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가 사랑할 때 4권
나를 보던 다니엘이 불현듯 걸음을 옮겼다.
그는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곧 눈물이 차츰 마르기 시작했다. 그의 일렁이면서도 고요한 시선을 마주하고서 나는 정신이 들었다.
“고마, 워요, 다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킁, 그럼 저쪽에 모두 서주실래요?”
그 벽은 꽃과 비단, 여러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이름하야 포토존.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내가 이 날만을 기다렸지!
* * *
그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보고 싶었다고 했다.
유진과 카인은 각자의 감상에 젖어 작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헤레이스가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리샤가 만들었다는 과자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주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일이 많이 줄었다더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카인과 유진은 헤레이스가 있는 쪽으로 향하며 대화했다. 어차피 그들도 리샤가 만든 과자를 먹으러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셋은 함께 서서 리샤와 다니엘을 맞이했다.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냥 작은 파티지만. 아, 다니엘이 많이 도와줬어요.”
리샤가 덧붙인 말에 세 남자가 멈칫했다.
“함께 준비하니까 정말 좋았어요.”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헤레이스가 웃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이상한 표정을 했다. 다니엘, 저 재수 없는 놈이 아주 즐거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아, 설마 그 과자 먹은 거 아니죠?”
셋과 다니엘의 미묘한 신경전은 모르고서 리샤가 말했다.
“먹지 마요. 그거 먹고 다니엘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았다고요.”
뭘 잘못 넣었는지 모르겠다며, 자기가 다 처리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맛이 이상하다고 해도, 그걸 리샤에게 티를 냈다니. 다니엘의 행동이 셋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서 그들은 보란 듯이 다니엘의 눈앞에서 리샤의 과자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슬프게도 그들은 다니엘을 이해했다.
“리샤. 이거 뭐야……?”
“그러게 먹지 말라니까요.”
어째서 이 예쁜 모양의 과자에서 썩은 맛이 나는 것일까. 아니, 이건 썩은 정도가 아니라 독을 푼 것 같은 맛이었다. 실제로 좀 독기도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쩌다가…….
리샤가 이 파티 음식을 이렇게 망쳤을 리는 없었다.
‘누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래. 다니엘이라든가, 암살길드장이라든가, 저 괘씸한 호위라든가. 셋은 아무래도 범인일 것 같은 다니엘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다니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구한 눈빛으로 마주했다. 하지만 그 입가의 미소는 매우 의미심장했다.
저거 죽여도 되지 않겠느냐는 헤레이스의 속삭임에 유진이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리샤를 마음껏 보고 리샤와 마음껏 대화를 한 시간이었다. 그걸 망칠 수는 없었다. 그때 리샤가 말했다.
“혹시 이제 바쁘지 않은 거라면, 조금 쉬는 것은 어때요?”
어딘가 애타는 표정이었다. 다니엘의 미소가 흐려졌다. 그것을 힐끔 보고서, 유진이 기껍게 웃으며 답했다.
“허락하신다면. 전하의 호위로 복귀하겠습니다. 호위는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아!”
리샤의 얼굴에 꽃이 폈다.
“저는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았으니, 허락하신다면, 종종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카인이 이어서 양해를 구했고, 리샤의 얼굴에 또 꽃이 피었다. 헤레이스는 다니엘과 유진, 카인을 번갈아 보다가 킬킬 웃었다.
“좋아. 일했으니까 이제 놀아야지! 나랑 놀자, 리샤.”
“좋아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어쩔 수 없지.’
리샤는 그들을 좋아한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저리 웃는 것을 보고서는 차마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저렇게 기뻐하는 것을.’
시간이 조금 흘렀다. 황태자와 가일 후작이 도착하자, 아담한 응접실이 복작해졌다.
리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싶은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모두를 눈에 담고 있는 리샤를 다니엘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짙은 감정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다니엘은 문득 조금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좋아 보이는데, 그녀가 어쩐지 조금 더 멀어 보였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어요?”
가만히 올려다보는 리샤에게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리샤가 답했다.
“여기 말고, 저기에 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줄래요?”
다정한 속삭임은 가벼웠다. 그러나 가볍게 받아지지는 않았다. 혼자 있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억누르며,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두운 자리를 찾았다. 다니엘은 누군가와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헤레이스의 옆에 가기엔 볼턴 경이나 아이릭 공작이 귀찮았다. 그는 그늘진 자리에 선 채로 모든 시선을 차단했다. 그저 리샤와만 눈을 맞추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의 그녀는 어딘가 더욱 그렇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때, 리샤가 손뼉을 한 번 쳤다. 다니엘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떨어져서 보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청초하지만 메마른 꽃 같았다. 선연한 미소를 그린 채로, 그녀가 순간 비틀거렸다.
“아.”
순간적으로 튀어나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서, 다니엘이 이를 살짝 악물었다. 오늘은 지켜봐야 할 것 같았으니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다가가려는 아이릭 공작을 그녀가 재빨리 막았다.
“괜찮아요. 그보다.”
그녀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상냥함을 품은 말간 눈길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사실 하나가 더 있어요.”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구한 게 있는데, 그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그림으로 재현해서 남기는 도구였거든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는 도구. 다니엘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돌 모양의 도구를 바라보았다.
“이거예요.”
저것의 정체를 모르지 않았다. 그것을 그녀가 왜, 원했는지도.
……모르지 않는다.
“이걸로 우리들의 그림을 남기면 어떨까 하고요.”
그녀는 무구한 분위기로 웃고 있었다.
‘어찌 보면 참 잔인해요. 리샤.’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는 살짝 눈을 굴려 응접실 안의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볼턴 경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가, 점차 낯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고, 아이릭 공작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서 리샤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었다.
‘남긴다면, 그걸 후에 가지게 되는 건, 그녀가 아니라 우리겠지.’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녀는 당황한 것 같았다.
“많이 남기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단체로 한 장씩? 복사해서 나눠 가져도 되고. 번거롭지도 않을 거고요.”
그녀는, 마치 모든 사람이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겨우 초상화 하나 남기는 셈인데, 그걸 요구한 것이 뭔가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굴었다.
“그, 이거 남기면, 못 보게 되었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애초에 이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무언가를 잘못했거나 무리한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겠지.’
늘 잘못되었다 일컬어지는 자리에만 있어야 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고.”
다니엘이 가라앉듯, 눈을 내리깔았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겨두면 좀 우울할 때 그걸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끌리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몇은 그녀가 얼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피아 영애마저도 눈치가 빨라 그런지 어느새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리샤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어 해달라고. 아름다웠던 순간에 그녀가 있었다고…….
‘그렇게 기억해달라고.’
자기가 그렇게 쓸 것처럼 말하지만, 그 속을 읽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숨죽인 침묵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와 다니엘의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 그…….”
그저, 떨리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을 것을 짐작했을 뿐이다.
다니엘은 그녀의 햇살 같던 얼굴에 씁쓸함과 서글픔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가가야 했다.
“괜한 말을 꺼냈네요. 미안해요, 다들.”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혼자 울지 말라고 해주어야 하는데. 끝내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것이 눈에 밟혔다. 그것은 사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로움을, 깊이 감추어져 있던 여린 부분을 발견한 것만 같아서. 누구도 그 순간에 쉬이 입을 열 수 없었을 뿐.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본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으흑, 전하! 아니, 아니에요. 저 남기겠어요!”
하지만 한 사람이 터뜨리자, 반응이 기다렸다는 듯 이어졌다. 그리고.
“리샤, 왜 울어? 해준다니까?”
“너무.”
리샤는 울면서 웃었다. 번지는 미소는 찬연했다.
“행복해서요.”
떨구는 눈물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니엘은 그것을 삼켜버렸다.
그제야 다니엘은 움직였다. 그 눈물을 삼킨 뒤에야. 눈물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건만,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손짓에 그녀의 눈가가 마르고, 미소만이 남았다.
“고마, 워요, 다들.”
리샤는, 아니, 그들의 황녀는, 고작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 저리 행복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킁, 그럼 저쪽에 모두 서주실래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꿈의 공간이 있었다. 만발한 꽃들과 비단으로 장식된 자리들. 모두가 그리로 향했다. 환하게 웃는 리샤를 위해.
리샤는 멀거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기운이 빠졌는지 간혹 비틀거리면서도…….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것 같았다.
‘……이상한 데에서, 소심해져요, 당신은.’
다니엘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리샤. 이리로 와요. 그것은 제게 맡기고.”
기억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의 용기 없음을 탓할 일은 없지만,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제가요……?”
마치 그런 상상은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그녀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이걸 들어야 하는데.”
그때 소피아 영애가 눈가가 붉어진 채로 리샤를 보다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아뇨, 제가 들겠습니다! 누구든 떠올리고 쥘 수만 있으면 되는 거죠, 전하?”
“그, 그렇긴 해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리샤가 답했다. 그리고 어색하고 조금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았고, 다른 이들이 에워싸듯 자리 했다.
소피아는 기억력이 좋지 못한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장면을 눈이 빠지도록 응시한 뒤, 곧바로 돌멩이 도구를 쥐었다.
이윽고, 그 도구를 올려놓은 종이 위에 느릿하게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와아.”
소피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리샤는 멍하니 앉은 채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심정을 짐작하며, 다니엘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애달픈 미소를 그렸다.
한편 유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리샤를 보는 것조차 쉬이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다 끝나버린 것처럼.’
마치 모든 걸 정리하고 털어버리는 것처럼 구느냐고.
‘……다시는 없을 추억 속의 한 장면인 것처럼.’
그러나 돌아올 답이 두려워서, 그저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포즈를 잡고, 웃고, 행복한 척만 했다.
거의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녀는, 자신을 함께 남기자는 다니엘의 말을 듣자 아주 낯선 말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여직 저 상태다.
자신이 속한 단체 그림.
‘저 반응을 보면, 생각도 해본 적이 없으신 거겠지.’
저토록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리샤가 한참 만에 뱉은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제인 남매도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는 미소가 더해지자, 마냥 처연하던 덤덤한 얼굴이 보드라워졌다.
그의 주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애틋하고, 외롭고, 다정한 분. 멀어지는 자취마저, 지켜드리고 싶은 분. 유진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황녀의 또 다른 진면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일 터진 것 같은데.”
리샤가 열심히 그림을 남기는 동안, 헤레이스가 그들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 * *
맙소사. 우리 언니. 언니를 이렇게 담았어요!
파티가 끝나는 시간. 나는 소피아가 쥐어준 단체 사진을 들고 감격으로 떨었다.
맞아, 이 몸 우리 언니 얼굴이잖아. 엉엉, 드디어 단체 사진을 쥐었어!
‘다 이루었도다.’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저것 여러분과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은걸?
그러다가, 마지막 그림사진을 확인하면서 문득 물었다.
“그런데, 제인 남매는 언제 온대요?”
다 끝나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있었다.
‘슬슬 걱정되는데.’
잠깐 들어와 있던 엠마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별일 없겠지.’
다시 사진들을 보았다. 마지막 그림사진은 누가 찍어준 우리 언니의 모습이었다. 장미꽃을 가득 모아둔 자리에 서 있는 모습.
‘어색해서 어떨까 했는데, 생각보다 잘 나왔네!’
언니는 하얗고, 청초하고,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어쩐지 조용해진 주변을 느끼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들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왜들 그래요?”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의아하게 보다가, 다시 제인 남매에게 생각이 미쳤다.
‘이상하다. 이렇게 안 올 리가 없는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집 주변에 지켜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되뇌고 있을 때였다.
“찾은 것 같아.”
헤레이스가 다니엘에게 속삭였다. 바로 곁에 있어서 들렸다.
무언가 불길했다.
“리샤.”
그때 다니엘이 나를 불렀다.
“막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내 주변에서 막내라고 불릴법한 사람은…….’
막내라면 하나뿐이다.
“콜린이 왜요.”
제인 남매의 막내 콜린. 불길한 기분이 든다. 9살이 되었지만 보기에는 5살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작은 아이였다.
“검은 동굴에 끌려간 것 같아요.”
“뭐라고요?”
검은 동굴이라니. 내가 제인 남매를 구해낸 곳이었다. 정확히는 그 곳에 가서 화를 입기 전에 구했었다. 제인 남매는 원작에서, 검은 동굴에 갔다가 노예로 팔릴 뻔하고, 고초를 겪던 중에 화재를 겪었다.
‘구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어떡하지?’
내 기색을 본 다니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선물을 사러 가는 길에 당한 것 같아요.”
“선물이라뇨?”
분명 콜린이 아파서 제인 남매가 늦게 온다고 했었는데. 경악해서 묻자,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실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늦게나마 사오겠다고 감기에 걸렸다고 둘러대 달라고 했거든요.”
“리샤.”
저쪽에서 유진, 카인과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하던 헤레이스가 나를 보고 날듯이 다가와 말했다.
“선물만 사러 잠깐 나왔다가 막내만 납치된 것 같아.”
지키는 사람도 붙여놨는데, 검은 동굴에 끌려갔단다.
“혼자 고르고 싶다고 해서 보냈더니…….”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거긴 인신매매도 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언제 벌어진 일이에요?”
“조금 전 일이야.”
헤레이스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무슨 일인가 하며 이비엔 경과 소피아 영애, 오라버니도 다가왔다.
제인 남매는 나와 가까웠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들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복잡하게 얽혔을 수도 있겠는데.”
헤레이스가 다소 냉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우리 일에 그 남매가 도움을 준 적이 있거든.”
나는 절로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도움이라고요?”
“리샤가 반기지 않을 거라고 말리긴 했는데. 제인이 강경하더라고.”
예상은 갔다. 내게도 그런 기색을 슬쩍 비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내 바깥 소문을 수집하거나 처리하는 데에 제인 남매가 무언가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검은 동굴에 대해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파하드 후작을 건드렸어요?”
내 말에 우리 미남들을 포함해 몇몇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내가 알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맞구나!
미친. 내가 검은 동굴의 화재를 막을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후작이었는데.
“큰일이네요.”
파하드 후작은 황태자파의 귀족으로, 수도 귀족들 중 꽤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뒷세계의 큰 손이니까요.”
나는 무작정 아는 것을 다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조용해진 주변은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큰 손 이상이죠. 그가 암시장의 중심이니까요.”
암시장의 중심이라 함은, 뒷세계에서는 왕이라는 의미였다.
‘정체가 감춰져 있지만, 아마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겠지.’
적어도 원작에서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 알 만한 사람들이 주요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냥 납치된 게 아니라 후작을 건드려서 납치된 거라면.”
놀란 표정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궁인들도 없고, 내가 믿는 사람들만 있었으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다니엘이 우리 주변에 막을 드리웠다.
“오라버니.”
그리고 그 믿는 사람들이, 나중에 이 파하드 후작을 벌레 밟듯이 처리했던 경로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작에서처럼 오래 걸릴 필요는 없었다.
‘내가 원작을 아니까.’
이윽고, 내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가 골칫거리시죠?”
“음?”
“이참에 확실하게 손에 쥐시는 건 어떠세요?”
나중에 파하드 후작은 황태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별짓을 다 한다. 지금도 기미가 보일 것이다.
내 말에 날 빤히 보던 오라버니는 이윽고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누이가 원한다면야.”
됐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방긋 웃은 뒤, 나는 원작에서 아리엘을 위해 오라버니와 함께 움직였던 세 미남에게 말했다. 그때는 납치된 게 아리엘이었지, 아마?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차례로 둘러보며 하는 말에 얼굴색이 조금 나아진 유진이 답했다.
“얼마든지요.”
카인도 나를 빤히 보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헤레이스가 어쩐지 신난 표정으로 답했다.
“뭔데? 말만 해!”
다니엘이 곁에서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한 번 보며 가만히 웃어준 뒤,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
그러니까,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더라?
“파하드 후작은 검은 동굴을 중심으로 일종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어요. 그 동서남북을 다 치는 거예요. 동쪽은 볼턴 경, 서쪽은 아이릭 공작, 남쪽은 헤레이스가 맡아주세요.”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입구와 암호, 방법을 줄줄 말해주었다. 원래는 헤레이스가 이걸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콜린은 북쪽 지하에 갇혀 있을 거예요. 아니라도 북쪽에 있겠죠.”
후작저도 함께 있는 북쪽은 입구가 두 개다. 후작저와 또 다른 곳.
“다니엘,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그도 제인 남매와 안면이 있으니 해줄 것 같았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다니엘이 북쪽을 맡아주세요.”
내친김에, 원작에서 그들이 조금 겪었던 당혹스러운 함정이나 예상할 수 있을 만한 돌발 상황들에 대해서도 줄줄줄 말해주었다. 아무도 내 말을 끊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고맙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오라버니가 후작저에 가시면 끝날 거예요.”
정답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우리 막내는 무사할 것이다!
“저는 아마 도움이 안 될 테니, 제인과 함께 있을게요. 지금 많이 불안할 거예요.”
마침내 말을 마친 나는 목이 타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문득 주위가 심하게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
무언가 멍한 표정들이었다. 다니엘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잠시 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가일 후작을 오라버니가 툭 쳤다. 가일 후작은 나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하군.”
그리고 잠시, 아주 즐거운 낯으로 나를 보던 오라버니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믿어보지. ……다들 안 움직이고 뭐하나?”
그 말에 정신이 든 듯, 유진과 카인이 움찔했다. 헤레이스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 직전에 다니엘에게 저지당했다.
“리샤, 같이 가요. 제인 집에 갈 거죠? 데려다줄게요.”
제인을 여기 데려오는 게 아니라 제인 집에서 함께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발버둥 치며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헤레이스의 눈빛을 말끔하게 무시한 뒤, 그대로 나를 안아들었다.
“……걸어가면 안 될까요?”
“가다가 분명히 지칠 거예요. 그냥 가요, 리샤.”
넹.
뭔가 거부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왜인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 밤이 지나기 전. 우리는 수면제를 마시고 지하 감옥에서 도롱도롱 잠들어 있던 막내를 무사히 되찾았다.
* * *
리샤의 또 다른 친구인 제인 남매에게 붙여 놓았던 수하가 연락을 해온 것은 파티가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아, 하필.’
그 막 나가는 헤레이스조차도 순간 낭패감을 느꼈을 만큼, 파하드 후작은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인질까지 잡혔다면 더더욱.’
파하드 후작가. 리샤의 소문을 퍼뜨린 큰 세력 중 후보에 있었던 이들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리샤의 바깥 소문에는 근본적으로는 얽힌 바가 없었지만, 그걸 확인하는 데에 약간의 마찰이 생겼었다.
“그 남매를 애초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헤레이스의 소식에 곧장 유진이 말했다.
“자원했고, 그 마음을 알고 있으니 받아들인 것이었네. 일단은 해결에 집중해야 해.”
카인의 말에 헤레이스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즈음, 헤레이스만큼이나 소식이 빠른 다니엘이 사단이 일어났음을 리샤에게 알렸다. 셋은 다소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리샤를 지켜보았다.
‘너무 놀라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부분에서 그들과 의견이 다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리샤에게 명확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알게 된 이상, 그들은 조금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헤레이스가 상황이 왜 심각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게, 우리 일에 그 남매가 도움을 준 적이 있거든.”
가능한 한 놀라지 않게 말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헤레이스는 아주 크게 놀라고 말았다.
“혹시 파하드 후작을 건드렸어요?”
겨우 저만큼 언급한 것만으로 어떻게 파하드 후작을 떠올릴 수 있지? 헤레이스가 드물게 진심으로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큰일이네요.”
그렇게 굳은 얼굴의 리샤는 처음 보았다. 유진과 카인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뒷세계의 큰 손이니.”
무슨.
셋이 동시에 멈칫했다. 그러나 그들의 당황과 상관없이, 리샤의 말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아니, 사실은 큰 손 이상이죠. 그가 암시장의 중심이니까요.”
쿵.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황태자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도 최근에야 어렴풋이 눈치챈 사실이었다. 증거가 없어서 두고 봤을 뿐이었지.
‘본거지 입구를 알기만 하면 해결인데.’
어쩌면 그 막내라는 꼬마는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이는 어째 침착해 보였다. 슬쩍 눈을 굴려보니, 다니엘이 이미 막을 친 상태였다. 아마 밖에서 황태자가 준 담요 더미와 함께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아리엘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태자가 만족스럽게 다니엘을 보면서, 리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냥 납치된 게 아니라 후작을 건드려서 납치된 거라면…….”
희망이 없겠지. 황태자는 누이를 살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오라버니.”
그때였다. 리샤가 갑자기 그를 돌아본 것은.
“솔직히 그가 골칫거리시죠?”
“음?”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누이를 보았다. 차분하고, 이지적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새로웠다.
“이참에 확실하게 손에 쥐시는 건 어떠세요?”
황태자는 누이를 빤히 보았다. 그래, 누이는 상당히, 뛰어난 인간이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식견을 가진 줄은 몰랐지만. 달가운 기분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가 원한다면야.”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리고 이어진 리샤의 말에, 주위는 숨을 죽였다.
“파하드 후작은 검은 동굴을 중심으로 일종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어요. 그 동서남북을 다 치는 거예요. 동쪽은 볼턴 경, 서쪽은 아이릭 공작, 남쪽은 헤레이스가 맡아주세요.”
황태자조차도 이어진 말에는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그조차 알 수 없었던 본부의 위치와 입구. 네 개나 된다는 그 입구를 공략할 방법, 위험한 부분, 사소한 암호들까지. 마치 눈앞에 그 장소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리샤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콜린은 북쪽 지하에 갇혀 있을 거예요. 아니라도 북쪽에 있겠죠.”
경악에 잠긴 주위를 리샤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이라는 자가 북쪽을 맡았다. 그 제안에 그자의 눈빛이 찰나 간 미묘하게 빛났다. 리샤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물론이죠.”
부드럽게 응수하는 낯짝을 황태자가 가만히 뜯어보았다.
헤레이스에게 듣기로 그는 암살길드장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았음에도, 황태자는 제 누이 곁에 붙어 있는 인간들 중 저 인간이 가장 미심쩍었다. 그리고 그 감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암살길드로 위장하고 있는 그의 진짜 무리를 리샤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저는 아마 도움이 안 될 테니, 제인과 함께 있을게요. 지금 많이 불안할 거예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리샤가 물을 마신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황녀를 보았을 뿐.
늘 밝은 모습만 보다가, 냉철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니 새로웠기 때문일까.
‘아리엘이 이걸 못 봐서 다행이군.’
봤다면 꽤나 곤란해졌을 것이다.
황태자는 누이를 가만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내가 아는 정보와 거의 일치해.’
아니, 더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들로 미루어 볼 때 꽤나 믿을 만한 정보였다.
뿐인가.
‘지시하는 것들이 상당히.’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었다.
그것은 또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각자의 실력과 세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거지.’
그가 알던 것보다 누이는 훨씬 유능했다.
‘거기다.’
누이는 그가 후작을 협박할 기회까지 빠짐없이 만들어서 쥐여 주었다.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다들 안 움직이고 뭐하나?”
가일 후작을 툭 치며 황태자가 말했다. 그리고 다니엘과 리샤 쪽을 다시 보았다. 둘이 뭔가 실랑이를 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황태자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심코 안아든 리샤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다가 분명히 지칠 거예요. 그냥 가요, 리샤.”
짧은 시간, 많은 고민이 스쳤다. 그녀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설사 그에 대해 그녀가 무언가를 더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걸로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의 무리에게 리샤는 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어쩌면 믿고 싶은 것일지도.’
그저 기억되기만을 바라며, 그림 한 장에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는 그녀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그런 경계심 이상으로 탄복하고 있었다.
‘대단해.’
다니엘은 아까 경악하던 유진과 헤레이스, 그리고 눈을 빛내던 카인을 떠올렸다.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정보는 결코 많지 않아. 그렇다면 이건 통찰력이겠지.’
리샤의 정보는 정확하다. 그것을 헤레이스는 몰라도 다니엘은 알았다. 때로는 암살길드에서 더 잘 알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그 날 저녁. 그들은 막내를 되찾았고, 아주 오랜 세월 뒷세계의 왕으로 군림했던 파하드 후작은 황태자의 완벽한 말이 되었다.
……그리고 리샤는.
그 모든 상황과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 제인의 집에 그대로 하루를 머물렀다.
“자, 이것 봐요. 제인, 신기하죠?”
언제나와 같은 고운 미소를 머금고서.
“콜린이 깨어나면, 이거 보여줘요. 기뻐할 거예요.”
제인 남매와 그녀, 그리고 다니엘이 함께 있었던 어느 날의 평화로운 정경을 담은 그림.
“전하…….”
고마움이 가득한 물기 어린 눈으로 제인이 리샤를 바라보았다.
“이런 귀한 것을, 이런 것까지 바, 받을 수는…….”
그러나 울먹이며 말을 멈춘 제인에게 리샤가 조금 쑥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 사실 음, 제가 힘들 때 보려고 이렇게 남기는 거라서. 특별히 빌려주는 거니까 어서 받아요.”
부담 갖지 말라고 하는 말에 제인이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받았다.
호위로 복귀한 유진, 카인과 헤레이스, 그리고 다니엘은 그저 방해되지 않는 거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
“리샤님.”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침묵을 깨고 카인이 리샤를 불렀다.
“전에, 제게 말씀하셨지요.”
그답지 않게 어딘가 주저하는 어조였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유진은 그때를 떠올렸다. 카인이 리샤를 돕기 위해 모임에 참여했을 때, 카인은 그녀에게 황태자를 견제하는 패가 되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리샤는 그때, 그런 자리에 자신은 관심이 없다고 했었다.
“그때, 리샤님은 스스로가 자격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 네, 그랬죠.”
리샤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유진은 지금 카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잠시 말이 없던 카인은 그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말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의 머뭇거림 끝에, 카인이 말한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어디에서든, 저를 그렇게 이름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실은 다니엘과 헤레이스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유진과 카인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불렸으니까. 어디서나 그녀를 리샤라 부르는 것도, 늘 이름이 불리는 것도. 드러내기에는 조금 사소하고 유치한 부러움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러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카인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전하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리샤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도 괜찮다면, 좋아요.”
카인은 그 미소를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그가 인정한 주인은 앞으로 그녀뿐이라는 말은, 가슴에 담아두기로 했다. 그저 저 미소를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
“그럼 저도 늘 리샤님이라고 불러줘요.”
이번 일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매우 자질이 뛰어났다. 그저 안쓰럽게만 보던 마음에 조금 다른 성격의 아쉬움이 깃들었다. 활동적이지 않은데도 세상을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다. 이비엔 경이 늘 하던 말들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놀라움 뒤에 찾아온 것은 잔잔한 감동이었다.
‘그 그림을 제인에게서 다시 가져오시는 일은 없겠지.’
많이 놀랐을 제인은 리샤의 몇 마디로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쌍둥이 소년들도, 그리고 깨어 있었던 콜린이라는 아이도.
‘사랑받을 군주의 재목.’
스스로도 알았으리라. 그러니 어쩌면 그녀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꾸었겠지.’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겠지만.
‘파하드 후작이 이렇게 단숨에 무너져 버릴 줄을 누가 알았을까.’
자유롭게 살기만을 원한다고 했던 그녀를 떠올렸다. 카인은 그것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당신이 입에 담는 자유라는 말에는…….’
조금도 티 내지 않았던 그녀의 노력과 희망. 그리고 꿈을.
‘미래에 대해 꿈을 꾸는 것은, 애초에 들어 있지 않았던 거야.’
