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가 사랑할 때(3권) (4/15)

악녀가 사랑할 때 3권

사람들의 차림새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축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누이, 호칭을 이참에 통일하는 건 어떨까?”

라빌로프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칭을요?”

“누이의 소문은 아름다움만으로는 불식되지 않는다. 궁내의 소문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지.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

아하. 그쯤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오라버니.”

라빌로프가 나를 기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참, 이쪽은 로암 남작이에요, 오라버니.”

“로암 남작이라. 그렇군.”

다니엘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은 그다지 호의 어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다니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기색에 라빌로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다니엘을 가만히 응시하던 유진이 나에게 싱긋 미소 지은 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남작님. 낮에 보니 당신이 황녀 전하를 리샤라고 부르던데 말입니다.”

“예. 격 없이 부를 때가 있지요.”

꽤나 반듯한 미소를 그리며 다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내’ 누이가 허락한 일이겠지?”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분명히 ‘내’에 강세가 들어간 것 같았는데. 라빌로프가 좀 이상했다. 착각인가?

다니엘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황태자와 유진에게 차례로 눈을 맞췄다. 그리고 아주 기꺼운 기색으로-분명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또렷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애칭’을 허락받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

황태자와 유진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황태자였다.

“애칭을, 부르는 사이란 말이지?”

왜일까? 어쩐지 황태자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리엘한테 답장이 안 왔나?

유진도 이상한 눈초리로 라빌로프 황태자를 바라보더니 가만히 있던 나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한숨을 폭 쉬었다. 어이없는 유진의 태도에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다시 다니엘을 쳐다봤다. 여전히 다니엘은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둘 다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건가? 다니엘이 최종 보스라는 걸?’

그럴 리가. 아직 별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원작의 주요 인물들과 최종 보스의 신경전이 형성되는 건 이 무도회 이후의 일이다. 무엇보다 아리엘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다니엘의 팔을 잡아끌어 옆으로 오게 했다. 순순히 끌려온 다니엘이 내게 짧게 속삭였다.

“첫 춤은 파트너와. 알죠?”

나는 그에게 진지하게 속삭였다.

“제 파트너가 단단한 구두를 신었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것 참 무서운 협박이네요.”

“글쎄요. 적어도 플로어에서는 당신이 날 두려워해야 할 거예요. 춤 정말 못 추거든요.”

아예 못 추는 수준이지만.

이윽고, 그가 내 손을 가볍지만 단단하게 쥐고서 내 속도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다니엘과 함께 회장의 한쪽으로 향했다. 문득 내 목숨줄이라 볼 수 있는 다니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눈빛만으로도 뱃속이 조이는 것 같은 매력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겨먹었지! 으엉.

하지만 마주한 눈 깊숙이 서늘함이 어려 있는 남자. 이 남자의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 와선, 나의 목적을 떠나서도. 하여 진심으로 그를 보며 기쁜 미소를 그렸다.

걸음이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그가 마법을 썼는지, 막을 두른 듯 우리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의 적안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다 사라졌다.

나는 내가 먼저 시선을 흘리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벽에 구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체력을 잘 배분해야 한다. 오늘 밤은 신경 쓸 일이 꽤 많을 것 같으니.

“춤은 조금 후에. 어때요?”

아무래도 기색을 보니,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춤을 추면서 하기에는 내가 힘겨우니까.

나는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지만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나는 달래듯 그에게 속삭였다.

“밤은 기니까요.”

“……그래요.”

살짝 내리깐 눈으로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 * *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서 내게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리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붉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나를 경계하지 않는 걸까요, 당신은.”

그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런데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암살 길드 소속이라는 건 짐작 중인 거고요. 다니엘이 ‘그 왕국’의 왕궁에서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령의 도움이죠.”

“그 태도가 이상해요.”

순간 그의 눈빛이 조금 무거워졌다.

“……태도?”

“정령은 피하라고 했을 텐데.”

정말 묻고 싶었던 건 이것이었을까.

“왜 다음 약속을 잡았어요?”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무료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간단한 이유인데.”

“뭐죠?”

나는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냥,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왜요?”

그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그걸 가만히 보던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인상 쓰면 우울해지지 않아요?”

손끝이 그의 미간에 닿았다. 내가 살짝 문지르자 그가 미묘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본 그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어려 있었다.

“……그다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코앞에서 마주한 시선에 거부감은 없었다. 안심하며 나는 옅게 미소를 그렸다.

“그냥……. 당신이랑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웠어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심을 담아서. 비록 가면이었다고 해도 그와 친구처럼 지낸 시간이 내게는 빙의된 후 가장 마음 편했던 시간 중 하나였으니까. 계속 뻗어 나가려는 상념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제가 거슬렸어요?”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를 최대한 느릿하게 벌렸다.

“……그랬다면요?”

한 발 늦게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붙잡으며 답했다.

“그랬다면.”

그 아름다운 모든 순간을 눈에 담으며 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저는 늘 사람을 상처 입히네요.”

내 말에 그의 눈이 살짝 짙어졌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리샤.”

입이라도 맞출 듯한 다정하고 유혹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코앞에서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날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데요.”

불길한 적안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첫 춤을 추어야죠?”

홀린 듯 회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사람들이 꽤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 귀를 간질였다.

다니엘이 마법을 거두자 사람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우리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댄스 플로어 위에 서 있었다. 나를 중앙으로 이끌며 그가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마요, 리샤.”

짙고 위험한 미소가 시야를 점령했고,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몸을 맡겼다.

처음은 가볍게 쉬운 곡이 흘렀다. 그러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점점 빠른 곡으로 이어졌다. 곡의 음률이 발에 날개를 달아 준 것처럼 나는 허공을 밟듯 가볍게 플로어를 누볐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다니엘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참으로…….

“기분이 어때요?”

짙은 핏빛 시선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가까이 맞닿았을 때 귀에 스민 그의 목소리 또한. 나는 다시 그와 맞닿을 때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는 것으로 그에게 답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부서져 내리듯 온 광경이 찬란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지치지 않았고, 개운하기까지 했다.

비교적 빠른 템포의 곡이 잠시 쉬어 가는 듯 여유로운 속도로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주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다 우리만 보는 것 같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가 느슨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역시 다니엘, 오늘은 악마 같아요.”

“찬사를 남발하는군요.”

우아하고도 퇴폐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가 속삭였다.

“뭘로 그 찬사에 보답할까요, 리샤.”

그가 부르는 애칭은 무언가 특별했다. 그것은 탄식을 닮은 듯도 하고, 신음을 닮은 듯도 했다. 아, 분위기 이상해. 진짜 이상해! 속으로 발버둥을 치면서 내가 말했다.

“당신은 이미 보답했는걸요.”

가까이서 그의 매혹적인 눈이 묘한 빛을 머금었다.

“제가 뭘 했죠?”

“그토록 만족스러운 얼굴이라니. 그거면 충분해요, 다니엘.”

내가 부르는 그의 이름은 그에게 어떻게 들릴까?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고, 또 어쩌면 조금은 특별할지도.

그는 말없이 나를 플로어 밖으로 이끌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왕자였을 시절에는 지금의 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그제야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는 느리게 걸어 나를 부축했다. 우리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순간 서늘한 손길이 이마에 닿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다니엘이 조금 무심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은 없네요.”

“지친 것뿐이래도요.”

그러나 그는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나를 보던 그가 망설임 어린 기색으로 손을 거두었다.

“쉬고 있어요.”

거리를 살짝 벌리며 그가 말했다.

“잠시 다녀오죠.”

나는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큰일 하나를 끝내고 나니까 피로가 몰려왔다. 고통은 느끼지 않아서 좋은데, 이런 식으로 체력이 거지인 것은 매우 불편했다. 어차피 보약 같은 것이 통할 상태도 아닌 텐데 차라리 각성제를 구해 볼까. 그런 생각에 멍하니 잠겨 있을 때 소리가 들렸다.

“꺅!”

“……?”

작은 비명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사람들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착각인가?”

하지만 또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

아무래도 내가 귀가 좋은 편인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이 몰리는 것에 조금 주춤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난 왜 이런 상황을 자꾸 만나지? 원더우먼 제복이라도 만들어 놔야 하나.’

어떤 상황일지는 훤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테라스의 바로 옆 자리였다. 닫힌 테라스 문 바깥쪽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걸어 테라스로 향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바깥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히 하지 못해?”

“놓으라고요! 사람을 부르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기 전에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곳의 광경에 혀를 차며, 문 한쪽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표현하기도 더러웠다.

나는 무심코 포크를 찾았다. 던져 맞추고 싶어서.

“읏! 르페르샤 황녀 전하, 이게 무슨! 이럴 때 들어오다니, 전하께선 예의도 모르십니까?”

“허…….”

잠깐 놀랐던 남자는 적반하장 식으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무리 뒤에서 수군대도 제국에서는 황녀에게 직접 대놓고 이딴 언사를 하는 인간은 없었는데. 신기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혐오스러운 인간이었고. 그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내가 우아한 황녀 언니의 모습을 최대한 따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지?”

이럴 때는 세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나는 지금껏 나와 직접적인 주종 관계가 아닌 경우, 가능하면 존대를 써 왔다. 하지만 저런 놈에게 존중은 필요 없었다. 툭 던진 물음에, 남자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읏……! 나는 바르시안의 5왕자요!”

놀러 와서 무도회 구경 온 망나니구나. 그렇게 착착 해석이 되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터번 비슷한 것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고, 가무잡잡한 피부에 밝은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바르시안이라면, 전생의 아랍이 연상되는 국가였다. 하렘까지 있는 곳이니, 상대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낮은 편이었고. 자연히 여성을 낮게 보는 인간도 많은 곳이었다. 아리엘이 기연들을 찾아 여행하는 외전에서 잠깐 나왔던 곳.

“바르시안이라. 사막 국가의 왕자인가?”

그래서 이렇게 황녀한테도 당당한 거구나. 그는 내가 황녀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목소리에 배인 업신여김을 지우지 못했다.

웃기지도 않네? 나는 한껏 고고하고 무심한 모습을 가장하고서 그를 깔아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핏대를 세우는 거지? 그대는 제국이 우스운가.”

소리가 크다고 다가 아니었다. ‘제국’을 입에 담자 그가 그제야 움찔했다. 말을 해 줘야 느끼는 머저리였다.

“게다가…….”

나는 우아한 어조를 고수하며 그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며 모습을 드러내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보기에는, 왕자가 그렇게 당당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흑, 어허엉……!”

남자의 뒤에서 튀어나온 여인은 분홍색 머리를 가진 아주 사랑스러운 외양의 소녀였다.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로 후다닥 달려온 그녀는 커다란 분홍색 눈동자에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며 다독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그녀를 다정하게 어르며, 나는 바르시안의 왕자를 싸하게 노려보았다. 그를 여기서 혼쭐을 내면 속은 풀릴 테지만, 뒷수습이 복잡해질 것이다.

사람을 부를까? 하지만 사람을 부른다면 오늘 데뷔를 치른 것으로 보이는 이 아가씨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건국제 당일이 아닌 시기에 데뷔를 치르는 영애들은 대체로 자작 이하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가문의 힘이 약할 테니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똑바로 굴리려 애썼다. 내 품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소녀를 더 꼬옥 안아 주고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은 이 아가씨 눈에 띄지 않게 하자고.

“젠.”

오랜만에 부르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검은 독수리가 어디선가 나와 날개를 펼쳤다.

“우, 우아악!”

왕자가 비명을 더 지르기 전에 나는 젠에게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가능해?”

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

내 나직한 부름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분홍 머리를 가진 굉장히 귀여운 아가씨였다. 떨면서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눈이 맑고 처연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눈가를 다정하게 한 번 쓸어 준 뒤 속삭였다.

“진정해요. 그리고 가능하면 마법 스크롤 같은 것을 늘 상비하고 다니도록 하고.”

“그, 흑, 전하…….”

훌쩍, 하고 영애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예쁜 분홍빛 입술이 살짝 오물거렸다. 비명이 막힌 왕자는 갑자기 닥친 ‘악몽’에 휩싸여 테라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바닥을 보려는 영애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잡아 내 쪽으로 돌렸다.

“영애는 아름다우니,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지 않겠어요?”

어쩐지 영애의 눈이 몽롱해졌다. 살짝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그녀가 진정을 하는 것 같아서 나는 하고자 했던 말을 부드럽게 일러 주었다.

“앞으로는 울고 있지 말고, 스크롤로 한 방에 갚아 주는 겁니다. 투명 스크롤부터 뜯고서요. 알았죠?”

“우으…… 네에…….”

착하다 하고 속삭이며 웃어 주었다. 매우 귀여운 느낌의 여인이었다.

왕자에게는 생애 가장 끔찍한 기억을 심어 줄 생각이다. 절대로 잊지 못하도록. 꿈에도 나오고 자꾸 생각나고 잊히지 않도록.

‘영원한 건 아니겠지만. 부디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콕 박혀 있기를.’

그를 흥 하고 비웃어 준 후, 영애가 눈물을 그치고 티가 나지 않게 수습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킁, 저 보세요, 전하. 말끔한가요?”

자신을 소피아라고 소개한 영애는 조금 회복되었는지 얼굴을 살짝 들어 보이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예쁘네요.”

수줍어하는 소피아에게서 리니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구해 줘서 그렇겠지.’

그때 소피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내게 조그맣게 말했다.

“전하, 저는 전하께서 무서운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너무나 다정하시네요.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한 충격을 나에 대한 미묘한 호감으로 극복한 것 같았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웃으며 답해 주었다.

“아아, 멋지셔요.”

“…….”

조금 과한 것 같긴 하지만.

“저 그리고 알 것 같아요.”

돌아보자 더욱더 열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엇을요?”

소피아는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서 이렇게 속삭였다.

“무대 가까이에서 목소리를 기억했거든요. 황녀님이 그 여신님이 맞으시지요?”

“여신……?”

“흑갈색 머리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신, 그…….”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흐름이었다. 나는 몹시 격렬하게 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금쯤이면 다니엘이 돌아와 있지 않을까?

“베아트리스 린데아 말이에요.”

“…….”

순간 아 하고 반응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소피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를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 너 덕질로 충격을 이긴 것이었구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은 비밀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녀는 마치 국가기밀이라도 들은 것 같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워!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다행히 가까스로 황녀 언니의 우아함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영애, 사실 나와 어울리면 좋은 소문이 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 나갈 때는 따로 나가고, 앞으로도 공개적으로는 잘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해요. 알았지요?”

말하다 보니 뭔가 비밀 연애라도 시작하는 것 같은 말이 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소피아의 취향에 부합한 것 같았다. 그녀는 열렬한 눈빛으로 말했다.

“비밀이라니. 전하와 저 사이의 비밀인 거죠? 아, 너무나 기뻐요!”

“……그래요.”

“그럴게요, 전하. 꼭 그러겠어요!”

“으응. 그래요.”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의도가 과연 저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저 집안사람들이 알아서 관리해 주겠지.’

소피아 마르시엔. 그녀는 알고 보니 백작가 출신 영애였다. 그 정도면 자기들의 아가씨가 황녀와 어울리겠다고 하면 아마 뜯어말릴 것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는 그녀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기절한 왕자를 뒤로 하고 테라스를 나올 수 있었다. 예상대로 다니엘은 돌아와 있었다.

“단.”

나는 그가 진심으로 반가워서 빠르게 다가가 방긋 웃었다. 한쪽에서 눈을 반짝이며 이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 쪽으로는 시선 한 번도 주지 않으며. 역시나 과한 반김의 민망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를 덮쳤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체력이 부족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리샤.”

“…….”

“쉬지 않고 움직이네요. 위험한 일에도 끼어들고.”

아무래도 그는 그가 없는 사이의 일을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의 내리깐 눈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았다.

“해야 할 일들이었는걸요.”

그리고 가만히 미소를 그렸다. 사실이니까. 내리깔고 있던 눈을 살짝 올리며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그의 루비 빛 눈동자가 스륵 옆으로 굴렀다. 시선이 향한 곳은 방금 내가 빠져나온 테라스였다. 그곳에는 이국의 왕자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젠에게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자 묵직함이 덜해진 붉은 눈과 다시 마주쳤다.

“다니엘?”

왠지 그가 텅 빈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무심코 묻고 말았다.

“당신, 괜찮아요?”

그의 눈이 흔들린 것 같았지만 어두운 시선은 다시금 다정하고 퇴폐적인 웃음기를 머금었다.

“리샤.”

“네.”

그는 두어 번을 더 나를 불렀다. 한 번 한 번이 전부 달콤했다. 나는 그저 그가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여기며 몇 번이고 답해 주었다. 잠시 부르기를 멈춘 그가 내게 말했다.

“잠시, 나갈까요.”

기꺼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은 숨 쉬듯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굳이 걷지 않았다. 나는 아까 춤을 추었을 때, 내가 허공을 밟듯 움직였던 것에 마법이 관여했음을 그제야 눈치챘다. 스륵 하는 표현을 붙여야 할 만큼 우리는 미끄러지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왔었던 정원에 도착했다.

“여긴…….”

황태자의 생일날 왔던 곳이었다. 말없이 서 있자 그가 나를 끌어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흘리듯 말했다.

“오늘은 베일이 없으니 가릴 수 없겠네요.”

“베일이라면…… 그날 나를 봤어요?”

그는 그저 슬쩍 웃었을 뿐이었다. 그랬구나. 그날 그도 나를 봤던 것이다. 그래서 술집에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그런데, 가릴 수 없겠다는 말은 뭘까.’

베일로 가려 봤자 얼마나 가려진다고.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내 목덜미에 드리워져 있던 백금발을 느릿하게 넘겨주었다. 사소한 손짓에도 발끝까지 저리게 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악마는.”

불현듯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음이 없어요.”

호륵 날아드는 불씨처럼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지나 입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탐하죠.”

이윽고 맞닿은 시선은 알 수 없는 빛으로 가득했다.

나는 홀린 듯 덩달아 나직하게 그에게 물었다.

“마음을? 어째서요……?”

“귀애하여.”

“마음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무언가를 귀애할 수 있어요?”

“없기에 느끼는 사랑스러움인지라. 반대에 끌리는 건가 봐요.”

무심한 미소를 한 조각 머금고서 그가 둔탁하게 시선을 끊어냈다.

“그 날 나는 의뢰를 받고 여기에 있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당신을 봤고요.”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밤에 먹혀 버린 정원을 응시했다.

“리샤.”

“네.”

자꾸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속을 누가 알까. 그는 묘하게 웃더니, 황금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매만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악마가 왜 악마인 줄 아나요?”

“글쎄요.”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거든요. 피를 타고, 미소를 머금고.”

그는 묘하게 눈을 휘었다. 은근한 어조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훔치죠. 예를 들면, 눈물과 같은.”

속삭이듯 들리는 말에 내가 눈을 깜박였다.

눈물?

“그들은 아름답지만.”

그가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유혹하듯.

“정을 주면 안 되는 존재들이에요.”

“……그렇군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정령이 말 안 해 줬죠?”

“뭐……를요?”

그는 더욱 퇴폐적으로 짙게 미소 지었다.

“혼혈의 진짜 능력에 대해서.”

언제 내 손을 잡아 들었는지 손끝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움찔하자 그가 다정히 미소 지으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정령과의 혼혈은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또 특성을 가져요.”

속삭이는 소리가 공간을 한 움큼 채웠다.

“그들은 눈물을 마시고, 그 대가로 작은 소원을 들어주죠. 감정이 담긴 눈물은 정령의 가장 큰 힘이 돼요.”

그가 내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독을 문 듯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조차 다정하고 또 달콤했다.

“그것이 바로…….”

“잠깐만.”

나는 직감했다. 내게 잠시 막혔던 그의 말은 다시금 매끄럽게 이어졌다.

“나의 왕국이 파멸한 이유죠.”

“…….”

“나는 아마도 유일한 완성형 혼혈일 거예요.”

“다니엘.”

그는 내게 자신의 정체를 언급하고 있었다.

“왜 이런 걸 저에게 말해 줘요?”

“글쎄요.”

스스로를 악마라 칭하며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눈물은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

이대로 지내면, 언젠가 마시게 될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나를 아주 힘들게 할 것 같다는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있잖아요. 단.”

나는 그를 가만히 마주 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나에게 악마이고 싶은 거예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답했다.

“친애하는 리샤, 그건 그대에게 달린 일이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지만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했다. 오늘 하루 그는 내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말 내용은 또 날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단다.

‘모순적이잖아?’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니까, 제게 바라는 것이 있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자 그가 멈칫했다. 그가 고요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뭘 원해요?”

나야 그에 대해 원작을 접하고 호감을 가진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는 나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비밀을 밝히면서까지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니.

“헤레이스.”

그 순간 그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면, 그는 웃을까. 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왜요?”

“전에 말한 예언을 받은 친구가 그예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죽을 거라는 예언 말이에요?”

다니엘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그랬구나. 나는 납득했다. 원작에서 그는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 대해서 깊은 애정과 헌신을 하는 사람이라고, 제인의 쌍둥이 동생들이 그랬었다. 그걸 눈으로 확인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샤, 나는…….”

“헤레이스가 날 사랑할까 봐 걱정인 거군요.”

“……네.”

그렇게 빠르게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단다. 다니엘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며 물었다.

“왜 날 죽이지 않았어요?”

조금 위험하기는 해도 그에게는 날 잡음 없이 죽일 힘이 있다. 헤레이스만을 위했다면 그냥 죽이는 게 깔끔했을 텐데. 그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답을 읽어 냈다.

“죽이려고 했는데 안 죽인 거군요. 왜요?”

나는 그게 중요했다. 혹시 내가 다니엘의 선 안의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중요해요?”

다니엘이 조금 김이 빠진 어조로 물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나와 달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고요하게 웃었다.

“리샤, 아까 말했잖아요. 당신 눈물은 보고 싶지 않아졌다고.”

“아하.”

그거면 충분해서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일순 눈가를 움찔했다. 와! 벌써 나는 그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게 이렇게 커다란 기쁨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와 가까워진 것 자체로 기뻤다. 나는 시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헤레이스는 제가 우는 걸 보고 싶다고 했는데는데. 단은 제가 우는 게 싫다고 하네요.”

“그건, 하아…… 제가 다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재밌거든요.”

“재밌다고요?”

“반가워서 활짝 웃어 주면, 자기가 그렇게 좋냐면서 막 시무룩해지거든요.”

“…….”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근데요, 다니엘. 헤레이스에게는 당신이 있잖아요?”

“네?”

“안 죽을 거예요.”

말만 잘 들으면.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도 있잖아요.”

내가 덕질을 하는 한 원작처럼 사랑 때문에 죽는 꼴은 못 보죠!

“그러니까 너무 그 말에 얽매이지 마요. 그러다가 친구한테 상처 주게 될 수도 있잖아요.”

“…….”

“그래서 저에게 정확히 뭘 바라는 거죠?”

나를 물끄러미 보던 다니엘이 옅게 미소를 그렸다.

“바라는 건, 조심하는 것 정도예요.”

“어, 아까 눈물을 탐한다길래, 눈물 달라고 하면 주려고 했는데요.”

이번에는 그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리샤.”

그리고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나는 그에게 훅 들어가 버렸다.

“다니엘, 만약 제가 당신에게 눈물을 주면, 당신은 제게 뭘 줄 거예요?”

“바라는 게 있군요, 리샤.”

순간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어쩌면 이건 기로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선 안에 완벽하게 속하거나 아니면 쳐내지거나.

‘하지만 지금 그는 거리를 두자고 하고 있는걸.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숨을 고른 뒤 그의 목 가까이의 옷깃을 두 손으로 잡아 쥐었다. 그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대로 잡아끌어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리샤……?”

붉었던 그의 눈이 오묘한 흑빛이 되어 있었다. 어떤 원리로 색이 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름다웠다. 거기 비친 르페르샤 언니의 모습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저도 당신 친구가 되고 싶어요. 헤레이스처럼.”

“……네?”

순간 그가 막혔던 숨을 토해 내듯 탄식했다.

“친구요? 그, 리샤. 잠깐,”

“그러면 울어 줄게요.”

그가 당혹스러워하며 뭐라 말하다가, 멈칫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

“아, 리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나를 사랑해요?”

“아뇨.”

“그럼?”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 같은 친구가 가지고 싶어서요.”

“…….”

그가 그의 목덜미를 그러쥔 내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런.”

어딘가 허탈한 듯한 표정. 그리고 부드럽고도 유혹적인 손길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어쩐지 조금 서글퍼 보였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죠, 리샤.”

“내 좋은 친구는 내가 정해요, 다니엘.”

그 순간 그의 눈에 매우 선연한 붉은 빛이 어린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나와 그 사이에 훅 끼어들었다. 퉁겨 날아간 것은 다니엘이었다. 그는 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로 부드럽게 날아가 선 뒤, 이쪽을 응시했다.

“인공정령의 자아가 그토록 강하다니. 아, 아닌가요. 애초에 인공 정령이…….”

-꺼져라.

나와 그 사이에 검은 날개가 너울지며 시야를 가렸다.

“……젠?”

-주인,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이렇게 화가 난 젠은 처음 보는 것이라 얼떨떨했다.

-저자와의 계약은 위험하다.

“위험하기로 따지면 금수 쪽이 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닥쳐! 계약자를 해치는 정령은 없다. 혼혈과는 다르지.

다니엘이 옷을 툭툭 털며 정돈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채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어떨지. 그러나 어쨌거나 진정하는 게 어떨까요. 아직 계약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에요.”

여느 때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나는 젠의 날개 너머를 보려고 까치발을 들었다. 어딘가 메마른 느낌으로 다니엘이 나와 눈을 잠깐 마주쳤다.

“그러나 그 정령의 말이 옳아요. 리샤, 당신은 너무 무방비해요.”

“…….”

“악마를 믿다니.”

나는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조금 무료해 보였다. 멀어지듯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가 멀어지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젠, 괜찮아.”

일단은 젠을 진정시켰다. 부드럽고 느리게 날개를 쓰다듬으며. 그리고 다니엘에게 말했다.

“당신이 악마든 또는 다른 것이든 나는 상관없어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흐려졌다.

-주인!

“계약이라고 했죠? 해요, 그거. 나랑.”

나를 찾아와.

“친구가 싫으면, 눈물 받을 때마다 꽃이라도 한 송이 건네줘요.”

나는 꼭 내가 뱀파이어에게 물어 달라고 하는 여자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잘 울지 않아서 당신이 불리한 계약이 되겠지만.”

“……혹시, 악마가 뭔지 모르는 건가요? 리샤. 우리는 괜히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이해했어요. 하지만 정말로 상관없어요. 어차피…….”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는 것뿐이다. 그래도 살해당할 것 같으면 황궁이라도 폭파시켜야지 뭐.

사실 황태자도 점점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제는 내가 원했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신이랑 있으면 자유롭거든요. 지금은 그걸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다가와.

“……그 이유만으로는 안 될까요?”

그는 탄식 소리를 뱉었다. 그러더니 젠을 알 수 없는 힘으로 슬쩍 치우고는,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으로 느릿하게 내 뒷목과 얼굴을 쓸다가 키스하듯 고개를 내렸다. 붉은 기 어린 숨 막히는 시선이 쏟아졌다. 기묘하게도 어딘가 서글픈 악의가 서려 있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죠.”

허한 웃음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는 내 귀에 속삭였다.

“리샤. 다음에 보면……. 당신을 죽이겠어요.”

서늘하고도 다정한 어조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 *

볼 수 없는 언니의 기억을 또 한 번 되찾은 날이었다. 피를 쏟는 것도 익숙해졌다. 시무룩하게 입가를 닦고서 고민했다. 궁인들이 보기 전에 피 묻은 수건을 치워야 하는데. 이건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했다. 좀 많이 토했기 때문이다.

“오늘 건 기억이 좀 강한 거였나 봐.”

나는 언니를 떠올리며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내 머리를 메우고 있는 건 언니와 다니엘이었다. 언니의 경우, 나는 어쩐지 전에 언니가, 내가 이 몸으로 계속 살 경우 언니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답이 없었던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역시 답을 피한 거겠지.”

그 다음으로는 다니엘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그리고 다정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이상하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에게 편안하게 끌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가 나의 유일한 생존 루트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다음에 볼 때는 날 죽인다고 했지.”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왜 내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암살길드장이 죽인다잖아! 근데 위협을 받은 느낌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실은…… 아직 그가 내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으으.”

그 생소하고도 열기 어린 감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극이 너무 심해!”

모쏠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힝.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만큼은 황태자와 약속해 버린 아리엘 공략법도 고민스럽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많은 하루였다. 우선 오랜만에 보는 이비엔 경에게 알짜 정보만이 담긴 묵직한 정보지들을 건넸다. 요즘 카인과 유진과 함께 덩달아 바빠진 헤레이스에게 부탁해서 얻은 것들이었다. 앞으로 내가 그녀에게 줄 원작 기반 정보에 대한 가림막이 되어 줄 것이다. 실제로도 도움이 되겠지만.

“세상에…….”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다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건 가장 중요한 것들만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도 양이 많아서……. 다 볼 수 있겠어요?”

당장 내일모레가 중요한 계약 날이었다. 만 하루 되는 시간에 이걸 다 보고 머리에 집어넣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이비엔 경은 아주 쉽게 답했다.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천잰가 봐. 감탄을 표하며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럼 내용은, 도움이 될 것 같은가요?”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요!”

“다행이에요.”

흡족하게도 신이 난 답이 돌아왔다. 흐뭇하게 웃음을 터뜨린 뒤 한껏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비엔 경,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말해도 되겠군요.”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이번 계약에서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랍니다.”

이비엔 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비엔 경에게 달려 있는 거예요. 이후 그들과의 관계는.”

중요한 투자자들과의 자리이긴 했지만, 그녀가 부담감에 질 성정은 아니라 생각되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뭐 애초에 내가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인 것이 더 컸지만. 그녀에게 일거리를 잔뜩 안겨 주고 자유로워지려는 까만 속을 감춘 채로 나는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전하, 이렇게…….”

못,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난 정말 생각 없는데. 살아남기도 나는 벅찼다. 그러나 걱정은 잠깐이었다.

“이렇게 저를, 믿어 주시다니!”

“…….”

믿……죠! 믿고말고요!

나는 어색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격하게 울먹이는 이비엔 경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제가 이비엔 경을 믿지, 누굴 믿겠어요. 새삼스럽군요.”

“전하…….”

아, 나 알 것 같아. 이다음에 이비엔이 할 말.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주먹까지 불끈 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주었다.

“콜록.”

계약 당일이었다. 나는 새벽에 또 피를 토했고, 상태는 여전했다.

“역시 기억을 못 보니까 언니 걱정이 더 되는 거 같아.”

나는 반쯤 넋을 놓고 전날을 보냈다. 오늘 아침까지도 그 상태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니 말고 다니엘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오늘일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혼자가 될 예정이거든!

‘틀림없이 날 찾아올 거야.’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확언은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부디 나와 계약하고, 자주 보길. 그러다 어느 날, 혹시 마음이 내킨다면, 원작 끝 무렵 그의 나그네 길에 날 살려서 데려가 준다면 더 고마울 것이다. 물론 친구로서.

“전하?”

“아. 응?”

나를 보는 엠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심상찮은 눈빛에도 익숙해져서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하고 넘어갔다.

“이비엔 경이 왔습니다.”

“그래. 나갈게.”

본래 이비엔 경만 보내려고 했지만 생각 끝에 결정을 바꿨다. 함께 나가기로.

오늘은 유진도 함께 가기로 했다. 궁 정문에서 유진이 씨익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 * *

나는 이비엔 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진 그녀에게 친근하게 눈웃음을 지어주며 말했다.

“이비엔 경, 경은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오늘 할 것만 생각해요. 알았죠?”

“예.”

걸어가면서 유진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잘 지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등등. 그러다가 이비엔 경이 오늘 계약을 전부 주도한다는 말에 그가 물었다.

“이비엔 경은 아직 이런 쪽에 경험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맡기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귀족 가문의 후계 교육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테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잘렸지만 그녀는 가문의 후계 교육을 받아 왔던 몸이다. 유능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만큼 노련한 상인들과 마주하고 협상을 해 보는 경험은 쉽게 얻을 수 없거든요.”

