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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가 사랑할 때(2권) (3/15)

악녀가 사랑할 때 2권

문이 닫혔다. 닫자마자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신 걸까요.”

유진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은회색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었다. 카인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착잡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영민하신 분이다. 모르실 리 없었다. 굳이 눈을 뜨지 않고 그들과 직접 마주하지 않은 것은.

“모른 척해 달라고 암묵적인 부탁을 해 오신 것이 분명하네.”

황녀가 자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록스가 뒤늦게 말을 멈춘 것이었다. 정말 황녀가 자는 중이었다면 그들은 앞으로의 대책까지 논의를 끝내고 나왔을 것이다.

“영혼이 망가지고 있다고.”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카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가장 우려했던 결과가…….”

이것은 황녀의 정신이 몸의 고통을 버티지 못할 경우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기도 했다.

매 순간이 아쉬울 것이다. 매 순간이 괴로울 것이다. 영혼이 흔들리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아예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그것은 영혼에도, 몸에도 큰 무리가 따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고통들을 다 참고 계시는 것인지…….”

록스가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벼랑 끝에 몰린 황녀는 그러한 충격을 홀로 감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야기 중간, 황녀의 숨소리가 심상찮아진 것을 느꼈다. 무언가 격한 감정을 참아 내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푹 말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안쪽 살을 꽉 물면서 황녀는 깨어나지 않은 척 제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황녀를 두고 나왔다. 고통을 참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멍청하게 서 있었다.

“저는 약초를…… 좀 더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록스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 * *

그렇게 다들 자리를 피한 사이 결국 눈물을 삼키고 있던 르페르샤에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아니, 소년이라기엔 신장이 길었다. 얼굴이 몹시 천사 같아서 소년의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그 헤레이스의 녹안이 황홀한 감상을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르페르샤가 울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누구세요?”

헤레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르페르샤의 말간 눈을 보고 이내 슬쩍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천사.”

그를 처음 보는 이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하긴, 죽음의 천사도 천사니까.

‘사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르페르샤가 설핏 웃다가 손을 뻗어 왔다. 흠칫했다가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황금빛 고수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르페르샤는 그의 보드라운 볼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떨리는 손은 몹시 가녀리면서도 따스했다. 그리고 그 손 가득히 눈물 냄새가 났다.

헤레이스는 눈을 파르르 깜박이다가 강아지가 하듯이 그 손에 얼굴을 살짝 기대 보았다. 그러면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르페르샤의 반응을 살폈다. 보랏빛 눈동자를 처연하게 적시던 울음이 점차 멎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굉장히 아쉬워진 헤레이스가 조그맣게 물었다.

“더 안 울어?”

르페르샤가 살짝 웃으며 답해왔다.

“……이제, 괜찮아요.”

그 말에 헤레이스가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물었다.

“뭐 때문에 괜찮아진 거야?”

우는 게 예뻤는데. 네 우는 모습을 보러 친히 여기까지 온 건데. 왜 더 안 울어?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보라색 눈을 예쁘게 일렁이며 르페르샤 황녀가 흘리듯 답했다.

“천사를 만났으니까요.”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면 그걸 치워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 고민했다. 곤란하네. 날 치울 수도 없고.

르페르샤 황녀는 그의 얼굴에 댔던 손을 다른 손으로 소중히 보듬어 쥐고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말갛고 투명했다. 그런데 거기에 눈물이 맺히니 진실로 아름다운 빛깔이 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약간 남아 있는 물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헤레이스가 천사처럼 웃으며 은근하게 르페르샤의 귓가에 속삭였다.

“있잖아. 너, 나랑 갈래?”

더 예쁘게 만들어 줄게.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예상했던 방해꾼들의 출현에 외양과 어울리지 않게 비웃는 웃음을 지은 헤레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르페르샤의 멍한 눈을 마주 보며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헤레이스야. 리샤.”

잘게 흘린 미소만이 그가 있던 자리에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 * *

속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훌쩍이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니 얼굴 가까이에 누군가 소리 없이 내려앉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

“…….”

잠시 말없이 그 정체불명의 인간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까 그 궁금했던 미소년이었다. 하필 이런 기분일 때 찾아온 걸까.

나는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 수는 없어서 울던 것을 최대한 수습하면서 눈에서 눈물을 끔벅끔벅 털어 냈다.

“누구세요?”

생각하기도 전에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같았으면 환호성을 질렀을 만큼 소년은 아름다웠다.

황금으로 자아낸 듯한 머리카락은 그 큐피드 아기 천사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조그마한 얼굴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끝이 약간 애교스럽게 올라간 오뚝한 코가 귀여웠다. 특히 그 초록색의 맑은 눈은 정말 천사 같았다.

나는 그의 금발 머리를 눈에 담고 있다가 언니를 떠올렸다. 훌쩍,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바로 하며 눈을 조금 휘었다. 이 사람 뭔가, 아름답긴 한데 뭔가. 음.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윽고 미소년의 옥구슬 구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사.”

으응?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소년은 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리고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이 미소년도 알 수 없는 소리 기능이 기본 탑재되어 있는가 보다. 어찌 보면 우리 미남들보다도 심한 것 같기도 했다.

자기가 천사라니. 조금 기분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고마운 일이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조금 정신을 차린 나는 이내 깨달았다. 저 놀라운 미소년이 지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것을.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미 손이 닿아 있었다.

저기…… 이게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고! 아이구, 이 손이 그만!

그러나 소년이 가만히 받아들이자, 내 솔직한 손은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쓸어도 보고, 뺨에 조심스레 손바닥을 대기도 했다. 그러다 소년이 그 손에 얼굴을 슬며시 대 주었을 때에는…….

큭.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너무 좋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 기분은 뭘까. 아주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인데, 또 묘하고, 진짜 천국에 날개 달고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더 안 울어?”

참 미성이네.

소년의 질문에 내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이제, 괜찮아요.”

네가 내 앞에 있잖아요. 나 이 손 안 씻을 거야. 장난스러운 생각으로 답해 보는데 소년이 갸웃하며 물었다.

“뭐 때문에 괜찮아진 거야?”

그야 너 때문, 아니지.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이 약간 이상한 것 같은 소년의 수준에 맞추어 답을 해 주었다.

“천사를 만났으니까요.”

소년이 정색을 했다. 그 정색에 나는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미, 미안. 근데 미소년이여, 너는 천사드립 쳐도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응, 그래, 안 되지. 네가 다 맞아.

시무룩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소년이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리고 소년이 속삭였다! 내! 귀에! 대고!

“너, 나랑 갈래?”

네……!

그 순간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밤이 내리듯 순식간에 검은 장막이 시야를 가렸다. 얼핏 보였던 것은 소년의 목에 은빛 칼날이 닿아 있던 것이었다.

카인이 다가와 나를 살피고 굳은 얼굴로 소년을 응시했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도 ‘나랑 갈래?’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지만. 목에 유진의 칼날이 대어진 채로 소년이 노래하듯 말했다.

“나는 헤레이스야. 리샤.”

응. 헤레이스. 헤레이스구나. 내 이름도 알고, 똑똑하기도 하지. 사라진 소년의 잔상을 멍하니 좇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 헤레이스? 그리고 딱 굳어 버렸다.

“…….”

나는 눈을 깜박이며 입을 조금 벌렸다. 원작에서 정보 길드장의 이름이 바로 헤레이스였기 때문이다.

* * *

방에 돌아온 뒤, 한잠을 푹 잔 나는 컨디션을 회복했다. 언니는 내게 자유롭게 살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주었다. 오래 살 수 있는 길과 함께. 언니가 원하는 바는 적어도 내가 슬픔에 잠겨 있는 것과는 방향이 다를 것 같았다.

본래 나는 내 분수를 잘 안다. 거창한 일, 거창한 생각, 거창한 마음은 품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내가 떠올려야 할 사람은 날 여기로 보내 준 르페르샤 언니였다. 그 언니만 품자. 나는 웃기로 했고, 행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정리한 표를 보며 헤레이스를 떠올렸다.

“굳이 주점을 다시 갈 필요는 없어진 건가?”

헤레이스. 아리엘을 사랑한 서브 남주 중 마지막 한 명.

‘아니, 애초에 그걸 사랑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니 조금 우스웠다. 헤레이스는 솔직히 말해 미친놈이었다.

황금빛 고수머리에 촉촉한 녹색 눈동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지만, 그 외모와 정확히 반대되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가서 울보 소리 들을 만한 외모를 하고서, 그는 남이 우는 걸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엘도…… 우는 게 특이하게 예쁘다고 쫓아다녔었고.’

우는 게 예뻐서 도와주고, 우는 게 예뻐서 괴롭히고, 우는 게 예뻐서 또 협조하고,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는. 어찌 보면 툭하면 우는 아리엘과 헤레이스는 천생연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의 마지막은 유진처럼 비참했다. 유진은 카인의 손에 죽고 말았지만, 헤레이스는 아리엘을 구하다가 죽고 만다. 그리고 아리엘의 품 안에서 눈을 감기 전에 천사같이 웃으며 말한다.

“나는 결국, 날 위해 우는 너를 보고 싶었나 봐.”

아리엘은 그 말에 어이없게도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흑, 나 혼자 있으면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

그리고 열심히 황태자의 이름을 불렀었지. ……정말 완전체다, 이 여자는. 으으, 어쨌거나 그런 마지막은 너무 안타깝다. 나는 흐린 낯을 정리하고, 아침 햇살이 들도록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어제를 회상했다.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공작…….”

헤레이스가 그렇게 도망친 뒤 멍하니 부르자 카인이 안도한 눈을 하고 나를 조심스럽게 다시 약제실 침대에 눕혔다.

“볼턴 경이 지금 그자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서요. 못 쫓을 거야.

헤레이스는 감추는 능력이 많은 인물이었다. 정보 길드장이니까 적어도 도망치는 데에 있어서는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조금 안타깝게 그를 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밖은 어느새 저녁이었다.

“볼턴 경이 돌아오면 수고했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그러겠습니다.”

“공작도 고마워요.”

“아닙니다.”

나는 살짝 웃어 준 뒤 그대로 내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웠다.

“헤레이스.”

나지막이 불러 보며 나는 조금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죽지 않게 해 줄게, 하고.

* * *

“대장, 어디 있었어!”

귀찮게 부르는 수하의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처리할 게 산더미인데!”

“시끄러.”

꿀빛 금발이 지하에서도 빛을 발했다. 녹안이 귀찮음을 가득 담고서 수하를 향했다.

“가서 르페르샤 황녀에 대해 좀 알아봐.”

“응? 황녀?”

“그래.”

늘 무료함에 젖어 있던 녹안이 순간 번뜩였다. 수하가 잘못 봤나 하며 눈을 비볐다.

“왜?”

“관심이 있어서.”

“아하, 아…… 어엉?”

수하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헤레이스는 수하의 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상에 잠겼다. 황녀가 우는 모습은 절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보고 싶었다. 아니, 일주일 내내. 아니 1년 내내. 죽음이 황녀를 울릴 수단이 된다면 그럴 용의도 있었다.

“재밌는 여자야.”

천사를 봤으니 이제 울지 않는다던 얼굴이 떠올랐다. 뺨에 닿았던 작고 가느다란 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는데.’

황녀의 얼굴엔 동요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저 어린 아이처럼 말갛기만 했었지.

“신기하단 말이야.”

눈물이 잦아들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얼굴이 우는 것 같아 보였었다. 정말 신기한 느낌이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도 매우 마음에 들었고. 그리고 그 떨리던 손에서 묻어나던 눈물 냄새가.

헤레이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을 들어 황녀의 손이 닿았던 볼의 자리에 똑같은 모양으로 철썩 대 보았다.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흐음.”

생각할수록 지독하도록 처절하고, 또 이상할 정도로 해사한 느낌의 여자였다. 헤레이스의 눈이 점점 맛이 가기 시작했다. 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귀를 후볐다. 그리고 설마 잘못 들었겠지, 하며 소리쳤다.

“대장? 뭘 그렇게 중얼거려? 그보다, 뭐? 관심이 있어? 아하하하하!”

대애자앙이이?! 과할 정도로 오버스럽게 호옹! 하고 장난스럽게 놀라는 척하던 수하는 머리에 혹을 세 개 달고서야 수선을 멈췄다.

“날 죽일 셈이야?”

수하의 머리에 돌멩이를 날려주면서 헤레이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잔말 말고 알아봐. 사소한 습관, 오늘 하루 뭐 먹었나, 이런 거 전부. 쯧, 처소 안은 들킬 위험이 있으니까 거긴 빼고.”

“어? 거긴 빼라니. 그보다 대장, 스토킹에 취미 들린 거야?”

그럼 그렇지. 관심은 무슨. 수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레이스가 수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저를 압박하는 광포한 기운에 수하가 움찔했다.

“어디에 몇 걸음 걸어가서 몇 초 동안 있었는지까지 알아 올게, 맡겨만 주셔!”

헤레이스는 무료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그 일 중독자 아이릭 공작이 장기 휴가를 냈다는 소식이 황궁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휴가 사유는 ‘정체 모를 인물이 있는 이상 황녀를 볼턴 경에게만 맡기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잠깐 냈던 휴가는 장기 휴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꽃 두 송이가 항상 함께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환히 웃던 르페르샤는.

“또 보네?”

싱글싱글 웃으며 세 사람을 맞이하는 그 소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천사님?”

약간 미쳤으나 역시나 그 미모가 그리웠던 미소년을 그녀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곁의 두 사람의 경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레이스가 키득 웃었다.

* * *

내 생각에 헤레이스는 앞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흥미가 가지 않는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서술되었었기 때문이다. 내게 흥미가 없었다면 그렇게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과한 미남들로 인해 평정을 잃지 않을 대책이 절실해졌다. 일단은 진정제를 다수 먹었다. 그리고 룩덕질을 하기로 결정했다.

룩덕질. 그것은 옷을 입혀 보는 것이었다. 내가 내 최애를 코디하는 기쁨에 빠진다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다른 것에 열중을 해 본다면, 넋 놓고 기절을 하는 불상사를 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다른 인물 덕질은 오늘의 결과에 따라 시기가 달라질 예정이었다.

‘빨리 적응을 해야 해.’

사실 사심이 충만했고, 반쯤 기분 전환용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유진, 혹시 좋아하는 색이 있나요?”

“좋아하는 색이라면, 글쎄요. 하얀색을 선호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군요. 카인은요?”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 없습니다.”

“아하! 알겠어요.”

함께 걸으면서 나는 둘의 취향과 스타일에 대해 슬쩍슬쩍 물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온갖 스타일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직접 꾸며 주기로 한 것이다. 집중하게 되겠지. 기절할 수가 없을 거야.

눈이 시릴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은발의 유진은 귀공자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흰색이 확실히 잘 받는 외모였다.

“으음. 단정한 분위기가 좋겠네요.”

“리샤? 그러니까, 저에게 말입니까?”

“네.”

“화려한 것이 어울린다는 말만 들어서 새롭군요.”

화려한 거라니!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시선을 사로잡는 붉고 매혹적인 입술 덕에 그에게는 객관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래서 그런가? 머릿속으로 단정한 스타일을 입혀 보니, 어휴. 옷이 단정하면 뭘 해.

“유진에겐 단정한 분위기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옷은 단정한데 그림은 금욕섹시의 끝판왕이 나올 것 같은 것이다. 몹시도 흐뭇한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네.”

유진이 어쩐지 약간 기쁜 시선으로 나를 보아 왔다. 그래, 미남이여, 그대도 마음에 드는 것이지? 역시, 카사노바는 패션에 밝기 마련이지. 나는 속으로 끄덕끄덕하며 생각했다. 뿐인가.

“카인은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지만, 화려한 것도 무척 잘 소화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같이 봐요. 알았죠?”

“예. ……리샤가 원하신다면.”

카인은 이런 대화에 몹시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해서, 착각인가 하면서도 그 새로운 모습에 나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좀 이상하게 보더라도 피칠 하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그 후에도 나는 이 둘과 끊임없이 그런 대화를 나눴다.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한 이 대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일단 유진과 카인을 향한 감탄은 식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흥분된 열기는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것 같았다. 그에 따라 증상이 조금 덜해졌다.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고 눈물이 나고 아프던 심장은 또 다른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이 몹시 말짱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또 보네?”

헤레이스를 다시 본 것은 한창 시장을 돌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를 두 미남과 함께 보는 순간에도, 나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헤레이스에게는 뭐가 어울릴까? 후후. 우후후후.

나는 의욕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천사님!”

“지금, 뭐라고…….”

“리샤, 혹시 저치를 보고 천사라고 하신 겁니까?”

유진과 카인은 얼굴까지 구기며 당혹스러워했다. 하긴, 천사님이라니 얼마나 황당할까.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미남입니다.

“저분이 직접 천사라고 하셨답니다.”

우리 조금 미친 것쯤은 이해해 주어요. 둘도 사실 약간은…… 응. 그렇잖아요.

최선을 다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 말에 나와 마주 보던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힐끗 본 헤레이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다가, 조금 느리게 다른 쪽 입꼬리를 따라 올렸다.

조금 부자연스럽지만 빙그레 지어 주는 미소에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어떻게 이렇게 딱 만났을까요?”

너 나 찾아왔지? 히히. 이럴 줄 알았지.

그러자 황금빛 머리칼의 천사 같은 헤레이스가 여상스럽게 답했다.

“천사라서 그래.”

“네?”

“난 천사라서 뭐든 다 알거든.”

으응?

헤레이스는 자기가 말해 놓고 어린아이같이 키들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기가 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진이었다. 카인은 특별한 반응 없이 헤레이스를 지그시 보고만 있었다.

대단하다. 저런 말을 하는 미남도, 저걸 듣고 아무 반응 없는 미남도. 전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랑 놀자, 리샤.”

헤레이스는 시종 나와만 눈을 맞추며 그렇게 말했다.

오. 제발. 제발. 녹색 눈이 인간의 것 같지 않게 맑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눈이 매우 사랑스러운 모양으로 살포시 휘어졌다. 미성이 나직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약속해. 즐거울 거야.”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거기에 이어지는 동굴 같은 목소리.

“정체부터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닌가?”

나긋하고도 각이 잡힌 신사의 목소리. 그리고 헤레이스의 무료한 미성이 뒤를 이었다.

“이름 알면 됐지, 뭘 더 바래?”

……미친. 나는 속으로 괴성을 질렀다. 귀가 황홀해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아직 몰랐어야 할 미남들이 서로 저마다의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뭇해라.

‘그런데 이상하네.’

아리엘의 어장 속 남자들은 사실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았을 인물들이었는데. 황태자는 유진과 카인을 이간질하고 헤레이스는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까지 했다.

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셋은 데면데면한 관계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어째 지금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 때문인가?

어떡해. 힝. 하지만 그 각자의 어둑어둑한 긴장감이 목소리에 실리니까 아주 흐흐 좋아서 죽을 거 같았다. 엉엉. 나는 최선을 다해 정신을 챙겼다. 안 되겠어. 이러다간 또 약제실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럼…… 그러면요!”

세 미남의 시선이 내게 훅 몰렸다.

아아아아아 안 돼!

나는 눈물을 훔치려 손수건에 얼굴의 반을 묻으며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옷 사러 다 같이 갈까요?”

* * *

아차 싶은 마음에 유진과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불명의 소년인지 청년인지 알 수 없는 이에게서 리샤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그녀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놀라는 일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던 록스의 말을 유념했어야 했는데. 눈을 잘게 떨면서 손수건에 얼굴을 묻는 리샤를 보고 입술을 짓씹은 유진이 그녀를 부축했다.

카인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금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어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시큰둥한 얼굴로 마주봐 오는 금발 남자는 무언가 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리샤는 영리한 황녀였다. 그런 그녀가 저 남자의 수상함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호감 어린 반응을 돌려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여 유진과 카인은 일단 남자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기묘한 분위기의 동행이었는데.

“천사님, 망토요?”

“응. 펄럭이고 다니고 싶거든.”

“아하. 어떤 거요?”

“가서 봐야지. 일단 초록색에 금색 무늬였으면 좋겠어.”

헤레이스를 경계하느라 조금 늦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오늘의 리샤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다는 것이다. 헤레이스가 원하는 망토의 외양을 들은 리샤가 잠시 멈칫하더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유진과 카인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리샤가 무엇을 결심한 것인지 그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전부 주세요.”

리샤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볼은 발그레했고 누가 보아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헤레이스의 마음에 쏙 든 암녹색 망토를 시작으로, 시장 곳곳을 다니면서 그들 셋의 물건들을 사고 있었다.

그녀가 헤레이스를 왜 호의적으로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 그게 우선이 아니었다. 사양을 몇 번 해 봐도 그녀는 그들에게 옷과 남성용 장신구, 음식 등을 사며 답했다.

“부탁이에요. 제 기쁨을 부디 앗아 가지 말아 주세요, 카인.”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기뻐요!”

“제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안 될까요…… 유진?”

급기야는 여기에 없는 궁인들의 것도 하나씩 고르기 시작했다. 종종 어지러운지 비틀거리고 가슴 부근을 부여잡기도 했지만 열심히 스스로를 수습하며 돌아다녔다.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과 카인의 얼굴빛이 점점 침중해져 갔다.

“리샤.”

헤레이스는 말없이 주는 족족 받아먹고 받아 입고 있다가 유진과 카인이 돌아올 답이 무서워 묻지 못한 것을 툭 물었다.

“왜 네 거는 안 사?”

그 말에 리샤가 흠칫했다. 그도 잠시 그녀는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

“아무것도 필요 없거든요.”

마치 곧 죽을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으로 비춰졌다. 정말로 그녀는 충분하다 여기고 있었다. 알던 것보다 더욱 절망적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오열하던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유진과 카인은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서 그녀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는 견디기가 힘들다고 한 마디 더 표하기는커녕 떠나기 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주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스스로를 챙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다정하게 흐를 수 있을까.

리샤의 답을 직접 들은 헤레이스가 눈을 깜박이다가 “그래?” 하고는 그녀가 사 준 망토를 고쳐 입고 앞장을 섰다.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기는 리샤의 뒤를 유진과 카인이 말없이 따랐다.

* * *

“일단 초록색에 금색 무늬였으면 좋겠어.”

라고 헤레이스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떨렸다. 덕심 때문이 아니라 불안감 때문에. 원작에서 그가 즐겨 입었다던 괴상한 디자인의 망토를 떠올린 탓이었다.

‘내가 있는 이상 그런 망토는 절대로 입게 둘 수 없지!’

나의 미남들이 이상하게 보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힘차게 쇼핑을 시작했다.

“천사님, 그, 그게 마음에 들어요?”

“응. 몹시.”

헤레이스가 집어 든 로브를 보고 나는 비명을 삼켰다. 글로 읽던 것보다 더해!

‘이게 무슨 짓이야!’

원작에서 여주 아리엘이 헤레이스를 처음에 이상하게 느끼고 경계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녹색이 저런 녹색일 줄은 몰랐고, 금색 수가 저런 모양일 줄은 몰랐다.

헤레이스가 집어 든 로브는 형광에 가까운 녹색 바탕에 독약 표시인 해골과 기괴한 취미의 그림들이 무려 황금빛으로 수놓인 로브였던 것이다.

“거 참, 수상한 취향이군요.”

“…….”

로브를 본 유진이 눈가를 잘게 떨며 말했다. 카인도 심각한 표정으로 로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내 미남들의 색다른 모습에 그들에게서 눈을 떼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헤레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헤레이스가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헤헤. 예쁘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마주 웃어 주고 말았다.

“음. 그럼 제가 선물하는 것도 가져가세요.”

자, 미소년이여. 눈치가 있다면 그 쓸데없이 혼을 불태우고 있는 예술작품은 우리 내려놓읍시다.

“아, 이거! 어때요?”

색깔이 같은 계열인 로브를 필사적으로 찾아 들었다. 지나치게 어둡지는 않은 암녹색 바탕에 백금색 실로 섬세하고도 신비로운 아지랑이 모양의 수가 놓여 있는 로브였다. 가만히 그 로브를 살피던 헤레이스가 말없이 그걸 받아 들고 입어 보았다.

후후, 세상에. 역시.

내 감각은 죽지 않았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하기보다는 유려하고 활기 있는 문양은 헤레이스와 아주 잘 어울렸다.

“와아! 너무 잘 어울려요!”

내 주위에 서 있던 유진과 카인에게서 호응을 끌어내며 진심으로 열렬하게 박수를 쳐 주었다.

제발 저거 말고 그걸 입고 다녀 주세요, 미남이여!

내 간절한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일까? 헤레이스는 날 빤히 보다가 해맑게 웃더니 처음에 골랐던 로브가 아닌 내가 골라 준 로브를 선택했다.

“정말 사 주는 거야?”

“그럼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돈은 여기에 쓰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다 주세요.”

지름신은 그렇게 강림하고야 말았다.

왕년에 옷 입히기 게임에 밥값을 쏟아붓던 용자로서, 나는 궁에서 가져온 돈을 탈탈 털어 내 미남들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아름답고 착하고 완벽한 나의 피사체들이 나를 말렸던 것도 같지만 사실 지금 기억도 안 난다. 난 반쯤 미쳐 있었다.

“부탁이에요. 제 기쁨을 부디 앗아 가지 말아 주세요, 카인.”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기뻐요!”

“제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안 될까요…… 유진?”

숨겨 왔던 덕심을 반쯤은 들킨 것 같았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시장이 아니라 아주 넓고 다양한 시장이었기 때문에 쇼핑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사진을 남겨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남겨야 하는데!

내 방에 두고 온 일기장을 떠올렸다.

‘일기라도 남겨야겠어.’

그러자 조금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을 샅샅이 기억해서 돌아가야겠다. 그때 헤레이스가 물었다.

“리샤.”

돌아보니 아까 사 준 달달한 고기꼬치를 오물오물 먹는 중이었다.

크흡. 뭐 이런 생명체가 다 있을까. 나는 손수건을 반사적으로 꼬옥 쥐었다.

“왜 네 거는 안 사?”

내 거?

내 걸 왜 사요……?

보니 아까부터 어쩐지 말이 없던 유진과 카인도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 미남들이 정말. 이렇게 뚫어져라 보면……! 나는 울컥 터지려는 감동의 눈물을 참아 냈다. 이걸. 내 시야의 이 장면을 남겨야 하는 건데. 으으, 제대로 기억해 둬야지!

어쨌거나 나는 답을 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거든요.”

그대들만 있으면 충분해요! 하고 잔잔한 미소를 그리며.

“그래?”

헤레이스는 그렇게 대꾸하고서 조금 구김이 간 로브를 툭툭 털었다. 헤헤. 내가 사 준 로브. 나는 다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아직 배가 고픈 것인지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서 앞장을 서는 헤레이스를 보며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내 옆과 뒤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유진과 카인을 살펴보았다. 하얀색을 기본으로 화려한 꾸밈은 하나도 없지만 맵시 있는 스타일의 옷을 입은 유진. 검정 계통의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입은 카인. 나는 유진의 목선과 카인의 팔뚝을 지금이라도 허공에 그릴 수 있었다.

그래. 그대로 남길 수 없다면, 오늘을 즐기는 거야!

조금 그늘진 느낌의 그들을 보니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으음. 쇼핑이 고되었나 보다.’

마네킹 역할이 결코 쉬운 게 아니지. 응응. 쇼핑은 그만하도록 할까?

다음 날을 기약하며 나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불렀다.

“유진, 카인, 어서 가요.”

* * *

그날의 외출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오늘 실컷 구경한 피사체 셋과 마침내 들어온 돈을 떠올렸다.

“뿌듯하다.”

절로 그런 말이 나올 만큼 기분 좋은 날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에 내가 지나치게 덕질에 치우치는 문제는 더 흥미를 끄는 것에 신경을 쏟는 것으로 어떻게든 개선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이렇게 조금 정신을 빼놓을 수 있는 건 유진이나 카인과 생각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궁 식구들도 그렇고. 적어도 그들 사이에서 나는 악녀로 불리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공략이 쉬운 인물들이었다고 해도 의외의 결과였다.

“……그러니까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직 이비엔과 제인이 있어. 그리고…….’

아직까지도 만나는 것이 조금 고민이 되는 인물. 일단 만나면 친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가능하면 제인까지 해결하고 만나고 싶은 어려운 인물이 남아 있다.

‘암살 길드장 다니엘.’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색은 갈색이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급스럽고, 깊고, 따스한 색. 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그 색을 가진 인물이라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작중 인물 중 르페르샤 언니를 악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 번, 그의 다정한 성품에 또 한 번 눈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 고민할 시간에 어떻게 친구가 될지 생각해 두자. 우리 언니도 이제 없는데, 그 사람이라도 오래 봐야지.’

다니엘은 흑막 같은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의뭉스럽지만 다정한 언행을 유지하는 그이지만, 정작 하는 짓을 보면…….

“약간, 미친놈이었지. 음. 그래도…….”

조금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헤레이스를 떠올리며 곧바로 그걸 털어 냈다. 사디스트라던 헤레이스가 천사니 뭐니 했던 걸 생각하면, 그 친구인 다니엘도 한결 덜 무서워지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그건 그렇고, 이제 한…… 두 달 조금 안 되게 남았나?”

날짜를 꼽아 보며 나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지금 열어 본 기억이 열한 개니까. 슬슬 요양을 가기 위해서 상태가 안 좋아질 필요가 있기는 했다. 요양을 안 가면 여기서 병이 치료된 걸 보여야 하는데, 별 이유 없이 기적이라고 퉁치고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요양은 가야 해. 날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무사히 살아서 다시 만나기 위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 다시 만나는 거. 그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거지.’