그녀가 겪고 있을, 미래를 잃는다는 고통에 대해서는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은 살아갈 자들이라서. 그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를, 병을 알게 된 순간 손에서 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 놓아버린 것들은 너무나 눈부시고 훌륭해서, 더욱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자신도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리샤를 말없이 보았다. 한 점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가 여느 때와 달리, 마냥 애틋하지만은 않았다.
“그리 하겠습니다. 리샤님.”
참으로 존경스럽고, 또한 귀한 사람이었다.
“리샤님, 허락하신다면, 저도.”
“당연하죠! 유진, 그렇게 불러주면 저는 기쁠 거예요.”
조금 비틀거리며 답하는 그녀를 다니엘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부축했다. 카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인은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괴물의 피를 이은 자였고, 충심을 가지기엔 삶이 너무 지난했다. 리샤를 향해서도, 충성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충심은 친분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므로.
그러나 가지게 되었다. 기어코 그렇게까지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덧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그의 주인을 향해, 카인이 한 손으로 가볍게 가슴을 치며 경의를 표했다.
* * *
제인의 집에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돌멩이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어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오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안정을 되찾았던 제인이 내게 물었다.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에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눈가가 붉어진 채로 쌍둥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기사님이네요?”
푸른 머리칼을 가진 펠이 나직하게 물었다.
“저건 그 까만 머리 공작님이시고요.”
붉은 머리칼을 가진 넬도 말했다. 나는 뿌듯하게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그들 앞에서 또 돌멩이를 쥐었다. 이윽고 남매가 감탄사를 흘렸다.
“우리들이네요.”
제인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매와 나, 그리고 다니엘이 같이 있을 때의 일상이었다. 다들 얼굴이 다 잘 나올만한 기억을 떠올리느라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림이 완성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된 그림은 사진 못지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차에, 우리의 막둥이 콜린이 집으로 돌아왔다. 박차고 달려 나간 애들을 반기는 것은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는 콜린이었다.
“벌써 끝났어요?”
탄성을 지르며 묻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다 리샤님 덕분이죠.”
그 뒤에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남은 건 황태자 전하의 일뿐이에요.”
“걱정 없겠네요.”
아이를 받아들며 답하자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마지막에 그린 그림을 제인에게 주고 돌아왔다.
‘빌려준 거기는 한데. 못 받을 거 같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더니 제인이 액자에 끼워서 벽에 달아두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왔기 때문이다.
‘뭐, 괜찮아! 많으니까!’
앞으로도 남길 수 있고 말이다. 한 명씩 남기고, 단체로도 남기고! 우후후후.
‘그래도 마법테러일 이전에 있을 사건 중에 제일 큰 건 처리했네.’
사실 후작을 처리하는 건 마법테러 사건 직전에 처리할 사건이었다. 그런데 내 소문을 정리하면서 후작을 본의 아니게 건드렸고, 사건이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이제 자잘한 일들만 남았나?’
우리 미남들이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일들이라면 다 정리해야지. 히히히.
“리샤님.”
뿌듯하게 웃으며 걷고 있는데, 카인이 나를 불렀다.
“전에, 제게 말씀하셨지요.”
음?
“……자유롭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왜 지금 그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거야 지금도 변함이 없지.
나는 멀뚱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그렇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샤 님은 스스로가 자격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네, 그랬죠.”
카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뜬금없게도 언제 어디서든 자기를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저, 정말? 허, 안 그래도 그거 말하고 싶었는데, 먼저 말해 주다니! 나는 감격했다. 밖에서만 부르는 것도 감지덕지였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유진까지 나섰다. 나는 환희에 감싸이며 그에게 외쳤다.
“당연하죠! 유진, 그렇게 불러 주면 저는 기쁠 거예요.”
나의 순탄한 덕질 인생은 오늘도 건재했다. 우하하하.
* * *
복사 마법으로 단체 사진과 개별 사진을 복사해서 다 나눠 주었다. 나는 모든 사진들을 모아서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뿌듯하다. 으으.”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유진은 내 호위 기사로 복귀했고, 카인은 자주 놀러 오겠다고 하면서 매일 오고 있고, 헤레이스는 자기 내킬 때 온다고 하면서 매일 오고 있다.
“아주 그냥 더 바랄 것이 없네.”
또 피를 토하는 날. 기억이 돌아오는 걸 느끼고 있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나와 분리되어있는 느낌이었던 몸에 확 감각이 돌았다.
“어…….”
가슴 부근부터 시작해서 찌릿한 감각이 쿡 찌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너무 순간적이라 착각인가 싶기도 했다.
‘이상해.’
너무 짧아서 거의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어? 하는 사이 지나갔으니까.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했다. 좀 전과는 달리 멀쩡했다. 평소처럼. 거울을 보았다.
‘창백하네.’
멍하니 생각했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하지만…….
‘좀 쉬어야 하나?’
그래. 아직 언니의 병은 나은 것이 아니었다. 진행 중이니까 무리하면 안 좋을 것이다.
‘콜린 일이 좀 무리였나? 하지만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흠.’
조금 머리가 멍했다.
“세상에, 전하!”
멍하니 걸어서 방 밖으로 나왔는데 누군가 나를 보고 눈을 화등잔만 하게 키우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큰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가 보니 이비엔 경이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그녀와 엠마가 함께 있었다.
“좋은 아침.”
열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엠마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전하, 일단 들어가시지요.”
“응?”
“안색이 너무 창백하십니다. 우선 누우시는 것이 어떨까요?”
엠마가 말을 잇기도 전에 이비엔 경이 말했다. 둘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아까 거울 속 창백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가만히 누웠다. 엠마가 연구실의 록스를 부르러 간 사이 이비엔 경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것 들으셨습니까? 대극장에서 태양의 요정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그게 진짜인가요?”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태양의 요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태양의 요정 연극은 저번에 황태자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된 파하드 후작이 주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하드 후작은 황태자파이면서도 황태자의 신경을 긁는 일을 가끔 하고는 했었다. 저 태양의 요정 연극도 마찬가지.
‘본래는 오라버니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연 거였는데.’
그리고 이 즈음의 파하드 후작은 슬금슬금 황태자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었다.
‘저 연극은, 황태자 암살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어.’
황태자가 왔다는 것을 암살자들에게 알리는 표시였다.
‘하지만 파하드 후작은 이제 오라버니 손에 있잖아?’
이상한데. ……그 후작이 미쳤나?
“그거 ‘드마리히’ 극단이 올리는 극이에요?”
“아, 그게 말입니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이비엔 경이 답했다.
“본래는 그저께 갑자기 취소되었는데, 어떤 극단이 나타나서요. ‘누바’ 극단이라고 했던가요. 그런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전하.”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말했다.
“글쎄, 표에 ‘파티는 계속된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게 무슨 사인이라도 되는 걸까요?”
이비엔 경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나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후작의 극단인 ‘드마리히’ 극단이 아니라니.
‘게다가 저 문구.’
후작의 극단을 도발하는 건가? 그럼 후작과 나쁘게 얽힌 극단이라는 걸까?
‘하지만, 저거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잖아.’
기분 탓일까. 파티라는 저 말이 꼭 원작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조금 소름이 돋았다.
원작의 사건. 그것은 아리엘이 극장에 저 연극을 보러 갔다가 겪는 사고였다. 아리엘이 극장에 저 연극을 보러 갔는데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무리가 나타나게 된다.
‘그 사건에 휘말려 여러 사람이 죽었었지.’
유진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마 거기 있던 사람은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아리엘 랭턴의 생일에 일어나는 사고였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저 파티라는 것이 황태자 암살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원작에서는 유진이 아리엘을 구해 주면서 본격적으로 황태자 눈 밖에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작은 바뀌었으니까.’
이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경, 이 연극, 언제예요?”
“이 연극이요? 내일모레입니다.”
점점 불길해졌다. 그 사고, 아리엘의 생일과 겹쳐 황태자가 드물게 극장에 가면서 일어나는 사고니까.
‘어떡하지?’
암살 계획이 진행 중일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누구한테 알릴 수도 없고,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암살 계획의 일부라면, 파하드 후작 대신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면.’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사고가 날 걸 알고 있는 이상 막아야 한다.
‘여기는 르페르샤 언니의 세계니까. 더더욱.’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싶다.
원작의 흐름대로 황태자 오라버니가 유진에게 살심을 품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많이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오라버니도, 유진도.
‘……원흉인 아리엘도.’
으으.
나는 어제 내 독사진을 한 장 슬쩍 가져가려던 하얀 손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제 열심히 복사를 마친 사진들을 뿌듯하게 보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사진 몇 장이 실수로 바람에 날아가 정원의 덤불 쪽에 떨어졌다. 당연히 나는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그 사진을 누군가 사사삭 소리와 함께 턱 손으로 짚더니 가져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눈앞에서 그 괴상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잠시 후 나는 덤불 속에서 비명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랭턴 영애?”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리엘 랭턴과.
“저, 전하!”
황홀한 것 같은 눈빛으로 아리엘이 벌떡 일어섰다.
덤불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너무나 달랐다.
“지, 지금…….”
물을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할 때 싸늘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싸늘하게 보며 묻자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그것이…….”
허둥거리며 앞뒤 없는 설명을 이어 가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녀를 천천히 살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의 커다란 담요, 옆으로 살짝 빠져나온 허리 부근의 방석 모서리, 머리칼에 듬성듬성 붙은 이파리들.
“저, 편지를! 꺅!”
“…….”
나는 뜬금없이 울리는 짧은 비명 소리에 그녀를 보았다. 말하다가 혼자 흥분한 것 같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걸까, 이 여주님은!
싸늘함이고 뭐고, 나는 그냥 그녀에게서 사진을 수거하고 조용히 돌려보냈다. 정신이 없어서.
“…….”
엉엉. 언니 저 무서워요. 새삼 그때를 떠올리니 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뭔가 제대로 잘못 걸린 것 같아! 그러니까 언니, 빨리 기억 다 보여주고 한번 만나 줘요…….
물론 언니는 답이 없었다.
* * *
어쨌거나, 나는 극장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고려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요즘 빨리 지치고 회복도 더딘 거 같아.’
완전히 기억을 찾기 전까지는 악화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해.’
뭔가 몸의 감각이 처음에 비해 굉장히 생생해졌다.
‘그리고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게 문제였다. 언니가 완전히 합쳐지기 전까지는 고통이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 잠깐씩 확 고통이 느껴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꼭,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라도 언니가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속으로 말해보았다.
‘언니, 그 죽는 사람들은 언니의 제국민들이고, 그리고 유진도 휘말리게 되는 걸요?’
솔직히 언니가 황녀로서 제국민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황녀로서 죽기를 바란 언니라면 이대로 외면하는 걸 반길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리엘도…….’
정이 든 건 모르겠는데, 그래도 알던 애가 죽으면 찜찜하지 않은가. 원작에서야 유진이 구해줬다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니, 이거 위험한 건 당연히 알고 있어요! 근데 안 위험해요!
“젠.”
확실하다. 언니가 말리고 있었다. 감각이, 그리고 고통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이…….
꺅! 언니! 진짜 저 안 위험한데!
[주인? 잠깐. 이게 대체 뭐지? 주인의 영혼이……!]
“……괜찮아.”
나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원작대로라면 저 연극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주위 땅까지 날카롭고 깊게 패여서 산 지옥을 연출하게 된다. 물론 극장에서 기본적인 대비는 하고 있겠지만, 이건 재난 수준의 일이니까.
‘그리고 적이 누구인지 모르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가서 봐야만 해.’
그리고, 사람들도 가능한 한 구하는 거다.
“저기, 젠.”
[주인. 무슨 일이 있나?]
“있잖아.”
나는 조금 어려워하며 물었다. 젠과 계약을 했기 때문에, 젠의 집이나 다름없는 이 일기장을 활용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 중 실드가 있었고. 본래 일기장에 걸려 있는 실드는 소소한 수준이지만, 젠과 계약한 후라면.
“극장 하나를 지킬 만큼 크게 실드를 펼치면, 어떨 거 같아?”
계약자의 영혼이 정령과 공명하며 마법이 증폭된다.
[무조건 무리다. 주인은 특히나. 한 번 그걸 시작하면, 계약자가 혼절하고 의식이 끊겨도 명령한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근본적인 것을 이루는 마나를 소모하게 된다.]
“그 말은, 내가 쓰러지더라도 유지는 할 수 있다는 거네?”
다행이다. 언니, 거 봐요. 죽진 않는다니까요?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위험하대도!]
“괜찮대도.”
젠은 잠시 침묵 후 말을 이었다.
[꼭 써야 한다면, 좋다. 주인이 무리하기 전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오, 솔직히 말해서 반대할 줄 알았는데. 그때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젠이 말했다.
[어차피 반대해봐야 소용없다. 주인은 늘……. 그러니까.]
“내가 뭘?”
[아니다.]
젠은 어쩐지 굳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렇게 될 바에야.]
“그렇게 되다니?”
[아니. 차라리 주인이 하려는 일을 도와서, 조금이나마 덜 고통스럽게 하는 게 낫겠다는 말이다.]
요약하자면, 힘껏 도와줘서 부작용이 적게 해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고마워, 젠.”
그리고 나는 곧바로 오라버니를 찾아갔다. 암살이 걸린 것이라,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확실하게 말하면 도리어 내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극장 가신다면서요. 아리엘 영애도 있고 하니, 평소보다 더 호위를 신경 써주세요. 편하게 다니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요. ……적이 많으시잖아요.”
그런데 뭔가 반응이 미묘하게 생각한 것과 다르게 돌아왔다.
“……고맙다.”
“네?”
“하지만 그보다.”
의심 한 조각 없이 무려 고맙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고 있는데, 오라버니가 돌연 얼굴을 굳히며 내게 말했다.
“누이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쉬어.”
“……그, 오라버니.”
나는 그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하기로 했다.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요.”
“무슨 의미지?”
“그러잖아도, 요즘 파하드 후작도 정리하시고, 활발하게 움직이셨잖아요. 솔직히 암살 시도가 걱정되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안 갔으면 좋겠다.
“과한 걱정이라고 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아니, 맞는 말이다. 후작도 오늘은 말렸고.”
오라버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랬어요?”
가일 후작이 까칠하기는 해도 판을 읽는 능력은 탁월한 인물이었다. 괜히 오라버니 측근이 아닌 것이다.
“좋아. 가능하면 극장은 피하도록 하지. 그런데 누이는?”
“음, 저는 볼일이 있어서요.”
“극장에?”
“네. 사실 유진이 그쪽에 갔거든요. 뭐라고 구체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맥나한 가문 일인 것 같고. 그 가문이 이렇게 나서는 일이라면, 위험할 거라는 건데. 파하드 후작도 없는데, 이상하잖아요.”
“그 위험, 내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다니엘이 나타났다.
“전하는 저와 가시면 됩니다.”
“다니엘.”
내가 돌아보며 웃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지하게 나를 보았다. 오라버니가 다니엘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젠이 부른 것 같았다.
‘잘됐다.’
리니와 아린은 다니엘과 극장에 간다는 말에 의욕에 불타올랐다. 딱 극장 가는 스타일! 뭔가 무도회 때랑은 다르게 반짝이는 치장이었다. 근데 진짜 창백해서, 발그레하게 뺨을 물들였어도, 그냥 새하얀 인형 같았다.
‘확실히, 정말로 몸이 별로 안 좋아.’
전반적으로 무거운 느낌이다. 눈이 감기려는 것을 애써 털어냈다.
‘정신 차리자.’
이미 유진은 오늘 양해를 구하고 그 연극 장소로 갔다.
‘파하드 후작이 없는데, 왜 흐름은 바뀌지 않았을까.’
해결해야 하는 의문이었다.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때 다니엘이 손목을 가볍게 잡는 것이 느껴졌다. 맥 재려고요. 입모양으로 지나가듯 설명한 그가 눈을 내리깔고 집중했다. 그 모습에 온갖 근심 걱정이 소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내 손가락 끝에 다니엘 손이 닿았다. 헉, 하고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그를 미묘하게 보다가 혼자 슬쩍 웃었다.
“고마워요.”
무거운 몸 때문에 처지려던 기분이 덕분에 좋아져 있었다.
“내 옆에 있어줘서요.”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돌아온 질문은 뭔가 미묘했다.
“당연하죠.”
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살아서.”
“살아서! 당연한 말을. 사는 동안, 옆에 꼭 붙어 있어야죠. 나랑 계약까지 했잖아요?”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웃어주며 손을 빼내고, 진통제를 집어 들었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고통이 아주 살짝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아이 참. 언니, 걱정 말래도요.
“살아 돌아올 테니까.”
나직하게, 언니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다니엘이 말했다.
“……헤레이스랑 아이릭 공작도 조사하러 간다고 했어요.”
“헤레이스도요?”
헤레이스가 받은 예언에 대해 다니엘과 했던 대화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다니엘이 내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샤의 추측이 맞았어요. 파하드 후작이 자백했다고 하네요. 황태자 암살 계획이 있었다고.”
어느새 화려한 대극장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간지러운 그의 손길에 옅게 웃었다.
“헤레이스는 무사할 거예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가 무언가 바라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더는 돌려줄 말이 없어서 어리둥절하게 마주 보았다. 그는 잠시 뒤,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채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자리에 앉았다. 대극장 2층에서도 두 번째로 화려한 좌석이었다.
“유진은 어딨어요?”
“저기요.”
무대 맨 앞이었다. 음, 몰랐는데, 진짜 좋아해서 보러온 모양이다.
아래에서 배우들이 등장했다. 태양의 요정을 연기하는 배우가 중심에 서 있었다.
<무너진 세계. 혼돈의 시대. 우리는 노래하네…….>
아름다운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어쨌든 연극은 재미있었다. 다니엘은 조금 미묘한 표정이었지만.
“왜 그래요?”
“음. 저 연극. 원작과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어떤 부분이요?”
“……글쎄요. 배우의 매력이?”
그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극 중 누가 보아도 눈이 멀 정도로 매력적인 요정이니까요.”
“아하하, 그거참.”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매력만 놓고 보자면, 딱 다니엘이네요.”
“……아.”
다니엘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느른하게 웃기만 하며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무심코 본 그의 옆모습에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의 귀가 아주 조금, 붉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정말.
“다니엘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리샤.”
극이 고조되고 있었다.
“리샤는, 내가 친구로 보이나요?”
배우의 노래와 맞물려, 덤덤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친구가 아니면요?”
되물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나는 다니엘이 좋고, 다니엘도 저를 좋아해 주니, 좋은 일이죠.”
“……아닌 것 같아요.”
그는 무언가 헤매는 것 같은 분위기로 말했다.
“그냥. 난 당신이, 내 것이 되기를 바라요.”
“다니엘. 그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나 말한다고 하려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약간 뺨에 열이 몰리는 느낌이어서. 그러다가 문득, 나는 차가운 감각을 느꼈다.
“어…….”
이건, 진짜 이상한데. 떨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르페르샤 언니인 것 같았다.
“리샤. 물러나요.”
다니엘이 굳은 얼굴로 나를 감싸듯 움직였다. 그리고.
쾅-!
지척에서 굉음이 터졌다.
어……?
나는 사방에서 솟는 불길을 보고 아연해졌다.
“불의 마법사라니!”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누가 외친 소리에 저 불길이 마법인 것을 알았다.
‘아, 저기에.’
사람들이 불의 마법사라고 소리친 것은, 그 마법사가 모습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무대 가까이에서 남성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스태프를 휘젓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원작에서는 마법 폭탄만 터졌다고 했었는데?
불의 마법사는 귀했다. 그건 원작에 나온 것 외에는 상식이 다소 달리는 나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불의 마법사만이 아니라 물, 불, 바람, 땅의 근원적인 속성을 가진 마법사 자체가 귀했다. 그들이 쓰는 원소 마법은 다른 마법사가 쓰는 것보다 수배는 강력하다.
“리샤.”
옆에서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나는 내 아래 자리의 상황을 보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그리고 문득,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노래했던 사람과 비슷한 목소리.’
왜일까. 긴박한 순간에 그런 것이 떠오른 이유는.
‘목소리가 아니라, 말투가 닮아 있었어.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을 살짝 끊어서 발음하는 습관.’
그건, 우리 르페르샤 황녀 언니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그건 언니 외가 특유의 발음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돌려 아까 노래하던 사람이 있던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노래하던 사람은 자리를 피한 것인지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강한 마법사군요.”
다니엘의 굳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니엘은 나를 그대로 감싸 안고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원소 마법사라고 해도 강해요. 지금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있는데도 불길이 만만찮고.”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하던 그가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괜찮아요?”
“……다니엘.”
“그대로 피할까 했지만 오기 전의 행동을 봐서는, 리샤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다니엘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언제든 당신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의 눈에 내가 온전하게 들어차 있었다. 질린 표정으로. 그런데 날 담고 있는 그 흑갈색 눈동자는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럽기만 해서.
“젠도 있고요. 그걸 알고 있으니 당신도 위험한 걸 알고도 온 거겠지만요. 그렇죠, 리샤?”
상황에 맞지 않게 평온한 목소리였다. 마음이 점차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맞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꼭 해야 할 말이라 꾹꾹 눌러 담듯 그에게 말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흐린 얼굴로 말했다.
“……저도 제가 여기 함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저 괜찮아요.”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어 준 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나로서는 처음 겪는 상황이라 당초의 계획과 달리 당황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까 그 가수, 찝찝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그거다. 일단 실드를 펼칠 때 펼치더라도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살펴보니, 아직 굉음과 불길만 솟았을 뿐 직접적으로 다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다.
“유진이랑 헤레이스, 카인은 괜찮겠죠?”
“……네. 그러네요.”
이 정도 상황에 다칠 사람들은 아니니까.
“리샤가 온 걸 눈치챈 것 같지만요.”
그래도 다니엘의 확답에 마음이 놓였다.
“오라버니랑 랭턴 영애는 오지 않은 거죠?”
안 오겠다고 오라버니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다니엘의 답이 늦어지고 있었다.
“다니엘?”
-주인. 그 여자는 온 것 같은데?
그때 젠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랭턴 영애가 왔어요?”
“……태자 전하는 오지 않으셨지만요.”
“어떻게 된 거지?”
아리엘 랭턴의 생일에 오라버니가 함께 있지 않다니!
“헤레이스와 유진이 그녀와 만났어요.”
가는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주시하던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보았다. 뭐지! 원작의 기본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건가!
“혹시 분위기가……!”
막 알콩달콩한가?
“음, 좋지는 않네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요.”
나는 잠시 미묘하게 그를 보다가 다시 전방을 보았다. 또 불길이 솟았기 때문이다. 앞서보다 더 큰 불길이었다.
“그나마 대극장이 이런 상황의 대처를 잘하는 곳이라 다행이네요.”
“……그렇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서도 대극장의 훌륭한 대처는 언급되었었다. 긴급히 투입된 마법사들의 물줄기가 사람들이 대피할 통로를 만들며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벽에 걸린 마법들이 인명 피해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소 마법사의 마법을 불식시키기에는 부족할 거예요. 폭탄도…… 더 있을지 모르고.”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중얼거리자 다니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이 옮겨붙고 있어요.”
홀로 위협적으로 불타던 불길이 위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폭탄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니엘, 아까 분명히 굉음이 났는데, 마법 폭탄이 터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불길만 보이네요.”
원래는 땅만 갈라졌었다. 폭탄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리샤, 잠깐 몇 발짝만 떨어져 볼래요?”
가만히 마법사를 보던 다니엘이 뭔가를 했다. 아마 그의 힘을 쓴 거겠지.
‘더는 안 돼.’
상황은 이쯤 알았으면 됐다. 폭탄은 아마 더 터질 것이고, 저 알 수 없는 원소 마법사까지 동원된 이상 이건 진짜 ‘마법 테러’인 것이다.
“젠.”
그때 불의 마법사가 배를 잡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가 실드를 펼치려던 순간, 입구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건!”
태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막지 않으면 안 된다.
“젠, 실드!”
-알았다.
나는 마력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순간 처음으로 체감했다.
심장 밑바닥부터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한 번 띵하게 울리고, 온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고, 실드를 펼쳤다.
-잘 들어라, 주인. 원래는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건 시전자에게 더 무리가 가게 된다.
젠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처음만 주인이 펼치면, 그다음 유지는 내가 하겠다.
나는 굉음이 울린 후 처음으로 다니엘의 표정이 흐트러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막아야 해.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손끝에서 최대한 넓고, 견고한 실드를 갈망했다.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조절 못하고 뻗어 나간 실드가 내 상상보다 어마어마한 모습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법사가 입구 쪽으로 굳이 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원작과 달리 이 테러의 목적은 황태자 암살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몰살시킬 생각인 거야.’
이건 진짜 테러다. 그렇다면 최대한 강력하고 넓은 실드가 필요했다.
“리샤!”
불의 마법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 마법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마주쳤다. 마법사의 표정은 제대로 못 봤지만 마주친 순간, 마법사가 멈칫했으니까.
“리샤, 멈춰요!”
“할 수 있어요.”
아니, 몰랐다면 몰라! 덕질을 떠나서 사람 다 죽을 걸 살릴 방법이 있는데 그걸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냐고!
‘언니, 나 죽지는 않아요! 우리 유진이랑 헤레이스랑 카인이랑 다 멀쩡하게 데리고 돌아갈 거라고요!’
“지킬 수 있어…….”
경고하듯 불길하게 찌릿거리는 심장에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이제는 다니엘에게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최대한 완벽하게 실드를 만들면 젠이 유지해 주겠지.’
그러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들도, 그리고 테러에 당할 뻔한 사람들도.
‘그만한 해피엔딩이 어디 있어?’
식은땀이 흐르는 중에도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수상한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 실드가 짙게 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짙게.
‘더 짙게!’
실제로는 몇 초도 안 되었을 시간이 영원처럼 지나갔다.
-주인. 이제 충분하다.
마법사가 악귀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내게 맡겨.
그가 방향을 틀었고,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음을 깨달았다.
아, 매우 좋아! 이건 내가 이겼어! 상대도 없는 승리감에 희열을 느끼며 나는 몸이 무너지는 중에도 웃었다.
“네년이!”
마법사가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왔지만 다니엘이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감히…….”
눈앞을 가린 그의 손과 나를 단단하게 감싼 그의 품속에서, 나는 마법사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주제를 모르고.”
에헤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마법사에게로 향하는 다니엘의 섬뜩한 목소리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서.
어쨌거나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다니엘, 죽이면 안 돼요…….”
잡아서 뒤를 캐야죠!
다행히 뒷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순간 멈칫한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일단, 알았으니 어서 쉬어요.”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나직하게 이어진 말에 나는 완벽하게 안심했다.
“그럼…… 저는 좀 잘……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맘 편히 꿈나라로 향했다.
* * *
헤레이스와 카인은 극장에 함께 도착했지만 각자 움직이기로 했다.
“아쉽네. 아주 웃겼는데!”
변장을 하고 온 헤레이스를 보고 보기 드물게 확연히 질린 표정을 짓던 카인을 떠올리며 헤레이스가 킬킬거렸다.
“그나저나 리샤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았을까?”
제인의 막냇동생 콜린을 구할 때 말이다.
정보 길드에서도 다 알기 어려웠던 파하드 후작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니. 차라리 그뿐이라면 후작과 아무도 모르는 친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판단.”
그녀는 파하드 후작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전력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냈었다.
“동쪽은 기사 놈, 서쪽은 공작 각하, 남쪽은 나한테 맡겼지.”
헤레이스가 가장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곳이 남쪽 입구였다.