“이비엔 경을 위한 것이군요.”

“그런 면도 있다는 거죠.”

계약은 성공적이었다. 이비엔 경은 나와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상대방을 거의 가지고 놀았다.

와, 언니 쩔어요! 꺅! 협상이 끝났을 때 나는 이비엔 경의 손을 부여잡고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저, 전하?”

“경, 정말 훌륭해요.”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냥 대단한 건 다 알겠어. 그냥 그녀가 너무 멋졌다. 언니, 날 가져요!

“멋있어요.”

“마, 마음에 드셨다니, 너무나 기쁩니다. 하지만 전부 전하의 지혜였는걸요.”

정보를 준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어우 겸손한 사람!

“제가 뭘 했다고요. 정말 잘했어요, 이비엔 경!”

그러자 이비엔 경이 또 울망울망한 눈으로 수줍게 볼을 붉혔다. 나와 이비엔 경을 번갈아보던 유진이 갑자기 이유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를 의아하게 보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비엔 경을 살포시 꼬옥 안아 주었다.

* * *

돌아가는 길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함께 하고, 꽤 평범한 대화를 나눈 뒤, 살롱으로 향했다. 이비엔 경의 옷을 골라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간 곳은 마담 다니엘라의 살롱으로, 꽤 고급의 살롱이었다. 신이 난 것은 이비엔 경이었다. 그녀는 꼼꼼하게 따지며 옷을 고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면 그 즉시 다른 말 안 하고 그것을 고르고는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본인이 행복해해서 그냥 두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살짝 문이 열린 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 전하가 얼마나 악명이 높으신데요. 영애, 들으시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다른 둘도 멈칫했다.

“듣기로 글쎄…….”

“그건 약과죠. 제가 들은 건 황녀님이 글쎄 유부남과…….”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명예도 모르신답니까?”

생각보다 수위가 센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남 일 듣는 기분으로 시큰둥하게 귀를 기울였다. 저것도 많이 식은 거였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녀인데 뒤에서 오가는 말들이 꽤나 노골적이었다. 마치 설사 이 말이 새나가도 처벌을 걱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처럼.

‘황제 때문이겠지.’

대놓고 황제가 배척했었으니까. 거기다 리시안 바누스의 영향도 클 거고.

어쨌거나 이름 모를 영애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모든 게 돈으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분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만도…….”

“그만하세요!”

……응?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자, 잘못 들었나? 어디서 들어 본 예쁜 목소리였다.

“아, 영애, 그…… 이 정도는 사실…….”

“그만하시래도요! 이렇게 남의 험담을 하는 분들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가 있나요!”

나는 당황해서 이비엔 경과 유진을 보았다. 저게 대체 뭔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이를 갈던 둘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누구지?

그 누군가의 청초한 목소리는 이제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흑……!”

“마, 마르시엔 영애?”

“소문이란 이런, 것이군요. 흐극. 진정한 그 사람의 속내를 보지 못하는 나쁜 소문들! 가슴이 너무나, 아파요…….”

제발, 그만. 악악. 대체 누구지. 어떻게 저렇게 오글거릴 수가 있지? 나는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마르시엔이라면…….

소피아 마르시엔. 그 아가씨구나! 바르시안 왕국의 5왕자에게 모욕당하던 걸 내가 구해 줬던 그 분홍 머리 영애 말이다. 나랑 친한 척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역시 이해하지 못한 거였구나.

“전하, 그만 들으십시오.”

그때 유진이 나를 끌었다. 허탈하게 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을 때, 따라 나온 이비엔 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 중에 올바른 분은 겨우 한 분뿐이군요, 전하.”

“네?”

“마르시엔 영애라면, 백작가의 그 아름다운 영애겠지요. 기억해 두어야겠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이비엔 경이 한 것으로 봐서는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준 기회를 타고서 후에 굉장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음,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언니! 나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진은 깊은 고민이 어린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애써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

그리고…….

“혼자 돌아가시겠다니요?”

“전하, 그게 무슨…….”

“두 사람 다 걱정하지는 마세요. 저도 저를 지킬 수단은 있으니까요.”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이 계속 말을 잇기 전에 둘 앞에서 젠을 불렀다. 쉬아악 하고 검은 독수리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색이 조금 더 진해진 것 같은데?

“전하, 설마 그건……!”

어쨌거나 설명이 먼저였다. 전에 보여줬으니 유진은 알고 있었겠지만, 이비엔 경은 놀란 듯했다.

“인공정령이에요. 짧은 거리를 혼자 걷는 데에 이만하면 훌륭한 호위죠.”

인공정령 중에서도 젠은 확실히 보기만 해도 아주 특별하고 강해 보였다.

유진이 조금 씁쓸한 눈으로 젠을 보았다.

“그래도 조금 돌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전하.”

이비엔 경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아예 못을 박았다.

“이비엔 경, 오늘 집을 계약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더 시간이 늦어지기 전에 해야죠. 유진도 바쁠 테니 돌아가야 할 거고요.”

두 사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혼자 걷겠다는 것은 무사히 받아들여졌다. 나는 희희낙락하며 둘을 먼저 보내고, 잠시 그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는 젠에게 부탁했다. 혼자가 되었으니, 다니엘을 찾을 생각이었다. 날 찾아오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으니까.

“젠, 부탁해.”

-걱정 마라. 하지만 그놈은…….

젠의 걱정이 전해져 왔다. 나는 내 의도를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렇게 답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젠이 못마땅한 분위기로 툴툴거리더니, 금세 다니엘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의외로 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적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나는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 나를 감싸는 젠의 날개가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는 순간 직감했다.

다니엘이었다.

* * *

아직 초저녁일 텐데도 사위가 캄캄했다. 그림자마저 사라진 한밤처럼. 나는 조금 후에야 그것이 젠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간 멍하니 있던 나는 뒤늦게 눈을 깜박였다. 얼핏 보이는 인영은 말이 없었다. 다니엘, 그가 분명한데. 앞에 있는데도 그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조급함이 슬금슬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를 지키고자 감싸고 있는 검은 독수리를 안아 주며 작게 속삭였다.

“젠, 거둬 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젠에게 마음을 다해 부탁했다.

그를 마주 보고 싶어.

그 괘씸한 바람을 젠은 들어주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부르지 않아도 나올 테니, 네 놈. 허튼짓하지 마라.

말 없는 다니엘을 향해 젠이 일갈했다. 나는 그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차츰 시야를 덮고 있던 새카만 장막이 거둬졌다. 드러난 장소는 생각보다는 덜 어두웠다. 아까 내가 들어온 골목 입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녁 어스름 푸른 빛깔을 머금은 공간은 완벽하게 캄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난히 그림자가 진 곳이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었다.

‘잘 안 보여.’

나는 그림자에 몸을 묻은 인영에게 눈을 맞추고자 다가갔다. 그때였다.

“……참 어려운 사람이네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작은 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만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걸음을 서둘렀지만 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다니엘, 가지 마요.”

몸을 움직이는 그를 빠르게 불러 세웠다.

“피하지 말아 줘요. 나는 정말로 당신이 무엇이든 괜찮아요.”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붓듯이.

그는 멈칫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과 계속…….”

“리샤.”

그가 내게 말을 거는 순간, 나는 그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갈색 머리가 신기하게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금안인가.

나는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혹시 내게 살려 달라는 소원을 빌려는 거라면.”

그가 조롱하듯 그러나 너무나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능하다고 말해 주겠어요. 그런데도 제게 친구 운운할 수 있겠어요?”

그의 미소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었다. 잠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리샤, 당신은 너무 조심성이 없어요.”

나는 그를 보며 조금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내가 정말로 르페르샤 언니였다면 아까 그의 말에 상처받았을 것이므로.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충분히 침묵이 고인 시점에,

“저는 조심하고 있어요.”

조금 잠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그래서 잃을까 봐.”

이래 봬도 덕질이 쉬운 게 아니거든요?

“친구가 부담스러우면 꽃도 좋아요. 내 눈물과 당신의 꽃을 교환하는 거예요. 하지만.”

게다가, 다니엘에 대해서는. 더더욱 조심스럽고, 고민스럽고, 어렵다.

“……그래도 전 당신과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어요.”

“왜죠?”

그의 입가에 그린 듯 머무르고 있던 미소가 슬쩍 흐려졌다.

“당신 친구가 되면 조금 더 행복해질 것 같거든요.”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저, 나는 당신이 나의 자유가 되어 주어서…….”

나는 멈추어 선 채로 더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었을 뿐이다.

“함께 있어 정말로 자유로웠던 건, 다니엘이 유일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중요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담담한 어조로.

“하지만 정 제가 번거롭다면…….”

나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잠시 숨을 멈췄다. 그때 그에게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친구는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니, 꽃으로 하죠.”

서늘한 음성의 끝이 살짝 떨렸다. 얼마간 일그러진 그의 미소는 퇴폐적이면서도 고결해 보였다. 진심으로 미친 미모였다.

“그리고 당신이 번거롭다니, 그럴 리가요, 리샤.”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중독될 것 같은 분위기로 말했다.

“계약하죠. 그러나 그 전에 확인해 둬야 할 것이 있는데요.”

“확인해야 할 것이요?”

그의 대답을 들어 매우 안심한 상태로 그를 말갛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요, 리샤.”

그가 짐짓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러나 그 미소와 달리, 그의 시선은 포악했다. 그 삼킬 듯한 시선이 드리워졌다.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지금, 내게 눈물을 맛보게 해 준다면…….”

이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알려주듯, 노골적으로.

나는 그에게 반쯤 안긴 채로 귓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대에게 기꺼이…… 꽃을 바치죠.”

그의 눈은 그 와중에도 무저갱처럼 깊기만 했다. 깊은 그 눈이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해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앞으로 당분간은 기력이 충분해질 거예요.”

꾸며낸 묵직한 미소가 내게로 향했다. 나는 미련 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뜻대로 하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헉, 소리가 났다.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숨이 퍽퍽하게 차올랐고, 서서히 서 있기가 어려워졌다. 내 힘이 빠지는 만큼 그는 더욱 단단하게 나를 안았다. 선 채로 그에게 몸을 맡기고서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위치에서 그가 내 모습을 남김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황금빛임에도, 짙고, 어둡고, 요동치는 시선이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고르려 애쓰며 그의 눈 속에 비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따스하게, 환하게 웃었다.

“…….”

그 순간 그가 굳었다. 이윽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눈을 감고서 그의 고요한 움직임에 나를 맡겼다. 나른하고도 상냥한 입맞춤이 눈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코가 스치고 고개가 기울었을 때, 그는 무섭도록 위험해져 있었다.

“……음.”

삼킬 듯 입 맞추는 그를 막지 않았다. 가늘게 뜬 시야로 그가 보였다. 나른한 황금색 눈이 오로지 하나의 감정으로 짙어져 있었다. 그것은 소유욕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완벽하게 마음을 놓았다. 이로써 그는, 다시는 홀연히 나를 떠나지 않겠구나 하고.

* * *

눈을 감은 여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가녀리고 아름다운 리샤는 마치 어린 백합 같았다. 그리고 방금 그 백합의 눈물은 그를 취하게 했다.

“곤란……한데.”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말이 새어 나왔다.

“…….”

품에 안아 든 여인의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덧그려 보던 손길이 멈칫했다. 포악하리만치 어두운 황금색 눈 깊숙이 갈무리되지 못한 갈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으나 소용없었다. 눈을 감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으므로.

고통. 그래. 미치게 만들 수준은 안 되도록 조절했지만 분명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견뎠을까.

“리샤, 당신은…… 대체…….”

아니, 견딘 정도가 아니었다. 충격으로 흐려지던 얼굴. 그러나 벅차서 숨을 못 쉬면서도, 기운이 빠져 무서웠을 것임에도, 그를 향한 두려움만은 보이지 않았었다.

“어떻게…… 그렇게, 웃는 거죠?”

이제 되었다는 듯, 정말로 괜찮다는 듯 그녀는 말갛게 웃었다. 그토록 처연하고도 황홀한 아름다움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꾸욱 쥐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삼키고 싶었다.

그는 문득 웃고 싶어졌다. 목이 말랐으며, 거세게 심장이 뛰었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여인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샤.”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듣고 싶다.

“저 같은 사람은 손에 쥔 것을 절대로 놓지 않아요.”

비록 사랑을 모른다 해도.

그래, 그는 충분히 경고를 했다. 위험하니 멀어지라. 겁도 주었다. 그러나 그대가 다가왔으니…….

“그러니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정령의 분노를 한 귀로 흘리며,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 * *

현재 리샤는 모르게 진행되는 일이 있었다. 리샤의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소문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 여기에는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가 속해 있었고, 그 모임의 장은 황태자였다.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따로 움직였다. 리샤가 유진과 카인을 밖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완벽주의자였고, 생각보다 그의 ‘누이’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으니까.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모였다.

그래. 발단은 그것이었다. 소문의 수위가 생각보다 심각했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퍼트린 상태였다.

얼핏 보면 소문의 발단은 황녀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특히나 황궁 밖의 소문들은 황녀가 태어난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소문을 낸 느낌이었다.

바삐 움직인 끝에, 이제 그 배후로 의심되는 곳까지 정리를 끝냈다. 황태자조차 기가 차 할 만큼 전국적인 규모의 큰 움직임. 그걸 할 만한 곳은 몇 군데 없었다.

그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겨 걷던 유진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황녀궁에 들렀다. 리샤가 귀가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예? 전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요?”

“……예?”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황녀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경, 함께 나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궁인이 불안한 얼굴로 묻는 말에, 그는 그 즉시 움직였다.

인공정령 젠은 그가 보기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충성심이 엿보였고, 나름대로 따로 확인도 끝낸 상태였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유진은 날듯이 걸어 그녀가 갔을 법한 곳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가 후미진 골목에 시선이 닿았다.

“…….”

찝찝했다. 설마 저런 곳으로 갔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굳이 일행을 먼저 보냈던 황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단’이라고 불렀던 수상한 인물도 떠올랐다.

유진은 이미 그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그것은 정지되어 있어서 밖으로 새지는 않고 있었지만 소드 마스터의 기감을 피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이 정도면 마법 테러다.’

다급하게 그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 발원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뚝 멈춰선 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니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먼저 닿았다.

줄곧 의문스러웠던 수상한 사내 단. 그리고…….

사내에게 폭 안겨 일부만 살짝 보이고 있는데도, 유진은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단의 품에 그의 소중한 주인이 안겨 있었다. 축 늘어진 채로.

순간 유진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황금빛 눈을 빛내는 야수가 그녀를 마치 제 것인 것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감히, 짙은 소유욕을 보이며. 유진은 분노했다.

달려들려던 순간, 사내,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휘어지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다가오지 말라고.

* * *

그날로부터 벌써 나흘이 지났다. 나는 조금 시무룩해진 채로 황녀궁 정원을 거닐었다.

다니엘이 찾아오지 않았다.

“뭐야. 왜 안 와요.”

눈물 받아 가 놓고 꽃을 주러 오지 않는 야속한 내 악마를 떠올렸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아니, 도대체가 말이야. 그, 그런, 것도 했는데!

“헉, 설마 이대로 튄 건가?”

진짜 그런 거면 가만 안 둔다.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걸 뻔뻔하게 털어 버리며 이를 갈았다.

“대체, 꽃 한 송이 들고 오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설마 내가 또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매너가 아니지.

슬슬 그 사기꾼에게 피로 물든 꽃을 받으러 가야 하나 하고 있던 차였다.

“전하를 뵈옵니다.”

이제 꽤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틀어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하게 말했다.

“후작, 요즘 자주 보는군요.”

가일 후작. 황태자의 측근이었다. 대체 어찌된 것인지, 다니엘을 기다리는 나흘 내내 나는 이 인간의 얼굴을 정말 매일같이 봐야 했다.

“오늘은 이비엔 경이 없습니다만.”

“압니다.”

이비엔 경과 일 이야기를 할 때에도.

“소피아 영애도 오늘은 만나지 못했어요.”

모른 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소피아 영애가 황녀궁으로 찾아와 별 시답잖은 이유로 내게 ‘처음 뵙겠습니다!’를 시전하며 수작-그건 정말 수작이었다.-을 걸 때에도.

“그것도 압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아니, 아무리 우리 언니 소문이 특이하다고 해도 그거 헛소문인 거 아는 사람이 말이야. 좀 심한 거 아니야?’

확 라빌로프에게 항의해 버려?

후. 아서라. 그러면 큰일 날 것이다. 나는 이 고슴도치 같은 후작이 굉장한 의심병자이며, 말을 아주 재수 없게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근 나흘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어디까지 사람들을 속이실 수 있을지 지켜봐야 제 마음이 편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황태자와 계약했던 날 당일에는 이 인간과 어쩌면 조금 친근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했었지.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그에게 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실시간으로 신경을 갉아 먹는 인간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그를 힐끔 보았다가 조금 멈칫했다. 그가 또 상처를 달고 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또. 후작, 대체 이 안전한 황궁 어디서 이렇게 다치고 오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얼굴 한쪽을 꿈틀거리며 후작이 냉랭하게 답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난 다친 사람을 눈앞에서 보고 그냥 둘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 그냥 상처도 아니고 피 뚝뚝 흘리는 상처라니! 의사에게 보이라고 해도 싫다고 하고, 내 옆에 붙어 있는 내내 상처를 저리 보이고 다닌다. 어쩌라는 거야! 미칠 노릇이었다.

“됐고, 손 내밀어요. 나도 내가 너무 신경이 쓰이고 보기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니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고요.”

“무슨 오해를 한단 말입니까?”

“혹시라도 후작을 제가 좋아한다거나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끼병 사절이요!

그러자 눈빛이 나를 뚫을 것처럼 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 으음. 너무 쏘아붙였나?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결심했다.

‘오라버니한테 말을 하자.’

소문 불식을 위한 거라면서 아리엘에게 편지 보내는 사적인 시간마저도 꼬박꼬박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하는 황태자였다. 그래서 이젠 혼자 있을 때도 가끔 오라버니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징하다 정말.

하, 그래도 나흘이나 참아 줬으면 충분했다.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어쩌면 이놈 때문에 다니엘이 못 오는 것일 수도 있……지는 아니겠구나. 눈치 볼 인간이 아니니까.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가볍게 그의 손의 상처를 처리한 뒤 몸을 돌렸다. 라빌로프에게 바로 갈 생각이었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가일 후작이 나를 따라오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는 그를 흘깃 보았다가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태자전하께 가요.”

“태자전하께 말씀입니까? 어째서죠?”

“그건 경에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

경 좀 떼어 놓으러 간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함께 가야겠군요.”

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빤히 보았다가, 피하지 않고 더 뚫어져라 마주 보는 그의 시선에 그냥 눈을 돌려 버렸다.

잘생기지 않았다면, 나흘이나 이 짜증나는 작태를 참지는 않았을 텐데. 가일 후작은 원작에서 딱히 잘생겼다는 묘사가 없었는데, 의외로 서브 남주들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거지같이 깐깐한 게 문제지만.’

청록색 머리에 눈동자.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좀 순한 표정을 지으면 충분히 지적인 미남으로 평가받을만한 외모였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그의 유일한 장점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일 후작이 말했다.

“이비엔 경에게 후에 태자 전하를 섬기게 될 거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죠.”

어차피 나 떠나면 새 황제를 섬기게 될 거란 말이었는데. 바보.

“그러나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정말로 이 인간이 뭐 하자는 걸까?

사실 내가 가만히 나흘을 견뎠던 것은 그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이 노골적인 감시가 라빌로프의 의지였을 경우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오라버니의 명령을 받고 온 것 같지가 않은걸.’

우뚝 멈춰선 채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안 되겠다.

“후작.”

나는 도도함을 가장하며 그를 나직하게 불렀다.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청록색 눈동자가 집요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설마 아까부터 날 추궁하는 건가요?”

“……몰라서 물으십니까?”

와, 이것 봐라?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즉각 튀어나오는 그의 말소리는 무언가 기쁜 것처럼 들렸다. 당연히 착각이겠지만.

“제가 황녀라는 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네요?”

다소 거친 말투에 그는 순간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알 수 없는 반응을 눈에 담으며 나는 조금 차가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날 추궁하는 것은, 공작의 사감이 섞인 행동이라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너 나 좋아하냐? 그렇게 들릴 수 있는 아주 유치한 도발을 날리자 공작의 표정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인가. 하여간 진짜 이상한 인간이다.

그는 나를 뚫어 버릴 것처럼 응시하더니, 느릿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황녀 전하.”

순간 웃을 뻔했다. 관심 있냐고 물은 걸 그렇게 질색하다니! 그래도 이 정도 말하면 더 짜증나게 굴지는 않겠지? 안도하며 내가 옅게 미소를 그렸다.

그가 아까보다 더 강렬한 눈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나는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후작, 아까 왜 오라버니께 가는지 물었죠?”

“예.”

“굉장히 궁금한 것 같으니 답을 해 주겠어요. 그 전에 하나만 묻죠.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 ‘오라버니’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가일 후작이 내 물음에 순간 움찔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역시 그렇군요.”

당당하게 악의가 어려 있던 청록색 눈동자에 당혹감이 비쳤다. 역시 허락 같은 거 받지 않은 단독 행동이었구나? 어우. 당당하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황태자 앞에서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마치 ‘역시 황태자가 시킨 거였군요.’로 알아들은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가 부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후작, 후작의 사감에 대해서는 나도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다시 걸음을 옮기며 흘낏 살펴보니 그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매우 기꺼운 마음으로 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죽기를 바라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일 테니까요. 전하를 위해서. 그렇죠?”

그의 얼굴이 미묘해지는 것을 즐거이 바라보며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못을 박았다.

“하지만 제가 지금 죽을 때는 아닌 것 같으니. 그래서 오라버니께 가서 저에 대한 감시를 다른 사람이 하게 해 주십사 청할 생각이에요.”

“지금 감시를, 직접 청하신단 말입니까?”

그가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그래요.”

사실 후작은 괘씸했지만 그거야 내 입장이었다. 내 주위의 누군가가 갑자기 180도 변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경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나라도 그럴 것이다. 나는 반쯤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후작이 미심쩍어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태자 전하의 측근에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거, 압니다, 후작.”

“……전하? 저, 잠깐.”

“더는 말하지 마세요. 후작의 충심을 오라버니가 오해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할 테니까요.”

단호하게 덧붙이자 후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황한 듯도 하고 믿을 수 없어 하는 듯도 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떤 내용에 그렇게 당황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고소했다.

“다만, 후작이 너무 표현이 강해서요. 체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면 좋겠어요.”

그 뒤로 가일 후작은 황태자궁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 입만 다물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냥 보면 지적인 미남이잖아.

속으론 또 황녀를 못 믿겠다느니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몇 마디 하고 나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가볍게 생각하며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라빌로프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리에 앉은 내게 가일 후작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하.”

다시 확인한 그의 얼굴은 다시 서늘해져 있었다. 내가 맹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후작이 입술까지 질끈 깨물며 말했다.

“부정할 수 없이 전하는 수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눈으로 전하를 지켜볼 것입니다.”

아, 네네.

말은 자기가 걸어 놓고, 그는 굳은 얼굴로 내 눈을 피했다.

나는 새삼 르페르샤 황녀 언니가 그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 존재였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말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이 아니었다. 살롱에서 들었던 뒷말들까지 생각해 보면, 언니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무시당하는 존재였던 것이 분명했다.

‘뭐, 지금은 상관없지만.’

후작이 하는 것 같은 직접적인 참견만 아니라면, 무시당하는 건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여길 뜰 것이니까.

‘오히려 무시당하면 나한테는 좋지 않겠어? 궁을 나가도 그냥 그러려니 할 거 아니야.’

그때, 후작이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네? 아, 글쎄요.”

이제 그에게는 뭐라 대꾸하기도 귀찮아졌지만 어쨌든 답은 해 주었다.

“후작이 만사를 제치고 감시할 정도로 내게 가치가 있는가 하고. 별 생각은 아니에요.”

살짝 웃으며 답하자 가일 후작이 또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옅게 붉은 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보니 또 그게 참 눈길을 앗아가기는 해서.

“입술 깨물지 마요.”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재차 말했다.

“입술, 깨물지 말라고요. 모양 나빠져요.”

서늘한 청록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혼란도 잠시, 그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재미있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생각보다 이 후작은 표정 변화가 다채로운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차에 황태자궁의 시종장이 문 밖에서 라빌로프가 왔음을 알렸다.

“누이 왔나.”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거 말고.”

설렁설렁 걸어 들어오면서 라빌로프가 무뚝뚝하게 손을 저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그에게 말했다.

“음. 그럼…… 저 왔어요, 오라버니?”

“그렇지. 착한 누이네.”

그가 무덤덤한 어조로 툭 말했다. 안쪽을 보던 시종장이 문을 닫기 전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어이없게 라빌로프를 보다가 이윽고 나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따라 들어왔던 시녀가 어느새 다과를 차려 둔 상태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한 모금 차를 들이켜기가 무섭게 라빌로프가 물었다.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나와 내 뒤에 서 있는 가일 후작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음. 설마 누이, 후작을 누이의 호위기사로 달라거나.”

“절대 아니에요.”

절대를 한 번 더 강조해 주었더니, 라빌로프는 어째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 반대입니다, 오라버니.”

라빌로프가 고개를 기울였다.

“후작을 좀 데려가 주세요.”

“……데려가 달라니?”

“나흘째, 계속 후작을 보고 있으니까요.”

“뭐?”

라빌로프가 잠시 침묵했다. 눈을 깜박깜박 빠르게 세 번 깜박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후작이 왜 거기에 있지?”

가일 후작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멀리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걱정 마요. 황태자가 너는 죽이진 않을 것이니.

나는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절 감시하고 싶으신 건 충분히 이해해요.”

“뭐라고?”

이번에 그는 뭔가 불쾌해진 것 같았다. 이크. 나는 살짝 서글픈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미심쩍겠죠. 믿을 수도 없을 거고, 정도 안 갈 거예요. 오라버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겠죠.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건데.

그런 말을 혼잣말처럼 덧붙이며 라빌로프가 준 찻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라빌로프는 여전히 살짝 화가 난 것 같은 분위기로 입을 꾹 다물고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을 붙이시는 건 조금, 가혹하신 것 아닌가요.”

“붙인 적 없…….”

“부탁드려요.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감시해 주세요.”

저 자식이 만날 노려본단 말입니다. 아주 체하겠어요!

어디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라빌로프에게서 아까의 화가 난 것 같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그림 같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감시라…….”

“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결국 결정권자는 라빌로프였다. 내가 감시를 그만둬 달라고 했다면 모를까, 사람만 바꿔 달라고 하는 이상 후작이 제 의지를 관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윽고, 라빌로프가 무섭도록 진하게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작, 나흘 동안, 그러니까, ‘내’ 누이를 ‘감시’했다고?”

또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유난히 ‘내’와 ‘감시’에 강조가 들어간 것 같은데. 라빌로프의 말에 후작이 조금 늦게 답했다.

“……예.”

“내가 그러라고 했던가? 기억이 안 나는군.”

말만 들으면 추궁하는 모양인데 말투는 느릿하고 무심했다. 나는 그제야 안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충격 어린 어조로.

“오라버니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었군요.”

후작이 다급하게 내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 알 수 없는 시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딜 보나, 후작?”

“죄송합니다.”

“아니지. 그 전에 누이.”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가 라빌로프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날 보면서 잠시 말이 없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누이를 감시하라고 한 적이 없어. 그걸 원하지도 않고.”

“아…….”

나는 멀거니 라빌로프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에 아마도 후작이…….”

또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뭐, 뭐지?

“착각을 한 모양이야. 내가 사과하지, 누이.”

“아, 아니에요. 그……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일부러 시무룩하게 답했다.

“불편했겠군. 대체 얼마나 빈번하게 찾아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어째 밖으로 돈다 싶더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었어.”

말이 어째, 다정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시큰둥해서 나는 잠시 인지 부조화를 일으킬 뻔했다. 하지만 후작의 표정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이……. 아이고, 고소해라.

“괜찮아요.”

나는 기죽은 어조로 애써 미소 지으며 라빌로프에게 고개를 저었다. 힐끔 보니 후작은 뭔가 꿈에서 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흑역사를 마주한 인간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라빌로프가 말했다.

“누이는 감시 같은 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리고 그는 소름끼치도록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 편지만 생각하도록 해.”

아리엘과 주고받는 편지. 내가 전생의 기억까지 바득바득 끌어 모으며 조언해 주고 있는 그 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살짝 진짜 오라버니처럼 느껴질 뻔했다. 내가 미쳤어! 나는 짜게 식어 버렸다. 그래. 기분이 괜찮은 것을 보니 아리엘한테 답장이 왔구나. 오늘 왜 이렇게 착하게 굴어 주나 했다.

그래도 나는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하고, 부디 가일 후작이 다시는 내게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하게 빌며 몸을 돌렸다.

홀로 돌아오는 길은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체력이 되는 한 자꾸 움직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요즘 산책도 틈틈이 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다니엘 말대로 기력이 평소보다 넘치기도 했고 말이다. 다니다가 꽃이 보이면 멈춰 서서 괜히 향을 맡고 다니엘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가일 후작이랑 자꾸 궁을 다니게 되었지만.’

뭐 그쪽은 지금 처리했으니, 이제 귀찮은 일은 덜었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내 산책에는 가일 후작만 꼬였던 것이 아니었다.

“꺅!”

어디선가 들린 돌고래 비명을 감지한 나는 상념에 빠질 새도 없이 급히 걸음을 옮겼다. 좀 느긋하게 바람 좀 쐬려고 했더니만 어김없이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잔걸음은 무의미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금세 가시거리에 나타난 얼굴에 나는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달덩이 같은 예쁜 얼굴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 소피아 마르시엔이었다. 그녀는 놀라운 빠르기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닿기도 전에 아코, 하고 엉덩방아를 찧더니,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발딱 일어나며 내게 수줍게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전하. 오랜만에 뵙네요!”

우리는 분명히 어제도 보았다. 난 이 영애의 기행에 반쯤 포기 상태였던지라 일단 웃으며 응수해 주었다.

“반가워요, 영애.”

“소피라고 불러 주시래도요.”

“음…….”

“아참! 제가 경솔했네요.”

비밀을 공유했다는 흥분이 감도는 얼굴로 청초한 소피아가 내게 속살거렸다.

“안 친해 보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전하.”

“…….”

그걸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사랑스럽게 발꿈치를 들고서 내 귀에 속삭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응? 으응……?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녀는 완전체 미인이었다. 여러 의미로. 전에 한 번 날카롭게 대꾸했더니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이와 같았다.

“하지만, 뵙고 싶었는걸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고…….”

심지어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을 때는 나는 진심으로 내가 역적이라도 된 것 같은 양심통을 느끼고 말았다.

“그렇군요. 알았으니 울지 마요.”

그렇게 깨달았다.

미인의 눈물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이토록 강력한 것이구나, 하고.

‘가일 후작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그건 아마도 그가 내 감시에 너무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전하. 전하.”

응석을 부리듯이, 그러나 수줍게 나를 불러 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왜요?”

“헤헤.”

소피아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 당장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말해 봐요.”

“그 후작님께선 오늘은 안 보이시네요?”

이것 봐라. 나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이거, 그동안 티는 안 냈지만 가일 후작에게 반한 거 아닐까? 그의 행방을 묻다니. 조금 흥미로워진 나는 이 무해하면서도 해로운 영애에게 답해 주었다.

“글쎄요. 아마 앞으로도 나와 함께 그 후작을 마주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쩌죠?”

“정말이요?”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소피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제 전하랑 저 둘만!”

“…….”

이게 아닌데. 몹시 의문스러운 반응이었다.

내가 그녀를 기이하게 보거나 말거나,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하며 조잘조잘 말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 사실 밖에 굉장히 크게 소문이 퍼지고 있대요. 제가 유모에게 다 물어봤어요.”

“……어떤 소문?”

“그 리스에 대한 소문이요.”

‘리스’를 언급할 때 아주 작게 소리를 낸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내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에 나는 그저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조금 우울한 듯 삐죽이다가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 베아트리스 린데아가 정말로 검은 머리였다지 뭐예요?”

