난도질했다.

“하…….”

황녀들의 외가인 바누스가가 그것을 조장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알리샤 황녀님도 그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그런데 친언니를 떠나보낸 뒤, 황녀는 직접 그 무서운 이들과 마주하고 그들을 단죄했다는 것이다.

“아…….”

두 황녀의 비극에 제국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말이 진짜 칼이 되어 버린 이 경험은 장기적으로 많은 변화의 시작이 되었다.

한 번이라도 황녀 전하에 대한 말을 옮겼던 사람들은 르페르샤 황녀를 향해 자책하며, 소문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좋은 변화 같습니다.”

가일 후작이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황태자에게 말했다. 다만 말투는 상당히 냉소적이어서, 내용만 아니면 후작이 화가 났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라빌로프가 후작을 힐끔 보았다. 어조와 달리 후작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글쎄. 그게 얼마나 갈까.”

그리고 이제 와 변화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게다가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나.”

“그렇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라빌로프가 물었다.

“……누이는 요즘 어때?”

“직접 가 보시는 것이.”

“자네도 모르는 거군.”

“그 다니엘 경이 항상 곁에 붙어 있으니까요. 병문안도 눈치가 보입니다.”

라빌로프가 픽 웃었다.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좋아.”

“네? 뭐가 말입니까?”

“자네 말대로 직접 가보겠다고.”

뜬금없는 말에 가일 후작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일 하다 마시고요?”

물론, 라빌로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누이도 들을 준비가 되었겠지.”

“하아. 가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글쎄. 권리에 대해서?”

가일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신지.”

“곧 알게 될 거야.”

라빌로프의 화려한 낯에 뱀처럼 사이한 미소가 슬쩍 어렸다.

“……불안한데요.”

라빌로프는 대꾸하지 않고 바로 채비를 했다.

그는 근래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이 몰고 올 풍파는 안중에 없었다. 그저 그가 생각한 것은.

‘누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지금까지도 말이다.

‘아버지는 누이가 자유를 원했으니 그걸 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어이없는 말이었다. 제국의 두 황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처음부터 가져 보지도 못하고서.

‘자유를 원했다고?’

그것은 가져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한 말이 아닌가. 그는 그 상황 자체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그는 그 자신의 기준 안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인 편이었다.

그는 누이들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고, 꽤 선명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이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제 와 사과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원한다면 줘야겠지.’

대신 그는 움직였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전부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최소한 그들이 가졌어야 했던 것들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여 그는 그가 가진 것 중, 사람을 제외하고 가장 귀했던 것을 기꺼이 포기했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의 대명제와도 같았던 것을.

* * *

“오라버니?”

나는 반갑게 오라버니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세요?”

황제에게 물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활짝 웃으며 묻자, 오라버니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걸 주러 왔어, 누이.”

“이게 뭔데요?”

근래 들어 그가 더 편해졌다. 그것은 그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와 언니를 그냥 동생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이건.”

다니엘이 내가 받아 든 것을 함께 보고서 묘한 표정을 했다. 나는 서류를 읽으며 입을 떡 벌렸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당혹스럽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가져.”

“아니, 가지라뇨.”

“역시, 부족한가?”

나는 결국 할 말을 잃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전하,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내가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오라버니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지.”

서늘한 낯은 참 요동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건, 그게 부족한가 하는 거야. 누이, 부족해?”

“애초에 전 오라버니에게 뭘 원하지도 않았어요!”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게다가 황태자 자리라니, 너무 크고 당혹스럽고……!

“부족한 게 아니라면, 뭐가 문제지?”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진심으로 심각해지는 오라버니를 보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후. 좋아요, 오라버니. 차근차근 짚어 보죠. 먼저, 저 이미 계승권 포기했거든요?”

“괜찮아. 그때 그 무도회의 일이 문제가 된다면, 나도 보라색 베일을 쓰지.”

말이 안 통해! 너무나 진지하게 대꾸하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 오라버니. 왜 이러시는 건데요?”

“자유를 원했다며?”

“그랬죠.”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건 이미 가졌으니, 이것도 가지라는 거야, 누이.”

오만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니까, 이거 뭔가 갚는 의미인가?

“아니, 그럼 오라버니는요? 황제가 되지 않으실 거예요?”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지.”