“남쪽부터 시작해서 다른 쪽 정보도 알아 갈 예정이었는데.”
알아보기도 전에 그냥 전부 알아 버렸다. 어중간하게 알게 되었다면 재미없어졌다고 한마디 했겠지만 너무나 자세하게 알려 주며 지시까지 하는 것을 보니 허탈함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샤니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일단 눈물 쏙 빼놓고 박수를 쳐 준 뒤 시작했을 텐데.
리샤에게는 애초에 그런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헤레이스였다.
“아니, 근데 나보다 많이 아는 거 아니야?”
이비엔 경에게 주는 정보지들도 어쩌면 이미 다 알면서 달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부터 해서 수많은 추측이 헤레이스의 작은 머리통을 수시로 꽉 채웠다. 그건 정보 길드장으로서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엔 하도 웃으니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다만 그런 상념의 끝은 리샤 자체에 대한 생각이었다. 거기에 이르면 뭔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재미, 흥미와는 또 다른 기분 좋은 감각.
“뭐, 그건 그렇고.”
유진이 맥나한 가문에게 지령을 받은 것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추측대로라면, 배후는…….”
남들은 들을 수 없게 중얼거리며 헤레이스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쪽밖에 없는데.”
어딘가를 떠올리며 헤레이스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마도 아직 추측이었기에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증거가 없단 말이지.”
그 증거를 확보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리샤의 나쁜 소문 문제도 이 이상은 진전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헤레이스는 카인과 헤어지자마자 유진을 찾아갔다.
“유진!”
그는 맨 앞 좌석에 앉아 있었다. 유진의 어이없는 얼굴이 헤레이스를 반겼다. 유진은 맥나한 가문의 의미심장한 지령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맨 앞에 앉은 것에는 연극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약간의 사심을 채우는 의도도 들어 있었지만.
‘유명한 극단 대타로 연극을 올리면 둘 중 하나지. 아주 잘 되거나, 아예 망하거나.’
다소 전문적인 의견도 포함해서 유진은 솔직히 이번 연극에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상념은 헤레이스를 보는 순간 일거에 말소되었다.
“헤레이스……?”
대뜸 튀어나오더니 그를 친근하게 ‘유진!’이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도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여장이었다.
……여장.
“그 꼴은 대체 뭡니까?”
심지어 잘 어울렸다. 그냥 취향을 존중하겠다고 하지 못한 것은 상대가 그 헤레이스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런 변장까지 하고……. 반쯤은 일하러 온 것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유진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을 노골적으로 관찰하던 헤레이스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더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레이스라뇨. 저는 헤일리인데요? 오호호호! 이름 가지고 장난을 치시는 건가요? 아이, 참, 재미있으셔라!”
그러더니 일반인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근데 왜 앞쪽에 앉아있냐?”
유진이 경악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보았다.
“아니, 이 연극할 때 사고 터질 거 뻔히 알고 있잖아? 근데 왜 굳이 앞에 앉아 있냐고.”
유진의 혼란으로 뒤덮인 표정을 속으로 재밌어하면서도, 헤레이스는 자기 할 말을 숙덕숙덕 이어 갔다.
“너 여기 위험한 거 설마 몰라?”
“……압니다.”
유진이 무언가 포기한 얼굴로 답했다.
“근데?”
“연극은 자고로 앞에서 봐야 하는 겁니다.”
헤레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서로를 괴상한 시선으로 마주보며 한동안 침묵하던 둘은 이내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기로 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어, 뭐, 그래. 너나 각하나 위험할 일은 없겠지.”
“각하도 오셨단 말입니까?”
“그럼 나만 왔겠냐?”
“아…….”
그제야 유진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 것을 떠올리고 심각해졌다.
“그쪽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단 말이군요.”
“파하드 후작에게 그쪽에서 접근한 느낌도 받았고.”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교묘하게 접근한 느낌 말이다. 황태자 암살 계획을 털어놓는 후작에게서 헤레이스와 부길드장은 공통적으로 그걸 느꼈다.
“알겠습니다.”
2층의 리샤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여기에 리샤가 왜 왔지?”
헤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위험한데 말입니다.”
유진도 좀처럼 그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아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샤에게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공정령 젠이 있는 데다 옆에 다니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쳇. 리샤는 다니엘과 있을 때에는 우리와 있을 때와 다른 얼굴을 한다니까?’
헤레이스가 불퉁한 얼굴을 하고 생각했다.
“리샤는 저 자식이 어디가 좋을까?”
그러자 유진이 살짝 놀란 얼굴로 헤레이스를 보며 되물었다.
“리샤가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네 눈치에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헤레이스도 이제 그 정도는 거뜬히 알아들었다. 애초에 그가 대개의 상황에서 눈치가 없는 이유는 그냥 기본적으로 주위에 신경을 안 쓰는 인간이라 그런 것이었으니까.
신경 쓰기 시작하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알지. 근데 뭘 그렇게 미묘하게 묻냐? 죽을래?”
살벌하게 묻는 헤레이스를 보며 유진이 픽 웃었다.
“글쎄요. 지금 우리는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알아듣게 말해!”
헤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좋아한다니까? 너도 리샤가 저놈을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랬죠.”
“그러니까, 뭐가 다르냐고. 뭐, 어차피 우리랑 더 친하니 괜찮, 아니, 그게 아니고. 너나 나나 같은 말을 한 거잖아!”
“네, 그런 걸로 칩시다.”
유진이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데요.”
연극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유진이 다니엘과 리샤 쪽을 힐끔 보았다. 아마 다니엘은 눈치챘을 것이다.
‘리샤를 그대로 모시고 나가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는 듯해서 유진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흠. 혹시 모르니 카인 한번 찾아보고 올게.”
헤레이스가 무언가 느꼈는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이 말없이 그를 배웅했다.
유진과 헤어진 뒤 헤레이스는 카인의 기운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카인과 함께 있는 아리엘 랭턴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 진짜.”
헤레이스는 혼자 풀풀대다가 아리엘 옆에서 한껏 불편한 분위기로 굳어 있는 카인을 힐끔 본 뒤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대로 쌩 돌아가 유진 옆에 앉았다.
“왜 그럽니까?”
유진이 의아하게 물었고, 헤레이스가 질린 얼굴로 답했다.
“그 여자가 왜 여깄어?”
“네?”
“그거, 그 랭턴 영애? 그거.”
“……여기 와 있습니까?”
유진도 순간 싫은 얼굴을 했다.
“어딜 가도 빠지질 않는군요, 그 영애.”
“내 말이!”
리샤는 몰랐지만 둘 다 아리엘에게 쌓인 것이 꽤 있었다.
“리샤한테 자꾸 접근을 한다고. 리샤가 울지 말랬다고 안 우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어!”
“거기다 눈만 마주치면 이를 갈죠.”
사사건건 아리엘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리샤 주변에서!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자주 그랬다. 게다가 리샤 주변, 특히 그들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를 보면 뭔가 보물을 훔쳐 가는 도둑을 보는 것처럼 도끼눈을 뜨는 것이다. 다니엘에게도 그러지만 다니엘은 아예 눈도 마주치지를 않는 데다 웃으면서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날려 버리니.
“왜 걔가 여기 있지?”
“……리샤를 따라온 거 아닐까요.”
“그러네. 그랬겠어.”
헤레이스가 한탄했다. 카인은 아마 아리엘을 말리지 못한 황태자의 명령을 받은 것일 테고.
“황태자 엄청 싫어하면서도 명령하면 듣는다니까, 각하는?”
헤레이스가 연이어 한탄했다. 유진도 한껏 안쓰러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엘과 카인이 있는 방향을 힐끔 보았다.
‘엉망이군.’
어떻게 찾았는지 리샤가 있는 2층 자리를 대놓고 보는 아리엘이나, 상황을 살피면서 너무나 의욕이 없어 보이는 카인이나.
하지만 남의 불행은 곧 행복일 때가 있는 법이었다. 카인의 무기력한 모습은 드문 것이어서 유진은 조금 웃고 말았다. 질색팔색하는 헤레이스도 재밌고 말이다. 유진은 굳이 따지면 다니엘처럼 신경을 안 쓰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둘의 반응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나쁘지 않아.’
자유 기사였던 이유는 지킬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킬 것이 꽤 생겨 버렸다. 리샤 때문에 모인 거지만 카인도, 헤레이스도 나쁘지는 않고, 황태자도 점차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니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감춘 것이 있는 듯해서 경계를 멈출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쁜 느낌은 아닌 이상한 사내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어쩌면 리샤가 나중에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미래에도 그녀의 혈족을 모시는 기사로 지내면서 살 수도 있겠지.’
그래. 미래에도.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깨닫게 되었다.
‘리샤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헤레이스를 힐끔 보았다. 그래, 정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그는 맥나한이 내린 임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일 터지자마자 수습할 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인 경계만을 유지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헤레이스는 어느 쪽일까.’
리샤의 죽음에 대해서.
‘포기인가. 아니면 달리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그 생각을 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하네.”
점차 연극 쪽으로 집중을 하던 헤레이스가 중얼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연극은 재미있었다. 무사히 끝난다면 극단이 유명해질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은 차마 이 극단이 다른 의미로 유명해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응, 화려하고 웅장한데 어쩐지 내용이 달라.”
“아, 확실히.”
유진이 여상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거 주인공이 저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잖아? 은근슬쩍 잔혹하게 바꾼 게 많은데?”
“맞습니다. 소소한 부분에서 잔혹성을 추가한 것 같군요.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서일까요.”
“흥미를 자극하려고? 겨우?”
“사실 대사도 좀 바뀌었습니다.”
유진의 말에 헤레이스가 그를 보았다.
“대사?”
“네. 저 부분에서는 ‘마침내 모든 빛을 앗아 가기로 했다네.’ 이런 대사는 없었죠. 원래 대사는 그 앞에서 끝납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십 년간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봤으니까요.”
“…….”
헤레이스는 기가 질린 얼굴로 다시 정면을 보았다. 의외의 부분에서 할 말 없게 만드네. 아니, 그보다. 헤레이스가 연극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검 쓴 사람들 특유의 느낌 말이야.”
“……그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만. 사실 유명한 배우들 중에는 기도가 제법 괜찮은 이들이 있거든요.”
“그래?”
하지만. 헤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카인과 유진으로서는 단번에 알아채기는 어려운 중류일 수 있겠지만. 그는 거의 직감적으로 살기를 느꼈다.
‘무슨 일 터질 것 같은데.’
그가 무심한 시선으로 다니엘 쪽을 보았다. 곧바로 마주치는 시선에 다니엘이 이미 그것을 느꼈음을 알았다. 뭐, 리샤만 무사하다면야. 헤레이스는 최소한의 보루가 지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비죽 웃었다.
곧이어 유진과 카인도 얼굴을 굳혔다.
“이건…….”
“역시 이상하지?”
유진이 빠르게 임무를 떠올렸다. 미심쩍었던, 그러나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임무 용지의 내용을.
“……흔들릴 수 있으니 조사 요망.”
의아하게 돌아보는 헤레이스에게 유진이 답했다.
“임무 내용입니다.”
어차피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이라니. 헤레이스가 유진과 함께 카인 쪽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킬킬 웃었다.
“난 그거 건물이 흔들리는 줄 알았는데.”
“꺅, 당신들이 여기에 다 몰려 있다니!”
그들 셋을 한눈에 담고서 도끼눈을 뜨는 아리엘을 보며 유진이 한숨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단은 가장 살기가 짙은 구석부터 처리하죠.”
“난 리샤 쪽 한번 보고 올게.”
“부탁합니다. 가능하면 먼저 데리고 나가는 게…….”
그러나 그때였다.
쾅!
굉음이 울리고, 거대한 극장과 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리뿐이었지만 셋은 미세한 균열을 느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았다.
“일반인이 이렇게 많은데 이런 공격이라니.”
핼쑥해진 얼굴로 카인이 서늘하게 뇌까렸다. 마법 테러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일반인들을 무작위로 학살했던 적은 없었다. 상징적인 장소를 폭파하거나 고위층과 안전한 곳을 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건…….
‘일반인 학살 자체가 목적인 느낌이다.’
셋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동시에 셋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리엘도 하얗게 질려서 얼어 있었다.
셋은 동시에 자신의 마력들과 기운들을 운용해 불길에 대항하고 사람들의 길을 트기 시작했다. 헤레이스가 심한 욕을 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미친놈들 아니야?”
불의 마법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법사의 불길이 아니라 원소 마법사가 일으킨 불길이라니.
“누가 이런 일에 마스터급을!”
원소 마법사, 그것도 이 정도로 다양한 방향의 여러 불길을 농도 짙게, 그리고 섬세하게 다루는 자라면.
이건 마스터급이 아닌가!
“저런 게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그러다 헤레이스는 기억해 냈다.
‘딱 저런 수준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력이 다 알려지지 않은 불의 마법사를 사 간 세력이 있었어.’
그리고 그 세력은.
‘리샤의…….’
헤레이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쩌면 리샤가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순간 그의 눈에 리샤가 있는 곳이 반쯤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리샤!”
다니엘이 있으니 무사할 걸 알면서도 헤레이스가 외쳤다. 불길에 대항하느라 조금씩 멀어져 있던 카인과 유진도, 헤레이스처럼 리샤 쪽을 끊임없이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리샤를 부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헤레이스는 아까 다니엘과 있을 때 보았던 리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리샤는 오늘 유난히 새하얗고, 생기가 없었다. 다니엘을 볼 때의 특별한 표정에 신경이 쏠린 상태에서도 그 상태는 헤레이스의 눈에 콕 들어박혔었다.
‘꼭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웃었었는데.’
폭발음이 터졌다. 연속적인 마법이었다. 위에서 보이는 것보다 아래쪽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헤레이스와 카인, 유진이 없었다면 벌써 다수가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불길 외에도 허공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마력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도 했고, 입구 쪽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하나가 아니야.’
저 불의 마법사가 다가 아니다.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적들 사이에서 사상자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극장이 무너지면.’
그들은 마나라도 둘러서 버틸 수 있지만 다른 일반인들은 아니었다. 리샤가 있는 쪽에 아무도 없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물론 그랬다면 아마 그들은 이미 리샤를 옆에 데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니엘과 젠이 리샤 곁에 있다.
‘무사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대개의 상황에서 개념이 없는 헤레이스조차도 유례없을 참사를 막는 것에 필사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곳곳에 비명이 난무한 상황. 로브로 모습을 가린 불의 마법사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소리 없이 의지를 전하고 있었다. 다 죽으라고.
카인이 눈을 어둡게 물들였다. 그가 봉인한 뱀파이어 혼혈의 힘을 쓴다면.
‘아니.’
그렇다 해도 너무 장소가 좁았다. 게다가 지금은 사람을 지켜야 하는 상황.
‘끝인가.’
보이지 않는 적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 순간 낭패감에 휩싸였다. 마법사가 주춤할 때. 그것은 후퇴 아니면 더 거대한 마법을 준비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은 상대방이 후퇴를 할 이유가 없는 상황.
끝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거대한 마법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 끝났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리샤 쪽을 보았다. 다니엘이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다.
그때, 콰콰쾅! 하고 귀를 멀게 할 만큼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엄습하던 거대한 마법이 사람들을 덮쳤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두가 무사했다. 바로 조금 전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사람들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이건.”
기적처럼 펼쳐져 있는 실드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대체, 이 실드는.”
“마법이 아니야!”
카인이 황망하게 말하자, 헤레이스 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이건 정령의…… 아니, 하지만 이만한 능력자가…….”
그때 위가 보였다. 세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선명하게 위의 상황이 보였다.
“……리샤.”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모를 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 * *
리샤의 보랏빛 눈은 이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사람들을 구했다고. 그러한 안도감이 번진 그 죽음의 빛깔에 다니엘은 덜컥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단 몇 발짝 사이에. 그는 리샤를 잃어버렸다. 코앞에서 리샤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안아 든 다니엘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나.’
똑똑한 사람이니, 애초에 이런 피해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서.
‘그래서, 젠이 나를, 부른 것이었어.’
생각마저 더듬더듬 이어지는 것이 어딘가 고장이 나 버린 것 같았다.
‘주인을 구해 달라고 했지.’
제발, 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서. 그러지 않아도 그리 했을 것을 알면서도, 그 정령이 그리한 데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네년이!”
다니엘은 허물어진 리샤의 몸을 받아 들며 그녀의 눈을 가렸다.
“감히…….”
공허한 흑갈색 눈이 달려드는 마법사를 향했다. 민낯의 감정이 흉포한 힘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주제를 모르고.”
그는 살인자였다. 죽어 가는 것들과 함께한 인생이었다. 그 무엇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으, 끄아아아악!”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다니엘, 죽이면 안 돼요…….”
희미한 목소리에 그가 덜컥 멈췄다. 마법사의 목숨은 그 순간 조금 더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고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당신은…….”
누가 당신 앞에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조차 할 수 없어서, 이리 맥없이…….
“일단 알았으니 어서 쉬어요.”
이런 상황에 이토록 부드럽게 말이 나가는 것은 그가 생각해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그러나 안도로 물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져서.
‘고마워요. 내 옆에 있어 줘서요.’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말하고 싶다. 아니, 간절하게.
‘당연하죠.’
그렇게 말했으면서.
‘살아서.’
‘살아서! 당연한 말을. 사는 동안, 옆에 꼭 붙어 있어야죠. 나랑 계약까지 했잖아요?’
‘살아 돌아올 테니까.’
‘다니엘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창백한 얼굴로 그리 말하던 그녀에게 그가 뭐라고 답했더라.
“……여기 함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친구가 아니면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나는 다니엘이 좋고, 다니엘도 저를 좋아해 주니, 좋은 일이죠.’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다니엘은 한 자 한 자 새기듯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인공정령은 좀처럼 무언가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을 잊지 못할 뿐더러, 그도 모자라 이리 되새기고 또 새긴다.
‘그냥. 난 당신이, 내 것이 되기를 바라요.’
그때의 혼란스럽던 마음의 실체를 그는 비로소 마주했다. 리샤가 무리해서 실드를 펼치고는 새까만 피를 토해내며 쓰러진 지금에서야. 이제야, 완벽하게.
“리샤!”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찢어지게 울리는 중에, 그는 깨달았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 * *
세간에서는 그녀를 악녀라 불렀다.
르페르샤 황녀. 녹지 않는 얼음처럼 차갑고, 악마같이 악독한 여자.
허무맹랑한 소문들이 퍼지는 중에 그나마 정확한 것은 그녀의 외양에 대한 것뿐이었다. 보기만 해도 시린 한기가 비칠 것 같은 백금발에 눈으로 빚은 듯 아름다우나 서늘한 느낌이라는 하얀 피부. 돋보이는 보라색 눈동자는 불길한 기운이 넘실대고, 꽤나 아름다운 생김새는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자들이 으레 그렇듯 사이함을 가진 종류의 것이라고.
그런 소문에 익숙한 이들 중에서도, 이 대극장에 모인 이들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그 소문 속 황녀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가까이서 황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번 되지 않았다지만.
때문에 그녀의 실드가 완성되고 다니엘의 품에 안기기 직전까지 그 짧은 순간 그녀를 확인한 이들 중에는 황녀를 알아본 이들도 더러 있었다.
급박한 상황일수록 소문이란 날개를 다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저 위에서 그들을 구하고 허물어진 사람이 르페르샤 황녀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사실 그들은 의심할 여지도 별로 없었다.
“전하?”
다른 신체 능력은 조금 건강한 수준이면서 눈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아리엘이 황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카인의 의무감에 기대어 무사히 옷깃 하나 찢어지지 않은 아리엘은 특유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으로 참았던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흑, 으, 흐으, 전하께서!”
울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전하가 잘못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아리엘은 어헝, 하고 거의 통곡을 하면서 전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저, 전하께서! 사람들 구하시려고! 그, 그런, 흑, 흐헝, 전하, 엉엉……! 괜찮으세요? 으허엉!”
헤레이스와 유진, 카인이 리샤 곁으로 쌩 날아간 덕에 그녀의 패닉 상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곁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마음껏 리샤를 위해 울부짖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리따운 공작 영애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비통해지는군.”
원작 여주의 위대함이 가미된 눈물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저 영애의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이미 아리엘의 통곡과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서러움에 동화되어 조금쯤은 훌쩍이고 있었다.
“피를 토하셨다는군.”
“이런 견고한 실드라니. 이 정도를 이루시려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영혼을 갈아 넣어야…….”
“……그게 아니라도 커다란 희생을, 치르셔야 했을 겁니다!”
오, 맙소사. 세상에. 이런 일이! 그들이 그토록 마녀 취급을 하며 뒤에서 씹었던 황녀 전하는 도리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지금 저렇게, 쓰러져 계신다는 것이다.
사실 소문을 옮기는 이들 중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즐겁게 옮기고 부풀리는 소문이 얼마든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하물며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사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순간, 그들이 가졌던 헛된 편견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중의 공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것은 거기 있는 리샤와 다니엘, 헤레이스와 유진, 카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리샤!”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달려온 헤레이스.
“리샤, 리샤 님…….”
마치 그녀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리샤를 애달프게 부르는 유진과.
“어떻게. 이런……. 전하. 리샤 님. 지금 상태가 어떠신…….”
리샤와 관련해서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고 하면 그답지 않게 토해 내는 말이 많아지는 카인. 거기다 다니엘은 다가간 세 사람조차 본능적으로 흠칫했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저기 봐.”
사람들은 르페르샤 황녀 전하를 둘러싼 네 남자의 비통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덩달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목숨을 거셨을지도 몰라……!”
“생명의 절반을 내놓고 저 마법을 펼치셨대!”
“곧 돌아가실 정도로 위중하시대!”
대극장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리샤가 있던 곳 이외의 곳에서 지켜진 사람들까지. 그곳에 모여 있던 이들은 꽤나 수가 많았다.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가운데, 아리엘은 혼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리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하기 무섭게 네 사람은 우연처럼 리샤를 데리고 대극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기사님들이 전하를 모셔 가고 있어…….”
“……내가 얼핏 보았는데, 그 공작 영애가 따라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급히 가셨대.”
심각한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하얗게 질렸다. 황녀에 대해, 그들은 적어도 양심이 있는 이상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붉은 화염을 만들던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전하에게로 갔었는데, 그 앞에서 쓰러지셨다는 거야.”
세세한 정황들이 한마디씩 더해질수록 그것은 더했다.
“자신을 지킬 힘도 남겨 놓지 않으시고…….”
그 모든 험한 말들을 들어가면서도 정작 그들을 구한 것은 황녀였다. 자기 목숨마저 도외시하며. 소문 또한 누군가 악의적으로 부풀린 새빨간 거짓말들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황녀의 소문은 급물살을 타고 새로운 방향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파…….’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반쯤 몽롱한 상태로 정신을 차렸다. 어딘가 붕 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꿈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부정한 것은, 꿈이라기엔 너무 뚜렷한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니!”
맙소사!
그래, 이건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기억이었다. 나는 괜히 울컥해서 잠시 서 있다가 훌쩍이며 조금 멀리 보이는 인영에게로 우다다다 달려갔다.
백금빛 찰랑이는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하얀 피부는 찰떡같다. 이목구비의 서늘하고도 유려한 선이 두드러진 얼굴.
“언니, 오랜만이에요!”
우리 르페르샤 언니였다!
‘마지막 기억이 그거였지?’
개 리샤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 뒤 언니가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기억. 책을 읽는 언니의 귀에 귓속말을 했었고, 그 뒤 진짜 언니를 만났었다.
‘……그러고서는 언니를 만난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보았던 마지막 기억에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언니는 여전히 마지막 기억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언니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만나면 나는 무사하고,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으며,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도 다 지켰다고 다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그러나 내가 언니에게 귓속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주변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
모든 색과 형태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퉁, 하고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조명이 꺼진 듯 깜깜한 공간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댄 것처럼 울음소리가 겹쳐 울리고 있었다.
이윽고, 파노라마처럼 언니의 기억이 처음부터 이어지기 시작했다.
* * *
“와!”
선물을 받은 순간들을 주로 보았던 전과 달리, 기억들은 촘촘히 이어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표정이 차가웠던 언니가 걸음마를 하고, 걷고 뛰게 되었다. 나는 괜히 숨을 죽이고 그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다, 다 소장…… 소장해야 하는데!”
보기만 해도 아기 냄새가 날 것 같다. 그냥 막 천사 같고. 으흑. 그때 나도 아는 기억이 이어졌다.
“이거, 다섯 살 때 기억이구나!”
황궁은 분명히 아니었던 공간에서 언니가 열심히 뜀박질을 했던 기억 말이다. 드넓은 초원이었다. 언니는 기억하던 대로 웃지도 않고, 특별히 다른 표정을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흐뭇하게 언니의 천진한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가 우뚝 멈춰 섰고, 고개를 돌려 달려온 뒤쪽을 돌아보았다.
“뭐 있어요?”
답도 없을 말을 중얼거리며 언니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음?”
그때 그 방향의 커다란 나무의 뒤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언니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나는 당황해서 달려드는 누군가와 아까보다도 더 빠르게 달음박질하는 언니를 번갈아 보았다. 뭐야,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제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살짝 일그러진 얼굴. 아직 아이인 언니는, 도망치고 있었다.
“이게, 어, 아니!”
언니를 쫓고 있던 사람은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움직임이 이상했다. 삐걱거리듯,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안 돼!”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쫓는 이의 움직임이 괴상해서 언니가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언니는 금세 잡혀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대화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들리지 않았다.
제대로 들으려고 씨근덕거리며 귀를 갖다 댄 순간, 기억은 부자연스럽게 툭 넘어가 버렸다. 일그러지며 바뀌는 주변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야.”
천진하게 뛰어논다고 흐뭇했었는데, 뛰어노는 것이 아니었어?
“언니는 무사한 건가?”
미래에 무사하게 있었으니, 괜찮았을 거라는 건데. 그래. 여섯 살 기억은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발을 구르는 순간, 새로운 기억이 자리했다. 이상하게도 다섯 살 기억부터는 기억의 촘촘함이 덜해진 것 같았다.
“너무 많아서 그런가.”
하긴 기억은 나이가 들수록 풍부해질 테니.
“힝, 우리 언니. 이렇게 예쁜데.”
일단 진짜 언니를 만나는 것은 이 이상한 통 기억이 끝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섯 살의 언니는 내가 짐작했던 대로의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엠마가 곁에 있었는데, 그녀는 지금보다 더 사무적이고, 더 벽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흠.”
하지만 아까처럼 마냥 언니의 일상이 보배롭다고 환호할 수가 없었다.
“아까 그건 뭐였을까?”
왜 언니는 그런 이상한 곳에 있었을까. 아까 그 표정을 생각하니 이제야 읽히는 것이 있었다. 무표정을 애써 가장했어도 언니가 두려움은 감추지 못했다는 것을.
‘그건 진짜였어.’
그냥 막연히 낯설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세상 제일 무서운 걸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 그 이후는 기억에 없는 거지?”
오히려 그런 기억이야말로 오래 남지 않나. 보기에 충격적일 수 있다고 해도.
“납치를 당했던 건가?”
그래, 그게 가장 현실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리시안 바누스의 딸이니까……. 보호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황녀니까 나가면 그래도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데.
“그 주변에 기사들이 있어 구해 줬을 수도 있어.”
미심쩍었지만 그런 식으로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표정한 언니의 어린 얼굴을 보며 애써 얼굴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언니의 여섯 살 생일이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엠마, 그게 뭐지?”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언니의 목소리가 나오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선물입니다, 전하.”