엠마는 같이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첫 인연인지라 리니와 아린을 포함한 궁인들과 1년 뒤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유진과 카인도 그렇고. 헤레이스는 얼굴만 봐도 정이 들 것 같고.

“그, 그 사람한텐 너무 정이 들면 안 되는데.”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사람 인연이 뭐 마음대로 되나 싶었으니까. 어쨌거나 생각을 마무리 지은 후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비엔 영애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 * *

이비엔 영애는 객관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여타의 영애들과 달리 그녀는 경영에 관심이 많았다. 하긴 어린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가문의 후계자였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후계자 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경영 그리고 회계를 계속 배우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카데미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곧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으니.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동생의 수업을 돕는 척하며 배움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만으로 만족했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부모님이 억지로 혼인을 추진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하여간 이런 건 참 안 좋아.’

이비엔 영애는 혼인을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다. 결국 영애는 가까운 친구 몇의 집을 전전하다가, 황궁의 시녀 자리에 자원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황태자에게 시녀가 아닌 비서로 발탁이 되었고……. 그녀는 자신을 알아준 황태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솔직히 아리엘만 없었다면 딱 헤레이스 황태자랑 이어지는 로맨스의 주인공 자리지.’

그 황태자가 정상인이었다면 응원했을 텐데.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그런 독특한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아리엘의 친구들 중 제인과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오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성격이, 열정적이지만 조금 사람에게 맹목적인 경향이 있어서…….’

메인 남주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렇다고 유일한 친구인 아리엘을 미워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을 한 번도 표해 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아리엘이 황태자와 혼인한 뒤 사임하고 시골로 잠적한다.

‘아까운 사람이었어.’

나는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원작이 시작될 때 이비엔 영애는 이미 황태자의 비서 중 하나였다. 신입이라고 했었지.

‘그러면 시기상 지금 그녀는 친구 집을 전전하고 있을 때겠지.’

나는 즐거워졌다. 그녀의 처지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떠올리니 즐거워졌던 것이다.

‘자기 일을 하게 해 줄 거야.’

처음으로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해 준 아리엘을 소중한 친구로 여겼던 것처럼, 나도 그녀와 만나서 그 말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황궁의 외궁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일자리를 알아보았었다고 했으니. 지금 나에게는 살롱 소유주 자리를 판 돈이 있었다.

‘그리고 원작은 의외로 자잘한 정보들이 꽤 있고 말이야.’

나는 경영을 하거나 사람을 쓰는 걸 못한다. 하지만 이비엔 영애는 잘할 것이다. 수석비서 자리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간 인재였으니까. 나는 엠마를 불러 몇 가지를 부탁했다.

“엠마, 여기 목록에 있는 상단들 중 경영 위기에 있는 상단을 추려 주고,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이비엔 영애를 데려오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불필요한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예, 전하.”

“그리고 개인 상단의 경영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외궁에 내 주겠어? 나이 제한을 넣어서.”

“바로 하겠습니다.”

“고마워.”

엠마는 바로 고개를 숙인 뒤, 단 하루 만에 일을 정리하고 내게 보고했다. 나는 그녀에게 따로 부탁했다.

“지원자들이 오면 첫째로 망해 가는 상단이란 걸 알려 줘.”

패기 어린 젊은이가 고개를 내두를 만큼 상태가 안 좋은 상단으로 추려 두었다. 빚은 없지만 사람이 무능해서 망해 가는 상단이었다.

“둘째로는 모집하는 사람이 황녀라는 걸 알려 주도록 해.”

그리고 마지막.

“마지막으로는 월급이 쥐꼬리만 할 거라고도 말해 주고.”

이비엔 영애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오지 않을 자리를 만들어 낸 나는, 티는 내지 않아도 엠마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엠마, 내가 엠마가 노후까지 돈 걱정은 하지 않도록 책임져 줄게.”

“……예?”

이번만큼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는지 엠마가 눈을 크게 떴다. 이비엔 영애에게 이만큼의 빚을 지워 놓는다는 건 내게 수입이 들어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조금만 받을 거지만. 그 조금이면 우리 궁 사람들 전부의 노후는 책임져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상상만으로도 꽤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내가 빙그레 웃자 엠마가 나를 보며 잠시 모호하게 울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내가 의아함을 표하기도 전에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전하께서 하고 싶으신 것이라면 저는 무엇이든 돕습니다. 그럼,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으, 응. 항상 고마워.”

엠마는 조금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엠마는 외궁의 할당된 사무실에서 일정 시간씩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며칠만 기다리면 되겠지!

이비엔 영애에 대한 일을 하나 마무리 지은 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렸다. 바깥 외출은 며칠간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사실 이것은 외출의 목적이 절반은 달성되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지금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네?”

내 방에서 오늘 자 일기를 쓰고 났을 때, 홀연히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으며 자동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천사님!”

다소 오글거리지만 자기가 천사라는데 별수 없었다. 정말 천사처럼 아름답기도 했으니까.

“넌 내가 오면 꼭 웃는구나.”

헤레이스가 다소 불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윽, 저게 되게 사디스트적인 이유로 나온 모습인 것은 알지만. 아는데도 귀여웠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신기하기도 하고요.”

“뭐가?”

“그야…….”

아무리 본궁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것 말이지. 그러나 내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유진이라면 헤레이스에 있어서만큼은 노크 후 바로 들어왔을 테지만 오늘은 카인이었다. 헤레이스가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서 아, 또! 하고 킬킬거렸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카인은 꼭 저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그 모습까지 기꺼워서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와요.”

잔뜩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나와 카인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던 헤레이스가 말했다.

“이상하다.”

어째 더 불퉁해진 어조였다.

“음? 뭐가요?”

“…….”

그는 뭔가 답이 없었다. 거의 깜박이지 않는 눈에 표정 없이 식어 버린 얼굴. 이럴 때는 좀 소름이 돋지만, 그게 또 좀 매력이기도 했다.

“무례하군. 전하께 말을 높이지 못하겠나.”

카인이 나직하게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나는 마음껏 그 동굴 목소리에 취하면서 둘을 지켜보았다.

“남이사? 존대를 하든 반말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댁이 내 애인이야?”

어째서 거기서 애인이 나오죠? 보통 그 자리는 아빠나 엄마가 들어가지 않던가.

그러나 만만찮게 평정심이 만렙인 카인은 예전의 낯을 가리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모습으로 나를 슬며시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느릿한 어조로 답했다.

“정체 모를 자와 엮이는 ‘취미’는 없지만, 기본이 안 된 자를 처리할 ‘권한’은 있지.”

“너, 죽고 싶어? 말 자꾸 어렵게 하지 마.”

큽. 아, 나 왜 이 이상한 만담이 웃긴 거지?

카인도 그 말에는 기가 막혔는지 말이 없었다. 내가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자, 헤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리샤, 울어?”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 웃겨서, 미치겠다.

“흡, 아니, 아니에요.”

나는 진정하려 애쓰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러자 귀엽게도 헤레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영문을 모르겠네. 놀래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상당히 살벌한 표정이었지만, 지금 그가 시무룩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었다. 카인이 고개를 저으며 좀 더 제대로 나를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말없이 손을 휘둘렀다. 마력으로 만든 검은색의 검이 빠르게 헤레이스에게로 쇄도했다.

분노한 카인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검을 피하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헤레이스가 무언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또 보자, 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신기한 사람이에요, 정말.”

“전하.”

“고마워요, 공작. 휴가를 절 위해 다 쓰네요. 미안해서 어떡하죠?”

가볍게 말을 돌리자 분기가 가라앉지 않던 눈빛도 차츰 가라앉았다. 카인이 이렇게 내 앞에서 감정 표현을 격하게 하기 시작한 것이 새삼 기쁘기도 했다.

헤헤헤.

“저는…… 기쁩니다. 전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헐. 나는 웃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뭐지? 나 지금 엄청나게 설레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 뭐지? 꺅!

진정제 효과가 아슬아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작은 내가 흥분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하, 요즘은 어째서 외출을 하지 않으십니까?”

망설임이 가득한 물음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조금 쉬려는 거예요.”

사실 르페르샤 언니의 기억을 하나 더 찾았다. 언니의 열두 살의 기억 곁에는 엠마가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강아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에 안심했다.

‘그래서 숨을 돌리는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외에 헤레이스 길들이기라든가, 한 것 많은데? 빨리 이비엔 영애까지 도와 줘야 신경 쓸 일이 많은 제인도 구해 줄 수 있다.

“그렇습니까.”

내 말에 그가 왜 안심을 하는 건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엔 나가는 걸 그렇게 반대했었는데, 첫 외출이 마음에 들었었나?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혼자 못 가는 건 아닐까? 사실이면 조금 안타까운데.

나는 소심한 그를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꽤 가까이에 있는 그의 얼굴을 볼수록 몽롱해졌다.

에라이. 나란 인간은 참으로 변함이 없구나. 그의 미모도 변함이 없고!

한번 들어오면 잘 나가지 않는 유진과 달리 공작은 그럼 쉬시라며 방에서 금세 나갔다. 나는 가까스로 우아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간 헤레이스를 떠올리며 웃음을 삼켰다.

‘아까 불퉁했던 거, 보나마나 내가 또 밝게 웃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의 미모에 휘둘릴 거라는 내 걱정은 기우였다. 두어 번 더 나를 찾아온 헤레이스를 만나 본 결과, 나는 그에게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직접 보니까 너무 귀여워서.’

내가 자기를 귀여워한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상상만 해도 재밌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를 길들였다. 말이 조금 이상한데, 그 표현이 딱 맞았다. 아리엘을 사랑하게 된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취향이었다.

타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좋아하는 취향. 그것이 그의 포인트였다. 특히 슬픔에 잠겨 우는 걸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심한 범죄 빼고는 거의 다 하는, 알차게 미친 ‘청소년’이었다.

그래, 연하. 연하다. 마치 새로 생긴 귀여운 남동생 같은…….

“히히…… 흠흠.”

이상한 웃음소리를 삼키며 생각을 이었다. 나는 그가 아리엘의 눈물에 간단히 휘둘리지 않기를 바랐다. 거기서 눈을 못 떼더라도 다니엘의 조언을 한 번쯤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그래서 시도한 방법은 하나. 함부로 울어 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울 일이 덕질 말고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슬퍼서 우는 모습을 좋아하는 헤레이스에게 있어서, 나는 아마도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상대가 아닐까.

‘원작에서 헤레이스는 쉽게 우는 아리엘도 좋아했지만 절대 울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묘하게 호감을 보였으니까.’

나는 아리엘처럼 잘 울 자신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후자 쪽을 택했다. 우는 것을 보고 싶은데 못 보는 것으로. 헤레이스가 내게 접근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법이었다.

보기보다 정이 많은 인물이니까, 조금 정이 들면 다니엘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게 은근슬쩍 도우면……. 이거, 가능하겠지? 긴 밀당 싸움이 될 것 같지만 예쁘게 구겨지는 헤레이스의 얼굴을 보면 웃겨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외모 이상의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었어.’

여전히 무의식중에 접하면 심장이 널을 뛰지만 말이다. 그렇게 유진과 카인, 궁인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또 헤레이스를 종종 골탕 먹이기도 하면서 다시 며칠이 흘렀다.

이제 나는 언니의 기억을 열세 살까지 보았다. 언니의 기억은 아직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예전에 내걸었던 공고가 이제야 빛을 발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엠마가 내게 보낸 최종 후보는 다섯이었다. 다행히 이비엔 영애가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영애의 또랑또랑한 눈이 살짝 떨렸다.

짙은 회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과연 상당한 미인이었다. 다만 그 외모보다 날카로운 눈빛과 다부진 인상이 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핡, 언니 멋져요.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면접 자리이고, 상대가 이비엔 영애니까. 이게 친구 사귀는 자리가 아니니 아무래도 좀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

당장이라도 언니 나랑 놀자고 매달리고 싶은 것을 꾸욱 참고서, 나는 최선을 다해 냉철하고 도도한 커리어우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다른 네 후보와의 문답이 끝났다. 이제 끝자리에 있던 이비엔 영애와 문답할 시간이었다.

나는 일단 다른 네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을 그대로 던졌다.

“왜 나를 보좌하는 자리에 지원했지요? 내 소문을 듣지 못했나요?”

결국 종합하면 이 자리는 내 비서 같은 것을 뽑는 자리였다. 그걸 아니까 사람들이 다 빠지고 다섯밖에 남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앞서 대화한 넷도, 이 자리가 시한부 계약직을 뽑는 자리라는 걸 안다면 줄행랑을 치지 않을까?

거기다 내 소문. 사실 차차 좋아지기는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앞서 이 질문을 받은 네 사람은 입에 발린 말을 하거나,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당황만 했었다. 그들은 이제 불만스럽고 불안한 기색으로 이비엔 영애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눈길들에 미묘한 무시가 느껴지고 있었다.

다른 넷의 지원 동기는 파악이 끝났다. 그들은 탈락이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이비엔 영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네 사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기가 죽지도 않았다.

“답할 말이 없나요?”

무덤덤하게 묻는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냉랭했다. 참으로 내 소문에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속없이 웃고 있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순간 이비엔 영애가 입을 열었다.

* *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원해도 이 자리에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비엔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황녀에게 말했다. 매우 까칠하고 도도하며 끔찍한 악평까지 듣는 황녀. 그러나 실제로 본 황녀는 듣던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얼음 같다는 건 맞는 것 같지만.’

황녀가 눈을 가늘게 하고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무슨 의미죠?”

황녀의 눈길이 두려우면서도, 이비엔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황녀에게서는 과한 흥분도, 편견 어린 경멸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협하고 잔혹한 성격이라고 했는데.’

사실 다른 건 몰라도 그 성격에 대한 소문만은 어느 정도 맞을 거라 여겼는데, 그런 느낌은 또 아니었다. 잠시 상대에 대해 파악을 끝낸 이비엔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제가 여자니까요.”

황족의 수행비서 자리는 대체로 남성이 맡았다. 체력적인 이유가 컸고, 수행비서가 필요한 황족들이 대체로 남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다들 동성을 더 편하게 여겼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직업은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이 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황녀도 알고 있을 텐데, 어쩐지 황녀는 불쾌한 표정을 했다.

“제국에 훌륭한 여성 관리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가 원한다는데 네가 그걸 따지고 드는 것이냐는 반응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비엔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선 제가 여성이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자신으로도 괜찮겠느냐는 물음을 최대한 덜 궁색하게 포장한 물음이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졸업 자격증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저 교육을 받았었다는 사실 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이 직업 분야에서는 다소 생소한 성별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치 않은데, 되레 내게 질문을 하는군요.”

“죄송합니다. 그것이 이 자리에 제가 지원한 이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이 있다고요?”

“네. 저는 전하께서 동성을 더 편하게 여기실 수도 있다고 기대했으니까요.”

당당해야 한다. 또한 진솔해야 했다. 앞서 네 사람의 문답을 통해 이비엔은 이 황녀가 사람의 성품을 보길 바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녀가 어떤 성격을 보고 싶어 하는지도.

“아까는 이 자리에 서지도 못할 거라고 여겼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런 마음이 반, 이런 기대가 반이었습니다.”

황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영애는 참…….”

부디, 건방지다고 여기지 않기를.

“솔직하네요.”

이비엔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꾸욱 모아 쥐었다. 황녀의 목소리는 매우 사무적이었다. 이비엔 영애는 떨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진실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선을 넘었다면, 부디 용서를 구합니다, 전하.”

황녀가 물끄러미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이비엔은 이 냉랭한 눈초리의 황녀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물어보죠. 내 소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씀하셨던 소문에 대해서라면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네 사람 쪽에서 허, 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들이 그렇게 답하고 탈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관하지 않는다면서 온갖 입에 발린 말을 했었지.’

그리고 그 느끼한 말들은 그들로 하여금 가장 최악의 점수를 받게 했다.

“상관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죠?”

“저는 저와 관계없는 사람의 소문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계있는 사람의 소문은 믿지 않습니다.”

이비엔은 잠깐 시간을 두고서 덧붙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데, 르페르샤 황녀에게는 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소문난 악녀이니까.

“그러니까, 소문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미군요.”

“예, 전하.”

황녀의 목소리가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착각일까? 그때 황녀가 말을 이었다.

“좋아요. 납득이 되는군요. 일단 첫 질문은 통과한 것으로 하겠어요.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네 사람이 응접실을 나갔다.

“영애.”

“예, 전하.”

이비엔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았다. 첫 질문을 통과했을 뿐이니까.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집에서 나온 뒤 극으로 몰리는 동안 이비엔은 칼을 갈았다.

여성이라 후계 경쟁에서 밀렸고, 여성 귀족이라 혼인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비엔은 그런 것에 휘둘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 중에 얻은 귀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행히 썩은 과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비엔은 황녀궁의 분위기와 황녀에 대한 시녀장의 철저한 정성스러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녀를 보고 깨달았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소문과는 달라.’

그렇다면 모험을 해볼 만하다. 의욕이 더 차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비엔은 첫 시험을 통과했다. 황녀는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분위기, 말투, 단어를 선택하는 느낌 그리고 사람을 시험하는 방식까지…….

‘아직은 느낌에 불과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이비엔은 꽤 많은 부분을 최대한 읽어 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황녀님을 모셔 보고 싶어.’

이것은 이비엔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비엔은 필사적으로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황녀가 입을 열었다.

얼마 후, 이비엔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 *

나는 긴장한 채 힘을 세게 준 듯 손을 모아 쥐고 있는 이비엔 영애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부드럽게 활짝 미소를 그렸다. 날 마주 보고 있던 영애의 눈이 차츰 커지는 것을 보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어서 와요, 영애. 아니, 이비엔 경.”

황족의 수행비서는 기사로 분류된다. 그녀는 합격이었다. 영애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

잠시 후, 나는 사람이 환희에 싸이는 광경을 매우 실감나게 지켜보게 되었다. 이비엔 영애는 얼이 빠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벌떡 일어나 내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약간 칼칼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몸이 부서지면 내가 곤란하니까, 적당히.”

“그럼 죽도록!”

“그래요. 그래.”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도닥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하고 자리에 앉자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계약서를 쓸까요.”

“……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빠진 물음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음, 설마 계약서를 모르나요?”

“아뇨, 압니다. 하지만 전하는 황족이시고, 저는 지금 수행비서가 된 것인데 어째서 계약서를…….”

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서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비엔 경, 저와의 일은 조금 성격이 달라요. 수행비서로서 할 일이 하나에 국한되어 있거든요.”

“아, 그거라면 들었습니다. 어떤 상단의 최고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고요.”

“맞아요. 그 외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이 상단의 일이라서 계약서를 쓰는 거고요.”

이비엔 경이 매와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반응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워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1년. 1년 동안은 저와 공동경영자가 되고요.”

길어야 1년이다. 아마 3개월 동안 도울 것을 다 도와 준 뒤에 나는 손을 놓지 않을까?

“예.”

“그 후에 저는 경영자 자리에서는 물러나게 될 거예요.”

경영은 어차피 다 이비엔 경이 하겠지만, 나는 원작의 유용한 정보들을 그녀에게 줘야 했다. 그것도 1년이 전부이니 그 후엔 그녀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저, 왜 기간을 두시는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비엔 경의 잿빛 눈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헐, 심쿵. 진짜 이 언니 볼수록 멋있어! 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서, 품에 넣어 두었던 진정제를 몇 알 꺼내 먹었다.

좋아. 차분해진다.

나는 이윽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이렇게 답했다.

“음, 멀리, 떠날 거라서요.”

가능하면 황녀궁 사람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지만, 안 된다면 그들을 책임져 주고 헤어지고 싶다. 어쨌거나 떠날 거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한 번 악녀로 몰렸던 황궁은 아무래도 위태로우니까.

‘황제한테도 그렇게 말했었고 말이야.’

그런데 어쩐지 이비엔 영애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뭔가 ‘설마 그 소문이…….’ 어쩌고 했던 것 같지만 내 소문이야 많지 않나. 놀라서 그러겠거니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계약 내용은 걱정 말아요. 아주 유리한 계약을 해 줄 테니.”

무려 9대 1의 계약이었다. 나는 나와 몇몇만 책임지면 되고, 기여하는 바가 초반의 조금 말고 없을 테니까.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이비엔은 원작과 달리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겠지.

‘아우, 상상하니까 설레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 좋아지는 길이 아닌가. 이비엔은 순진하게도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넋이 나간 채로 도장을 찍었다.

완벽해.

나는 몹시 음흉한 마음을 감추고 그녀에게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나 다음 날 아침, 이비엔은 뒤늦게 지나치게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이라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언하!”

복도를 내달리는 이비엔 경을 유진과 카인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비엔 경은 압도될 정도로 격렬하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미치겠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지만 나는 그저 놀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하! 이건 너무 과합니다!”

엠마가 살벌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뛰쳐 들어오려는 코뿔소, 아니 이비엔 경을 제지했다.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이비엔 경이 다시 외쳤다. 이건 부당한 계약이란다.

“전하께 이런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이상함을 느낀 유진과 엠마가 계약서로 눈을 돌리기 전에 그녀의 손에서 계약서를 낚아챈 뒤 차곡차곡 접으며 말했다.

“과하지 않아요. 손해도 아니고요. 저는 이비엔 경이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뿐인걸요. 그리고 아마 상단 일로 고생 많이 할 거예요, 이비엔 경.”

사실 또 하나, 그걸 덜 가지면 이비엔 경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크기만 해요. 잘.

“전, 전하…… 어찌.”

“정 마음이 불편하면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이비엔 경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전하, 전하, 하고 말하다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이렇게 선언했다.

“욱…… 전하! 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바로 그거야! 서로 좋은 일을 하자고요, 언니.

나는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잿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주 기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다가 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기억 찾는 날이었구나.

나는 언니의 기억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살짝 올라온 핏물을 사람들 보기 흉하지 않게 재빨리 처리했다. 그리고 다시 방긋 웃었다.

“…….”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이비엔 경이 나를 태워 버릴 것처럼 열렬하게 보더니,

“저만 믿으십시오, 전하! 기필코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라며 굳은 얼굴로 정중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흐지부지되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정적이 흘렀다.

“뜨……거운 분이시네요.”

내 점심을 가져온 리니가 지켜보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굉장히 헷갈리는 표정의 미남들과 심란한 표정의 엠마를 보고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한 건 해결이었다.

* * *

언니의 열네 번째 기억을 보았다. 언니는 받은 선물을 또 나열하고 있었다. 장식장 같은 데라도 넣어 두지. 하지만 그런 조언은 할 수 없는 위치니까 나는 그저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았다. 처음에 받은 하얀 깃펜은 아직도 새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받은 선물은.

“엠마, 이게 뭐지?”

“개집입니다, 전하.”

나 저 집 모양 알아! 나는 탄성을 질렀다. 황녀궁의 미니 사이즈네.

“이게 리샤의 집이야?”

아주 큰 개가 되어 있는 개 리샤가 컹 짖었다.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언니를 르페르샤 언니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에게 언니와 나를 구별해서 리샤로 부르라고 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작은 궁이 내 집……. 에비에비 쓸데없는 생각. 그때였다. 굳은 얼굴로 함께 온 메시지를 읽던 작은 언니가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 리샤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와.”

“네?”

무언가 사무적이던 엠마도 이번엔 놀랐는지 되물었다.

“못 들었어? 다른 사람에게 주고 오라고. 그 개집도 함께 가져가.”

마지막 목소리가 여운을 남겼다. 그 말과 함께 기억은 끝났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빨리 끝나?”

열네 살의 기억이 이게 전부라니. 나는 영문을 모르겠는 기분으로 입을 쭉 내밀었다. 아, 뭐야. 왜 그런 거예요, 언니? 시무룩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날짜 계산을 했다. 14번째니까, 벌써 한 달 하고도 12일이 지났다.

“아, 제인.”

드디어. 제인을 구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피어오르는 미소를 막지 못했다. 오래 기다린 만큼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 * *

제인은 르페르샤 언니가 쓴 독에 죽은 소녀였다. 여주인 아리엘을 대신해서.

제인은 아리엘이 건국제에 맞춰 수도로 올라온 날, 왈패들에게서 구해진 뒤 아리엘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시녀였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얼마 전 헤어진 남동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기상 원작이 시작되기 겨우 한 달 전에 헤어진 아이들이었다.

아리엘은 그녀가 불쌍하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동생들을 찾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제인은 결국 동생들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죽으면서도 아리엘에게 말한다.

“당신 같은 다정한 분을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악. 아오.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원작 내에서 그녀의 쌍둥이 동생들은 그녀와 몇 번이나 엇갈렸기 때문이다. 제인의 쌍둥이 동생들은 천재들이었다. 그 동생들은 사고로 누나와 헤어진 뒤 다름 아닌 다니엘을 모시게 된다.

암살 길드장의 수제자들. 다니엘이 완벽하게 가족으로 받아들인 아이들이었다. 제인은 사고로 얼굴 한쪽이 화상 자국으로 덮였기 때문에 그 동생들은 제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제인 또한 은밀하게 다니는 암살자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고.

동생들을 보고 죽었다면 그 안타까운 죽음이 조금은 덜 안타까웠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노리는 것은 그들이 헤어진 사고에서 그들을 빼내 오는 것. 황태자 파의 부패한 귀족이 쓰레기 청소라는 명목으로 한 그 무자비한 화재를 막을 자신은 없다. 대신 그들이 자주 갔다는 그 특정 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릴 뿐.

그곳은 전에 살롱을 팔 때 알아 두었던 바로 그 ‘검은 동굴’이었다. 무너진 집들과 나무들이 뒤섞여서 동굴 같은 공간이 된 곳으로, 화재의 영향권에 있던 곳이다.

“화재가 일어나는 게 한 달 전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한창 제인이 드나들 때. 나는 다음 기억을 찾기 전에 얼른 그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피를 쏟는 양이 꽤 늘어서 한 번 쏟으면 기력이 딸려 하루를 날리기 때문이다. 딸랑, 종을 흔들었다. 그리고 당도한 엠마에게, 나는 오랜만의 외출을 알렸다. 그리고 걱정하는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 * *

정말 다행히도 금방 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직 그 ‘검은 동굴’에 도착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리샤!”

“아, 괜찮아요.”

역시 노다지. 어떻게 걷다가 이렇게 원작인물을 만나지?

나는 넘어질 뻔한 나를 거의 안다시피 하며 부축하는 유진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준 뒤, 나와 부딪혀 넘어진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소녀가 그 제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천운이었다.

일단 연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그 소녀가 내게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을 때 멀리서 소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제인!”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멀리서 고개를 쑥 내민 두 놈의 머리칼이 각각 푸른색 머리 한 움큼과 붉은색 머리 한 움큼이 섞인 갈색 머리였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원작에서 천재 쌍둥이라고 불렸던 그들이니까.

제인은 나를 보고 귀족 영애의 심기를 어지럽혔다고 생각했는지 공포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애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절 팔려고 하는 사람을 피해 달리다 그만, 흑, 지, 집에 저만 보는 동생들이 셋이나 있습니다. 제가 없으면 그 아이들이 전부 굶어 죽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흐흑…….”

나는 멍하니 소녀를 보았다.

이름이 제인이고, 사정이 저렇고, 저런 동생이 둘 있는 딱 보기에도 가난한 소녀.

음? 근데 동생이 지금 셋이라고?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까 나와 마주치고 뜨악했기 때문인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제인이 아니라고 하기가 더 어렵다 싶었다.

“…….”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소녀를 보고 있는 미남들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은 뒤 홀린 듯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소녀의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 리샤!”

“리샤!”

놀라는 미남들의 소리보다도 지금은 이 놀라운 행운이 먼저였다. 어떡해. 아무래도 진짜 같아! 제인! 제인이다!

“아, 아가씨?”

자기 눈앞에 같은 높이로 꿇어앉은 나를 보며 경악해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 어린 나이에 세월의 풍파에 거세게 휩쓸린 흔적이 가득한 소녀, 제인.

으헝, 나는 감격해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상대가 버틸 만한 미모 레벨이라 그런가. 현기증은 안 나고 그냥 눈물만 마구 나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 아니다. 살살 기미가 있는 것 같기도……. 아이고 엉엉. 아, 나 얘 정말 좋았단 말이야. 근데 이렇게 갑자기 딱! 나타나고 그러면…….

너무 반가웠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제인의 구슬 같은 눈물을 경건하게 닦아 냈다. 히히, 흑, 흐끅. 그리고 일단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왜 울어요?”

가만히 마주 보며 일단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끔벅이며 멍하니 봐 오는 제인의 갈색 눈은 담담하면서도 순박해서 깨끗해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짙은 피로와 고된 환경으로 인한 깊이 모를 무언가가 느껴졌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흑. 직접 보니까 더 좋았다. 나 이런 느낌의 사람 너무 좋단 말이다. 막, 막 다 해 주고 싶고 그렇다고!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이 이어 갔다.

“괜찮으니 일어나요. 아까 들린 걸로 봐서는 이름이 제인인가요?”

“네? 네.”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제인이라고 부를게요.”

제인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어쩐지 직접 보니까 더 마음이 가는 소녀였다. 거기다 실은 제인의 작은 키가 기억에서 보았던 르페르샤 언니와 비슷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제인의 눈에는 나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존재했다.

그래, 내가 여주인공도 아니고 친구는 무리겠지. 후원자 쪽으로 할까?

“동생들 나이는요?”

일순 경계심이 날카롭게 서는 것 같아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묻는 거예요. 제인은 나와 비슷한 것 같고요. 맞나요?”

웃으니까 제인은 잠시 묘한 듯 쳐다보더니 머뭇거렸다. 유하게 생겼으나 생각보다 장벽이 만만찮은 아가씨. 나는 질질 끌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걸 직감했다.