“아, 그렇군요.”

“그녀는 사실 나비의 여신이 되었는데, 그때의 ‘리스’가 바로 그녀의 현신일 거라는 거예요!”

하하. 맙소사. 이쯤 되자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애.”

“네.”

“혹시 수도에 이야깃거리가 턱없이 부족한 걸까요?”

소피아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서 말했다.

“글쎄요.”

“대체 ‘리스’가 뭐라고 지금까지 소문이 돌아요?”

“그야,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니까요.”

두 손을 모아 제 가슴을 꾸욱 누르며 그녀가 말했다. 황홀하고도 몽롱한 어조로.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 * *

소피아는 하도 들떠서 나를 황녀궁까지 모셔드리겠다고 씩씩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녀는 황녀궁까지 동행하고 자기 갈 길을 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 영애, 아무리 봐도 아리엘보다 완전체야.’

쟤가 아리엘이랑 맞붙는 거 보고 싶어. 주위 사람들이 참 고생스러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몇 달 후 떠나기 전까지는 저 영애와 이 정도 거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에휴. 진짜 호감 가져 주길 바라는 사람은 소식이 없는데.’

다니엘을 떠올리니 또 한숨이 나왔다.

“후우…….”

침대 위에 미끄러지듯 몸을 누였다. 그리고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그에게 안겨 그를 바라보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으. 아우.”

밀려오는 묘한 민망함에 이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내 아랫입술에 내 손끝이 닿아 있었다.

“에휴…… 그러면 뭐해. 코빼기도 안 보이는걸.”

시무룩하게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가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

‘좋아. 내일은 진짜 다니엘을 찾아 나서야지.’

정신이 점점 멀어졌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

“……음?”

눈을 슬쩍 떴다. 코를 스치는 향은 금세 사라졌지만 그건 분명.

“꽃향기?”

근 나흘간 수시로 산책을 하면서 꽃이라면 무조건 다가가 향을 맡았었다. 한 송이씩 보면서 꽃말을 알아보기도 했고, 유난히 마음에 드는 꽃은 따로 이름을 기억해 정리해 두기도 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짙고 강렬하게 스친 꽃향기의 정체를.

“카라 꽃.”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황녀궁 정원에 가득 핀 꽃이라 가장 자주 맡는 향이기도 해서.

나는 혹시나 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책상으로 홀린 듯 다가갔다. 이윽고 오래된 양피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심호흡을 한 뒤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독특한 감촉의 종이였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해도.>

내가 그것을 입 모양으로 따라 읽기 시작하자 유려하게 휘갈기는 글씨가 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비틀린 자의 축복은 차라리 저주와도 같을지니. 멈춰 버린 밤에 속한 자들이여, 이제 이 위에 인을 더하라.>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이 끝나고, 잠시 멈추었던 글씨는 이윽고 느릿하게 어떤 이름을 그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같은 글씨였으나 읽을 수 없는 글씨였다. 그래도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니엘.”

아주 긴 다니엘의 본명 옆에 황금빛 원이 쿵 떠올랐다. 그리고 또 쿵 하고 그것이 검게 물들었다.

내 이름은, 그러니까, 이 몸의 이름은 금세 쓰였다. 그리고 또 쿵, 하고 황금빛 원이 떠올랐다.

“…….”

르페르샤 람 트리엘.

잠시 그 이름을 물끄러미 보며 떨림을 가라앉힌 나는 망설임 없이 손끝을 펜촉으로 찔렀다. 왜 그랬을까. 왜 굳이 나는 피를 낸 것인지. 그러나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몽글거리는 피가 뚝 하고 원 중앙으로 떨어졌다.

“이런.”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선 채로 ‘다니엘’이 말했다.

“피의 계약이라니요.”

나는 느릿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왔어요?”

“지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이 답했다. 나는 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걸 참기도 벅찼다. 그는 곤란한 기색으로 웃더니 손끝으로 계약서를 톡 쳤다.

“어쩔 수 없나?”

내리깐 눈을 하고서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다니엘.”

왜 이제 왔어요? 철없게도 방향 없는 야속함이 치밀어 올랐다.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서운한 내 감정이 그에게 전해졌는지, 나를 담고 있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럴 리가요, 리샤.”

한동안 나를 눈에 담고 있던 다니엘이 말했다.

“계약서를 준비해오느라, 미안해요.”

“…….”

나른하게 읊조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런.”

툭 떨어지는 눈물에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가만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울면서 우는 표정이 꽤나 우스웠을 것이다. 시종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순간 풀린 것을 나는 똑똑히 목도했다.

됐다.

“리샤, 왜 울죠?”

“당신이…….”

됐고, 얼른 눈물 가져가요! 라고 하려다 말았다.

“당신이 꽃을, 아직 주지 않아서.”

둘러대는 것처럼 몹시 안도한 마음을 아낌없이 표했다. 그의 시선이 뜨거운 재처럼 짙어졌다. 오늘은 잿빛이다. 아까 맡았던 꽃의 향기가 다시 코끝을 스쳤다.

“그럼 왜, 웃고 있죠?”

그가 가만히 내 눈가와 볼에 서늘한 손을 대며 물었다. 나는 그 손길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눈물을 억누르며 그에게 답했다.

“그냥, 오늘 날이…… 좋은 것 같아서요.”

그의 손길에 내 눈물이 말라 있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물기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이어진 단정하고 매혹적인 미소 사이로 향기가 가까이 스쳤다.

나는 이번만큼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내 귀에 그가 살며시 꽂아 준 것은 꽃이었다. 카라 꽃 한 송이. 꽃에는 상냥한 향이 짙게도 배어 있었다.

“내 계약자는 생각보다 더 눈물이 많은 모양이네요.”

어딘가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은근한 눈길로 그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나는 눈물이 많지 않아요.”

“아닌 것 같은데.”

다니엘이 가볍게 웃었다. 그가 준 꽃향기에 마음이 조금 안온해졌다. 나는 조금 침착해진 채로 그에게 말했다.

“사실은 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눈물은 너무 많은 걸 희석시키거든요.”

“…….”

내 말에 그가 조금 이상해진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요.”

그가 조금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죠.”

이어지는 침묵은 어딘가 서글퍼서, 나는 먼저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 말?”

“피의 계약이라는 거.”

그가 멈칫했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굴려 계약서를 보더니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어 스륵 말아 품속에 넣었다.

“리샤가 날 위해 억지로 자주 울 필요는 없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음?”

의아하게 그를 보자, 그가 설핏 웃으며 나를 끌었다. 그리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히고서 창에 기대 선 채 말했다.

“더 많은 걸 주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가 준 꽃을 손에 쥐고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꽃 말고도 더 들어줘야 하게 되었다는 거죠. 억울해서 어쩌죠?”

내가 조금 안심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불쑥 하얀 손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턱을 가볍게 잡고서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대신 리샤, 당신은 그 눈물에 담긴 감정도 내게 주게 될 거예요.”

어딘가 나른하고도 상냥한 어조였다.

“그렇군요.”

“…….”

내 차분한 답에 그의 무표정하던 낯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그것을 샅샅이 눈에 담았다.

“내가 두렵지 않아요?”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내게 꽃을 건넨 사내는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다니엘은 늘 알 수 없게 굴어요.”

무심코 나온 내 말에 그가 내 눈가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매혹적으로 잿빛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죠?”

“무슨, 내가 당신에게 알 수 없게 굴었다고요?”

아주 직설적으로 부딪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자 다니엘이 나직하게 답했다.

“내가 좋다고 했잖아요.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네.”

“두렵지도 않고, 함께 있고 싶다고 했고.”

“그랬죠.”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만 가득하니.”

그가 무시무시하게 퇴폐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어찌해야 할까요.”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리 말해도 모르는 것 같은 그에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흐음?”

“꽃을 보면 당신을 생각했죠.”

“리샤, 그런 것치고는 동행이 늘 있던데요.”

조금 놀리듯 말을 잇던 나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 보고 있었어요?”

“가끔요.”

나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네에…….”

미묘한 눈빛으로 그가 응수했다.

“다니엘.”

“네?”

“사실 항상 같이 보고 싶었던 이가 있기는 했어요.”

“아, 그래요?”

그가 조금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냈다.

“누구죠?”

“다니엘이라고 있어요.”

다니엘이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나가서 바람 쐬어요. 예쁜 곳들 다 보아 뒀거든요.”

그래 봤자 이 주변뿐이지만.

다니엘은 어딘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알아요? 당신은 나를 마치 사람처럼 대해요.”

“음? 시간 안 돼요?”

모른 척 묻자 그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직하게 답했다.

“되죠.”

* * *

그와 가고 싶었던 곳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꽃도 나무도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지만 딱 하나 특별한 것이 있었다.

“다니엘, 이것 봐요.”

“연못이군요.”

한구석에 아주 조그맣지만 맑은 연못이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단숨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연못 앞으로 그를 이끌었다.

“예쁘죠?”

쪼그리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도 내 옆에 편히 앉았다.

“꽃을 보면서는 날 생각했다더니.”

“네?”

갑자기 들려온 말에 그를 돌아보자 그가 비스듬한 미소를 걸치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걸 볼 때는 누굴 생각했어요?”

“으음……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죠.”

아하, 하고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장 귀한 것은 그대 몫이군.”

“내 몫은 아니죠.”

나는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리고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는 연못에 손을 살짝 담그며 되뇌었다.

“내 몫은 아니야…….”

이 궁에는 내 것은 별로 없으니까.

“혹시 울 생각이라면 기꺼이 곁에 있어 드리죠.”

“안타깝지만 전혀 아니에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물을 탐하던 혼혈 정령은 내 말에 그저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다니엘. 내가 당신 없는 데서 울면 어떻게 그 눈물을 받아 가요?”

“혼자 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계약을 맺었으니.”

“아하.”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참 낭만적이네요.”

“……낭만?”

그는 순간 굉장히 이상한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내가 슬플 때 당신이 옆에 있어 주겠다는 거잖아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거, 얼이 빠진 느낌인데. 그의 표정이 괴상하게 무너지는 것을 구경하며 나는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바람에 날린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나는 순간 숨을 참았다가 의식적으로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요?”

“음?”

“당신 계약자, 꼭 동화에 나오는 공주님들 같지 않아요?”

그가 그 심연 같은 눈에 나를 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특이하게 기억되도록 움직이는 거 말이에요. 그네들은 그게 천성이고, 나는 노력해야 한다는 게 다르지만.”

“나에게 특이하게 기억되고 싶어요?”

잿빛 허무를 품은 눈이 슬쩍 휘어졌다.

“그렇다면 실컷 보람을 느껴요, 리샤. 당신은 성공했으니.”

“아하하, 고마워요.”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표정이었다.

“있잖아요. 단.”

내가 툭 말했다.

“너무 절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테니까요.”

지금 나는 언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최악의 경우를. 내가 이 몸으로 사는 대신 언니가 사라지는 거라면, 뭔가 대책을 세우고 싶었다. 언니한테만 아무것도 못 해줬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정말 최악의 경우, 나는 우리 언니에게 행복하고 안전한 인생을 선물하고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묘했다.

다니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슨 의미예요?”

다른 몸에 들어간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 따지고 보면 난 유령인 셈이니까. 아직은 생각할 필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냥요.”

그래도 그에게는 미리 말해두고 싶었다. 무언가, 안전선 같은 걸 그어두고 싶은 기분.

“지금에 집중하자는 거죠.”

그의 다정하게 무심하던 표정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

“그저 차곡차곡 기억하자는 거예요. 지금처럼 같이 있는 순간들을.”

“당신은 항상 곧 떠날 것처럼 굴어요.”

내 말을 그저 듣고만 있던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검은색 같았다. 수많은 것들을 뭉쳐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의 눈을 하고서 그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러나 좋아요. 그건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으니까요.”

쌓아가고, 추억이 된다. 그러다 잊히겠지.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나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말했다.

“단은 참 착한 것 같아요.”

그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인데. 음, 제정신이에요?”

나는 그를 장난스럽게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난 멀쩡해요.”

“퍽이나.”

나는 그를 장난스럽게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따라왔다. 멈췄다. 그도 멈춘다. 그걸 한 번 더 반복한 뒤, 그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묘하게 웃더니, 다가와 나를 살짝 안고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왜요?”

조금 부담스러워서 눈을 굴리며 묻자 그가 짙게 미소 지었다. 순간적으로 확 홀리게 하는 미소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흐음.”

그가 슬쩍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천천히 나를 품에서 풀어 주었다.

“알 수가 없어서요.”

“또 그러네. 저만큼 알기 쉬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묘한 분위기를 떨쳐내려 일부러 가볍게 말하자 그가 나른한 어조로 노래하듯 말했다.

“친구라. 당신은 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죠.”

“……네. 그게 왜요? 어, 무르는 건 안돼요.”

“하아.”

내 단호한 대꾸에 고개를 저으며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꽃들이 만발한 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찾았다. 다니엘. 뭐든 걱정 말고, 일단 고개 조금만 숙여 봐요.”

그는 내가 등 뒤에 감춘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조금 내려온 그의 머리 위에 어제 만들어 두었던 화관을 씌워 주었다. 이윽고 그가 내리깔았던 눈을 바로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 자리한 아름다운 남자를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화관은 리샤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지금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군요?”

“알죠.”

답하는 목소리는 지극히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담담했다. 내가 입을 살짝 벌리자 그가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알고말고요. 지금 당신 심장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요.”

“헉. 그게 들려요?”

식겁하며 나도 모르게 심장 부근에 두 손을 얹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린 것 같은데. 그에게 툴툴대며 말했다.

“전 화관은 필요 없어요. 당신이 주기로 한 꽃 한 송이면 되는걸요. 그러니 그 화관은 가져가요.”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 싱그러운 것이 다행이었다. 소피아가 가르쳐 줘서 어제 만들어 뒀던 것인데, 만들어도 줄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는 말없이 웃으며 나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눈에 저만치 서서 우리를 보고 있는 그들이 들어왔다.

“오라버니?”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던 라빌로프가 특유의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가일 후작까지. 둘이 바람 쐬는 거예요?”

다가가며 묻자 가일 후작이 움찔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덩달아 당황해 멈춰 서자, 라빌로프가 나와 가일 후작을 번갈아보며 살짝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내 뒤에 다가온 다니엘이 자연스럽게 나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인사를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로암 남작.”

“예, 전하.”

나는 순간 다니엘의 회색 눈동자가 전의 무도회 때처럼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저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

“누이와는 어떻게……?”

나는 어딘가 상태가 이상한 가일 후작을 보다가 둘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 초대했거든요.”

“누이가? 언제?”

“전에 한번 오라고 했었는데 오늘 찾아왔네요. 그보다 오라버니.”

“음?”

“후작이…….”

“아.”

가일 후작은 이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도 할 수 없게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서.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혹시…… 제게 다가오지 말라거나,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건 아니죠?”

그냥 감시만 저 인간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을 뿐인데 설마……. 그러나 라빌로프는 답했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누이가 원치 않는다면 철회하지. 그러니 편지만 생각해.”

“…….”

그놈의 편지. 이히히히.

나는 내 뒤에서 후작 쪽을 무표정하게 물끄러미 보고 있는 다니엘을 힐끔 보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음, 이런 식은 어색하니까, 철회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가능하다면요. 그냥, 과하게 가까이 있게 되는 걸 조심하자는 의미였거든요.”

라빌로프는 내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네?”

“누이, 너무 물러. 하지만 누이가 원한다면…….”

어딘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리샤.”

나는 라빌로프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다니엘이 부르는 소리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귀에 누군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치지 않았어요?”

“아, 조금요.”

다니엘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라빌로프에게 말했다.

“전하께선 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나도 될는지요.”

나는 소름 돋게 웃고 있던 라빌로프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역시, 다니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라빌로프는 나를 잠시 살피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차라도 같이 마시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어서 처소로 돌아가, 누이. 식은땀까지 흐르는데.”

그리고 무어라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내 몸이 들렸다. 나는 저 멀리 있던 가일 후작이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정확히는 다니엘에게 안긴 나를 살벌하게 응시하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쯧.”

귓가에서 다니엘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안아 들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주 잠시 후, 그는 나를 내 방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가는 거예요?”

침대에 고이 눕혀진 채로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머리맡에 기대 선 채로 내게 답했다.

“리샤가 잠이 들면요.”

나는 눈을 감고 슬쩍 웃었다.

“너무 시간이 일러서 잠은 안 오는데.”

“그럼 대화를 할까요?”

“바쁘지 않아요?”

“그다지.”

“그렇구나.”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더니 매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봐요?”

“방금 든 생각인데요, 단순히 리샤의 비위가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요.”

“그것 참 무례한 말이네요. 비위라니.”

“중요한 건 리샤가 진심으로 아까워지기 시작했다는 거죠.”

뭔 소리지? 나는 그냥 대꾸하지 않고 그를 멀뚱히 보기만 했다.

“……과하게 가까이 있었단 말이지.”

“단?”

그는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끝으로 홀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조금 후 내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뭐예요?”

의아해서 그에게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돌멩이요.”

“네? 돌멩이요?”

“말라 가는 호수에 던지는 돌멩이죠.”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하네요.”

그가 조금 서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잦아들더니 다니엘이 어딘가 흐려진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담담하게 마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어쨌든 선물이라니 고마워요.”

그러자 그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 보아서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하고 말았다.

“어, 음…… 나도 열심히 울어 볼게요. 당신이 많이 먹을 수 있게.”

그러자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울어 본다니.”

어지간히 웃겼는지 그렇게 한참을 웃은 그가 다가와 내 눈을 감겨 주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은 다시 잿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일 밤에 봐요.”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씻자마자 책상 위에 그가 준 것을 올려놓았다. 작은 주머니였는데, 안에서 나온 것은 책이었다.

“책?”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라 가만히 노려보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심하고, 손끝으로 책을 넘겨보았다. 제목이 눈에 띄었다.

<영혼의 신비>

“…….”

조금 오글거리는 감각이 잠시 휘몰아쳤지만, 나는 쉬이 그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빙의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시간을 확인했다. 이비엔 경이 오기로 한 때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시 복잡한 심정으로 책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이내 결심하고 책장을 넘겼다.

“7장. 영혼의 질병과 변화에 관하여?”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나는 책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영혼과 질병이라니. 지금의 내게는 어느 하나 무겁지 않을 수 없는 주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문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책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찢어진 부분도 있었고, 최근에 수정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이 한 가지 질병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라파엘리스. 이 몸이 걸린 병에 대한 것 말이다. 그것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나는 매우 흥미롭게 모든 내용을 읽었다.

‘그러니까, 사람의 악의가 만든 병이라는 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방에 틀어박혀서 흔들의자에 앉아 흐르는 구름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날 밤 다니엘을 마주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내가 당황하며 눈물을 감추기도 전에 그의 손끝에 이어 입술이 닿았다. 숨죽인 시간이 흐르고, 내게서 살짝 멀어진 그가 내 턱을 가볍게 쥐고서 조금 혼란스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어째서……?”

이어지지 못한 말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눈물에 담긴 감정을 함께 먹는다고 했으니까. 당신이 삼킨 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까라면 모를까. 지금만큼은 나도 알 수 없었다.

“……기뻐하고 있군요.”

사실 그 책은, 결국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뻤나 보다.

‘어차피 그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기도 했고.’

나는 가까이 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알려준 게 기뻐서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전혀 만날 수 없는 언니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뻤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새카만 밤의 빛깔을 머금은 눈동자가 차츰 묵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사람이 이 정보를 알려준 건 아마도 또 거리를 두려는 수작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금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말했다.

“다니엘, 나는 당신이 참 좋아요.”

그와 있으면 즐거웠고, 진심으로 웃었고, 때때로 황홀했으므로.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대체 왜 저렇게까지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직한 어조에 나는 기껍게 웃으며 답했다.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

“그저 좋을 뿐이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입꼬리를 살며시 말아 올렸다. 나는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매혹적인 미소만이 자리한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마치 진짜 악마처럼, 그는 유혹적으로, 그리고 어딘가 악의적으로 내게 다시 속삭였다.

“절망하지 않았어요?”

오늘 그의 눈은 밤하늘을 닮았다. 공허하고도, 서늘하고, 동시에 따스하다. 가라앉은 눈은 그 태도와 달리 한 점의 악의도 품고 있지 않았다. 내가 답이 없자, 내 턱을 살며시 놓으며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감추듯이.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 책. 근래에 누군가 수정하거나 덧댄 것 같았던 부분들. 내게 준 사람은 그였다. 책에 손을 댈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는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가 하는 다소 냉랭한 말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것이 말 그대로, 내가 병으로 죽더라도 내버려 둔다는 의미라 해도 상관없었지만 만약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거라면, 더더욱 괜찮았던 것이다.

나는 문득 웃고 싶어졌다. 이 사람이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저 웃는 나를 보고 그의 미소가 일순 굳어졌다. 다시금 여유를 찾으며 그가 매끄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혹시 충격을 너무 크게 받은 건가요? 아니면…….”

“응. 괜찮아요.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요?”

“중요한 건 당신이죠.”

나는 가만히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차갑고 우아한 손끝이 내 하얗고 마른 두 손에 싸여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 책, 보게 해 줘서 고마워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어서 개운해졌어요.”

가만가만히,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진심을 전했다.

“어째서요?”

그는 어딘가 형형한 눈을 하고 물었다.

“살고 싶지 않아요? 인간만큼 생의 욕구가 강렬한 존재는 없어요.”

그 지독한 매혹적인 빛깔에 숨을 멈추었다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는 거 말이에요. 꼭 제가 당신을 미워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순간 그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꾸 도망치지 마요, 다니엘. 시간이 다 지나면, 그 후엔 절 잊으면 되요.”

그에게 내가 원수 집안 딸이기도 하니까. 인공정령을 계기로 정이 들었을지언정 평생 잡음 없이 어울릴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마 그가 이러는 것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 당신이 좋은 거니까.”

으레 나오던 ‘이상한 여자’라는 말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니엘에게 안겨 있다가 손을 꼬물거리던 나는 끙끙대며 두 손을 빼서 그를 마주 안았다. 끙끙대는 동안에도 힘을 풀지 않고 있던 그는 내가 그를 마주 안고서 나도 모르게 휴, 소리를 내자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평소보다 어쩐지 김이 빠진 느낌이었지만, 달가운 소리였다.

“있잖아요, 다니엘.”

“응.”

돌아오는 목소리는 아까의 악마적 모습과 달리 잔잔했다.

“나중에 한…… 한 달 뒤에, 같이 여행 가지 않을래요?”

그러나 내가 그 말을 꺼낸 즉시 젠이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무시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만류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숨죽여 웃더니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당신의 파수꾼이 결사 반대를 하는군요.”

-감히! 염치없는 것 같으니!

얼마나 다급했는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리만으로 젠이 외쳤다. 곧이어 쉬아악 하고 나타난 젠이 날카롭게 다니엘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조심을 좀 하래도!

다니엘은 말없이 미소를 그리며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무슨 속셈으로 주인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족속들이야.

“젠?”

점점 과격해지는 언사에 젠을 말리려고 하자, 다니엘이 조금 재미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해요.”

-더군다나 저들은 감정을 먹으면서 감정을 모르지. 정령 혼혈이란 그런 것이야. 아무리 인간 사이에 오래 있었다 해도 말이야.

“역시 잘 아는군요. 하나 왕에서 짐승이 된 자보다야 낫지 않나요?”

-네놈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이쯤 되니 젠의 정체가 더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저기서 우아하게 박수를 쳐 주고 있는 다니엘과의 관계도. 나는 가만히 둘을 보다가 슬금슬금 밀려오는 졸음을 하품으로 쫓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둘 다 난 좋으니까.”

“…….”

-…….

하품의 끝에 웃음이 맺혔다. 똑같이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날 보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럼 어쨌든 한 달 뒤에, 내 사정이 가능해진다면 둘 다 같이 여행 가는 거예요. 알았죠?”

원작 시작 전에 요양을 떠나기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 일단 요양소에 엠마랑 유진 데려다놓고. 그 다음엔 기연 찾으러 저 둘이랑 여행을 떠나야지!

배시시 웃으며 답을 구하자, 둘은 묘하게 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저놈과 단둘이 둘 수는 없으니까.

“저런. 좁은 곳에 오래 있다 보니 뒤끝이 길어진 건가요.”

-누가 뒤끝이 길다는 것이지.

“누구겠어요.”

“어휴.”

정말로 눈이 절로 감길 지경이 되어서, 나는 그냥 벌러덩 누워 버렸다. 둘은 알아서 하라지.

내가 눕자마자 다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조금 후 슬쩍 실눈을 뜨자 머리맡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기장으로 돌아간 젠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냉한 손이 내 눈꺼풀 위를 살며시 덮었다.

“……시원하다.”

감기는 눈꺼풀에 닿은 손길이 기분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때로는, 진정으로 영원하기를 바라게 되어서.”

몽롱한 중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고 올게요.”

그리고 찰나 같은 밤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사라지고 이름 모를 붉은 꽃 한 송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어제 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비엔 경.”

“아니, 아닙니다! 어찌 사과를 하십니까.”

황녀 언니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 찾아가는 중이었다. 보지는 못해도. 그렇게 피를 토하느라 이비엔과의 약속을 미룬 어느 날이었다.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바쁠 때 일정이 꼬이면 얼마나 답답할지 아는걸요. 미안했어요.”

다음 날 오전에 본 이비엔 경은 내 사과에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괜찮다고 사과를 받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것을요.”

나는 방긋 웃고서 곧바로 그녀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녀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정보들이에요. 나흘 치라 양이 제법 되어요.”

“아!”

물론 다니엘이 준 책은 빼둔 터였다. 이비엔 경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외쳤다.

“그 정보들 관련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나누고, 오늘은 어떤 걸 이야기할까요?”

“오늘은…….”

이번이 세 번째 회의였다. 우리의 회의는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그 계약 자리에서 이비엔 경은 일 전선에 뛰어들어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그녀가 고민하는 것이라거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것들에 내가 원작을 근거로 의견을 더하는 것이 우리의 회의였다.

“이비엔 경, 그 지방은 쌀보다는 약초가 더 귀할 거예요.”

“예? 하지만 이 지방은 늘 쌀을 공급하는 곳이 중심을 맡아 왔습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지금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는 지방은 쌀을 쥔 사람들이 승리하는 곳이었다. 척박한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달라질 것이다.

“맞아요. 그랬죠.”

원작 초반부에 나올 사건이 있었다. 아마사. 오래 묵은 짐승들의 땅에서 벌어진 일.

“하지만 곧 그 지방에 약초가 마를 거거든요. 그리고 시기적으로 전염병이 돌기 좋은 계절과 겹칠 가능성이 높아요.”

이비엔 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나는 적당한 근거도 찾아 두었다.

“그 지방의 약초는 점점 마르고 있어요. 이걸 봐요.”

헤레이스가 전달해 준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지 중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정보지를 보고 정리한 통계표를 건네자, 이비엔 경이 빙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원작을 근거로 이렇게 의견 제시를 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이었다.

확인을 마친 그녀가 감탄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그 부담스러운 감정을 말로 꺼내기 전에, 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그곳이 생산지인 약초들이 종류별로 전부 다 줄고 있죠?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염병이 자주 돌았던 계절이고요.”

그리고 통계표와는 별개로 이번에 크게 전염병이 돌 예정이었다. 원작을 보면 전염병이 짧고 굵게 대륙을 강타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마법 테러리스트들이 마법 실험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다만 이것은 내가 미리 알고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니 언급하지 않았다.

“쌀 쪽에 손을 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쪽은 이미 오랫동안 뿌리내린 경쟁자가 있잖아요. 이번 해에는 약초 쪽으로 힘을 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이비엔 경은 조금 고심하는 것 같았다.

“시원찮으면 내년에 쌀을 시작해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회의를 할 때만큼은 그녀의 의견이 우선이라고 주지시켰다. 내 의견이 강요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 정도만 말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비엔 경은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해 보겠어요. 전하, 그런데 혹시 꼭 이 약초는 독점을 해야 한다고 여기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질문에는 깜짝 놀랐다. 꼭 내 속을 읽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날 보며 조금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있기는 한데요.”

“부디 말씀해 주세요, 전하.”

“으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리스티아요.”

리스티아는 주로 꽃을 감기약으로 쓰는 식물이지만 아주 가끔 그 줄기의 즙을 비상시의 해독제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리스티아의 줄기 즙과 뿌리의 가루를 잘 섞으면 마력 안정제가 된다는 것.

‘나도 원작 덕에 알게 된 거지만.’

여름에 아마사 지방의 전염병 때문에 난리가 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정보 길드장인 헤레이스는 도무지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는 황태자에게 리스티아의 저 특징을 알려 주고는 원하는 무언가를 받아 간다.

“특히 줄기와 뿌리를 독점해야 해요.”

이비엔 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줄기와 뿌리를요?”

“그래요.”

나는 조금 긴장하며 입술을 축였다. 그 효능을 언급해야 납득을 할 테니까. 리스티아의 마력 안정제로서의 효능은 아주 고명한 의사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마법사이자 의사인 이들이나 알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연히 어떤 의사에게 들었다고 하면 지나가겠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비엔 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티아의 줄기와 뿌리.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전하.”

씩씩하게 답하며 신이 난 기색으로 웃는 이비엔 경을 보고 나는 얼이 빠졌다.

“안 물어봐요?”

“예?”

“어디에 쓰는 건지, 왜 굳이 줄기와 뿌리인지 같은 것들이요.”

변명이랑 다 생각하고 설명하려고 준비했는데. 그러자 이비엔 경이 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게슴츠레하게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첫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우리 궁 시녀들과도 허물없이 친해진 것 같던데, 어째 조금 닮아 가는 것 같았다. 배시시 웃는 모양이 리니를 닮아 능청스러웠다.

“진짜 이상한데.”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그저, 천재는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열렬한 나의 팬을 밖으로 쫓아냈다.

* * *

사모하는 황녀님에게 쫓겨난 이비엔은 진중한 눈빛으로 황녀의 방 쪽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셔.’

리스티아의 줄기 즙과 뿌리가루의 효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비엔도 힘든 시절에 인생 경험을 한답시고 저잣거리를 탐색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귀중한 정보였다.

그러나 황녀는 알고 있었다. 평생 궁에서만 사셨다는 분이.

‘게다가 그 효능이 필요한 일이라면…….’

듣는 순간 알았다. 아무래도 달리 헤아리시는 것이 있구나, 하고.

‘마력 안정제가 필요한 전염병.’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은 한 곳으로 향했다. 먼 옛날의 마도 제국이 부패해서 와해된 뒤, 그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마법 테러리스트들이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들은 온 대륙의 적이었지만 쉽사리 뿌리 뽑을 수 없는 강력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나마 소수만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금지된 실험을 하는 이들도 사실 그들뿐이었다. 그리고 인위적인 전염병이라면, 그들의 금지된 실험 외에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저분은 대륙적인 혜안을 지니고 계셔.’

황녀 전하는 그녀에게 주는 모든 정보를 먼저 접할 뿐 아니라 이비엔 이상으로 그것들에 감춰진 대륙의 정세를 읽는 것이 분명했다.

‘언뜻 들으면 다소 허무맹랑할 수 있는 의견이라도, 황녀 전하의 의견을 들어서 손해를 본 적이 없었어.’

앞서 두 번의 만남으로 나눈 의견들은 겨우 나흘 만에 엄청난 결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비엔이 신음하듯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천재…….”

그래, 저분은 천재시다. 이비엔이 봐 온 그 어떤 사람도 황녀만큼 비범한 자는 없었다.

‘어떻게 저런 분에 대해 그런 소문이 돌고 그런 하찮은 취급을 받으시는 거지?’

이비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소문과 달리 영민하고 따스하고 공명정대한 분인 줄로만 알았다. 황녀가 황태자에게 했던 행동에 대해 듣고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었다. 더불어 그녀는 이제 그녀의 은인이었다. 그러니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자고 여겼다. 이비엔은 그 각오로, 흠잡으려는 황태자 지지자들 몇이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그때의 희열은 정말, 잊을 수 없었지.’

그 첫 회의에서 이비엔은 황녀에 대한 모든 판단을 뒤집어 버렸다.