이윽고 선물을 받고 희미하게 웃는 언니를 보며, 나는 또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흑, 우리 언니 천사……!”
그때였다.
전에는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다가 언니의 발그레한 뺨을 보고 무심코 넘겼던 것. 그게 눈에 들어온 것은.
[무사히 다섯 살을 넘기신 황녀 전하께. 여섯 살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단테 바누스]
나는 멈칫하고서 그 쪽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언니가 쪽지를 접어 두기 전에 바싹 다가갔다.
“단테 바누스.”
언니의 외가인 바누스의 수장. 아마 리시안 바누스의 오빠일 것이다.
“우리 언니가 이때는 이렇게 기뻐했었는데, 개 리샤를 다른 곳으로 보낼 때는 엄청 싸늘해졌단 말이지.”
하지만 편지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별다른 특이함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편지에서 ‘무사히’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꼭…….’
언니가 무사히 못 넘길 뻔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확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언니는 대개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냈어.’
안전하다는 말이다. 만약 황궁 실내로 아까 봤던 검은 옷의 무언가가 나타났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고.
‘황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황족, 나아가서 황제에 대한 시해 시도로 받아들여졌을 테니까.
‘언니가 위협받았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
……방금 전의 일만 제외한다면.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언니가 편지를 접어 엠마에게 건넸다.
첫 번째로 받았던 선물은 새하얀 만년필이었다. 언니는 그 후 그걸 늘 가지고 다녔다. 다섯 살 때와 비슷한 일상인데 어쩐지 좀 더 언니가 밝아진 것 같아서, 나는 어느새 흐뭇한 얼굴로 언니를 보고 있었다.
“헤헤. 귀여워라.”
다만 그것과 별개로 주변 사람들이 언니에게 얼마나 무관심하며 얼마나 악의적으로 대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악녀라고 불렀다고…… 언니가 그랬었지.’
원작에서 죽기 전에 했던 말. 내가 언니를 몹시 좋아하게 되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언니의 현실은 더 차가웠다. 나는 우리 언니를 동정하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그녀를 보려 애썼다.
“……우리 언니, 화이팅.”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물론 귀에 말고 멀찍이 떨어진 채로.
다행히도, 위협적인 일은 다섯 살 때의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다소 빠르게 언니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아홉 살이 된 언니를 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진짜 그냥 해프닝이었나.”
그냥 한번 일어난 일이라고 넘기기엔 그 검은 옷 인간이 너무 수상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언니가 지속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다만 조금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나는 조금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언니…… 이왕 보여 주실 거면 다 보여 주시지, 힝.”
무슨 시간 때우는 것처럼 해마다 정량만 딱딱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도 알던 기억보다는 촘촘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아쉽군, 아쉬워. 하지만, 괜찮지!”
그냥 언니를 만나서 들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히히! 그렇게 슬슬 눈을 빛내며 그냥 빨리 진짜 언니를 만나 볼까 하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언니를 찾아왔다.
“초대?”
“예, 전하. 허락하신다면, 바누스 가에서 직접 모실 사람을 보내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가.”
외가의 초대에 언니는 정말 언니답지 않게도 조금 망설였다. 그 순간 초대를 전한 사람이 말했다.
“‘선택’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알 수 있었다. 언니가 이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윽고,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렇게 또다시 중요한 기억이 열렸다.
‘선택이라…….’
방금 전 나온 말은 뭐지?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면서 기억을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의 아홉 살 기억은…….’
내게 먼저 공개되었던 언니의 아홉 살 때의 기억. 그것은 지금과 달리 ‘조금 차가워진’ 언니의 일상이었다.
“모시겠습니다.”
나는 상념을 멈추고 마중 나왔다며 허리를 깊게 숙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회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었다. 목소리로 남성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가려져 있었다. 아니, 하나 더.
“손을 잡으십시오.”
두 손을 내밀며 남자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래, 기계적으로. 남자는 어딘가 인형처럼 삐거덕대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꼭…… 언니 다섯 살 때 그 이상한 사람처럼.’
과한 생각일까?
“으, 안 가면 좋겠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외쳤다. 불안해 미치겠네!
언니의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풍경들은 점차 빠르게 흐려지더니, 마치 회오리 안에 갇힌 것 같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곳이 바로, 바누스 본가입니다.”
묘하게 ‘전하’ 소리를 붙이지 않는다. 괜히 사소한 것까지 신경이 쓰였다.
‘이건 무슨 마왕 집에 아무것도 모르고 놀러 가는 기분인데.’
정말 다시 말하지만, 내가 언니 옆에 있었다면 말렸을 것이다. 엉엉.
검고 녹슨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로 넓고 황량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저녁인 데다 지금 겨울인지라 풍경이 좋지는 않습니다.”
기계적인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기억이 넘어갔다. 불안한 감은 잘 들어맞는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너무 심각하게 들어맞아서 문제였다.
“저건.”
나는 경악하며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사람을 가지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지금 이게 뭐지?”
내 경악 어린 외침과 언니의 차분한 물음이 겹쳐졌다. 눈앞에는 그야말로 살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묘사하기도 무서운 광경.
‘인조인간?’
딱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법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남자가 답했다.
판타지적인 실험실에서 한쪽은 개조를 당하는 광경이, 다른 한쪽은 개조당한 인간들이 무언가를 훈련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언니는 말이 없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언니, 얼른 나가요.”
여기 뭐야, 정상이 아니잖아?
그때 사방에서 훅 하고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그것은, 낯익은 불길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그 불기둥들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개조된 사람들이 훈련을 하던 방향으로. 거기 한 마법사가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 제국은! 멸망해야 해! 바누스여, 참으로 고맙구나!”
미친 듯이 웃으며 내뱉는 말, 그 안의 광기도, 그 말을 하는 목소리도 나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극장 테러에서.’
누군가 다가가 남자를 기절시켰다. 불길도 가벼운 일인 것처럼 진화되고 있었다. 피해는 전무했다.
“왜 이런 걸 내게 보여 주는 거지?”
한참 만에 언니는 입을 열었다. 나는 언니를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언니 앞을 가리고는 언니를 안았다. 하지만 이건 기억일 뿐이라, 가려지지 않아 저 광경들을 언니가 다 본 것 같았다.
“선택받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저희의 답입니다.”
남자가 그 뒤를 이어 무어라 더 말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뭐, 뭐지.’
답을 들은 언니가 남자를 서늘하게 노려보는 것을 보고 있는데 또 주변이 어그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열 살 언니의 기억이 이어졌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언니는 어딘가 텅 빈 것 같았다. 보다 차가워져 있었고, 주위에도 서늘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어지는 것도 뭔가 희한하고.”
열 살의 생일 선물. 그것을 떠올리니 더욱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아지를 보낸 게, 열 살 때였어.”
내가 본 마지막 생일 선물이었다. 그걸 받았을 때 엠마는 곁에 없었고, 처음 보는 시종이 언니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
“리샤라고, 애칭을 붙여 주면서 언니가 기뻐했는데.”
그 기쁨이, 열 살 기억을 통틀어 유일한 기쁨이었다는 것은 몰랐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평화롭다고 하면서 흐뭇해했던 열세 살까지의 기억들. 그 기억들 속에서도 언니는 엠마를 대할 때 조금 편해지는 것을 빼고는 시종일관 어두웠다. 오로지 강아지 리샤를 대할 때만 가끔 생기 어린 모습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외가의 선물들에도 시큰둥하고.’
정확히는 시큰둥한 게 아니라 없는 셈 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기억들이 빠져 있어서 내가 좋은 대로 보게 되었던 거야.’
결국, 언니가 나중에 찾으라고 한 기억들은 어둡고 강렬하며, 언니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기억들이었나 보다.
‘15살 이후의 기억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언니는 왜 이렇게 따로 나눠서 보여 준 것일까?
‘게다가.’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서 이 뒤를 떠올렸다. 이제 보게 될 열네 살의 기억 속에서, 언니는 리샤를 버리게 된다.
‘그게 내가 본 마지막 기억.’
나는 정신을 차렸다. 기억이 끝나고 나면 바로 언니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윽고 내가 아는 기억이 나왔다.
“엠마, 이게 뭐지?”
“개집입니다, 전하.”
황녀궁의 미니 사이즈 집.
“이게 리샤의 집이야?”
아주 큰 개가 되어 있는 개 리샤가 컹 짖었다. 굳은 얼굴로 함께 온 메시지를 읽던 작은 언니가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 리샤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와.”
“네?”
엠마가 놀라 되묻는 것을 들으며 나는 언니가 쥐고 있는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보낸 사람은, 역시나 단테 바누스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사히 열다섯 살이 되신 전하께.]
“못 들었어? 다른 사람에게 주고 오라고.”
[지금쯤이면 저희가 보낸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아 보셨겠지요.]
“……그 개집도 함께 가져가.”
[라파엘리스. 사람이 만들어 낸 가장 우습고 완벽한 질병 말입니다.]
편지는 시종 차분했고…….
[전하에게서 이런 쓸모라도 찾을 수 있게 되어 저 또한 몹시 기쁩니다.]
차가웠다.
“미친. 이게 뭔 소리야!”
[부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전하께서도 바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파엘리스. 사람의 악의로 발생하는 불치병. 다니엘 덕분에 이제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만, 최근 미물에게 꽤 마음을 쏟고 계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니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동물을 사랑하는 황녀라는 소문이 더해지기를 원하지는 않으니까요.]
지금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것들이 의도적으로 언니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
[그 아이에게 집을 선물합니다. 오늘 밤 거기서 잠이 들고 나면, 그 아이는 편안하게 안식에 이르게 되겠지요.]
집에 독이라도 묻어 있나.
“그래서……. 리샤를 다른 곳으로 보냈구나.”
언니는 개 리샤를 엠마 손에 들려 보낸 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언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원작에서 악녀의 외가는 그렇게 비중이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외가가 언니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
“심지어 병까지도 그들에게서 말미암은 것이었다니.”
원작에서는 특수한 검사를 어릴 때 받고서 병을 알게 된 것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검사 받기도 전에 알고 있었던 거예요?”
언니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너무 기가 막혀서 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분통을 터뜨렸다.
“뭐 이런 또라이들이 다 있어요? 아, 이게 뭐야! 언니 제가 가서 부숴 버릴까요? 저 할 수 있어요!”
오늘도 봤겠지만 내가 좀 능력이 있다.
막 실드도 쓸 줄 알고, 아마 찾아보면 공격 마법도 있을 거고, 일기장 자체도 흉기라고 한 데다 젠도 있다.
“체력만 받쳐 준다면 무서울 게 없는데! 체력만! 받쳐 주면!”
다 부술 수 있는데!
아으으! 속상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눈치 없이 울적해지려는 것을 고개를 털어 멈춰 버리고서 언니 귀에 대고 또 중얼중얼 분노를 표했다.
“피의 복수! 피의 복수를 하자고요, 언니! 이럴 땐 다들 그런 걸 하던데요!”
아니, 이걸 이때 알고 있었으면, 어? 아리엘이고 뭐고 외가 놈들을 싹 다 쓸어 버렸어야 억울하지 않지!
“아니, 아니, 언니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요! 아. 화가 나서 미치겠네!”
그렇게 한참을 풀풀대고 있을 때였다.
[정신없으니 그만해라.]
“……!”
나는 꿈에 그리던 언니를 보았다. 아니, 목소리만 들었다.
“헉, 언니?”
[정말 성가시구나.]
누군가 내 이마에 꿀밤을 날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전하!”
그리고 내 사람들의 해쓱한 얼굴들을 멍하니 마주 보다가, 왈칵 피를 토했다.
* * *
극장의 사건 이후 무려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황녀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지인들은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어떤가?”
황녀궁에 모인 자리에서 무거운 침묵을 깨고 카인이 입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황녀는 어김없이 피를 토했다. 회복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마법을 쓰느라 무리를 하셨는데. ……영혼의 균열도 덩달아 가속화된 것 같습니다.”
록스의 침중한 말에 카인이 암담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헤레이스가 살벌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정신을 차려야 뭐든 먹을 수 있을 거 아냐.”
영양제와 마법으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이대로는…….”
리샤의 몸이 못 버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헤레이스가 이를 악물었다.
‘리샤 님…….’
유진이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전해 드릴 말이 산더미인데.’
극장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리샤가 들으면 안타까워할 일도, 기뻐할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다.
그녀가 쓴 그 마법은 강력했다. 죽을힘을 다하더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실드를 펼칠 수 없다. 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뛰어난 부분이 적어도 무력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마력의 양은 너무나도 강대했다. 일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만약 당신이 원하셨다면.’
어쩌면 그녀는 초월자 마법사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온통 불타고, 매캐하고, 무너져 내려서 몰랐지만.’
뒤늦게 소름 돋는 걸 느꼈었다.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해.
‘하지만 지키는 게 그녀다운 선택이었어. 공격 마법은 할 줄 모른다고 젠이라는 정령이 그랬고.’
그러나 배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라면 언제나처럼 바라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겠지만.
‘그냥. 늘…….’
이르는 결론은 그녀에게 시간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어서. 그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
유진은 자꾸만 다 끝난 것처럼 아파 오는 가슴께의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저는 다시 전하께 가 보겠습니다.”
록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벌써 정기적인 검진 시간이었다. 아마도 지금 가면 눈을 감고 있는 리샤와 일주일간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있는 다니엘이 있을 것이다.
‘다니엘, 그 녀석은…….’
헤레이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놈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그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리샤의 지척에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그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리샤의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
‘게다가 그 눈…….’
그를 떠올리며 헤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원수 같은 놈이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라 골치 아팠다. 헤레이스의 죽상이 된 얼굴을 힐끔 본 카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동행하겠네.”
늘 그렇듯 세 사람은 록스의 뒤를 따랐다.
다니엘은 평소의 다정한 가면도 집어던지고 굳은 얼굴로 리샤의 방에 있었다. 예의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리샤가 깨어나는 것만이 의미 있었다. 그의 수하들도 처음 보는 다니엘의 모습에 긴장하고 있었다.
‘대장, 진정하십시오.’
그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면 재앙이 생길 것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는 깨어나실 겁니다. 그러니.’
……아니, 그보다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식사 정도는 좀 하고 다니십시오.’
또한 다니엘에게 르페르샤 황녀가 이토록 소중한 존재라면, 그 소중한 존재를 절대로 잃어버리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그들을 떠올린 다니엘이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그에게, 이토록 소중한 존재라면. 그 말에 숨이 찼다. 그래, 소중하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만큼 소중한 줄은.’
절대로 잃을 수 없다고.
그리 깨달은 순간에 그녀가 고꾸라졌다. 그 아찔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있어. 일어날 거야.’
그녀는 지금 나아지고 있다. 록스는 다소 부정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지만 다니엘은 느끼고 있었다.
‘영혼의 균열이 이만큼 큰 상태인데도,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 균열이 또 다른 결과를 일구어 내는 중이라고 봐야 한다.’
젠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 정령은 방이 더욱 아늑해지도록 제 날개를 흩어 아늑한 어둠을 만들어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필요했다. 그는 리샤가 눈을 뜨고, 그를 봐 주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눈을 떼면 그녀가 그대로 흩어져 버릴 것 같아서.
날이 밝고 있었다. 아침 검진을 하러 사람들이 올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새어 드는 빛은 젠의 장막에 한 차례 걸러져 은은한 조명처럼 방 안에 드리웠다. 다니엘은 들어올 이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참 길게도 자는군…….
젠이 어딘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잠시 막을 옅게 했다. 조금 더 환해진 방에 록스와 세 남자, 그리고 엠마가 들어왔다. 리샤와 가까운 두 시녀도 시간을 냈는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잠시 그들의 한숨 어린 시선이 다니엘에게 닿았다.
사실 정신을 잃은 리샤 곁에 아린이나 리니 중 한 명이 상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들이 할 일을 마법으로 전부 해 보이며 자신에게 맡기라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다니엘이 굳이 시녀들을 내보낸 것은 젠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젠이 리샤 가까이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리샤의 영혼에 힘을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헤레이스의 보증으로 다니엘의 독단적인 행동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웬걸. 그는 들어올 때마다 저 살벌한 모습으로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쯧.”
헤레이스가 혀를 찼다.
‘눈이 아주 시뻘겋잖아. 맛이 갔네, 갔어.’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다니엘의 눈 색이 그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색은 알고 있었다.
‘붉은색이 돌고 있다면 뭐든 조심해야 하지.’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처럼 극에 몰린 상태일 때 저런 눈이 된다.
‘자제력이 가장 없을 때일 테니. 그러니 건드리면 안 되기는 하는데.’
말은 또 왜 안 하고 있는 건지. 난생처음으로 다니엘을 걱정해 주면서 헤레이스가 또 다니엘을 흘겼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헤레이스의 관심은 금세 리샤에게로 향했다.
“……눈 좀 떠라, 리샤. 응?”
한동안 리샤를 보던 헤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꼭 손윗누이를 보는 것 같은 응석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러나 헤레이스의 시무룩한 조름에도 리샤는 답이 없었다. 파리한 얼굴로 숨만 옅게 쉬고 있을 뿐. 언제나 화기애애했던 그들 사이에 침묵만 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제발. 간절한 시선이 교차했다. 다니엘이 잠시 떨어졌던 거리를 좁히며 리샤를 살폈다.
이윽고 천천히, 보랏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록스의 외침에 얼어붙었던 이들이 일제히 리샤를 에워쌌다. 어딘가 공허한 보랏빛 눈동자가 멍하니 그들을 향했다.
“……리샤.”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로 다니엘이 리샤를 불렀다. 그녀는 답도 하지 못하고, 왈칵 피를 쏟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양을. 창백해진 채로 무너지는 리샤의 몸을 다니엘이 하얗게 질린 채 받아 들었다.
“……록스.”
다니엘의 부름에 록스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마치 일국의 왕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도 잠시, 그는 자신을 응시하는 다니엘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전하께서, 깨어나셨다.’
피를 토했기 때문에 가히 좋은 상황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몸을 보할 준비를 최대한 해야 했다.
‘진통제도, 아마 가장 강한 것으로…….’
황제에게도 알려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오는 황태자 전하도, 여기 있는 사람들만큼 전하를 걱정하던 그 랭턴 영애에게도. 리니와 아린이 즉시 지시를 받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록스가 침중한 눈으로 엠마를 보았다. 엠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록스와 함께 자리를 떴다.
* * *
열네 살의 기억은 그 이후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밀려오는 것은 열다섯 살의 기억이었다. 전과 달리, 거의 통째로 밀려오는 기억들. 기억 속에서 언니는 원작에서 묘사된 대로 검사를 받았고, 라파엘리스를 확인했다.
“어차피 원래부터 그랬다. 나는 늘 악녀였어.”
그리고 그녀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작게 소리 내어 다짐했다.
“그러니…….”
차라리 정말로 악녀가 되어 주겠노라고. 그것만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일 테니.
그녀는 제 소문이 황궁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철저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쉼 없이 움직였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원작대로.’
그 말이 이렇게 가슴 아픈 말이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게 지나가 버린 과거라는 것도.’
동정이니 하는 것을 떠올릴 여유가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나, 나는, 언니.”
귓속말도 무엇도 아닌 말을 뱉었다. 어디에서인가 언니가 듣고 있을 테니까. 언니가 행복하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도 아직 살지 않은 시간이 있잖아?
“언니는…… 살 수 없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결국 그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풍경이 바뀌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가볍고 편안한 미소를 그렸다.
“헤헤.”
역시 어딘가에서 듣고 있었어!
[……왜 웃지?]
“언니 보니까 속없이 좋아서요. 아까 목소리만 들었잖아요.”
[이마도 맞았지.]
“에헤헤.”
내가 배시시 웃자 언니가 묘한 얼굴로 날 물끄러미 봤다.
“어?”
그러더니 살짝, 아주 살짝 옅은 미소를 잠깐 짓는 것이었다!
“헉! 언니, 갑자기 그렇게 웃으면!”
본능적으로 심장에 손을 얹자 언니가 몹시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한 녀석.]
……그거 어디서 들어 본 말인데요?
나는 황태자 오라버니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묘한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덤덤하게 마주 보던 언니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적이 누구인지, 알았겠지?]
그녀는 외가를 적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네가 계획했던 대로 멀리 도망치도록.]
“그게 안전하니까요?”
[그래.]
“음, 근데 언니. 그래서 언니는 지금 영혼 상태인 거예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묻자, 언니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눈치가 없구나.]
“눈치도 봐야 할 때가 있고, 보면 안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지금 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나는 기꺼이 눈치가 없어지기로 했다.
“영혼 상태인 거예요?”
[……그래.]
“기억을 다 찾고 나서,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된다고 했으니, 그 말은 이 몸에 제가 자리 잡는단 말이네요?”
[맞아.]
“그렇게 되면 언니는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결국 언니가 아주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네 몸을 뺏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당연히 언니 몸이니까 언니가 평생 써도 되죠! 저는 이렇게 잠들어만 있어도 좋아요.”
[…….]
“그러면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언니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힝, 진짜, 정말로 답해 주면 안 되는 건가!
“……같이 행복하게 살아야죠.”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침묵하던 언니가 작게 말했다.
[눈치 안 보겠다더니.]
“네?”
[……너는 일단 살아남기나 해라. 내 외가는 만만하지 않아. 그게 먼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뭐냐.]
말투는 처음 그대로 냉랭한데, 어쩐지 언니가 말랑말랑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헤, 헤헤.
[……그리고 누가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
“어, 네?”
그 말에 배시시 웃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언니의 얼굴을 보고 깨갱했다.
‘어우. 아까 그건 비웃는 게 아니었네!’
아주 살벌하고도 화사한 표정으로, 언니가 말했다.
[그들은 라파엘리스로 죽은 뒤 무덤에 피는 꽃을 노리고 있거든.]
“꽃이요……?”
[그래.]
그 바람꽃이라 불리는 꽃을 말하는 건가?
[그 꽃을 얻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복수가 될 것이야.]
진심으로 차갑고도 통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악녀’라는 느낌! 핡. 맙소사. 우리 언니 너무 멋져!
“그렇군요!”
덩달아 활짝 웃으면서 나는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병이 고쳐지면 복수라는 거네요?”
[그래.]
나는 언니를 보고 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언니. 그럼 언니 말씀대로, 기억 잘 찾으면서 자유롭게 살면 되는 거군요.”
‘자유롭게’를 강조하자 언니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아.”
근데 언니, 그것만 하면 분이 안 풀리죠. 자고로 복수는 할 거면 정말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너 눈빛이 무언가, 이상하구나.]
“에이, 기분 탓이에요.”
적어도 두 배로는 갚아 줘야죠. 히히. 감히 내 최애를 건드리다니. 대충 그런 심정으로 나는 열심히 보살 미소를 지었다.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안심해서 그런 걸 거예요.”
[흠.]
“조심할게요. 뭘 하든!”
내 약속에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손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깨어날 때가 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깨기 직전, 언니에게 말했다.
“다 잘될 거예요!”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언니의 표정을 끝으로, 나는 깨어났다.
“리샤.”
한숨 어린 소리가 가장 먼저 귀에 들려왔고, 이어 차례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샤 님, 정신이 드십니까?”
“록스를 불러 오겠습니다.”
“일단 뭐 좀 먹자.”
헤레이스마저 허둥대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내 주위에는 우리 미남들만 있는 것 같았다. 점차 빛에 적응하며 나는 주위를 한번 확인했다. 역시.
“……다들 보고를 하러 갔어요.”
다니엘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궁금해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나는 그에게 미소를 보낸 뒤, 입을 열지 않고 문 쪽을 손짓했다.
“리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만큼은 우리 미남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기를 바랐단 말이다. 으헝, 언니. 거울 안 봐도 지금 꾀죄죄한 느낌이 나고 있어요!
“리샤, 왜 그래요?”
“리샤 님?”
관리를 해 주긴 했겠지만 그래도 입을 열기는 찝찝했다. 말없이 웃으며 문 쪽을 가리키자 그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 그래도 우리 언니의 자존심만은 지켜 드려야 해요!
“리샤 님…… 그렇게 감추지 않으셔도…….”
……네?
하지만 카인이 꼭 무언가를 크게 결심한 얼굴로 진지하게 하는 말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뭘 감추고 싶은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덩달아 심각해져서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 볼 수는 없었다. 살며시 내 턱을 잡고 부드럽게 내 고개를 돌리는 다니엘 때문에. 그는 금세 내 얼굴에서 손을 뗀 뒤 그 어느 때보다도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찬찬히 응시했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데.
“예뻐서요.”
“…….”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그를 보고만 있자 그가 말했다.
“……감추는 것도, 감추지 않는 것도, 전부 예뻐요, 리샤.”
지, 진짜?
눈물 나게 고마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음, 잠깐만 나가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부.”
“…….”
“아, 진짜! 그러니까, 감출 거 없다고!”
이상하게 그만 보이던 분위기는 단숨에 깨져 버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헤레이스가 나를 보며 외쳤다.
“혼자 참으면 미련한 거라니까, 리샤? 너 바보야?”
“리샤 님.”
유진도 거들기 시작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내 얼굴이 밝아지기 전에 그가 뒤통수를 때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겁니다. 결코 혼자…… 괴롭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함께 견디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나는 우리 언니의 상태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심각한가 하고 놀라고 말았다. 견딘다는 말을 이렇게 진심으로, 거의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로 할 필요가! 아, 진짜! 이 눈치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리샤.”
내가 그들을 보며 단호하게 문을 가리키자 다니엘이 한숨을 쉬며 나를 불렀다. 이번만큼은 들은 척도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잠시, 말이 없던 그들은 천천히 어딘가 아련한 느낌으로 나를 보다가 방을 나갔다.
“……흑.”
아린이랑 리니는 어디 있는 것일까? 깨끗하게 해 준다거나 그런 관리는 당연히 해 줬을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언니 내가 죄인이에요. 엉엉. 이제 사고 수습은 안 할 거야! 큰 사고라 할 만한 사건은 이제 없기도 했지만, 뒷마무리가 이런 식이 된다면!
“괜찮아. 괜찮아…….”
나는 창피함을 애써 부인하며, 상비하고 있는 물통을 찾아 몇 모금 마셨다. 이 간단한 일을 위해, 묵직한 눈빛을 네 개나 감당해야 했다니. 정말 이건 말도 안 된다.
“다들 괜찮은 것 같으니까, 다행이지만.”
원작과 달리 유진도 생채기 하나 없어 보였고 말이다.
그건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다행히 그 덕에 나는 말끔하고 자신 있게 웃으며 문을 열 수 있었다.
“들어와요, 다들…….”
말끝이 절로 흐려졌다. 나는 어색하게 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이들을 보았다. 록스와 엠마, 거기다 언제 왔는지 이비엔 영애까지 합세해서는 다들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비장해?’
극장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듣고 싶고, 괘씸한 외가에 내 식으로 복수하기 위해 의논할 것도 있는데.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다니엘?”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다니엘을 불렀다.
“네, 리샤.”
“……그, 무슨 일이 있나요? 혹시 극장에서 누가 다쳤다거나,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거나.”
말하다 보니 나까지 심각해졌다.
“극장의 일은 잘 수습되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다친 건 리샤, 당신뿐이었고요.”
“아.”
나는 그의 말에 안도해서 활짝 웃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다행이라.”
착각일까? 순간 다니엘의 눈이 훅 새빨개졌던 것 같았는데.