“쌍둥이들과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자기도 왜 대답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가 제인이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물으세요?”

“그야 음…… 동화 좋아해요?”

제인이 내게 휘말리고 있을 때 바로 밀어붙였다. 어리둥절하게 봐오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 동화에 나오는 요정 후견인을 좋아하거든요.”

엉뚱한 소리였다. 제인도 의아해했고, 지켜보고 있던 미남들도 멈칫했다.

“……네?”

어리둥절한 표정도 좋아서 설렜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는 제인과 당황하는 미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제인, 제인의 그 세 동생들을 데리고 저쪽으로 올 수 있겠어요? 굶는다니, 일단 음식을 줄게요. 그리고 저와 이야기를 좀 해요.”

좀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나는 빠르게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 아가씨가 말한 현실적인 문제는 이제 곧 동생들이 굶다가 다 죽을 거라는 것. 일단 그것을 해결해 줘야 했다.

내 말에 제인이 혼란과 절망과 희미한 희망이 혼재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음식이라는 단어 하나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것 하나로 제인의 삶은 절박해졌으니까. 곧 제인이 달음박질쳐 사라졌다.

“…….”

나는 내가 저쪽이라고 가리켰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제인의 이름을 부른 아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금방 오지 않을까 하며. 못마땅한 표정의 헤레이스와 유진, 카인이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 저 셋도 잘 어울려 다니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멍하니 감상하며 나는 잠시 시간을 죽였다.

이윽고 제인이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아가씨.”

제인은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제인의 옆에 있는 아이들도 체구가 마르고 작았다. 꼬질꼬질한 상태지만 제인을 많이 닮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싱긋 웃고는 제인을 데리고 여관에 가서 일단 뭔가를 먹이고, 씻기고, 쉬게 해 주었다.

제인의 동생들은 소화에 부담이 가지 않는 스튜와 빵, 간단한 먹거리를 먹고, 제인을 여관 이곳저곳으로 이끌기 바빴다. 그동안 나는 미남들과 함께 발품을 팔아 적당히 평범한 집을 황녀 명의로 사고, 마찬가지로 황녀 명의로 후원 절차를 밟아 딱 1년뿐이지만 그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정신없는 하루에 휘둘리는 것은 미남들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카인이 물었다.

“전하, 이런 일을 왜 하십니까?”

“자기만족이에요.”

아주 보람찬 자기만족!

“……왜 저 애죠?”

“음, 그냥?”

처리는 순식간에 됐지만, 배부른 제인 남매를 데리고 그들 명의의 집으로 향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여 소곤소곤 대화했다. 내 답이 충분치 않은지 인상을 찌푸린 카인과 유진,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헤레이스를 차례로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좋을 거예요.”

“그렇다면.”

카인이 물었다.

“왜 1년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저와 관련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요.”

“맞서 싸울 생각은…….”

카인이 말을 하다 말았다. 나는 그저 싱긋 웃었고, 그는 알아서 내 몸 상태로 이해를 한 것 같았다. 싸울 생각은 당연히 없다. 살아남기도 벅차다고.

그러다 유진이 조금 묘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챙기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잉? 아닌데. 나는 아주 알차게 내 인생을 차근차근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유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안위는 걱정 안 하면서 남 안위는 그리도 걱정하십니까.”

“말했잖아요, 유진.”

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만족이라고요. 이거 전부 절 위한 거라니까요?”

유진은 더 말을 할 듯하다가, 작게 한숨만 쉬었다.

제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밖이 캄캄해져 있었다. 안에서 쉬라고 해도 그럴 수 없다면서 미남들이 같이 움직여 주었기 때문에 나는 덕질의 황홀경을 하루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크흐흐.

“이게, 이게……!”

제인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일 테니까. 제인 시점에서는 엄청나고 부담스러운 걸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휴. 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건 당연할 테니,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로 했다.

“제인,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요. 내가 이렇게 했다는 건 주위에는 되도록 말하지 말고요.”

제인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집은 제인 거고, 1년뿐이지만 아이들 관련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다 말해요.”

“아, 아가씨.”

“음, 혹시 내 말투가 불편해요?”

위아래로 얽힌 사이도 아니니 존댓말은 불편한데.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아니, 그, 아니오.”

그러다 문득 제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건…….”

황녀가 후견인이라는 증명서.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르페르샤 람 트리엘이에요. 이 제국의 황녀죠.”

“황녀 전하……?”

마구 떨리는 목소리로 제인이 나를 불렀다.

제인은 발음이 좋은 편이군. 노래도 잘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감상을 하며 목소리를 감상하면서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인은 그냥 운이 좋은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래오래, 동생들이랑 행복하게 살아 줘요.”

그러자 날 가만히 보던 제인이 갑자기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헐. 왜 그러지. 설마 화났나? 그런데 그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전하, 이런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만족이라니까요.”

안 받을까 봐 걱정해서 말했는데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런 건 저희 분수에 맞지 않습니다. 과한 것을 받으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될 겁니다, 전하.”

“하지만 제인, 동생들은 이것들이 필요하잖아요.”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은 표정이 흐릿해졌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몹시 부족하지만 저를 전하의 하녀로라도 받아 주십시오.”

“어, 일자리라면 생각해 두었는걸요.”

“아니오. 보수를 감히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 제가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한순간이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껏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헤레이스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유진과 카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미남들의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거 그거잖아! 미친. 그 여주인공한테 하던 레퍼토리!

“아뇨! 안 돼요!”

“아…….”

“아니, 아니, 실망하지 말아요. 제인이 부족한 게 아니라…….”

부족하다니? 차고 넘치지.

“……제게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에요.”

힝. 얼마 후에는 여주랑 남주 피해서 도망가야 하는걸. 그걸 생각하니 지금이 너무 황홀해서 새삼 한숨이 나왔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일기로는 모자라다. 함께 사진을 찍을 도구가 필요해.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진기! 사진기를 어디서 구하지? 사진이라도 있어야 남은 날들을 버틸 수 있을 텐데. 나는 사진기의 기능을 가진 것을 기필코 찾아내리라 다짐하며 제인을 아련하게 보았다.

그래도 제인은 내가 준 집에 고이 모셔 뒀겠다, 한 달 동안이지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인이 개죽음당하지 않고 동생들이랑 알콩달콩 사는 걸 구경하고 싶었다. 그걸 상상만 해도 좋아서 나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없다는 건…….”

제인이 뭐라 입을 열려던 것을 멈추더니 내 뒤에 있던 미남들을 보고 움찔했다. 그리고 그들과 시선을 교환하는 것 같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아, 저 얼굴은.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구나!

나는 그 굳은 얼굴을 보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늦었으니 전 이만 갈게요.”

저건 화장실이 급한데 그걸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주 잘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약간 물기가 어려 있는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나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1년 정도는 황궁에 제가 있을 테니까 어려운 일 있으면 무리하지 말고 절 찾고요. 알았죠? 그럼.”

봤는가? 이 쿨한 돌아섬을.

사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느새 잠들어서 각자의 방에 눕혀 둔 제인 닮은 꼬맹이들도 구경하고 싶고……. 이제 보니 아마도 그 검은 동굴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막내 때문인 것 같았다. 검은 동굴은 위험하지만 먹을거리가 많은 곳이니까. 어쨌든 난 제인이랑 얘기 왕창 하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친구도 되고. 흐흐.

그래도 나는 눈치 있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혹시 몰라 제인 남매의 보호를 요청해둔 보초들-아직 제인은 모른다.-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코를 훌쩍이고 궁으로 향했다.

그때 지켜보고만 있던 카인이 내게 물었다.

“리샤, 어째서 1년입니까? 마치 1년만 존재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의 황홀한 저음에 몸을 부르르 떨고서, 제인으로 인한 상실감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사실은 병에 걸린걸 알게 된 날, 바로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네?”

아예 몰랐다는 듯, 처음 들었다는 듯 유진은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카인마저도 처음 듣는 얼굴이다.

음, 몰랐구나, 다들.

“리샤? 잠깐, 떠나다니요?”

“어? 리샤, 어디 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리고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들도 보기 좋았다. 헤헤, 행복했다.

“그런데 미뤘어요. 폐하께 요청했더니, 1년 있다가 가라고 하셔서요.”

“지금, 지금 리샤, 그러니까…….”

으음. 내 말이 어려웠나? 하지만 어딘가 떨리는 유진의 목소리에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 로브를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낑낑대며 두르는데, 그가 나를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옷이 보기는 좋은데 추워 보이긴 했다. 그런데 내 사이즈의 작은 로브를 어깨에 둘러도 그는 끝내줬다.

헤, 하고 있는데, 그때 헤레이스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샤, 혹시 너 바보야?”

헐. 나를 유진에게서 떼어 내고는 어딘가 살벌하게 웃으며 묻는 헤레이스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기, 세상에, 미소년, 너 섹시도 할 줄 알았……?

“리샤.”

이어진 카인의 말에 생각이 끊겼다. 그가 그의 목소리보다도 더 동굴같이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헤레이스에게서는 떨어진 상태였다. 날 가지고 왜 자꾸 패스를 하고 그러는 거예요. 황홀하게!

“스스로, 그러니까, 스스로…… 떠나려고 하셨다는…….”

하고 끝을 흐린다. 평소와 달리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이 이상했다.

“여기 머무시는 게 아니라…….”

아니, 내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러 떠나려고 했다는 말이 이렇게 이상할 일인가. 게다가 스스로 떠나지 그럼? 하지만 그런 의아함도 잠시,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눈치도 없이 신음이 튀어나갈 것 같아서.

지, 지금이 혹시 섹시 타임, 뭐 그런 건가?

아무래도 너무 좋아서 계속 보고 있으면 또 빈혈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몸을 그들에게서 돌리고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으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지금은 어쨌든 1년 미뤘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뭔지는 몰라도 대강 이해한 바, 아무래도 이 미남들이 나한테 얼마간 정이 든 것 같았다. 1년이 너무 빠르다면, 아무래도 이별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고 날 보낼 뻔했다고 자책하는 것 아닐까.

이런, 이런 착한 사람들 같으니! 세상 사람들, 미남들이 얼굴값을 해요! 이게 실화입니까! 하. 나는 성덕이었다.

수습이 끝나고, 나는 웃는 얼굴을 보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있죠. 많은 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저 제가 떠날 때, 웃으면서 배웅해 주셔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런 말을 유진이 아니라 카인이 하다니. 어어?

“떠난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못 들었는데.”

그야, 그 얘기를 굳이 할 이유가……. 거기다 1년이나 남았잖아. 내가 멍하니 카인을 보고만 있자, 카인이 어쩐지 격한 어조로 말했다.

“황궁을 떠나 잠적하시다 홀로 생을 마감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누구도 데려가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황태자 아리엘 커플과 만나면 안 될 사람은 데려갈 건데?

“한마디 통보도 없이 홀로 가실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맞았기 때문일까, 표정에서 긍정이 읽혔나 보다.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카인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근데 카인은 왜 저러는 거지?

“전하께 나는, 우리는 뭡니까?”

“그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온화한 마음으로 웃었다.

“도대체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나 카인의 격한 기색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 참고 참았던 것을 터뜨리는 것처럼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생소한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인이 그 동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사람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네? 힝,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렇게 말하는 카인을 앞에 두고, 그날은 마무리되었다.

* * *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제인은 고민했다. 어린 동생들은 일어나자마자 말했다.

“……무슨 꿈이 이렇게 길어?”

“그러게. 이상하다 정말!”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막내는 행동이 느린 아이였다. 어제 스프로 얼굴을 마사지하다시피 했던 꼬마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얼굴을 부비다 차츰 움직임을 멈췄다.

“스쁘…….”

스프를 얼굴에 잔뜩 발라 뒀는데 없어졌다고, 역시 꿈이었다며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 제인이 가만히 다가가 익숙한 손길로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누나…….”

낑낑대며 얼굴을 비벼 오는 몸짓이 연약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해 아이는 몸집이 작았다. 그건 저기서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모를 말을 뱉고 있는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생생한데. 아니, 근데 넌 왜 나랑 같은 꿈을 꿔?”

“야,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 미친. 꿈에서도 널 보다니!”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평소와 달리 격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다. 제인은 그 속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너무 꿈같아서, 꿈이 깰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해했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반쯤은 그랬기 때문이다. 이건 전부 꿈이 아닐까.

“와서 앉아.”

나직하게 들려오는 제인의 목소리에 쌍둥이들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똑같았다.

“누님?”

“제인 누나?”

평소라면 부르면서 달려왔을 놈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못한다. 열두 살이나 먹은 놈들이 아직도 손이 많이 간다고 생각하며 제인이 말했다.

“꿈 아니니까 와서 앉아.”

그 말에 서로 마주 보던 쌍둥이가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즉시 달려와 앞에 조르르 앉았다. 제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어제를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도 조심스러운 기분이었다.

이윽고 제인의 입이 열렸다. 사실은 손목이 잘릴 각오를 했었다. 쌍둥이 동생 중 눈썰미가 좋은 편인 아이가 목표물을 발견했고, 차분한 아이가 위험요소를 살폈다. 근 일주일째, 제인과 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소매치기를 하는 중이었다. 몰래 해야 했다. 그리고 아주 적은 금액에 만족해야, 대형 소매치기 무리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모자랐다. 제인이 아무리 굶어도 먹을 것이 부족해서, 동생들은 배를 곯아야 했다. 조금 어눌해서 병신이니 하는 온갖 잔인한 말들을 듣고 사는 막내도 지켜야 했다. 막내는 아프기도 곧잘 아팠다. 사실 쌍둥이들도 건강한 편은 못 되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대로는 얼마 못 간다. 극단적인 생각을 수없이 했다. 다 같이 죽을까. 아니면 눈 딱 감고 자신이 홍등가로 간다면…….

그러나 그런 곳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인은 딱 한 번만,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이 정한 목표물은 딱 보아도 험한 세상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금발의 아가씨였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 리샤!”

“아, 괜찮아요.”

제인은 아가씨에게 부딪치고 손을 뻗으려다가 소름끼치는 느낌에 재빨리 거둬들였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세 남자가 귀신같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손목이 날아갈 뻔한 것이다. 일단은 살아 나가야 했다. 제인은 떨리는 것을 억누르고 상황을 살폈다.

그래. 살아 돌아가려면 수그리고 조아려야 했다. 눈앞의 아가씨는 실로 고귀한 계층이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동생들까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가 심장을 물들였다. 귀족 아가씨가 고개를 들라고 했다. 선택지는 없다. 하여 아가씨에게로 고개를 들었는데.

‘아.’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공들여 만든 인형 같았는데. 부딪친 뒤 가까이서 보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미인이 서 있었다.

‘본 적 있어. 어릴 때 가 본 신전에서…….’

신들의 수종을 든다는 고귀한 존재. 벽화에 그려진 그 하늘 위의 존재들이 떠올랐다. 제인은 무의식적으로 아가씨의 뒤를 눈으로 더듬었다. 날개는 없었다. 없는 날개 자리를 더듬던 시선이 순간 멈췄다. 제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제인은 묘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췄다.

‘어쩌면 골라도 이런 사람을 골랐는지.’

생존에 눈이 멀어 호위의 존재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게 문제였나. 제인이 씁쓸하게 표정을 정리했다. 길고도 짧았던 순간이었다. 제인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애원했다.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어찌됐든 살아서, 동생들 곁으로.

“사,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절 팔려고 하는 사람을 피해 달리다 그만, 흑. 지, 집에 저만 보는 동생들이 셋이나 있습니다. 제가 없으면 그 아이들이 전부 굶어 죽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흐흑…….”

아마도 멀리서 보고 있을 동생들은 연기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인은 딸린 동생들 앞에서는 꺼낼 수 없는, 의미 없는 설움을 가감 없이 꺼내어 입에 담았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사락, 하고 희미한 향이 제인을 스쳤다.

“아, 아가씨?”

봄에 향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제인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고귀한 아가씨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왜 울어요?”

참.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홀릴 것 같아 제인이 가까스로 눈을 끔벅였다.

“괜찮으니 일어나요. 아까 들린 걸로 봐서는 이름이 제인인가요?”

“네, 네.”

아니, 사실은 이미 홀려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비현실적으로 곱게 휘어진다. 그 찬란한 빛에 홀려, 그녀에게 휘말려 든다.

“일단은 제인, 제인의 그 세 동생들을 데리고 저쪽으로 올 수 있겠어요? 굶는다니, 일단 음식을 줄게요. 그리고 저와 이야기를 좀 해요.”

정신을 못 차리는 제인을 두고, 아가씨가 술술 말을 이었다. 그저 귀에 박힌 말은 하나였다. ‘일단 음식을 줄게요.’ 오늘이 지나면 생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내가 떠올랐다. 제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대로 달음박질해 제인은 세 동생들에게 돌아갔고, 품에 안다시피 한 막내를 챙기고, 쌍둥이들과 함께 걸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믿었다가 배신당해도, 그대로 굶어죽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제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이게…….”

“제인,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요. 내가 이렇게 했다는 건 주위에는 되도록 말하지 말고요. 집은 제인 거고, 1년뿐이지만 아이들 관련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다 말해요.”

1년이라도 이것은 제인의 인생에 깊게 새겨질 기적이었다. 하지만 감사함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욕심은, 사람을 죽인다.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본 대가가 무서웠다. 눈앞의 여자의 지갑을 훔치려다 죽을 뻔했던 것처럼.

“저, 전하…….”

“음, 혹시 내 말투가 불편해요?”

“아니, 그, 아니오.”

여자는 그들을 이끌고 음식을 주었고, 단 한 번도 꿈꿔 보지 못한 것들을 단숨에 안겨 주며 말했다.

“제인은 그냥 운이 좋은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래오래, 동생들이랑 행복하게 살아 줘요.”

오래오래. 동생들이랑 행복하게. 살아 줘요.

어쩌면 정말로 천사가 다가와준 건 아닐까? 제인의 경계심은 허물어지다 날카롭게 서기를 반복했다.

‘왜 이 사람은…….’

이토록 제인이 꿈꿔 왔던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처럼 넘기는 걸까? 혼란이 찾아들었다.

그래, 사실은……. 그 말이야말로 제인이 간절히 바라 왔던 것이라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줬다면 동등한 양을 갚아야 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은 없다. 갚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줘야 했기에 하녀로 들어간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르페르샤 람 트리엘. 믿겨지지 않지만, 황녀. 아직도 그 생각에 손이 떨렸다. 황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제게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황녀 전하는 웃고 있었다. 즐겁게, 어찌 보면 근심 없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서. 그래서 무슨 의미냐 여쭈려 했었다.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던 세 남성이 아니었다면. 세 남성은 두려운 기운으로 제인의 입을 막았다. 제인은 그들이 제인의 입을 막을 만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뭐길래? 그래, 1년이라고 했다. 왜 1년일까. 무언가 이상하다. 그러나 더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깊이 알고자 하는 것이 무례가 된다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제인은 금세 황녀의 답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황녀가 어딘가 허둥지둥하며 나가느라 챙기지 못한 것인지, 그들이 간 자리에 돈이 한 뭉치 놓여 있었다. 손이 떨릴 정도로 큰 금액이어서 제인은 그대로 그걸 들고 뛰쳐나갔다. 그때였다.

“리샤.”

검은 머리의 창백한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스스로, 그러니까, 스스로…… 떠나려고 하셨다는…….”

제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황녀는 제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창백하게 질린 남자들을 등지고 있었다. 여린 꽃과 같이 시종 밝고 힘차고, 찬란한 생기를 머금고 있던 황녀의 얼굴에 상상도 못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당혹스러움. 떨림. 깊이 감추어진 고통과 하늘을 보는 눈빛 속 체념. 그리고 혈향이 났다. 아, 그래. 그녀가 저 손수건을 얼굴에 댈 때마다 혈향이 났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분명. 제인은 멍청하게 황녀를 지켜보았다. 1년. 1년이 지나면 황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 황녀가 얼마나 애써서 표정을 정돈하는지를 보고 제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있죠. 많은 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저 제가 떠날 때, 웃으면서 배웅해 주셔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고운 달빛처럼 잔잔히 머금은 미소가 부정할 수 없도록 진실 되어서. 하지만 어쩐지 공허한 그 얼굴은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다. 제인은 한참을 그늘에 몸을 숨긴 채로 그들이 떠난 자리를 멀거니 보았다.

* * *

시작은 작은 호의였다. 카인이 처음 르페르샤 황녀를 만났을 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악독한 황녀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저, 공작.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제게 이렇게 도움을 주는 이유가 뭔가요?”

우아하고 절로 우러러보게 되는 아우라를 가진 사람이었다. 카인에게 부드럽게 선을 긋는 그녀에게는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은 기품이 어려 있었다. 순간 그녀가 여왕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녀의 말마따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는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날 전하께선, 절망하셨을지언정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그렇게 말해 볼 뿐.

“제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었나요?”

카인은 황녀가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음에도, 그 지독한 고통을 견디고 있음에도, 저토록 무구한 낯으로 부드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성품은 강인했고, 경이로웠다.

“없으셨다면.”

반쯤은 충동적으로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지고의 자리, 황제가 되셔도 좋을 것 같다고. 수많은 계산이 깔린 말이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카인은 그 순간 황녀에게 휘둘려 입을 열었었다.

“절대 안 돼요!”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카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저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 꿈이에요.”

그 말을 하는 황녀가 너무나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한다는 것이, 카인의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었다. 그 자유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로운 반응이었다.

그래, 카인은 황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날이 갈수록 신기함을 느꼈다. 그녀는 달빛 같았다. 머물러 고이는 듯하지만 허상처럼 은은하다. 맑고, 밝았으며, 자연스러운 따스함이 배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영혼의 온도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것은 몇 번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을 대하는 모습, 궁인들을 대하는 모습, 그리고 카인 자신을 대하는 모습까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좋은 패였다. 그래서 돕겠다고 했었다. 황태자를 견제할 패라고 생각했었고, 그러다 어느새 작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작은 호의로 하는 행동들이 늘어났다.

“그 생이 이어지는 한, 저는 당신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 말도 작은 호의였을 뿐이었는데. 그저 죽기 전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 정도. 정말 노골적으로 속을 파헤쳐 드러내 보자면, 그는 사실 그녀가 고마워할 것이라 여겼다. 그의 작은 호의는 분명히 그녀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이며, 아쉬운 점을 채워 주게 되었을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제게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에요.”

당연히 그녀가 그를 두고 어디로 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리샤, 어째서 1년입니까? 마치 1년만 존재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답지 않게도 그리 따져 묻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도 찾지 않고 오해받는 게 가여웠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손쉽게 내민 그의 작은 호의에 자만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친구 같은 감정도 함께 있었다. 유진과 달리 카인은 술집에서 그녀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유진은 그 이야기 들은 이후 힘들어하기도 하고 황녀 눈을 잠시 못 쳐다볼 때도 있었지만.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정이 드는 건지, 우정인지, 사실은 가엾게 여기는 건지 모를 때가 있었다. 가녀린 몸이 쿨럭일 때 나오는 피. 아무렇지도 않다는 미소. 순수한 호감이 어린 태도. 그것들은 자꾸만 카인을 헷갈리게 했다. 한 마음만으로 대할 수 없게 했다.

지금 와서는 결국, 친구 같았다. 그 감정은 카인에게는 참으로 달콤한 것이었다. 황녀의 곁에 있는 것에 어느덧 그 자신이 구원받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알까. 그러나 생각보다 르페르샤 황녀는 먼 사람이었다. 우습게도 유진도, 자신도, 헤레이스도 르페르샤 곁에 있어 준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보면 그녀가 그들의 곁에 있어 주는 느낌이었다.

선은 정확하고 의외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를 좋아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를 할 만큼 가까이 두는 사람은 없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르페르샤가 떠난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혼자 그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었다. 새삼 그는 충격을 받았다.

“떠난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못 들었는데.”

왜? 왜 그녀가 떠난다니까 버림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러기에는 자신이 그녀를 너무나 가볍게 대하지 않았나. 정말로 이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아니다.

카인은 부정했다.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는 것을 입에 올리니까, 괜히 더 버림받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닐까.

카인이 울컥해서 물었다.

“전하께 나는, 우리는 뭡니까?”

“그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좋아하는데, 왜 정작 아무도 안 담겨 있는 것 같을까? 그 선 안에 들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자 마음이 간사해졌다.

“도대체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들고 말 정도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쪽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늘 가까이 다가오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만큼의 틈은 안 주는. 카인은 치미는 무수한 말들을 삼켰다. 그녀에게 쏟아붓기에는 너무나 스스로가 부끄러운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사람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그것이 전부였다. 르페르샤 황녀랑 가까워진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정이 깊이 들어서. 그는 생각을 바꿨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다가갔어야 했다고.

르페르샤 황녀는 바보가 아니다. 맑아 보여도 참 많은 것을 선명하게 보는 사람이어서, 어쩌면 그의 치졸한 속내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진지한 태도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진지했어도 뭐가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후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조금 더 절박하게 다가갔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 * *

나는 보람찬 마음으로 누워 언니의 기억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잠들기 직전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마지막에 보았던 열네 살의 기억. 그 유난히 짧게 끝났던 찝찝한 기억에서 언니가 보았던 쪽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무사히 살아남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마치 죽을 위기에서 언니가 살아남은 것 같은 말이 아닌가. 생일을 축하하는 것만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언니의 태도가…….”

황녀궁 모양의 개집을 받은 언니는 개 리샤를 다른 곳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나쁘게 해석하려면 한없이 나쁘게 해석할 수 있는 선물이잖아.”

언니는 그래서 불쾌해졌던 걸까?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토록 아끼던 반려견을 떼어 낼 리가…….

“아아, 언니랑 대화라도 하면 속이 시원하겠네!”

아우, 정말. 기억만 가지고는 유추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착각일지도 모르는 그 이상한 느낌을 일단은 가슴에 담아 두기로 했다.

* * *

“그런데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헤레이스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화를 요구한 것은 얼마 전, 제인과 아이들이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식사를 거의 다 마쳐 갈 무렵이었다. 사실 헤레이스도 유진과 카인이 별로였고, 유진과 카인도 헤레이스의 몸에서 너무 짙은 피 냄새가 난다며 그를 싫어했다. 그건 사람을 죽인 자 특유의 냄새니까.

“대답 안 하네?”

헤레이스는 시큰둥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보면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유진과 카인에게 말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리샤가 원래 저렇지 않았거든.”

다들 알 것이다. 르페르샤의 태도, 외모, 소문 등.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소문과 전혀 달랐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의외로 첫 반응은 카인에게서 나왔다. 카인은 리샤에게서 눈을 떼고 묵직한 눈으로 헤레이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작게 키들거린 뒤 말을 이었다.

“사실 시한부 인생인 사람이 리샤 하나인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 난 많이 봤거든. 근데 쟨 그런 사람들하고 비교를 해도 뭔가 달라.”

“……뭐가 다르지?”

“아무리 봐도 눈에 미련이 없어.”

헤레이스의 말에 유진이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원망이 없어.”

헤레이스는 천진한 미소를 그리며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죽기 직전의 사람은 앞으로 살날이 많은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하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제인을 보며 한 점 어두운 감정 없이 잘 살라고 하고 웃었던 리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 씁쓸함조차 머금지 않던 그녀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헤레이스의 입장에서 리샤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몹시 위태롭게 느껴지는데, 약점을 알 수 없는 상대.

그는 희게 웃고 있었다. 대체 뭘 해야 저 황녀를 울릴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그런 속말을 중얼거리며.

“그러니까, 아마 병을 막는 게 다가 아닐 거란 말이지.”

“그게 무슨…….”

“잘 지켜보란 말이야.”

헤레이스가 눈꼬리를 가식적으로 순하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무리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해.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잖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수는 없어. 그런데도 저렇다는 건, 하나지.”

“…….”

“…….”

그들의 귀에 헤레이스의 미성이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삶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발버둥 한 번 치지 않고 그냥 죽어 버릴 사람이라는 거지.”

궁에 떠도는 소문, 영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닌 모양이야. 헤레이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샤는 물기 어린 얼굴로 환하게도 웃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문득 빛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표현이라 웃겨 죽겠다. 그런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재밌다니까?”

진심으로 슬퍼서 울면 어떤 얼굴이 될까, 저 황녀는?

“궁금해서 눈을 못 떼겠어.”

정보 길드장인 그는 리샤의 모순과 그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밝고, 너무 혼자 모든 것을 감수하려 한다. 확실하다. 저 여자는 자신의 병을 알기 전부터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그녀의 가족들이 주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황가라……. 헤레이스의 얼굴이 흥미로 물들었다. 그는 환희와 이유 모를 불쾌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그녀를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참 예쁘게도 망가졌네.”

헤레이스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헤레이스가 일깨워 준 덕에 유진과 카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급함 가운데 리샤를 보게 되었다.

르페르샤 황녀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그 소문. 르페르샤가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곁에 있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라면. 이미 세상 자체에 미련이 없어진 수준이라면. 헤레이스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이용하려고 하는 건 아니었나 보네.”

역시 리샤는 신기해. 정말로 순수한 호의였단 말인가? 그걸로 인생역전을 시켜 줘? 헤레이스가 또 혼자 중얼거렸다.

“…….”

진짜 모르겠는 여자다. 망가졌는데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다고? 리샤는 비틀리거나 현실 도피의 기운 하나 없이 말갛기만 했다.

“있죠. 많은 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저 제가 떠날 때, 웃으면서 배웅해 주셔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헤레이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불길하고도 화려하게 미소 지었다. 유진은 말없이 그녀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카인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복잡하고 골치 아픈 분위기는 질색인데.’