뭐라는 거야!

“누이는 누이만 생각해.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가지기 싫으면 다른 걸 말하고.”

기가 막혀서 웃다가, 이어진 말에는 그냥 웃음이 터졌다.

“원래 가졌어야 할 것들을 가지지 못한 걸 생각하라고, 누이.”

참, 오라버니답다 싶었다.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감추고 또박또박하게 답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전 필요 없어요.”

“흠. 정말이야, 누이?”

“네.”

오라버니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따라 빙구처럼 보이는 이 오라버니를 보며 말했다.

“게다가 그 자리는 함부로 가지는 자리가 아니라고요. 전 못해요.”

“아니, 누이는 잘할 거야.”

오라버니의 말에 다니엘이 거들었다.

“그건 그렇죠. 리샤는 잘할 거예요.”

다니엘에게 살짝 눈치를 준 뒤 내가 말했다.

“원하지도 않고요.”

“가장 좋은 것인데 말이지.”

“오라버니에게나 가장 좋은 거죠.”

“그렇군. 누이 말이 맞아.”

오라버니가 심각하게 답했다. 힐금 보니, 다니엘은 상당히 재밌어 하는 얼굴이었다.

“음, 리샤가 필요 없다면 그런 거죠. 사실 이런 자리는 피곤한 일이 더 많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다니엘이 말했다. 오라버니가 살벌하게 다니엘을 노려보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좋아, 다른 것을 생각해 보겠다.”

그러더니 아리엘과 상의해 보겠단다. 얼씨구.

“그랬다간 더 큰일이 날 것 같으니,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내가 에밀인 걸 안 뒤의 아리엘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황태자 자리보다 더한 걸 받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킥킥거리며 오라버니를 열심히 뜯어말려야 했다.

며칠 후, 고민이 깊어지는 오라버니를 보다 못한 내가 오라버니에게 요구한 것은, 언니의 장례식이었다.

“축복만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환하고, 밝고, 아름답게 해 주세요.”

기쁨은 없어도, 축복만은 가득한 자리가 되기를.

‘언니는 환생한다고 했지.’

……고단하게 살았으니, 새 인생은 따스한 환경에서 행복하기를. 오라버니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 머리를 한번 가볍게 쓸어 주며 말했다.

“그러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 언니가 있었다면, 나는 황태자 자리를 쥐어주려는 오라버니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언니에게는 황태자가 어울렸을 테니까.’

……보고 싶다.

내 딸로 태어나라고 했을 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였다.

“생각해 봤는데, 누이.”

오라버니가 말했다.

“누이가 싫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누이 후손들 중 원하는 사람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주는 거야.”

“오라버니…… 왜 그렇게 황태자 자리를 주려고 하세요?”

“내가 당연하게 누린 것이니까. 누이도 당연하게 누려야 공평하거든.”

“공평…….”

사과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두 번 공평했다간 아예 황가가 바뀌겠네!”

“볼수록 재밌는 분이라니까요.”

헤레이스와 다니엘이었다.

“뭐, 리샤는 훌륭한 흑막이니까, 황태자 되는 거 난 찬성이지만! 솔직히 황제는 성격이 좋아야 하잖아.”

오라버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라버니 옆에서 날 힐끔대며 조용히 서 있던 가일 후작이 얼빠진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라버니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가끔 헤레이스는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굴고는 했다. 아니, 종종……. 자주……. 그리고 헤레이스와 망설임 없이 드잡이질을 시작하는 오라버니를 보며 새삼 그들이 많이 친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리샤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들을 보고 있는데 단이 다가와 물었다.

“황태자 전하의 제안 말이에요.”

“제 후손에게 넘기는 거요?”

그의 흑갈색 눈동자가 다정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마주 웃으며 내가 답했다.

“글쎄요…… 어이없지만,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뭘 준다고 할지 불안하네요.”

“그럼 받아들이죠.”

다니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내 사람들이 보였다. 손을 흔들자 유진이 그 찬란한 얼굴에 시원한 미소를 그리며 다가왔다.

“내 기사님이 오셨네요?”

내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는 유진에게 나는 자유를 주었다. 누군가를 구속하는 것이 싫다는 마음이었다. 다만 그를 이렇게 불러 주면 기뻐했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부르고는 했다.