“그래요, 다행이죠, 리샤.”
잠시 무표정하게 나를 보던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일어났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아주, 좋지 않았을 테니까요.”
잠시 핏빛으로 보였던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의 온화한 흑갈색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방금, 착각이겠지? 나는 다니엘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다니엘, 걱정해 준 거죠?”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결국 내가 눈을 떠서 다행이라는 말이 아닌가.
“고마워요.”
절로 온화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렇게 웃자, 다니엘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리샤.”
하긴, 그렇게 쓰러졌으니 걱정했을 것이다.
“일주일이나 눈을 뜨지 않으셨으니까요.”
하지만 구석에서 이비엔 경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웃다가 굳어 버렸다.
“……일주일?”
다니엘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랬군요.”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긴, 본 기억이 좀 많기는 했으니까. 아이고. 이건 진짜 걱정했겠다!
“미안해요, 다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을 줄은.
일단 나는 사과부터 했다. 우리 미남들, 우리 궁인들, 내 사람들에게 이런 걱정을 끼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으헝, 진짜 앞으로 좀 조심해야지!’
이어 그들이 뭐라 답하기 전에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요. 일어나는 걸 이렇게 기다려 줘서.”
나는 다니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많다.’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 그리고 다니엘.
‘제인 남매도 있고.’
엠마와 록스, 이비엔 경과 여기 없는 소피아 영애.
‘거기다 우리 오라버니까지.’
하나하나 손에 꼽기엔 조금 많은 수였다.
‘아, 우리 리니랑 아린도 있지?’
나는 가만히 그들을 눈에 담고 있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많아요, 언니.’
속삭이듯 부드럽게, 언니가 듣기를 바라며.
‘그러니까, 걱정 마요!’
헤헤. 이제 내가 하려는 복수는 언니의 우려와 달리 아주 안전하고 행복할 테니 말이다.
“……저는 정말 행복한 것 같아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나는 조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극장 사고도 잘 수습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같이 뒷수습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굳이 위험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지만, 실드를 펼쳤을 때의 마법을 쓰는 감각은 조금쯤 다시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분명히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혼자 쉬어 버렸네요.”
이건 진짜 아쉬웠다. 일기장 마법들 중에 쓸 만한 게 있었을 텐데. 힝.
“전하.”
어쨌거나 그런 아쉬움을 삼키고 있는데, 나를 보며 흐린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 중 엠마가 말했다.
“전하께서 좀 더…… 스스로만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것은 어딘가 엠마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 미묘한 이상함을 느끼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하, 그 외의 일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 저희가 완벽하게 해낼 테니, 부디…….”
“어…….”
몹시 간곡한 어조였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녀에게 답했다.
“엠마, 나는 충분히 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만큼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무엇을 하든 나는 내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물론, 내 안위도!
‘우리 언니 몸이니까 더더욱.’
하지만 엠마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쓰러져서 그렇겠지? 아이, 참. 하지만 무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나도 다친 곳 없이 눈을 떴다.
‘앞으론 무리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엠마는 걱정되겠지. 난 조금 미안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걱정 마, 엠마. 늘 그랬듯이, 나는 괜찮을 테니.”
“……그렇, 습니까.”
노파심에 한 말이었는지 엠마는 알겠다고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좋아, 화제를 돌려야겠다! 마법을 경험하는 건 혼자서 해 보면 될 일이 아닌가. 어쩐지 조용한 내 사람들을 한번 다시 훑은 뒤, 나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음. 다들 이렇게 모였으니, 같이 뭐 좀 먹을까요?”
언니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떠오른 계획이 있었다.
‘원작을 활용하는 거지.’
조금 밝아지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확인한 뒤, 다 함께 움직이며 생각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원작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떠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같이 먹는 거면, 많이 먹어야겠네, 리샤?”
“음. 저는 평소만큼 먹으면 될 거 같은걸요.”
“그러면 안 되지. 솔직히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많이 먹어. 알았어?”
“노력해 볼게요.”
헤레이스가 불퉁하게 입을 살짝 내밀었다. 나는 유일하게 웃음기가 없는 다니엘을 슬쩍 보았다가 헤레이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조금 웃었다.
“뭘 웃어?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냥, 좋아서요.”
“……그냥 좋아?”
“네.”
다니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이 걱정한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그의 바로 눈앞에서 쓰러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동시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기쁨도 느꼈다. 걱정했기 때문인지 그가 유난히 세상에 나만 보이는 것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즐거워요. ……늘 이랬으면 좋겠고.”
사실, 내가 이런 날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것 아니겠는가! 처음엔 구경만 하고, 또는 조금만 친해지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복수만 해서는 안 되지.’
르페르샤 황녀가 행복한 모습은 중요했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복수가 된다는 언니의 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려 우리 언니님의 말씀인걸!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게 살면서 복수도 할 거야.’
그래야 우리 언니도 좋아할 테니.
그러니까, 떠날 생각은 없어졌다는 말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원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움직일 것이니까.
“늘, 말인가요?”
그때 다니엘이 몹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물은 건가? 의아하게 그를 보자, 그가 읽을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만 한 번 살짝 끄덕였다. 순간 다니엘의 입꼬리가 움찔 하고 미소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점차 번지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고요한 밤, 달을 좇아 피어나는 꽃처럼.
“……그럴 거예요.”
그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워 보였다. 뭐라 묻고 싶은 기분이 차올랐지만, 뭘 묻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그를 빤히 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바로 했다. 착각일까? 나직한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가벼워졌다.
우리는 잠시 응접실에 모였다.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조금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근데 분위기가 좀.’
둘러앉고 보니 다들 별말 없이 나만 보고 있어서,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을 찾다가 나는 그냥 지금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제 외가 말인데요. 아무래도 그들과도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요. 이번 극장 일에 대해서 말이에요.”
어마어마한 정적이 흘렀다. 경악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역시나, 다들 이미 우리 언니의 외가를 의심하고 있었구나.
‘내 소문의 근원지였으니 우리 미남들은 다들 외가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겠지.’
지금까지야 의미가 없어서 관심 가지지 않고 있었지만. 걱정으로 흐려지는 그들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불의 마법사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아서요. 황궁은 아닐 테니. 남은 것은…….”
“전하의 외가뿐인 거군요.”
카인이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그곳과 이야기를 나눠 보신다는 건…….”
아마도 여기 모인 이들은 반대하겠지. 나도 진짜로 거길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가서 내가 뭘 하겠어?’
목적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위험하겠죠?”
“당연하지!”
싱긋 웃으며 묻자 헤레이스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피해도 모자랄 판에!”
“리샤?”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다니엘이 의뭉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때의 불의 마법사와 연관이 되어 있다면, 리샤에게는 아군보단 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다니엘 말이 맞아요. 하지만.”
“하지만?”
다니엘이 나를 보며 눈을 나른하게 떴다.
“제가 따질 것이 있어서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멱살 잡고 흔들며 우리 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따질 것이라니요?”
유진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퍼뜨린.”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우리 언니를 떠올리며.
“제 소문에 대해서요.”
“……!”
놀란 사람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삼켰다. 기억을 보고 나니 모른 척하기도 우스웠던 것이다. 애초에 ‘르페르샤 황녀’는 소문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그 편지를 보낸 자가 단테 바누스였으니, 바누스에서도 황녀가 소문의 출처를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몰랐던 척을 하면 나중에 더 이상해질 거야.’
게다가 이건 복수와도 연관이 되어 있고.
“너무 심하지 않나 해서.”
나는 원작을 활용해서 자잘하게 그들을 방해하기도 하고, 내 소문을 적극적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적극적으로 구는 이유로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극장 사고를 이유로 드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대충 알고는 있었어요. 다만…… 음, 제 외가가 원하는 바가 뭔지는 몰라도, 그게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면.”
답지 않게 성녀 같은 말을 하려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어우, 그래도 갑자기 기억이 났다는 것보단 낫잖아……?’
나를 보는 이들의 눈을 슬며시 피하며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어느새 차를 마시던 작은 소리조차 멈춰 있었다.
“전하.”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이비엔 경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씀은…….”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어물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였을 뿐.
“이비엔 경?”
“아니오, 아닙니다.”
뭐지?
“……음.”
나는 뭐라 더 말을 붙이려다가 그냥 내가 하던 말을 마저 하기로 했다.
“물론 저도 직접 가서 따지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요?”
다니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소문, 오라버니와 함께 수습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저도 손을 보태고 싶어요.”
“안 됩니다, 리샤.”
다니엘이었다.
“왜요?”
“……당신의 소문입니다. 그걸 굳이 직접 들을 이유가 있을까요?”
다들 다니엘의 말에 동감하는 기색이었다.
“맞아, 리샤. 속만 상할 텐데.”
“제 소문, 그들이 의도적으로 낸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로 얻는 게 있다는 거겠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넓은 범위로 공을 들인 만큼, 이미 많은 걸 얻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걸 방해해야 한다. 다들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니엘이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더 반대하기 전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직접 마주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다니엘이 멈칫했다.
“그럼요?”
“소문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나는 다니엘과 세 남자, 그리고 근심 어린 엠마와 록스, 이비엔 경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비웃음을 살 수도 있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어놓았다.
“좋은 소문으로 맞불을 놓으면 어떨까요?”
“……네?”
다니엘이 반문했다.
“아니, 헛소문에는 헛소문으로 대응을 하는 거죠.”
“……헛소문?”
이비엔 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음, 조금 부끄럽지만, 저를 아주, 아주 착한 사람으로 소문을 내는 거……죠.”
매우 민망했지만 그래도 우리 언니의 소문이라는 생각으로 꿋꿋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보던 다니엘이 물었다.
“아주 착한 사람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인데요?”
“예를 들면…….”
나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이미지라든가?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사람들을 지원해 줬다거나, 그냥 도와줬다거나.”
“…….”
가만 있자, 성녀 하면 뭐가 있지?
“막막 신기하고 성스러운 힘으로 사람들을 보호해 준다거나.”
“…….”
어쩐지 듣는 이들의 표정이 미묘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너무 과장했나!
‘하긴 이런 건 소문을 내는 사람도 낯이 뜨거울 테지.’
그 소문을 내는 건 아마 우리 미남들이 주로 하게 될 텐데. 미안해요, 미남들이여……! 빠르게 개심한 나는 밝은 어조로 가볍게 말을 바꾸었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아요! 가령, 길 가다가 할머니를 도와드린다거나?”
오, 이거 좋은데?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미묘했다. 뭐야, 왜들 이래!
“……혹시 그거, 경험담이에요?”
“네?”
다니엘을 바라보니, 그가 무언가 오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음, 아니에요, 리샤.”
그의 시선을 따라 다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니, 다들 무언가 이해가 된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엠마와 록스는 몹시 자애롭고 어딘가 서글퍼 보이기도 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리샤는 그런 거 대놓고 말하는 거 싫어하는구나.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뭐라고요?
“헤레이스.”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내가 정색을 하기도 전에, 카인이 정색을 하며 헤레이스를 불렀다. 헤레이스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리샤는 그 외가에 찾아갈 생각은 없다는 거지?”
“네, 그렇죠……?”
이 반응들은 대체 뭐지?
“그럼 됐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헤레이스.”
“음, 그러니까, 리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겠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며 헤레이스를 보자 그가 어린애처럼 딴청을 부리며 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샤, 준비가 다 됐다고 하네요. 가요.”
“음. 네.”
어딘가 허망한 기분으로 다니엘에게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 정말 꽤 긴장하면서 말한 건데? 아, 모르겠다. 좀 이상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히히. 할 말도 다 했겠다, 나는 어쨌거나 고마운 마음으로 웃으며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 *
처음, 소문의 출처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황녀가 담담하게 말했을 때. 그때부터 이 자리에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전 직접 마주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 말에 일단은 안도하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누스 가. 뚜렷한 증거만 없을 뿐 이미 황녀의 소문의 주체임이 확실한 곳이었다.
‘솔직히 그것 말고도 뭔가 있어. 나도 폐하께 말씀드려 보지.’
그 여유로운 황태자조차 그리 말하며 살벌하게 표정을 굳혔었다.
“소문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황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전하가 무슨 제안을 하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 그 위험한 가문에 직접 찾아가는 것만 아니라면!
“좋은 소문으로 맞불을 놓으면 어떨까요?”
“……네?”
하지만 전하의 의견은 무언가 이상했다.
“아니, 헛소문에는 헛소문으로 대응을 하는 거죠.”
“……헛소문?”
지금 전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좋은 소문으로 맞불을 놓는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헛소문?’
이비엔의 슬픔이 가득하던 눈에 점차 미묘한 당혹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음, 조금 부끄럽지만, 저를 아주, 아주 착한 사람으로 소문을 내는 거……죠.”
아주, 아주 착한 사람……. 이비엔이 고개를 휙 돌려 엠마를 보았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군.’
엠마,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때 미묘한 침묵을 깨고 다니엘 경이 물었다.
“아주 착한 사람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인데요?”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이미지라든가?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사람들을 지원해 줬다거나, 그냥 도와줬다거나.”
“…….”
이비엔은 언젠가 자신과 회의를 할 때 전하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회 환원. 신기한 말이었어.’
하도 신기해서, 그리고 반쯤은 황녀가 그걸 원하고 있다는 확신하에, 이비엔은 이미 상단을 키우면서 아주 적은 지분이나마 사람들을 위한 일에 써 보고 있었다. 물론, 황녀 전하의 이름으로.
“막막 신기하고 성스러운 힘으로 사람들을 보호해 준다거나.”
“…….”
극장에서 모두의 머리에 신기하고 성스러운 힘으로 실드를 펼쳐 사람들을 지켜 냈다는 누군가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걸 직접 본 사람들의 표정은 더더욱 미묘했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아요! 가령, 길 가다가 할머니를 도와드린다거나?”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언젠가 보았던 리샤를 떠올렸다. 시장에서 혼자 돌아다니던 그녀는 잡상인 할머니의 장식품을 전부 사더니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었다. ……그런 소소한 일을 말하는 건가?
다만 지금 조금 궁금한 것은, 지금 그녀가 알고 말하는 것인가였다. 그 소문들이 이미 그녀가 말한 것 이상으로 퍼져 있다는 것을.
“……혹시 그거, 경험담이에요?”
“네? 무슨…….”
“음, 아니에요, 리샤.”
저도 모르게 물어 놓고,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를 리가 없겠지.’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해 놓고 말이다.
‘아니, 모를 수도 있겠는데.’
그녀라면 모르고도 남았다.
은근히 정확한 예측을 해낸 다니엘이 미묘한 표정으로 리샤를 바라보았다. 당황하며 사람들을 보던 리샤가 찝찝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어쩐지 조금…….
“다니엘? 이제 괜찮아요? 계속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는데…….”
“괜찮아요, 리샤.”
느슨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이 말했다.
그녀를, 사랑한다.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매가 짙어졌다. 그가 묘한 눈으로 리샤를 응시했다.
‘복수심.’
제국에 대해 미칠 듯한 복수심을 가졌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내 목적은 복수인데.’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지킨다. 그는 굳이 이 제국에 터를 잡고서 제국의 귀족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의 무리는 궁극적으로 황가가 망가지기를 원했다. 그런데도.
“다니엘?”
잠시 멈춰 선 사이 사람들과 조금 거리가 생겼다. 다니엘은 그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리샤의 볼에 손등을 가까이 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렇게 내버려 두는 이유.”
그것은 이 여자를 죽일 수 없어서. 사랑하게 되어서.
“혹시 알고 있어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네요.”
“어려운 말은 아니에요, 리샤.”
손끝을 닿을 듯 말 듯 하게 멈춘 채로, 다니엘의 눈이 칠흑처럼 짙어졌다.
“나는 당신이 갖고 싶은 거예요.”
깊고, 어두운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느릿하게 쉬었다. 나른한 분위기로 살짝 내리뜬 눈도,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도 짙고, 붉었다. 옭아매는 듯한 시선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겨우 눈만 잘게 깜박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거둔 손끝의 열기가 아직도 볼 주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적절한 답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어색하게 그의 가까이로 다가가서 어서 가자는 재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말로 꺼내지는 못하고 눈치만 주었더니 그가 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아주 사람 심장을 가지고 노는 인간이네, 이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웃는 그를 조금 원망을 담아 흘기다가, 나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느긋하게 따라붙었다.
식사는 맛있었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좋은 시간인데, 기억에 남은 건 그의 새카매졌던 눈과 붉은 미소. 그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아주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았다.
‘몸은 조금 무겁지만.’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어우, 복수한다고 생각하니까 무거운 몸도 막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3일에 한 번 기억을 찾으면서 컨디션이 나빠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이비엔 경.”
오늘은 어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일들을 시작해야 했다. 가장 먼저 개인적으로 부른 사람은 이비엔 경이었다.
“리스테인, 기억해요?”
“네, 전하.”
나는 드물게 다리를 꼰 채 조금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리스테인은 예전에 이비엔 경과 회의할 때 말이 나왔던 약초였다. 아마사 지방에는 곧 전염병이 돈다. 원작에서는 그 병에 대한 치료제는 조금 지난 뒤에 발견된다. 그 치료제가 바로 리스테인이었다.
‘정확히는 리스테인의 뿌리.’
그래서 전에 나는 이비엔 경에게 그 지방에 자리 잡고자 한다면 쌀 말고 약초를 독점하라고 했었다.
‘쌀은 이미 독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더불어 사람 목숨 달린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일로 이비엔 경이 얻을 명예가 값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 이유 가운데 내가 조금 포함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겠지만.’
이 사건은 원작의 후반부에서 마법 테러 단체와 연관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마법 테러와 바누스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했다. 기억들을 보니 더더욱. 그렇다면 원작의 초중반에 발생했던 사건, 아마사 지방의 전염병 사건을 간과할 수 없었다.
‘한번, 제국민들의 여론이나 흔들어 볼까?’
나는 꼭 마피아라도 된 것처럼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채 이비엔의 보고를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약초를 빈틈없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약초들로 그 지방을 파고들고 있고요.”
든든한 이비엔 경! 뿌듯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훌륭해요. 다름 아니라, 오늘 이렇게 따로 보자고 한 것은 걸리는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약초, 어쩌면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막내 콜린을 구할 때 내가 정보력이 좋다는 인식이 퍼진 것 같으니, 이 정도 둘러대기는 통할 것이다.
물론 적당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해야겠지만. 나를 바라보던 이비엔이 바로 답했다.
“그렇군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유를…….
“……아, 네.”
그, 정말 든든하네요!
“고마워요. 그…….”
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긍정하는 거람! 나는 허망한 심정을 재빨리 수습하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하나를 더 부탁해도 되겠어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혹시 그걸 쓸 일이 생기면요, 제가 일이 잘 수습된 것을 아주 기뻐했다는 소문을 함께 흘려 주세요.”
본래 리스테인으로 인한 칭송은 당초 목적대로 이비엔 경과 그 상단의 것으로 두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아직 안 일어난 일이니까, 사용해도 되겠지.’
바누스 가. 그들은 원작을 아는 나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하나 더.”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의 카리스마를 떠올리니 몸이 절로 움직였다.
“제 외가가 만약, 마법 테러 사건들의 흑막일 경우에.”
앞으로 나는 원작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여겨진 사건들이 있다면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 바누스 가의 목적을 모르니 아는 만큼 전부 방해를 하려는 것이다. 더불어 내 소문도 바꿔 버리고. 아직은 느낌일 뿐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꽤 큰 타격을 줄 것 같았다. 다만.
“상단의 힘만으로는 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요.”
상단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더불어 사건에 관련된 무수한 사람들도.
“그럴 바에야 이렇게 그들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일에는 내가 나서는 게 나아요. 막아 낼 자신도 나름 있고요.”
말해 놓고도 너무 세게 말했나 싶었다. 그래서 이비엔 경을 말끄러미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부담이 되는 일이라면 꼭 그렇다고 말해 주면 좋겠어요.”
부담은 안 되겠지만!
“……전하.”
내 말에 잠시 나를 마주 보던 그녀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전하를 존경합니다.”
“네?”
그녀는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그걸 마주 보고 있자 그녀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저를 믿어 주셨고, 밀어주셨지요. 그래서…… 그래서 저도, 전하께 그런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 그러니까, 믿어 주고 밀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경은 이미…….”
“전하께서는 이미 제가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하실 테지만…….”
헉, 어떻게 알았지. 심각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더욱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제.”
무엇을 떠올렸는지 이비엔 경의 낯이 흐려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말씀을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이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비엔 경이 혹시라도 어디서 돈을 빌렸다던가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떠올린 뒤 심각하게 말했다.
“편히 말해 봐요, 경. 지금이라도 말하면 되지 않겠어요?”
언니, 불안에 떨지 말고!
“지금이라도. 네, 그래야겠지요.”
이윽고 이비엔 경이 내게 말했다.
“제 감정은 저를 믿어 주시고 도와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
“……그날, 첫날 저를 보며 웃어 주셨던 것. 그 하나만으로도 전하를 주군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기쁘긴 한데,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전하께서 천재가 아니셔도…… 그 무엇도 가지지 않으셨어도, 저는 전하가 좋습니다.”
“…….”
좋대…….
힝, 모르겠다. 당황했던 것도 잊고서, 나는 그냥 감동해 버렸다. 뭐야! 갑자기 이러면!
“저도 경이 좋은걸요. 딱 그렇게 좋아해요.”
하긴 나도 그러니까! 원작 인물에 대한 호감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하가 무엇을 꿈꾸셔도, 저는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게는 전하의 본모습을 감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드러낼게요.”
뭔가 찔끔하면서, 내가 답했다. 이거, 내가 자기 덕질 하는 걸 알아챈 거 맞지……? 하지만 경은 결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에 소리 없이 안도하며 그녀에게 한결 친근해진 미소를 보냈다. 좋아요! 허락도 해 줬겠다, 이제 더더욱 마음껏 경을 덕질 하겠어요! 이비엔 경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 매우 만족한 분위기로 당차게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해 제 마음을 다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일이라면, 조금 전에 부탁한 전염병 사건을 말하는 것이겠다. 굳이 ‘마음을 다해서’를 강조해 말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고맙기만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부탁할게요.”
“예, 전하. 그럼, 가 보겠습니다.”
쏜살같이 나간 이비엔 경을 배웅한 뒤, 나는 회의할 때는 소리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으, 역시 어색하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 잠시 넋 놓고 보다가, 혼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바로 했다. 새삼 둘만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이 갖고 싶은 거예요.’
그때는 어색하게 어찌어찌 마무리 지었었지만.
‘생각해 보니 알겠어. 모를 수도 없는 일이잖아.’
나는 곤란하면서도, 마냥 곤란하지만은 않은 기분을 느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다니엘이 대놓고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왜 그래요?”
“헉.”
갑자기 들린 그의 목소리에 나는 과하게 놀라고 말았다.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그가 잠시 묘한 표정을 했다가 심각한 기색으로 급히 다가왔다.
“아니, 아니에요.”
“그럼.”
다가오는 그의 걸음이 멈추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그가 입을 열었다.
“뭔가, 곤란한 건가요?”
흐린 미소를 머금고서, 그가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날 보지 않으면서도, 모조리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니엘 때문이에요.”
나는 그 위험하고도 섹시해 보이는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일순간, 떨림으로 인해 숨이 막혔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었다.
‘너무 가까운데.’
하지만 이 정도 거리는……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다.
‘친구……였으니까.’
굳이 따지면, 그와 나는 친구였다. 특별한 계약 관계가 더해진, 특별한…… 친구.
다니엘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갖고 싶다고 말해서 그래?”
하고. 피할 수 없는 순간, 그가 무심히,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당신이 쓰러진 순간 했던 생각이 있어요.”
다시 부드러운 존댓말로 돌아온 다니엘이 내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꿈을 덧그리듯 말을 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당신을 다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제가.”
말도 안 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그 순간 스친 빛깔은, 붉은빛도, 검은빛도 아니었다.
“……깨어나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겁니다.”
서글픈 잿빛이었다.
“그리하여 깨달았습니다.”
어딘가 고풍스러운 말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망막에, 귓가에 아로새겨졌다.
“차라리 가져야겠다고.”
나는 그 순간 그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다니엘의 조국에 대해서. 로바인 왕국에서 왕족의 몸으로 혼혈 정령이 된 다니엘. 원작에 표현된 그는 제국에 칼을 들이미는 모습뿐이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를 이루는 것은 로바인에서의 과거가 더 크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런 헤아림의 끝에서, 나는 직감했던 것이다.
이 남자에게 갖고 싶다는 말은…….
다니엘이 말했다.
“르페르샤. 당신을.”
내게 주세요.
순간 뺨 훅 달아올랐다. 심장이 아찔하게 뛰었고, 그가 남자로 느껴졌다. 허, 위험해. 위험하다. 이 순간, 다른 원작 내용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이 부분은 바로 고백하지 않으면 나쁜 거니까.
“나는, 황녀잖아요. 그리고 황가가 한 일을 알고 있어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알아요.”
다니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건 다음에 생각하죠. 나는…….”
당신을 이미 한 번 잃을 뻔했어요, 리샤. 하고 속삭이는 음성에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복수 따위를 할 시간에 난 당신이랑 있어야겠어요.”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당신이 몇 년 안에 죽든, 당신의 그 시간을 내 것으로 하고 싶어요.”
그러더니 달래듯 내 귓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 주며 어딘가 음험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내게 호감이 있다면, 죽기 전에 연애라도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어때요?
그 순간의 그는 진실로 악마 같았다. 내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뛰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깨달아 버린 것이다.
흑막 다니엘. 암살 길드의 수장 다니엘. 원작에서 여주마저도 함락시키지 못한 남자.
……나도, 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덕질이라면 많이 해 봤다. 뒤죽박죽인 한국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생활처럼 덕질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연애적인 의미로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그는, 덕질 대상……인가?’
무, 물론 내게는 덕질이지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덕질은 사람으로서의 존중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니까, 호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지. 내 호감은 내 주변을 향해 풍부하게 뻗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다니엘만은, 무언가 다르다.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만지고 싶다고 느꼈다.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에게도 소매만 잡는 등 황송하다고 여기거나 넋을 잃었는데. 솔직히 손잡는 것마저도 욕망이 아니라 황송함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니엘이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리감을 느끼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피어오르는 잿빛. 화려하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은 그 빛깔에, 그 어떤 빛깔보다도 그것에 마음이 확 쏠린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다니엘.”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
“난 죽어요.”
다니엘도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가 말을 하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래 살 수도 없고, 라파엘리스는 불치병이죠. 심지어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덤덤하게 나오는 말들은, 평소에는 정말로 덤덤하게 넘기던 말들이었다.
“나는 아마, 금세 사라지겠죠.”
언니가 준 인생이다.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정말 내 것이라고 여기느냐고 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게, 언니가 버젓이 있는데.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 돈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이니까.
“사라질 거예요. 아마도.”
지금만큼은 언니가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살포시 뒤로 미뤄 두었다. 그에게 말해야 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죠. ‘나’는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당신은 들어도 된다.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아직,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은 당신에게, 매우 비겁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머무를게요.”
하지만.
“하지만 나를 ‘줄’ 수는 없을 거예요.”
“…….”
이것은 사실이다.
다니엘은 묵묵히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역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천천히 그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이비엔 경뿐 아니라 유진, 카인, 헤레이스도 따로 만났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관련된 사건을 미리 차단하는 지혜를 주었다. 그로 인한 명예에서 내 이름을 끼우는 부탁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루 종일 유난히 말이 없던 다니엘이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다니엘?”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리샤.”