그냥 죽거나 죽이거나 협박하거나 그게 다인데. 혹은 갖고 놀거나. 헤레이스 앞에 앉은 유진이랑 카인이 어딘지 후회하는 기색이라 기분만 별로였다.

“가야겠다.”

헤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왜 저 여자를 찾아가는지 모르겠다. 재미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붙어 있는 건지. 그만둘까? 놀이라기에는 유희거리도 안 되는데.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르페르샤 황녀의 창문을 넘어 잠이 든 황녀의 옆에 섰다.

“난 또 왜 여깄을까?”

모르겠다. 그냥 오게 되었다. 그는 턱을 괴고 르페르샤를 보았다. 죽이거나 놀래 줄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자게 내버려 두었다.

죽은 것처럼 숨소리는 옅고 피부는 하얗고 곱다. 들릴 듯 말 듯한 색색 소리 때문에 살아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계속 보다가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고 있는데 흐르지는 않을 정도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어라?”

헤레이스가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이 다가갔다.

“조금 우네?”

무슨 꿈을 꾸는지, 잠든 황녀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한 방울 흐르고 있었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그는 쪼그리고 앉았다. 매우 조용한 상태에서 잠든 미인과 마주하는 거라 묘하게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헤레이스의 녹안이 르페르샤를 담았다.

“드디어 울었다.”

그는 손을 들어 황녀의 보드라운 눈가를 스윽 훔쳤다. 손에 물기가 묻었다. 그걸 보는 그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잠시 돌더니, 다음 순간 그 손가락이 그의 혀끝에 닿았다.

“……짜.”

당연한 결과임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의외라는 듯 놀람이 깃들어 있었다. 헤레이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건 셈에 치지 않을 거야.”

우는 얼굴로 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목적이 달성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혼자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면 노는 것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르페르샤는 그를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대해 주니까 말이다.

마치 남동생을 대하는 것 같은데 그게 또 나쁘지 않기도 했다. 그는 잠시 르페르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고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한 것 같은 여자. 그러나 잠이 들어도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죽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 냉소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헤레이스가 조금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죽으면 너 우는 걸 못 보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말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리샤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헤레이스는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꿈에 세 남자와 한 소녀가 나왔다.

“이런 미모는 어디 없습니다. 똑똑히 봐 두세요, 전하.”

은의 기사 볼턴 경이 도도한 표정으로 비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경이로운 심정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저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전하.”

반쯤 흘러내리는 옷을 걸친 흑발의 카인이 우수에 어린 눈빛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봐, 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나보다 예뻐?”

짜잔 하고 날개 달린 천사가 하늘을 포르르 날았다. 나는 코피를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흑, 너도 정말 예쁘지만 그래도 우리 르페르샤 언니가 제일 예뻐.”

“기절이나 한 주제에!”

천사의 분노를 슬픈 얼굴로 감내하며 나는 품에 안은 갈색 강아지를 보듬어 안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아지인 제인이 나를 보며 헥헥 거리다가 내가 슬피 울자 동생 강아지 셋을 이끌고 세 미남에게로 돌진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 언니는 아무에게도 못 줘!”

왈왈왈왈!

강아지들의 합창을 들으며 나는 흐느꼈다. 저 도도함, 퇴폐미, 사랑스러움, 깜찍함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 감격과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러다 번쩍, 눈이 떠졌다. 아침의 햇살을 맞이하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진기…….”

그리고 지금.

“전하?”

“리니.”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으신 건…….”

“아, 아니야. 괜찮아.”

리니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아련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았다. 아름다운 르페르샤 언니의 얼굴에 눈물길이 나 있었다. 그걸 착잡하게 응시하며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리니, 엠마를 불러 줄래?”

“네, 전하.”

사진기를 대체할 것이 당장이라도 필요했다. 엠마는 단숨에 달려왔다.

“엠마, 혹시 말이야.”

“예, 전하.”

사진기를 묘사할 말들이 뭐가 있더라?

“남기고 싶은 순간을 그대로 그림으로 간직할 수 있는 도구가 있을까?”

방은 고요했다. 잠시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남기고 싶은 순간 말입니까?”

어쩐지 엠마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린 것 같았지만 나는 사진기에 골몰해 있었다.

“응. 진짜 같은 그림으로 그때 그 순간 그대로 남길 수 있는 거.”

나의 간절한 눈빛에 엠마가 입술을 살짝 사려 물더니 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그런 물건은 왜 필요하신 건지요?”

“그야…….”

나는 기억 속에만 남아 버린 어제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답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너무 아까워서.”

꿈을 통해 기록하지 못하는 건 죄라는 걸 깨달았다. 시장에 갔을 때, 우리 미남들의 패션쇼는 정말 굉장했었는데. 어제도 제인과 처음 만났으니 뭔가 기념해서 남겨 둘 만도 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너무 슬프잖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인데.”

이 덕질 기간이 끝나면 여주와 남주와 엮이지 않기 위해 도망쳐야 하는데.

“또 마음껏 만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남은 것들로 흐르는 시간들을 버틸 수도 있을 테니.”

보드라운 햇살이 잔잔하게 방을 비췄다.

“그렇……군요.”

“……엠마?”

그제야 나는 엠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알아챘다.

“어디 아파?”

엠마는 잠시 말이 없더니 살짝 물기가 어린 눈으로 나를 한번 올려다보고 답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얼이 빠진 채 재빨리 나가는 엠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때 나는 몰랐다. 내 미남들을 이틀이나 볼 수 없게 된다는 불행한 사실을.

* * *

르페르샤가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고, 가까이에 지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후, 유진과 카인은 록스와 함께 리샤의 정신 건강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습니다.”

“병이 악화되는 것 아닌가?”

록스가 침음하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 무조건 참고 인내하시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그렇게밖에 살아오지 않으신 거겠지요.”

록스의 답에, 유진이 말했다.

“어쨌든, 마치 이후를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그녀는 분명 1년 후 떠난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떠난다는 걸 언급하며 이지러지던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잠자코 듣던 록스가 말했다.

“스스로의 내일을 챙겨야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계시는 거로군요. 그리하여 몸 상태도 신경 쓰지 않는 겁니다.”

록스는 쓰게 웃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미 그분은 삶에 지쳐 계신 것 같습니다.”

유진과 카인에 이어 처음 제대로 마주한 어의를 위아래로 살피던 헤레이스가 다소 얄밉게 거들었다.

“아무리 명의라도 죽고자 하는 자를 살릴 수는 없지.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긴 할 텐데.”

유진과 카인, 록스의 눈빛이 대번에 살벌해졌다. 헤레이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좀 더 보고 싶기는 하니까, 도와주지.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어.”

헤레이스의 말에 록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절망한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보며 행복해할 수 있는 거지?”

그러자 카인이 황녀가 잠들어 있을 방향을 응시하며 느리게 대꾸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건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으신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세상 누구보다도 상냥한 사람.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그들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그녀는 정작 자기 자신은 버려두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그 모순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냥한 천성 탓이 분명했다.

얼음 황녀 르페르샤. 그런 이름으로 마녀처럼 불렸지만, 되새겨 보면 르페르샤가 실수한 건 하나도 없었다. 완벽한 황족이었고, 어디 틀린 구석 하나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황궁 내의 시선과 사람들의 소문뿐.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르페르샤는 그걸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황궁 안에서 그녀는 제 살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황녀궁 시종시녀들의 말들만 들어 보아도 그랬다. 비록 어릴 때부터 황녀를 지켜본 이들은 몇 되지 않지만 다들 황녀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치했었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상냥하시고, 사랑스러운 분이시라고.

당장 그날 밤부터 네 사람은 더욱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인간 헤레이스는 록스와 유진, 카인이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을 들고 밤새 황녀궁을 드나들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나누었다. 헤레이스는 자신이 황녀궁 출입증을 받고 움직이는 게 이상하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지만, 어쨌거나 큰 도움이 되었다. 하여 그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도움들을 받으면서, 다른 세 사람은 암묵적으로 헤레이스의 정체를 묻지 않기로 합의했다. 사실 그 방대한 정보량을 보고 짐작하는 바가 있기도 했고. 그렇게 이틀이 정신없이 흘렀다.

* * *

제인을 만난 뒤 무려 이틀이나 우리 미남들을 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너무해! 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없으니 없는 자리가 허전했다. 인생의 빛이 사라졌어!

리니와 아린도 요즘 바빴다. 이비엔을 조금 도와주고 있다는데, 상당히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하는 김에 열심히 도와주라고 했다. 그랬더니 나는 심심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목표했던 것들은 다수 이루었다. 유진, 카인, 헤레이스와 친해졌고, 이비엔을 얻었다. 제인도 구했다. 하지만 아직 내 안위에 대해서는 할 것이 남아 있었다. 황태자에게 죽을 수는 없으니, 이제 최종 흑막이자 보스인 다니엘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나는 그를 떠올려 보다가, 정보라도 수집해야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전에 카인을 보았던 외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린의 친구인 던 경을 데리고서. 분명 정보 수집을 하려고 온 것인데 재밌는 책 위주로 보게 되었다.

‘오늘까지만 쉬어야지!’

쓰러졌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약한 몸에 무리하는 건 손해다!

그리 생각하며 호기심 가득한 심정으로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되게 낡았네.”

하지만 제목이 흥미로웠다.

<대륙 10대 불가사의>

굉장히 두꺼운 책으로, 사실상 자세히 설명된 것은 9개뿐인 책이었다. 왜냐하면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바로 언니가 걸린 병 라파엘리스였기 때문이다.

“라파엘리스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니까.”

병 외에 아홉 가지 중 내가 꽂힌 것은 바로 인공정령이었다.

“인공정령이라면 나도 하나 가지고 있지.”

내 일기장 말이다. 물론 그 두꺼운 양장본을 일기로 꽉 채워야 튀어나오는 정령이라서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곧 보겠지? 으으, 정령이라니, 설렌다.”

뿌듯하게 웃으며 나는 인공정령에 대한 부분을 펼쳤다.

“인공정령. 로바인 왕국이 이 분야가 발달한…… 대표적인 국가이다.”

로바인 왕국?

여기서 로바인 왕국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진지하게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슬슬 만나야 하는 ‘다니엘’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만 남기고 왕족이 전부 죽거나 사라진 ‘망국’.

“흠…….”

인공정령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이유는 원작에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다니엘의 무리가 주로 사용하는 힘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의 나라가 인공정령의 유래라는 건 몰랐다.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다니엘에 대해 막막하게 여겼던 것에 큰 도움이 될 만했다. 나는 그 책을 대여하고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그리고 이틀 만에 우리 미남들을 마주쳤다.

“아!”

너무나 광채가 나서 그들을 보자마자 비틀거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면역력이 부족해졌어. 엉엉. 오랜만에 보니 다들 새삼스럽게 눈이 부셨다. 그들이 가까워졌다. 나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절하면서 깨달았다.

아, 미남들 없는 이틀 동안 진정제를 먹지 않았지? 혈액보충제도 안 먹었고.

아, 안 돼! 더 볼래!

그러나 야속하게도 언니의 약한 몸은 곧 기절하고 말았다.

* * *

세 남자는 이틀째 되는 날, 엠마에게만은 리샤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엠마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께서 정확히 어떤 병에 걸리셨는지에 대해서는 궁인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대부분은 그저 병약하신 줄로만 알고 있지요.”

순진한 시녀는 지병이 있는 줄 알고, 다른 시녀들은 심하게 아픈 줄 어렴풋하게 알 뿐이었다. 아무도 불치병이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그런데……. 라파엘리스라고요……?”

엠마는 그들의 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헤레이스가 물었다. 엠마는 불충이 아닌 선에서 들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말을 전했다.

“……남기고 싶은 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으시답니다.”

그 말에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 안쪽을 질끈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봐. 지금 아픈 게 확실한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지?”

헤레이스가 짜증스럽게 툴툴거렸다. 늘 웃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헤레이스가 무언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잘 때 울더라. 많이는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헤레이스가 어딘가 몽롱한 어조로 툭 던진 말에 유진과 카인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들은 견딜 수 없었다. 유진이 먼저 움직였고, 카인이 따랐다. 헤레이스도 쳇, 하며 그들을 따라 걸었다. 외궁 도서관에 갔다는 황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셋은 직접 그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자마자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리샤를 목도했다.

“전하!”

바닥에 닿기 전에 유진이 그녀를 받아 들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같은 수준으로 걱정하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일어나면 사과를 할 것이다. 한 문제에 사로잡혀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말았다고. 당신을 홀로 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어쩐 일일까. 그녀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오래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유진이 초조하게 묻자, 록스가 떨리는 숨을 뱉으며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헤레이스마저도.

“전하의 병은,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르는 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록스! 살려 내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이 아닙니까!”

그 차분하던 엠마가 창백한 얼굴로 록스에게 달려들 듯 말했다. 동요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함부로, 함부로 그분에 대해 그런 진단을 하지 마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은 그녀는 결국 고통스럽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도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유진이 뒤늦게 떨리는 목소리로 리샤를 불렀다. 카인은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 리샤를 응시하고 있었고, 헤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울상을 감추고 있었다. 전부 이런 것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래, 사실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 그리고 르페르샤가 함께 있는 것이 완벽하게 자리 잡혀 있었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일상. 리샤가 방에서 일기를 쓰거나, 리니, 아린과 함께 담소를 나눈다. 종종 헤레이스가 그녀의 방에 쳐들어오고, 그러면 밖에 있던 유진이나 카인이 들어온다. 유진이 한껏 비꼬며 헤레이스를 공격하면 헤레이스는 말이 어렵다며 성질을 부린다. 카인이 경멸하며 화를 내면 헤레이스는 리샤를 울리는 방법을 되레 묻기도 했다.

리샤는 그사이 늘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즐거워해서, 그들도 어느새 조금, 즐거워졌던 것이다. 그녀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 주고, 중심에 서서 지켜 주어서. 익숙해져 버렸다.

그들은 그런 식의 평화로운 즐거움이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더더욱 그 일상이 신기했고. 그리고 그러다가 그만 한심하게도 그토록 강한 리샤이니 이런 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급하게는 아닐 거라고.

헤레이스가 말없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상관없는 척 마이 페이스로 굴어도 그도 결국 익숙해져 있었다. 리샤와 저 답답한 놈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정이 들어 뭐하려고요. 헤레이스, 그러다 후회합니다.’

다니엘이 그에게 그랬었다. 드물게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었다. 그걸 듣고 그는 코웃음을 쳤던가. 하. 그러나 다니엘의 말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끔찍하게 들릴 줄은.’

뭐야. 그런 건 싫었다.

당장이라도 황녀의 온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벌써부터 시체 같은 건데?’

누워 있는 리샤의 모습이 너무 창백했다. 헤레이스는 그만 가슴이 철렁해서 희게 질려 버렸다.

“그래서.”

그때 말없이 넋을 놓고 있던 카인이 쉰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깨어나시기 전까지 해 드려야 하는 건 뭔지 말하시게.”

유진과 헤레이스는 그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엠마까지 가세해 함께 록스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래,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 시간은 깨질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빠르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차가운 현실과 마주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도.”

곁에 없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그들에게 소중해진 그 일상이, 리샤에게도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 사실은 너무도 기쁜 일이기도 했으나 더는 그 일상을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 그래, 죽음에 의연할지언정,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무게는 그만큼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너무 가볍게 여기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황녀에게 얼마나 깊게 정을 주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특히 카인과 헤레이스의 경우는 더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그들의 마음에 정답이 되어 주지 못했다. 예고도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그녀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들은 전력으로 맞서야 했던 것이다.

‘영원한 건 없는 것을.’

그녀는 그대로 3일간 깨어나지 못했다.

* * *

나는 반짝하고 눈을 떴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꿈이네?”

이런 느낌 전에도 받아 본 적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흥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외쳤다.

“언니! 르페르샤 언니!”

풍경은 달랐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꿈 안에 언니가 있다는 것을!

“어쩜. 묻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꺅!”

나는 일단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화원의 정자에 앉아 있는 언니를!

“핡.”

나는 배시시 웃으며 통통 튀듯 달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정자의 모양이 상당히 낯익었다. 꼭 전생에 봤던 고궁의 정자 같은 모양. 내 꿈이라 그런가 보다. 그 고풍스러운 느낌의 정자 위에 언니가 홀로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 보인 채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고고한 자태였다.

나는 숨죽이고 있다가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언니의 뒤에서 왁! 하고 놀래 주려던 순간. 언니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악! 놀래라. 갑자기 돌아보셔서 놀랐어요.”

[…….]

말없이 나를 지그시 보는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나는 찔리는 것이 있어 샐샐 웃고 말았다. 놀라게 하려고 한 거 들켰나?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헤헤.

“언니, 오랜만이에요!”

[그래. 슬프게도 또 너를 보게 됐군.]

“혹시 제가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서 오신 거예요?”

최대한 귀여운 척을 하며 묻자, 언니가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힝, 상처야!

[네 사정 따위 알 게 뭐냐.]

헤헤, 하지만 싸늘한 언니는 여전히 고고하시며, 아름다우셨다.

[할 말이 있는 것뿐이다.]

“네? 어떤 말이에요?”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다소곳한 자세로 묻자 그녀가 황당한 얼굴로 날 물끄러미 보았다.

[쯧.]

“에헤헤.”

[웃지 마.]

“넵!”

[…….]

또 한숨을 쉰 언니가 입을 열었다.

[나를, 이렇게 보고 싶을 때는.]

“헉, 네!”

맙소사, 그거 내가 알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그렇게 조르듯이 부르지 마. 시끄러우니까. 기억 속의 내 귀에 대고 나를 부르면 충분하다.]

말을 하던 언니가 말끝을 흐리더니, 내 얼굴을 기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음? 왜 그러시지?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내가 몹시 행복하게 입가에 힘을 풀고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제없는데?

그런 시선으로 마주 보자, 언니가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럼,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언니를 볼 수 있는 거예요?”

이히히히히히. 언니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빠르고 날카로운 어조로 답했다.

[내가 싫으면 오지 않아. 시끄러워도 오지 않는다.]

“네! 시끄럽게 안 해요! 헤헤헤.”

[후……. 혹시 물을 게 있었으면 물어봐도 좋아. 특별히 답해 주지.]

“헉, 정말요?”

내가 환호성을 지르자 언니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렇지만 그래 봤자 언니는 다정해요! 만나는 방법도 알려 주고! 몇 개만 물어보라는 한계도 정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뭐지?]

나는 신이 나서, 언니, 언니 하며 물어보았다.

“기억을 다 찾으면 저는 그대로 이 몸으로 사는 거죠?”

[그렇다고 했지 않나.]

“그러면요, 언니.”

내가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언니가 고개를 내 쪽으로 느릿하게 돌렸다. 다시 마주본 얼굴 위로 이상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던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어? 어어?

그리고 눈을 떴다. 진짜로 눈을 떴어.

언니, 정작 대답은 안 해 줬어! 엉엉.

하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 또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다음엔 대답 꼭 들어야지. 못 들으면 신성국이라도 찾아갈 생각도 있었다. 신전 같은 데면 뭐든 방법이 있을 테니까. 어차피 요양 겸 여행 떠날 때 들르면 된다.

가장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서 이 정도도 못 하면 덕후가 아닌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졸음이 물러가도록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차츰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맞다! 어제 미남들 보고 미모에 취해 쓰러졌었지?’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어……?”

그제야 내 옆에 아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숨소리도 안 났는데? 놀라 아린을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린, 너, 괜찮은 거야?”

내 목소리는 조금 안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아린부터 말해 봐, 응?

어쩐지 깊게 잠긴 목소리가 나와서 당황했지만, 아무리 봐도 며칠 밤을 샌 것처럼 초췌해진 아린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흑, 허흑.”

나를 보고 잠시 흐느끼던 아린은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눈물을 훔치며 뛰쳐나갔다.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한 기분이 되었다. 하여 아린에게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고 있는데, 곧 엠마가 달려왔다. 그리고 난리가 났다.

“정신이 드십니까! 어디 아프신 곳은요?”

“그, 괜찮은데…….”

“록스, 록스를 불러오겠습니다.”

막 잠에서 깨어서 조금 몽롱한 중에도 나는 엠마가 답지 않게 매우 흐트러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뭐, 뭐야!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잠긴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빠르게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다들 모여 있어요? ……천사님까지!”

세상에 헤레이스가 카인이랑 유진이랑 나란히 서 있잖아!

“아직 꿈인가?”

“전하.”

유진이 다가와 내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말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리샤, 꿈이라니. 꿈이면 안 되지, 응?”

헤레이스가 그 옆에서 미간에 힘을 주고서 종알거렸다. 그러나 나는 평소와 달리 그에게 웃어 주지 못했다. 헤레이스의 눈가가 거뭇했기 때문이다.

아니, 미소년의 상큼함이 매력인 인간이 지금 그게 뭐랍니까!

안타까워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흑 하며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헤레이스가 놀랍게도 순간 묘하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그게.”

아니, 티 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걸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망부석처럼 서 있던 카인이 입을 열었다.

“록스, 전하의 상태는 어떤가.”

줄곧 말없이 나를 보던 그의 동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나는 그의 새카만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무래도 여기는 꿈이거나, 아니면 천국인 것 같아.

어쨌거나 다들 과민반응인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상황 파악 이전에 이 사람들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부드럽게 웃으며 모두를 달래기 시작했다.

“제가 또 자다가 식은땀이라도 흘렸어요? 에이, 괜찮아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리니, 뚝! 어휴, 왜 그렇게 울어. 아린도! 뭐, 하루를 공으로 날린 건 좀 아쉽지만, 괜찮아.”

“전하, 삼 일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유진이 작은 소리로 한 말에 나는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네……?”

저기, 네? 삼 일?

당혹스러운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때 나를 꼼꼼하게 뜯어보던 카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고단함이 어린 한숨이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자 카인이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께서 삼 일이나 쓰러져 계신다는 말에, 폐하께서…….”

폐하라는 말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카인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

상당히 많은 것이 생략된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조금 암담해졌다. 깊은 관심이 어떤 관심이었는지 묻는 것도 무서웠다.

어억. 나 나갈 건데. 그거 데드플래그 아닐까? 황제가 관심을 보이면, 황태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하하! 그것만은 안 되는데…….

당황한 와중에도 나는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을 눈치챘다. 어쩐지 우리 미남들의 말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 특히 헤레이스와 유진 말이다. 그들은 어쩐지 무언가 후회를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헤레이스까지 말이다.

“…….”

더, 더 불안해. 나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모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 * *

결국 다들 물러간 뒤에야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황제 입장에서는 관심을 보일만했다.

“궁에서 황녀가 병으로 죽어 나간다는 건 분명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겠지.”

그래.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어. 그러니 황태자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겠지?

나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 미남들 말고 엠마에게 황제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엠마, 황제 폐하께서 관심을 보이셨다는 그거. 어떤 이야기야?”

진심으로 언니 자체를 걱정할 리는 없다. 아마 형식상의 행동이겠지. 아니면.

‘아, 혹시 내가 가까워진 인물들이 문제가 됐나?’

유진도 자유기사인데다, 카인은 공작이니까 수상해 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무려 계승권 포기를 입에 담았단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일은 없을 텐데.’

그런데 엠마는 예상 외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의 건강에 대해 몹시 염려하셨습니다. 많이 마음 아파 하셨지요.”

“뭐?”

어딘가 서글퍼 보이면서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순간 얼이 빠졌다.

“아니, 그럴 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간 말에 지레 놀라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엠마의 서글픈 시선이 좀 더 짙어졌다. 하지만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그때 엠마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다 폭탄을 던졌다.

“하여, 폐하께서 전하의 몸이 좀 나아지시면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

나는 그냥 영혼 없이 웃어 주었다. 그냥 다 망한 느낌이어서.

이대로 날 마음껏 덕질 하게 놓아주면 안 되나요, 황제여!

결국 다음 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황제를 보러 갈 채비를 했다. 애초에 아픈 것도 아니었던 데다, 매를 맞을 거면 일찍 맞자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은 기억을 찾는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르페르샤 언니 만나는 동안 기억 찾는 날이 하루 지나가 버렸다. 어찌된 일인지 기억이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그에 대해 다녀와서 언니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아린과 리니는 불퉁해져 있었다.

“무슨 일 있니? 왜들 그래?”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리니가 답했다.

“아직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폐하께선 어찌…….”

말하다가 말고 한숨을 포옥 쉰다. 나는 그런 리니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얼굴인 아린을 번갈아 보다가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둘의 머리를 오랜만에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에 닿은 손길에 놀란 둘이 나를 보았다.

“어휴, 너희 덕분에 내가 산다.”

“……!”

“……!”

둘이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대로 손을 거두고, 부러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서 못마땅한 분위기로 서로를 본체만체하고 있는 세 미남들을 보았다. 묘하게 같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꼭 싸운 형제들 같기도 하고. 상상도 못한 모습인데 보기는 참 좋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입을 열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안쪽의 리니, 아린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있으니까 너무 좋아. 그래서 하나도 안 아파. 정말이야.”

진심을 가득 담았으니 전해지지 않았을까?

“전하…….”

아린이 축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리니가 킁, 하고 훌쩍였다.

진짜, 귀엽다니까. 내게 쉽게 감동하는 순수한 시녀들이 나는 참 좋았다.

“다녀올게. 기다려.”

더불어 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세 미남들에게도 말했다.

“갈까요?”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유진이 옆에 붙었고, 그리고 헤레이스가 화들짝 놀랐다.

“왜 내가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내가 아나요? 네가 알지.

카인도 익숙하게 헤레이스의 과민반응을 무시하고 내 옆에 섰다.

“근데 그냥 알현하러 가는 건데 둘이 다 이렇게 붙으면…… 조금, 과해 보이지 않을까요?”

“둘이 아니라 셋이지.”

헤레이스가 정색하며 가르치듯이 말했다. 나는 조금 식은 미소를 그에게 보냈다.

유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가다가 쓰러지시면 어떡합니까?”

“음, 그럴 리가요.”

오히려 기절이 걱정이라면 이렇게 셋 다 같이 가는 게 더 위험한데……?

카인이 이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전적이 있으십니다만.”

“…….”

가, 강력해.

순간 유진과 헤레이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기막힌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유진의 어딘가 부드러운 눈빛에 할 말을 잃고 먼저 움직여 버렸다. 그래도 덕분에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것은 많이 풀려 있었다.

“같이 가!”

“전하.”

마음속으로만 감사 인사를 보내며 나는 그들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토라진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얼굴들을 한눈에 담으면 진짜 기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에잇! 미남의 파괴력이란. 익숙해질 새가 없어. 이번에 쓰러진 것도 따지고 보면 너무 오랜만에 저 셋을 한 번에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걷는데, 어쩐지 주변에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자각하기 무섭게 세 미남이 나를 에워싸며 걷기 시작했다. 사방을 호위해 주는 것 같이.

“…….”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그냥 작게 웃고 말았다. 뭐, 저 시선의 주인공들은 아마도 내 소문을 듣고 악의적으로 구경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볼 테면 보라지!’

나한텐 미남들이 있고, 니들한텐 미남들이 없다고! 그것이면 내가 이긴 것이다. 으항항항.

그런데 그때, 유진이 말했다.

“이제야 귀한 줄을 아는군요.”

응? 뭐가?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리 알 거라면 조금 더 일찍…….”

아까부터 무슨 소리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묻기도 전에 알현실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는 금세 그들의 알 수 없는 말에서 관심을 거뒀다. 그리고 내 불쌍한 현실을 한탄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나는 혼자서 알현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 * *

죽음을 향해 간다는 황녀. 그 소문 속 주인공을 구경한다며 몰려 있던 황궁 사람들은 조금 충격 받은 눈으로 황녀를 지켜보았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리시안 바누스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져 있었는데. 직접 본 느낌은 전혀 달랐다. 유진은 그런 중얼거림을 곳곳에서 들었다. 그는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의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래도 아린과 리니가 꾸며 주어서 비교적 화려하게 다녔다. 그것도 예전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화장도 안 한 수수한 상태였다. 거기다 주위의 수군거림에 개의치 않는 담담한 모습은, 황녀에 대한 소문과 달리 몹시 매혹적이며 아름다웠다.

특히 특유의 병약한 느낌이 쉬이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고아한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소문을 걷어 내고 드러나는 황녀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존재였다. 조금 들려오던 수군거림이 넋을 잃은 시선들 가운데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유진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귀한 줄을 아는군요.”

황녀는 유진의 소리에 비로소 무언가를 들은 티를 냈다. 무심하던 눈에 순식간에 온기가 깃들고,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몸짓은 나비 같았다. 유진의 입가에 조금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헤레이스가 별꼴이라는 듯 그를 힐끔거렸다.

“이리 알 거라면 조금 더 일찍…….”

뿌듯해하는 유진과 달리 카인은 시선들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호기심과 호감이 어리기 시작하는 저 시선들은 분명 황녀에게 좋은 일은 맞지만 어쩐지 못마땅했다. 황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카인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 스스로가 그 변화를 자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흥.’

헤레이스는 어쨌거나 그 쓸데없이 진지한 두 놈들에게서는 깔끔하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생기발랄한 미소를 짧게 지어 주는 리샤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비웃듯 비틀린 입술 사이로 어린애 같은 웃음이 짧게 새어 나왔다.

이윽고 리샤가 홀로 알현실 안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셋만 남게 되자 유진이 비죽 웃으며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솔직한 아이가 사랑받는 법입니다, 헤레이스.”

“……?”

헤레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카인이 말했다.

“볼턴 경, 그렇게 어렵게 말하면 저치는 이해하지 못하네.”