“리샤 님.”

유진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각하의 동의를 받아서 오는 길입니다.”

“아, 카인이 허락했군요.”

“네.”

유진은 내가 기뻐할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더니, 어째서인지 자유 기사들을 한데 모아 대륙적인 경찰 조직 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약자의 편에 서고 싶다나? 거기에 제국 소속인 아이릭 공작도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잘됐네요. 축하해요.”

이제는 그의 미모를 봐도 나는 끄덕하지 않는다. 그것은 카인에게도, 헤레이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게 언니에 대한 사과를 한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상황을 전부 안 뒤에도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 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덕질은 그들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리감을 드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덕질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알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을 텐데 받아들여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많은 것이 정리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나는 피를 토하지 않는다.

‘상한 몸도 점점 회복되고 있고.’

제인 남매도 어느새 자기들의 자리를 착착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제인과 쌍둥이는 자유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나?’

막내만 빼고.

‘콜린이 신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신관의 자질이 있어서 우리 막내는 신전으로 갔다. 내가 깨어나는 것을 봐야 떠난다고 고집을 부렸다가 며칠 전에 떠났다.

‘대신관이 아닌 척하면서도 애지중지하는 것이 참 보기 좋았었지.’

그리고 이제 며칠 후에는 나도 다니엘과 함께 궁을 떠날 예정이었다. 긴 여행을 가기로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다니엘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싶고.’

그를 살짝 올려다보다가 안아 주는 품에 폭 안겨 기댔다.

“단. 단도 우리 언니 봤죠?”

“네.”

나 말고 언니를 직접 만난 건 그가 유일했다. 더 말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우리 언니 엄청 아름다웠죠?”

그가 웃기만 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이 무척 아름다우셨어요.”

나는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언니가 더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의 부드러운 눈길과 함께.

‘행복해.’

아마도 나는 알아 갈수록 그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들어 쪽 입을 맞추자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활짝 웃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 입을 맞출 듯 가까이 갔다가 코앞에서 씩 웃기만 했다. 기다리던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날 마주 보더니 부드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날 사랑스럽게 보는 그의 눈빛이 좋다. 부드럽게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서 속삭였다.

“어제 꿈을 꿨어요.”

“어떤 꿈이요?”

“우리 언니랑 하늘 위를 뛰어노는 꿈이요.”

“하늘 위를?”

“네. 구름을 막 밟았어요.”

“구름을 밟았다니. 멋지네요.”

구름으로 집도 만들며, 어린 아이가 되어 뛰어놀았다.

“자유로워 보였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렇게 평화로운 날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언니의 장례식 날이 밝았다.

-밖에 검은 옷이 하나도 없군?

“응. 젠만 검은 옷이야.”

-주인, 나는 원래 검다. 옷이 아니야.

불퉁한 목소리를 웃어넘기며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언니의 장례식에는 모두 단순한 디자인에 봄의 빛깔을 가진 옷들을 입기로 했다. 연한 분홍빛, 싱그러운 녹빛, 귀여운 노란색과 청초한 하늘색 등.

잔잔한 분위기였지만 마냥 어둡지도 않았고, 추모하는 과정에는 하얀 꽃뿐 아니라 오색 꽃들이 함께했다. 물론, 언니는 단정한 것을 좋아하니까, 어느 곳도 흐트러지는 부분들은 없었다.

“젠, 이제 네 차례야.”

나는 슬퍼할 자격을 잃은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젠에게 속삭였다.

-그렇군.

내 주변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며 날고 있던 검은 독수리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별인가?

“벌써? 자유로워지면 나 안 볼 거야?”

-찾아와도 되나?

“물론이지. 정령왕 분들도 마찬가지야.”

-……그래.

소리 없는 봄빛 장례의 말미에 찬란한 일곱 빛깔이 허공을 수놓았다.

젠의 검은빛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에 내게서 분리되어 가장 넓게 하늘을 덮었다. 포근한 빛깔이었다. 앞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정령왕들이 젠을 반기며 찬란한 밤하늘을 만들어 냈다. 축복의 장례식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별무리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언니는 늘 당당했고 더없이 영민했으며 꿋꿋한 의지를 가졌던 황녀였다. 그러니,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다시는 괴상한 소문이 침범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 거니까.’