“네.”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뭐죠?”
평이한 어조였지만, 설렁하게 답하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 움직이는 것도 힘들 텐데요.”
“아, 그건.”
어째 몸이 무겁더라니. 우리 언니 몸이 극장 일 이후로 회복이 더딘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기 때문에 이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고.
“괜찮다고 하지 말고요.”
요즘 내 속을 읽는 사람이 어째 많다. 하지만 괜찮은 걸 괜찮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엉엉.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더 못 할 짓 아닌가.
“……괜찮을 리 없으니까, 필요한 것을 말해요, 리샤.”
“필요한 것이라면…….”
하지만 그의 과할 정도로 간절하게 들리는 어조에, 결국 나는 두 손을 들었다. 거절 같지도 않은 거절을 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뭐라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거짓말은 하기가 싫었다.
“아!”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 있네요.”
잔잔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하나. 뭔데요?”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좋지 않을까?
“좋아한다고 말해 줄래요?”
“…….”
“사실, 무척 기뻤거든요. 그, 이비엔 경이 말해 줬을 때.”
다소 뜬금없기는 했지만, 이비엔 경이 직접적으로 표해 준 말이 마음에 생각보다 깊게 남기는 했다.
‘그녀는 충성심이었지만.’
조금 우습지만 어쩌면 어제 그가 내게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다면, 그를 거절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그런 말이 나한테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 같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조금 일방적으로 원작 인물들에게 애정을 쏟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뜬금없이 구는 것을 아니까, 동일한 호응이 돌아오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정이 들고, 그들과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즐겁고 행복하지만.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따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뭔가 다르더라고요.”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진지하게 조곤조곤 이유를 말했다.
“말로 들으니까, 음.”
표현하기 전부터 미소가 배어났다.
“행복해지네요.”
“좋아해요.”
하지만 훅 들어온 말에 덜컥 굳어 버렸다.
“당신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천천히, 확연히 의식하고 있던 미소가 무뎌져 갔다. 나는 그저 그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이것 봐. 역시,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리샤.”
어제와 달리 그는 상념에 잠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잔잔한 미소에 어린 감정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번에도, 행복해졌나요?”
마치 그럴 리 없다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매달려 입을 맞추었다.
“……!”
아주 잠시, 굳었던 그는 이후 느릿하지만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목 뒤를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졌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다고.’
나도 좋아해요. 그 말을 할 새를 찾지 못하고, 오로지 그를 탐했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잠시 떨어졌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잦아들고 짧은 정적이 흐르는 순간,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 이렇게 만지고 싶었다. 그 충족감에 미소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좋아해요, 다니엘.”
“……하.”
순간 떨리는 탄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삼킬 듯 키스했다.
* * *
어릴 적,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기억들 중 그녀를 닮은 것이 있었다.
잔잔한 호수에 달빛이 어리면, 세상의 그 어떤 진귀한 것으로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어린 다니엘은 그런 것을 마음에 들어 하고는 했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광경이. 인상적인 사람도, 사건도 없었던 그 기억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답게 남아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도 소중해서, 오히려 잊은 듯이 살아가야 했던 장소였다. 후에 찾아갔을 때는 사라져 버려서, 이제는 그의 기억에만 남아 버린.
“좋아해요.”
하필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리샤는.
“당신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닿을 수 없고, 이제 와서는 역시나 너무 귀해서 닿기 무서워질 만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리샤.”
기대도, 무엇도 없었다. 다니엘은 그들이 보낸 시간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을 괴물로 살아왔으니까.
“……이번에도, 행복해졌나요?”
그는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 대해 참 많이 알아 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순간이 가득하다. 지금처럼.
그녀는 그에게 달려와 키스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좋아해요, 다니엘.”
그날, 그는 자신이 그녀로 인해 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늦잠 잤네.”
언니의 기억을 찾는 날이 밝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야지.’
눈을 살짝 비비며 생각했다. 피 토하는 날은 쉬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달리 할 일이 있기도 했다.
‘언니랑 만나서 할 말이 있으니까.’
쉰다고는 해도,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리샤, 일어났어요?”
“아, 잠깐만요!”
문밖에서 들리는 음성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침부터 저건 왜 부르고 난리인 건가.
젠이 투덜거렸다. 어젯밤부터 내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들이 전부 다니엘을 아니꼽다고 하는 말들뿐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일기장을 두어 번 쓰다듬어 준 뒤 가볍게 준비를 마쳤다.
“다니엘.”
“리샤.”
호위 기사로서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그가 고개를 숙이게 했다.
쪽.
남들 볼세라 재빨리 그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들어와요.”
“…….”
잠시 굳어 있던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웃음소리에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
-하아…….
젠의 고뇌 어린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다니엘을 충분히 눈에 담은 뒤 가볍게 웃으며 손짓했다.
“어서 와서 앉아요. 오늘 전부 다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요.”
다니엘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낮게 내리깔고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랬죠.”
그에게 오늘 말해 준다고 약속한 ‘전부’는 바로 지난 이틀 동안 내가 몇 사람에게 부탁한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요.”
그가 진지한 눈빛을 보내왔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분명히 궁금할 텐데 묻지 않는다.
‘그런 건 신뢰를 떠나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지.’
괜히 미소가 나왔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 집중하기로 했다.
“이비엔 경은 전염병을 막을 거예요. 근시일 내에. 그리고 저는 그 전염병에 제 외가가 연관되어 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진 경에게 부탁한 것은…….”
“음, 리샤. 잠시만요.”
“네?”
“저를 단이라고 불러 줄래요?”
“……?”
그의 눈에 옅게 붉은 기가 스쳤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단.”
“고마워요. 말 끊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볼턴 경에게 부탁했던 거라면, 스테프니 거리의 르네타 살롱을 찾고, 그 주변 어린아이들을 주시하다가 구하라는 거였죠?”
“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자유 기사이기 때문에 그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요.”
“그렇겠네요.”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프니 거리는 제국 수도에 있지만 독특한 풍조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곳은 오래 전 성녀가 태어났던 거리였다.
“신전의 입김도 센 곳이고, 아카데미와도 가까우니.”
제국 수도의 명물인 동시에 가장 골치 아픈 구역들 중 하나였다.
“자유 기사가 이름을 떨치는 게 가장 좋게 받아들여지겠죠.”
“맞아요.”
원작에서 어린아이들이 집단으로 이상한 사람에게 현혹되었던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유진이 해결했던 사건이기도 하고.’
시기적으로 조금 뒤에 일어날 일인데, 그냥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법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했거든.’
마법이라. 나는 조금 멍하니 손을 움찔거렸다. 마법을 썼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보니, 그 전과 달리 몹시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리샤? 왜 그래요?”
이마를 조심스럽게 짚어 오는 손길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냥, 마법을 생각했어요. 느낌이 신기했거든요.”
“마법이라. 리샤의 정령이 더 신기한 건데 말이죠.”
“그래도요. 그리고…… 음, 좀 무섭기도 하고.”
그리고 슬쩍 떨어지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서 중얼거렸다.
“그보다, 시원해서 좋네요.”
다니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을 기분 좋게 받고 있던 순간, 입술에 뭔가 촉 왔다 갔다.
“……!”
눈을 번쩍 뜨자,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눈을 맞춰 오면서 다니엘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 어떤 마법사도 감히 당신에게 무언가를 하지 못할 테니.”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하지만 지금 심장이 부드럽게 두근거리는 것은, 그것이 몹시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고맙죠.”
그가 내 이마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그대로 내 옆머리를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후우…….
분명히 이거 일부러 내는 소리야. 정령이 무슨 한숨이람? 물론, 모른 척했지만 말이다. 젠의 한숨을 뒤로 하고, 나는 다니엘과 함께 마냥 좋아 웃었다. 오라버니가 찾아온 오후 시간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 * *
어둑한 골목 한쪽을 길쭉한 인영이 걷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평범해 보이도록 분장한 유진이었다.
“르네타 살롱이라.”
그는 다른 살롱들과 달리 다소 고즈넉한 장소에 세워진 살롱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조금 분위기가 특이하단 말이지.”
일단 드나드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부는 늘 밝고 화려했다. 그것은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머무르면서 사용하는 손님이 있다는 건가?’
그 외에도 이상한 향이 가끔 풍겼다. 지금 그 향을 모아 록스에게 물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참으로 수상하게도, 향의 정체는 독초였다.
‘환상을 보여 주는 독초라고. 아주 짧은 순간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여 주지만…… 근본은 독초라고 했지.’
아무리 봐도 이 살롱, 뭔가 있었다.
“게다가 이 주변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고.”
유진에게 리샤가 언급한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그중 이틀이 흐르는 동안, 유진은 살롱 주변뿐 아니라 살롱까지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실소유주가 하필…….”
스테프니 거리의 르네타 살롱은 살롱 중 거의 유일하게 실소유주가 귀족이 아니었다. 한 상단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 상단이 리샤의 외가인 바누스가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
‘알고 계셨을까.’
유진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내 쪽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잠깐 만났던 카인과 헤레이스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가에 대해 좀 더 확고하게 수상하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비엔 경도 그랬지.’
살롱을 잠시 서늘하게 보던 유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살롱 주변의 아이들을 살필 차례였다.
‘고아들이 많아.’
특이한 점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을 포함해서 하층민들이 편안하게 살롱 주변을 다닌다는 것도 이상했다. 사실 살롱이라는 가게의 특성상 대체로 주변 정리도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고급스러워야 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일단은 지켜보라고만 하셨으니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상한 점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 둘 뿐. 유진은 리샤가 말한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휘이잉. 불어온 바람에 한 아이가 버려진 레이스로 꼬물꼬물 만들고 있던 리본이 날아갔다. 그것을 낚아챈 손길이 있었다. 유진이 힐끔 그쪽을 보았다.
“꼬마 아가씨, 네 것이니?”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유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매끄러운 목소리지만 어딘가…….
“네, 네…….”
“저런. 놀랐겠구나. 여기 받으렴.”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 같은 말투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투를 가졌군.’
그 정도 감상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진은 말없이 온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감사합니다…….”
레이스 리본을 받아 든 소녀가 몽롱하게 대꾸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예쁜 것을 줄 수도 있는 것을!”
“더 예쁜 것이요?”
“그래. 여기, 이것을 한번 보려무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은 로브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유진도 알고 있는 향을 뿜고 있었다.
‘그 독초다.’
살롱에서 가끔 톡 쏘듯 퍼지던 향. 그 향을 가진 환상초.
‘어린아이에게는 정신 착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서 금지되었다고 했지.’
록스의 설명을 떠올리며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군.”
리샤 님이 막으라고 하신 것. 3일 만에 그 기미를 포착한 것이다.
‘리샤 님이 지시하셨던 위험한 물건은 벌써 처리했고.’
위험한 물건. 제국 곳곳에 있는 ‘위험한 물건’들. 즉, 바누스 가의 협력 가문들이라면 지금쯤 아마 이곳의 물건 말고도 전부 처리되었을 것이다. 리샤 님의 정확한 지시로.
‘그렇다면 이제, 마음 놓고 날뛰어 볼까.’
유진이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몸을 풀 때가 온 것 같았다.
* * *
“리샤, 그럼 아이들을 홀리는 마법사를 잡으면 되나요?”
다니엘이 물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네. 그리고 그 마법사를 잡으면서 아이들도 구할 테니까. 그 후에 제가 유진 경을 칭찬했다는 소문만 함께 퍼뜨리면 되는 거예요.”
이비엔 경에게 말했던 것만큼 쉬운 일이리라. 커다란 유진의 명성에 고명처럼 내 좋은 소문을 살짝 얹는 것. 히히.
다니엘이 어쩐지 나를 오묘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배시시 웃으며 묻자 다니엘이 짙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리샤다운 것을, 정말로 좋아해요.”
나다운 게 뭔데요! 그런 드립 같은 답을 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어우, 그냥 괜히 기분이 좋아서, 참.
“다만.”
다니엘이 조금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다만, 뭐요?”
“아뇨. 기대가 되어서요.”
그가 묘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오라버니의 난입에 내 부탁으로 자리를 비웠다. 생각보다 기꺼운 표정으로.
* * *
“그래서, 저 사람이군요.”
“다니엘 경?”
아주 조금, 시간을 조금 더 두고 지켜본 뒤. 유진이 막 아이를 홀리는 이를 덮치려던 순간이었다.
“경은 빼라고 했을 텐데요. 그보다 뒤.”
유진이 가볍게 뒤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인영을 칼등으로 퍽 해치웠다.
“훌륭하네요.”
나른하면서도 심드렁한 어조로 말하며 다니엘이 두어 번 박수를 쳤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쫓겨났거든요. 그보다, 슬슬 튀어나오네요.”
다니엘은 살벌한 얼굴로 쳐들어왔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모종의 힘으로 수상한 인물들의 입을 전부 막아 버렸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습니까.”
다정한 내용과 달리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유진이 그런 다니엘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움직였다. 살롱 주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들에게 환상초의 향을 맡게 하던 이들이 순식간에 검거되었다. 소리 없이.
“죽이지 마세요, 볼턴 경.”
“압니다.”
“더불어, 환상초들은 내게 주시고요.”
“불가합니다.”
일단 거절한 뒤, 유진이 다니엘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산다고 해도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됩니다. 아니, 뭡니까? 왜 그런 걸 원하죠?”
“……사람을 홀리는 마법은 없거든요.”
“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다니엘에 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니엘은 아까 들었던 리샤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이들을 홀리는 마법사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능으로 사람을 홀린다면, 그건 적어도 마법은 아닐 터.’
“무슨 말씀입니까?”
실은 다른 것인 줄 알았지만.
“다니엘 경?”
사실은 인공정령이 아닐까, 했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짓을 하는 이들이네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다니엘은 무감정한 눈으로 한 곳에 모아 둔 인영들을 흘깃 보았다.
“어쨌거나 환상초라면, 언젠가 쓰일 데가 있을 겁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리샤가 위험해졌을 때요.”
“…….”
순간 유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환상초를 먹이면 가짜 기억이 만들어지거든요.”
젠의 말로는 리샤의 일기장은 이 독초를 가공한 물을 먹인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정보.
“물론 먹은 사람은 얼마 안 있어 죽겠지만,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시간은 있을 테니까요.”
유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마지못한 듯 말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에 좋다는 말이군요. 적이 많은 사람에게는 요긴한 것이기는 합니다.”
리샤 님은 날뛰고 있었다. 지금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외가와 날 때부터 가졌던 적들 모두를 부술 것처럼,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지금보다도 더 많은 적이 생길 수 있다며 걱정했을 때, 그녀가 뭐라고 했더라.
‘모두 없어지면 그만 아니냐고 했지.’
그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매우 놀랐었다. 며칠 전을 떠올리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남자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샤 님에 대해서만큼은 더없이 믿음이 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유진이 빠르게 환상초를 수거해 다니엘에게 내밀었다. 다니엘이 그것은 한숨 어린 눈으로 보다가 받아 품에 넣었다.
“사실 이건 봤으니 달라고 한 것이고, 따로 할 말이 있어 왔어요, 볼턴 경.”
“뭐죠?”
유진이 살롱 쪽에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잡은 이들을 전부 기절시켰다. 그리고 하나하나 짐처럼 포개기 시작했다. 그런 일련의 일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리샤에 대한 소문을 끼우기로 했죠?”
“들으셨다시피, 그렇습니다.”
“리샤가 말한 그대로 할 생각입니까?”
“그대로 할 겁니다.”
다니엘이 묘한 얼굴로 유진을 보았다.
‘기사들이란.’
그나마 유연한 자유 기사라 해도 근본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충성심으로 받은 명령이나 부탁에 대해서만큼은 융통성을 발휘할 줄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다니엘 경.”
“그 소문.”
사실, 리샤가 이들을 통해 하려고 하는 것을 다니엘은 단숨에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리샤를 위해, 더 제대로 내 보지 않겠어요?”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리샤가 기뻐하니까.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하는 데가 있으니, 좋은 일로 놀라는 것도 보고 싶고.’
자신의 소문을 접하고 얼떨떨해할 그녀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
리샤를 위한다는 말에 멈칫한 유진은 잠시 생각한 뒤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말해 보십시오.”
“역시, 경은 말이 통해요.”
다니엘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저 사실 그대로로 소문내면 충분해요.”
“하긴, 리샤 님이 부탁하신 그 소문은 사실을 축소한 것이니. 알겠습니다.”
유진이 한번 감을 잡자 빠르게 말이 통했다. 다니엘은 그를 보며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으세요, 볼턴 경.”
오늘따라 볼턴 경이라고 굳이 부르는 일이 잦다고 생각하며 유진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 뭡니까?”
“살롱 거주자들의 정보.”
드나드는 손님 없이 유지되던 이 살롱. 마침 그것도 알아보려던 차였는데. 속을 읽은 것처럼 정보를 건네는 것에 유진이 고개를 들어 빤히 다니엘을 보았다.
‘더럽게 수상하게 구는군.’
속을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도. 온화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목소리도.
‘리샤 님을 대할 때면 달라지지만.’
아무리 보아도 캘 것이 없음을 안다. 유진이 한숨을 쉬며 다니엘의 건조한 눈에서 시선을 뗐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가끔 드는 생각은, 저 다니엘과 황태자 중 누가 더 싸우기 싫은 인간인가 하는 것이었다.
‘강한 사람과 싸우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는데.’
그 황궁에서 진심으로 싸우기 싫은 강자들을 만나 버린 셈이었다.
“건투를 빌어요, 볼턴 경.”
옅은 미소를 흘리고서 다니엘이 홀연히 사라졌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역시 싸우기 싫은 존재다.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비록 직접적으로 해 주신 말씀은 아니지만.’
살롱은 바누스가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였다. 리샤 님이 주신 그 실마리를 확실하게 낚아채기 위해,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황녀궁 앞에 가볍게 내려선 다니엘이 황녀궁 지붕에 늘어져라 누워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헤레이스.”
잠시 후,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곁에 나타난 그가 입을 열었다.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말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헤레이스가 눈을 번쩍 떴다.
“네가? 나한테?”
“네.”
헤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리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귀찮아.”
사실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황태자가 있어서 포기했다.
“……말만 전해 주면 돼요.”
“무슨 말?”
여상스러운 어조로 다니엘이 답했다.
“모든 계획을 잠정적으로 보류한다고요.”
사실상 황가에 대한 복수는 멈추기로 한다. 다니엘은 표면적으로 암살 길드를 표방하고 있는 그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전하기로 했다.
‘이것들 뭔가 하고 있기는 했군?’
다니엘과 그 무리가 무언가 큰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헤레이스도 알고 있었다. 그 칼날 끝에 리샤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헤레이스는 그 일이 다니엘 무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삐딱하게 물었다.
“걔네가 그 말 듣고 나한테 달려들면? 죽여도 돼?”
“안 달려들 겁니다.”
아마 다들 예상하고 있을 테니. 다니엘이 부드럽게 답했다. 헤레이스가 멀뚱히 다니엘의 옆모습을 보았다.
‘리샤가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그리고 그녀가 마음을 먹자마자 나라 곳곳에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소름 돋을 만큼 굉장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뒤에서 몇 가지를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현재 가장 위험하고도 핵심적인 것들을 빼냈다. 가볍게 미리 처리하라고 하던 물건들만 떠올려 봐도.
‘이런 걸, 흑막이라고 하나?’
그 물건들을 다 모아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샤가 그토록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 봤다.
‘적으로 돌린 쪽이 가여워질 지경이야.’
가볍게 지시한 것들 중 그 무엇도 가벼운 것이 없었다. 이미 그들은 바누스 휘하의 가문 몇 개를 부쉈다. 그런데 아직도 바누스는 자신들이 황태자의 단속에 잘못 걸린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계산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리가 없어.’
헤레이스가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흑막이 아닌가 하며.
* * *
“부쉈어, 누이.”
나는 어색하게 오라버니를 돌아보았다.
“오, 오셨어요!”
“누이…….”
그런데 어쩐지 오라버니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바누스 쪽 가문 몇 개를 부쉈으니까 기뻐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거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아, 맞다. 부탁하는 입장이면서 내가 직접 안 갔구나?’
허, 이런! 정신을 빼놓은 것이 분명했다! 일어나자마자 찾아가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느라 오라버니에게는 서신만 보내고 말았다.
“멀쩡해 보이네?”
속삭이듯이 들리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웃지 말고.”
싸늘한 얼굴로 오라버니가 말했다.
“저기, 죄송해요, 오라버니.”
“뭐가 죄송하지, 누이?”
“그게, 변명은 아니지만, 그렇게 쓰러져서요.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제가 먼저 오라버니께 갔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시무룩하게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침묵하다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지.”
“네?”
“누이가 잘못한 건 그게 아니라고.”
오라버니는 거기까지 말한 뒤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을 쉬는 건 또 처음 보는 터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오라버니가 소파에 앉으며 손짓했다.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그를 살피자 오라버니가 대뜸 말했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아.”
“……됐어. 사과하지 말도록.”
애초에 사과할 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작게 미소 지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타박하는 그가 진짜 내 오라버니 같아서.
“헤헤. 오라버니.”
“……뭐야.”
배시시 웃으며 부르자 그가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질색하는 느낌이 매우 재밌었다. 하지만 그 재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랭턴 영애가 뭘 해요?”
“극장에서의 너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깨, 깨달음…….”
“지금은 그 소피아 영애인가? 그 영애와 함께 다니고 있지.”
“…….”
“아리엘의 인생에 스승은 둘이라고 하더군. 하나는 에밀이요, 하나는 황녀 전하라던가.”
“어…….”
그것 참. 나는 몹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를 보았다. 오라버니는 이제 내게 성질을 낼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에게서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건 착각이겠지. 그가 심심찮게 아리엘에게 불려 나가 덤불 사이를 돌며 인생에 회의를 느꼈다는 것을, 이때의 나는 몰랐다.
어쨌거나, 짠하다. 도무지 원작의 커플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엇갈리는 짝사랑이었다.
“기운 내세요.”
“……고마워, 누이.”
좌절된 짝사랑이란. 사람을 개과천선시키기도 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우리는 쌓인 이야기를 했다. 바누스 가에 대해서라든가, 오라버니는 많은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내 생각보다 더 막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사람을 보내고 왔다.”
“네? 무슨 사람이요?”
“레티시에 가문. 그냥 부수라고 했는데.”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멍하니 물었다.
“저기, 네?”
그건 바누스 쪽의 가문 중에서도 중견 가문이었다. 거기를 뭐? 부숴……?
“어차피 그쪽 가문들은 사실상 전부 부서진 거 아닌가. 그걸 우연으로 보이게 만드는 누이의 능력이 무서울 정도야.”
“네?”
뭐라고 이상한 말을 흘리던 오라버니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중견 가문이기는 해도 문제는 없어. 먼저 족치고 증거는 나중에 주면 그게 증거가 되는 것이니.”
시큰둥하게 말하는 오라버니를 보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권력이군요.”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쓰는 게 권력이지.”
“그, 그래요.”
멋진데? 내 소리 없는 갈채 시늉을 묘한 눈으로 보던 오라버니가 툭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놈은, 계속 누이 곁에 있는 건가?”
묘하게 날이 선 말투에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말하다 보니 웃음이 나와서 그만 살짝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제 곁에 있을 거예요.”
내가 울 때뿐 아니라, 웃을 때도, 내 곁에 그가 있기를. 그래, 이제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추억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오래 그러지 못하더라도!’
헤헤.
내 답에 와그작 표정이 구겨졌던 오라버니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를 금방이라도 말할 것처럼 굴면서도, 끝내 한숨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걱정 마세요. 걱정 끼치지 않게 조심할게요!”
다니엘이 곁에 있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 참, 우리 오라버니도!
“……그래. 조심, 해야지.”
으득 이를 갈면서 오라버니가 답했다. 네가 아니라……. 라고 또 중얼거렸는데, 자세히는 듣지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고마워하며 답했다.
“네!”
그러나 씩씩하게 답한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그날 늦은 오후 피를 쏟으며 정신을 잃었다.
‘아, 이런.’
그것도 오라버니와 다니엘, 헤레이스가 보는 앞에서.
‘그렇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헉.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 불현듯 알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리샤!”
“누이……!”
한 번 더 울컥 쏟아지는 피를 느끼며 시야가 암전했다.
“뭐, 뭐지?”
나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언니의 16살 기억.
“그게, 보여야 하는데.”
기억 속인 것 같지 않았다. 온통 새카만 공간. 나는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 언니를 만나려면, 기억 속 언니의 귀에 대고 불러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빛을 보았다. 손톱만 하던 빛은 점차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기억이 저 안에 있어.”
언니의 16살 때 기억. 여전히 악녀 소문을 퍼뜨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망연히 보다가 나는 울상을 지었다.
“힝, 언니.”
언니 보고 싶어.
“여긴 어디예요? 저 물어볼 거 너무 많은데.”
언니가 있는 그 환한 공간이 좋다. 여긴 싫었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공간이 환해졌다. 환해진 공간에 언니가 여신 같은 자태로 서 있었다.
[……너.]
“언니!”
히히, 웃으며 달려갔다. 그리고 달려가던 그대로 꿀밤을 맞았다. 헐, 아파!
“어, 언니?”
[쯧.]
무언가 아주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언니가 나를 보았다. 나는 시무룩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단 할 말이 진짜 많은데. 어디부터 말할까요?”
[그걸 나한테 묻는……! 하아. 됐고, 하나만 해명해.]
“뭘요?”
다니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고, 내 계획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데, 언니가 듣고 싶은 건 하나뿐이라니!
하지만 아쉬움보다는 궁금함이 앞섰다.
“묻기만 하세요! 다 말해 드릴게요!”
[네가 사라질 거라는 말.]
“…….”
억.
언니의 눈이 거의 살기까지 뿜고 있었다.
[무슨 의미지?]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언니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요. 저도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 본 것이에요…….”
[무슨 방법. 그리고 나는 전부 말해 줬다만?]
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걸.
“언니, 제가 신전 사람들이 오면 물어보기는 할 테지만, 언니보다 그 사람들이 많이 알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그래서?]
“그러니까 말해 줘요. 몸 다 낫고 나서, 이 몸, 언니가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아니.]
아.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당혹스러웠고, 울고 싶어졌다.
“그럼, 언니가 사라져요? 아니, 아니,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뭐가 있어요?”
언니는 역시나, 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성장하는 인간이었다.
“없으면 지금 없다고 바로 말했을 텐데. 제가 이제 언니 좀 알거든요? 방법이 있긴 있는 거 같네요. 그렇죠?”
[…….]
“하나만 더요. 혹시 제가 요즘 한 번씩 고통을 느끼고 있거든요. 이것과 언니가 관련이 있어요?”
[……글쎄.]
언니가 살벌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긴장하지 않았다. 그냥 웃음만 나와서.
“음, 좋아요. 언니도 답을 줬으니까, 저도 답해 드릴게요.”
[뭐?]
퉁명스러운 반응.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언니는 말을 안 할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성격인 것이 분명하다.
“제가 사라질 거라고 그에게 말했던 거, 무슨 의미냐고 물으셨잖아요.”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우리 언니에게 말했다.
“무조건, 언니는 지킬 거라는 의미예요.”
내가 듣기에도 단호함이 철철 넘치는 말이었다.
[…….]
언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확인하기도 전에, 내가 잠에서 깼기 때문이었다.
으슥한 밤. 다니엘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주인!
나를 크게 부르는 젠의 소리를 들으며 일기장을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쑥스러운 게 분명해!’