그래, 황녀는 따스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그것은 맞지만, 그녀가 헤아린 것 이상으로 따스하고 다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상상도 못한 수준으로 지혜롭고, 유능했으며, 겸손했다. 모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안다는 것조차 낮추며 지혜를 나눠 주는 데에 한 점의 거드름도 없었다. 그 어마어마한 혜안은 직접 실행해 보며 느꼈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야.’

그런데 겨우 희대의 악녀의 딸이었단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세간의 그 무지한 평가질들이란…….

‘갑갑하다.’

이비엔은 굳은 얼굴로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전에 보았던 인상 좋은 영애, 소피아 백작 영애가 떠오른 것이다. 백작 영애는 근래 떠오르는 별 같은 이였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청순함,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매력. 똑 부러지는 성품과 말간 웃음 같은 것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기의 중심에서 그녀는 외치고 있었다.

“저는 황녀 전하와 그다지 가깝지는 않지만! 종종 뵐 때마다 느낀답니다. 그분은…….”

자애로우시고 아름다우시고 신비로우시고 기타 등등. 그다지 표현력이 좋은 영애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교계에서 귀부인들이 황녀 전하를 미쳤다는 둥 함부로 말하는 것을 줄이는 데에는 톡톡한 역할을 했다.

이비엔은 소피아 영애와 합심을 하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황녀 전하께서 제안하셨던 가게에 그 영애가 자주 오니까, 그때 함께 이야기해 봐야겠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반드시 저분의 천재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시게 하고 말겠어.’

물론 원치 않으신다면 그만둘 테지만 말이다. 분명히 훗날 황녀에게 해가 될 것 같은 허무맹랑한 나쁜 소문들을 조금씩 지우는 것 정도는 해도 될 것이다.

‘우선 제안해 주신 일들 먼저 처리하고.’

이비엔의 굳은 얼굴에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한편, 이비엔이 궁에서 나간 시각, 황녀궁 한쪽에서는 다시 궁인들의 비밀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멤버는 전과 같았다. 엠마와 주방장, 리니와 아린, 시종 몇과 기사 몇.

“점점…… 심해지고 계십니다.”

황녀의 입맛이 점점 강해지고 있고 양은 더 줄고 있다고, 주방장이 침중하게 보고했다.

“저희는…….”

리니가 우울하게 보고했다.

황녀가 나들이를 자주 하는데 혼자 있을 땐 늘 우수에 젖은 분위기다. 가일 후작을 만나는 날에는 더 굳어 있고, 소피아 마르시엔을 만난 날에는 덜 굳어 있다는 것 등등, 그동안의 관찰 결과를 풀어놓았다.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린이 말을 덧붙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특히 체력과, 토혈 부분이요.”

황녀가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불안할 정도로.

시종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르페르샤가 산책이 길어진다 싶던 어느 날 속이 파인 나무 안쪽에 피를 토하고 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후작 각하 좀 그만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사들도 분통을 터뜨렸다.

세세한 사정은 몰라도 가일 후작이 르페르샤 황녀를 적대시한다는 것은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리 황녀님의 스트레스의 근원! 모두가 타도 가일 후작을 속으로 외치며 살벌하게 눈을 빛냈다.

* * *

또 피를 토한 날, 나는 슬슬 제인 남매를 챙기기로 했다. 이제 원작이 시작하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서신 같은 걸 주고받기는 했는데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걱정도 없겠다, 그간 가장 어울리지 못했던 제인들과 어울릴 생각이었다.

“단, 같이 갈래요?”

무사히 계약을 마친 우리는 붙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는 남작의 신분으로 황녀 호위로 자원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유진도 다니엘을 하루를 굴려 본 뒤, 질린 얼굴로 어디서 저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난 거냐며 학을 뗐다.

이윽고 우리는 출발했다.

“그 돌봐 준다고 했던 그 남매를 보러 간다고요?”

다니엘이 나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네, 1년뿐이지만요.”

“흠.”

다니엘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윽고 제인의 집에 도착했다.

“제인!”

“리샤 님.”

그래도 편지를 주고받아 와서 그런지 제인은 처음보단 나를 수월하게 대하고 있었다.

“잘 지냈지? 뭐 어려운 점은 없고? 애들은?”

“잘 지냅니다. 어려운 점도 없고요. 애들이라면, 저기 내려오네요.”

열렬한 눈빛에 비해 차분한 어투로 제인이 답했다. 나는 2층에서 빠끔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세 소년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예쁘게 웃어 주었다. 위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났다.

“……애들이,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제인이 조금 민망한 어조로 말했다. 아, 귀여워! 배시시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윽고 이마와 무릎을 손으로 문지르는 제인의 쌍둥이 동생과 걷는데 아장아장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수줍은 막내 동생이 내려왔다.

제인의 쌍둥이 동생 중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펠,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넬이었다. 이 둘이 원작에서 다니엘의 수하로 있었다는 거지. 다니엘을 힐끔 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귀여운 막내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막내 도련님 이름은 뭘까?”

몹시 수줍어하면서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조그마한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 보고 있더니 반쯤 위층으로 도망가려던 자세를 살짝 바로 했다.

“콜린…….”

‘이에요.’라는 말은 아주 작았다.

“콜린이구나. 반가워.”

아이는…… 몹시 보송보송한 아이였다, 흑. 작고 마른 굉장히 연약한 소동물 같은. 내가 애들이라면 또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는 환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애가 어, 어 하는 사이에 부드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너무 놀라기 전에 그대로 제인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망치려는 거 같아서.”

“…….”

그렇게 어색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나는 무사히 제인과 제인의 동생들과 상당히 즐겁게 대화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뿌듯하다.”

기뻐서 울듯이 중얼거리자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다니엘이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돌아갈 거예요?”

“아뇨, 오늘은 아직 안 끝났어요.”

나는 그날 제인 남매에 대해 최대한 모자란 점을 찾아 채워 넣은 뒤에야 제인의 집을 나섰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다니엘을 지나가듯 살폈다. 쌍둥이를 보고 뭔가 느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다니엘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시!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리샤, 여행도 다 끝난 뒤에는 뭘 할 건가요?”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가, 유난히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부드러운 느낌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풀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내 계획을 떠올렸다. 아마도 기억들을 다 찾고, 그러면서 외전에 나왔던 아리엘의 것들을 하나하나 먹어 치우지 않을까?

‘위대한 마법사가 연자에게 남겨 두었다는 빈집을 가장 먼저 찾아야겠지.’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아리엘이 무력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계기였다. 마법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더 바랄 것이 있겠어? 생각해 보니까 나 그것들 다 찾으면 돈도 꽤 생길 것 같은걸!

그런 생각으로 미소를 지으며 나는 다니엘에게 답했다.

“글쎄요. 멀리 가서 살지 않을까요?”

그는 잠시 후 되물었다.

“멀리……. 어디에요?”

“글쎄요. 어디로 가든.”

그걸 알려 주면 안 되죠! 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므로, 적당하게, 속삭이듯 말을 끝냈다.

“마음이 닿는 곳에 머물겠죠.”

그는 그대로 끝까지 말이 없었다.

* * *

며칠 동안 나는 그간 못 봤던 것을 다 채우려는 마음으로 제인의 집을 드나들었다. 아, 혹시 몰라서 황태자에게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조금 돌봐 주고 손 뗄 생각이라고 말해 둔 차였다.

물론 그 말은 황태자가 아리엘의 백지에 가까운 편지를 받고서 기분이 매우 좋을 때 슬쩍 건넸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본 아리엘의 답장은 여러 의미로 엄청났다.

“아직도 요정님이라니.”

정체를 밝혔는데. 세상에. 황태자한테! 아리엘은 대단한 여자였다.

“결혼해도 요정님이라고 부를 것 같…….”

“시끄럽다.”

내가 답장을 보고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말을 끊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어딘가 우울해보이는 황태자를 마주보았다. 자, 웃으면 안 돼.

“잘 하고 계세요.”

“……그런가.”

여전히 약간 불안한 기색으로 황태자가 답했다. 에헤이! 대뜸 불러들여서 집착하던 당신보다는 내가 나을 거라니까? 적어도 나는 몹시 당당했다. 솔직히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오라버니 여자친구예요. 차라리 이름을 부르지 다 큰 성인에게 요정님이라니!

어쨌거나 그날 황태자는 아주아주 다정한 문체로 아리엘에게 답장을 썼다.

<친애하는 나의 아리엘.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

이제는 저 다정한 문체가 거의 익숙해진 것 같았다. 어쩜 좋아. 웃겨.

물론, 저 뒤에 자기 집에 오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둥, 가능하면 별장 밖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둥 하는 집착 어린 표현들을 붙이려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 했지만 말이다. 휴. 이건 참 이것대로 쫄깃하군.

그렇게 나름대로 생각보다는 편안하게 마지막 한 달 기한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취미를 발굴해 내기에 이르렀다.

* * *

처음에 말했듯, 내가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이 유난히 선명했을 뿐이다.

퉁 소리와 함께 몸이 날았다. 빠르게 아득해지던 하늘. 너무 한순간에 몰아쳐서 채 아프다 말하기도 전에 사라진 고통. 마지막까지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어지던 해방감.

백금빛 머리가 바람에 산들거렸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채를 한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렸다. 후우웅. 바람이 운다. 괜히 술렁이는 마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드러난 볼에 닿아 오는 바람의 결을 느꼈다. 그렇게 볼이 차게 식도록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잔디가 밟혀 자박거리는 작은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그 소리에 금세 마음을 빼앗겨 일부러 빙 돌아 처소로 향했다. 하늘이 맑아 좋았다. 오늘은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찾았다. 펜을 쥐자 곧 하얀 종이가 빼곡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마에 주름을 잡아 가며 눈앞의 작업에 골몰했다. 마녀가 악당으로 나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등장 자체를 불쾌해할까? 아니면 악역이니 반길까? 아니면 상관없으려나.

“흠…….”

나는 동화를 쓸 생각이었다.

물론 이쪽으로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인의 어린 동생들이 예뻤을 뿐이었고, 그 애들에게 우연히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공주 이야기들이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갈 줄은 몰랐지.”

보니까, 의외로 이 세상은 아이들을 위한 것들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우리 제인과 쌍둥이와 막둥이가 이야기가 좋다는데! 내가 써 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두고두고 볼 동화책 한 권쯤 선물해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흐흐흐.”

그러니까, 다분히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심이 충만한 시작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맨 처음으로 선택한 이야기는 계모에게 쫓겨나 난쟁이 나라로 도망친 눈의 공주님과 저주받은 개구리 왕자님의 사랑 이야기였다. 독 사과도 나오고, 개구리 왕자님의 슬픈 질투도 나오며, 눈의 공주님의 키스로 저주가 풀린 왕자님이 바로 그 키스로 독 사과를 먹은 공주님을 살리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였다.

끄적거리는 펜 소리만이 고요하게 흘렀다.

* * *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제국 내 최고 도서상회인 기드온 상회 본부에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책을 만드는 장인들은 여상스러운 태도로 그 소포를 풀었고, 그 안의 묵직한 종이 뭉치를 꺼내어 읽어 보았다. 문단을 따라 내려가던 장인의 퀭하던 눈이 점점 반짝반짝해지더니, 장인이 의외의 재미로움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그대로 첫 권 분량을 다 읽은 그는 다음 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곰방대를 탁자에 꽝 찍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괴성을 질렀다.

“이, 이봐! 이리들 와 보라고! 이런 소설은 처음이야! 아니지, 저리 비켜 보게. 내 직접 회주님께 들고 갈 터이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단 일주일 만에 ‘눈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는 제국을 휩쓸었다. 구전되는 신화들보다 환상적이며 여느 소설들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와 흥미로운 전개를 갖춘 ‘눈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

1권은 일주일 만에 제국 전역을 휩쓸고, 나아가 대륙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연한 순으로 그 저자인 ‘에밀’의 정체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신비의 작가라 불리는 에밀은 혜성처럼 나타나 오직 책 한 권 만을 냈을 뿐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소문은 갈수록 무성해지고 허무맹랑해졌다.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유려한 문장과 섬세한 표현력, 그리고 따스한 감성이 악녀라 욕을 먹는 르페르샤 황녀의 손끝에서 나왔다는 것을. 황녀의 부탁으로 모든 개인 정보를 차단한 상단주 이튼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 *

동화책의 성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많은 돈을 쓸어 모았다.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이야.

“……이비엔 경 상단의 지분이 없어도 되겠는데?”

와, 나 부자 됐어.

유명세를 타기엔 아직 이르다 여기며 뒤늦게 익명을 요구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내 주위 사람들의 눈까지는 가릴 수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쓴 거라고요?”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 중 가장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인 것은 다니엘이었다. 그는 나를 굉장히 놀라운 외계 생명체를 보듯이 보더니, 드물게도 미소가 지워진 얼굴로 책을 느릿하게 살폈다.

“이런 걸 공개하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에요.”

내가 의아하게 묻자 그는 한참 만에 내게 말했다.

“좋은, 일 같네요.”

띠링!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와 같은 알림 문구를 본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 상념에 잠긴 것 같은 다니엘의 옅은 미소를 눈에 담으며 기쁘게 웃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널리 읽혔다는 것이다. 신드롬을 몰고서. 그리고 그건 안 그래도 여러 인물들이 달라지고 빠져서 어디로 튈지 몰랐던 원작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게 문제였다.

원작이 시작되기 이틀 전의 어느 날. 여주인공 아리엘 랭턴이 이틀 먼저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 출발의 이유는 에밀. 수도에 사는 것이 확실하다는 신비의 작가 에밀을 찾아내 만나는 것이라나. 심지어 황태자 요정님에게 한 번 만나게 찾아달라고 부탁도 했다고 한다. 편지 한 장을 전부 에밀 이야기로 꽉 채워가며.

“하하, 에밀인지 뭔지, 괘, 괘씸하네요.”

“괘씸하지.”

황태자의 뱀 같은 눈이 오랜만에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엉덩이를 뗐다.

“저, 저는 이만.”

“…….”

그날 황태자에게 그대로 목이 잘리는 줄 알았다. 그의 앞에서 피를 토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피를 토하자, 황태자는 노려보던 그대로 놀람을 표했다. 괴상한 표정이었다. 그거에 내가 더 놀랐을 지경이었다.

“……황녀궁 의사를 불러와.”

나직하게 시종장에게 명령하는 얼굴은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 있었다.

* * *

황녀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았다. 그것도 황태자의 앞에서.

보기 드물게 평정을 잃은 모습으로 황태자가 황제를 찾아왔다. 그리고 대체 무슨 병인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황제와 유진, 카인, 헤레이스가 작정하고 황녀의 병을 감추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아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심각하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아서 움직이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소문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던 거군요.”

황태자는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황녀의 일에 대해 그렇게 열을 내는 황태자의 모습은 흡족한 것이기는 했으나.

“…….”

황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브람스가 가만히 다가와 적당히 식은 홍차를 놓아두었다. 그 차향이 떠올라 황제의 언저리를 가득 채울 즈음 미동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브람스.”

소리 없이 곁에 서 있던 충직한 시종이 슬쩍 고개를 숙여 답했다. 황제는 피곤한 듯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들어 테라스의 뻥 뚫린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후…….”

황제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브람스는 그의 한숨에 담긴 마음을 헤아리고 말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 돌보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쓴 글이라고 하더군요.”

브람스는 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전하께선.”

그 말에 황제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그 어떤 생각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말할 자격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악녀라 불렸던 한 여자를 기억한다. 그도 그녀로 인해 괴로웠지만, 가장 고통 받았던 것은 어쩌면 그녀의 딸로 태어난 그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르페르샤 황녀를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나 밀쳐 내고 내친 아이인데. 이제는 자꾸만 그 달빛을 닮은 머릿결이 눈에 밟힌다. 따스하면서도 서글픈 보랏빛 눈동자에 순간순간 가슴이 덜컥거리고. 그 여린 얼굴에 원망 한 점 안 비치는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파 온다.

르페르샤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참 아이답지 않기는 했다. 그래서 괴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어렸던 아이가 이렇게 애 같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비라…….

황제의 얼굴이 버석거리는 미소로 구깃해 졌다.

‘내 그 아이에게 아비의 마음을 가졌는가.’

그는 그렇게 ‘딸’을 떠올리며 간신히 치받는 무언가를 참아 냈다.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 아이가 쓴 글에 세상이 들썩였다는 소식에 그는 보는 사람들의 수준을 비웃었다. 제목만 들어도 어린 아이들이나 보는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사랑 이야기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황녀의 글은 무척 완성도가 높았다. 그는 내심 매우 놀랐다. 비단 글의 수준에만 놀랐던 것은 아니었다. 황녀는 그것을, 친동기처럼 아끼는 아이들을 위해 썼다고 했다.

아름다운 글이었다. 무엇보다도 문체로 엿보이는 황녀만의 분위기가 예상과 달리 부드럽고 따스했다. 문체는 대체로 사람의 성품을 따라 다듬어진다고 여기는 그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놀라며 소설을 읽다가, 어느 즈음 해서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딸이 누구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를 바랐다는 눈의 공주님의 죽은 어머니를 그리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마음으로 여주인공의 행복을, 아픔을 그렸을까 따위의.

소설을 읽은 후에는 그 아이를 똑바로 보는 것이 더욱 힘겨워졌다.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린 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대체 지금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은 이제 의미가 없는데.

이미 그는 황녀를 자식으로 대하지 않았고, 황녀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태였다. 황녀의 진짜 가족에 그는 속하지 않았다. 싫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 주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브람스는 고요히 주인의 곁을 지켰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마리, 저것 좀 봐! 강아지야!”

“아가씨, 조심하셔요.”

천천히 달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하늘색 머리의 영애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수도 거리의 정경이 들어박혔다.

“이게 수도구나…….”

주의를 줘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아가씨의 모습에 유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아가씨를 보았다. 밖에 거의 나와 본 적이 없는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는 수도의 거리가 참으로 신기할 것이다.

“마리, 나 잠깐 내려 보면 안 될까?”

“안 돼요, 아가씨. 이렇게 볼 때는 신기해 보일지 몰라도 거리가 얼마나 위험한데요.”

“위험해?”

“그럼요. 더럽기도 하고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랍니다.”

흥미로 반짝이던 아가씨의 하늘색 눈이 시무룩해졌다. 그에 크게 흔들릴 뻔했지만 유모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밖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를 좀 보세요.”

“응? 어머! 저게 뭐야?”

“거리의 아이들이죠. 구걸만 하는 것도 아니고, 소매치기에 강도짓에 가리는 것이 없는 아이들이랍니다.”

“세상에. 어린 나이부터 그런 나쁜 짓을 한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제대로 씻고 다니지도 않아서, 닿기만 해도 무슨 병이 옮을지 몰라요. 저런 꼬마들이 아가씨께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렇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가씨가 유모 마리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리가 아가씨를 달랬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금방 공작저에 도착할 테니까요.”

“응. 알았어, 마리. 거리도 이제 안 볼래.”

“우리 아가씨 착하기도 하시지.”

아가씨가 배시시 웃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름은 아리엘 랭턴. 그녀는 랭턴 공작가의 금지옥엽으로, 가을하늘처럼 맑은 하늘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영애였다. 공작은 딸을 몹시 아껴서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는 했다. 그건 공작가의 사람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만큼 아리엘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우리 아가씨는 천사님이 주신 선물이 분명해요.”

그녀의 유모 마리도 늘 저런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천진하고 순수한 아리엘 랭턴. 딱딱한 여느 귀족 영애들과 달리 감정 표현이 솔직하며 눈물도 많은 아리엘 랭턴. 거기에 어딘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미모가 더해지자, 아리엘 랭턴은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소녀로 자리 잡았다.

“아빠는 집에 있어?”

다소 세간의 예의를 살짝 벗어날 때가 있기는 했지만. 말간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아리엘에 마리는 바짝 긴장하고서 잠시 말을 골랐다.

“……없어?”

“그, 오늘이 정무 회의가 있는 날이라.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세 저택으로 돌아오실 거랍니다.”

“…….”

아리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윽고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맺히기 시작했다.

“아가씨, 정말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닭똥 같은 눈물에 유모 마리는 이성을 잃었다.

“당장 기별을 넣겠습니다.”

마리가 창을 두드려 기사를 불렀다. 이윽고 한 기사가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필사적으로 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는지, 아름다운 아리엘의 얼굴은 이제 몹시 서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면 아가씨,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가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아마 집에 도착하셨을 때쯤이면 공작님이 계실 거랍니다.”

“킁, 그치만…… 바깥은 더럽…… 잖아.”

“절대로 그런 것들과 닿지 않도록 기사들이 지켜 줄 거예요.”

“……정말?”

“아무렴요. 어디로 가 볼까요? 그렇지, 가까운 곳에 마담 로제타의 살롱이 있지요. 아름다운 드레스를 마음껏 입어 보시는 거예요.”

“드레스는 나 많은데…… 흑.”

“살롱의 매력은 드레스만이 아니죠. 아가씨만큼은 아니셔도 품격 있고 아름다운 영애 분들을 만나 친구가 되실 수도 있을 거예요.”

본격적으로 흐르던 눈물길이 슬쩍 마르기 시작했다. 마리는 이때다 싶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거기다 그 살롱은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니 절대로 지루하지 않으실 거랍니다. 그러니 눈물을 그치세요, 아가씨. 이 마리 가슴이 찢어집니다.”

“알았, 어. 흑…….”

아리엘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마저 흘려보낸 뒤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인 것 같아, 마리. 왜냐하면, 요정님도 만날 거고, 에밀 님도 만날 거니까!”

“세상에, 아가씨…….”

우리 아가씨는 천사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는 호위 기사들에게 말을 전했다.

“마담 로제타의 살롱으로.”

아가씨의 흐느낌 소리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들과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의 방향을 틀었다.

이윽고 그들은 수도 제일의 살롱이라 불리는 마담 로제타의 살롱에 도착했다.

* * *

바야흐로 이틀 빨라진 원작의 시작이었다.

나는 멀찍이 서서 마담 로제타의 살롱으로 들어가는 일행을 확인했다.

‘아리엘 랭턴. 와, 진짜 여주인공.’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색. 그런 표현에 딱 들어맞는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으, 신기하긴 한데…….”

신기한 눈으로 그쪽을 보던 나는 목표로 했던 곳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지.”

황태자의 연애를 도와주기로 한 이상 마주치는 건 필연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주는 원작에서 황궁을 자기 집 안마당처럼 들쑤시고 다녔던 인간이었으니까.

그래도 찝찝해. 쟤 눈물이 많다고 했다고. 사소한 일에도 눈물 글썽글썽하는 타입이었단 말이지.

“순수한 것도 맞긴 하지만.”

어쨌거나 도착한 곳은 상단 지부였다. 정확히는 내 동화를 투고했던 도서 상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단주 이튼이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이 시간대에는 나만 오는 걸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에밀 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약속대로 나를 에밀이라고 부르며 상회의 안쪽 응접실로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나는 내가 서신으로 제안했던 것에 대해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이비엔 경의 상단과의 협약이었다.

“무조건 찍어 낸 책의 최소 20퍼센트는 그 상단을 통해 팔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래요.”

원작 지식은 아니지만 이비엔을 도울 것이 또 생겼으니 잘된 일이었다.

“대신 이 상회에만 원고를 주겠어요.”

“좋습니다!”

그는 더 들어 보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슥슥 서명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그…….”

마치 이것이 본론이라는 듯이.

“2권은 그, 언제쯤, 나오는지요?”

“음…….”

“사랑의 결실들의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테지요? 오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밀 님.”

나는 흠칫했다. 너무나 눈빛이 열렬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그냥 유명 동화 짬뽕인 건데.’

그래도 처음으로 받은 책을 제인의 동생들에게 갖다 주니 몹시 기뻐했었다. 잠시 그들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글쎄요. 2권이라…….”

그런데 말이다. 사실 이거 1권이 아니라 그냥 완결이었다. 애들 주려고 그냥 한번 쓴 건데 굳이 2권까지 갔을 리가 있나.

‘그런데 완결이 찝찝하게 끝났나 봐.’

멋대로 연결권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공개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이쪽 소설들이 다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이후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다 쓰는 편이었다. 어떤 소설은 여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쓴 소설까지 있었다. 기가 막혀서 졸음도 안 오더라.

“여유가 될 때 천천히 써 보죠.”

눈을 피하며 나는 2권에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함께 비극적으로 죽이기로 결정했다. 우리 제인 남매들에게는 해피엔딩 버전으로 계속 얘기해 주면 되겠지. 흥. 멋대로 1권이라고 발표한 것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물론 이때의 나는 이 작은 복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할지는 알지 못했다.

이튼은 매우 아쉬운 얼굴로 몇 번이고 독촉을 하려다가 내가 살짝 노려보자 한숨을 쉬며 그만두었다. 기분이 좀 묘했다. 내가 다가간 것도 아니고, 나와 아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첫 만남부터 날 악녀로 대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소문에 어두운 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이튼이 귀신같이 알아듣고 답했다.

“팬이거든요, 전, 아니 에밀 님의!”

곰방대로 조수 머리를 수시로 때릴 것 같이 생긴 어르신이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나는 바로 납득해 버렸다.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 아닌가!

크, 그렇구나. 당신도 그 소피아 영애처럼 덕질을 하는 거였어! 우리는 덕후 동지. 비록 그 덕질 대상이 나요, 내 책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럼 그런 걸로 알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튼.”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튼이 90도로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그의 극진한 배웅을 받고서 상회를 나왔다.

“슬슬 돌아가야겠네.”

사실 좀 놀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젠이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주기적으로 피를 쏟는 것을 젠만은 늘 곁에서 전부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과보호야, 젠.”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정령이야. 네 영혼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건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젠이 바로 답했다.

-그리고.

“응?”

말을 하다가 마는 것에 내가 천천히 걸으며 재촉하자, 젠이 어쩐지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다, 주인. 영혼 문제로 생기는 고통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괜찮아. 진짜로. 나 하나도 안 아파.”

-……내게는 감추지 않아도 된다.

나는 도저히 믿지 않는 그에 말을 돌렸다.

“그보다 요즘은 왜 안 물어봐? 그…….”

그 덕질에 대해 진지하게 묻던 것 말이다. 그러자 젠이 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으니까.

“……응?”

나는 화들짝 놀라서 멈춰 섰다. 그리고 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뭐, 뭘 알았는데?”

-그건 주인이 더 잘 알겠지.

“어엉?”

-어쨌든 돌아가라. 아까부터 그 혼혈 놈이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그 말을 끝으로 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젠이 말한 ‘혼혈 놈’, 그러니까 다니엘이 기다린다는 말에 히 웃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뭐, 여주인공도 왔겠다, 이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왜냐하면, 원작을 진짜 제대로 활용하고 떠날 생각이거든. 나는 히죽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으며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니, 부딪힐 뻔했다.

“아…… 단?”

언제 온 건지 다니엘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걷던 나를 멈춰 세운 채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계약을 맺은 후로 그는 정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행동을 종종 보였다. 이렇게 저 먼 궁에서 여기까지 단숨에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오늘은 괜찮은 건가 싶어서요.”

“에이, 제가 괜찮지 않을 일이 뭐가 있어요?”

내가 방긋 웃으며 묻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걱정이 없네요, 당신은.”

이렇듯 그는 내가 느끼는 기분을 한 점의 오해도 없이 귀신같이 맞추고는 했다. 나는 그게 또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즐거우면 된 거잖아요.”

“그런가요?”

다정하면서도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응수했다.

로암 남작으로서 내 호위 마법사가 된 뒤로 그의 눈은 짙은 흑갈색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우리가 피의 계약을 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했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고정된다나. 약간 짙고 따스한 느낌의 갈색 머리와 그 눈은 무척 잘 어울렸다. 그토록 아름다운데도 내가 홀려서 기절하지 않는 것도 그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그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왜요?”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 건 또 아닌데. 분명히 가슴이 술렁이고 그렇기는 한데 어지럽지는 않고…….

‘하여간 신기해.’

마법을 쓴 건가?

그래도 좋은 영향이 있었다. 유진이나 카인, 헤레이스를 보아도 비틀거리는 일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적응이 되기는 하는구나.’

어쨌든 그들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거의 매일 보고 있으니.

“제인에게 들렀다가 가요. 요즘 검을 배우고 싶다고 그랬거든요.”

다니엘이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무 오래 있지는 마요, 리샤. 그들도 일찍 자는 게 좋을 거예요.”

“알았어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다니엘은 무언가 헷갈리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나를 한 번 보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 애들은 왜요?”

“아뇨. 아직은 생각 중이라 나중에 말해 줄게요.”

오, 드디어!

우리 쌍둥이들은 그가 재능을 발견해서 선 안에 들였다고 했었다. 다니엘 무리가 쓰는 그 힘에 있어서 천재라고 했었지. 지금은 그 힘이 인공정령을 다루는 친화력이라는 걸 안다.

‘다니엘이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히히.’

누나랑 헤어지지도 않았고, 재능도 발견했으니, 쌍둥이는 미래가 창창했다. 다니엘이라면 암살자 일도 쌍둥이가 원하지 않으면 굳이 시키지 않을 거고.

“나쁜 일은 아니죠?”

“그럼요.”

내가 대강 짐작하면서 묻자, 그가 이번엔 정말로 따스한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좋은 일이죠. 따지자면.”

나는 그와 함께 천천히 걸어 제인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제인이 동생들과 함께 빨래를 널고 있다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웃는 것을 잘 모르던 소녀는 그새 조금씩 자주 웃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제인, 맛있는 거 사 왔어요.”

오는 길에 사 온 붉은 산딸기 케이크를 들어 보이자 말수 적은 제인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녀님.”

“하지만 맛있게 먹어 주는 게 너무 좋은 걸 어떡해요.”

제인이 조금 더 밝게 미소 지었다.

“우와!”

“와아!”

쌍둥이 중 활발한 쪽과 막내가 탄성을 지르며 케이크를 반겼다. 나한테 인사를 하면서 케이크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그들이 귀여워서 나는 또 즐겁게 웃었다.

‘으, 행복해!’

완벽한 일상이었다.

* * *

궁에 돌아온 뒤 나는 펜을 입에 물고 일기장을 펼쳤다. 젠에게 인정받은 뒤로는 늘 필요한 만큼의 새 지면이 더해지는 일기장.

“흠.”

젠이 볼 테니 적지는 않겠지만 이 신기한 일기장을 펴기만 해도 머리가 더 쌩쌩 돌아가는 것 같다.

원작의 사건은 아리엘이 건국제에 오면서 시작된다. 건국제, 정확히 말하면 건국 무도회에서 아리엘은 조금 늦은 데뷔를 하게 된다. 거기서 아리엘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데, 사실 이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무도회에서 시비도 붙고. 그걸 순수한 모습으로 한 번 이긴 뒤에 후미진 골목의 살롱을 발굴해 내면서 스타가 되지.’

건국 무도회와 그 후 며칠에 걸쳐 이어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아리엘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후 건국제 마법 테러 사건도 있었고, 우리 르페르샤 언니랑 정면으로 붙는 사건도 있었고…….’

이것저것 사건사고가 많았는데, 사실 그걸 해결하는 과정은 조금 단순한 편이었다. 일이 터졌다! 아리엘이 울었다! 또는 아리엘이 열심히 뛰었다! 또는 아리엘이 황태자를 불렀다!

‘저 셋 중 하나였어. 분명히 그래.’

언니의 기억은 열어 볼 수 없게 되었어도 맨 처음에 받은 원작의 기억은 완벽하게 생생했다. 그러니 분명하다. 사건 터지고 아리엘이 저 셋 중 하나를 선택해 움직이면, 사건은 해결되기 시작한다.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이 아리엘의 순수함을 보고 개과천선을 하거나,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거나…….’

저런 것들이 안 통할 상황이면 서브 남주들이나 황태자가 와서 다 쓸어버리는 것이다.

‘가끔은 이비엔 경도 아리엘의 친구라서 휩쓸리기도 했지. 더 재밌는 건…….’

아리엘이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에 막 사건의 가장 중요한 열쇠가 담겨 있고 그랬다는 것이다. 꼭 카인을 의도치 않게 꼬셨을 때처럼.