축복의 의미에 겸하여 그러한 의도도 함께 있었던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꽃무덤 곁을 지켰다. 그 언젠가, 언니가 자기 무덤에서 나를 엿보았을 때처럼.

“…….”

여덟 정령왕들의 말을 들은 것은 혼자가 되었을 때였다.

다니엘도 어딘가로 간 사이에, 그들은 내게 속삭였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를.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의 복수는 함께 이룬 것이었구나.”

하고.

* * *

바누스가는 그 막강함에 비해 꽤나 쉽게 무너졌다. 단테 바누스는 특히.

그것은 상당한 운이 작용한 결과였다. 바누스가의 힘이 ‘진짜 정령’에게 취약하다는 것은 극비였으니까.

[사실, 복수를 하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지.]

르페르샤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걸치고서. 완전히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그녀는 묘한 심정으로 일련의 일들을 떠올렸다.

알리샤는 아직 몰랐다. 그녀가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회귀를 감행했다는 것을. 그것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외전이라는 지도를.]

알리샤가 기억하는 원작. 그 책에는 외전이 있었다. 아리엘과 라빌로프가 무력이 없는 아리엘을 위해 여행을 하면서 여러 보물들을 모으는 여행기 말이다.

[눈치 챌까 싶었는데, 그건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외전은 기억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존재했던 이유를 궁금해할 법도 한데.

[그쪽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거겠지.]

원작에는 르페르샤가 나온다. 하지만 르페르샤가 사라진 이후의 외전은 기억일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엔 르페르샤가 없으니까. 그것은 지도였다.

[내가 수없이 많은 회귀를 하면서 알아낸, 보물지도였지.]

그런데 그게 정령왕들일 줄은 몰랐다. 바누스가에게서 알리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했다.

[알리샤를 데려와도 바누스가가 그녀를 노리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니까.]

그러려면 진짜 정령의 힘이 깃든 물건이 필요했다. 르페르샤는 영혼을 조각내어 하나는 알리샤의 시간을 붙잡는 데에 쓰고, 나머지는 회귀를 거듭하는 데에 썼다.

힘겹게 찾아낸 보물들이었다. 바누스 가에서 감추기도 했기 때문에, 실은 목숨도 걸어야 했다. 그래서 회귀를 하고, 또 해야 했던 것이다.

[일곱 개나 찾았으니, 이 정도면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니까, 알리샤가 당하지 않을 정도를 기대했을 뿐. 그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운이 좋았다.

[알리샤. 너였기에 정령들이 깨어났던 거니까.]

덕질이라는 것을 할 때 알리샤는 유난히 상대를 ‘동등하게’ 대하고 배려하는 형태로 그것을 표출하고는 했다. 그건 알리샤의 타고난 성격이었다.

[그게 이질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정령들에게도 발휘될 줄은 몰랐지만.]

친화력도 친화력이지만, 결국 알리샤는 정령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었다. 다니엘 로바인, 젠. 정령왕들까지. 그들은 알리샤의 그런 점에 마음을 열었으니.

[결국 그 보물들에서 풀려난 정령왕들 덕에 둘 다 보전될 수 있었지.]

무엇보다도, 복수를 했다. 아주 제대로.

무엇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단테 바누스가 여름날의 얼음마냥 허물어지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르페르샤는 저도 모르게 편안하게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령왕들이 완벽하게 자유가 되어 차례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맞이하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동생의 마음을 조금쯤 가볍게 해 줄 생각이었다.

바람을 타고 정령들이 말을 전한다. 알리샤가 몰랐던 것들을 다 말해주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고, 고맙다고 전해 주었다.

아이가 웃는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끝내 울지는 않고서 웃으며 배웅해 준다.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인과 너, 몹시 닮았다.

젠이라는 추억의 정령왕이 중얼거렸다. 기분 좋은 말이다. 르페르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단한 생이었다. 그러나 후회 없이 살았다. 마지막 순간에 저 아이가 있으니, 완벽하기까지 했다.

르페르샤는 젠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알리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가, 가야 할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그녀는 먼 곳으로 향했다. 아주 홀가분한 모습으로.