“……둘 다 아까부터 뭔 헛소리들이야?”

확실히 헤레이스는 아예 말을 이해를 못했다. 할 말을 잃은 유진이 아련하게 헤레이스를 보았다. 같이 있다 보니 헤레이스는 도무지 경계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면이 있었다. 정보지에 있는 건 귀신같이 외우고 다니면서, 사회성이 부족한 건지 종종 김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헤레이스도 눈치가 있기는 있었다.

‘이것들…… 지들이 다니엘도 아니고. 뭐야, 이거.’

뭔지는 몰라도 이것들의 행동이 그 얄미운 다니엘 놈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 말이다! 마치 꼬맹이를 보는 듯한 유진과 카인의 시선에 헤레이스가 이를 갈았다.

* * *

미남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잠깐 비틀대다 중심을 잡았다. 흑, 황홀경이었어. 역시 미남이란 옳다. 자세를 잡으며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있던 황제에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리 앉아라.”

그때 내 뒤통수를 쳤던 ‘1년 머물러’ 공격 이후 처음 보는 황제였다.

‘어째 목소리가 그때보다 온화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하며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전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알현실에서 가까이 마주 보는 그의 얼굴은 약간 피곤해 보였다.

“……?”

어쩐지 그의 시선이 이상했다. 무언가 착잡한 듯도 하고, 잔잔하게 일렁이기도 하는……. 그 알 수 없는 시선에 더 의문을 가지기 전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아. 예. 그랬습니다. 3일 정도 누워 있었다네요.”

냉큼 답하자 그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리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게냐.”

“……?”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 의아함이 전해졌는지 황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뭐 하자는 것이지? 무, 무슨 뜻인 걸까.

나는 조금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정말 큰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길게 자고 일어난 것뿐인걸요, 폐하.”

설마하니, 우리 르페르샤 언니를 저 인간이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 테고 말이다. 그 가능성을 치우고 이것저것 머리를 굴려 보았다.

아, 혹시 화장 때문인가? 평소 화장은 타고난 피부가 너무 희어서 약간 톤 다운시키려고 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안 했으니 더 하얗겠지.

……설마 황제 앞에 오는데 화장 안 했다고 문화충격을 받은, 그런 건가. 나는 경악한 시선으로 황제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충격이 어린 황제의 눈을 마주했다. 놀라서 딸꾹질 나올 뻔했다. 진짜 왜 저래!

“황녀.”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아직,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는 것이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 생각?

* * *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황녀를 보며 황제는 사실 속으로 꽤 충격을 받았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창백했고, 어딘가 더 여려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제 곧 사라질 것처럼.

그 즉시 황제는 후회했다. 부르지 말 것을 그랬다고. 이리 아픈 아이를 오라 가라 한 것이다. 나으면 오라고 했는데 벌써 온다고 하기에 생각보다 큰일은 아니구나, 했는데……. 그의 말을 명령으로만 듣고 무리해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처지는 마음을 감추며 황녀에게 용건을 꺼냈다. 이왕 온 것, 빨리 끝내고 보내는 게 최선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용건은 하나였다.

“그 생각이요?”

“아직, 나갈 생각이냐는 말이다.”

황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예, 폐하. 약속도 했을 뿐더러, 그 편이…… 좋으니까요.”

그러고서 눈을 내리까는 황녀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황제는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결국 그는 염려의 말을 꺼내고 말았다. 기만으로 들릴 수 있기에 아꼈던 말을.

“괜찮습니다.”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보내며 황녀가 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고민 끝에, 다시 부를 필요가 없도록 알려줄 말을 지금 전부 하기로 했다.

* * *

“예, 폐하. 약속도 했을 뿐더러, 그 편이…… 좋으니까요.”

왜 저런 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참에 나의 무해함을 확실하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날 경계하기 시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하다 보니 황태자가 떠올랐다.

그 끔찍한 집착남! 어우, 제발 나 따위는 잊어 줬으면.

그런데 내 답을 듣고 어쩐지 말없이 나를 가만히 보던 황제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물론 자동으로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하지만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뭔가 불안하다. 저런 걸 황제가 묻는 저의는 뭘까?

“황녀.”

눈치를 보고 있는데 황제가 짧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황태자가 너에 대해 물어보더구나.”

……히히. 지금 뭐라고요?

“아무래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 일이나 깨어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더구나.”

아악?

“내게 묻기에, 네가 소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주었다.”

악악, 그래서?

“궁금해하더구나.”

“…….”

황태자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는 황제의 음성이 마치 악마의 조롱처럼 들렸다.

야, 이!

나는 황태자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대목에서 울어야 할지, 내 아주 무해한 소원을 황태자가 알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나를 궁금해 한다는 대목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아하하하! 망했네!

“그래서…… 황녀? 괜찮은 것이냐?”

“……예. 폐하.”

아마도 내 얼굴은 지금 정말로 창백해졌을 것이었다.

“안 되겠군. 황태자가 한번 찾아간다고 했으니, 그것만 알면 되었다. 돌아가 쉬어라, 황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애써 참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미치겠다. 원작은 시작도 안 했고, 아리엘은 건드리기는커녕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지금 내 상황에서 그놈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그 끈질긴 놈이 뭘 할지 모르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켜보고 있었다니. 어쩌면 황태자는 내 생각보다 더 우리 언니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를 지켜봤다면, 그간 내 행보도 전부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전하? 무슨 일이…… 전하!”

“그…… 유진, 제가 다리에 힘이…….”

힘이 풀려서 주저앉기 전에 세 남자가 달려와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유진이 바로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나는 힘을 풀고 그의 품에 안겨 돌아가면서 생각을 이어 갔다. 미남의 단단해 보이는 가슴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지금만큼은 그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황태자가, 나를 궁금해한단다. 집착 남주가 궁금증을 품으면 멀쩡한 인생에도 서리가 끼는 법. 그럼에도 찾아온다는 걸 영원히 막을 방법은 없었다. ……만나긴 해야겠지?

“흑.”

흐르는 신음을 꾹 억누르고, 나는 속으로 발광했다.

‘어떡해! 언니, 나 어떡해요! 이러다 황태자한테 찍혀 죽겠어!’

그래도 그날은 무사히 궁에 돌아갈 수 있었다.

* * *

황제는 황녀가 쓰러지거나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그는 오늘 놓아 버렸다.

“들어와서 한 번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사실 그 아이는 살면서 한 번도 응석을 부린 적이 없었다. 지금도 삼 일을 못 깨어날 정도로 안 좋은 상태였음에도. 마주본 아이는 너무 처연하고, 새하얬다. 게다가 눈을 감은 얼굴은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 아이가 이랬던가, 싶을 정도로 큰 변화였다. 라파엘리스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증상에 시달리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른 감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황제는 문득 황태자를 떠올렸다. 어제 갑자기 그를 찾아온 황태자는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로 아비에게 청했다.

“르페르샤 황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이 무언가를 알고 싶다고 했을 때는 기어코 알아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 진득한 성정을 아꼈을 것이나 이번에는 조금 곤란했다. 황태자에게 황녀에 대해 알리는 것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그는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그는 황태자의 끈질긴 눈빛을 거절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여인을 쏙 빼닮은 얼굴과 표정으로 조르는 황태자에게 그는 약했다. 아들을 믿는 마음도 컸고. 해서 그가 아는 것 중 병에 대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을 황태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황녀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행보들. 황태자가 모르고 있었던 건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1년 뒤 계승권을 반납하며 궁을 떠나기로 했다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황태자의 표정은 다소 기이했다. 그럴 리 없다는 의미임을 알아채고 황제는 두어 번 더 확인을 해 주기까지 했다. 황태자가 말했다. 황녀를 찾아가겠노라고.

“직접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소문에 휘둘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은 황제를 다소 흡족하게 했으므로, 황제는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그런데……. 황녀가 받은 충격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그제야 황제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래. 르페르샤 황녀는 궁을 벗어나기만을 바랄 정도로 궁 자체에 지쳐 있다. 라빌로프 황태자의 다소 잔혹한 성정은 지금의 황녀에게 잘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만약 못할 짓을 한 것이라면, 이를 어찌한다?”

걸어온 것마저도 힘들었는지 르페르샤 황녀는 휘청거렸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 그런 아이를 사지로 몰아넣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참으로 나는 간사하군.”

사실 없어도 될 자식처럼 여기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후회한 뒤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경계하는 것을 버리지도 못했었다.

‘명배우여도 죽음에 다다른 사람의 느낌은 연기할 수 없다.’

금방 죽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 아이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린 것이다. 황권 계승권도, 재산도, 권력도, 그리고 가족도. 전부 다. 종래에는 결국 본인 남은 삶까지 잃어서 꽃처럼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 죽을 아이.

황제는 가슴 아픈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래도 주변인들이 있지 않나. 황제는 카인과 유진을 떠올렸다. 거기 더해진 헤레이스라는 놈도. 사실 우스운 말이지만 셋 다 사위 후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도, 그 둘도 르페르샤한테 관심 보이고 잘해 주면서도 영 그 이상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쪽보다는 좀 더……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하게도 말이지.”

좀 더 가깝고 친한 친구 관계처럼. 르페르샤는 유진을 붙들었고, 카인을 곁에 받아들였으며 헤레이스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유진은 르페르샤를 싫어했던 이였고, 카인은 모든 타인에게 다소 무관심한 성정이었다. 헤레이스는 정체 모를 놈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그들이 그 아이에게 남은 희미한 끈이라니.’

황제는 조금 암담함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둘에게는 알리는 것이 좋겠군.”

황제는 생각 끝에 그날 저녁, 그나마 믿음직한 유진 드 볼턴 경과 카인 드 아이릭 공작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황태자가 황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다.

“아무래도 태자의 관심이 버거운 것 같았네. 황태자가 황녀를 해할 리는 없겠으나…… 불필요한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두 사람이 황녀를 잘 지켜 주게.”

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나가고 황제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했다.

“그래. 지금의 황녀를 본다면 황태자는 설사 적의가 있었더라도 그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괜찮겠지.”

황태자는 힘을 완전히 잃은 새나 죽어 가는 사냥감의 목은 꺾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주위의 사람들이 잘 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지난 한 달여간 그는 황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황녀가 황궁에서의 생활을 1년이나 채우고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 필요하다면, 안전해졌다는 확신이 들면, 1년이 되기 전에 보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1년을 채우기 전에 보내 줘야 한다면, 안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궁만큼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동원하고, 평생을 외면해 왔던 또 다른 많은 것들을 마주하며 결론을 내렸다.

‘황태자와 황녀가 직접 마주하고도 서로를 해하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러면 그도 안심할 것 같았다. 약한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황태자를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했던 것이다. 그는 생각 끝에, 황태자에게 서한을 썼다. 황녀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개선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황태자가 가진 힘이라면 금세 수습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런 도움을 주면 황녀도 황태자를 그리 겁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수가 그의 자식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득이 되기를 바라야겠지.”

생각에 잠긴 황제의 노쇠한 눈이 피로에 잠겼다. 이윽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그는 잠이 들었다. 그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붉은 머리의 여인과 오로지 정략 관계로만 이루어졌던 또 다른 여인이 차례로 꿈에 찾아왔다. 붉은 머리의 여인은 늘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어린 소년과도 같은 기분이 되고는 했다. 꿈에서 마주한 그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한쪽, 정략혼으로 맺어졌던 하얀 머리의 여인은 완벽하게 정반대였다. 그녀는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악녀였다. 황제의 눈에는 단 한 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비밀이 많은 공신 가문의 잘 만들어진 인형. 입을 열면 섬뜩한 말만 쏟아 내던 유리 인형.

한 번도 두 여인을 동등한 선상에 두어 본 적이 없었던 황제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만이 세상의 전부였으므로.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그간 철저하게 외면했던 그 여인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르페르샤의 어머니, ‘리시안 바누스’를. 꿈인지 상념인지 모를 기억들이 황제를 잠식했다.

이윽고 황제는 눈을 떴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 * *

“네?”

유진과 카인의 말을 듣고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무릎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금 들은 말이 잘 입력되지 않았다.

“화, 황태자 전하와 만날 거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두 분까지?”

악. 무슨 짓을! 내가 당신들이 원작에 휘둘리지 않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데요! 아니, 거기다, 지금 나부터가 망한 거잖아? 하나만 망하면 될 걸 셋이 같이 망하자고? 이게 무슨!

그러자 유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어색한 남매 사이이니 편안한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좋을 거라 하셨습니다, 전하.”

그 편안한 사람들이 황태자랑 만나면 안 되니까 하는 말인데! 그래, 좋다. 정말 좋게 생각해서 황태자가 직접 내 변화를 확인하게 된다면, 모든 게 해결될 수도 있겠지. 정말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아니다. 이미 황제가 나를 신경 쓰기 시작한 이상 날 죽이기로 내심 결정을 했을 것이다. 뻔해! 망했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언니의 기억이 타이밍 좋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슬픈 현실인데, 기억이라도 좀 길었으면 좋겠다. 저번에 건너뛰었으니까 길겠지?’

아예 깨어나질 않으면……. 히히, 아니야. 그럼 더 쉽게 죽겠지?

“전하!”

“록스! 록스를 불러와! 리플리라도!”

왈칵 피를 토하며 나는 꼬르륵 기절해 버렸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기억은 저번처럼 짧았다. 언니는 이제 생기가 거의 없었다. 그저 건조하게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처럼. 개 리샤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한동안 가만히 보다가 시무룩하게 언니에게 다가가 그 귀에 속삭였다.

“언니 나 죽겠어요. 어떡해요? 흐엉.”

기억 속 언니는 책에 몰두하며,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무심한 뒷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야가 바뀌었다. 몽롱하고 신비로운 공간.

“언니!”

[…….]

진짜 르페르샤 언니였다. 나는 달려가서 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했다.

“그래서 황태자한테 죽게 생겼어요! 으헝.”

[그래서, 뭘 원하는데?]

“아뇨, 그냥. 말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나 봐요. 고민 말할 사람이 언니밖에 없으니까요. 말하니까 좀 속이 풀리네요. 고마워요, 언니.”

[흐음.]

언니는 나를 묘한 눈으로 보더니 잠시 후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렇게 황태자를 두려워하지?]

“그야,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소유욕 때문에 사람을 몇이나 죽인 인간이었다. 거기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결여된 부분이 많은 인간이다. 가만히 나를 보던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기억들. 당분간은 보지 못하게 해 두겠다. 나중에 몰아서 봐라.]

“……네?”

[아마 이후로는 찾게 되는 기억의 양이 더욱 일정하지 않을 거다. ……몰아서 찾게 될 테니까.]

“아……. 그런데 기억들은 갑자기 왜요?”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릴 여지가 있기 때문이지. 되찾는 건 그대로라 피는 꾸준히 토할 테니 그건 기대하지 말고.]

“어어? 어, 언니?”

[당분간은 불러도 오지 않아. 기억들을 전부 보게 되면, 그때 불러라.]

딱 그것만 말하고서 언니는 사라졌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흑, 너무해.”

맨날 언니 맘대로야! 근데 예뻐! 언니 맨날 여신이야! 으헝. 당분간 보고 싶어도 못 본다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내 일상의 낙이…….

하지만 돌이킬 길은 없었다. 그리고 마주한 문제가 너무 컸다. 당장이라도 황태자가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엠마에게 황태자가 찾아오면 내가 몸져누운 상태라는 말로 일단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책상 앞에 앉았다.

“좋아. 계획 전면 수정이다.”

황제가 유진이랑 카인도 황태자랑 만나게 할 줄이야.

‘이러다가 자기만 빼놓지 말라면서 헤레이스까지 끼어들면 어떡하지?’

그들 모두, 여주와 남주와 엮이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데.

‘아직 다니엘도 못 만났는데 일은 죽어라 생기네.’

제인 남매도 슬슬 가서 챙겨 줘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지금 하나도 못 했다.

‘으으, 정리! 일단은, 그래도 나부터 살아야 하긴 하는데.’

그래. 일단 지금은 내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들이지 않고 머리 터져라 고민한 결과,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몇 가지로 좁혀졌다.

“첫째. 내가 무해하다는 걸 황태자에게 어떻게든 인식시키기.”

그러면서도 너무 두려워하는 걸 티내면 안 된다. 너무 티내면 그것도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방문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만나 버리는 게 낫겠지. 당분간은 아픈 걸로 피하고.”

내가 먼저. 그럼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

‘직접 그 황태자궁에 찾아가?’

아니다. 가능하면 사람 많은 데에서 만나고 싶다. 그런 데가 어디지?

“아!”

나는 손뼉을 쳤다.

“사교계!”

곧 아리엘의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교계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어차피 황태자와 마주치는 게 불가피해진 이상, 보란 듯이 공식적으로 황태자에게 숙이는 것이 제일이었다. 오늘은 제인에게 가보려고 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둘째. 이젠 무조건 다니엘을 만나기.

“도무지 접근할 방법이 나오지 않아서 미룬 거였는데.”

어차피 만나서 그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으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설정이……. 미움 받지 않으면 다행인 거 같은지라.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마침 저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거지.”

외궁 도서관에서 발견한 대륙 10대 불가사의. 나는 그걸 통해 다니엘에 대해 얼마 정도 신빙성 있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가 로브를 쓰고 다니는지 등에 대한…….

“아마, 보석안을 갖고 있을 거야. 가끔 눈빛 묘사가 나올 때 색이 다 달랐으니까.”

딱 짚어서 보석안이라고 나온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보석안. 책에선 그것이 인공정령과 인간의 혼혈이 가지는 눈이라고 했다. 갈색 머리라는 것만 밝혀졌던 다니엘의 외모에 정보가 더해졌다. 나는 따스한 갈색 머리에 보석안을 가진 남자를 상상해보며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잘생겼을 거 같아.

그러다 나도 모르게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단속했다.

“어휴, 나도 참 주책이야.”

그래도 이건 거의 확실했다. 원작의 마지막에 그가 드러냈던, 불가사의할 정도로 강력했던 인공정령의 힘. 그것까지 떠올리면 저것뿐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게도 길이 있었다.

‘인공정령 혼혈은 인공정령의 인정을 받은 자들에게 거의 무조건적으로 호감을 느낀다고 했지. 인공정령에게 인정받는 사람은 또 엄청 희귀하다고. ……일기장 남은 분량이 어느 정도더라?’

얼마 안 남았다. 엠마가 보안을 중심으로 가장 좋은 걸 얻어 온 것이었는데, 거기에 인공정령이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거기다 그들은 능력들만 보자면 악마에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했어.’

그제야 메인 남주를 이겨먹은 무식한 능력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로바인 왕국이 멸망한 지금, 혼혈은 다니엘만 남았을 지도 모른다. 왕족이나 고위 귀족 사이에서나 발견되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니까.

‘일단 일기장 정령을 만나고 나면…… 무조건 인정을 받아야 해.’

그래야 다니엘과 친구가 될 희망이 생긴다.

나는 즉시 각을 잡고 일기를 쓰며 적당한 무도회를 물색했다. 인생은 선방. 시기적절하게도 무려 황태자의 탄생일 무도회가 멀지 않았다.

* * *

원작이 시작할 때까지 르페르샤 언니는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아린과 리니는 흥분해서는 나를 무도회 날 아침부터 들들 볶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솜씨를 한껏 발휘한 우리 르페르샤 언니는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 미모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내 눈치를 조금 보면서 리니가 물었다.

“그런데 황녀님, 정말로 그, 그걸 하고 가실 거예요?”

아린도 걱정 어린 기색으로 말을 더했다.

“전하, 확실히 어울리지만 그래도 무도회에 베일을 하시는 건…….”

무도회에 베일을 하는 건 금지된 것에 속한다. 그건 상복에 속하는 의상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복으로 쓰이지 않을 경우에는 패배의 의미를 가진다. 간절하기까지 한 말들이었지만 나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야. 이걸로 할 거야. 그래야 해.”

“네…….”

시무룩해지는 둘의 머리를 차례로 가볍게 쓸어 주었다. 내 손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얼굴들이 새삼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무도회에 갈 준비가 끝났다.

“그럼, 다녀올게.”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다녀오세요, 전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리니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응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하여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는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귀족들은 우리 궁 사람들처럼 쉽게 인식이 바뀌지 않을 거야.’

황태자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무해한 황녀가 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다. 이왕 무도회를 이용하는 것, 여러 효과를 노리기로 했다.

나 너무 똑똑한 거 같아. 크.

‘귀족들에게는 충격요법을 줘야 해.’

더불어 황태자 주변 사람들의 경계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마음으로 가늠해 보며 걸음을 옮겼다.

“…….”

무도회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사들을 돌려보낸 뒤, 나는 가면을 쓰듯 표정을 고고하게 바꾸었다. 웃는 듯 마는 듯 조금 우울해 보이는 미소와 내리깐 눈.

‘걸음은 당당하게.’

지난 나흘간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장의 문이 열렸다.

* * *

오늘 나온다는 소문이 돌던 ‘그’ 황녀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화젯거리인 그녀의 입장을 기다리면서 귀족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미쳤다는 소문이 있던데 말입니다.”

“밤에 맨발로 뛰어다녔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직접 본 사람도 있다고 하니…….”

“무도회에 오신 지 오래 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늦던 분이 아닌데, 커흠. 뭔가 일이 있긴 있으신가 봅니다.”

눈앞에서는 못할 말을 주고받는 이도 있었고, 염려하는 척 흥미롭게 눈을 빛내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것 같군.”

황태자가 그런 귀족들을 보고 가면 같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그의 사나운 측근 가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르페르샤 황녀…….”

황태자가 입만 웃는 모습으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미쳤다는 것 빼고는 변했다는 말이 다 사실이란 말이지.”

황태자는 황제의 도움으로 파악한 황녀의 정보를 떠올렸다. 아, 그래. 계승권을 반납하겠다고 했다고 했지.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녀가 어떻든 우리에게 영향이 올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전하.”

가일이 말했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변화는 늘 부작용을 수반하는 법. 이물질이라 해도 급격한 변화에는 주시할 필요가 있어.”

“급격한 변화…….”

황태자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에게 또 말했다.

“듣자 하니, 황녀궁의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더군.”

가일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뱀의 소리 같은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주 다정하시고, 스스럼없으신 분이라던가? 황녀가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성정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황녀는 제 시야 밖의 사람에게는 상당히 무심했다.

그런데 다정하다니?

“게다가 자꾸만 거물들이랑 어울리고 있지.”

유력한 인사들이라면 누구라도 탐을 낼 자유 기사 유진 드 볼턴 경. 거기다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뱀파이어 혼혈 공작 카인 드 아이릭. 헤레이스라는 놈도 아무래도 정보길드의 핵심부에 속한 인물 같았고 말이다.

“어디가 아픈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직접 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겠어.”

황태자의 말에 가일이 툭 물었다.

“그녀가 황위를 탐할 거라 보십니까?”

겨우 그런 여자가? 그런 기색의 말에 황태자가 픽 웃었다.

“아니.”

“그렇다면 왜 경계하십니까?”

“자네는 참, 아직도 나를 모르나.”

황태자가 무심한 눈을 들어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황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중요한 것은, 내 것을 건드릴 여지가 있는가, 없는가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가일은 꾹 참았다.

“내 것이라면 어떤……?”

“수많은 것을 내포하지.”

“그러십니까.”

가일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차례 저은 뒤, 꺼리는 낯으로 툭 물었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뭘?”

“무엇이든.”

꿍꿍이를 알아본다든가, 그냥 처리를 한다든가.

“글쎄.”

황태자는 짧은 침묵 이후 말을 이었다.

“그건 이제 생각해 봐야지.”

꿍꿍이를 캐는 것과 처리하는 것. 그 두 가지를 단계적으로 전부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고.

“르페르샤 람 트리엘,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가 사이한 눈동자를 문 쪽으로 향했다. 열리는 문 사이로 누군가 발을 들였다. 그리고. 여유롭게 그쪽을 응시하던 황태자의 얼굴에 일순 흥미가 돌았다.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채 들어오는 이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리고 속삭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탄생일 무도회에 베일이라.”

회장 안 모든 시선에 호기심과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베일을 하는 것은 패배와 죽음을 상징한다. 숨죽인 시선들을 가로질러 그녀, 르페르샤 황녀가 멈춰 섰다. 가일은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녀의 저의를 생각하기도 전, 무심코 본 황태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황태자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뭐든 쉽게 끝낼 눈빛이 아닌데.’

가일은 애써 황태자에게서 눈을 뗐다. 사실 그가 보기에 황태자 본인의 생각보다 황태자는 르페르샤 황녀에게 관심이 많았다.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늘 황녀와 관련된 중요한 변화나 사건들은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황녀에게서 불쾌한 꿍꿍이를 읽어 내지는 못하신 모양이군.’

잔혹한 느낌은 가라앉아 있었다. 순전히 흥미만이 깃든 눈을 보니, 뭔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한 차이를 봤다든가 했겠지.

가일은 다시 황녀를 보았다.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온 황녀에게는 모시는 시녀도, 지키는 기사도 없었다. 그런 채로 황녀는 회장을 가로질러 황태자의 정면으로 향했다. 가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평온해 보인다.

황제가 자리에 없기에 결국 르페르샤가 오늘 인사할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모두가 황태자와 황녀의 만남에 주목하고 있었다. 잠시 후, 르페르샤 황녀가 황태자 앞에 섰다. 흥미가 깃든 눈으로 황녀를 응시하며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누이께서 무슨 일이신가?”

‘황녀께서 이런 자리에 걸음하지 않은 지 꽤 되셨지.’

가일이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르페르샤 황녀는 그저 가만히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가일은 그녀를 보며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황태자 전하를.”

목소리. 저렇게 맑았던가? 자세도 어쩐지 전처럼 꼿꼿했고, 베일 밑으로 보이는 희고 마른 손은 묘하게 투명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황녀가…… 저런 분위기였던가.

“인사는 됐으니, 누이.”

그녀의 잔잔한 시선에 황태자가 뱀처럼 가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베일,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겠나?”

그때였다. 아주 크고 긴 베일로 온몸을 감싸 드레스를 치장한 르페르샤 황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그녀는 그대로 몸을 낮췄다. 머리 하나 만큼, 아니, 허리를…… 저만큼이나.

황녀의 인사가 상대를 극진하게 높이며 낮아질수록 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그것은 태자에게 정식으로 군신의 예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 * *

같은 세대의 황족이 같은 세대의 다른 황족에게 복속의 예를 표하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광경이다. 황족은 자존심이 매우 센 법이니까. 역사서에서도 말하길, 제국 역사에 이런 경우는 손에 꼽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군신의 예를, 베일을 하고 했다. 이렇게 되면, 베일이 가지는 죽음, 패배의 의미가 상대가 아닌 내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우, 복잡해. 이거 알아낸다고 머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엠마가 아니었다면 이런 의미를 담지 못했을 것이다. 알려 주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던 그녀를 떠올리며 속으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이건 내가 며칠 안에 준비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충격요법이었다.

나는 빠르지 않고 당당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모델들이 워킹하는 것을 떠올리며. 중앙 높은 자리에 어쩐지 섬뜩한 미소를 살짝 짓고 있는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황태자 라빌로프 페사 트리엘.

저래 봬도 어릴 때 아리엘에게 붉은 머리로 염색을 하고 요정 코스프레를 했던 인간이다. 그의 진짜 머리는 아름다운 적금발이었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을 때였다. 그 적금발의 남자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누이께서 무슨 일이신가?”

누이라고 부르는 것에 황태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황태자의 섬뜩한 미소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인사는 됐으니, 누이.”

황태자의 눈빛이 더욱 흥미로 물들었다.

조금만 더.

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을 노렸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그 베일,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나?”

지금.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르페르샤 언니라면 죽어도 하지 않았을, 군신의 예를 올렸다.

* * *

‘그 황녀’가 황태자에게 군신의 예를 올렸다. 무려 패배의 상징인 베일을 쓰고서. 그러면서 일견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그 우아한 움직임이라니. 순간 좌중은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

그런 분위기와 상관없이 무료하게 서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들고 있던 잔을 나른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뒤늦게 그가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옮겼다. 그는 감추고 있지 않았다면 황태자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만큼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온화하며, 깊은 느낌이었다.

그림자에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그에게서 얼핏 화려한 빛깔이 엿보였다. 이제는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보석안. 오늘은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그 눈이 황녀의 베일 언저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황녀가 우는 것을 기필코 보겠다더니 본업으로 복귀할 생각을 안 하는 친구, 헤레이스를 떠올렸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관심 보이는 정도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친절하게 충고를 해 주었으나, 역시나 고집스러운 친우는 듣지 않았다. 르페르샤 황녀.

‘그 리시안 바누스와 그 황제 사이에서 나온 결과물인가.’

남자는 공을 들이듯 천천히 단정한 미소를 그렸다.

‘제법…….’

그저 다정한 듯 무심한 그 시선의 끝에 문득 흰 목덜미가 들어왔다.

‘사람을 홀리는 모양이야.’

그때 황녀가 몸을 바로 하며, 보랏빛 베일이 그의 시야에서 그 하얀 목덜미를 감추었다. 어둠 속 그의 표정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그림자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황녀의 행동, 그것은 사실상 계승권의 포기 선언이었다. 사실 최근 이상해진 황녀가 평소 황위에 관심 없던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황위에 관심을 두었어도, 그녀가 황제가 되거나 황위를 차지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황태자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해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전적으로 황태자 측에 좋은 일이었다. 완전무결하다 일컬어지는 황태자의 유일한 약점은 어머니의 신분이었으니까. 공신 가문을 외가로 둔 황녀가 그에게 복속된다면, 그는 약점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황태자는 잠시 서늘한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생각보다 가진 것을 꽤나 잘 쓰는군.’