“……정말, 복 받은 인간.”

참 편하게 사는 인간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여기에 이제 3개월 정도만 더 머물고 튀어야 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이룰 것은 내 안위와 내 사람들의 안위. 이 둘뿐.

‘내 안위는 솔직히 이제는 그다지 걱정이 안 돼.’

황태자 오라버니는 여전히 살벌하고 툭하면 살기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친해졌다고 볼 수도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살기까지 보이기도 전에 죽이는 게 더 어울리는 인간이니.’

게다가 조금 내게, 묘하게 친절해진 것 같기도……. 아니, 아니다. 으윽, 방심하면 못 써!

‘그래도 예전처럼 막 겁이 나지는 않는단 말이지.’

거기다 다니엘. 지금 와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최대한 냉정하게 따져 본다고 해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관계는 아니게 된 거지.’

계약까지 했으니 말이다. 무려 피의 계약! 이게 어떤 계약인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그럼 나는 해결이 된 셈인데.’

이제 남은 건 내 주위의 안위였다.

‘사실 아리엘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유진, 카인, 헤레이스 말이다.

‘아리엘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면 되는 거고.’

이비엔 경, 그리고 제인. 후자의 둘은 거의 해결되었다. 적어도 아리엘을 나보다 우선시하지는 않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전자의 서브 남주 셋은…….

“예정된 대로 흐를까?”

과연? 그 정도로 질긴 인연이거나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정말 작은 가능성 하나도 무시해선 안 된다.

게다가 신경 쓸 인물들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이제는 내 궁의 사람들도, 평탄하기를 바라니까.

“내 악녀 소문…….”

그거 수습한다고 황태자가 그랬었다. 지금 임시로 최대한 내게서 떼어 놓은 유진과 카인도 명목상은 그 일을 하고 있으니까.

“좀 적극적으로 나서 볼 가치가 있겠어.”

지금까지는 악녀 소문 해소에 대해서는 약간은 수동적으로 주위에 맞춰 주는 것을 택했었다. 어차피 내가 떠날 곳이라서.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소문이 나아지면 내 주위를 공격하는 것도 적어질 거고…….”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면 황태자 오라버니와 유진, 카인 그리고 헤레이스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아리엘과 그들 사이의 분위기도 읽을 기회가 있을 거고.

더불어, 원작에서 위험할 만한 사건들은 그냥 미리 다 해결해 버리고 가는 걸로 했다. 원작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상관없다. 내 사람들만 안전해진다면.

“그러고 겨울에 떠나야지.”

약 3개월 뒤, 그러니까 초겨울이 되면 대륙적으로 마법 테러 사건이 벌어진다. 그걸 이유로 신관들이 순례를 시작하고, 이 제국에도 신관들이 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마지막 순례지라고 했었지.

‘거창한 이유로 오지만 결국 아리엘의 천사 같은 성격을 칭송해 주는 역할들이었어.’

그 아리엘 칭송 담당들과 함께 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신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떠난다고 하면 아주 딱 좋지.”

물론, 그때까지 그들에게도 잘 보일 수 있게 악녀 소문 좀 죽여야겠지만.

유진은 데려갈 거고, 제인 남매도 자리 잡는 거 여의치 않으면 데려갈 거고, 엠마도 원한다면 데려가고.

“그래도 돈 많으니까.”

히히.

난 부자니까 다 먹여 살릴 수 있어!

기승전 돈으로 끝난 나의 사색은 젠에게 방해를 받았다.

-주인, 겨울이 되면 떠날 거라고?

참다 참다 물어보는 느낌이다. 나는 내 까만 독수리 정령의 목소리에 살짝 놀라며 답했다.

“……응.”

-…….

내 정령은 침묵했다. 뭐, 뭐지?

“왜 그래?”

그러나 젠은 그 뒤로 죽 답이 없었다. 신경이 쓰여서 기다렸지만 어느 순간 나는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은 눈이 일찍 떠졌다. 건국제 하루 전. 오늘은 황태자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다리를 꼬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던 황태자 오라버니가 나를 반겼다.

“앉아.”

그래, 살기가 안 날아왔으니 반긴 거지. 게다가 지금은 안다. 지금 저 모습, 나름대로 긴장한 거라는 걸.

“아리엘이 곧 온다.”

“네에?”

아니, 오늘은 에밀에 대해 어떻게 감출 것인가를 이야기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내 정체가 에밀이라는 건 비밀이었다. 일단 내가 부담스러웠고, 오라버니는 혹시라도 아리엘의 관심이 내게로 모조리 쏠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경악하는 나에게 오라버니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편지 하나를 건넸다.

“…….”

무려 꽃향기가 나는 편지였다.

<친애하는 나의 요정님께.

에밀 님을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나는 어제 밤잠을 설쳤어. 언제나와 같은 밤하늘인데 어제는 유난히 별이 총총해 보였어.

아아! 에밀 님! 얼른 뵙고 싶어!>

“에밀…… 님?”

“으득…….”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죽 읽어 갔다.

<눈의 공주님의 그 도도함! 개구리 왕자님의 그 애절함은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지. 요정님, 전에 읽어 보겠다고 했었지? 읽어 보았어? 어땠어?>

참……. 황태자에게 반말이 이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싶었다. 다 저 오라버니가 편지 주고받으면서 허락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편지는 이와 같은 말로 끝이 났다.

<거기 나오는 개구리 왕자님 같은 다정함과 눈의 공주님 같은 멋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내 이상형일 거야. 아, 나도 사랑을 해 보고 싶어! 있잖아. 에밀 님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

“…….”

하, 한 번 더 피를 토할 수 있다면 좋겠다! 처음으로 나는 피를 토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러면 저 살벌한 오라버니의 칼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괜……찮지 않을까요? 악, 진정하세요, 오라버니!”

“뭐가, 괜찮다는 말이지, 누이?”

이런 맙소사! 그러고 보니 너 아직 짝사랑이었지!

“저는 여자잖아요! 꺅!”

칼 뽑지 마! 다행히 오라버니는 내 외침에 뽑던 칼을 스릉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 혼잣말이었나 보다. 나는 잠시 눈을 비볐다. 황태자에게서 시무룩해진 귀가 보이는 것 같았다. 방금 내게 살기를 뿜던 인간이 저런 꼴을 하니 징그러웠다. 에라이.

“제가 에밀인 건 더더욱 밝히면 안 되겠네요.”

내가 여자인 것은 참으로 다행이기는 했지만 편지를 보고 나니 아무래도 에밀인 걸 들통 나는 순간 스토커 하나가 생길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황태자도 다른 의미로 그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그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는 대체, 그런 걸 왜 쓴 거지?”

나는 그냥 하하 하고 웃었다. 저번 피를 토한 뒤로 그래도 조금은 유해졌던 그의 눈빛이 다시 강렬해져 있었다. 목소리는 침울했지만.

“그……래도 그 글 덕분에 영애가 일찍 온 거잖아요? 이건 달리 말하면 기회라고요, 오라버니.”

“기회?”

그가 멈칫했다. 서서히 눈에서 독기가 빠지고 무언가 생각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렇군.”

유난히 아리엘에 대해서만큼은 그답지 않아지는 오라버니였다. 나는 지금만큼은 단순하기 짝이 없을 이 생물을 고이 다루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음, 이건 어때요?”

“뭔가?”

“책을 읽고 관심 있는 척을 하는 거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건 중요하잖아요.”

이참에 동화로 성질도 좀 개선되면 참 좋을 텐데.

“그리고 일단 공감! 공감을 표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면서?”

오라버니가 눈을 깜박이지 않는 특유의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음…… 이곳저곳 데이트를 하는 거죠. 지금 오전이잖아요? 오자마자 모시고 나가요. 에밀이 있을 법한 곳을 함께 돌아보자고 하면서 막 연극도 보고, 무투 대회도 보고, 그러는 거죠!”

“흠.”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그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오라버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다.”

아주 국가 중대사 뺨치는구나.

“네, 큼…….”

웃지 말자. 웃지 마.

“그럼, 된 거네요. 저는 가 볼게요. 데이트 준비 잘 하세요, 오라버니!”

빵긋 웃어 준 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끝났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니엘이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그 힐링 미소에 모든 불안과 걱정이 씻기는 것을 느꼈다.

턱.

그리고…… 다시 불안과 걱정에 휩싸였다.

“오, 오라버니?”

문이 닫히지 않았다. 아까 그 모습 그대로 다가와서 문을 잡고 선 오라버니가 굉장히 소름끼치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어딜 가, 누이?”

“그…… 저도 오늘 무도회 준비하러…….”

내 소문을 위해 매일 저녁 무도회에 참여하라는 말을 지키는 중이었다. 주로 다니엘과 함께.

‘덕분에 내 소문에 다니엘도 끼어들기 시작한 것 같고.’

어쨌든 그래서 준비하겠다는데.

“그걸 왜 하지?”

오라버니는 몹시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저는 이것저것 할 게 많죠. 하하.”

“아니. 지금 내 준비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누이?”

섬뜩한 줄 알았는데 잘 보니 절박했다.

“누이 말마따나, 나는 실수를 하기에 아주 좋지 않은가.”

나는 그의 번뜩이는 눈에 어린 절박함에 할 말을 잃었다.

“다시 들어와.”

“전하.”

그때,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를 막고, 다니엘이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를 향할 때와 전혀 다른, 황태자의 차가운 눈빛이 다니엘에게 닿았다.

“뭐지, 남작?”

“저도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라버니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니엘은 살갗이 따끔할 정도의 살기에도 요동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마음이 급하시면 실수를 하실 수도 있으니, 시간도 단축할 겸, 저도 의견을 더하겠습니다.”

나는 다니엘을 보면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미소는 매우 습관적인 것이었고, 말투는 공손하면서도 감정이 없었다.

오라버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나를 다시 물끄러미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놀랍게도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예요!”

나도 모르게 나온 경악성에 둘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소리 말고 들어와, 누이. 실수는 용납하지 않아.”

뱀 한 마리 같은 적금발의 황태자가 쉭쉭거린다.

“몸이 안 좋으면 돌아갈까요, 리샤?”

서슴없이 나를 향해서는 온기를 품는 다니엘의 얼굴이 살짝 다가왔다. 심지어 황태자 앞에서도 황녀의 애칭을 부르면서 내 안색을 살핀다. 너무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뭐가 문제인지 순간 헷갈리게 만드는.

이렇게 보니 황태자와 다니엘이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 와 닿았다. 그 둘 사이의 공기가 어쩐지 살벌했다. 다니엘, 왜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지? 황태자는 그걸 또 받아 주네? 악악.

나는 그냥 포기했다.

“아……니에요.”

그리고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나는 둘의 의견 교환을 빙자한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다니엘은 조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왕국의 멸망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젠이 아닐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흠.

“수고했어, 누이.”

내 쪽을 보면서 황태자가 말했다. 다니엘이 이어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리샤.”

무언가 ‘저 재수 없는 놈을 참아 주느라’가 앞에 생략된 것 같은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놀랍게도, 우리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턴 경! 공작! 천사님!”

그들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나는 그들을 환한 얼굴로 반겼다.

“전하?”

“…….”

“리샤, 너 또 왜 창백해?”

의아해하는 유진, 나와 다니엘과 오라버니를 번갈아 보는 카인, 다짜고짜 다가와 자기 궁금한 걸 툭 던져 놓는 헤레이스.

엉엉. 내 미남들. 왜 하필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오랜만이에요!”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조금 울먹이며 말하자, 셋이 멈칫했다. 그리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똑같이 짓더니 제각기 미소를 지었다.

어우. 어우!

히히히!

다가온 그들이 익숙한 대형으로 내 주변에 둘러섰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뭔가 물으려던 찰나, 헛기침 소리가 끼어들었다.

“흠.”

황태자였다. 내가 미소를 흐리며 돌아보자 황태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도 한마디 했다.

“리샤, 그렇게 기뻐요?”

어쩐지 서늘한 목소리였다. 영문을 몰라서 눈을 깜박이고 있자, 헤레이스가 말했다.

“리샤는 만날 그래. 나만 보면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니까.”

조금 고민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내 눈물을 못 봐서 아쉬워하던 그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헤레이스는 처음 다니엘이 내 호위로 들어온 날 경기를 하며 다니엘을 데리고 잠깐 사라졌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왔는지, 그다음부턴 별말이 없었고 말이다.

“전하.”

유진이 다니엘을 잠시 응시하다가 내게 물었다.

“태자 전하와 이야기 나누고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그래요.”

내가 황태자의 일을 무언가 돕는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셋은요? 함께 오다니.”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마중 나왔죠. 기쁘시죠?”

정중하고 조금 능글맞은 말투였다. 기쁘냐고 묻는 말은 약간 강세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파아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록스와 리플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전하.”

카인이 제법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황태자와 다니엘이 우리를 또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럴까요?”

내가 그 둘을 확인하고 찝찝한 표정을 하자, 유진이 잠시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쨌거나 불편한 분위기를 끊어 낼 기회였으므로 나는 다시 밝게 말했다.

“음. 안 그래도 가려던 차였어요. 가요, 다니엘. 가 볼게요, 오라버니.”

황태자 오라버니가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하지만 어쩐지 무섭지가 않았다. 살기를 뿜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그는 지금 무려 아리엘을 맞이해야 하는 남주의 입장이었다.

그렇게 황태자 오라버니를 뒤로 하고 우리는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라버니의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

팔랑팔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몸짓으로 한 영애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사람은…….”

하늘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 약간 처진 눈매를 가진 강아지 상의 아름다운 영애.

“아시는 분입니까?”

카인이 물었고, 답은 다니엘에게서 나왔다.

“아리엘 랭턴, 그 영애군요.”

팔랑팔랑 가까워지는 영애를 잠시 보다가 우리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 큰 움직임을 보면 한 번쯤 시선을 줄 법한데.

“요정님!”

아……, 아리엘 랭턴은 강적이었다.

“요정님?”

유진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나는 필사적으로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아리엘이 우리가 낸 길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팔랑팔랑 거닐기 시작했다. 시선은 이제 막 데이트 준비를 끝낸 황태자 오라버니에게 박혀 있었다. 우리는 자연히 우리가 방금 떠났던 뒤쪽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들 침묵했다.

“아리엘.”

거기 웬 훤칠하고 자상하며 어딘가 도도해 보이는 왕자님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웃음보단 감탄이 더 나왔다. 아까 준비할 때 다정한 면만 조언을 해 달라고 하더니. 아리엘의 이상형에 철저하게 맞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비록 에밀 때문에 갑작스럽게 생긴 이상형이기는 했지만.

내 옆에 서 있던 다니엘이 은은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완벽하네요.”

“그러게요.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 그 자체…….”

“……백마요?”

“딱 그런 이미지라는 거예요. 막 눈부신.”

다니엘이 짧게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같이 웃다가, 나는 헤레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유진과 카인도 분명 방금 전엔 저쪽을 보고 있었는데 이제 이쪽을 보고 있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묘한 표정을 하고 있던 헤레이스가 다니엘에게 말했다.

“역시 너, 죽여 버릴까 봐.”

“…….”

다니엘이 유한 웃음으로 헤레이스의 눈빛에 받아쳤다.

……이 세상 미남들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 하하.

“아리엘, 잘 지냈어?”

“응! 요정님은?”

“와, 진짜 요정님이래…….”

헤레이스가 탄성을 흘렸다. 외계 생명체를 본 얼굴이었다. 그것은 유진과 카인도 다르지 않았다. 요정님 소리에 결국 우리는 전부 그대로 그 괴상한 광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오라버니의……사랑을 다 함께 응원합시다.”

저쪽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며 말하자 유진이 큽 하며 웃음을 참았다.

“요정님, 에밀을 찾으러 가자고? 함께?”

“그래, 아리엘.”

두근두근. 데, 데이트 신청! 과연 성공할 것인가.

“찾아 준다고 했잖아.”

오, 맙소사.

“약속했으면서.”

세상에…….

푸른 눈에 순식간에 맺히고 낙하하는 눈물이 뒤에서도 그냥 막 상상이 되었다.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되게 빨리 운다.”

헤레이스의 경악한 감탄사에 나는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미치겠다.

“아, 아리엘.”

“너무해, 요정님. 우정을 걸고 약속한다고 했잖아……?”

미치겠어요. 언니, 나 좀 살려줘.

그때 다니엘이 흡족하게 웃으며 우리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차이셨네요. 안타깝게도.”

너무 티 나게 즐거워한다.

“그런 것 같군.”

카인마저.

하긴 평소에 황태자에 대해 가면 한 겹 씌운 것처럼 구는 그였다. 좋은 감정은 없어 보였지.

“에밀 님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려고 일찍 올라온 건데! 흑.”

“아리엘! 우, 울지 마.”

“정말, 실망이야, 요정님…….”

엉엉엉엉. 내가 아니라 저 아가씨가 우는 소리다.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고개를 모로 틀고서 펑펑 우는 아리엘을 보니 살짝 골이 아파 왔다.

“하…….”

카인이 잠깐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만 가죠.”

와, 어떡해.

황태자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우리 쪽은 신경도 못 쓰고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냥 자리를 피하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은 묘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황녀궁에 도착하자 방을 청소하고 있던 아린이 우리를 반겼다.

“차……를 가져올까요?”

아린이 우리를 휘 둘러본 뒤 흠칫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게는 혼자 웃을 장소가 필요했지만 안타깝게도 함께 있는 이들이 있었으므로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우리는 내 방 응접 구역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 아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놓고 간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헤레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하학! 하! 요정님이래!”

그 황태자가 무려 요정님이라는 것에 그는 큰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헤레이스 말고는 다들 별말이 없었다. 나도 좀 가라앉고 나자 이게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다.

“그 영애를 진짜,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어떡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내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어요. 미쳤네.

“원래 그런 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리샤.”

다니엘이 다소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설마 도우신다는 일이 그런…… 거였습니까?”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네…….”

“근데 리샤, 네가 뭘 도와줘? 연애해 본 적도 없으면서?”

에라이.

내가 눈을 피하자 다니엘이 헤레이스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흘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끼어들면 귀찮아지는 일에 어쩌다 휘말렸는지.”

나 들으라는 말이지, 이거. 힝. 아니, 물론 나도 목숨이 달린 게 아니었다면 남의 연애에 끼어들었겠는가.

“보나마나 거절할 수 없으셨을 것이네. 그만하게. 무례하군.”

그나마 카인밖에 없었다. 엉엉. 맞아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물론 좀 다른 사정이긴 해도 말이다.

“아, 확실히. 그렇겠군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대꾸했다. 그런 거야? 라고 하며 헤레이스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나는 다니엘의 뭔가 다 아는 것 같은 묘한 눈빛을 애써 받아내며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말을 돌리자. 앞으로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록스랑 리플리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유진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전하, 약을 개선했습니다.”

“아하!”

그들이 내가 부탁한 소문 관련 일 외에 록스, 리플리와 하는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말리지 않기로 했다. 말리면 큰 오해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삶의 의지를 버렸다거나 하는. 그건 사양이다. 늘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는 예쁜 황녀! 그렇게 그들과 어울리다가 떠나고 싶으니까.

“그래요, 그럼 가요.”

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생겼다. 비틀거리는 것을 다니엘이 받쳐 주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래요.”

다니엘이 말없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살피는 시선. 그리고 이어지는 안도의 시선. 나는 너무 선명한 그 시선을 읽으며 조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개발한다는 약…….”

다니엘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들어도 될까요?”

“당연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고 있던 유진이 말했다.

“헤레이스가 보증한 분이고, 폐하께서도 허하셨습니다. 다만…….”

“비밀 엄수라면 기본이죠.”

다니엘의 매끄러운 대꾸에 유진이 잠시 침묵했다.

“……전하,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나는 생긋 웃으며 유진에게 답했다. 그리고 무언가 옭아매는 것 같은 다니엘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 뒤,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리샤, 황태자한테 또 조언할 거지?”

함께 걷다가 약제실이 보이는 지점에서 헤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네. 왜요?”

“아니이, 그냥. 나도 해도 될까 싶어서.”

“천사님.”

나는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헤레이스가 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다고 속을 모를까.

“안 돼요. 장난치고 싶은 거잖아요.”

“아, 왜! 난 그놈, 아니 태자전하가 우는 것도 보고 싶다고!”

유진과 카인의 눈빛에 바로 말을 바꾸면서 헤레이스가 생떼를 부렸다.

“진지하게 좋아하시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장난은 하면 안 돼요.”

나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마음으로 최대한 다정하게 그에게 답했다. 늘 하듯이.

“흐음…… 알았어.”

헤레이스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생긋 웃어 준 뒤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그가 말을…… 아니에요.”

어딘가 감탄한 표정이었다. 이런 다니엘은 처음 본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말을 잘 듣는다, 이거겠지? 으하하하.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고서 입을 다물었다. 말해 줘 봐야 소용없으니까.

‘헤레이스는 누나에게 약하고 형에게는 고집부리는? 그런 스타일 같거든.’

이걸 말해 뭐해.

이윽고 도착한 약제실에서 록스와 리플리는 새 약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약을 삼킨 순간에, 나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전……하?”

“리샤.”

사실 요즘 피를 토하는 양이 좀 심상치 않다. 누가 봐도 화들짝 놀랄 만한 양이었다. 그래도 미리 혈액 보충제와 기력 보충제를 먹어 두면 피만 토하고 끝난다.

“어…….”

문제는 오늘 내가 황태자한테 붙잡혀서 챙겨 먹지를 못했다는 것이지. 시야가 흐릿해지는 동안 나는 내 사람들이 덜 놀라기를 바라며 말했다.

“저 조금만…… 잘게요.”

이윽고 시야가 암전했다.

* * *

다니엘이 황녀를 안아 들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보던 헤레이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요.”

그들 사이에서 다니엘이 황녀의 밀착 호위를 하는 것은 이야기가 끝난 터였다. 그러니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다니엘의 다정한 물음에 헤레이스가 황녀를 보며 답했다.

“안 우는 거.”

유진이 가라앉은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이라면 저 말이 무례한 심술로 들렸겠지만.’

같이 연구하고, 바깥소문 조사까지 함께하면서 그런 오해는 하지 않게 되었다.

“고통이 점점 심해지실 텐데, 티를 내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부연하듯 말을 더하는 유진에 다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익숙한 손길로 닦아 준 그녀의 입가에 아주 조금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러다가 끝까지 웃기만 할 거 같다고.”

헤레이스가 이를 갈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는 몹시 속상해 보였다.

다니엘은 솔직히 말해서 그의 친구가 걱정을 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살짝 헷갈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아까 헤레이스를 다루던 리샤를 떠올리며.

대신 그는 의문을 표했다.

“글쎄요. 그녀는 즐거워하고 있는데요.”

조금 냉소적인 태도로, 그는 아까 황태자궁에서의 황녀를 떠올렸다.

‘그 환해지던 얼굴.’

사람의 미세한 변화에 대해 다니엘보다 민감하게 읽어 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그가 보기에 리샤는 황태자의 앞에서는 어딘가 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서는 가끔은 조바심을 보이면서 강한 호감을 드러냈고.

‘저 세 사람을 향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호감을 보인다. 그것은 다니엘 그에게 보이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래, 다르지.’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그는 신경이 쓰였다.

“전하를 이쪽에 누이십시오.”

상념은 리플리의 목소리로 끊겼다. 다니엘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없이 그녀를 한쪽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그대로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록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간 궁인들이 살펴본 결과, 전하께서는 대략 3일 주기로 피를 토하시는 것 같습니다.”

“3일이라. 원인은 뭡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혼이 받은 충격이 몸에 쌓이면, 그 쌓인 타격을 피로 배출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주기가 앞으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서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시선은 리샤를 향한 채였다.

“그러면 더 빈번하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다른 경우는 뭔가?”

“다른 경우는…….”

창백하고, 가늘다. 풍성한 백금발도 자세히 보면 올이 가늘었다. 감긴 눈을 뜨면 다니엘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말갛게 빛날 것이다. 다니엘은 황녀의 이마에서 코끝으로, 그리고 입가로 시선을 옮겼다.

“이 경우는 정말 완벽한 가설일 뿐입니다만…….”

머뭇거리는 록스의 말보다도 더욱 느릿하게. 그 시선이 가늘고 흰 목에 닿았다.

“라파엘리스라는 병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나온 가설입니다.”

다니엘은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몇 올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영혼을 무너뜨리는 길은 예로부터 저주, 그리고 사념이었죠. 그렇다면 라파엘리스의 근원도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지금까지 라파엘리스에 대한 정설은 신의 저주였지요. 사념으로 영혼을 무너뜨린다는 건 거의 이론상의 원리였기 때문입니다.”

옮겼던 손을 느릿하게 회수하면서 다니엘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리샤를 바라보았다.

“사념?”

진지하게 물어보는 헤레이스의 물음에 아주 잠깐 착잡한 침묵이 흘렀다. 다소 황당한 목소리로 카인이 답했다.

“……사람의 생각이네.”

“알아. 내 말은, 그래서?”

다니엘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 같은 것은 금세 사라졌다.

“저희는 전하의 소문에 주목했죠.”

“그 허무맹랑하고 악의적인 소문들. 거기서부터 시작해 봤더니, 놀랍게도 가설을 하나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다니엘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벌써 리샤에게 책으로 알려준 것들이었다.

“라파엘리스는 어쩌면, 사람의 악의로 발생하는 병일 수 있다는…….”

그것은 정답이었다.

“가설을요.”

“그 가설이 맞을 경우, 악의가 사라지면 병이 사라지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래, 아니었다. 이미 생긴 병은 누룩처럼 영혼을 갉아 먹는다. 끔찍한 고통은 여기서 발생한다.

안쪽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다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다니엘은 그가 준 책에서 이 내용을 읽었을 때 리샤가 어떻게 반응했었는지를 떠올렸다.

‘기뻐했지.’

그 눈물이 알려준 것처럼. 그 기쁨은 진실이었다.

‘알려준 마음이 고맙다며.’

다니엘은 아주 가끔, 리샤 몰래 그녀를 굉장히 낯설게 보고는 했다. 지금처럼. 그녀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고향을 짓밟은 제국의 황녀라는 것은 사실 처음 인공정령의 인정을 받은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의미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좋았다.

‘소중하지 않아.’

좋다 해도, 그에게는 그녀보다 더욱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어린 날의 기억을 잃어서 본능만 남은 친구 헤레이스, 그리고 그가 이끌고 있는 정령의 선택을 받은 자들. 그들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녀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서…….

“어떻게 생각해도,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꾹 억누른 듯한 유진의 말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방법은 없다. 라파엘리스는 사람의 악의가 낳은 병. 무너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녀는 곧 죽는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면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조금 더 가쁘게,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며 쿵쿵거린다. 숨죽여 그녀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자 록스의 답이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확실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녀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눈을 뜨려 하는 듯했다. 다니엘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더 자요, 리샤.”

말소리가 뚝 끊겼다.

저기 있는 이들은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감추려 한다. 바깥의 소문이 황궁 이상으로 끔찍하고 더 악의적이라는 것도. 그 독사 같은 황태자마저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는 것도.

‘리샤, 당신이 충격을 받아서 혹시라도 수명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까 봐, 저들은 그렇게 해요.’

그녀에게 호감을 품으면서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하던 다니엘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러나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려주어도, 그녀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아 할 것임을. 그녀는 강하다.

‘사람이 눈이 부실 수도 있었다니.’

그의 세계에는 없던 사람이라서, 괜히 더 눈부신 것일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암살자였다. 그는 죽음이 익숙했고, 그의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애쓰기에도 여력이 없었다. 아무리 좋아하게 되었어도, 르페르샤 황녀는 제국의 황녀였다. 피의 계약도, 그녀의 숨이 멎는 날 끝나겠지. 그녀의 순리를 따라 그녀가 죽는다. 그로서는 그리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녀에 대한 의뢰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적어도 암살로 죽지는 않도록 손을 써 두었다. 그러나 그뿐.

그랬는데. 지금도 다를 것은 없는데.

“음. 다니엘……?”

부드럽게 눈 위를 덮는 다니엘의 손에 리샤가 웅얼거리며 그를 부른다. 붉은 기가 돌고 있음에도 죽은 사람 같았던 입술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생기를 머금는다.

“피를 너무 많이 토해서, 피곤할 거예요.”

그는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눈에 담았다.

“괜찮아요.”

망설임, 그리고 미소. 박혀 들어오는 그 모든 것들을.

“일어날래요.”

햇살을 머금은 듯 다정한 울림이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눈을 덮은 제 손을 가만히 보다가 무심코 딴소리를 뱉었다.

“작네요.”

“네?”

“리샤 얼굴이요.”

손아래에서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간지러워요.”

그녀가 풋, 웃음을 터뜨린다. 살포시 휘어지는 눈웃음이 손 아래로 생생히 느껴졌다. 다니엘은 자신의 벼려진 감각이 주는 이 순간에 몰입했다.

“그냥 더 자요, 리샤. 이제 곧 해도 지니까요.”

다독이듯이,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다니엘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음…….”

리샤의 깜박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잘 자요.”

지친 그녀가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라며, 다니엘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도 그녀는 보지 못할 그 미소는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믿는 미소였다.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그녀가 더 오래 살기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늘 순응하며 살아왔고,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 언제든 그녀가 편안하기를 바랐다.

그가 무언가를 해 주지 않아도 리샤는 충분히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작은 순간에서 황홀을 찾아내며, 뛸 듯이 기뻐할 줄을 알며, 사랑할 줄을 안다.

그래, 그런 면들이 금세 눈에 들어오고 말아서. 그래서 어느새 이리 마음을 주게 된 것이겠지.

잠이 든 리샤를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다니엘은 그제야 일어나, 밖에서 말없이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록스와 리플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세 남자만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그럼 이제.”

조금 전과 달리, 다니엘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제가 아는 것을 말해 보죠.”

“무엇입니까?”

암살로부터의 위협을 완벽하게 지웠다는 것에서 다니엘을 인정했던 유진이 물었다. 다니엘이 답했다.

“3개월.”

“예?”

“3개월 후, 그녀는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겨울에 떠날 거라고.

그를 질색하는 정령 젠이 도움을 청해 왔다.

“어디로?”

카인이 가라앉는 눈으로 물었다.

“왜?”

“여행을 할 생각인 것 같았는데.”

다니엘은 그녀가 고통에 대해 거의 초월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 목적이, 마지막을 맞이할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담담한 어조로, 다니엘이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황녀의 최근 행보를 차례로 떠올렸다. 책을 써서 남기고, 황태자의 말 같지도 않은 부탁을 들어주며 연애를 돕고, 툭하면 혼자서 밖을 구경하고, 암살자인 다니엘과 친구가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두려움을 초월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피를 그렇게 토하는데, 그래, 정작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못 느꼈을 리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빛나게 채워 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지키고 싶은 것 아닐까.’

그녀의 시간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분명하다.’

그녀라면 그럴 만했다.

아, 그녀는 어쩌면 이렇게 강한 사람인지.

“……지켜 주고 싶었는데.”

각자의 생각에 잠긴 침묵을 깨며 유진이 신음하듯 말했다.

“도리어 지켜지고 있었군요.”

다니엘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그린 채로 유진을 보았다. 그리고 카인을, 마지막으로 헤레이스를.

“……니들이 너무 걱정해서 떨어뜨려 놓은 거였나 보네.”

헤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툭 말했다. 유진과 카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근래 들어 자꾸 그 둘을 떼어놓고 싶어 하는 것을 그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처음엔 꽤나 서운하기도 했었는데. 유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우리가, 나중에 너무 힘들어질까 봐 그러신 거였나 봅니다.”

그녀의 죽음에 점차 매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영민한 황녀가 그걸 몰랐을 리가. 카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함께하는 시간을 무겁게 여기는 것 자체를, 바라지 않으셨던 거겠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니엘의 묘한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둘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저 우리의 곁에 즐겁게 머물다 가는 추억으로 남기만을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네.”

“소문을…… 알아봐 달라고 할 때 내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왜 싫으면서 부탁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전하께서도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셨던 거겠지.”

다니엘은 눈을 깜박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싶은 기분.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

그저 그녀는 강하고, 알아서 죽음을 준비할 정도로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강하니까, 그렇게 괜한 걱정을 하면서 부담스럽게 굴지 말라고 가볍게 말하려던 것이었는데.