* * *

<리샤 님께.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긴 것 같습니다. 리샤 님이 궁에 계시지 않아 그런 걸까요?

여행을 떠나신 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나셨네요. 잘 지내시는지요.

이쪽은 다들 무탈합니다.>

엠마에게서 온 편지는 두께가 상당했다.

단과 함께하는 여행은 가끔 정령왕들도 함께하는 통에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즐겁기는 하지만 우리를 따라다니거나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악조건이었다. 그래서 한 번에 많은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유진이랑 카인이 하는 일이 잘되나 봐요.”

“헤레이스가 불만이 많은 것을 보니 그런 것 같더군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헤레이스랑은 정반대의 일이겠네요.”

“벌써 유진과 카인에게 몇 번 잡혔었다고 해요.”

단이 곤란한 척, 그러나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진과 카인이 대륙적으로 치안을 강화한 셈이니, 정보 길드의 헤레이스와는 종종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둘에게는 헤레이스의 여장도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거 참 곤란하겠어요.”

하지만 헤레이스도 만만치 않아서 유진과 카인도 골머리를 앓는다고 들었다. 물론 구경하는 우리는 재미있을 뿐이지만.

<……얼마 후에 태자 전하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인 것 아시지요? 그때는 뵐 수 있을 테지요.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다니엘이 편지를 읽는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고마워요.”

그가 가만히 웃으며 나를 뒤에서 안아 왔다.

“리샤, 또 뭐라고 해요?”

“음…… 아리엘 영애랑 오라버니 결혼식이요. 우리 선물 준비해야 하는데.”

“리샤가 가는 게 선물일 거예요.”

“어휴.”

내가 살짝 흘기자 단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외진 북쪽 땅이었다. 겨울에 가장 추운 곳. 일 년의 대부분이 겨울인 곳이다. 나는 이곳의 상쾌한 서늘함도, 작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의 따스함도 전부 좋아했다.

“녹지 않는 얼음 세공품을 가져갈까.”

“진상품들 중에 있지 않겠어요?”

“그렇겠네요.”

나는 실내 장식용 고드름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오라버니와 아리엘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면.

“아.”

나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단에게 말했다.

“3권 쓸 때가 됐죠?”

“……그렇죠.”

단이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눈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의 마지막 권을 한정판으로 두 권 뽑아 줘야지.

“사인해서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그렇죠. 아리엘 영애가 좋아하면 태자 전하도 좋아하시겠죠.”

다니엘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라버니는 이를 갈겠지만. 다른 선물도 곁들여서 주면 되겠지!’

그렇게 해서 우리 여행의 마지막 여로에서, 마지막 권이 출간되었다.

이제 이 이야기의 배경을 모두가 아는 상황이다. 3권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고. 외가의 방해 공작으로 생이별을 했던 두 주인공은 역경을 이겨 내고 다시 만난다.

눈의 공주님은 당당하게 모든 것을 극복했지만, 손에 쥐고자 결심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았다.

개구리 왕자님의 과거도 자세하게 드러났다. 그는 앞서 1, 2권에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살았고, 지키기 위해 죄를 지었다. 그 생의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그렇게 온통 어둠뿐이던 그의 인생에 눈의 공주님은 빛이었다. 모두가 차갑다고만 했으나 실은 무엇보다도 환하게 빛나던…… 그런 빛.

“있잖아요, 단.”

“네.”

무뎌진 듯 굴어도 알리샤로서의 어릴 적 기억은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을 공감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다니엘이었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내용이야 어찌됐든 결말은 꽉 닫힌 해피엔딩이다.

“리샤.”

그리고 책을 받은 아리엘의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오라버니의 결혼식 날.

“당신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어요?”

그 아름답던 어느 겨울밤에…….

다니엘은 내게 청혼했다.

* * *

알리샤 륜 트리엘과 다니엘 로바인의 결합은 특이했다. 그들은 둘 다 대공의 위를 받았는데, 각각 트리엘 대공, 로바인 대공으로 불렸다. 그리고 옛 로바인 왕국의 터를 영지로 받아 다스리기 시작했다. 정령력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과의 협업을 모색하며, 새 마탑이 도시 주변에 세워졌다.