그렇다고 달리 꿍꿍이가 있는 느낌도 아니다. 황태자 라빌로프는 낱낱이 파헤치는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궁금했다. 그녀가 황태자를 도와서 얻고자 하는 건 뭘까. 이윽고 황태자가 기꺼운 척 눈을 낮게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누이, 이건 선물인가?”

인사를 마치고 바로 선 르페르샤가 그와 눈을 맞춰 왔다. 그 순간 황태자는 황녀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오호라.

그는 황녀를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공짜는 아닐 테고. 원하는 것을 말해 봐. 비싸지만 않다면, 다음 누이의 생일 때 내 챙겨 주지.”

그저 여흥을 위해 한 말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황녀를 언젠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신호를 보내면 황녀를 죽일 준비까지도 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에 갖고 노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군.’

어쨌거나 여기서 황녀가 무엇을 달라고 말하든, 황태자는 안타까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어쩌지. 그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러니 이 선물은 도로 가져가는 것이 좋겠군, 누이.’

그렇게 한다면 황녀는 회장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아주 망신스럽겠지. 그리고 황태자의 흥미가 가시고 나면, 언제고 소리소문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황태자는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곧 그의 가장 귀한 이가 수도로 올라온다. 온전히 자신의 것만 가득한 황궁으로 그 귀한 이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러나…….

“없습니다.”

황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것은 예상 범위 밖의 답이었다. 우아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황태자가 재차 물었다.

“그럴 리가. 뭐든 말해, 누이.”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황녀가 할 말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황녀의 베일 아래서 달싹이는 입술이 보였다. 나붓한 느낌의 그 작은 움직임은 무언가 묘했다. 가일이 더욱 이상한 얼굴을 하고서 그런 황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태자가 심심해진 낯으로 재촉을 하기 전 르페르샤 황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저 없는 셈 쳐 주세요.”

예상과 달리 황녀는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살고자 합니다. 하니 이후로는 제가 없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답에, 황태자의 눈에 탐탁찮은 기운이 어렸다. 심지어 진심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르페르샤 황녀를 죽일 생각을 단숨에 접어 버렸다. 저것이 생각하는 것을 낱낱이 파헤쳐 알아내고 싶었다. 그냥 죽이기에는 감히 그를 자극했으니, 알아본 뒤엔 제대로 이용해 주고 죽이리라. 그는 가일에게 수신호로 황녀의 생존을 명했다. 오늘 황녀를 죽이기 위해 와 있었을 ‘암살 길드장’에게 즉시 지령이 전해졌다. 의뢰는 무기한 연장되었다.

‘황족이니, 달콤한 죽음을 선물해 줄까 했더니만 다 제 복이지.’

황태자는 르페르샤를 서늘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묘한 웃음기가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없다고 생각해 달라니. 다행히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군. 그럼 그 선물, 고맙게 받지, 누이.”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숨죽이고 둘의 대화에 집중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황녀의 행동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녀의 요구사항은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정말로 황녀가 미친 것인가. 그런 내용의 수군거림이 퍼져 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르페르샤는 초연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쉰 뒤 우아하게 몸을 돌려 회장을 빠져나갔다. 황태자는 황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일.”

인상을 찡그리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던 측근이 고개를 돌렸다.

“황녀의 분위기가 다르군요, 전하. 그렇다 해도, 어째서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죽인다라, 그랬지.”

황태자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답했다.

“하지만 안 죽이기로 했다.”

측근 가일 후작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황태자 성정을 아니까. 황태자는 호기심이 생기면 그걸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있었다.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니 요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황녀를 여유롭게 살려 두는 것이리라.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답하면서도, 가일은 솔직히 찝찝했다. 불길하기만 했던 황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신비로웠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담담한 시선은 오묘한 분위기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황녀를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다 지나치게 파격적이고 뜬금없는 행동이었지만, 어쨌거나 황태자에게는 해될 것이 없는 우아한 행동이었다. 무엇을 원하는 걸까. 정말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게 전부일까.

황태자가 다시 무심한 낯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따로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가 볼까?”

가일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장단을 맞춰 주었다.

“미심쩍은 걸 남겨 둘 순 없겠지요.”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황태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잠시 후, 그들은 차례로 회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 * *

“조용히 살고자 합니다. 하니 이후로는 제가 없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생각해 뒀던 대로 답했다. 아마도 저렇게 나온다면, 황태자는 더욱 의아해질 것이다. 황태자는 호기심과 조심성이 많다. 아리엘을 보고서도 왜 내 눈에 쟤가 예쁘냐는 호기심으로 사랑을 자각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렇기도 하고, 뭔지 모르면 확실히 알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나를 따로 부르겠지. 그때 유진과 카인을 두고 혼자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대놓고 말할 생각이었다.

‘마나 공증으로 약속을 해 달라고.’

연애를 성공적으로 돕겠다고 하는 것이다. 뭔가 허무맹랑한 것 같지만 난 그를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솔깃할 것이다. 그는 아직은 아리엘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기 위해 고민 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뭘 하더라도 아리엘의 마음을 얻는 것을 우선으로 두겠지.’

가능하면 여주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으윽. 여주를 끌어오는 거 말고는, 그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약속받을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슬프게도. 황태자가 얼마나 내 의도에 부응해 줄 지는 미지수지만.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거나 나 아무래도 미쳤다는 쪽으로 소문이 났나 보네.’

하긴 너무 급격한 변화이기는 했을 테니까. 가만히 서서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쳤다는 말은 들려오는데 더 은밀한 소문은 들을 수 없었다. 별로 관심은 없지만. 좋아. 그렇다면 이제는 다니엘을 생각할 때였다.

“…….”

화려한 정원의 벤치에 앉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주점 달빛 정원을 계속 다녀야 할까. 다니엘은 대체로 거기서만 등장하니까.

‘제인을 보러 가는 김에 보면 되겠지? 일단 일기가 이제 두 장 남았으니까 그걸 오늘 채우고…….’

바람이 조금 찼다. 나는 코를 훌쩍이다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음, 위험한데.”

언니의 몸으로 감기에 걸려 본 적은 없지만 이건 확실히 감기 걸리기 직전의 느낌이었다.

“아프면 다들 걱정할 텐데.”

감기 걸려서 기침하다가 폐렴으로 번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몸이니까. 생각해 보니 새삼 내가 최약체라는 것이 다가온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렸다.

‘미친. 너무 배고파…….’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무도회 준비하느라 다 건너뛰었고, 저녁도 방금 쇼를 하느라 만찬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파지자 나는 문득 서러워졌다. 나는 그냥 덕질만 하고 싶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꼬이는 거야!

찔끔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돌아가야지.”

가서 간만에 큰 고기를 해 달라고 해야겠다. 너무 적게 먹는다고 잔소리하기 시작한 우리 궁 주방장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는 푸짐한 고기를 대령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곁들이겠지.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우리 미남들은 아마 타당하다든가, 재밌다고 여기겠지만. 내 이미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람. 이미 다 말아먹은 거 아냐? 아냐. 그래도 이미 깎여 나간 이미지보다는 아직,

“잃을 것이 많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고기로 배를 채우는 걸로 하자.

차마 외면하지 못한 불안함에 흐느적거리며 나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조용히 궁에 돌아가서, 아린과 리니의 코러스까지 더해진 주방장의 인생예찬을 들으며 전투적으로 고기를 삼켰다. 다행히 체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오늘 절반의 성공을 자축하며 잠이 들었다. 그날이 내 생각보다 성공적인 하루였다는 것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 * *

회장을 나가는 르페르샤 황녀의 뒤를 두, 아니 세 사람이 조용히 쫓았다. 황태자 라빌로프, 측근 가일 그리고 그 둘과 따로 움직여 먼저 황녀 주변에 도착한 남자 하나.

“아프면 다들 걱정할 텐데.”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혀 왔다.

그들은 황녀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가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어쩌면 황태자보다도 황녀를 더 자주 봤을 사람이었다. 경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쓸쓸해 보이는 황녀는 본 적이 없었다. 가일은 더욱 의혹 어린 눈으로 르페르샤에게 집중했다. 황태자는 여전히 무료한 기색이었다. 그때 황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려다 비틀거렸다.

‘설마, 이쪽을 눈치챘나?’

자기도 모르게 든 생각에 가일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처연하다. 새하얀 얼굴. 달빛 아래,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머리를 짚는 것이 확실히 어딘가 아파 보였다. 혼자가 된 황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었는데.’

회장 안에서 의연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지금의 그녀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일은 황태자를 힐끔 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황태자의 시선이 살짝 일그러진 채로 황녀를 향하고 있었다. 황녀는 가만히 달을 응시하다가 얼핏 서러운 얼굴을 했다.

“돌아가야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였다.

“잃을 것이 많겠지만…….”

황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아까 잠깐 보았던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낯설고 기묘한 광경이라고 가일은 생각했다. 황녀가 가녀린 몸짓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뭘 잃는다는 거지?”

당연히 가일도 몰랐다.

‘애초에 잃을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비정하긴 해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경계하는 것이 허무할 정도로 가진 것이 없는 황녀였으므로. 그러나 비틀거리던 가녀린 걸음의 주인을 쫓아가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저도 모릅니다.”

“짐작 가는 것도 없나?”

“없습니다.”

가일은 보고서 내용을 기억하며 답했다.

아픈 얼굴을 보고서야, 진짜 뭘 못하는 상태라 맨날 처소에 있다는 기록을 이해하기도 했다. 그것은 황태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건 그냥 몸이 안 좋은 정도와는 연결이 쉬이 되지 않는 변화였다.

“무언가 있군.”

호기심을 느낀 황태자가 생전 대화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만나 봐야겠어.”

그리고 라빌로프는 그녀와 독대를 해 볼 마음을 굳혔다.

‘찾아가서 당황하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녀는 그에게 숙였으니까. 그만한 대우는 해줘야 할 것이다. 비로소 ‘대우’와 같은 단어를 떠올린 황태자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한편 르페르샤와 라빌로프, 가일을 한눈에 담고 있던 누군가가 미묘한 눈으로 황녀를 보다가 슬쩍 사라졌다.

사라진 남자는 궁에서 먼 곳, 암살 길드 본부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르페르샤 람 트리엘. ……트리엘.”

트리엘의 황녀. 나직한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어딘가 서늘했다.

“역시 늦기 전에 죽이는 것이…….”

그의 눈이 빨아들일 듯한 오묘한 빛깔로 빛났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무저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다니엘. 암살 길드장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무표정한 얼굴로 황녀를 떠올렸다. 회장에서는 어딘가 말갛고 흐릿하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던 황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둠 속에서는 환히 빛났었다.

마치 달처럼.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켜볼까.”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마침내 결정했다.

“그도 좋겠지. ……확인해 볼 것도 있으니.”

익숙한 향기가 났었다. 지금은 거의 그의 무리에서만 맡을 수 있는 인공정령의 향기가. 아직 인정을 받은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특이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의 따스한 다갈색 머리에 달빚이 왕관처럼 드리워졌다.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은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듯 빨려들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 * *

깨어났을 때 창밖은 푸르스름해져 있었다.

“벌써 저녁이네.”

“푹 주무셨어요, 전하?”

리니가 물었다. 나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맑았다. 좀 띵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개운했다. 한참 자서 그런가? 아니면 어제 밤에 고기를 먹어서 그런가? 어쨌거나 몸 상태가 상쾌하기 때문일까, 상당히 쓸 만한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을 만날 수 있는 원작의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원작 시작하고 나서 있는 일이지만, 어차피 지금 상황 봐서는 3개월이 지나자마자 요양을 가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황태자는 소식이 없었다. 아리엘 딜을 걸어야 하는데. 힝, 이거 통하면 다니엘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 건데. 그냥 어쩌면 어제 일로 관심 껐을 수도 있고, 가치가 없어서 신경 쓰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황태자는 관심이나 흥미 가졌다면 진작 쫓아왔을 인물이란 말이다.

‘다니엘 생각이나 해야겠다.’

요즘 하는 생각은 다니엘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미루던 때와 달리 이제는 무조건 빨리 만나야 했으니까.

오지 않으면 내가 다가가야지. 아무렴.

나는 즉시 아린을 불렀다.

“아린.”

“네, 전하.”

“내일 모레는 외출을 가려고. 같이 갈래?”

내일은 언니의 기억을 찾는 날이었다. 비록 이제는 기억은 못 보고 피만 토하겠지만.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피를 토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슥슥 처리를 한 뒤, 다니엘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일기를 다 쓰고 정령을 마주한 것이다. 이 일기장의 정령은 일기가 마음에 들었을 때만 계약을 할 수 있는 인공정령이었다. 아니라면 계약까지는 못한다고. 다행히도, 내 덕질일기는 정령의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와! 신기해.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젠.”

이윽고, 눈앞에 사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계약자의 이름은?

독수리의 형상을 한 검은 정령이었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정령을 구경하다가 답했다.

“르페르샤 람 트리엘.”

답과 함께 떠오르는 매뉴얼대로 손끝에 피를 내어 정령에게 내밀었다. 정령이 야수 같은 몸짓으로 손끝에 볼을 댔다.

꺅.

그리고 잠시 후, 정령 젠이 느릿하게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 주인.

“좋아, 젠. 내 일기가 마음에 들었구나. 고마워.”

생긋 웃으며 말하자 젠이 묘한 눈초리로 답했다.

-다시는 못 볼 일기라고 생각했다.

엄숙한 말투에 나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렇구나.”

반들거리는 까만 눈동자가 고왔다. 마음에 들어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몹시 창피해지고 말았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찬양 일색이더군. 사실 조금 걱정했다.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나왔다, 주인. 대체 제인이라는 소녀가 집을 얻은 걸로 왜 주인의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건가?

그 외에도 미남에게 손끝이 닿았을 때 눈물이 나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왔다. 그 느릿하고도 진지한 질문에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칭찬을 들어도 수치스러워!

“화, 황녀는 자고로 비밀이 있는 법이야. 들어가 있어. 나중에 부를 테니.”

내 말에 젠이 조금 불퉁한 느낌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뭔가, 희한하네. 참.

그와 똑같은 생각을 젠도 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다음 날.

“로브가 여기 어디 있었는데.”

유진과 카인이 무언가 바빠 보였기 때문에 이번엔 혼자 나가기로 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비밀이고! 다니엘은 혼자 만나는 게 좋고, 정령 젠이 꽤 호위로 쓸 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반 기사들보다 훨씬 좋을 지경이니…….’

인공정령은 정말 강력한데 어떤 건 마스터에 맞먹는 기량까지 낼 수 있다고 한다. 그게 젠은 아니어도, 그만큼 세니까. 나는 로브와 돈 주머니를 챙겼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감추고서, 푸른 저녁으로 물든 궁을 빠져나왔다.

자, 이것이 바로 나의 그날 저녁의 경위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익숙한 그 주점 달빛 정원에서, 나는 바로 그 다니엘을 만났던 것이다.

* * *

처음에는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그야 아직 병이 있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이 되어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무알콜은 없나요?”

“무알콜이 뭡니까?”

점원이 귀찮은 기색으로 답했다. 쳇, 아무래도 판타지 세상에 무알콜은 없나 보다.

“그럼 가장 도수가 낮은 건 뭔가요?”

“전부 비슷합니다만…….”

“알았어요. 그럼 이걸로.”

나는 한숨을 쉬며 가장 달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나마 이게 낫겠지.

“저, 손님, 그건…….”

“……?”

눈을 마주치자 점원이 갑자기 멈칫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기다렸는데 말을 안 한다. 그때 점원이 당황하는 이유를 물었어야 했는데. 내가 멀뚱히 보고만 있자, 점원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앞에 놓인 안주들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하…… 아이고.”

큰일이네.

이 술이 도수가 센 건지, 아니면 언니의 몸이 술에 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젠에게 대기하라고 말한 상황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젠이 데려가거나 지켜 줄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겨우 한 모금에 이게 무슨. 병든 몸이라 그런가?’

내 시야에 갈색 로브를 입을 사람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합석해도 될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웃고 말았다.

“……좋아요.”

“고맙군요.”

그렇게 아직은 정체를 모르는 상태로 나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 * *

“이런 독주를 마셔도 되나요?”

앉자마자 하는 말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독주. 판타지 세계의 독주는 맛은 밍밍한데 도수가 심각하게 높은 것 같았다. 그제야 문득 몇 방울로도 취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쩐지 독하더라니. 그래서 점원이 망설였었구나.

“이미 마셔 버린걸요.”

세상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런가요?”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가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음식은 금세 사라졌다. 애초에 나 혼자 먹을 양이었으니. 그는 말없이 앉아 나를 보다가 자기가 마실 술을 주문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또 혼자 조금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내 인공정령 젠이 내게 다급하게 말을 걸어온 것은.

-주인! 피해라.

“……응?”

“왜 그래요?”

“아니…….”

-그자에게서 살기가 느껴져. 위험한 자다. 그리고 저 눈. 혼혈이군.

“……어어?”

로브를 쓴 남자가 내 인공정령의 기운을 느꼈는지 멈칫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아니, 설마. 하지만 확실히 로브도 입고 있고.

……다니엘?

-나는 분명 내가 있던 왕궁 기록실에서 저 인간을 본 적이 있다, 주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젠이 로바인 왕궁에 있던 인공정령이었다니.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말로, 나는 눈앞의 남자의 정체를 확신했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로바인. 분명해.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있었군.

“…….”

역시.

이윽고 나는 방긋 웃었다.

“뭔가 즐거운 일이 있으신가요?”

내 입가를 보았는지,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네,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 다정한 목소리가 어딘가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깊어서, 나는 떨쳐내듯 밝게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예요?”

“단입니다.”

다니엘이다.

그렇게 겁을 냈으면서도 막상 그를 만나니까 그냥 마냥 좋기만 했다. 심지어 다른 인물들과 달리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너무 기대했기 때문일까?

“단. 그렇군요. 단이라고 불러도 돼요?”

“편히 부르세요.”

조용하게 답하는 목소리가 참 좋았다.

“목소리 좋네요.”

“취했나 보군요.”

“느낌도, 좋고.”

술을 한 모금 마신 그가 나직하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가 물었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그의 작은 미소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속삭이듯 답했다.

“리샤.”

그리고 손을 들어 내 시야 속 그의 로브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가볍게 선을 그렸다.

“그나저나 그쪽. 느낌이 밤하늘 같아요.”

“밤하늘이요?”

원작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는 밤이었다. 그가 암살길드장으로서 누군가를 죽일 때, 그는 마치 상대를 잠재우듯, 움직였다. 내 손끝이 그와 나의 시야에서 아래로 멀어진다. 손을 툭 떨구며 덧붙였다.

“네. 가을밤 같아요.”

가을날의 밤처럼, 어딘가 시원하고 아늑하면서도, 쓸쓸한 느낌. 맹하니 이어지는 내 말에, 유일하게 드러난 그의 입가가 느릿하게 무뎌지기 시작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그 입술을 보며, 나는 아주 흐리게 미소 지었다.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조금 느리게 중얼거렸다.

“재밌네요.”

“제가요?”

“네.”

“그렇군요.”

우리 주위에만 결계가 쳐진 것처럼 주위의 아무도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것도 그의 능력일까?

“그럼 많이, 봐 둬요.”

나는 그에게 느슨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부드럽게, 조금은 서글프게 말했다.

“……오래는 못 볼 테니.”

그는 아무 답이 없었다. 그대로 말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가 왜 계속 나와 대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더는 정말로 취할 것 같았다.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내 친구가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하네요.”

동요 없던 남자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입매를 더 끌어당겼다.

“……친구라.”

“네, 친구요.”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그의 정체를 안다는 말에는 동요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곳에 관심을 보인다. 그대로 그를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또 봐요.”

* * *

보랏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다니엘은 그 눈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여자가 떠난 자리를 배회하던 시선이 마침내 거두어졌다.

“…….”

가장 독하기로 소문난 술이 목을 축였다. 그리고 그는 무도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의뢰를 하나 마친 차였다. 혈향이 날 것처럼 붉은 와인을 머금었으나 맛은 없었다. 그때 맑은 음성이 귓전을 때렸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그 여자가 있었다. 르페르샤 황녀.

흑보랏빛 베일의 언저리를 따라가던 시선은 사라진 향내의 흔적을 따라 짙어졌다. 하얀 목덜미가 금세 베일에 가렸다. 향은 사라진 뒤였다. 그는 잠시 목마름을 느꼈다. 황녀의 눈물을 보고 싶어 하는 친구 헤레이스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눈물은 어쩌면 헤레이스를 완벽하게 취하게 할지도 모른다.

라파엘리스. 그 병 때문에.

그 병에 걸린 자의 눈물은 정령의 힘을 가진 자에게 유혹적이었다.

‘마치 술처럼.’

다니엘이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다정한 듯 무심한 시선으로 찰랑이는 술을 응시하다가, 그가 한 번에 그것을 삼켰다.

‘헤레이스. 우리에게는 정말로, 위험한 상대인 것을.’

특히나 헤레이스에게는. 그는 친구를 지켜야 했다.

‘치우려고 황태자의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하지만 황태자가 관심을 보였다. 의뢰를 넣은 주제에. 그리고 놀랍게도 주점에서 그녀를 만났다. 완벽한 우연이었다. 발견하자마자 접근했다. 그리고.

“목소리 좋네요.”

“취했군.”

“느낌도, 좋고.”

로브 안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의 눈에는 로브 안의 그녀의 표정이 전부 보였다. 그늘이 져서, 그녀의 맑은 보라색 눈이 흑보라색으로 보였다. 불길한 빛깔이었다.그는 허공에 작게 선을 그리는 손짓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쪽. 느낌이 밤하늘 같아요.”

“밤하늘이요?”

어째서일까.

“네. 가을밤 같아요.”

그는 그녀를 만나 하려했던 일을 아주 잠깐, 미루었다. 반쯤 취한 듯 몽롱한 낯이, 이상하게도 보기 좋아서. 나른한 목소리가 어딘가 그리움을 담고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하려던 것을 멈추지 않는 그는 조심스럽게 일을 미루었다.

“재밌네요.”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종류의 직감에는 따르는 것이 좋았다.

“제가요?”

“네.”

“그렇군요.”

그녀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많이, 봐 둬요. ……오래는 못 볼 테니.”

그는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건너편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와 새근대는 소리는 좋은 안주였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는 볼 수 없겠지만. 병에 걸린 것을 의미하는 건지, 정말로 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처연하면서도 천진한 말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순간이었고, 침묵이었다.

“저기요. 내 친구가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하네요.”

그에게는 물 같은 술인데도, 취한 듯 한 번 웃을 수 있었을 만큼.

“……친구라.”

“네, 친구요.”

그는 조금 궁금해졌다. 그녀는 과연 인공정령을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알고 있는 걸까, 하고. 그리고 그것은 꽤나, 그에게 호감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또 봐요.”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향기를 오래 더듬게 만들었다. 그는 그날 꽤 긴 시간, 그 순간에 머물렀다.

* * *

어떻게 된 것인지 숙취가 없었다. 심지어 평소보다도 더 개운했다. 나는 문득 조금 웃고 말았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 말을 남겼는데. 찾아올 것이다. 다니엘은. 그간 긴장했던 것에 비해 괜찮은 시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안 떨었고.”

오히려 그 로브 안의 얼굴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음, 취해서 그랬던 건가? 뭐 내 입장에서 보면 황태자야말로 최종 악역이니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아린이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어두운 것이…….

“무슨 일 있어?”

“그것이……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셨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뭔가 입질이 온 건가? 좀 늦긴 했는데 왜 불렀을까. 어쨌든 바라던 소식이기는 했다.

“그래. 그럼 가야지.”

다니엘하고도 괜찮게 만났으니까, 황태자와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린 덕분에 준비는 금세 끝났다. 이윽고, 나는 황태자궁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어서 와, 누이.”

특유의 서늘하고도 매끄러운 말투로 황태자가 나를 반겼다.

“…….”

나는 그를 잠시 보았다가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목례했다.

* * *

“린드 부인의 차야.”

“감사합니다.”

황태자 라빌로프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는 르페르샤를 미묘한 시선으로 일별했다. 이토록 말끔하게 정중한 황녀라니. 이전엔 확실히 차갑고 인형 같아서 재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수수께끼 같았다.

‘물러진 건가. 아니면 여유로워진 건가.’

어느 쪽이든 흥미롭다.

“어떤가, 누이? 린드 부인의 차는 만들기도 어렵고 우리기도 어렵지만 맛은 으뜸이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누이, 오늘 이리 부른 것은 몇 가지 정리할 것이 있어서다.”

“정리할 것이요?”

라빌로프는 그가 꺼낼 이야기를 들은 후의 그녀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는 가능한 한 나긋나긋한 어조로 서두를 열었다.

“폐하께서 내게 명하신 일이 있거든. 누이가 헛소문에서 벗어나도록 도우라고 하셨지.”

유진 드 볼턴 경과 카인 드 아이릭 공작이 합세한다는 말에 황태자는 가볍게 수락했다. 뛰어난 기사인 볼턴 경과 한때 황태자가 황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를 썼던 아이릭 공작. 황태자는 그들과 황녀의 관계에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소식에, 너는 어떻게 나올까, 르페르샤.’

라빌로프의 눈이 잠시 서늘하게 빛났다.

* * *

“그렇군요.”

나는 라빌로프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황제가 르페르샤 황녀를 걱정하고 있구나.’

원작에서 그렇게 철벽을 치면서 무조건 배척했으면서. 좀 아니꼽기는 했지만, 지금은 황태자에게 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전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황태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무리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나는 침묵을 끊고 입을 열었다.

“무리?”

황태자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잘생겨도, 표정이 저렇게 비인간적이면 소름부터 돋는다는 것을.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너무 겁먹은 것을 들키지도 않고, 적당히 거래도 할 만한 대상이 되어야 했다.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 헛소문, 쉬이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요. 이유는 아시겠죠?”

언니의 악녀 소문의 시작은, 언니의 어머니인 리시안 바누스였다. 그리고 그 소문은 언니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강력한 저주처럼.’

외부인 출신인 유진이나 세상사에 무심했던 카인이라면 모를까, 황태자라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문득 유진과 카인을 떠올렸다. 어제, 언제까지고 곁에 있겠다고 하는 그들에게 내가 뭐랬더라?

제게 매여서 자유를 포기하시는 건 바라지 않아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열심히 말했는데, 가만히 듣던 둘의 표정이 너무 참담해서 멈췄었다.

‘그래도 원작에서는 떨어뜨려야 하는걸. 그런데 마침 잘 되었네.’

나는 악녀 소문을 지우는 일에 대해서, 그들에게 적당히 일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이유라.”

그렇게 그들을 곧 시작할 원작에서 떨어뜨릴 방법을 찾아서 안도하던 차, 가만히 내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 하던 황태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리하지 말라고? 어차피 불가능할 테니까? 괜한 걱정을 하는군, 누이.”

황태자는 무료한 표정이었다.

“걱정 마, 누이. 두엇을 본보기로 처벌만 해도 많이 수습될 거다.”

라빌로프는 어딘가 무료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와 눈을 맞추며 답했다.

“그래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보다 전하.”

“음?”

나를 살피던 라빌로프가 답했다.

“저와 거래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그의 냉막한 낯에 점차 미소가 번졌다. 흥미가 동한 듯한 미소였다.

“확인차 묻는 건데, 누이가 지금 내게 거래를 하자고 한 건가?”

“네.”

“혹시 미친 거야?”

나는 사근사근함을 가장하며 물어 오는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말끄러미 마주 보다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아니라면, 겁을 상실한 거로군.”

“아니에요. 저는 그저 전하께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이에요.”

“…….”

“아리엘 랭턴.”

순간 나를 덮치는 기세가 달라졌다.

“랭턴 가의 영애가 드디어 사교계에 데뷔하신다면서요. 기다리고 계시죠?”

“어떻게 알았지?”

황태자는 기세를 죽이지 않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나는 그 섬뜩한 모습에 겁먹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어릴 때는 저도, 전하의 동향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누이가?”

“네. 랭턴 가의 별장에 유독 많이 드나드셨던 것을, 사실 저 말고도 꽤 많은 분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원작에서 그가 아리엘에게 제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들켜버렸던 것이고 말이다. 그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긴 하지.”

나는 뻔뻔하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여유로운 척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제가 전하의 ‘누이’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황태자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하지만 계속해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눌리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단언하건대, 전하께선 앞으로 그분을 괴롭게 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가 나를 죽여 버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연애를 해보신 적이 없으니까요.”

폭발하던 기세가 멈칫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누이?”

“어긋나기 참 쉬운 관계라는 거지요. 그러니 도와드릴게요.”

그에게 완벽하게 숙였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황태자는 이제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성공한 것이었다.

“제 진정한 자유와 전하의 귀한 분과 전하와의 관계를 두고 거래하자는 겁니다.”

“…….”

그것은 참으로 놀랍도록 선명한 변화였다. 황태자는 황제와 달랐다. 그는 살벌한 기색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말했다.

“구체적으로, 뭘 돕는다는 거지?”

나는 조금 눈과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가 무언가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벌한 모습인데도.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가 말했다.

“혼자서 지내오신 여성분이라니, 제가 좀 더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섬세하게 다가가셔야 하겠죠. 실수하실 만한 걸 그때그때 짚어 드릴게요. 두 분이 행복해지시도록.”

이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내밀 수 있는 마지막 패였다.

“기한은 지금으로부터 4개월이에요.”

2개월째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4개월. 황궁 체류 기간을 3개월 더 늘린 것이다. 원작을 활용할 수 있도록. 어차피 알던 내용도 아닐 테지만.