“…….”

하지만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니엘이 헤레이스를 힐끔 보았다. 헤레이스는 맹한 표정으로 유진과 카인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한 말이 이 대화의 발단이었음에도 말 이해를 못 하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정보 길드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천재적인 기억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부길드장이 길드장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니들 지금 뭐라고, 읍!”

“나중에 물어봐요, 헤레이스.”

그러는 거 아니에요. 다니엘이 뒷말을 겨우 삼키며 말하자, 헤레이스가 웬일로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이 철없는 친구가 제 충고를 들어줬다는 것에 감격해서, 그만 그들에게 하려고 했던 다른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는 말 말이다.

‘죽을 자리 찾는 여행을 암살자와 한다니. 신기했지.’

물론 그걸 들었다면 헤레이스는 그의 충고를 절대로 듣지 않았을 테니, 잘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 * *

“사랑은 참 신기한 것 같아.”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건국제 날 아침. 오랜만에 같이 다과를 즐기던 리니와 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막 사람이 달라지고 그러는 건 정말 대단하다 싶어서.”

“……누가 전하께 고백했나요?”

리니가 어쩐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정말 그냥이야.”

“…….”

“…….”

전혀 아닌 것 같다는 리니의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아린의 재빠른 대처로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전하, 그럼 이제 다과도 즐기셨으니, 준비를 하셔야죠!”

잠시 후, 자기들끼리 뭔가 속닥거리던 둘은 아주 의욕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 만만인 모습에 내가 식겁하며 말했다.

“망신만 안 당하면 충분한데.”

오늘 저녁의 무도회는 건국 무도회. 전에 황태자의 생일 무도회에 왔던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였다. 베일 쓰면서 황태자에게 신하를 자처한 것이 슬슬 다 알려졌을 시기라는 말이다.

“그동안 충분히 갔으니까 오늘까지만 가면 되기도 하고. 눈에 안 띄면 더 좋아!”

황태자 오라버니 말대로 무도회는 웬만하면 열심히 다 갔다. 덕분에 젠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던 것도 못 했는데! 악녀 소문은 확실히 덜해진 것 같고, 충분해.

“뭘 입으셔도 망신은 안 당하시겠지만, 안 되죠, 전하. 전하께선 가장 빛나셔야 한다고요!”

이럴 때는 자기주장이 더 강해지는 리니가 열변을 토했다. 나는 결국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몸을 내맡기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저녁이 다 된 시간에, 나는 거울 앞에서 정신을 차렸다.

“여…… 신.”

“맞아요! 마치 여신 같으세요.”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둘이 흡족하게 맞장구를 쳤다.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이라 민망해할 새도 없었다.

“너무 눈에 띄는데.”

오늘은 아리엘이 데뷔하는 날이자 원작이 시작되는 날이다. 원래의 황녀 언니는 참석도 하지 않았던 무도회. 이 무도회의 꽃은 아리엘이었다. 원작이 달라지는 거야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문제는 황태자 오라버니가 그런 상황을 매우, 몹시 바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음, 그래도 뭐, 예쁜 게 죄는 아니지. 내가 제일 예쁜 걸 어쩌겠어, 으하하항.’

나는 그냥 흐뭇하게 우리 언니의 예쁨을 즐기기로 했다.

방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다니엘과 마주했다.

“오늘은 그냥 멋있네요.”

“아쉽다는 말로 들리네요, 리샤.”

“아니에요. 제가 방금 거울을 봐서 눈이 좀 높아져서 그만.”

“아, 그러시군요…….”

다니엘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이해해야죠.”

그리고 내 손을 가볍게 잡아 들고 살짝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장갑 위로 꽃잎처럼 왔다 가는 그것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 나 모쏠. 모쏠이라고요!

물론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조금 새침하게 웃어 준 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와 팔짱을 꼈다. 그의 흑갈색 눈이 느릿하게 접혔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회장으로 발을 디뎠다.

원작의 시작이었다.

* * *

다니엘에게 팔짱을 끼고 회장으로 들어가는 황녀를 보며 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얼굴인가?”

함께 있던 카인이 묻자, 유진이 답했다.

“뺏긴 기분이라서요.”

솔직한 답에 카인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계가 필요한 자이기는 하지.”

어제의 깨달음 이후, 유진과 카인은 마음을 바꾸었다. 황녀를 지켜봐 주는 마음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조급함에 그녀가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가 있는 그대로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기를 바라며. 그래도 다니엘이라는 자는 위험해 보였지만 말이다.

“암살 길드장이라니. 정보 길드장보다 더합니다. 하지만…….”

더 비밀스럽고, 더 두려운 자였다. 그런 자가 곁에 붙어 있는데 황녀가 어쩐지 행복해 보였다.

“기뻐하시니까.”

한숨 어린 말에 카인이 말없이 동의했다.

다니엘이라는 자는 특이했다. 그는 황녀가 마치 오래 살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오래 살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이 황녀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대했고, 그것이 어쩌면 황녀에게 아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어제 그래서 다니엘을 비로소 완벽하게 인정했던 것이다. 유진과 카인은 다니엘 곁에서 편안해 보이는 황녀의 모습을 부드러운 눈으로 보았다.

* * *

건국 무도회에 아리엘은 황태자의 파트너로 참석한다. 그렇게 데뷔를 해서 주목을 받고 동시에 아니꼬워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아서 좋아요.”

“다행이네요.”

다니엘이 인식 교란 마법이라고 한 방법 덕이었다. 나는 가만히 아리엘이 원작의 시작을 끊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원작의 시작을 보았다.

“와!”

“리샤?”

“아름답네요. 저 두 사람.”

아리엘과 라빌로프는 함께 있어 꽤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라빌로프가 아리엘을 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나는 다니엘에게 인식교란 마법을 풀어달라고 했다. 황태자를 도울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법을 풀자마자 이비엔 경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전하.”

“이비엔 경! 오늘 아름답네요.”

“과분한 칭찬입니다. 전하야말로 오늘 너무나 아름다우십니다.”

이비엔 경의 매 같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요즘 바쁜 만큼 제대로 상단을 키워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그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고위급 인사가 많은 오늘의 무도회에서도 그것은 티가 났다.

“이비엔 경, 여기저기서 부르네요. 어서 가 봐요. 전 쉬고 있을 테니.”

“그러겠습니다, 전하!”

굳은 다짐을 하는 비장한 얼굴로 답하고서 이비엔 경이 멀어졌다. 다니엘과 함께 편안한 침묵을 즐기며, 나는 회장 안을 구경했다.

아리엘은 과연 원작대로 움직였다. 황태자 옆에 꼬옥 붙어 있다가, 그가 바쁜 것 같자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멀리서 봐도 티가 나도록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혼자서 테라스로 향한다. 아, 이제 곧 영애 무리가 다가가겠지?

나는 조금 기대에 찬 눈을 했다. 로판을 볼 때마다 거의 꼭 봤던 장면. 영애들이 무리지어 다니면서 여주인공을 흉보거나 인신공격하는 것 말이다. 그런 장면의 단골인 영애 무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흥미진진해요?”

다니엘이 내게 물었다. 나는 온화하게 답했다.

“그냥, 모든 것이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나는 흥미롭다. 애초에 남주와 여주 때문에 원작을 피하려고 한 거였지, 그것만 아니었다면 원작의 팬인 내가 원작 구경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하.”

다니엘이 노래하듯 수긍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나를 살벌하게 쳐다보고 있는 오라버니와 눈이 마주쳤다.

“…….”

“…….”

눈으로 말해요 같은 능력은 없지만, 어쩐지 저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아리엘 도와라 이거지?

아니, 저건 그냥 알아서 하게 두면 안 될까? 딱 내가 악녀로 몰리기 좋은 상황 같은데 말이다. 모른척하며 눈을 굴리려고 하자, 오라버니가 슬쩍 비웃으며 입으로 말했다.

‘도. 와.’

“……흑.”

“가지 마요. 안 가도 돼요.”

나와 같은 것을 본 것인지 다니엘이 슬쩍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녀올게요.”

나는 그냥 마음 편히 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황태자가 정해 준 매뉴얼대로 무도회에서 늘 우아하고 되도록 상냥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리엘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

‘저 무리에게 말실수 한 것 때문에 이 무도회 후에 곤욕을 치르니까.’

그 곤욕 치르는 것 덕에 감춰진 고급 살롱을 찾아내게 되지만.

나는 우아하게 걸어 다니엘의 마법 범위를 벗어났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리엘과 영애 무리가 들어간 테라스로.

“……그러니까, 영애. 혹시라도 영애가 마음이 상할까 봐 하는 말이에요.”

“착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태자 전하께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시는 분이거든요. 한 번 파트너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안 될 겁니다.”

오오. 나는 잠시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다가 내 임무를 자각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낸 소리에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화, 황녀 전하?”

당황하는 무리들을 힐끔 일별한 뒤 나는 아리엘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흑.”

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그녀를 가리고 서서 영애들을 마주했다.

“영애들, 이쯤 하는 게 어떨까요?”

내 존대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들이 보였다. 입까지 벌리고 나를 보는 통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리엘이 막말하고 저 영애들에게 찍혀서 험담으로 고생하지만 않으면 된다.

“저, 전하께서 어째서…….”

“저희 문제입니다. 죄송하지만 끼어드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전하.”

우왕좌왕 뒤늦게 터져 나오는 소리에 나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멈칫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뒤쪽 상황을 살폈다. 훌쩍임이 멈추었는지.

“비, 비켜 주세요.”

그러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엄청 울먹이면서도 내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이미 나의 악녀 소문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일단은 막아서고 비켜주지 않았다.

“전하, 뭘 하고 싶으신 건가요?”

“저희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궁에서 쫓겨나신다지요?”

아, 베일 일로 소문이 그렇게 났구나.

“거기다 그 로암 남작이라고 했나요? 그분과 관련해서도 아주 민망한 소문이 돌던걸요.”

“아, 하긴. 전하께선 이런 소문에는 신경 쓰지 않으시는 분이었지요?”

내가 너무 착하게 굴었는지, 그들은 내가 가만히 있자 더 기고만장해서 나를 모욕했다. 베일 일로. 다니엘 일로. 하지만 나는 절대 화내지 말라고 한 것을 지켰다. 그냥 니들은 떠들어라, 하고 있었을 뿐.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사실 별로 화도 안 났다. 그들은 신기한 엑스트라들이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매뉴얼대로 참 실감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신기하네.’

대사도 뭔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의 대사뿐이었다. 나는 듣다가 그들이 할 말이 다 떨어진 것 같자 입을 열었다.

“내 신경을 많이 써 주고 있었군요. 고맙네요.”

상냥하게.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좋은 구경했어요. 그런 말까지 건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지 넋이 나간 그들을 뒤로 한 뒤, 아리엘을 조심히 이끌고 테라스 밖으로 나섰다.

방금 그 영애들은 모르겠지. 내가 결국 그 영애들의 가문을 황태자의 손아귀에서 지켜 냈다는 걸. 원래대로라면 저런 수위의 모욕이 아리엘을 향하게 되고, 아리엘은 눈물을 퐁퐁 흘리며 회장을 뛰쳐나가게 된다.

그래, 저렇게.

“……?”

저렇게……?

나는 내 손을 뿌리치며 어허헝, 하고 회장을 울며 뛰쳐나가는 아리엘을 멍하니 보았다.

뭐, 뭐야? 왜 저래?

* * *

아리엘은 정원에 나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무서웠어. 흑.”

처음 수도에 왔을 때 살롱에서 들었던 것은 이 나라 황녀의 험담이었다. 얼마나 민망하고 무서운 소문들이던지.

“악녀 황녀.”

절대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게다가 거기엔 왜 끼어들어? 누가 해 달랬나?’

방해였다. 아리엘은 자신이 울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가 울어서 풀리지 않은 일은 없었다. 아까 그 영애들 또한 죄책감에 몸부림을 치게 되었을 거다.

아리엘은 회장에 도착한 뒤 보았던 황녀를 떠올렸다. 구석에 다니엘이란 사람과 나란히 선 채로 서 있었다. 춤도 추지 않고. 그런데 주변의 시선은 모조리 그쪽을 향해 있었다.

“이상하지요? 로암 남작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요.”

“어두워서라기보단 마법 같네요. 세상에, 마법사라니.”

“전하 말입니다. 어째 갈수록 아름다워지시지 않습니까?”

“소문은 조금 그렇지만 그건 그래요.”

아리엘은 악녀 황녀도, 그리고 그 황녀를 이상하게 주목하는 주변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참해.”

모두의 중심에 있지 않는다는 것은 아리엘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아리엘의 눈에 또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때였다.

“아리엘, 괜찮아?”

황태자였다.

적금색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황태자는 요정님이었다. 어린 날에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던.

“요정님…….”

잠시 연락이 끊기기는 했지만 다시 그녀에게 다정한 편지를 보내 인연이 이어진 친구였다. 아리엘은 함께 빠져나와 준 황태자 앞에서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가 특별하게 대해 주는 것이 좋아서.

“나…… 너무 슬퍼.”

“왜 그래. 응?”

“……모, 모두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아.”

관심 받고 싶다는 것을 아리엘은 시무룩함으로 포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예상 못했던 반응을 마주하게 되었다.

“누가 널 무시했어, 아리엘?”

황태자가 눈을 번뜩이며 캐묻기 시작한 것이다.

“응?”

“세세하게 기억해서 말해 봐.”

아리엘은 당황했다. 그녀의 요정님은 그 상대들을 전부 발라 버릴 기세였다.

‘이게 아닌데.’

아리엘은 잠깐 속상한 표현을 받아 주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실제로도 그녀를 무시한 사람이 없었다.

‘있기는 했지만 황녀가 막아 냈었고.’

아, 황녀. 황녀가 있구나. 아리엘은 쉽게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당장 미움 받기 싫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상처를 받았을 뿐이야, 하는 회피적인 생각으로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 황녀.”

“응?”

어릴 적의 기억보다 더 다정해진 요정님이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댔다.

“르페르샤 황녀 전하 말이야.”

“……음?”

“그 황녀 전하가 나, 나를…… 무시했어.”

어차피 나쁘다고 소문난 여자잖아. 이 정도 험담은 티도 안 나겠지. 이상하지도 않겠지.

“무시를 했어?”

아리엘은 요정님, 아니 황태자의 의구심 어린 눈빛을 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응. 그래서 너무 속상해.”

아리엘이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훌쩍였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누구든 그녀를 달래 주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어……?”

그런데 일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갔다. 가슴이 덜컥해서 올려다보자, 황태자는 그야말로 순수한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게 그저 의문인지, 비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황태자는 그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지만, 그것이 다정함을 한 꺼풀 벗어 던진 모습이라서 아리엘은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리엘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내 말을 설마 의심하는 거야?”

정말로 상처를 받은 것처럼.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오해일 거라는 거지.”

어김없이 다정한 말투인데, 말 내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리엘이 습관적으로 울먹이며 고개를 팽 돌렸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입을 꾹 다물고서, 앞에 보이는 장미 한 송이를 우울하게 톡 건드렸다.

“아리엘?”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풀릴 뻔했다. 하지만 이내 아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앗.”

장미 가시!

세상에, 너무 따가워. 아리엘이 처연한 얼굴로 구슬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요정님이 놀라며 아리엘에게 물었다.

“왜 그래. 응?”

“꽃…….”

“응, 꽃?”

“가시에 찔리고 말았어…….”

무언가 때려 부술 기세로 흥분하던 요정님이 잠시 후 다시 아리엘에게 물었다.

“……가시?”

“응.”

아리엘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은 것처럼 일그러진 채로 요정님을 응시했다. 요정님은 가만히 서서 그 눈에 담긴 자신을 보다가 눈을 한 번, 또 한 번 깜박였다.

그는 치열한 고민 끝에, 아리엘을 위해 그 장미의 가시를 하나 잘라 냈다.

칼로.

“…….”

“…….”

아리엘은 울던 것도 멈추고 그녀의 요정님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라빌로프 황태자는 약간의 희망을 품은 눈으로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한편 그런 둘을 관전하던 다니엘과 헤레이스의 눈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저것들 뭐 하는 거지?”

“신경 쓰지 마요. 그냥 끼리끼리 만난 거니까.”

“그러니까 끼리끼리 만나서 지금 뭘 하는 거냐고.”

“…….”

헤레이스와 있을 때는 익숙하게 돌아가는 대화 흐름에 다니엘이 한숨을 삼켰다.

“글쎄요. 굳이 말하면 데이트?”

“야, 내가 하나 되게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뭔데요.”

다니엘이 온화한 어조로 말하자, 헤레이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지금 저 황태자가 저 이상한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

다니엘은 그들의 대화가 아래에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래에서 아리엘이 황태자 라빌로프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갈색 머리 영애랑, 금발 영애랑, 눈이 찢어진 영애랑…… 다 나한테 테라스에서 뭐라고 했어.”

“그랬군.”

다시 주제가 돌아온 것 같았다. 이번에는 리샤를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쪽 거짓말은 그만둔 것 같았다.

하긴 바로 들통날 행동이었다. 둘의 손에 쥐어진 종이에는 오늘 르페르샤 황녀의 험담을 한 목록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바로 들어가려다가 아리엘의 말에 멈춘 것이었고, 아리엘의 모함이 계속되었다면 손을 쓸 생각이었다.

“계속 저러네요.”

처음엔 진짜를 이야기하다가 라빌로프가 그래서 더 무슨 짓을 했느냐고 캐묻자 떠밀리듯 말을 지어 내기 시작하는 아리엘을 보며 다니엘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가만히 보던 헤레이스가 툭 말했다.

“그런 사람 없었는데? 꿈꿨나 봐.”

둘의 대화가 멈췄다. 휙 고개를 드는 아리엘과 못마땅한 표정의 독사 같은 황태자를 헤레이스가 지켜보았다. 헤레이스가 훌쩍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

다니엘이 옆에서 헤레이스를 눈으로 좇다가 픽 웃었다.

“무슨, 그런 사람이 없었다니. 무슨 말이죠?”

아리엘이 발끈했다. 헤레이스가 말했다.

“아니까 말하지. 없어, 그런 사람. 근데 설마 지금 장미 가시 찔려서 운 거야? 정말로?”

맥락 없이 툭 던지는 말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누군데요. 그리고 맞아요. 가시에 찔려서 눈물을 흘렸죠.”

그 당당함에 헤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니엘은 리샤 때와 달리 긴장하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얼굴에는 호감보다는 악의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그냥 새로운 인종을 보는 눈빛이네.’

다니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리샤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웠다고 생각하며. 그의 머릿속에 아리엘은 이미 없었다.

“이리 와, 아리엘. 진정해.”

라빌로프 황태자는 아리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가까스로 아리엘의 요즘 취향에 맞춰서 다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표정은 관리하지 못했지만. 아리엘이 보지 못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응. 요정님, 근데 이 사람은 누구야?”

“그는…….”

아리엘이 돌아보자 그는 표정도 정리했다. 아리엘 맞은편에서 황태자의 행태를 고스란히 지켜보던 헤레이스가 둘 다 등신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깐.”

그러나 헤레이스에 대해 아리엘에게 설명하려던 라빌로프는 헤레이스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요정님? 그는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헤레이스의 손에 들린 종이. 아마도 정보지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 헤레이스가 그에게 가져올 정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누이의 소문의 출처들.’

아리엘이 갸웃했지만, 라빌로프는 그 종이에 온 신경이 쏠려 답하지 못했다.

“……이리 내라.”

헤레이스가 흐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아리엘 쪽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아리엘이 있는데 줘도 되는 거냐는 눈짓에 라빌로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잔말 말고 내놔.”

“그렇다면야.”

헤레이스가 들고 있던 종이를 가볍게 던지며 말했다.

“이번 무도회에서는 확실히 줄었어.”

“그래야지.”

라빌로프가 그걸 낚아채듯 받아서 쭉 읽으며 답했다.

‘뭐지?’

자신을 빼고 흐르는 상황에 아리엘이 고개를 한 번 더 갸웃했다.

“요정님, 뭐야?”

“…….”

하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울먹이려다가 아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목록의 끝까지 읽은 라빌로프의 얼굴에 날것 그대로 드러난 감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매우 살벌하고, 몹시 사나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차가워.’

미소가 저렇게 차가울 수도 있구나. 멍하니 생각하며 아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요정님이 저런 표정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라빌로프의 곁으로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종이의 내용을 확인했다.

“황녀를 헐뜯는 인간들을 파악할 것?”

첫 줄에 있는 제목이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죽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정작 목록 내용은 비밀스러운 암호 글자로 되어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리엘이 첫 줄을 소리 내어 읽자, 라빌로프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아리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아리엘.”

“이게 뭐야?”

“별거 아니야. 요즘 벌레가 기승을 부려서.”

“벌레……?”

“응.”

아리엘의 동그란 눈과 라빌로프의 부자연스럽게 다정한 눈이 맞닿았다.

“그렇구나. 벌레라니, 징그러워.”

“그렇지?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꽤 줄었어. 그러니 걱정 마.”

“으응.”

아리엘은 요정님의 그 다정한 눈빛을 신기한 기분으로 마주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꼭 <눈의 공주님과 개구리 왕자님>에 나오는 사악한 마법사만큼 무서워 보였는데.’

지금은 봄 햇살까진 아니고 겨울 햇살 같은 따스한 표정이었다.

‘요정님은 신기한 사람이구나. 그 황녀랑은 뭔가 다르기도 하고…….’

아 또! 또 황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리엘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리엘?”

가만히 지켜보던 헤레이스가 하품을 하며 라빌로프에게 물었다.

“있잖아, 전하. 진짜 저 여자가 좋아?”

라빌로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헤레이스를 보았다. 다행히 아리엘은 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네놈은 닥쳐라.”

그녀의 요정님이 심지어 닥치라는 상스러운 말을 했다는 것도 아리엘은 의식하지 못했다.

‘돌아가야겠어. 요정님이 있는데도 황녀 생각만 나는 건 말이 안 돼. 그냥 착각하는 것일 뿐이야. 다시 보면 뭔가 달라지겠지.’

아리엘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고개를 쳐들었다. 어딘가 먹구름이 낀 요정님의 얼굴이 아리엘을 반겼다. 아리엘은 요정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비장하게 말했다.

“나 돌아갈게.”

“……어디로?”

음산한 느낌의 물음이었다. 아리엘이 어린 날의 어느 때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장으로!”

“그렇구나. 알았어, 아리엘. 그럼, 내가…….”

“혼자 갈게!”

황녀와 단둘이 있어야 이 이상한 느낌이 착각이라는 걸 제대로 알겠지!

‘요정님이 방해물인 건 아니지만…….’

두서없는 생각을 하며 아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빨리 황녀에게 가고 싶었다.

“그래…….”

요정님이 어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스라는 재수 없는 인간이 말했다.

“전하, 얼른 가라고 하자. 보기 싫은데.”

“…….”

헤레이스가 낄낄거리는 소리에 아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기분 나쁜 인간이야! 그녀는 휙 돌아서서 회장으로 팔랑팔랑 돌아갔다. 가면서 생각했다.

‘역시 수도는 무섭다.’

시비를 걸어오는 영애들도 있었던 데다, 장미꽃 가시에 손가락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씩씩하게 버텨야 한다.

‘에밀 님을 볼 때까지는!’

외로운 별장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던 소설. 그녀는 그 소설의 저자인 에밀 님을 만나기 위해 힘을 내야 했다.

* * *

나는 아리엘이 가련하게 뛰쳐나간 방향을 어이없게 지켜보았다. 살짝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여주한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잇, 직접 보니까 진짜 상성이 안 좋네!’

다니엘이 다가와 물었다.

“리샤, 무슨 일이에요?”

“……안에서 곤란해 보이기에 도와주긴 했는데, 저렇게 뛰쳐나가네요?”

그를 돌아보며 답하자, 그가 아리엘이 나간 쪽을 힐끔 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서늘해 보였다.

그때 테라스 안쪽에서 우리 뒤에 남겨졌던 영애들이 뒤늦게 나오기 시작했다.

“아.”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들이 흠칫했다.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아까처럼 막말을 할 리는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그저 설핏 웃어 주었다. 그들의 표정이 순간 이상해졌다. 화가 났는지 뜬금없이 조금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아니, 우리 예쁜 언니 얼굴로 미소를 지어 주는데 왜 표정들이 저 모양인 것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속으로 툴툴거리며 다니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니엘과 함께 아까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윽.”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신음을 흘렸다.

“전하.”

가일 후작이었다. 황태자 오라버니의 측근이자, 나에게 유난히 의심이 가득한 그 인간!

‘요즘은 좀 덜해지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잔소리 대마왕이라는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가일 후작은 영애들에게 눈치를 줘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이지적인 청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말했다.

“또 이러고 계십니까?”

“후작.”

“자꾸 그렇게 두 분이서만 계시면 무도회에 오신 의미가 없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하아……. 알았어요.”

여지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귀족들 사이의 소문이란 정말이지 성가신 것이었다. 뭔가 세세하게 조심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가일 후작의 잔소리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혼자 움직이십시오. 괜한 소문 만들지 마시고요.”

“…….”

다니엘이 물끄러미 가일 후작을 보았다.

“저는 전하의 호위이자 파트너입니다만.”

아주 다정한 말투였지만 가일 후작은 다니엘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층 서늘해진 다니엘의 분위기에 몰래 웃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내 쪽으로 향하게 한 뒤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죠?”

은근하게 웃자 다니엘의 미소가 차츰 부드러워졌다.

가일 후작이 굉장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도 생긋 웃어 주었다. 내 의미심장한 미소에 가일 후작이 흠칫했다가 휙 몸을 돌려 멀어졌다. 멀어지는 그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이윽고 나는 다니엘과 슬쩍 떨어졌다.

‘뭐, 언제나처럼 하면 되겠지.’

사실 저 움직이라는 말은 내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귀족들의 문화나 분위기에 내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판타지 세상의 귀족들은 신기하니까.’

가벼운 덕질을 하듯 하면 되는 것이다. 말을 최대한 줄이고, 주로 들어준다. 그리고 적당히 그들 하나하나를 구경하다가, 다른 무리로 옮겨 가는 것이다.

“영애, 얼른 저쪽으로 가요.”

그렇게 움직이다가 이렇게 뭔가를 옷에 엎질러서 곤란에 처한 영애를 보면 몸으로 가려 주고, 수습 공간으로 빠져나가게 해 주기도 하고.

“가, 감사합니다, 전하.”

남녀노소 관계없이 구경하다보면 사소하게 곤란한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데 망신을 당할까 봐 하나같이 감추기 바빴고.

‘그러다 더 곤란해지고.’

나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다가 슬쩍슬쩍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다. 나는 평판이 아주 나쁘기 때문에 어떤 실수를 들켜도 그들이 망신스러울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은 처음보단 편안하게 도움을 받아들인다.

내가 그런 심리까지는 알아냈다, 이 말이야! 뿌듯했다. 히히.

* * *

수도의 귀족들은 대체로 소문에 밝고, 영악하며, 경계심이 많았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부분 소문이 가지는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소문을 옮기고, 만들었다. 그들은 소문을 이용하고, 그 소문 속에 감춰진 유용한 정보를 사금 캐듯 발견하는 것을 즐겼다.

“황녀 전하 소문 들으셨습니까?”

그런 그들에게도 르페르샤 황녀의 소문은 조금 독특한 축에 속했다.

“그분 소문이야 한두 개가 아닌 것을요.”

타계한 전 황후 리시안 바누스는 악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들보다는 황실에 더 큰 해를 준 존재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딸에게까지 악녀의 굴레를 씌울 정도로 그 황후가 악독했는가 하면, 아마도 다소 회의감을 느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황녀의 소문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었다. 바누스 가문을 수도에서 몰아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는 중요한 가치가.

물론, 그 가치 이상은 없는 이 소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활발하게 부풀려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많기야 하죠. 제가 말하는 건 최근의 소문이랍니다.”

“별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독특한 소문이기는 하지만, 말을 옮기는 것도 때로는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큰둥한 물음에 답답하다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아니, 정말 못 들으셨습니까?”

조금 소문에 어두운 편인 귀족에게 말을 꺼낸 귀족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베일 사건 말입니다.”

나직하게 옮기는 소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황녀가 황위까지 포기하며 황태자에게 숙였다는 것. 간단하지만 그것으로 예상되는 파장은 컸다. 일단 수도 귀족들과 바누스 가문 휘하의 귀족들이 극도로 반목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던 귀족의 눈이 이제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그들은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 족속들이었고, 그만큼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건국제가 가까워졌을 무렵. 그들은 아주 젊은 층에서부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건국일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는 무도회에 르페르샤 황녀는 매일 한 번씩 참석했다. 때로는 작은 무도회에, 때로는 큰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낸 황녀는……. 그들이 알던 것과 달랐다.

“그렇군요. 어쩌다가. ……저런.”

황녀는 나긋나긋하면서도 쉽게 대할 수 없는 우아함을 두르고 있었다. 귀족들의 취향에 그보다 맞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황녀는 말을 잘 들어주었다. 작은 일에도 귀를 기울여 주고, 가끔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주기도 했다.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밝았고, 또한 상냥했다.

“괜찮아요?”

특히 영애들에게. 드레스를 입고 이곳저곳을 활보하는 것은 종종 당혹스러운 상황을 야기했는데, 황녀는 무심한 듯 다가와 대기실로 티 나지 않게 빠져나가는 데에 도움을 줬다.

귀족들에게 향하는 도움은 은밀하여 사려 깊게 다가갔고, 시중을 드는 궁인들에게 말없이 주는 도움은 궁인들에게 심쿵을 선사했다. 황녀의 많은 장점들이 그들에게 자꾸 드러났다.

또한 그녀는 아름다웠다. 솔직히 한 번 보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바뀐 분위기의 황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귀족들은 젊은 층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최근 튼튼한 상단을 키우며 능력 있는 귀족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이비엔 영애와 젊은 층 사이에서 귀여움으로 인기가 좋은 소피아 영애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과거가 쌓이면 좋은 오늘이 만들어진다. 소문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씹어 온 실체 없는 소문을 쉬이 버리지는 못했지만, 어제 본 황녀의 인상 깊은 모습을 외면하지도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영악한 만큼 그런 종류의 진솔한 모습, 그리고 그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약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황태자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여론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과하게 황녀의 뒷소문을 읊던 몇몇이 수도 밖으로 쫓겨나거나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 은발의 천사를 보았다는 둥, 흑발의 사신을 보았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하나둘 귀족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약간의 강압까지 더해져 급물살을 탄 결과. 건국일 당일 무도회에서, 황녀에 대한 나쁜 소문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다니엘과 관련된 흥미 본위의 소문이 살짝 돌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곧 사라질 소문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와 황태자, 황녀에 대해 열심히 추측하고 있었다. 황제는 암묵적으로 이 변화를 용인하고 있었으며, 황태자의 개입은 거세고 선명했다. 거기다 어딘가 변한 황녀 본인.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상태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황녀가 달라졌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호감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지금의 황녀는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되니, 슬금슬금 황제와 황태자가 황녀가 귀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 소문을 말도 안 된다며 웃어 넘겼지만 소수의 눈치 빠른 이들은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황태자가 제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황녀를 향한 온갖 종류의 수군거림이 무도회의 일상적인 대화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새 황녀는 무도회의 가장 주목받는 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그렇게 오늘도 회장을 한 바퀴 보람차게 돌고 난 뒤 다니엘 곁으로 돌아왔다.

다니엘의 시선은 회장 구석구석을 다니는 내내 내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혹시 눈빛으로 날 지키는 거예요? 든든하긴 하지만 여기서 경계할 것이 뭐가 있다고요.”

장난 반으로 묻자 다니엘이 조금 느리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글쎄요. 경계할 것이라.”

무방비한 줄은 알았지만, 하는 작은 중얼거림 소리가 들렸다. 의아하게 그를 보자 다니엘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보는 것만 느껴지나 봐요.”

“네?”

“……아니에요. 마법부터 걸게요.”

그러나 그가 인식 교란 마법을 걸기 전, 나는 막 회장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까 뛰쳐나갔던 아리엘이었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리고.