두 대공은 그곳을 매우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다스렸는데, 훗날 이곳은 공국보다는 자유 도시라 불리게 된다. 정령과 마법의 도시, 리베라는 그렇게 탄생했다.

트리아노 제국의 다음 대 황제 프란시스 람 트리엘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란시스 황제는 이따금 푸른색의 정체 모를 힘을 쓰고는 했는데, 그 힘을 쓸 때마다 짙은 빛의 머리카락이 백금빛이 되고는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알리샤 륜 트리엘 대공의 일기장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었다. 그 일기장에는…….

“오오……! 이건 분명!”

“여, 여기 이 서명은 분명 트리엘 대공의 것이 분명하오!”

고고학자 여럿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불치병으로 죽은 자매를 위해 위대한 힘으로 반역자들을 단죄했다는 그!”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트리엘 대공의 죽은 자매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당한 것이며, 불치병을 앓았던 것은 트리엘 대공 자신이라든가. 연인인 로바인 대공과 함께 그 병을 이길 방도까지 찾아냈었다든가.

정설은 아니었으나 꽤나 힘을 받고 있는 설이었다. 왜냐하면, 트리엘 대공의 죽은 자매인 르페르샤 람 트리엘 황녀가 아주 강하고 고고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엔 라빌로프 황제의 뒤를 이은 프란시스 황제가 자신이 그 황녀를 많이 닮았다고 말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어쨌거나.

“이것이 트리엘 대공의 일기라면, 이 일기가 진실을 밝혀줄지도 모르겠소.”

나이 든 고고학자가 경건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마법 도구 같구려. 보안이 확실하군.”

그러나 그들은 이 일기장의 진정한 보안 기능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는 왜곡된 영상을 보여 준다는 그 기능은 그들이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추억의 정령왕의 마법이었으니.

“자, 그럼.”

얼마 후 그들은 선별된 장소에 모여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아아! 진실은 그것이었나!”

“트리엘 대공. 그녀는 대체. 이 얼마나 강인한 분이란 말인가!”

피를 토하면서도 따스하게 웃는 영상이 떠올랐다.

“병마저도 그분이 앓고, 그분이 이겨 내신 것이었다니!”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영상. 사진을 찍고서 행복하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련한 모습.

“떠날 거라고 하는 이 부분을 보시오. 이 담담함…… 그분의 고뇌가 절절하게 느껴지는군.”

이어지는 영상을 보며 그들의 대화는 점차 잦아들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 숙연해진 분위기는 점점 비장해지더니, 알리샤 륜 트리엘 대공이 바누스가를 무찌르고 로바인 대공과 결혼하는 부근에서는 모두가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분이셨구려…….”

“큭, 이 일기 영상을 모두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알리샤 륜 트리엘의 이야기는 더 치열한 인생으로 한 번 더 갱신되었던 것이다.

* * *

어느 봄날이었다.

리베라 도시의 대공저 푸른 화원에서 알리샤는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한 어린 딸을 안고서 해를 쬐고 있었다.

“우리 아가, 이름을 어서 지어 줘야 할 텐데.”

너무 고민이 되어서 그만.

“단도 참. 완벽한 이름을 주어야 한다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게 없으니 어쩌니?”

알리샤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어린아이가 엄마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비가 아이 얼굴을 스쳤다.

그때, 알리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나비를 좇던 아이의 손끝에서 익숙한 푸른빛이 어리다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알리샤는 그 힘을 기억했다.

“……이건.”

평생 그렇게 맑고 선명하며 시리도록 투명한 느낌의 푸른 힘은 한 번밖에 보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짙은 갈색이었던 아이의 머리가 힘을 쓰는 순간 그리운 백금빛으로 물들었다.

‘언니, 내 딸로 태어나요. 아니면 가까운 사람으로라도.’

‘생각해 보지.’

알리샤를 깊이 사랑해준 언니가 있었다. 비록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 알리샤는 지금까지도 언니를 위해 기도했다. 어디에서 새 시작을 하든, 부디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해지기를. 떨리는 눈으로 아이를 보던 알리샤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설핏 미소를 지었다.

“…….”

그날, 아이의 이름은 정해졌다.

“프란시스.”

자유로운 아이.

“……네 이름이란다.”

다정하게 속삭이며 알리샤는 사랑스런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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