“이유가 뭐지?”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한 말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이는 행동을 여러 모로 바꾸고 있지. 내 생일날 행동도 갑작스러웠고 말이야. 정말로 원하는 게 뭔가? 그리고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반목하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 말은.”

라빌로프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죽일 생각이셨잖아요, 저를.”

담담하게 답하자 황태자가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거 봐, 이거 봐! 죽이려고 했다고 딱 말하네!

“그야, 저는 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존재였으니까요.”

라빌로프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황녀가 아니었다면 벌써 누군가에게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저를 죽이려 하셨을 거라 확신했어요.”

라빌로프의 얼굴에 무의미하게 걸쳐져 있던 미소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러니 자유를 주세요.”

나는 재차 말했다.

“제가 꿈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니.”

라빌로프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소 낯선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흠. 그렇단 말이지.”

조금 귀찮은 표정으로 고민하던 그가 이윽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려요.”

“무얼.”

어째 조금 묘한 눈빛이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연스럽게 품에서 준비해온 마나 공증 계약서를 꺼냈다. 구두로 끝내면 곤란하지. 목숨 걸린 일인데.

“…….”

그걸 보고 잠시 말이 없던 라빌로프가 처음으로 조금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큭, 하고 오글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누이, 이게 뭐야?”

“계약서요.”

“아, 나를 못 믿으시겠다?”

“그냥 믿을까요?”

네가 그러라면 그럴게, 같은 어조로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주 좋은데.”

그는 의외로 흥미가 가득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리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는 그 옆에 이미 되어 있는 내 서명을 보고 또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그럼.”

“또 뭐지?”

라빌로프의 얼굴에서 흥미로운 기색이 차츰 가시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찻잔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먼저. 편지를 보내볼까요.”

“……누이. 혹시 조금 미친 건가?”

나는 그의 어이없어 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랭턴 영애가 수도로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죠?”

“……25일.”

한 달 가량도 아니고 25일이란다. 시간을 말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조금 웃긴 것을 감추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고민이 되시는 게 뭔가요.”

한참 후, 황태자는 말했다. 자신이 정체를 감췄다는 것을. 그리고 덧붙였다.

“참고로, 지금부터 말하는 것들이 밖으로 새면, 누이는 죽는 거야.”

“당연한 말씀을요. 비밀은 엄수해야죠.”

지나가듯이 하는 살해 협박에 살이 떨렸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말했다.

“25일 안에, 전하께선 영애의 마음도 열고, 정체도 자연스럽게 밝히시는 겁니다.”

그리고 수도에서 처음 만날 때, 완벽하게 멋진 모습으로 맞이하는 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흠.”

내 말이 일리 있게 여겨졌는지, 미심쩍어하면서도 라빌로프는 일단 편지지를 가져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이고 살해 협박과 함께 의구심을 내비쳤지만, 내가 예전에 봤던 영화와 소설들을 근거로 여유로운 척 코치하는 말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연애편지를 쓰는데 부하한테 하는 말투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이건.”

“그건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 아리엘 랭턴 영애는 그 별장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연애를 책으로 배웠을 거라는 얘기죠.”

나를 흥미로운 사기꾼 정도로 깔아 보던 그의 눈에 미약한 깨달음이 스쳤다. 나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너무 잘 풀려서 무서울 지경이다. 아니, 달려들어 보기는 했는데 곧바로 이런 광경을 연출하게 될 줄은 몰랐다.

황태자는…… 음, 참으로, 훌륭한 학생이었다.

“말해. 이다음은 어떻게 쓰라는 거냐.”

“처음 쓰는 것인데 뭘 그렇게 길게 씁니까? 안부 인사 정도면 충분하죠. 한 번만 쓰고 말 것 아니잖아요, 전하.”

“흠.”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의 눈빛을 보았다. 편지를 쓸 때는 봄날의 훈풍이 부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순간순간 집착 어린 번뜩임이 공존했다. 지켜보다 보니 소름이 돋았다. 조금 낮아지려던 경계심이 절로 바싹 끌어 올려졌다.

아, 이 놈이 그 놈이 맞구나.

“그럼, 답장이 오면 불러 주십시오, 전하.”

이 ‘편지로 연애 돕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고개를 휙 들어 나를 독사 같은 가는 눈으로 살피는 걸 보면, 어쩌면 내가 그냥 공포로 심장 떨려서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부르겠다.”

한참 만에 가늠하던 시선이 나를 떠나갔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미약한 신뢰까지 담기에 이르렀다. 신뢰를 얻어도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편안했다.

* * *

황태자와 독대한 날 이후로는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웃음이 늘었다. 그러자 황녀궁의 분위기도 좀 더 좋아졌다. 그렇게 3일.

“여기가 천국 아닐까?”

나오는 음식들은 최고급. 거기다 나와 비교적 데면데면하던 이들과도 친밀하게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데굴데굴 굴러도 침대는 구김살 없이 나를 포근히 받아 주었다.

“아, 좋다!”

오늘은 18번째 기억을 찾았다. 기억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를 토했으니까. 황태자 문제는 아리엘 쪽 일을 돕는다는 아주 좋은 방법으로 대처하기 시작했으며, 다니엘과는 인공정령으로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어제, 나는 유진과 카인을 내게서 얼마간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아쉽지만, 내가 앞으로 황태자를 자주 봐야 하는걸. 일이 잘 된다 싶으면 그때 봐도 되니까.”

황궁 밖의 내 소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들은 창백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부탁했다. 혹시 그 소문들에 대해 조사해줄 수 있느냐고. 아마 오래 걸리겠지. 곁에 있겠다고 하기에, 젠을 보여주기도 했다. 저는 저를 지킬 테니, 두 분은 가서 제 명예를 위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하면서. 그들이 어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좋아. 이제 재빨리 여주와 남주를 이어주자. 그러면 원작이 진행될 필요도 없을 테니.’

히히. 완벽해! 똑똑하다!

“나 너무 수고한 거 같아. 그러니 오늘까진 완벽하게 천국을 만끽해야지!”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으며 침대와 사랑에 빠지듯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나는 다시 주점으로 향했다. 다니엘을 만나러. 저녁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또 몰래 나온 길. 굳이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블란쳇 거리를 혼자 거닐기 시작했다. 다니엘과 마주치기 좋도록.

“오오.”

수도의 치안은 훌륭했다. 순찰하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보였고, 거리는 깨끗했다. 시장에 가까워지자 거리는 활기를 더했다. 소동이 일 만하면 기사들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어서 큰 소동으로 번지지 않게 하고 있었다. 가볍게 감탄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닭꼬치?

나는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꼬치를 파는 가게 앞으로 달려갔다. 사실 아까부터 조금 몸이 늘어지는 느낌이었지만 하도 반가워서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녕하세요. 꼬치 하나에 얼마 하나요?”

흥분해서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꼬치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금화를 건넬 수는 없었으니까. 시무룩해져서 미련 가득한 눈으로 꼬치를 보다가 어렵게 발길을 돌렸다.

“환전을 해야 하나.”

하지만 은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할 일이 있는데 환전하자고 궁에 다녀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잠시. 나는 이내 시장 곳곳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왁자한 분위기 자체가 기분을 들뜨게 했다. 나로서는 신기한 풍경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눈에 띄는 것이 있어 다가갔다.

“와, 할머니. 이거 직접 만드신 건가요?”

“그렇지. 처자도 하나 보고 가.”

“음, 돈이 없어서요. 다음에 용돈 받으면 다시 올게요.”

“허이구. 그래, 그럼, 이거 가져가.”

작은 가판대에 아기자기한 소품을 놓고 팔고 있던 할머니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건강해지는 보석이야. 처자 얼굴이 아주 창백한데.”

“어…….”

얼굴이라는 말에 확인해 보니 나도 모르게 모자가 살짝 뒤로 넘어가 있었다. 할머니는 날 안쓰럽게 보며 인상을 찡그리셨다.

“음, 괜찮은데요.”

“식은땀도 흐르는데 무슨. 쯧쯧. 어여쁜 처자가 아주 하얗게 질려 있네그려. 그냥 가져가. 나는 하나 더 있으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보석을 받아 들었다. 딱 봐도 모조품이었지만 반질반질한 것이 할머니가 품에 지니고 자주 만지셨던 것 같았다.

“이렇게 귀한 걸.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할머니.”

“그려.”

할머니가 뿌듯하게 웃으시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자리를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 로브를 더 깊숙이 고쳐 쓴 뒤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환불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아! 비싼 곳.”

멍청하게도 그제야 떠올랐다. 아주 비싼 물건을 파는 곳에 가서 하나 사고 거슬러 받으면 되는 것을. 나는 할머니가 보지 못할 곳까지 가서 보석 상점을 찾아냈다. 그리고 작은 루비 몇 개를 사고 거슬러 받은 돈을 들고 할머니에게 돌아갔다.

“할머니.”

“허, 숨 좀 고르고 말혀.”

“이거 다 주세요.”

활짝 웃으며 말했지만 어째 몸이 축축 늘어지는 듯했다.

“여기, 용돈 받아 왔거든요.”

“으잉?”

할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격을 듣기도 전에 금화 한 개에 버금가는 돈을 전부 할머니께 드렸다.

“남는 돈은 아까 주신 건강해지는 보석 값이에요.”

치안이 좋기는 하나 금화를 주면 어쩌면 할머니에게 불편한 일이 생길 수 있었다. 하여 루비를 사고 거슬러 받은 돈으로 값을 치른 것이었다. 할머니가 뭐라 하기 전에 나는 할머니의 모조 액세서리들을 모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팔찌의 아공간으로 쓸어 담았다. 할머니는 아이구아이구 소리만 내시다가 내가 일어나자 날 보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찡긋 웃고서,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요즘 처음 왔을 때에 비해서 몸이 어째 자꾸 늘어지고 힘이 들었다. 고통을 느끼지를 못하니, 가끔 다른 것에 신경이 쏠리면 이렇게 몸 상태에 대해 잊고는 했다. 옅게 미소를 지으며 쓸어 담은 것들 중 탁한 녹색 보석이 박힌 핀을 꺼내 머리에 꽂았다.

조금 쉬었다가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여 잠시 섰는데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체력 관리를 못 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려는데, 순간 누군가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붙잡아 준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서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런. 조심하셔야죠.”

로브를 쓴 남자.

“단?”

그가 저번에 알려 준 가명을 불렀다. 그리고 안긴 채로 아래에서 보이는 얼굴에 나는 눈을 못 떼고 있었다.

‘와.’

일순 생각조차 멈추었다. 나는 더듬더듬 생각을 이으며 눈을 깜박였다. 허. 그늘진 모자 안에 있는데도 훤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몽롱하기만 하고 어지럽지는 않네. 우리 미남들 덕에 나도 좀 익숙해졌나봐.’

만약 그들보다 다니엘을 먼저 보았다면 진심으로 기절을 밥 먹듯이 했을 것이다. 보석안이 눈에 확실히 띄었다. 보석안은 매일 눈의 색이 다르게 보이는 눈을 말한다.

“오늘은 눈이 검은색이네요.”

내가 말하자 그가 정갈하게 미소지었다. 눈에 특별히 온기가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따스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 묘한 느낌에 빠져 있는데, 그가 물었다.

“혼자 나왔어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다정하지만 역시 어딘가 서늘했다.

“음, 네.”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흠, 위험하지 않나요. 왜 혼자 나왔어요.”

“…….”

널 보러 혼자 나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더니 내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 빼며 말했다.

“그래요, 인공정령이 있을 테니. 그건 그렇고 아까…….”

“네.”

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왜인지 내 머리핀이 있는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 환궁하는 것이 좋겠어요, 리샤.”

“어! 아니에요.”

급히 부정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쪽 끝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그와 맞추고 그의 손에서 팔을 뺐다.

“안색이 안 좋은데요, 리샤.”

“괜찮아요. 그리고 단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나를 꿰뚫을 듯 지그시 보고 있는 그를 마주 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몸은…… 아까보다 나아졌으니 괜찮아요. 혼자 다닐 수 있어요.”

“제가, 그 상태인 리샤를 혼자 보내길 바라나요?”

“네, 정말 괜찮으니까요.”

사실은, 아니오! 맨날 같이 놀자고 매달리고 싶지만 나는 밀당을 하기로 했다. 너무 대놓고 들이대면 의심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놀러 나온 것으로 치는 것이다. 빨리 친구가 되어야 하니까.

“그렇군요.”

얼핏 보이는 그의 표정이 굉장히 묘했다. 의심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더는 그를 보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웬 여성 한 명이 어떤 깡마른 왈패의 거짓 눈물에 흔들리는 광경을 보았다.

“위험해 보이네요.”

나는 아직도 나를 지그시 보고 있는 다니엘에게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그가 내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신매매?”

작게 중얼거리자, 다니엘이 나를 가만히 보았다. 벌써 수작질에 말려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혀를 차며 바로 움직였다.

“……리샤?”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그대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파! 이거 놔!”

그새 왈패는 여인을 끌고 가려고 슬슬 힘을 쓰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젠.”

나지막이 정령을 부르자, 솨아 하고 검은 아지랑이가 빠르게 형상을 이루었다.

“엇! 이게 뭐야!”

“꺅!”

단번에 여인에게서 왈패의 손이 떨어졌다. 검은 독수리는 내 의지를 읽어 왈패를 다리에 쥐고 들어 외진 골목 안쪽으로 던져 버렸다.

“뛰세요.”

그녀에게 말했다. 우물쭈물하던 여인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울면서 왔던 길로 뛰어갔다. 뒤늦게 온 순찰 기사들이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녀를 돌아보다가, 나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로브의 모자가 살짝 뒤로 넘어간 상태로, 그와 나는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날 향해 더 공개된 그의 얼굴 정면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가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고 있었다.

“무모했지만, 통쾌하군요.”

골목 어귀에 서서 한 차례 찬란한 웃음을 터뜨린 다니엘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가 부드럽고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령을 아주 잘 다루네요, 리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어딘가 깊고 공허했다. 나는 내가 그의 원수인 황가의 황녀라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인공정령으로 일구어낸 호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데, 무언가 속이 상하고 말았다.

아니, 뭐야, 왜 이래.

“리샤?”

“아…….”

다니엘은 뭐라고 말을 하다가 조금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힘겹게 검은 눈에서 눈을 뗐다.

“괜찮아요?”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은 어조와 표정으로, 다니엘이 말했다.

“데려다줄까요? 황궁에.”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정체를 안다는 뜻이었다. 말간 시선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그에게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서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 기사와 공작을 부르는 것은요?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아주 다 안다고 티를 낸다. 이건 알아달라는 말이지. 심지어 유진과 카인을 지칭하면서 존칭을 붙이지도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신분인 걸 티내는 것 아닌가. 내 정령이 그의 신분을 알려줬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뇨.”

놀란 표시도 내지 않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네요.”

생각이 바뀌길 바랐던 건지 다니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헤레이스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약간 냉랭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헤레이스는 일이 갑자기 몰려서 아마 바쁠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입을 엄청 불퉁하게 내밀고서 다짜고짜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군요.”

“네. 그나저나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정말로 괜찮답니다.”

다니엘의 얼굴의 일그러짐이 조금 더 깊어졌다.

“혼자 더 놀다가 돌아갈게요. 혼자 다닐 수 있으니까 단은 볼일 보세요.”

다니엘의 얼굴의 일그러짐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것까지도 선이 아름다웠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으윽, 저 얼굴이 너무 좋았다!

“글쎄요. 제 볼일은 리샤에게 있는 거라서요.”

그리고 그 말에 나는 이상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요?”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던 그가 아까같이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좋은 술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오늘은 그냥 데려다줄 생각이었지만요.”

“수, 술…… 친구요?”

“음, 네.”

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자,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식간에 기분이 풀려서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가 순간 느슨하게 내려갔다.

“가요!”

“……리샤?”

“술친구라면서요! 친구!”

헤헤. 야호! 친구래!

나는 기뻐하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가 움찔하며 경악하는 시선을 보냈다.

“친구니까, 이래도 되는 거 아니겠어요! 어서 가죠!”

“허…….”

기가 막힌 소리를 흘리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겁니까?”

“단이랑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

움후후후후!

그러자 그가 매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주 이상하고 신기한 것을 보듯.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그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걸어요.”

우리는 그대로 달빛 정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검은 물결이 하늘을 덮기 전에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품에 넣어 둔 돈주머니를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생각 끝에 우선은 아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멀리 그 정보 길드의 술집 ‘달빛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눈앞이 또 핑 돌았다.

‘아, 정말 체력이. 언니. 이런 몸으로 그 모든 고초를 겪으신 거였군요.’

속으로 슬퍼하기도 잠시, 몸이 슥 들리는 것을 느꼈다.

“힘들면 말을 해야죠.”

다니엘이었다. 안긴 채로 눈을 맞추자, 다니엘의 눈이 보였다. 아까는 검은 색이었는데? 지금은 암녹색이다. 가까이서 봐서 녹빛이 이제야 보인 것일까?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자주 이러나요?”

“음, 아니에요.”

사실은 맞지만, 심각한 일도 아니니까.

“흠.”

나를 안아 든 팔이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동안 시야가 맑아졌다. 나는 눈을 깜박여 맑아진 시야를 확인했다. 로브 모자가 벗겨져 있었다. 나를 보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훅 짙어졌다가,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툭 물었다.

“무겁지 않아요?”

그는 답 없이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렸을 뿐이었다.

뭐, 뭐야, 무겁다는 건가?

“내려줄까요?”

되레 그리 묻는 그에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짐짓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런 행운을 걷어찰 리가!

“그래요.”

“단은 무겁더라도, 저는 단 품이 따스해서 좋으니까요.”

나의 덕심이 환호하고 있는 이 소리를 당신은 못 듣겠지!

순간 그가 멈칫했지만 바로 이어진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그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몸은요?”

“아, 괜찮아요.”

뭔가 더 물어볼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하긴, 정보 길드장이 친군데 다 알았겠지. 그는 그저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 나를 내려놓고 자기 몫의 술과 부드러운 빵 두어 개를 주문했을 뿐이었다. 그에게서 빵을 하나 받아 들고서 내가 물었다.

“과일주예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술을 한 모금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의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과일주면, 마시려고요?”

나는 눈을 데굴 굴렸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빵을 한 입 먹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정말 상태가 괜찮아졌나 보네요.”

“네. 이제 괜찮아요. 그냥 체력이 조금 부족한 것뿐이니까.”

“그런가요?”

“네. 아, 덕분에 바닥에 눕는 건 면했어요. 고마워요, 단.”

그가 됐다며 슬쩍 웃었다. 미친. 순간 사람 넋을 빼 버릴 정도로 잠깐의 그 미소가 눈부셨다. 나는 가출할 뻔한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말했다.

“신기하네요. 그런 데서 마주치다니.”

“그건 제가 눈이 좀 좋아서.”

“눈이 좋다니요?”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요.”

“무슨 말이에요?”

그는 그저 슬쩍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무래도 날 발견하고 거기에 왔다는 말 같은데.’

나와 다시 볼 생각을 하기는 했다는 뜻이었으므로.

“어쨌든 다시 봐서 좋네요.”

“그래요.”

그는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신기했다. 이제 두 번째 보는 건데 그와의 대화가 참 편했다. 침묵이 편한 상대는 만나기 어려운데. 그래도 이제 술친구도 되었고! 물론 그냥 말만 그렇게 한 거라는 건 알지만 말이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저 문득 그가 쓸쓸하게 보였을 뿐이다.

‘책에선 이보다 훨씬 더 비밀스럽고 얄미운 느낌이었는데.’

이토록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도 말만은 편하게 나가는 건, 첫 만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비가 내릴 때 우산을 쓰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공간에만 소음이 빗겨 가고 있었다. 동떨어진 느낌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별말 없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무리해서 말을 걸지 않고 그 시간을 즐겼다. 사실 오늘은 좀 지치기도 했고. 그때 가만히 술만 마시던 그가 나를 슬쩍 일별했다. 나는 보고 있던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멈칫한 다니엘이 나를 묘한 눈으로 보다가, 술잔에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을 털어 넣은 뒤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해요?”

“음, 단 생각이요?”

“이런.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함부로 반하면 안 돼요.”

뭐야, 이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하지 않아요.”

내 말에 그가 몹시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표정이었다.

“그러시다면야.”

그 얼굴에 어린 은근한 퇴폐미에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어물거렸다.

“세상에.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냥 있는 것뿐인데요?”

“아니…….”

“왜요?”

나는 가만히 그가 살짝 보이는 눈웃음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홀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이건, 이건 아름다워서 설레는 것과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딱 그 말. 홀리는 것 같은 느낌. 기절이 아니라 코피가 나올 것 같은.

“하, 설마요.”

확실한 것은 그가 이 시답잖은 대화를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홀렸어요?”

작은 소리인데도 귀에 박히는 목소리였다. 즉각 부정하자 그가 속 모를 표정으로 작게 웃고는 표정을 정리했다. 과한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이거 고의 같은데.

“…….”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옅게 미소 짓고 있던 그가 문득 생각난 표정으로 내 팔찌를 가리켰다.

“그 정령. 인공정령 맞죠?”

“그래요.”

그는 알 수 없는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가 절 안다고요?”

“그렇대요. 기록실에서 봤다고 하던데요?”

“아.”

그가 조금 미묘한 눈길로 고개를 기울였다. 혼자 잠시 생각하던 그가 불현듯 내게 말했다.

“인공정령이 진짜 정령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거 알고 있어요?”

“네?”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답했다.

“아뇨, 그쪽은 잘 몰라요.”

“과연.”

진짜 정령은 발견하기도 어렵고, 계약하기는 더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인공정령이라고 그 책에 나와 있었는데.

“리샤가 가진 그 정령은 모델로 삼은 정령이 없다는 건요?”

“네?”

내가 눈을 깜박이자, 그가 의뭉스럽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의 달콤할 정도의 다정함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진짜 정령이 남겨 준 모델이 없으면 인공정령은 만들지 못하죠. 그건 굳이 말하자면, 추억의 정령인데요…….”

“…….”

“모델이 없는 대신, 만들 때 무언가 다른 과정이 필요했겠죠. 특별한 정령이에요.”

“으음.”

그는 잠시 목을 축이고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인정받았다면 좋은 아군을 얻은 셈이니 제 말에 너무 불안해하지는 마세요.”

“불안해하다뇨?”

나는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추억에게 인정을 받았다니, 진심으로 설레는걸요.”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들릴락말락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반하면 곤란한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어진 대화는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젠이라. ‘잠재우다’라는 뜻? 좋은 이름이네요.”

“그렇죠?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그래요. 용맹하기도 하고.”

“맞아요.”

아까 사람을 가볍게 잡아 내던지던 검은 독수리를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젠에게 속삭였다.

‘젠 칭찬 들었네. 좋겠다.’

젠이 조금 퉁명스럽게 그 놈과 그만 대화하라고 하는 것이 들렸다. 가만히 웃으며 소리를 듣고 있자 다니엘이 물었다.

“혹시 대화를 해요?”

“네? 네.”

유하게 웃고 있던 다니엘이 내 반응에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용케 그런 귀한 걸 골랐네요. 자아가 그렇게 강한 인공정령이라니, 축하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단.”

“네.”

“혹시 이 정령, 갇혀 있는 상태인 건가요?”

인공정령에 대해서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라서 갇혀 있다는 의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자아가 강하다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 질문에 다니엘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해요?”

램프의 요정이 떠올랐다. 갇힌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던 그 요정 이름이 지니였던가?

“갇힌 것이 괴로운 건 아니에요?”

“괴롭다면 풀어 주기라도 하려고요?”

그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풀어 줄 수 있어요? 어떻게?”

“…….”

다니엘은 잠시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기운이 빠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다는 듯했던 헛웃음은 점점 즐거운 웃음으로 변했다. 듣기에도, 보기에도 무척 황홀했으나 영문을 알 수는 없었다.

“재밌어요?”

“미안해요, 그저…….”

그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모습으로 답했다.

“마음에 들어서.”

“뭐가요?”

“당신이요.”

나는 어쩐지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아까의 그 숨 막힐 것 같이 홀리는 미소보다도, 지금 이렇게 시원하게 웃고서 툭 던지는 말이 더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그는 별 의도가 없었던 것 같았다. 내가 말이 없자 그가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령이 직접 알려준 이름이니 그건 진짜 이름이겠죠. 그도 당신과 계약하기를 원한 거예요. 지금도 잠잠한 걸 보니, 굳이 거기서 해방시켜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으음.”

어쩐지 부드러워진 어조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겨우 할 말을 찾았다.

“그래도 방법은 알아 두고 싶은데요.”

“어째서요?”

“제가 마음에 들었다면야 다행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일평생 갇혀 있는 건 괴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건 당신 외의 주인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요?”

이 대화를 젠이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다.

절로 술렁이던 가슴이 잦아들었다.

“아니. 젠이 원한다면 그건 상관이 없는데요. 문제는 원하지 않을 경우죠.”

“아하.”

다니엘은 어쩐지 그리 반응하고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어쩐지 목이 타서 점원을 불렀다.

“과일주로 하나 주세요.”

“예.”

주문하고 돌아보니 다니엘이 얼굴을 조금 드러내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동자는 가슴이 철렁할 만큼 신비로웠다. 그걸 멍하니 보면서 나는 지레 찔려 말했다.

“한 잔만 마시려고요.”

“음. 리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한 병이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시간도 늦었고.”

“그렇죠. 시간이 늦었는데 왜 술을 먹어요.”

대화가 뭔가 이상한데.

“목이 타서.”

“흠. 그럼 잠시만.”

대체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꼬박꼬박 답을 해 주었다. 그는 집요한 성격이구나, 하면서. 다시 점원을 부른 다니엘이 그에게 뭐라 속삭이자, 점원이 매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뭐라고 했어요?”

“물을 달라고요. 과일도 함께요.”

“……술만 되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

“식사도 되는데, 술만 될 리가요.”

그는 다정하게 대꾸했지만, 어쩐지 날 비웃는 느낌이었다.

착각이겠지?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샤라는 이름, 제 애칭인데 말이에요.”

내 말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우스운 기분으로 말했다.

“좋은 목소리로 들으니까 기분 좋네요.”

사실 아까부터 조금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취한 것도 아닌데. 하긴 오늘 치 체력은 소진한 지 오래였으니까. 그때 주문했던 과일과 물이 나왔다. 자연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물을 마셨다. 물기가 많은 과일이 기분을 환기시켰다.

조금 개운해진 상태로 내가 그에게 말했다.

“돌아가야겠어요.”

두 번째 만남으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 너무 늦으면 좋지 않았고.

“그래요.”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몸을 일으키자 그도 함께 일어나 따라 나왔다.

“리샤.”

함께 걷고 있는데, 편안한 침묵을 깨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인공정령 중에는 예언을 하는 정령도 있거든요. 조건부 예언이지만.”

“오.”

나는 탄성을 흘렸다. 신기하다.

“만약 그 정령에게서 당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사랑에 빠지면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무거운 어조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가능하면 위험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걸 막겠죠.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죠?”

“네.”

그렇게 답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의 기억이 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피를 토했다. 오늘 체력이 바닥 나 있었던 나는 더 대화를 잇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시야가 암전하듯 캄캄해졌다.

* * *

“…….”

반사적으로 받아 든 르페르샤를 보며 다니엘이 살짝 인상을 썼다.

‘오늘은, 가능하면 죽이려고 했는데.’

그를 알고 있다는 인공정령에 대해 듣고 나니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인공정령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본 탓일까.

‘황족인데도.’

그는 오늘도 그녀와 그저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물론 결코 심심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데려다줘야겠지.’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주시지요.”

그것은 놀랍게도 유진 드 볼턴이었다. 황녀의 말에 따르면 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르페르샤가 쓰러지는 순간에 다가온 유진은 확연하게 굳어진 얼굴로 다니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르페르샤를 넘기라고.

“글쎄요. 어떡할까요.”

다니엘이 자연스럽게 로브의 모자를 쓰며 답했다. 돌아온 답에 유진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나 다니엘은 빙긋 웃으며 르페르샤를 단단히 안고 있을 뿐이었다. 유진이 날을 세웠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은 당신이 함부로 손대실 분이 아닙니다.”

“제가 함부로 손을 댔다고요?”

“……아닙니까?”

이유 모를 불쾌감을 감추며 유진이 말하자 다니엘이 슬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죠. 쓰러진 여인을 두고 가는 것이야말로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유진의 날카로운 모습이 자못 볼 만했으나 다니엘은 이내 무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귀한 여인의 정체를 들은 적이 없으니, 아는 것 같은 그쪽에게 맡기는 것도 좋겠죠.”

르페르샤는 탈진해서 쓰러졌다. 다니엘은 그녀의 입가의 피를 살살 닦아 주며 피를 토할 때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낭패감. 딱 분명히 그 정도였다. 그러니 그는 딱히 염려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 얼른 쉬게 하는 것이 좋을 테니.”

유진은 다니엘에게서 조심스럽게 르페르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인사 한마디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시종 웃는 얼굴로 보던 다니엘이 한참 뒤에야 움직였다.

“황녀의 기사로군.”

늘 유들유들해보여도, 자유기사 볼턴 경은 누군가와 관계를 깊게 맺지 않는 인간이었다. 황녀에게는 더더욱 그랬고. 그랬던 사람이 저렇게 바뀌었다.

“주인을 보는 눈은 아니었지만…….”

유진이 은연중에 풍기던 소유욕 짙은 분위기를 떠올리며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가 미세하게 미간을 구겼다. 검은 독수리 정령을 떠올리며 다정하게 웃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인정한다. 르페르샤 황녀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달갑지 않게도.