“……?”

어쩐 일인지 그녀는 또 발개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내가 뭘 했다고?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렇게 울그락불그락한 거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원작에서 아리엘은 상당히 평면적인 인물이었다. 그냥 잘 울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며 천진난만한 여주인공. 내가 원작을 처음 읽었을 때 이 여주에게 내가 공감했던 것은 딱 하나였다. 한곳에 스스로를 가두고 외롭게 살았다는 것 말이다. 그 외에는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내가 악녀 언니랑 조연들만 핥은 이유 중 하나였지.’

바로 그 아리엘이 나를 보고 붉어진 얼굴로 울먹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악! 왜 와!

“리샤?”

흠칫한 걸 느꼈는지 다니엘이 나를 살짝 그의 뒤로 이끌었다.

“괜찮아요?”

“음. 그게…….”

나는 크나큰 위기감을 느꼈다. 아리엘은 벌써 반 이상 가까워져 있었고, 주위의 시선이 조금씩 몰리고 있었다. 주목할 수밖에 없는 외모들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달갑지 않았다.

아리엘의 눈물이 아롱진 눈을 보며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안 되겠다. 저거랑은 엮이면 안 되겠다!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누명을 씌우려는 것 같았다. 다 황녀님 때문이라면서 울어 재낀다든가.

엉엉. 저리 가. 가서 오라버니랑 놀라고!

“전하…….”

그러나 지척으로 다가온 아리엘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 떨어졌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아까 저를 구해 주셨지요?”

꺅! 언니, 어떡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르페르샤 언니를 불렀다.

“……그랬죠.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영애.”

잔뜩 굳은 채로 나온 내 목소리는 우리 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아, 목, 목소리가 같지.

“그게. 저어…….”

아리엘은 우물쭈물하면서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 눈에 눈물이 또 한가득 차오르는 것을 공포스럽게 지켜보았다.

……근데 얘도 예쁘긴 더럽게 예쁘다. 우리 언니가 최고지만.

“아, 설마 고맙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런 미인인데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회장 안의 시선들이 느껴지는데도. 으아, 화내면 안 된다고 오라버니가 그랬는데!

그러나 나는 벽을 세우듯 말을 이었다. 얘랑은 안 엮이기로 마음 딱 먹었으니까.

“아니겠죠. 아까 도와줬을 때 손을 뿌리치고 나갔으니. 다른 볼일이 있는 거겠죠?”

“아…….”

아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말해요. 무슨 볼일이죠?”

느릿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악녀 소문 더 나겠지? 으헝.

괜찮아! 괜찮다고! 뭐 막말을 한 것도 아니니까 오라버니가 추궁할 일도 없을…….

……없겠지. 응.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아리엘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그렇지 않아요……. 그건, 저는, 손을 뿌리친 게 아니었어요!”

아리엘은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내 말은 내가 들어도 몹시 냉랭한 말투였으니, 참기 어려울 것이다.

“저는 그냥 그때…….”

나는 이제 아리엘이 울음을 터뜨리며 회장을 뛰쳐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했던 거예요.”

당황과 눈물로 가득하던 아리엘의 눈은, 점점 기이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죠, 영애?”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싸늘하게 물었다.

“……저는, 전하의 아름다움에 당황했던 것뿐이에요.”

응……?

나는 순간 당황해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급기야 눈을 사르르 접으며 진짜 홀려 버린 사람처럼 예쁘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던 거였어. 이제야 알았어요…….”

저 황당한 말을 지금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다 듣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리엘은 뭔가 선명하게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기, 여주야?

“전하께서 도와주시는 순간, 저는 빛을 본 느낌이었어요. 그 영애들이 저에게 태자 전하를 들어 모욕했을 때, 거기서 전하가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자, 잠깐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그런 일까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솔직히 울면서 가해자로 지목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선행을 퍼뜨려 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예상한 것보다는 긍정적이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와 이런 식으로 가까워지는 건 안 된다. 그야, 우리 오라버니가 질투를 할지도 모르고. 우리 미남들 곁에 저 여주는 가능한 한 떨어뜨려 놓아야 하니까. 게다가 저런 민폐형 친구는 개인적으로도 사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절대로 엮이지 않으리라고. 오라버니에게는 아리엘이 오라버니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일부러 차갑게 대했다고 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요.”

아리엘은 내 차디찬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아리엘이 충격 받은 얼굴로 펑펑 울며 뛰쳐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나가서 오라버니 만나고 위로받으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그런 찬사를 받자고 영애를 도와준 게 아니에요. 오히려 듣기가 거북하군요.”

아리엘이 숨을 들이켜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차분하고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울지 마세요.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어라. 뱉고 나서야 알았다. 이, 이건 눈의 공주님과 개구리 왕자님에 나오는 대산데?

집필할 때 썼던 게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꼭 동화 속 공주님을 따라하는 꼬마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니엘을 몰래 힐끔 보자, 그도 역시나 내가 한 것이 대사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웃음을 참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악, 창피해!

그런데 그 순간, 아리엘이 내 주위에만 들리게 외쳤다.

“눈, 눈의 공주님……!”

그것은 마치 인생의 진리라도 깨친 것 같은 외침이었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쟤 지금 뭐라는 거지?

“아…… 그저 아름다우셨던 것만이 아니었어! 제가 공주님을 알아본 거였어요!”

“…….”

내가 내뱉은 대사가 눈의 공주님의 대사고, 르페르샤 언니 얼굴이 딱 눈의 공주와 어울리기는 한데. 그래도 그건 아니지. 으음.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딱 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다니엘의 뒤로 몸을 쏙 감춰 버렸다.

“……리샤?”

나를 물끄러미 보던 다니엘이 잠시 후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 좀 창피하지만 이해해 주길! 다니엘 뒤에 숨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꼬옥 잡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살짝 몸을 틀었다. 윽, 가만히 있지! 내가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거기가 좋아요?”

나는 순간 상황도 잊고 그를 멍하니 보았다. 그의 한쪽 손이 내 손을 톡 건드렸다. 꺅.

아니, 음, 지금 다니엘의 뒤에 있는 게 좋으냐고 물은 거겠지? ……근데 왜 뭔가 다르게 들리는 걸까!

“무슨 생각해요?”

“……이상한 생각이요.”

내가 가는 눈으로 물끄러미 보며 말하자, 다니엘이 멈칫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요?”

부드럽게 접히는 눈이 다정하면서도 묘했다. 나는 겨우 상황을 인식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리를 멍하니 보고 있는 아리엘에게 말했다.

“영애는 아무래도 수도에 오면서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리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아리엘을 물리친 뒤,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급히 다니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만 돌아가요.”

“그럴까요?”

다니엘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살짝 보이는 그의 눈이 즐거움으로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 이렇게 더 있어도 되는데.”

지금 당신 재밌어하는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죠!

밖으로 나가면서 나는 속으로 아리엘에게 외쳤다. 훠이훠이, 저리 가. 그런 덕심은 필요 없어!

“눈의 공주님이라고 했던가요?”

돌아가는 길에 다니엘이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지. 지금 날 놀리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리샤가 쓴 소설, 맞죠?”

“……맞아요.”

눈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

사실 처음에는 백설공주를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려줄 애들이 제인 남매였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우리 제인 남매들은 공주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왜 참기만 하느냐고 했던가?’

같이 듣던 다니엘도 한마디 했었다. 공주는 착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방치한 것이라고.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온 아이들에게 맞춰서, 나는 이야기를 바꿨다. 물론 잘생긴 왕자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주가 늘 착하게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독사과를 먹고, 거기서 왕자가 구해 주는 구도는 그렇게 바뀌었다.

‘그리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인물 성격도 바뀌어 버렸지.’

다분히 충동적으로 각색한 이야기였다. 백설공주를 눈의 공주라고 바꿨더니 눈의 여왕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의 여왕을 떠올렸더니 우리 르페르샤 언니가 떠오르고 말았던 것이다!

‘떠오른 이상 지나칠 수는 없었는걸.’

그렇게 해서 눈의 공주님은 내 안의 르페르샤 언니의 이미지와 상당히 흡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자님의 캐릭터도 마냥 완벽하던 것에서 약간의 핸디캡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물론, 공주님께 맞춰서 왕자는 다정남이었다.

‘다정한 개구리 왕자는 매력적이었는걸.’

핸디캡이 있지만 그걸로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도 않고, 눈의 공주님과 도움을 주고받는 남주인공.

둘은 서로를 키스로 구한다. 눈의 공주님이 독사과를 먹고 죽어 갈 때 개구리 왕자는 영원히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을 감수하고 키스를 하고. 개구리 왕자가 결국 마법사의 마법으로 죽어 가게 되었을 때 눈의 공주님도 목숨을 걸고 그에게 키스한다.

‘키스의 마법……이었지.’

우리 제인 남매 중 막내가 유난히 볼을 발갛게 붉히면서도 그걸 좋아했더랬다…….

‘그게 아리엘을 홀릴 줄은 몰랐지만. 악!’

그것도 눈의 여왕님에게 홀렸다니. 그건 참 묘한 것이었다.

원작에서 르페르샤 황녀 언니는 악녀였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중 하나는 아리엘이 언니를 무서워했다는 것이 한몫을 했고.

‘그런데 무서워하기는커녕…….’

“아까 그 영애, 너무 아름다우셔서 도망쳤다고도 했었죠?”

“…….”

역시, 지금 즐기고 있어, 다니엘! 어디서 헤레이스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나는 그날 결국 다니엘과 빨리 헤어진 뒤 침대에 몸을 묻었다.

“뭐야, 이게.”

허탈하고, 어이없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확실한 것은 달갑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주인. 무슨 일 있었나?

“으응.”

젠이 일기장에서 고개를 반쯤 내밀고 내게 물었다. 내가 대강 답하면서 손짓하자, 젠이 수욱 빠져나와 내 옆에 내려앉았다.

“망한 거 같아.”

-왜?

“우리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있는데?

“내가 오라버니 연애에 초를 친 것 같거든.”

-……어쩌다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눈의 공주님이래. 그래서 내가 좋대.”

젠은 말이 없었다. 나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지나가다 구해 줬더니, 내 아름다움에 당황해서 내 손을 뿌리쳤다는 거야.”

젠은 이제 나를 물끄러미 보기 시작했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냥 망한 것 같아.”

-주인…….

젠이 말했다.

-그 인간도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세간에서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머뭇거리나. 불안한 마음으로 젠을 보자, 젠이 말을 이었다.

-반했다고 하지 않나.

“…….”

말도 안 된다! 진심으로 격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막 상냥하게 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원작에서 언니가 걔한테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대했다. 그렇다면 원작에서처럼 나를 적대시해야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그래! 그, 그냥 눈의 공주님 닮았다고 한 것뿐……이겠지.

“모질게 말하고 나왔으니, 설사 처음에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닐 거야.”

-그런가?

젠이 몹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 왔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척했다.

“으으. 떨어지길. 제발, 제발.”

우리 미남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게 혼자 발버둥을 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젠은 말도 없이 일기장으로 돌아간 후였다. 칫. 좀 더 옆에 있어 주지.

‘우리 미남들도 자주 못 봐서 안 그래도 요즘 힘든데. 상황이 진짜 이상하게 꼬이잖아!’

뭐가 잘못된 거야, 엉엉. 그렇게 구시렁대면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피를 토했다.

손바닥에 흥건한 피를 물끄러미 보다가 익숙한 손길로 천을 찾아 슥슥 닦아 냈다. 그리고 창을 열어 환기를 한 뒤, 결심했다.

“아리엘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원작을 한두 번 읽은 것도 아니고, 아리엘의 패턴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걔, 그 대단하신 요정님의 비호를 입고 황궁 구석구석 탐방하고 돌아다니는 애다. 지금은 에밀을 찾는다는 목적도 있겠다, 요정님이랑 놀고 싶어 하겠다, 바쁠 게 뻔했다. 그러니 자주 마주칠 리도 없겠지.

“오라버니한테는 나한테 정을 떼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라고 할 거고.”

그러고 혹시 만나게 되면 진짜 냉정하게 대하는 거다. 좋아.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뜬금없이 아리엘이 찾아오게 됨으로써. 아리엘 랭턴은 놀라운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날 점심 때 나를 찾아와 같이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지금 기별도 없이, 이렇게 통보 식으로 제안을 한 건가요?”

“그, 그것이…….”

이상하다. 얘가 원작에서는 이런 말에 기죽을 애가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그, 저, 폐를 끼치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좋아서…….”

눈물이 맺히려고 하는데 아리엘이 그걸 놀랍게도 참고 있었다. 그러면서 눈이 마주치자 또 뺨이 붉어진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그 광경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 젠의 말대로 반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호의는 품은 듯하군.

……그렇다면 싹을 잘라야지!

“어제 처음 본 사이가 아닌가요? 무례하네요.”

최대한 까칠하고 도도하게 말했다. 헤헤, 이러니까 좋은 점이 있기도 했다. 꼭 우리 언니가 하는 말 같아! 그런데 그때, 아리엘이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흑…….”

“……?”

“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나는 도무지 무슨 답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냉랭한 말도 할 내용이 있어야 할 텐데.

“예를 갖추시지요, 영애.”

옆에 있던 엠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먹일 줄 알았던 아리엘은 의외로 알았다고 했다.

정말 이상하다.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원작에서 이런 순간이 있긴 했나? 왜 이리 얌전해? 바뀌어도 뭔가 계기가 있어야 이해를 할 텐데 이건 너무 뜬금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울지 않는군요?”

“전하께서, 울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울먹임이 어린 목소리였다.

-반했다고 하지 않나.

젠의 말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에, 에이. 설마.

하지만 이렇게 차갑게 구는데도 아리엘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있었다. 나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진짜 아름다워서 당황해서 뛰쳐나갔다고? 아, 그건 뭐, 생각하니 납득이 됐다. 우리 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히히. 언니를 떠올리며 괜히 뿌듯해지던 찰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가 너무 좋…….”

“잠깐!”

나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계속 위험한 말을 하려고 했다.

“저는 황녀님에게…… 반…….”

꺅! 그만해, 이 여자야!

그때 아리엘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서 있자 곁에 누가 다가왔다. 아, 다니엘이었다.

“리샤, 어떻게 할까요?”

“뭘요?”

“저 영애요.”

“……지금 없어진 거 다니엘이 한 거 아니에요?”

“네.”

이미 치워 놓고 어떻게 할지를 묻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리샤가 원한다면 황녀궁 밖이 아니라 수도 밖으로도 보낼 수 있어요.”

“……지금은 황녀궁 밖으로 보낸 거예요?”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딘가 자꾸 나오려는 웃음을 자제하려 애쓰며 확인했다.

“다쳐서도 안 돼요. 다쳤으면 가 봐야겠어요.”

“걱정 마요.”

다니엘이 진하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궁으로 곱게 보내 드렸으니까요.”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니엘 덕에 조금 개운해진 기분으로 나는 엠마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저 영애가 설령 황태자 전하의 용건을 들고 온다고 해도 들여보내지 말아 줘, 엠마. 차라리 내가 밖에서 만날게.”

“예, 전하.”

아리엘은 아마 숨어들었을 것이다. 원작에서 그녀는 가끔 덤불과…… 덤불 사이를 넘나들며…… 다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으음. 지금 황궁에 내가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리엘이 새삼 희한하게 느껴졌다.

“다니엘, 그…….”

나는 이번엔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네, 말하세요, 리샤.”

“……고맙다고요.”

괜히 쑥스러워하며 말하자 다니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진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별말씀을. 그럼 앞으로도 이렇게 하죠.”

아리엘이 어디 갔는지는 몰라도 죽이진 않았겠지. 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려 황태자가 들인 ‘친구’이니까.

“그나저나, 오라버니가 부르셨다니 채비를 해야겠네.”

아리엘은 이 말을 전하러 와놓고 내게 점심 같이 먹자는 말을 한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긴장한 채로 오라버니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수고했어, 누이. 이제 무도회에 안 나가도 되겠다.”

“……네?”

그리고…… 그에게 칭찬을 들었다.

아니 물론 어제를 마지막으로 더 안 나갈 생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리엘 말인데.”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내가 이토록 긴장을 한 이유. 그건 아리엘이 내게 좀 호감을 보였다는 것이 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내가 아주 싸늘하게 쳐 냈다는 것도 함께 들었겠지. 내가 아는 황태자라면 날 지금 죽이고 싶을 것이었다.

“그 소설…… 정말 불태우고 싶군.”

꿀꺽.

하지만 그는 어쩐지 살기를 비치지는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한숨을 쉬고서 내게 말했다.

“이제 어떡하지, 누이?”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제 이렇게 편해졌지?’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집착남인 그를 싫어한 이유 중에는 그가 여주인공을 사랑하기보다는 소유하려는 느낌이 더 강했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어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잘한 거 맞나?”

“음,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잘했어요, 오라버니.”

그런데 나에게 살기를 비치지도 않고, 무언가 제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이 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서로의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내가 그를 꽤 편하게 여기게 되고, 그도 나를 꽤 진짜 누이처럼 대하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어쩌면…….

내 답에 다소 안심한 기색으로 황태자 오라버니는 주제를 돌렸다. 그는 내 소문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담담하게 읊었다. 그리고 끝에는 이제 신경 쓸 일 없을 거라는, 나름 위로하는 것 같은 말을 붙였다.

이거 진짜 좋은 현상 같은데. 진짜 진짜 잘하면, 나 우리 미남들이랑 다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도 될 거 같은데! 아리엘도 상태가 원작이랑 조금 다른 것 같……고?

하지만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에는 아직 좀 부족했다.

“오라버니.”

나는 한참을 눈을 굴리다가 결국 그에게 물었다.

“지금도, 저를 죽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지만 바로 어떤 답이든 나올 것 같았던 오라버니는 답이 없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특유의 서늘하고 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답했다.

“아니.”

“아하.”

한참 만에 나온 답치고는 짧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나는 안심했다.

“좋아요. 그럼 소문도 얼추 해결된 거고, 오라버니 연애도 그 정도면 이제 혼자 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 이상은 진정성이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오라버니. ……일단 영애의 관심이 제게 쏠리게 된다면, 제가 최대한 랭턴 영애에게 무섭게 대할게요. 그러면 오라버니가 잘 받아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좀 설레지 않겠어요? 그 후는 두 분에게 달린 거고요.”

내가 아주 안도한 기색으로 줄줄 말을 하자 나를 빤히 보던 오라버니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의 목숨이 걸린 일보다 그게 더 중요한가?”

“오라버니의 일이니까요.”

오라버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이지 않겠다는 말은 어째 그리 바로 믿는 건지.”

나는 멈칫했다가 비식 웃으며 답했다.

“오라버니는 뱉은 말은 지키시잖아요. 좀…… 의뭉스럽긴 하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내가 찔끔해서 조금 웃으며 말했다.

“멋지다고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보다가 정말 미묘하게 구겨지는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상한 녀석.”

으응?

“좋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네? 잠깐만요, 방금 저한테 녀석이라고…….”

“폐하와 있었던 대화를 전해 들었다.”

“어어. 그런가요.”

잠시 후, 오라버니는 내게 그간 그가 한 일에 대해 덤덤하게 나열했다. 나는 추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경악해서 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그…… 볼턴 경이랑 아이릭 공작이랑 헤레이스…… 전부 같이, 움직였다고요?”

그들이 황태자와 안면이 생긴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의견을 주고받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아예 각 잡고 팀 만들어서 거의 하루 종일 부대꼈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그래, 누이. 그리고 이제 궁내의 소문과 귀족들 사이의 소문은 꽤 잡았지. 하지만…….”

……저기요.

내가 그 우리 미남들을, 댁이랑 아리엘에게서 최대한 떨어뜨려 놓으려고!

피눈물을 머금고 내게서 떼어 놨었……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미남들은 저번에 아리엘을 한 번 봤는데? 아리엘이 오라버니를 요정님이라고 부르면서 나타났을 때 말이다.

그런데 아무도 아리엘에게 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하기는커녕 헤레이스는 황태자가 웃긴다며 박장대소를 했고, 카인은 불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진도 오라버니의 상황을 마냥 우스워한 쪽이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엘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잘된 것 같지만 뭔가 미심쩍었다. 내가 움직인 것이 있으니 원작에서처럼 홀린 듯 반하게 되는 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아예 아무 호감도 보이지 않는 건 예상치 못했으니까.

……왜지?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나와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소설에서나 르페르샤 황녀와 여주인공이 대치했던 것이지, 지금은 전혀 관계없는 사이였다. 나와 친해졌다고 해서 그들이 아리엘에게 느꼈던 매력이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반감이 될 수는 있어도.

뭐, 애초에 내가 바란 게 그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가능하면 아리엘과 엮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엮이더라도 매력을 원작에서보다 덜 느끼는 것을 목표로 움직였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내 눈에 원작의 그들은 금사빠였으니까! 아리엘에게 반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그녀의 눈물이라면, 그걸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들은 아리엘을 보고도 특별한 변화가 없다.

‘그럼 아리엘이 바뀐 거라고 봐야 하나? 별로 원작에서랑 다를 게 없어 보이……지 않았구나. 히히.’

악악. 나는 내게 거의 고백을 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다소 착잡해졌다. 상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오라버니가 그 흐름을 깼다.

“뭘 그렇게 고민해, 누이?”

“아, 아니에요. 몰랐던 일이라 당황한 거예요.”

오라버니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런데 누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 네. 뭐예요?”

“병이 있나?”

그가 하도 일상적인 분위기로 물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답했다.

“네.”

“라파엘리스고?”

“네…….”

어?

“그렇군.”

나는 얼결에 답해 놓고 그를 멍하니 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본인이 알고 있었어.”

나는 뭔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눈빛이 뭔가 살벌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저, 맞긴 한데, 딱히 그걸로 문제될 일은 없으니까요.”

그와 내가 나름 가까워졌다고 해도 나는 그가 아리엘에게 얼마나 깊게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어도 오로지 아리엘만을 유일한 빛으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설사 황녀 누이가 사라진다고 해도 조금 아쉬워하고 말 인간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나는 사실 죽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서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누이.”

서늘하면서도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가 물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지?”

어, 음. 이 타이밍에 저런 걸 물을 줄이야.

“황위도 아니고, 심지어 이 황궁도 아니지. 폐하께 듣기로 재물도, 지위도 아니라고 하더군. 아니, 재물이야 지금은 부족할 것이 없기는 하겠지만.”

아뇨, 저기, 재물은…….

“나를 도와준다고 한 것도, 생각해 보면 딱히 누이를 위한 일도 아니었지. 내가 누이를 죽일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 않았어?”

느릿하게 말을 이으며 오라버니는 살짝 인상을 구겼다.

“그 계약서도 그렇고.”

“네?”

계약서? 계약서라면, 그는 나를 자유롭게 해 주고 나는 그의 연애를 돕는다고 했던 그……?

“알고 있어, 누이? 그 계약서, 나는 지킬 필요가 없는 계약서였다는 거. 자유는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애매한 말이거든. 구체적으로 연애를 돕는다는 것은 지켜야 하겠지만. 아니, 누이가 몰랐을 리가 없지.”

“…….”

아,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내 계약서가 자살골이었다는 말이구나! 아하하하하!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감추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된 거 몰랐다는 것이라도 들켜선 안 된다. 엉엉, 우리 언니에게 무식하다는 말을 듣게 할 수는!

“게다가, 나와 아리엘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누이가 내 어머니와 신전 사이의 일화를 몰랐을 리가 없지…….”

그게 뭔데! 몰라! 모른다고! 나는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오라버니가 조금 더 잔잔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지.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자유를 바란다면 굳이 그럴 것 없이 도망을 쳤을 테니.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 하지만 누이는 내내 진심이었어.”

진, 진심이기는 했죠. 나와 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말해 봐, 누이. 내게 뭘 바라고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오라버니가 나른하게 물었다. 에휴. 나는 그를 마주보며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것저것 전부 다 헛일이었다니. 근 한 달간 마음껏 덕질을 하지 못하고 우리 모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애썼는데 말이다.

그래, 뭐 다니엘이랑 오라버니를 얻었으니 후회하는 건 아니다. 일도 잘 풀릴 것 같고.

……그치만! 그래도!

엉엉. 나는 돌아가자마자 엠마에게 당장 사진기 대용을 구하러 같이 가자고 조르기로 다짐했다.

“대체 뭘 바라서?”

그러나 일단은 오라버니에게 답해야 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오라버니 마음이 편해지시는 거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해탈까지 이르셔서 살심이 사라진다면 아주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뭐?”

“그냥 그걸 바랐어요.”

허탈하여 내가 들어도 아련한 목소리로 답했다. 믿거나 말거나. 흑. 내 한 달. 공으로 날렸어.

“…….”

오라버니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를 흘낏 보았다가 그냥 살짝 웃어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고?”

“네.”

그래도 결론만 놓고 보면 개운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부대끼면서 잘 지냈다면, 오라버니가 내 사람들을 죽일 가능성도 줄어들었을 것 같고.’

이제 나에겐 행복한 인생만 남은 것이다. 벌써부터 내 미남들과 놀 생각에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진심, 이군.”

오라버니의 표정은 솔직히 말해서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저게 믿어진다는 거야, 아니면 못 믿겠다는 거야?

“진심이야.”

그는 그렇게 두어 번을 고장 난 인형처럼 중얼거리다가 갑작스럽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가 볼게요.”

아이고, 이젠 나가라는 말도 안 하시네. 내가 정말 많이 편해졌나 보지? 히히. 이것도 참 좋은 일이었다.

나는 오로지 사진기와 우리 미남들을 떠올리면서, 밝게 웃으며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돌아오자마자 엠마를 불렀다.

“엠마, 혹시, 전에 말한 거…… 찾았어?”

“남기고 싶은 순간을 남기는 도구 말씀이십니까?”

엠마가 어쩐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못 구했구나. 아이고. 괜찮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구했습니다.”

“응? 어? 정말?”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엠마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너무 기뻐. 엠마, 혹시 지금 줄 수 있어?”

“…….”

“그리고…… 엠마?”

엠마는 어쩐지 어두운 얼굴이었다. 나는 그제야 들뜬 것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가만히 살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하.”

엠마는 굉장히 어두운 얼굴로 나와 눈을 맞췄다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내일, 내일 드려도 괜찮겠는지요.”

“응, 그럼. 괜찮아. 가서 쉬어.”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떠나보냈다. 저런 적은 처음인데.

“그런 부탁을 했었어요?”

그때 가만히 나와 엠마를 지켜보던 다니엘이 조금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해 주었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순간들이 많아서요.”

“…….”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미남들을 내게서 떼어 놓았던 것은 너무 뼈아팠다. 내가 유진이랑 카인이랑 헤레이스랑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엉엉. 난 그들이 금방이라도 다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었다. 겁에 질렸던 것이다.

“……시간이 모자라요.”

곧 몇 가지 사건이 터지고, 마법 테러가 있게 된다.

“할 일이 많은데.”

그러면 대륙 전역을 순례하는 신관들이 올 거고, 나는 그때 그들과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혼자 떠난다고 하는 것보다는, 신관들의 순례길에 동행해서 요양 장소에 간다고 하는 게 더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언니의 기억도 몰아서 봐야 하는 데다, 지금 황제도 그렇고 오라버니도 그렇고 생각보다 가까워진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시간이 별로 없다.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슬퍼하다가 문득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가끔은 그의 눈 색이 어떤 원리로 바뀌는 것인지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보석안은 그의 역린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지금의 황금색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키스를 했을 때. 나는 조금 몽롱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자꾸만 나를, 무너뜨려요.”

무언가 꾹 참는 듯한, 사그라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다니엘?”

“내가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나는 가만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인간 같지 않은 수준의 얼굴을 보면서도 내가 꽤나 멀쩡하게 생각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를 볼 때는 이상하게도 내 감정과 생각이 짙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리샤.”

어느새 다니엘은 잔잔하고 따스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순간 그가 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엠마와 그의 평소와 다른 상태를 보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좀 더 주위에 세세하게 관심을 쏟아야겠다고. 물론 우리 미남들과 이비엔, 제인 남매에게도. 헤헤.

억눌렀던 덕심이 해방을 맞이한 그날, 나는 꽤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 *

저녁이 되었다. 르페르샤 황녀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다소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다.

-잠들었나?

“……그래요.”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들 알고 있었다. 황녀가 피를 토한 날은 유난히 피로를 많이 느낀다는 것을.

-불안해.

일기장에서 빠져나온 검은 독수리가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답 없이 그저 리샤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죽음만을 준비하는 것 같지 않단 말이다.

“그렇죠.”

다니엘이 가볍게 수긍했다. 그녀의 병을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자신의 문제로도 벅찰 거라고 여겼다. 벅찰 텐데도 저리 의연하게 웃고, 진심으로 무언가를 사랑하여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그래, 리샤는 그런 사람이지.’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도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리샤를 보면 생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생전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도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그토록 순수하게 사랑을 할 줄 안다. 그녀는 이 세상을 눈부신 것처럼 바라보고, 제 주위 사람들을 더없이 사랑스럽고 따스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눈부신 사람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정말 그뿐이었다면 다니엘 자신이 이렇게까지 흔들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그녀의 죽음 때문에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머무르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야.’

그녀의 고통과 애틋함, 아름다움에 가려진 모습.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죽음 이후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리샤.’

지금껏 그 누구도, 어린 아이를 위한 책을 쓰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갇혀 있는 정령의 안위를 걱정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 누구도 그 포악한 황태자에게 그토록 가볍고 편안하며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않았었다.

완벽하게 신분과 상관없이 상대의 본질만을 꿰뚫어 보며 애정을 보일 줄 아는 사람도, 그는 리샤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세세한 부분들은 지독하게 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죽음 앞에 의연한 정도가 아니다. 정말 웃기는 생각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죽은 이후의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그래, 아마도 그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리샤에게서 눈을 못 뗐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그리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위사람들 눈에 그녀가 유난히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겠지.’

아, 그래. 그녀는.

사람의 죽음에 익숙한 그가, 제 죽음조차 언젠가는 갑작스럽게 올 것이라 덤덤히 받아들이는 그가, 타인의 죽음에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눈을 못 떼게 만들어 놓고는 잠깐 머물다가 떠날 것처럼 굴어서.’

그녀는 꼭 바람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물질에 불과한 것처럼 군다. 야속한 세상을 향해 아름답다고 웃어 주며 심지어 그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정작 그 세상에 속할 의지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순간들이 많아서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녀는 참으로.

“…….”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모자라요.”

그녀는 기이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향한 연민을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다니엘은 그녀가 죽을 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괜찮았다. 그녀를 특별히 안타깝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기엔 그 또한 쉽지 않은 생을 살아왔고, 비참한 것들을 너무 많이 보았으니까.

“할 일이 많은데…….”

그는 무너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그런데 리샤.

“당신은…….”

때때로 나는 당신 앞에서.

“자꾸만 나를, 무너뜨려요.”

무력감에 빠진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진심으로 그가 느끼는 무력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

무구한 표정으로 그를 부른다.

사실 그녀는 그녀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지도 잘 모른다. 알고 있다면 슬퍼했을 테니, 저리 모르는 것이 다행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괴리는 결국 그녀가 자신을 그만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리라. 결국 근본적으로 그녀는 어디에서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고, 또 제 죽은 이후까지도 염려하고, 돌보고, 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모르겠다. 다니엘은 그녀를 볼 때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내가 이럴 리가 없는데.”

지금도 그렇다. 안쓰럽지도 않다. 그저…….

“그런데도, 리샤.”

사랑스러웠다.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꽃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면, 꽃잎은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바람 사이를 이리저리 노닐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그의 말에 상기된 미소를 보내 왔다. 지독하게 순수하고 여리게, 꽃잎처럼.

그래, 그렇게 웃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 이상을 바라면 무엇이든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그 무구한 미소를 보고 또 보았다. 가능한 한 많이,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녀가 잠이 들고 옅은 숨소리만 들릴 때까지.

* * *

라빌로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체스 말을 옮겼다.

그토록 기다렸던 아리엘이 왔는데 지금 그가 생각하는 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누이. 편의상 그렇게 불러 주었던 황녀. 그는 그에게 말하던 누이의 모습을 샅샅이 떠올리며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작……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누이.”