나는 이 모든 언니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건 다니엘에게 ‘에라, 모르겠다!’ 하고 키스하면서 달라진 점이었다.
‘무조건.’
확신도 커졌겠다, 밀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언니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방향으로.
“어휴. 나도 참, 영악하다니까!”
언니를 너무 잘 알아! 으항항항. 그렇게 혼자서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으쓱으쓱하고 있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어느새 나는 다니엘에게 안겨 있었다. 그가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꼬옥 안고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단, 언제 왔어요?”
“전 늘 곁에 있었어요.”
“……맞아. 그랬죠.”
동그랗게 떴던 눈을 바로 하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볼을 살짝 부볐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어딘가 절박하게 나를 안고 있었을 뿐. 나도 말없이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이번에는 젠의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기다리던 소식을 접하고 눈을 떴다.
‘이제 아마사를 손에 넣어 볼까?’
“이비엔 경.”
나직하게 내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비엔 경을 불러 보았다.
“움직여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들은 정보는…….
원작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아마사 지방의 전염병. 그것이 예상보다 일찍 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 * *
혹한의 땅, 아마사. 지형적으로 설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곳.
‘전하의 말씀이 전부 옳았어.’
그러나 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넓고 마력이 풍부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역.
‘오늘로 열 명. 아직 가시적인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이건…….’
이비엔 경은 짙은 잿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번뜩이며 눈앞의 서류를 바라보았다.
‘전염병. 아니, 마력을 흔들어 인위적으로 낸 재앙이라고 해야 하나.’
이비엔이 특정한 적을 향해 비소를 보냈다. 마침내 이 지방에 마력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필요해졌다. 준비해 둔 리스테인을 쓸 때가 된 것이다.
‘전하께서 애초에 예상하셨던 것은 자연 발생한 전염병이었지만.’
이비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전염병이라니.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정황이 여러모로.’
시기도 시기지만 아마사 지방 곳곳에서 마법적으로 수상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바누스.’
탄탄한 공신 가문인 만큼 그들의 재력과 권력은 어마어마하다. 이비엔이 아무리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댈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 전하의 재산은 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는 많을 거야. 그들은 전하가 에밀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황녀의 전폭적인 지원과 이비엔의 천재적인 수완 아래 이비엔의 상단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크기를 부풀렸다. 그것의 배당금. 거기다 전하께서 ‘눈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가 벌어들인 수입과 사회 환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수입까지. 리샤는 몰랐지만 그 모든 수입들은 ‘리스’라는 의문의 재력가에게 가고 있었다.
‘리스. 전하께서 베아트리스 린데아 대회에서 쓰셨던 가명이라고 했지.’
소피아 마르시엔 영애가 국가 기밀을 발설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해 준 것이었다. 아리엘 영애가 그걸 듣고 감격해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중얼거렸었다.
‘눈의 공주가 아니라 여왕님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전부, 그분을 위해.’
지켜 드리고 싶다. 그분의 안위와 그분의 숭고한 뜻을.
‘내 명예는 그것뿐이야.’
곧 죽을 사람이라며 좀처럼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 황녀 전하시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은 전부 누리고 가지셔야 해.’
어느 순간 이비엔은 꿈을 꾸게 되었다. 황녀님이 만들어 내는 세상을. 전하께선 전혀 생각하시지 않으시겠지만, 곁에 있는 우리들은 그녀의 곁에서 매일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황녀 전하가 한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적들은 무너진다.’
그 누구도 황녀 전하의 왕관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현명함은 군주의 그것이었으므로.
<전하, 말씀하셨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그녀는 전하께 서신을 보냈다.
<예상했던 때보다 빠르게 일어났지만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당신을 위해. 너무나도 완벽한 당신께, 나라도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제게 부탁하셨던 ‘그 일’도, 차질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비엔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아마사 지방의 전염병은 빠르게 번졌다. 모든 생명에게 병이 깃들어, 주식인 벼마저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 지역의 상인들은 이때다 싶어 가격을 올렸다.
“제발 내어 주십시오.”
“아이가 굶고 있어요…….”
아비규환이었다. 전염병이 있는 데다 고립이 되어 있어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식량은 너무나도 쉽게 떨어졌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가격은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그 가격을 지불하고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되려던 찰나.
“전부 사겠습니다.”
가면을 쓴 여자와 그녀 뒤의 사람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맨 앞의 여자가 기사 같다면 뒤는…….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없이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얼만 줄 알고 그런 말을 하시오?”
그런데 전부라니. 상인들은 내심 당황했다.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요?”
“이 정도에 500골드!”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듯 상인이 외쳤다. 그러나 여자의 입술이 비웃듯 말려 올라갔다.
“그게 돈이요?”
뭐라? 되묻기도 전에 여자가 주머니를 던졌다.
“내 주인의 반나절 수입도 못 되는 돈인데.”
상인들 중 하나가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았다. 그리고 함께 안을 지켜본 이들 모두 눈을 부릅떴다. 핑크 다이아몬드가 가득 있었다.
“이, 이건……!”
쌀값보다도 많은, 횡재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벅찬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황궁의 궁 하나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푼돈처럼 던진 행태에 공포심까지 느껴졌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아마사 지방의 상인 길드를 전부 사들이는 값이오.”
모든 영광은 나의 주인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그 날 부로 아마사의 상권을 장악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지역의 정보 길드 및 암살 길드까지 먹어 버렸다. 저항하던 길드들도 몇 마디를 속삭여 주면 조용해졌다. 단 반나절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소름 돋는군.”
이비엔을 도우러 왔던 다니엘의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사실 직접 움직이고 있는 이비엔도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이 정도의 존재감이라니.’
아마사의 정보 길드나 암살 길드인데도 이비엔이 한마디를 하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용의 눈물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을 뿐인데.’
전하의 정보력은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걸까. 얼마나 많은 것을 헤아리고 계신 것일까. 정보 길드장 헤레이스조차 어렴풋이 아는 정보를 전하께선 알고 계셨다.
‘어쩌면 그분은 그저 감이 좋은 천재인 것이 아니라…….’
헤레이스나 일행조차 모를 정보원들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런 망상이 들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이뤄낸 이가 바로 전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아마사 지방의 실권 대다수를 손에 넣었다. 아마도 곧, 몇 달도 되지 않아 이곳은 통째로 완벽하게 전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아, 이건 정말이지…….’
하늘이 내린 희대의 천재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아마사를 손에 넣었다는 보고를 들은 뒤 황녀 전하께서 가장 먼저 시킨 것은 쌀을 공짜로 푸는 일이었다.
‘그리고 약초를 푸셨지.’
하지만 ‘리스테인을 제외한’ 약초들이었다. 하루 만에, 사람들은 모두 그 어떤 약초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인공적인 병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어.’
마법적인 개입이 있었다. 그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하게 만들었다. 이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리스테인을 푼다면, 모든 것은 완벽하게 흘러갈 것이다. 이분의 능력에 그저 소름만 돋았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 것일까 하고.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실 수가 있는가 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모든 일을 처리하고 한숨을 돌리는 틈 시간. 겨우 혼자가 된 이비엔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허망하게 져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황녀 전하는. 결국 아마사를 손에 넣은 것마저도 타인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어째서, 위협받고 계신 상황에도 이러시는 거지? 왜 그분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하지 않으시는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위해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지켜 드리고 싶은데.’
매번 이리 아픈 사실만을 확인하게 되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이비엔은 잠깐의 눈물을 훔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일에 임했다. 치열하고, 먹먹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 약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마사의 주민들은 이비엔이 무상으로 배포한 쌀로 연명했다. 또한 배포된 약초들 덕에 병이 호전되지는 못해도 악화되는 것은 막아 낼 수 있었다.
‘황녀 전하의 뜻대로, 단 한 명도 잃지 않을 것이다.’
잃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리스테인만 갖춰지면 전보다 더 좋아질 정도로. 거대한 자금 규모. 가장 현명한 선구안. 그리고 마침내, 르페르샤 황녀의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사에, 리스테인을 푸세요.>
날개 돋친 듯 리스테인이 풀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풀었다. 리스페인을. 이비엔에게 마지막으로 서신을 보낸 뒤 그대로 앉아 숨을 골랐다.
“…….”
어쩐지 화가 났다. 조금 슬프기도 했다. 새삼 바누스 가 때문에 입은 피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우리 언니는 악녀로 죽어야 했다.
그리고 나도.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나를 위한 결정이었다. 사실은 이 모든 상황이 솔직히 말해서 낯설었다. 낯선 곳에서 찾은 즐거움에 몸을 맡겼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을 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언니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떠나면 어떤 형태로든 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런 마음이 분명 마음 한편에 있었다. 그 답이 나에 대한 것이든 언니에 대한 것이든. 그러니까 떠난다는 결정은, 돌이킬수록 단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떠나지 않기로 했다.
‘……바누스가 때문에.’
그들을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비엔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또 떠올렸다. 아마사에 리스페인이 풀린다.
‘……여파가 클 거야.’
한숨이 나오는 것은 아마사의 일이 달갑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 규모가, 벅차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각자만의 인생 방식이 있는 법이다. 행복의 규모도 마찬가지. 매우 개인적인 이유였다. 결코 바란 적 없는 규모의 변화가 예상되어서. 또 그것이 내가 각오했던 일이 아니라서.
‘내가 원한 대로 흘러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그 지방의 일에 바누스가가 연관되어 있다면, 정말로 이비엔 경이 휘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소소하게 나를 소문에 끼워 파는 식으로 충분할까?’
수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채웠다.
‘잘못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임이 무거웠다. 그러나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들을 용서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이 모든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바누스 가가 지독하게 미워졌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부숴 주겠어.’
생각할수록 그것이 답이었다. 그게 나와 언니, 나아가 내 주변을 지키는 길이라고. 다니엘도 도와주고 있고,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어.’
이제 새로 할 일은…….
‘이래도 되는 걸까?’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에밀로 벌어들인 돈은 기하급수적이었다. 온 세계에 팔렸기 때문에 지금 쌓인 돈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일 줄은. 나도 확인해 보고 알았지.’
솔직히 말해서, 이 제국의 3분의 2는 사들이고도 남을 만큼 쌓였다. 또 한숨이 나왔다.
‘돈이 너무 많아서 겁이 나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그들을 부술 수 있을까. 뭘 해야…… 지킬 수 있을까.
‘그렇구나. 이번에, 아마사 지방을 아예 먹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에서 이비엔을 지키려면 그게 답이었다.
‘적응 안 되는 규모의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금력은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원작에는 그 지방을 확실하게 먹을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었다.
‘원래는 아리엘이 우연히 알게 되는 거지만.’
그것은 그 지방 토박이 길드들과 상단들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상단들부터 먹자. 아예 그 지방을 이비엔에게 속하게 해 버리는 거야.”
그러면 그녀는 훨씬 안전해지겠지.
“내게도 도움이 더 되는 일일 테고.”
리스테인을 풀라는 서신에 이어 나는 이비엔에게 서신을 하나 더 보냈다.
‘원작에서 아마사가 상인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고, 이참에 부패한 상인들도 처리해 버리는 거야!’
완벽해.
그리고 서신을 보낸 지 단 며칠 만에, 이비엔은 아마사를 먹어 버렸다. ……문제가 하나 생겼지만.
‘큰일 났네?’
나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앉아 눈앞의 많은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러니까, 이비엔이 너무 일을 잘해서 생긴 일이었다.
“상단주님!”
이비엔은 아마사를 먹어 버리더니 상단 규모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키우기 시작했다. 역시, 준비된 엘리트! 언니 멋져요!
‘딱 거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허망하게 이비엔 경을 힐끔 보았다. 내가 보는 걸 어찌 알았는지 멀찍이 서 있던 이비엔이 뿌듯한 미소를 보냈다. 한숨을 삼키며 나는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상단주님은 저희의 은인이십니다.”
은인을 모시겠다며 아마사 사람들 찾아올 줄은.
‘아니, 상단주가 자기가 아니라고 하다니! 이비엔 경, 이 눈치 없는 언니 같으니라고!’
‘르페르샤 황녀’에 대한 좋은 소문을 흘리는 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비엔 상단의 소유주가 르페르샤 황녀라고 알려지게 되면.’
황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 바누스 가의 공격을 더 심하게 받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이다.
엉엉. 마음대로 되질 않네. 그래서 나는 가면을 썼다.
“그……렇군요.”
상단주 ‘에밀’은 그렇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 ‘에밀’이 대륙을 강타한 소설을 쓴 에밀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아마사에서 온 대표들은 더욱 나를 동경 어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맙소사. 일이 이렇게 흐를 줄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파들파들 떨리는 입가를 정돈하며 말했다. 하지만 아마사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를 않았다. 내 도움이 되겠다며 내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애원할 기세였다.
“헤레이스. 이비엔 경.”
나는 당혹스러워하다가 결국 그들을 일단 내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헤레이스와 이비엔 경에게 부탁했다.
“저 사람들, 제국 각 지방에 적당히 보내면 좋겠어요. 상단 지부를 차려서 책임자로 보내는 거죠. 헤레이스가 조금 도와주세요.”
“역시…… 리샤는 흑막이었어!”
뭐라고요? 지금 우리 예쁜 언니한테 그런 칙칙한 명칭을 붙인 거예요? 꺅!
‘언니 미안해요, 엉엉.’
‘적당히’를 강조한 나의 마음은 조금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헤레이스의 반응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속으로 절규했다. 이비엔마저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열렬히 끄덕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더 이상의 설명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마사 지방 사람들에게는 바로 신경을 끄고, 곧바로 다른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마탑을 찾는 일이었다.
‘마법 테러가 횡행하는 세상이라 숨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지.’
마탑은 테러와는 상관없는, 숨어서 연구에 매진하는 마법사들이 모인 곳이었다. 본래 아리엘이 외전에서 여행할 때 발견했던 곳이었는데.
‘시기가…….’
아리엘이 여행하면서 보물들을 쓸어 모으는 외전은 원작 시기 이후 시기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작의 초입 시기.
‘지금은 마탑이 아직 살아남아 있을 때야.’
원작에서 아리엘이 발견한 마탑은 폐허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법 테러에 당한 마탑이라니.’
마탑에 있었던 테러가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을 손에 넣어야 해.’
바누스가가 마법사를 이용한다면 이쪽도 마법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젠?”
젠에게 의견을 구하자 그가 솔깃할 만한 정보를 주었다.
-마탑이라. 연구에 미친 괴짜들의 모임이겠군. 가면 아마 주인에게 호기심을 보일 거다.
“내게?”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정령의 향을 맡으니까.
“……그렇구나.”
신기하네.
“그러면 다니엘도 함께 가는 걸로 결정!”
하지만 마탑을 방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위치는 아는데…….”
“애초에 그 위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리샤?”
헤레이스가 신기해하며 물었지만 나는 고민이 깊어 미처 답해 주지 못했다.
“……암호를 대라니. 그걸 어떻게 알죠?”
“나도 모르지.”
헤레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
다니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락툼, 마이나 훔, 크리시드. 아마 이 셋 중 하나일 거예요.”
“……너는 또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헤레이스가 이번엔 조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어떻게 알아요?”
내가 다니엘에게 물었다.
“전에 인연이 있었거든요. 저와의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로바인 왕국과 마탑이 교류가 있었다는 말이구나.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셋 중 하나라…….”
“일단 가서 셋 다 대 보면 될 거예요. 눈총은 조금 받겠지만…….”
“그래야겠네요.”
내가 체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서 세 번 왕복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번 만남에서 협조를 받아 내야 한다. 나를 포함해 다니엘과 헤레이스, 카인과 유진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아리엘을 끼워 넣기로 했다.
‘여주로서의 행운을 발휘해 줄지도 모르잖아?’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고. 그런데 그게 답이 될 줄은…….
“크리시드!”
나와 나들이를 간다는 것에 흥분하던 아리엘은 우리가 고민하며 암호를 고르는 사이에 대뜸 그것을 외쳤다.
“통과.”
모두 잠시 멍하니 아리엘을 보다가,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 탑의 비밀을 아는 이만 5층 이상을 방문할 수 있소.”
5층 무렵에서 괴팍한 어투로 들려온 말에 우리는 당황했다. 마탑의 비밀은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암담하던 차였다.
“마탑에는 알려지지 않은 문이 있어요!”
아리엘이 외쳤다.
“그 문을 세 번 두드리면 열리죠. 그걸 열면……!”
“토, 통과! 그 뒤는 말하지 마! 젠장,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마법사가 혼비백산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6층 즈음에서 우리가 그녀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아리엘은 해맑게 답했다.
“고대 신화 이야기책에서 봤거든요!”
여주의 행운이 아니라 은둔 덕후의 실력이었구나. 세상에.
“훌륭해요, 아리엘.”
처음으로 그녀에게 따스하게 미소를 보내며 말해 주었다. 아리엘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헤레이스가 유진에게 뭐라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리샤는 저 여자가 알 거라는 걸 알고 데려왔을 거야.”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억,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렇게 꼭대기, 마탑주가 머무는 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외쳤다.
“당신……!”
“혹시 죽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
가까스로 동요를 감추고 나는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일행이 걱정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건 독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마주한 바, 역시나 그는 탑주였다.
“조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황녀 전하.”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마법사는 괴팍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세상이라 그런 그가 조금 특이해 보였다. 사실 외양이 특이하기도 했다.
“미력하나마 이곳의 탑주를 맡고 있는 시온이라고 합니다.”
탑주는 하얀 머리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피부가 가무잡잡했다.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피부색이었다. 그런 신비로운 외양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인상은 순박한 곰 같았다.
“르페르샤 람 트리엘입니다.”
그를 가만히 마주보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말씀은…… 나중에 듣겠어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나는 과감하게 방금 전의 주제를 뒤로 미뤘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탑주. 혹, 바누스 가에 대해 아시나요?”
탑주가 순간 멈칫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답했다.
“글쎄요. 안다고 해야 할지…….”
“답하기 곤란하신가요?”
그는 잠시 침묵 후 나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안다고 답하겠습니다. 그러나.”
순간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적대감을 발견하고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들과 한마음인지를 물으신 것이라면, 절대 아니라 답하겠습니다.”
“그렇군요.”
덤덤하게 대꾸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한결 낫겠습니다.”
“예?”
무슨 오해를 했던 것인지 어두워졌던 탑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도와주세요.”
표정 변화가 꽤나 잘 읽히는 사람이다.
“무슨…….”
“바누스 가를 막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희 쪽에는 마법사가 없거든요.”
순박한 타입이라면 정공법이 무난하다. 보기보다 영악하다고 해도 정공법이 손해 보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좋은 인상은 남길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이 맞았는지 그가 조금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전하.”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도 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는 그가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하면 알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몇몇 가설을 포함해서. 그리고 끝에 덧붙였다.
“저만을 노린 것이라면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우리 언니를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제 소중한 사람들이.”
내 소중한 이들에게 그들이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지만 않았더라면.
“위험해질 가능성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당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 탑주가 힘을 빌려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예요.”
탑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맑은 분홍안이 알 수 없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아직 대가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반쯤 마음이 기운 것 같았다. 나는 못을 박았다.
“도와준다면, 유익한 마법사들이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제 오라버니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그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일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중한 어조였다. 그러나 이미 허락한 분위기여서 나는 다소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문제를 이야기할 순서였다. 그는 앞서보다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말했다.
“전하께선 지금 정말 이상한 상태이십니다.”
“이상한 상태요?”
“원래 이 몸인데, 이 몸이 아니기도 하고…….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이제야 그의 괴짜 마법사의 면모를 보는 것 같았다. 혼잣말인지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를 말을 늘어놓던 그가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전하께서 죽었지만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
섬뜩한 것 이전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말이죠.”
뭐라는 거야. 말장난을 하는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지금…….”
하지만 그 의미를 묻기 전에 나는 멈칫했다.
‘어쩌면…….’
라파엘리스는 마력을 다루는 검사에서만 드러난다. 그 라파엘리스는 영혼이 걸리는 병이다. 즉, 이것은.
‘마력은 영혼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
눈앞의 사람은 무려 마탑주였다. 나는 좀 더 침착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탑주, 혹시 맹세할 수 있나요?”
그리고 고민 끝에 결정했다.
“맹세. 비밀의 맹세를 말하시는 겁니까?”
눈을 번뜩이며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너무나 순수한 호기심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마법사에 대한 책을 읽어 봤을 때 본 적이 있다. 비밀의 맹세. 그것은 죽음의 맹세였다. 무거운 맹세지만 나는 어쩐지 눈앞의 사람은 수락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 시온은 이 진명을 걸고 르페르샤 람 트리엘 속 영혼의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어길 시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 것이며, 영원히 그 불명예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다다다다 읊은 맹세의 말에 따라 그의 마력이 눈에 보이게 움직였다. 놀라운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그가 헥헥대며 물었다.
“이제 되셨지요?”
“…….”
이래서 괴짜라고 하는 거구나. 호기심에 죽고 호기심에 사는 인간들인 건가!
“전하!”
은근히 보채는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 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내 말을 들은 탑주가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안 믿겨질 거 알아요.”
“아뇨. 안 믿겨진다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 전하의 영혼은 이곳의 것입니다.”
“……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지금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만.]
……언니?
나는 경악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르페르샤 언니가 분명한 색을 가지고 나타나서 서 있었다. 반투명했지만, 분명히, 내 눈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한 심정으로 멍하니 있는 동안, 그녀는 탑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은은한 빛이 언니의 손끝에 어리는가 싶더니 탑주가 스륵 잠이 들었다.
[후우.]
“어, 언니.”
[너.]
내 심정은 아랑곳 않고서 언니는 얼굴을 살벌하게 일그러뜨렸다. 내가 흠칫한 순간, 언니가 벌컥 화를 냈다.
[바보 같은 짓 좀 하지 마라!]
“……바보 같은 짓이요?”
[그래. 이자의 기억은 지웠으니 이상한 짓 할 생각은 버려.]
“네?”
나는 놀라 그녀에게 외쳤다.
“하지만, 언니. 그는 단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처음으로 내 영혼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언니의 영혼도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우리의 해결법의 단서도.
“맹세도 했고요.”
마법사에게 저 맹세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책으로 안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그만 좀 해.]
“……쓸데없는 짓이라니.”
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그런, 그런 말이 어딨어요…….”
언니가 그제야 나를 똑바로 보았다. 이렇게 나타나 놓고, 한다는 말이.
[포기해.]
겨우, 포기하라는 말이라니.
“으. 싫어요! 몸 준다니까요! 이 몸 다시 가져가도 된다고 하잖아요!”
[필요 없다고!]
“왜 필요가 없어요! 언니는 왜 자꾸!”
사라지려고만 해요?
[네가 행복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녀가 외쳤다. 처음으로 소리 지르며 언니와 싸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저 마주 보고 있다가, 언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애써 울컥 치미는 울음을 삼켜 냈다.
“……이렇게, 사라질까 봐 무서운 건데.”
언니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음 날. 언니의 힘으로 기억이 사라진 탑주는, 나와의 대화 중 앞부분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백 년 만에 의욕이 생겼다’는 얼빠지는 이유를 대며 결연하게 말했다.
“합류하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백 년 만에’ 라니. 너 백 살이 넘는다는 거야?”
헤레이스가 외쳤다. 탑주가 헤레이스를 이상하게 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올해 백열두 살이 되었지요.”
“저도 그에 대해 그렇게 들었습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탑주 시온의 합류가 결정되었다.
* * *
상단은 각 지부별로 에밀 저서를 융통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에밀의 팬들이 내 상상보다 넓고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전 대륙 구석구석에 닿아 있네. 와…….”
나는 틈틈이 2권을 쓰면서, 각 지부에서 보내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확인했다.
“바누스 가가 그 산에 투자를 했대요.”
“어라?”
헤레이스와 대화를 하다가 나온 말에 내가 첨언을 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우리도 아직 못 알아낸 정보인데!”
“그 산 개발하는 사람 중에 에밀의 팬이 있어서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자 헤레이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리샤, 다 좋지만 내가 먹고 살게는 해 줘야 해.”
“네?”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야.”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힘내라며 파이팅을 해 주었다.
“알았어요.”
헤레이스의 시무룩한 모습이 가시지 않기에 그렇게 달래 주었다.
“그래. 약속이야?”
“네, 네.”
그러자 방실 천사같이 웃으며 헤레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리샤 요즘 몸은 어때?”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웃으며 답했다.
“음, 괜찮아요. 건강해요.”
“건강해?”
“네.”
안색은 사실 아주 창백했다. 거울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 여전히 아름답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때보다도 상태가 좋았다. 기억을 찾을 때 피를 토하는 건 여전했지만 뭔가, 생기가 도는 느낌?
‘병이 나아가는 징조인 건가?’
하긴, 피를 어지간히 토했어야지. 언니의 말대로라면 영혼과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 상당히 진행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언니, 화 풀렸을까?’
그때 마탑에서 처음으로 싸운 뒤로 한 번도 못 보았다. 시무룩해져 있는데 헤레이스가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알았어. 너 건강해.”
“……음, 네.”
“……착하고.”
넹?
황당함에 그를 가만히 보자 헤레이스가 매우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슝! 하고 사라져 버렸다.
“허…….”
나는 순간 심쿵해서 심장을 부여잡았다가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기절할 뻔했어! 꺅! 덕분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배시시 웃고서 방을 나섰다. 오늘은 탑주까지 다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었으니까.
‘신관들의 순례 행렬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었나.’
본래 그 행렬에 끼어 황궁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만, 신관들과 대화를 하기는 해야 했다.
‘언니의 일로. 그리고 더불어…….’
이제는 꽤나 증거를 갖추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바누스 가의 만행에 대해서도. 자연히 떠오르는 언니의 얼굴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
이윽고 회의를 하기로 한 황녀궁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다소 우울한 상태로 시작된 회의는 다행히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러다 싸움이 터졌다.
‘이걸 싸움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샤, 당신은 이런 걸 너무 많이 주워 와요.”
“주워 온다니요.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경.”
아무래도 다니엘의 심기가 매우 안 좋은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다니엘이 계속 말했다.
“회의에 집중하지도 않던걸요. 아까부터 뭡니까? 자꾸 저와 리샤를 본 것 말이에요.”
“신기해서 본 겁니다!”
“신기해서……? 뭐가 말이죠?”
상냥한 다니엘의 물음에 시온이 단호하게 답했다.
“냄새가요.”
“…….”
다니엘의 주위로 살기가 넘실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헤레이스가 끅끅거리며 웃다가 정색을 하면서 “잠깐, 리샤 냄새도 맡았다고?”라고 하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말없이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카인도 묘하게 무서운 눈길로 탑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리샤 님, 이 무례한 자를 어떻게 할까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유진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자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몹시 살벌한 분위기로 탑주와 대치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다가가 그의 뒤에서 그를 꼬옥 껴안았다.
헉, 하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멈칫 굳어진 그의 반응에 집중했을 뿐. 잠시 후, 그가 몸에서 힘을 서서히 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그를 안고 있는 내 손에 그의 손이 닿았다. 전해지는 온기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탑주가 무언가 다급한 분위기로 말했다.
“그저 별거 아닙니다. 두 분에게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을 뿐인데!”
그는 헤레이스를 힐끔 보았다가 헷갈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제야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다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런데 아직 말이 안 끝났는지 탑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요?”
다니엘이 한결 풀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금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빙긋 웃어 버렸다.
“다니엘 경, 제게 경을 해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웃는 채로 굳어 버렸다.
나는 다니엘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유진과 카인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 어디에 좀 내다 버려 주시겠어요?”
탑주는 창고에 갇혀서 하루를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마법을 쓰면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그는 갇히기 전부터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나름 협력자라 상냥하게 말해줬는데.
“흥.”
코웃음을 치자 다니엘이 나를 뒤에서 안아 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모두가 돌아간 저녁. 내 잠자리를 봐 주던 리니가 내게 물었다.
“전하, 요즘 괜찮으신 거지요?”
“응? 그럼. 내가 괜찮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어.”
방긋 웃으며 답하자 아린이 몹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너무 밝으셔서 오히려 저희는 걱정입니다.”
“너무 밝아서 걱정이라니?”
아린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쭉, 아프셨잖습니까. 그래서 꼭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보여서…….”
헉, 그게 무슨! 나는 아린을 놀란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이시죠?”
오늘 다들 왜 이래? 일단 나는 리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저…… 할 일이 생긴 것뿐인걸.”
“할 일이라면…….”
둘이 나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못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하긴, 이 둘과 엠마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으니 이렇게 크게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걱정 마. 바누스만은, 반드시 부술 테니.”
바누스를 부수면 이들이 걱정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나요?”
“왜냐하면 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아주 많거든.”
언니도. 내 사람들도.
“너희도 포함해서 말이야.”
“하지만…….”
“응?”
아린이 말끝을 흐리다가 내가 되묻자 이어 말했다.
“황녀님은요?”
“나?”
“황녀님은 누가……. 아니, 그, 그보다, 그 사람들을 다 지키신 뒤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언니에게 돌려주고 싶어.’
그래서, 언니가 마땅히 누려야 했던 것들을 누리게 해 주고 싶어. 하지만.
“……모르겠어.”
그냥, 모르겠다. 싸우고 난 뒤엔 가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걸 어쩌지.”
또 날이 저물고 있었다.
* * *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리니도, 아린도 더는 어떤 말도 더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리 말하며 잔잔하게 미소 짓는 황녀 전하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혼잣말을 하듯 묻는 말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치 않게도 전하 앞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따스한 하루에 끝이 없다면. 늘 따스하신 전하께서 여기에 머물러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소망을 가져 보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셔서.’
여전히 피를 토하신다. 가슴 아플 만치 마르신 전하는 사실 운신도 어려울 상태라고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밝게 구신다.
‘아프시잖아요.’
건네지 못하는 말들이 궁인들 입속에 하루 종일 맴돌았다.
‘사실은 견딜 수 없이 힘겨우시면서.’
리플리라는 의사가 황녀 전하의 정신력을 칭송한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칭송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탄식할 뿐.
두 의사들은 점점 보기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예상보다 황녀의 병 진행이 빠른 것 같다며 연구실에 틀어박혔으니까.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전하. 우리 주인님. 소중하신 분.
‘어떻게 해야…….’
그러나 그 어떤 궁인도 소리 내어 묻지 못한 것은 아마도 돌아올 답이 무서워서일 것이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혼자가 되었을 때 리니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전하는, 자기를 잊으라고 하실 것 같단 말이에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내주지 말라고. 그리 말씀하시다가, 어느 순간에 떠나 버리실 것 같아서.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을 거라서.’
마치 그것밖에 해 줄 수 없다는 듯 황녀궁 궁인들은 주인을 닮아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황녀를 위해 밝아지고, 황녀를 위해 어두워진다. 그리고 쉬이 울지 않았다.
‘원하시는 대로. 보고 싶으신 대로.’
리니는 익숙하게 울음을 삼켜내며 활짝 웃었다.
“전하!”
그리고 저를 돌아보는 다정한 시선에 또 한 번 소원을 빌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꿈을 꾸었다.
‘기억인가?’
언니의 기억들은 점점 두어 번에 한 해씩으로, 한 해 기억이 늘어났다. 그렇게 슬슬 내가 빙의했던 시기의 기억에 이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꿈속에서 본 언니는 어린 언니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어린 언니.’
조금 웃으며 어린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손을 뻗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몹시 해맑게 웃으면서. 나는 처음 보는 그 맑은 미소에 순간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언니, 예쁘네요.”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나는 크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웃으니까 너무 예쁘잖아요.”
그런데 그때, 활짝 웃는 언니가 천진하게 외쳤다.
“가자!”
어……?
“지금, 누구에게…….”
그 순간, 기억이 휙 지워졌다. 불 꺼진 무대처럼 캄캄한 공간에 멍하니 떠 있는데, 누군가 나를 휙 잡아끌었다.
“……언니?”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니 언니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울망울망하게 바라보는데, 언니가 다짜고짜 물었다.
[설마, 봤어?]
“네? 아, 기억이라면 봤어요.”
순간 언니의 얼굴에 낭패 어린 표정이 스쳤다. 그것을 의아하게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언니, 저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언니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늘 보던 모습이었다.
화 풀렸구나! 그에 마음이 놓여서 나는 속없이 웃으며 언니 곁으로 날아갔다.
“그럼 우리 화해한 거예요?”
[하아…….]
“네? 언니? 아, 언니.”
[……알았어.]
“헤헤.”
꿈이라 그런가. 아니면 언니가 같이 있어서 그런가. 깜깜한 공간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넌 뭘 할 생각인 거지?]
나란히 허공에 앉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언니가 내게 물었다.
“바누스 가를 무너뜨릴 거예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처음에는, 내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지키며 그들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나를 지키면서 복수를 하려면, 어중간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상단도 차리고, 별 정보를 다 캐고, 마탑주까지 끌어들인 거야?]
“네!”
내가 환하게 웃으며 긍정하자 언니가 잠시 기가 막힌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너는.]
그러다가 언니가 나직하게 물었다.
[두렵지 않나?]
“당연히, 두려우니까 이러는 거죠.”
[……뭐?]
“사실, 제가 감당 못 할 일들도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하는 거예요. 실수할까 봐 두려운데, 그래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두려우니까요.”
소중해져서.
……사랑하게 되어서.
언니는 말이 없었다.
[부모 세대에, 관련된 실마리가 있다.]
“……네?”
끝없이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언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반문하며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언니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부모 세대요?”
[그래. 들어 본 적 있나?]
“아뇨. 아니, 그보다, 뭐에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네가 파헤치는 모든 것에 관련이 있지.]
여전히 언니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언니가 우는 건 아니라고 짐작해 볼 뿐.
“그렇구나. 알았어요!”
일부러 밝은 어조로 대꾸하며 나는 언니보다 먼저 재빨리 말했다.
“지금 가려고 했죠? 헤헤, 제가 눈치가 또 빨라요.”
[…….]
“좋은 꿈 꿔요, 언니.”
잠을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쉬러 가는 것 같아 건넨 인사였다. 언니는 멈칫 굳어서는 미동하지 않았다. 그녀를 조금 어색하게 보는데, ‘그래.’ 하고 작게 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쏟은 피를 익숙하게 정리하고 오라버니를 찾아갔다.
“누이의 어머니에 대해서 알려 달라고?”
“네.”
선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가장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리시안 바누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황제에게 찾아가는 건 내키지 않고.’
그래서 오라버니에게 온 것이다.
내 질문에 오라버니가 나를 가만히 보았다.
“기억이 안 난다고?”
“네…….”
그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기억들이 없어진 거지? 누이, 다른 이상은?”
“음,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나, 그 외에 몇 가지요. ……아마도요. 제가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것도 있으니. 그 외에는 별다른 이상은 없어요.”
더듬더듬 답하자 오라버니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이 없다고. 어쨌거나 일단 물어본 것부터 답하자면.”
잠시 후, 그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의 어머니, 리시안 바누스는…… 알다시피 악녀라고 불렸지.”
“네, 그랬죠.”
그가 나를 힐끔 보았다가 다소 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먼저, 세간에 알려진 악행들은 대부분이 사실이야.”
“그렇군요.”
악녀는 악녀였구나. 피 보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거나 하는 소문들이 사실이었다니.
“그래, 그런데 말이지. 그게 다가 아니더군.”
뭔가 있나 보다. 나는 더욱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첫째로, 리시안 바누스는 알려진 것보다는 유한 사람이었다.
“유하다니, 애매한 말이네요.”
“말 그대로야. 예를 들어, 피를 보고 편안하게 여긴 적은 있었어도 그걸 좋아하거나 그걸로 목욕을 하거나 한 적은 없다는 거지.”
“아하.”
그것 참, 미묘한 차이로군. 기가 막힌 심정으로 수긍을 하자 오라버니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둘째로, 폐하께서 의외로 리시안 바누스를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
지켜주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요? 음, 그건 의외네요.”
“그렇지?”
사실 오라버니도, 리샤 언니도, 선대 어머니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두 여인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이러한 사실들을 오라버니가 어떤 이유로 알아본 것일지를 생각하다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진짜 의외인 건, 따로 있다.”
“뭔데요?”
“세 사람이 어쩌면, 친한 사이였을 수도 있다는 거다.”
“……네?”
이 무슨 막장 스토리입니까?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그게 음, 가능해요?”
그들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애초에 어머니들끼리는 접점 자체가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라버니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불가능할 것까지는 없지. 하지만 뭐, 소문을 생각하면 확실히 의외이긴 해.”
그는 잠시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누이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조금 웃어 버렸다.
“저도요.”
그리고 조금은, 씁쓸했다. 나는 결국 그의 진짜 동생은 아니니까. 오라버니는 조금 온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와 신전의 관계는 알고 있나?”
“아뇨?”
“아하. 그래서 그때…….”
살짝 얄밉게 웃으며 오라버니가 설명했다.
“우리 어머니가 신전에서 대신관 셋에게 연달아 축복을 받은 사람이거든. 반쯤은 성녀 취급을 받았다더군.”
“아하…….”
“그래서 어떤 계약이든 신전의 공증이 있는 계약이라면, 내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는 거지.”
“아…… 아?”
“몰랐군. 그것도 잊어버린 거였어. ……잠깐.”
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부터 기억이 비어 있었던 거야?”
“좀, 됐죠. 오래 쓰러졌을 때……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시선을 내리깔며 답하자 오라버니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군. ……몰랐네.”
“음, 그래서요, 오라버니? 신전 이야기는 왜 하신 거예요?”
“아. 알아본 바로, 폐하와 리시안 황후 사이에 어떤 계약이 오고 갔다고 하더군.”
……계약.
“그것도 영혼을 걸고 하는 맹세의 계약을.”
“대체, 왜 그런 무거운 계약을.”
“모르지. 나도 궁금해, 누이. 그 계약의 공증인이 내 어머니셨다지? 보통 친분이 있는 게 아니면 잘 하지 않는 계약인데 말이지.”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내용의 계약이었을까.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낼 도리가 없어. 계약에 대해서는 당사자만 알 수 있으니까.”
나는 언니가 말한 실마리가 그 계약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중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혹시 그 계약에, 누이가 엮여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진중한 표정으로 오라버니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리고 슬며시 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게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다소 사악한 방법이.
“그걸 쓰면 당장이라도 알 수 있기는 하지. 어때?”
“조건이 있어요?”
“응.”
오라버니는 조금 신나 보였다. 치사하다. 나는 조금 불퉁하게 물었다.
“뭔데요?”
“나와 같이 가는 거.”
“어딜요?”
“어디긴.”
그가 아주 신랄한 어조로 답했다.
“그 계약의, 하나 남은 당사자 앞이지.”
“근데, 정말 이렇게 기별도 안 하고 가도 되는 거예요?”
“급습이니까.”
“……음.”
여러모로 걸맞지 않은 단어 선택이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오라버니가 불길할 정도로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신관들이 수도에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지금 가도 못 뵐지도 모르는데.”
순례 행렬이 오늘 도착했을 것이다. 아마 내일 저녁에 그들을 반기는 행사를 하겠지.
“괜찮아, 누이. 아무리 바빠도 누이를 데려가는데 거절을 할 리가 없으니.”
응……?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음험한 표정이었다.
“그, 그래요?”
“응. ……걱정이 되면 직접 와 볼 것이지.”
“네?”
뒷말이 너무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했다. 내가 되묻자 오라버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황제를 보는 건 오랜만이네.’
전에 오라버니가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리시안 바누스에 대해 묻는 걸로 이상한 의심을 사지는 않겠지?’
오라버니도 함께 가니까.
이윽고 황제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 * *
황제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 서명을.”
세 사람이 아직 앳되었을 때. 셋이 편안하게 서로를 보았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말 이것으로 되겠소?”
그가 물었었다.
늘 비밀이 많고 불길했던, 그러나 그들의 친구였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그녀, 리시안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 여인을 의심 없이 친구라 여겼었지만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바누스 가에 대해 알아 갈수록 더욱더.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리시안, 다시 생각해 봐요.”
그의 연인이 말했다. 하지만 리시안 바누스는 그녀를 힐끔 보았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계약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 뿐. 그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굳었음을 짐작한 그와 연인이 결국 한숨을 쉬었다.
“서명을.”
조금 후, 무표정한 얼굴로 신관이 다시 말했다. 다소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가 서명을 했다. 리시안을 여전히 친구라 여기고 있었던 그의 연인이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드디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리시안 바누스가 서명을 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황제와 그의 연인, 그리고 리시안 바누스 간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 것은. 오로지 계약으로만 이루어진 관계가 되고, 리시안 바누스가 악녀가 되었던 것은.
“이제 만족하오?”
그녀에게는 바누스 가와의 확실한 분리를 약속했다.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 셋 모두 이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네. 만족합니다.”
어딘가 섬뜩하게 웃으며 리시안 바누스가 답했다. 그래. 필요한 일이었다. 그와 연인을 위해서는.
“이제 맹세를.”
이번에는 아무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황제는 눈을 번쩍 떴다.
“선잠이 들었군.”
가볍게 눈가를 누르며 그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한 번도 그때의 꿈은 꾸지 않았는데.’
아주 잠깐 친구가 된 것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 후 아주 오랫동안, 리시안 바누스는 그저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았다.
‘아니, 오히려.’
그 악녀의 명성은 영 헛것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리시안 바누스를 친우로 믿었던 제 연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상할 만큼.
“……그 아이 때문에, 이런 꿈을 꾸었나.”
르페르샤 황녀. 날이 갈수록 걱정되고, 애틋해지는 황녀였다. 그래서 더더욱 얼굴을 볼 엄두를 못 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황제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황녀를 위한 일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무 소용없는 행동 같지만.’
그때였다.
“폐하, 두 분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음?”
집사가 전해 온 말에 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태자와 황녀가 왔다는 건가? 함께?”
“예, 폐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신관들의 순례 행렬 때문에 일정이 차 있었다.
‘하지만.’
태자 혼자만 왔다면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을 텐데, 그 아이가 함께 왔다고 했다.
‘정말로 가까워졌구나.’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리 확인을 하게 되니 반가웠다. 그는 들이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머뭇거렸다. 황녀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오랫동안 쓰러졌을 때는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후…….”
“돌아가시라 할까요?”
집사가 나름의 재촉을 해 왔다. 순식간에 늙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들라 하게.”
“예, 폐하.”
둘이 함께 찾아올 일이라면. 황제는 단숨에 그들이 왜 왔는지를 알아챘다. 그럴 일이라면 하나뿐이었으니까.
‘절대로 먼저 찾아오지는 않을 아이까지 왔으니.’
그 어머니들에 대한 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꿈을 꾼 이유가 이것이었나 싶기도 했다. 잠시 후, 아이들이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아들은 그와 연인 카라를 골고루 닮아 있었다. 그에 비해 딸은 리시안 바누스도, 그도 별로 닮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아이는 닮아 있었다.
“그래.”
잠시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던 황제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온 것이겠지?”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딸은,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마르고 창백해져 있었다. 전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예, 폐하.”
예상 외로 답을 해 준 것은 태자가 아니라 황녀였다. 황제는 덤덤한 척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의미심장하게 그 반응을 살피던 황태자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과 계약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 녀석,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나 보군.’
그리 생각하며 황제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 왔다, 싶기도 했다.
“뭐든 말해 주마.”
그는 그럴 수 있었다. 혈육에게는 발설해도 괜찮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더했었기 때문이다.
‘혈육이 계약을 알아챈다는 조건 하의 일이었지만.’
황태자가 계약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반쯤은 황제가 알려 준 것이었다. 언젠가 물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황제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황녀의 어머니에 대한 것이겠지.”
순간 황녀의 눈이 작게 떨렸다. 황제는 자꾸만 눈길이 가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고 입을 열었다.
“나와 카라는 그녀와 잠깐 함께 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리시안 바누스는 도망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표정과 말씨는 전혀 아니었지만 행색이 그러했다.
“겨우 일주일 정도였지만 그 후로 잊을 만하면 연락을 주고받았지.”
딱 그 정도의 인연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그들에게 리시안 바누스는 친구에 가까웠었다.
“어느 날, 그녀가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그 계약을 맺게 되었어.”
최대한 간략하게. 황제는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바누스 가에서 분리해 주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고 했지.”
“어느 정도의 자유라니,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황녀가 물었다.
“그녀의 궁에는 누구도 쉬이 발을 들일 수 없었고, 그 궁에서도 어떤 곳에는 누구의 출입도 허하지 않았지.”
그 외에도 철전하게 그녀의 개인 생활과 공간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했다.
황제는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황태자의 어머니인 카라는 리시안 바누스를 꽤 친근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도 리시안 바누스를 친구로 여긴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지속되기엔 그 후의 수상한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 것도.”
수상하지만 철저하게 선을 긋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며 리시안 바누스가 둘에게 보장한 것은.
“뭡니까?”
황태자가 눈을 빛냈다. 예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누스 가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그러나 다음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바누스 가는 나와 카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째서요?”
“한때 그들은 특별한 마력을 수집했었거든.”
바누스 가가 은밀하게 해 왔던 여러 수상한 일들 중 하나였다. 목표는 카라였다. 마법사이지만 신들의 사랑을 받던 소녀. 그 마력은 확실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당시 황태자였던 그와 신출내기 마법사였던 카라는 그들을 배겨 낼 방법이 없었다. 그때 마침 그 가문의 여인에게 서신이 온 것이다.
“그저 가출 소녀인 줄 알았던 리시안이 바누스가의 적녀였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었지.”
리시안 바누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계약을 제안해 왔다. 그 계약의 영향으로 일찍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상대가 목숨까지 걸고 맹세를 하는 계약이라니, 황제와 카라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계약이었다. 카라는 반대했지만.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황제는 황녀를 위해 말을 골랐다.
“계약은 신속하게 체결되었지.”
지금도 그는 왜 리시안이 수명까지 줄여 가며 그들과 그런 계약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카라를 지키는 것만 생각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카라의 죽음을 겪으면서 더더욱.’
그 후로는 리시안 바누스의 악행과 끔찍한 소문들 때문에 질려 호기심을 거두었었다.
“그 외에는 잘 모른다. 아이를 낳을 때조차 그녀는 아무도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했으니까.”
최대한 간략하게 했음에도 짧지 않았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던 황태자와 황녀는 각자 생각에 잠겨 앞에 놓인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황제는 생각보다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방을 떠나는 아이들을 덤덤하게 배웅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누스 가를 벗어나려 한 것은 그렇다 쳐도, 그 후에는?
“왜 그렇게 폐쇄적으로 굴었지?”
이상할 정도로 늦은 물음이었다.
* * *
“오라버니.”
방을 나온 뒤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저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계세요?”
“무슨 의미야, 누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오라버니가 묘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가볍게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엮인 기억이 많은가요?”
“아하.”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마주했던 기억을 이르는 것이다.
“어릴 때는 거의 본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난 대체로 소식을 접했지.”
“그렇군요. 하긴, 오라버니는 어릴 때 연애도 하셨으니까…… 바쁘셨을 거고요.”
“……진지하게 하는 말인가?”
그가 음울하게 물었다. 그대의 짝사랑을 향해 묵념. 나는 엄숙하게 속으로 위로를 전하며, 주제를 나에게서 아리엘 쪽으로 자연스럽게 틀었다.
“왜요, 잘 안 돼요?”
“누이, 얼굴도 자주 못 봐.”
“가서 그냥 보면 되잖아요.”
“……가면.”
적어도 아리엘에 관해서는 다소 단순해지는 오라버니라서 다행이었다.
“가면요?”
“……방해가 된다고, 했어.”
이 말엔 살짝 울컥했다. 방해라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만 이게 또 미안한 것이, 내 소문을 없애려고 아리엘과 소피아, 이비엔 경이 합심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냐.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네요! 오라버니, 제가 가서 우리 잘생긴 오라버니에게 왜 그러냐고 따질까요?”
부러 과장을 더해 식식대며 말도 안 되는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굉장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고는 먼저 간다고 작게 말하고 걸음 속도를 올려 앞서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미처 감추지 못한 쑥스러움을 발견하고 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내 궁 앞이었다.
“……데려다준 건가?”
설마, 아니겠지. 픽 웃은 뒤, 나는 지친 심신을 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구도 들이지 않고서 침대로 다가가 몸을 누였다.
“그러니까.”
그 상태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게 실마리인 건가?”
리시안 바누스는 바누스가에서 도망쳤다.
“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우리 언니처럼 무언가 당한 것 아닐까.
“그럼 왜 그렇게 살다가 갔지?”
그렇게 폐쇄적으로. 심지어 아이까지 혼자 낳았다고 했다.
“……꼭 뭔가 감출 것이 있는 것처럼.”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 멍해졌다.
“감출 것?”
이미 바누스 가를 벗어났다. 바누스 가의 세를 약하게 한다고 했던 것도, 악녀 소문으로 이루어진 것 같고. 왜 그 소문에 계약 당사자인 황제가 휘둘렸는지는 이해 못할 일이지만 말이다.
‘이건…… 너무 상식 밖이라 그랬던 건가? 아니면 수상해서?’
어쨌거나 벗어났는데도 감출 것이 있었다는 말이겠지.
“누구에게서?”
뻔하다. 바누스 가 아니겠는가.
유난히 기억 속 언니의 궁에 사람이 적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폐쇄적이었으니 언니가 바누스가에 갔던 것도 공개적인 일정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생각할수록…….”
언니의 과거를 알아야 해. 자연히 생각은 그렇게 흘렀다.
그러니까, 언니가 이렇게 보여 주는 기억들 말고, 리시안이 폐쇄적으로 지냈던 시절 이 궁에서 일어난 일들 말이다.
“……언니가 안 보여 주는 기억들도.”
나는 오랜만에 보았던 어린 언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걸 보고 있을 때, 언니가 나타나 기억을 지워 버렸었지.’
그 외에도 받은 기억들의 군데군데가 비어 있었다. 근래 들어 통째로 받는 기억 뭉텅이들도 마찬가지.
“엠마.”
그래. 그녀가 답이구나. 나는 마치 탐정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대기 중인 리니를 불렀다.
“리니.”
그런데 부르자마자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리니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헉, 전하. 역시, 헤레이스 씨 말씀대로, 알고 계셨군요.”
“……응?”
뭘?
엠마를 불러오라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항의서 말이에요!”
리니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하, 항의서?
“에밀에게 항의서가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고…… 전하?”
“……어?”
당황하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다.
“그, 헤레이스 씨가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오늘 중으로 부르실 거라고 하셨거든요. 모, 모르……셨어요?”
“어, 음. 리니? 난 몰랐, 아니, 그보다 항의서라니? 왜?”
꼭 경찰서에서 고발장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니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 2권에 대해서요.”
“2권?”
“다음 권이 안 나온다는 항의서가…….”
리니는 진지했다.
“이비엔 상단의 실소유주가 에밀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소문이 심상치 않아요.”
“응, 그거야…….”
그 영향으로 팬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고.
“역시…… 알고 계신 거야.”
“리니?”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해 그녀를 재촉하자, 그녀가 조금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음 권에 대한 항의는 있어왔지만…… 근래 들어서는 걱정될 정도의 규모로 항의서가 오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제…….”
나는 리니가 울상이 되어 하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결말이 비극이라는 소문이 퍼졌대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나는 그게 뭐가 그리 큰일인가 싶어 물었다. 리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게요, 다소 폭력적인 수위로 올라갔다고 하네요.”
“포, 폭력.”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기도 무서웠다. 그리고 그냥 잔뜩 쪼그라든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다니엘이 물었다.
“쓰려고요?”
“네…….”
“걱정 말아요, 리샤. 어떤 결말이든 리샤에게 해가 오는 일은 없을 테니.”
무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반쯤 얼이 빠진 채로 그를 보았다.
“쓰고 싶은 대로 써요.”
“사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게 없어서요.”
비극으로 끝낸다는 건 생각만 해 봤었는데! 억울하다, 억울해.
“그럼 떠오르는 대로 쓰세요.”
다니엘이 나른한 미소를 은은하게 그리며 말했다. 겁먹지 말라는 듯 살짝 안아 주면서.
‘떠오르는 대로?’
언니가 준 실마리보다 일단 이걸 먼저 해결을 해야겠다.
‘진짜?’
나는 힐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비극만 아니면 뭐든 된다는 거겠지?’
다니엘의 편안한 미소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그리고 약 이틀 후, 나는 신나게 쓴 짧고 굵은 내용의 원고를 상단에 넘겼다.
“이 정도면 되겠지.”
서로의 저주를 이겨 내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눈의 공주님과 개구리 왕자님. 그들은 2권에서 악당 가문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그 희대의 악당 가문이 하필이면 눈의 공주님의 외가였다는 것이 밝혀지며 이야기는 끝났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오히려 비극 속에서 둘의 사랑은 애틋해졌다. 그리고 비극이 난무한 그 2권의 말미에는 3권을 기대하시라는 멘트가 적혀 있었다.
‘가상이기는 해도, 욕 들으면 찔리겠지.’
으항항항. 광기 어린 팬들은 다소 가라앉음과 동시에 쌓였던 분노를 그 ‘악당 가문’에게로 돌렸다.
“리샤 님, 이건…….”
유진이 아주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카인은 그 짧은 동화에서 좀처럼 눈을 못 떼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뭐야! 리샤가 한 번에 끝장을 냈네!”
헤레이스는 구석에서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끝장이라니, 그렇게까지? 나는 조금 어색하게 헤레이스 방향을 보다가 유진에게 답했다.
“에밀의 팬인 사람들이 소문을 만드는 것에 조금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이 더욱 할 말이 늘어난 얼굴로 물었다.
“조금, 입니까?”
“네…….”
잘한 일 같았는데. 아닌가? 내가 조금 시무룩하게 답하자, 다니엘이 드물게 소리 내어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잘했어요, 리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헤레이스의 웃음소리가 거의 흐느끼듯 격해졌다.
“이제 리샤가 에밀인 것만 밝히면 되겠네? 아하하하!”
“저분은 혹시 조금 미치신 겁니까?”
뒤늦게 내 글을 접하고 소리 없이 열중해 읽고 있던 마탑주 시온이 툭 말했다. 그리고 답도 듣지 않고 진지하게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만. 가설일 뿐이지만 미친 사람들의 머리에 속성이 맞는 마력으로 충격을 주는 것으로…….”
나는 말없이 그에게 2권을 건넸다. 그는 금세 조용해졌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엠마와는 이야기를 끝냈어. 그러니.’
이제는 신관을 찾아가야겠지. 원고를 넘기고 며칠이 지난 날,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신관을 찾아가기 위해 채비를 마친 순간.
“오랜만이군요.”
나는 정체 모를 누군가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르페르샤 황녀 전하.”
그것은, 바누스 가의 사람이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