들을 사람도 없는 말이 방을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도와줄 생각이었어.”

생각보다 누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의향이 있었다. 누이가 아프다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누이는 실제로도 어딘가 아파 보였다.

‘하지만 아주 잘 웃는 멍청한 녀석이라서, 불치병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지.’

대부분의 소문이 헛소문이었으니 아프다는 소문도 와전된 것이리라 여겼었다. 볼턴 경과 아이릭 공작, 헤레이스가 그에게 철전하게 숨기기도 했지만, 그도 딱 그 정도밖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신경이 쓰였어.’

누이는 흥미로웠다.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죽일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가끔은 죽이고 싶기는 한데, 그게 또 완전히 그렇지가 않았다. 애매한 상태라면 죽이지 않는 것이 나았다. 누이는 애매하게 짜증나고, 애매하게 멍청해 보인다.

‘그리고 애매하게,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선사하지.’

그는 점차 누이의 소문을 세세하게 가리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되뇌며 귀족들 몇을 쥐 잡듯이 잡기도 했다.

‘고작, 그 누이를 위해서, 내가.’

그는 차츰 누이를 제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하나만 꼽자면 경계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남매들이 이런 걸까? 그는 오라버니라고 불리며 누이에게 연애상담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그래서일까. 누이가 피를 뿜었을 때, 그는 그의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랐다.

“내가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된 줄 알았었지.”

그리고 알게 되었다. 누이의 병을.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특별히 그 문제에 사로잡혔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냥 좀, 기분이 이상했고, 조금은 허전했던 것 같고,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알게 된 이후에는 볼턴 경과 아이릭 공작, 헤레이스가 대놓고 그의 앞에서도 누이에 대한 염려를 드러냈다. 그는 그들이 조금 우스웠다.

“누이에게 상처가 많다면, 그렇게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상처 준 이들을 누이 앞에서 죽여 버리면 확실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했을 때 셋은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누이를 닮았는지 그놈들 상당히 괘씸해.’

하지만 역시나 그들도 죽일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는다. 누이처럼. 거슬리는 외가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누이는 볼수록 흥미로운 이였다. 그녀는 그에게 진짜 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래, 혈연으로 따지면 진짜 누이가 맞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그들 남매는 결코 가깝지 않았으니까.

“오라버니.”

그리 부르라고 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누이는 가끔은 그를 한심하게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질린 눈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거리감에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누이는 누이의 자리에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도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은 아리엘에게 느끼는 자극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누이는 ‘그의’ 누이가 되었다.

‘어이가 없어.’

그런데 황당하게도.

‘먼저 그렇게 다가왔으면서.’

친근함이 어린 얼굴로 누이는 또 물었다.

“지금도, 저를 죽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니.”

어이없는 심정으로 그는 단숨에 부정했다. 여기서 만약 진짜냐고 되물어 오면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고 답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납득하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누이의 목숨이 걸린 일보다 그게 더 중요한가?”

아리엘에 대해서 누이가 그런 생각일 거라는 짐작은 이미 하고 있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이가 아주 당연하다는 어조로 답했다.

“오라버니의 일이니까요.”

그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이지 않겠다는 말은 어째 그리 바로 믿는 건지.”

그러나 돌아온 답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라버니는 뱉은 말은 지키시잖아요. 좀…… 의뭉스럽긴 하지만.”

누이는 그를 믿고 있었다. 그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믿다니. 이건 너무 멍청하지 않은가. 그는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멋지다고요, 오라버니.”

하지만 정말로 나쁘지 않아서. 그는 안 해도 될 말을 구구절절 하고, 또 그답지 않게 직설적인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평소 같았다면 뒤로 다 알아봤을 것들을.’

네가 바라는 것이 뭐야. 내게 이렇게 다가오는 이유는 뭐지. 누이는 그에게 이렇게 다가올 필요가 없었다. 막말로 불안하면 정말 야밤에 튀어도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지금 벌써 죽어 있었겠지만.’

그때의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누이가 그걸 알았을 리도 없고.’

그는 의문스러웠던 것을 전부 쏟아 냈다. 누이의 답을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데. 말을 할수록 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왜 저러는 거지?’

그의 앞에서 저렇게 어두운 모습은 보인 적이 없었다. 긴장했을지언정 누이는 잘 웃고 거침없이 말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흐릿한 미소도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고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무슨 의미지?’

왜 그렇게 회한이 어리고, 서글픈 눈을 하고 있나. 그는 이런 반응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만 물을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와서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말해 봐, 누이.”

그리고 알고 싶기도 했다.

“내게 뭘 바라고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런 인간이 그의 주위에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을 쉽게 믿어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늘 복잡했다. 누굴 대하든, 무슨 일을 겪든.

“대체 뭘 바라서?”

“오라버니 마음이 편해지시는 거요.”

그런데 누이는 그가 뭘 계산하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툭 답을 주었다.

“뭐?”

“그냥 그걸 바랐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 어린 말이었다. 누이는 쓸쓸해 보였고, 어딘가 도망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답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누이에게 돌려줄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심, 이군.”

고작, 그런 말이 다였다.

“진심이야.”

불신을 가득 품고 몰아붙이는 말에 아마도 속이 상했을 터였다. 그럴 것을 예상하면서도 몰아붙였다. 누이가 속 깊이 품고 있었던 답을, 그는 그렇게 듣고야 만 것이다.

그 답은 너무 이상하고, 그리고…….

차마 따뜻하다는 표현을 떠올리지는 못한 채로 그는 누이를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늦은 시간까지 누이를 생각했다.

“하……. 내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랐다고.”

냉랭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자기가 뭐라고, 그런 것을 걱정하나.”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이다. 그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작 자기 마음은 관리할 줄을 모르면서.”

남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병 고친다고 모인 그놈들한테 피라도 뽑아 주던가.

“감히 나를 걱정해?”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어서 너무 화가 났다. 그는 체스 판을 툭툭 정리했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결국 그는 잠이 들 때까지도 그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던 아리엘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각. 아리엘은 황태자궁의 한 덤불 속에 곱게 안착한 뒤 결의를 다졌다.

“전하께선 갑자기 찾아가는 걸 싫어하시는구나.”

하지만 그 싫어하는 모습이 정말 도도하고 고고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조금 갈등하다가 아리엘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싫어하시는 건 하면 안 돼.”

그러니 편지를 보내고 들어가자.

“하지만 내 편지를 전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아리엘은 분명히 보았다. 황녀 전하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손짓을 하자 자신의 몸이 날았던 것을. 그뿐인가? 무도회에서 보았던 그 헤레이스라는 인간도 어쩐지 아리엘에게 적대적이었다. 그 사람도 전하의 친구라고 요정님이 가르쳐 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녀 전하에게 다가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리엘이 울먹이다가 킁 하며 울음을 참았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다니엘과 헤레이스에게 전의를 불태우며 아리엘은 결심했다.

“편지 정도는 내 손으로 전해드려도 될 거야!”

창가에 놓고 간다거나, 그 엄하지만 인자해 보였던 시녀장 주머니에 찔러 넣어 둔다거나.

잠시 아빠에게 부탁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다. 무도회 끝나고 말했더니, 아빠가 황녀 전하라면 질색을 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그렇게 아리엘은 자기가 떨어진 궁이 황태자궁이라는 것도 그냥 넘겨 버린 뒤, 늦은 시간까지 황궁을 탐방했다. 그리고 뿌듯한 얼굴로 드레스를 툭툭 털었다.

“대충 파악했어!”

황녀궁 주변, 그리고 황태자궁 주변. 그 정도 파악하는 건 반나절로도 충분했다.

“별장에 있을 때 많이 해 봤으니까.”

덤불 사이로 다니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다. 사삭거리는 소리가 덤불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면서도 피부에 생채기가 남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아리엘은 고수였다.

“좋은 덤불이 많았어.”

황궁은 딱 아리엘이 웅크린 정도 사이즈에 맞는 덤불이 많았다. 아리엘은 기뻤다.

그러다 멈칫했다.

“아 참, 아빠가 황궁에는 들어가면 죽는 곳도 있다고 했는데. 거긴 어떻게 피하지?”

아! 고민하던 아리엘이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요정님!”

그녀의 요정님은 그녀가 자유롭게 황궁을 다니는 것을 허락했다.

“에밀 님을 찾아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에밀 님을 찾는 건 아리엘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조급해도 약속해 준 요정님을 믿는 수밖에.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요정님과 함께 노는 것도 기대되는 일이었다. 함께 도서관도 가고 이곳저곳 구경도 시켜 준다고 약속했었지.

“노는 김에 가도 되는 곳들을 알려 달라고 하면 되겠지?”

황태자궁에서 잠이 들어 있던 황태자가 잠결에도 위기를 감지하고 움찔했다.

짝사랑 상대와 함께 덤불과 덤불 사이를 넘나들게 된 요정님의 운명을 뒤로 하고, 아리엘은 신이 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나는 엠마에게 이상한 모양의 돌을 받았다.

“……이게 뭐야, 엠마?”

회색의 네모난 돌은 밋밋하고 묵직했다.

“남기고 싶은 순간을 남기는, 도구입니다.”

엠마가 어딘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나는 그녀를 의아하게 보다가 손에 들린 돌멩이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돌멩이였다. 나는 조금 착잡하게 돌멩이를 보았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봐. 내가 엠마에게 평소 무언가 마음 상한 게 있었느냐고 물으려 하는데 엠마가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이것은…….”

“응?”

“……예전에, 귀하게 쓰였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뭔가 말이 이어질 것 같아서 엠마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으, 응?”

뭘?

뒤늦게 되물었지만 엠마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엠마, 왜 그래?”

“아니, 아닙니다, 전하.”

엠마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아니 지금 사진기가 문제가 아니네! 아무래도 엠마가 아픈 것이 분명했다.

“엠마, 괜찮아? 안 되겠다. 록스에게 가자.”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하자 엠마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늦게 답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전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뭔데, 말만 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쓰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사 준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인가? 뭔가 이상했지만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찜찜함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늘 그렇게 할게.”

부드럽게 웃으며 답해 주자, 엠마가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가 천천히 온화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마우면…… 날 전하 말고 리샤 님이라고 불러 줄래?”

엠마의 얼굴이 아주 잠깐 울 것 같이 살짝 일그러졌다.

“엠마?”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부탁한 것이었다.

리니와 아린이 날 그렇게 부르면 너무 특별 취급한 티가 나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엠마는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엠마는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조금 시무룩해지려던 찰나, 엠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겠습니다, 리샤 님.”

“와! 고마워! 너무 기뻐!”

내가 거의 환호성을 지르며 엠마를 꼬옥 안자, 놀랍게도 엠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등을 마주 안아 주었다. 나는 순간 조금 울컥했다. 그냥,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정말 조금, 엄마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더 밝게 배시시 웃으며 재빨리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미묘한 기분을 툭 털어 버리며 엠마에게 말했다.

“이것도 고마워. 잘 쓸게.”

어떻게 쓰는 건지는 나중에 물어보든가, 젠에게 물어봐야지. 아마 알지 않을까? 잠시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던 엠마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휴.”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쉰 뒤, 돌멩이를 이곳저곳 만지작거려 보았다.

“젠, 이거 쓸 줄 알아?”

-그건…… 어디서 구한 건가?

“엠마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런데 사용 방법을 잘 몰라서.”

-……알기는 하지만.

음후후후후. 나는 젠을 보며 기특함을 가득 담아 웃어 주었다. 잠시 나를 미묘하게 보던 젠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후.

“마음에 드네.”

사진기보다 더 좋았다. 그냥 손에 쥐고 남기고 싶은 기억을 떠올린 뒤, 종이 위에 올려 두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림을 그려 준단다.

“횟수 제한이 있다는 게 아쉽지만.”

일종의 필름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개념인가? 어쨌거나 나는 젠에게 사용 방법을 배웠다.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젠이 물었다.

-주인, 그것은 어디에 쓰려고?

“아, 이거? 글로 남길 수 없는 순간들을 남길 거야.”

유진의 얼굴이라든가, 카인의 얼굴이라든가, 헤레이스의 얼굴이라든가.

다니엘의 얼굴은 좀 더 생각해 봐야지. 여기가 제국인데 망국의 왕자 얼굴이 남겨지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 그런가…….

“응.”

그래, 이제 우리 미남들을 되찾아 올 때가 되었다. 그들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할 상황인 것 같으니까.

머리 한구석에 떠오르는 아리엘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모른 척했다. 중요한 건 죽을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거지!

‘생각해 보니까 내 소문으로 뭉쳤다는 거, 장점도 있는 것 같아. 오라버니랑 우리 미남들이 아리엘을 사이에 두지 않고 친분을 쌓았다는 말이잖아?’

우리 미남들,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하다. 알아서 살길을 찾았네요, 다들! 나도 오라버니가 안 죽인다고 확답 줬고.

“히히.”

혹시 모르니 지금 하고 있다는 소문 잡기 모임은 그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것 같으니 한 달 정도는 돌아와 달라고 해도 되겠지?

‘한 달이 두 달 되고, 두 달이 세 달 되는 것 아니겠어!’

신관들 여정에 동행해서 떠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세 달이 채 안 된다.

“함께 많이 다녀야지.”

그렇잖아도 원작 시작했으니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몇 개 터질 것이다. 그 일들에서 아주 조금만 우리 미남들이랑 제인이랑 이비엔 경을 위해서 움직일 생각이다. 그 후엔 마법 테러가 제국 수도에 있을 것이고. 아, 마법 테러. 거기선 몸을 사려야겠지.

“체력이 문제이기는 한데. 그건 뭔가 방법이 있겠지.”

나는 그 즉시 미남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리니와 함께 생강 쿠키를 만들고,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디저트 역작들과 취향에 맞춘 차들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사진기 역할을 해 줄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단체 사진 찍자고도 해 봐야지.

“……리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던 다니엘이 나를 불렀다.

“네, 다니엘.”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자 다니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이것들은 다 뭐예요?”

“아! 오늘 볼턴 경이랑 아이릭 공작이랑 헤레이스를 초대하려고요.”

“초대요?”

굳이? 그런 느낌의 되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번에 그분들이 저를 위해서 많이 노력해 주었다는 걸 전해 들었거든요.”

눈에 띄는 환영 파티를 하는데 이 정도 명분은 당연히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로 고맙기도 했고 말이다.

“아.”

다니엘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렇군요. 그들을 위해서.”

나는 멈칫했다. 그들을 위해서, 라고 할 때 순간 서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

“네, 리샤.”

하지만 다시 확인한 다니엘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에, 묘하게 은근하고 상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착각인가.

“과자도 직접 만들고.”

“아, 그거요. 리니는 잘 만드는데 전 솔직히 좀……. 모양 어때요? 괜찮아요? 이상하면 그냥 치우려고요.”

“……네. 맛있어 보여요.”

“다행이네요.”

히히. 내가 기분 좋게 웃자 그도 마주 보며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하고 같이 하니까 더 좋아요.”

“…….”

내 말에 다니엘이 멈칫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그분들에게도 말하죠. 저와 같이 준비했고 아주 즐거웠다고. 어때요?”

“좋아요!”

아무 문제가 없어진 현실이란, 정말이지 천국 같았다! 나는 신나게 답한 뒤 준비를 이어 갔다.

저녁 식사를 생략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간단한 샌드위치도 준비해야지. 야호!

* * *

엠마는 무거운 걸음으로 황녀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참았던 한숨을 쉬었다. 떨리는 숨을 뱉어 보아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황녀에게 준 물건. 그것을 떠올리니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무거워진다. 그것은 가장 좋은 일기장을 구했을 때 찾았던 곳에서 구해 온 것이었다.

“남기고 싶은 순간을 완벽하게 남길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까?”

마탑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과 닿아 있다는 그 상점은 규모는 작지만 그 이상 가는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엠마 정도는 되니 그곳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기고 싶은 순간이라.”

그런데 그 상점의 주인은 엠마의 질문에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구해 오라 지시하신 분이 고위 귀족이십니까?”

“아닙니다.”

“유서 깊은 가문을 말하는 겁니다. 아니라면, 황족이십니까?”

엠마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주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교롭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주인은 입에 물고 있던 정체 모를 풀떼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답했다.

“그런 고상한 표현을 쓰는 이들은 대개 귀족들이죠. 그리고 그 표현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엠마가 불길함을 감추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일기장 때와 달리 말이 길어지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주 먼 과거는 아니고, 예전에 말입니다. 황족이나 왕족, 그리고 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그런 도구를 원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는 도구. 손에 쥐었다가 종이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그 순간을 그림으로 재현해 주는 마도구는 이제는 다시 만들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라고 했다.

왜 자꾸 말을 끄는 것일까.

“……그것이 어쨌다는 겁니까?”

주인이 답했다.

“그야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고위층들이 죽기 직전에 쥐는 돌이거든요.”

엠마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주인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죽기 직전에 떠올린 것을 남기는 거죠. 괴상한 취미 아닙니까? 그런 게 그게 꽤 오랫동안 은밀하게 유행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도구는 현재로서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그러니 그런 도구를 찾는 사람이 만약 고위 귀족, 또는 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라면, 아마도 저 용도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사실 본인보단 남은 이들을 위한 도구죠. 사용되기에 따라서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엠마가 비틀거렸다. 도저히 태연하게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값을 치르고 돌아온 뒤에는, 꽤 오랫동안 황녀에게 주지 못했다. 도저히 제 손으로 건넬 수가 없었다.

‘알고 구해 오라 하셨을까.’

아니, 그보다는, 저 용도를 알고 계셨다면, 이 도구는.

……어떻게 쓰이게 될까.

“……예전에, 귀하게 쓰였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그것을 제 손으로 건넸을 때 엠마는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모르셨기를. 그러나 황녀는 무어라 답하지 않고 엠마를 잔잔한 시선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그때 엠마는 직감했다. 아. 알고 구해 오라 하신 것이었구나. 정말로 전하께선, 빛나는 것만 남기고 떠나려 하시는구나.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잔인하십니까, 전하.”

엠마의 가슴 저미는 음성이 허한 복도를 가득 채웠다.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총 11명이었다. 유진, 카인, 헤레이스, 다니엘. 그리고 제인 남매와 이비엔 경. 이비엔과 아주 친해졌다는 소피아도 불렀고, 오라버니도 초대했다. 거기에 우리 궁의 궁인들도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었다.

“어서 와요, 천사님!”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가 먼저 왔다. 셋은 따로 도착했는데, 반응이 가지각색이었다.

“리샤, 파티를 한다며?”

헤레이스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황녀궁에서 해?”

“지인들만 부른 거거든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방긋 웃으며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몇 초대했어요. ……자주 못 보니까.”

자주 못 보게 된 상황에 시무룩해지는 마음이 되었지만, 나를 빤히 보는 헤레이스의 시선에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저를 위해서 해주신 일들이 고맙기도 하고요.”

헤레이스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놀랍게도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금 저건 쑥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으하항.

“……드, 들어와요!”

나는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재빨리 그를 안으로 들였다.

“전하.”

다음으로 온 유진은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그런데 파티라니요?”

“그냥, 고마워서요.”

내가 답하자, 내 얼굴을 잠시 살피던 그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곧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의 눈이 편안하게 풀렸다.

“그렇습니까?”

조금 장난기가 어린 말투. 오랜만에 듣는 말투였다. 반가워서 나도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맛있는 거 많아요. 제가 만든 건 함정이지만.”

다니엘이 맛있어 보인다고 했던 과자는 모양만 예쁘고 맛이 지옥이었다. 뭔 실수를 한 거지? 그건 혼자 먹겠다고 한쪽에 치워뒀는데 설마 그걸 먹지는 않겠지.

“전하가, 만드셨다고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네.”

유진이 잠시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의 기대 어린 눈빛에 당황했다. 그래서 그에게 작은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음, 다시 말하지만 함정이에요. 먹으면 못써요. 알았죠?”

“혼자 다 드시려고요? 너무하시네요, 전하.”

“경에게 다 줄 수도 있기는 한데…….”

그가 푸핫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하겠습니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근래 본 것 중 가장 가벼워 보였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멀리 보이는 카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리샤.”

가만히 지켜보던 다니엘이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즐거워요.”

새삼스럽지만, 파티라고 준비를 하고 나니 생각보다 들떴다.

“……굳이 그들을 직접 맞아줄 필요가 있나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물론이죠!”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야 하는 걸요.”

그가 멈칫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당도한 카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요, 공작!”

“전하, 오늘 혹시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까?”

카인이 인사를 가볍게 한 뒤, 아주 심각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고민을 꽤 한 티가 났다.

“전하의 생신은 아니고, 그렇다면 무슨 날인지.”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 ……혹시 어젯밤에 이거 생각하느라 잠도 못 잔 건…… 아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뇨, 아니에요!”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답했다.

“고마운 게 많아서, 이런 걸 하게 됐어요.”

“고마운 것, 말씀이십니까.”

멈칫하는 그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모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네.”

그리고 뭘 떼어주는 척 그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꼭 이유가 없더라도, 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나는 당신들이 늘 보고 싶었다고요! 엉엉.

조금 시무룩하게 나간 말이었지만, 그래도 다 잘 해결되었으니 거칠 것이 없어져서 좋기도 하다.

카인은 고개를 내게 맞춰서 살짝 내린 채로, 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

놀랍게도 그가 아주 확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옅은 빛의 붉은 입술이 말끔한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늘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것이 매력이었던 이 퇴폐적인 미남은, 미소 한 번에 순수를 머금었다.

“으.”

“……전하?”

“음, 아, 아니에요.”

순간 숨이 막혔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나를 부축해 주는 다니엘이 느껴졌다. 걱정이 어리며 살짝 커졌던 카인의 눈빛이 아주 잠깐, 내 뒤의 다니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내가 그 눈빛을 읽기도 전에 다시 나를 향했다.

그 놀라운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을 했지! 확실하게! 으항항항!

“괜찮으신 겁니까, 전하.”

“괜찮아요.”

나는 들뜬 기분으로 그에게 답했다.

“들어가요, 카인.”

카인은 나를 걱정스럽게 보다가, 다니엘을 힐끔 보고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는 그를 나와 함께 응시하던 다니엘이 툭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가 웃어줬잖아요.”

멍하니 흘러나오는 답을 막지 않았다.

“웃어줬어요. 내게.”

다니엘은 어쩐지 더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카인의 미소의 잔상을 마음껏 즐겼다.

“……그렇군요.”

다니엘이 무언가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그를 돌아보자, 그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글거리는 것 같은 흑갈색 눈동자에 얼핏 황금빛이 비쳤다. 그 신비로운 빛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그가 더 짙게 미소를 그리며 내게 속삭였다.

“리샤. 아까 약속한 것 잊지 말아요.”

“……아까 약속한 것이요?”

“저와 함께 준비했고, 그 시간이 즐거웠다는 거요. 꼭 말하는 거예요. 알았죠?”

혹시 공표를 하는 수준을 원하는 걸까? 나는 눈을 깜박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직접 말해야죠.”

속을 읽은 것 같은 말이 돌아와서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리고 의미 모를 압박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니, 그 말을 하는데 이런 사명감을 느끼게 될 줄은.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원한다면! 주먹까지 불끈 쥐며 심각한 표정으로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니엘의 얼굴이 묘해졌다.

“착하네요.”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반쯤은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살짝 가는 눈으로 보다가,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리고 우리 이비엔 경과 그 옆의 소피아 영애를 발견하고 그들을 반겼다.

“어서 와요. 둘이 함께 왔네요?”

다니엘이 나른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다시 다가와 섰다.

“전하.”

“전하!”

설렘을 가득 품은 이비엔 경과 소피아 영애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그래도 아리엘보다 소피아가 백배 나은 친구다! 둘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뭇했다. 무도회에서 날 위해서 많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고맙기도 했다. 그들의 손을 한 번씩 꼬옥 쥐며 말했다.

“고마워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와줘서 정말 기뻐요.”

“전하! 흑!”

이비엔 경은 감격한 표정으로 비장한 얼굴을 했다.

“전하, 제, 제가 더 기쁩니다! 세상에, 홈파티라니요!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전하와 그, 그……렇게 친하지 않지만! 하지만 너무 기쁩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소피아의 기쁨은 격렬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슬슬 나와 친한 척하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을 철회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소피아가 표정을 갑자기 굳히며 내게 작게 물었다.

“아, 그런데, 전하. 혹시 그 후작님은……. 오셨을까요?”

아무리 봐도 썸은 아닌 것 같았다. 가일 후작을 언급하며 전투적으로 눈을 빛내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지만 뭐, 가일 후작은 날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내는 인간이라 따로 부르지는 않았었다.

좋아하겠네?

“아뇨, 안 불렀어요, 영애. 하지만 올 수도 있겠죠.”

오라버니의 측근이니 말이다. 안 불렀다는 말에 환해지던 소피아 영애의 얼굴이 삽시간에 우울해졌다.

“그, 그렇군요…….”

그녀는 겨우 웃는 얼굴로 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터덜터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다니엘이 툭 물었다.

“가일 후작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으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겠어요.”

그때, 이비엔 경과 함께 들어갔던 소피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입구로 다가왔다.

“영애?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저, 전하.”

그리고 내게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저 안에……. 그, 저 신사 분들은.”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내가 답했다.

“아, 제 소중한 분들이랍니다.”

오늘 나는 다 모은 김에 단체사진도 찍을 생각이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나왔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에요.”

“저 분들이요……?!”

소피아 영애는 머리에 돌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끄앙, 하는 표정을 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아련한 눈으로 보더니 돌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까워. 아깝다고…….”

“영애?”

그리고는 그 귀여운 분홍색 머리를 살랑이며, 시무룩하게 몸을 돌렸다. 나는 심각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묘한 어조로 다니엘이 말했다.

“리샤.”

“……아, 네.”

“인기가 많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작은 혼잣말이 뒤를 이었다.

“다니엘? 이런 인기는 달갑지 않거든요?”

뭔가 사고 칠 것 같잖아! 황당한 심정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반쯤은 재밌어하는 표정이었다. 얄미워……!

시간이 흘렀다. 오라버니는 조금 늦는다고 했고, 제인 남매가 많이 늦는다고 했다.

아아, 단체 사진을 남기기엔 오늘이 최고인데! 아쉽지만, 막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 막내 콜린은 몸이 많이 약했다. 심하게 아플 때는 남매가 전부 달려들어 간호를 하고는 했다. 오늘은 좀 심한가 보다.

‘걱정되는데.’

그냥 오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제인이 다소 강경하게 오겠다고 전해왔다.

‘일단 늦더라도 기다려봐야지.’

그렇게 파티가 무르익었다. 피를 토하는 날도 아닌 데다, 혹시 몰라서 진정제와 혈액보충제도 충분히 먹어두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껏 놀 수 있었다. 히히. 물론, 다니엘이 말했던 같이 준비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미남들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도 내가 만든 쿠키를 보란 듯이 입에 넣었다. 그리고 헤레이스가 말했다.

“리샤. 이거 뭐야……?”

혹시 독을 넣었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그에,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그러게 먹지 말라니까. 물론 나는 그 레어한 표정들도 전부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중간에 들어와서 어쩐지 살벌한 기색으로 나를 보던 오라버니는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 가일 후작도 왔는데, 그는 어쩐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직접적으로 까칠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삐진 느낌인데, 설마. 착각이겠지……?

어쨌거나 올 사람은 다 왔다. 나는 감격하여 응접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과 마주쳤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어요?”

다니엘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네.”

“뭔데요?”

나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기 말고, 저기에 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줄래요?”

“…….”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말이 없던 다니엘이 잠시 후 눈을 살짝 휘었다.

“알았어요.”

여상스럽게 답한 그가 내게서 떨어져서 응접실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한쪽 벽에 기대선 채로 나와 눈을 맞추고 웃자 정신을 차렸다.

……저게 즐기는 건가? 무언가 찝찝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렇게 다 모이니까 기분이 묘하네.’

내가 이 몇 달을 정말 알차게 보냈구나, 하는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전부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불안한 미래를 맞이할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심지어 우리 오라버니까지도, 원작보다는 나은 인간이 될 것 같았다. 뿌듯하군!

좋아. 이제 저 사람들의 사진만 남기면 완벽하다.

‘제인 남매가 없는 건 아쉽지만, 나중에 남기면 되니까!’

나는 손뼉을 짝 쳤다. 곧바로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아.”

순간 나는 감격해서 비틀거렸다. 모여 서 있는 미남들은 물론이고, 우리 이비엔 경에 소피아까지. 거기다 오라버니와 가일 후작도 한 미모 하는 인간들이었다. 특히 오라버니! 아니, 이렇게 떨어져서 보니까 원작 남주가 맞네, 맞아! 과연, 남주다운 미모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카인이 다가오려는 것을 저지하고, 나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절로 맺히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흑, 아름다워.’

그러다가 나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늘 안에 자기를 숨기고 서 있는 그는, 일단 시선을 주자 홀로 오롯하게 빛나고 있었다. 짙은 흑갈색 눈동자에 염려가 어려 있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나는 가까스로 그에게서 눈을 뗀 뒤,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사실 하나가 더 있어요.”

딱 열댓 명이 편하게 오갈만한 크기의 응접실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얼마 전에 구한 게 있는데, 그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그림으로 재현해서 남기는 도구였거든요.”

말없이 나를 주목하고 있던 사람들 중 몇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이거예요.”

나는 돌멩이를 들어서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이걸로 우리들의 그림을 남기면 어떨까 하고요.”

그런데 다들 어쩐지 흐린 낯을 하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힝. 나는 한 사람이라도 거절을 할까 봐, 급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많이 남기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단체로 한 장씩? 복사해서 나눠 가져도 되고. 번거롭지도 않을 거고요.”

사실 독사진도 남기고 싶지만! 제발 허락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장점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그, 이거 남기면, 못 보게 되었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영원한 덕질을 위한 필수품!

“기억할 수 있고.”

영상까지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그건 젠에게 모든 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겨두면 좀 우울할 때 그걸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렇게 좋은 것이니, 우리 단체로 한 장 이상, 독사진으로 한 장 이상씩 남기는 게 어떨까요?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지만 다들 내 말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몇몇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미남들은 화까지 난 것 같았고, 다니엘은…….

“어, 그…….”

그는 그답지 않게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 붉은 기가 도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설마 아무도 허락 안 해주는 거야……? 나는 어물거리다가, 그냥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실망이 너무 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으헝, 우리 언니를 남기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은! 잠시 시무룩한 채로 돌멩이만 멍하니 응시하다가, 나는 일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큼, 안된다면, 어쩔 수 없죠. 이건 포기!”

이 정도는 허락해줄 줄 알았는데.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무언가를 남길 수는 없었다.

“괜한 말을 꺼냈네요. 미안해요, 다들.”

다만 눈에 맺히는 물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짧은 순간 감정을 추스른 나는 이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본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으흑, 전하! 아니, 아니에요. 저 남기겠어요!”

좋았어. 그냥 아주 토시 하나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천재가 되는 거야! ……응?

‘잠깐.’

나의 새로운 다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외친 소리.

“……남긴, 다고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하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내 시선을 피했던 소피아 영애였다. 아니, 저기 영애, 그 옆의 이비엔 경도 설득해주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비엔 경이 나섰다.

“……그게 뭐 어렵다고.”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하겠습니다, 전하.”

헤레이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유진이 조금 창백한 얼굴에 고상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카인은 묵묵히 나를 보다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그림으로 남기는 도구라. ……들어봤지.”

오라버니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고, 그 옆의 가일 후작은 나를 빤히 보다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가일 후작은 빠져줘도 괜찮은데! 하핫!

‘그럼,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돌아본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무거운 표정을 하고서.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점차 그는 표정을 풀었다. 옅지만 선명한 미소가 어린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주인?

젠이 날 부르는 걸 들으면서 나는 결국 한 번 훌쩍였다. 아 뭐야! 긴장했잖아! 소장품 하나 가지지 못하고 여길 뜨는 줄 알았다. 말도 안 되지! 엉엉.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는 건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헤레이스가 얼굴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리샤, 왜 울어? 해준다니까?”

“너무.”

흐윽, 미소년이여, 고마워요!

“행복해서요.”

헤레이스의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 둘러본 사람들 전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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