천천히 사라지던 그의 신형은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끔찍하게도 나의 비밀 가출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황녀님!”

“으음. 알았어, 리니. 다신 혼자 나가지 않을게.”

망했다.

“정말이시지요? 아무리 마음이 힘드셔도 위험하게 그러시면 안 돼요. 꼭 기사 분 한 분을 대동하시는 거예요.”

“응, 알았대도.”

아린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나는 시무룩해진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들에게 답했다.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알아. 알고말고.”

정말 망했다.

이로써 다니엘을 만나기 위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빨리 그의 선 안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유진은 어떻게 그 시간에 날 데리고 돌아온 걸까?

그는 심지어 날 안아 들고 황녀궁의 정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잠들지 않았던 몇몇 궁인들에게 서늘하게 주인을 잘 모시라고 일갈한 뒤, 의사가 있는 곳의 침대 위에 나를 올려 두고 사라졌다.

그렇게 내 무단 외출을 궁인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조심할게. 약속해. 그보다 나 배가 고픈데…….”

“앗!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겨우 말을 돌리는 데에 성공하고서 나는 두 시녀를 돌려보냈다. 이윽고 나는 내 방에서 젠과 놀아 주기로 했다.

“젠.”

슈와악 하고 나온 아지랑이가 검은 독수리의 형상을 이루었다. 아린과 리니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이야기 좀 해야지. 가만히 다가와 얼굴을 내 손바닥에 들이미는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잠시 실실 웃으며 젠의 머리와 몸을 살살 쓰다듬어 주다가 내가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젠, 어제 밤에…… 들었어?”

끄덕.

“그렇구나. 혹시 하나 물어봐도 괜찮아?”

젠은 이번에는 소리 내어 답했다.

-물론이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

-지금은 생각 없다, 주인.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답에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나를 빤히 보는 까만 눈동자가 퍽 고왔다.

“그렇구나.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유를 물어도 될까?”

-네 일기.

나는 젠을 다정하게 보다가, 조금 멀찍이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젠이 말을 이었다.

-궁금한 점이 많은데, 도통 답을 안 해주는군.

“으, 으응.”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려 필사적으로 애쓰며 살짝 웃었다.

“고마워.”

-주인, 왜 까만 인간을 볼 때 뱃속이 조이는 것이냐?

“고맙다, 젠.”

-왜 이렇게 일기에 느낌표가 많은 것이며,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면 말해. 어떻게든 해방시켜 줄 테니.”

그 말에 젠이 드디어 말을 멈추었다. 휴.

-……이상한 인간이다, 너는.

“이상하다니 뭐야.”

짐짓 불퉁하게 대꾸했지만 젠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어쨌거나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구시렁거리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독수리야? 부엉이가 아니고?”

-독수리가 좋으니까.

“그렇구나. 멋지네.”

젠이 품 안에서 바르작댔다. 답답해하는 것 같아 슬며시 놓아주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노크 소리와 아린의 목소리도.

“그럼 또 얘기하자.”

젠은 끄덕이지도 않고 말간 눈에 나를 가득 담고 있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수욱 사라졌다. 나는 들어오는 이들을 반겼다. 잔소리만 빼면 완벽한 주방장의 음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향이 실로 기가 막혔다.

“고마워. 잘 먹을게.”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하자 아린과 리니가 슬며시 웃었다. 꽤나 익숙해진 평화였다.

* * *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는 황태자에게 향했다.

“답장이 왔다.”

“오, 봐도 될까요?”

그는 잠시 움찔했다. 확실히 아리엘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는 조금 더 인간적인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하를 그 분이 요정으로 알고 계시네요?”

나는 짐짓 몰랐던 것처럼 놀라워하며 말했다. 황태자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순간이동으로 지금 당장 오라고 하시는…….”

그의 눈가에 살짝 드리워진 밤샘의 기운을 힐끔 보며 말하자, 황태자가……. 그 황태자가 무려 한숨을 쉬었다.

‘웃으면 안 돼. 근데 웃기다, 좀.’

그러나 이 이상은 놀린다는 게 들킬 것이므로, 나는 진지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슬슬 밝히죠. 더 있으면 배신감이 더 크겠어요. 그, 요정이 아니니까요.”

황태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웃으면 안 돼.

“꽃을 한 송이 동봉한 편지지에 정체를 밝히면서 건국제 날 오라고 초대도 하시는 겁니다. 어때요?”

“꽃? 그건 무슨 의미가 있지?”

꽤나 진지하게 듣던 라빌로프가 무섭도록 의심쩍어 하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일단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건국제에 그녀는 당연히 올라올 거다. 내가 공작에게 말을 흘려 두었으니까.”

아이구, 그러셨어요? 누가 계략남 아니랄까봐!

“그게 더 낭만적이잖아요.”

“무슨.”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그에게 말했다.

“작은 설렘이 큰 설렘을 만드는 법입니다, 전하. 소소한 즐거움을 이렇게 쌓아가면, 요정이 아닌 전하라도, 랭턴 영애께서 전하를 보는 걸 기대하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외로운 분이실 테니 더더욱 기뻐하실 것이고요.”

조금 어색하지만 진솔하게 보이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 분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시는 거죠.”

“…….”

아리엘이 기뻐할 거라는 말에 라빌로프가 그 무기질적인 얼굴에 표정을 띄웠다. 이제 슬슬 저 집착남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어윽, 안 되는데. 저건 날 죽일 생각을 언제든 할 수 있는 놈인데!

어쨌거나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일단 한번 해보십시오.”

“……그러지.”

그렇게 긴장한 라빌로프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네.”

조심스럽게 내놓은 답 이후 침묵이 흘렀다.

큼, 사실 자꾸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진짜 너무 싫고 무서운 놈인데, 편지 쓰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어떤 식으로 써야…….”

나는 황급히 웃음기를 가라앉히고, 이어 말했다.

“너무 정중해서도 안 되고, 가능하면 다정한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건 반드시 지키셔야 하는 건데요, 전하.”

“뭐지?”

“로맨틱해야 합니다.”

라빌로프가 침묵했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뱀 같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일정 이상 표가 나면 안 됩니다.”

정중하게 하세요. 존중. 또 존중!

존중을 열렬하게 강조하면서, 나는 부디 이게 그의 끝을 모르는 집착에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굉장히 혼란스럽고, 미심쩍고, 그냥 죽여 버릴까와 같은 수많은 감정이 라빌로프의 얼굴을 스쳤다.

“알았……어, 누이.”

“네, 전하이시니 분명히 훌륭한 편지를 써 내실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답한 뒤 나는 그에게 내가 직접 고른 녹색 종이를 내밀었다.

“…….”

라빌로프가 조금 웃기게 얼굴을 꿈틀거리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건, 우리 계약서고요.”

우리의 서명 이후 신전의 확인까지 받아 완성된 계약서. 각자 나눠 가지면 끝이다.

내가 이렇게 똘똘해!

그의 몫의 계약서를 건네면서 나는 몹시도 뿌듯해졌다. 나는 기대에 차 있었다. 나는 그의 연애를 돕고, 그는 나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 그가 그것을 받아든 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를 마셨다.

그때였다.

“저도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사례가 들렸다. 콜록거리며 돌아보자 한 사람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질색했다. 가일 후작. 라빌로프 황태자의 측근이자, 황태자와 아주 비슷한 놈이었다. 더 충동적이고 공격적이기는 해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간밤에는 편안하셨는지요.”

“아……. 덕분에요.”

왜 저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 답지 않게.

“언제부터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나?”

라빌로프가 물었다. 조금이지만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대담하게도 가일은 대꾸도 없이 우리 둘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도 별다른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굉장히 가깝구나.’

황태자와 그를 번갈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원작에서 보인 것보다 가까워 보였다. 그사이 내 허락을 받고 계약서를 읽은 가일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를 쏘아보던 가일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보기만 하던 라빌로프 황태자의 입가에도 어느새 그린 듯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급기야 큭큭 거리며 웃고 있는 황태자를 소름 돋는 심정으로 보다가 한숨 소리에 다시 가일을 보았다.

“신전의 공증이라니.”

“네?”

“……아닙니다.”

가일은 아주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용케 꾹 참고 있었다.

그때 라빌로프 황태자가 말했다.

“누이, 이 계약에 후회는 없겠지?”

상냥한 어조였다. 그리고 무언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그럼요!”

뭔가 불길했지만, 계약서 내용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자 가일 후작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나는 둘 사이의 기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일의 몹시 떨떠름한 인사까지 받고 돌아오는 길은 조금 진이 빠졌다.

한숨을 푹 쉬고서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쭉 쉬어야겠네.’

내일은 다니엘을 만나기로 한 날인데 또 어젯밤처럼 체력 딸려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체력 비축을 위해 잠을 자기로 했다.

* * *

쨍그랑!

접시가 깨졌다.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헉! 전하! 괜찮으세요?”

안절부절못하며 달려드는 리니에게 위험하다며 다가오지 말라 손짓했다.

“록스 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울상을 한 리니는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가며 외쳤다. 나야 아픔을 못 느끼니 별 느낌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깨진 건지 손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청소할 도구를 가져온 아린에게 말했다.

“기껏 만들어 왔는데 못 먹게 되었네.”

“전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다시 가져다드릴 수 있는 걸요.”

아린이 자기가 다친 것처럼 아파하며 말했다.

역시 상냥한 아이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을 치우겠다고 하는 아린을 위해 손발을 들어 주었다. 청소가 금세 끝났고, 록스가 달려왔다. 처치는 금세 끝났다.

“전하, 그러고 보니 진통제가 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서랍에 그대로 남아 있는 약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빨리 잠을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일찍 잘게. 다들 좋은 저녁 시간 보내.”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한 뒤, 눈을 감았다. 이윽고 아득한 잠기운이 나를 덮쳤다.

* * *

“오늘은 일찍 잘게. 다들 좋은 저녁 시간 보내.”

록스와 아린, 리니는 잠을 청하는 황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저녁의 난리에 달려온 문 밖의 궁인들도 숨을 죽였다. 이윽고 아린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가 황녀를 살폈다. 그새 잠이 들어 있었다. 새근대는 숨소리에 안도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불과 베개를 정리해 주었다. 리니가 살금살금 걸어가 창의 커튼을 내렸고, 빛이 들지 않도록 예비용 암막 커튼을 더 내렸다. 그리고 식사한 흔적을 소리 나지 않도록 치웠다. 그렇게 황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신경을 쓴 뒤 그들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시녀장 엠마와 리니, 그리고 아린. 시종 몇과 주방장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기사 던도 함께였다. 일명 르페르샤 황녀궁인 모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아린과 리니가 차례로 보고했다.

“분명히 손이 깊이 베이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셨어요.”

“드시는 양도 갈수록 너무 줄어들어요.”

예전에는 늘 자기가 갈 곳이 있다면 진즉에 이런 궁 떠났다고 투덜거렸던 주방장이 머뭇거리며 이어 말했다.

“입맛도 조금 달라지셨는데, 그것이…….”

그가 내민 종이에는 황녀의 음식 취향이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것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걸으실 때 너무 기척이 없으십니다. 그게 소리가 없다기보다는 기운이 없으신 느낌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질이 좋지 않은 귀족들을 만나는 것도 일체 중지하셨죠.”

시종들도 앞다투어 속삭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엠마가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두 명의 기사들이 살금살금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들이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너무 극심한 고통에 오래 노출되셔서,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으로도 느끼지 못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 꺼낸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엠마는 일단 종합적으로 황녀의 생활이 더 편안하도록 세세하게 지시한 뒤 해산을 말했다. 굳은 얼굴을 애써 펴면서 그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모였던 이들은 황녀를 지척에서 돌보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황녀궁의 분위기는 빠르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요즘 깨닫고 있었다. 요즘 황녀가 조금 시무룩하고 긴장도 많이 하고 있었으니까. 유진과 카인을 멀리하는 것부터 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해서 이렇게 정기적으로 모이기로 한 것이다. 궁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황녀 열혈분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역시 잠이 보약이었다. 나는 아주 쌩쌩해진 몸 상태에 참으로 행복해졌다. 맑고 자신 있는 몸 상태와 더불어 오늘은 일정까지 완벽했다.

“낮에 바깥에 나가신다고요?”

“응. 다음 무도회 준비는 간단히만 할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마. 참, 기사도 한 명 데려갈게.”

물론 따돌릴 거지만.

악동의 미소를 속으로 씨익 그리며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리니. 울었니?”

리니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로브와 돈주머니를 확인하고 나서 내가 물었다. 리니는 살짝 놀라더니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하.”

“아니긴.”

잠시 고민 끝에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음을 확인했다. 건국제는 한 달 전부터 이런저런 이벤트들이 많이 행해지는 대대적인 행사였다. 지금은 건국제 한 달 전이었다. 이제 슬슬 구경을 다닐 만했다. 그리고 나도 구경을 가기로 했다. 물론, 다니엘과. 그거 약속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리니를 이끌어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아린도 불러왔다. 둘은 내 밑에 나란히 앉아 눈을 데굴 굴렸다.

“둘 다 울었네. 이거 봐, 이거. 눈 빨간 거. 너희 누가 괴롭혔어?”

“헉, 아니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꼭 말하라고. 그 말 하려고 한 거야.”

살짝 웃으며 말한 뒤 리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아래쪽에서 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니 아린의 눈시울이 또 붉어져 있었다.

이거 뭐지. 감동했나? 고작 이런 말에? 새삼? 왜들 이래?

하지만 그런 기색이어서,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하여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큼, 오늘 우리 착한 아이들이 우울한 날인 것 같네. 그냥 지나칠 수야 없겠어.”

장난스러운 어조를 눈치챘는지 애들이 비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고서, 내친 김에 내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색조 화장품으로 세 개씩.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던 두 시녀가 똑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크윽, 귀엽다. 나는 배시시 웃고서 예쁜 끈으로 포장한 화장품들을 들고 다시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 받아.”

“……네?!”

“저, 전하? 이런, 이런 걸 받을 수는!”

눈앞에 들이대고서야 내 의도를 눈치챈 그들이 경악했다. 나는 벽에 걸린 마법시계를 일별한 뒤 그들이 거절하기 전에 조곤조곤 말했다.

“늘 고마워서 주는 것이니 받아. 정 부담스러우면 앞으로 내가 뭐 가르쳐 달라고 하면 가르쳐 주고 그러면 돼.”

속셈이 없지는 않았다. 그냥 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이 야무지고 귀여운 시녀들에게 생활 전반에 대한 것들을 배우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던 것이다. 요 근래 떠난다, 떠난다 하고 살다 보니, 떠나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연히 생각이 갔다.

그리고 그 결론은, 돈지랄 반, 자립 반이었다. 기본적으로 돈 많이 들고 가서 편하게 살되, 혹시 모르니 이 세상에서 통하는 잡기 몇 개는 익혀 두기로 한 것이다.

‘아리엘의 기연들을 독식하면 필요 없을 수 있겠지만.’

거기에 도움을 좀 준다면 아주 고마울 것이다.

“뇌물이라고 생각해.”

이제 원작 시작 후 3개월까지 4개월은 더 머물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떠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억지로 안겨 준 화장품을 보는 둘의 눈빛이 초롱초롱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그들은 마음을 다잡으며 거절했지만, 정말로 이제는 나가 봐야 했으므로 나는 딱 못을 박았다.

“돌려주면 정말 슬플 거야. 너희 주려고 눈여겨봐뒀던 것이니, 나는 아마 그걸 쓸 수 없을걸?”

결국 둘 다 감사하다고 말하며 받아 주었다. 울먹이는 둘의 머리를 또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뒤, 나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유진에게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사 던을 대동하고서, 정식으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맑은 날이었다. 찬란한 금빛 햇살이 마음을 녹진하게 했다.

“어우 날 좋다.”

아침인데도 광장은 사람들로 굉장히 바글바글했다. 이 정도면 한 번쯤 한눈을 팔 만도 한데, 내가 데려온 순진한 기사 던은 생각보다 기민하게 나를 관리했다.

“던 경, 잠깐 저쪽을 좀.”

“예, 전하. 아무것도 없습니다.”

“…….”

조잡한 시선 돌리기조차 빠르게 눈을 굴리는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를 벗어나려 용을 쓰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청록색의 사나운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일그러졌다. 그는 가일. 황태자의 측근이었다.

윽, 반갑지 않다. 정말.

나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뚝 서고 말았다.

“앞이랑 옆이 막혔네.”

“전하?”

“아니, 아무것도.”

그새 가일은 나와 가까워져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살짝 움직여 나와 기사를 훑었다. 나는 조금 당당해졌다. 경솔하다는 말은 안 듣겠구나 하고.

‘그냥 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네?”

“지금은 한창 준비하실 시간이 아닙니까.”

아, 저녁 무도회 준비 말이군.

오늘 저녁에는 라빌로프가 소문 죽이기의 일환으로 작은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했었다.

“그건 괜찮습니다만.”

그쪽이 무슨 상관인지.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내게 시답잖은 것을 묻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볼일이 있어 나왔어요. 그러는 가일 후작은요?”

“…….”

가일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다는 뜻 같았다. 옆에 선 던 경의 눈초리가 살짝 서늘해졌다. 그가 나서려는 것을 말리며 내가 방긋 웃었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답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일의 눈이 더 일그러졌다. 영문을 모르겠네. 악녀 짓도 안하고, 그거 대부분 헛소문인 것도 조사하면서 다 알았을 텐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어쨌거나 가일은 황태자의 친구이자 측근이었으므로,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던 경을 끌고 그의 앞을 빠져나왔다.

우리 꼼꼼한 기사 던 경은 말없이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과일주스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때맞춘 센스에 감탄하며 감사히 주스를 받아 마셨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니엘과의 약속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으음. 곤란하네.’

센스 있는 기사였지만 그를 대동하고 다니엘을 만날 수는 없었다.

“저기, 경.”

나는 결국, 강수를 두기로 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그에게 내가 속삭였다.

“실은 지금 음…… 혼자 봐야 하는 것을 사려고 하거든.”

“혼자 봐야 하는 것 말씀이십니까.”

“응. 예를 들면 음…… 있잖아. 그런 거.”

의미심장한 어조에 의아해하던 던 경의 얼굴이 어느 순간 확 빨개지기 시작했다.

응. 알아서 이해해 줘서 고맙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내가 조금 수줍게 웃었다.

“가, 가게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응.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홍시처럼 빨개진 얼굴로 던 경이 고개를 저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던 경은 가장 가까운 곳의 속옷 가게를 힐끔 본 뒤 혼자 지레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그 원맨쇼를 잠시 감상하다가 웃음을 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순박하네.”

“그러게요.”

“…….”

고개를 휙 돌리자 언제 왔는지 옆에 다니엘이 서 있었다. 그는 로브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내 눈과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데이트 중이었던 거 아니에요? 제가 방해한 것 같은데.”

무섭도록 상냥한 어조로 묻는 소리에 순간 왠지 소름이 돋았다. 뭐지? 나는 어쩐지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데이트라니. 아니에요.”

“그럼?”

“굳이 말하자면 친구예요.”

“친구라.”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꽤 길게 웃은 그는 내가 그를 가는 눈으로 흘기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사람 홀리는 미모로 저런 천진한 표정을. 비록 가려져 있지만 나는 그 미모를 보았기 때문에 괜히 심장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가 또 홀렸나요?”

아주 얄미운 말이었다. 나는 그냥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그를 따라 걸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그가 글쎄요, 하고 말을 끌더니 굉장히 우스운 표정으로 답했다.

“기대했거든요.”

“……저 만나는 걸 기대했다고요?”

“아뇨, 오늘의 축제를 기대했죠.”

“아, 그래요.”

조금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또 작게 웃었다.

“나는 기대했는데.”

“음?”

내가 툭 작게 말하자, 그가 웃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단이랑 만나는 거 말이에요. 기대했다고요.”

잠시 그가 멈칫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이런 축제 전 잘 모르니까, 안내해 줘야 해요. 알았죠?”

나는 품에서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 펼쳤다. 나를 살피던 그의 눈동자가 스륵 굴러 종이 위로 향했다. 이윽고 읽어 내려가는 그의 얼굴이 점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정말, 작정하고 나왔군요.”

기가 막힌 듯한 어조에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구…… 아니 가족들에게 물어봤거든요. 축제 처음이라서.”

“처음이라고요?”

“이렇게 편하게 노는 건 처음이에요.”

“아하.”

다니엘은 살짝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못 본 척을 하고서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친구가 없나 보네요.”

나는 조금 우스운 기분이 되었다. 괜히 웃음을 터뜨리고서 그에게 장난스럽게 답했다.

“없다뇨? 여기 있잖아요. 친구.”

“저런, 설마 나한테.”

“안 홀렸어요. 안 홀렸다고요.”

사실 자꾸 홀리지만! 내가 얼굴을 조금 구기며 그에게 툴툴거렸다.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단이랑.”

“반하지 말라니까 그러네요.”

“이, 진짜. 자꾸 이럴래요?”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시야가 살짝 밝아졌다. 그가 내 로브를 조금 넘겼기 때문이다.

“뭐야. 모자 내려놔요.”

“이거 안 걸쳐도 되는데. 편하게 다니는 게 어때요, 리샤.”

“…….”

귀 가까이에서 리샤, 라고 부르는 소리가 어이없게도 살짝 달콤하게 느껴졌다.

“인식 교란 마법 걸어 둘게요.”

“오 능력자네요. 마법도 쓰고.”

아마 정령의 마법이겠지.

“능력까지 출중하니 곤란하죠, 리샤?”

리샤. 다시 들려온 리샤라는 부름에 나는 되레 로브를 더 깊게 썼다. 가려질 리가 없지만 어쩐지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내 귓가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 * *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나는 모쏠이었다. 이성친구들이야 늘 많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의미의 이성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다니엘과의 대화는 무언가 좀 달랐다. 내 덕질 대상이었는데, 목적이 친구 되기였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유진이나 카인, 헤레이스, 제인 등을 볼 때와 다르게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을 떠올리게 해서 편하면서도, 그의 행동이나 표정, 말씨 같은 것들은 편치 않은 이상한 기분이…….

‘싫지 않지만.’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설레고 있다는 것이다.

‘어휴, 하긴 저 얼굴로 저러면 누군들 설레지 않을까.’

다니엘은 말하자면 최종 보스였다. 그래. 그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정을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테니까.

그냥 덕질만…… 은혜롭게 하는 거야!

‘하지만 적어도 가까워지고 있는 건 확실해.’

정말 백번 양보해서 내가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존재인 것은 확실했다. 아니라면 쏟아지는 의뢰 때문에 유진, 카인과 함께 요즘 보지 못하게 된 헤레이스 때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 떠나서 지금은 그와 진짜로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친구는 될 수 있을 거야. 꼭.’

그렇게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독였다.

“무슨 생각해요?”

나른하고 다정한 어조. 물어 오는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로브. 안 벗어요?”

그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쉬며 그의 말대로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세상 다 산 것 같은 어조로 답했다.

“그냥요. 다 부질없다 싶어서요.”

“흐음. 왜 갑자기.”

“단의 정체, 정령에게 들어서 짐작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아하, 그런데요?”

“그래도 왠지 실례일 거 같아서 직접 묻는 걸 피했더니, 웬걸? 대놓고 자꾸 티를 내네요?”

“그래서 부질없다고요?”

“그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단도 로브 벗어요. 시원하게 다녀요.”

빙의되고 는 건 임기응변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내게 기특하다 칭찬을 해 주고서 시큰둥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대하고 있군요, 리샤.”

“…….”

순간 속을 들킨 기분에 나는 살짝 놀랐다. 나른한 시선이었다. 그걸 애써 평온하게 받아치며 눈을 피하던 나는, 무심코 그의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

내 경악한 표정에 다니엘이 웃음기를 지우고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금빛 머리의 천사같이 생긴 헤레이스와 오랜만에 보는 카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이쪽을 마주 보고 있었다.

“리샤! 그리고 거기!”

헤레이스가 사납게 비죽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런.”

다니엘의 느른한 목소리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잠깐 보았다. 나는 그를 보고 그냥 싱긋 웃었다.

데이트는 끝이네! 히히.

그때 나를 지그시 보고 있던 다니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샤, 아까 그 종이의 목록. 줘봐요.”

“네?”

뜬금없는 말에 되물었다. 그가 로브를 벗고 달콤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중 골라서 가 보죠.”

“…….”

나는 멍하니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다니엘이 가볍게 나를 안아 들기 전, 그를 잠깐 저지하고 헤레이스와 카인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좋아. 좀 뻔뻔해지는 거야.’

나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모이자 내 입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오, 랜, 만, 이, 에, 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헤레이스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리샤가 왜 저래? 하는 입모양이 읽혔다.

그, 런, 데, 저, 노, 는, 중.

헤레이스와 카인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옆에 있던 다니엘이 내 행태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이, 따, 봐, 요.

그리고 어린애처럼 활짝 웃어 버렸다. 결국 웃음보가 터진 다니엘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웃으며 자리를 떴다.

“아, 조금 미안하네요.”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다니엘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좀 웃어요.”

“리샤가 귀여워서 그래요.”

뭐야…….

나는 그를 지그시 보다가, 르페르샤 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리고 가까워진 그의 귓가에 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흠칫하고 나를 휙 돌아보는 그의 보석안이 살짝 커져 있었다. 오늘은 아쿠아마린으로 보이는 눈이었다.

나는 어쩐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귓가에 다시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제가 좀 귀엽고, 예쁘고, 혼자 다 하기는 하죠?”

장난스러운 속삭임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은근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자기가 아는군요.”

“알죠, 그럼.”

내가 고개를 살짝 비튼 그와 눈을 맞추고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단이 왜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나 했더니, 이래서였구나.”

“……이래서라니요?”

순간 그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나는 은근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난 뒤, 답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딘가 통쾌했던지라, 나는 그만 내 발밑을 못 보고 말았던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대 자로 넘어지려던 찰나, 다니엘이 나를 빠르게 부축하고서 그대로 안아 들었다.

“참…… 곤란하다니까요. 그냥 보고 있기가 어려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어쨌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몹시 창피했다. 내 민망해진 얼굴을 봤는지, 위에서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흘렀다.

축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

“…….”

황녀가 정체 모를 수상한 놈팽이와 사라진 뒤, 헤레이스와 카인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 노는 중. 이따 봐요.

……라고 했다.

‘뭐?’

그 르페르샤 황녀가.

‘……?’

속으로 자꾸 멍청한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 입모양을 따라 읽었던 헤레이스는 정말이지 미묘한 기분에 어딘가 마구 긁고 싶어졌다.

리샤는 자기가 같이 노는 상대가 누군 줄은 아는 걸까? 웃겼다. 아니, 웃긴 건가? 웃기긴 했는데 폭소를 터뜨리기에는 더러운 기분.

“……리샤가 혹시, 미친 걸까?”

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 헤레이스의 물음에 카인이 음울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카인이 보기에 헤레이스는 지금 반쯤 혼이 빠진 것 같았다. 요즘 의뢰가 갑자기 쏟아졌다더니.

“정신 차려라.”

“아니, 공작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차가운 카인의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황당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

카인은 가만히 시선을 비끼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살짝 패인 미간에서 그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을 간파한 헤레이스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헤레이스는 다시 아까 황녀가 있던 곳을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나도 같이 놀지.”

그 말에 카인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눈동자에 가득한 혼란이 숨을 죽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각자 사로잡혀 있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황녀가 무단 외출을 했다고 고발하는 유진 때문에 나온 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헤레이스는 유진의 그 행태가 너무 재밌어서 장단을 맞춰 준 것이기도 했다. 길에서 자기를 마주쳤을 때 황녀의 반응이 기대되기도 했고. 그런데 자기가 당한 기분이었다.

“근데, 아까 그건…….”

카인이 혼란한 중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섰다.

“아, 그놈.”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바로 그 부분을 헤레이스가 짚자 카인이 멈춰 섰다.

“아는 사람인가?”

그리고 헤레이스를 돌아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뭐.”

“누구길래. 살기 죽여라.”

“남이사. 저 자식 나한테 일거리를 교묘하게 다 넘기고 자기는 리샤랑 놀고 있었어. 영업 방해야. 죽여 버릴 거야.”

카인이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꼭 말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이렇게 말했다.

“유진이 말했던 그 사람인 것 같군.”

“……그게 저거라고?”

“그때도 평범한 로브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얼중얼 카인의 말이 이어졌다. 어쩐지 카인이 말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면서 헤레이스가 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울컥했던 정체 모를 화가 가라앉았다. 지금은 눈앞의 재밌는 인간의 상태가 더 호기심을 당긴다. 헤레이스는 방긋 천사처럼 웃었다. 카인이 묘하게 그를 보자 헤레이스는 휙 몸을 돌렸다.

“안 와? 할 거 많은데?”

“……간다.”

그들은 오늘 황녀의 소문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축제를 이용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에이.”

평정을 되찾은 것 같은 카인을 보고 혀를 차는 헤레이스를 보며 카인이 눈을 깜박였다.

* * *

옛날 이 나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스. 어찌나 아름답던지 아주 어릴 때부터 구혼이 줄을 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가문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나이가 찬 뒤엔 구혼자들의 사랑이 광기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사랑을 노래하던 남자들은 그녀를 소유하고자 했죠.”

다니엘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그녀가 도망갈 자리를 모조리 빼앗았단다. 가족, 친지, 돈, 그리고 명예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어이없게도 희대의 요부라 불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배부른 미친놈에게 팔려 가기 전.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두근두근. 흑막은 이야기를 참 잘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결심? 무슨 결심이요?”

“음, 다음 이 시간에?”

“…….”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잘 웃어서 단은 늘 건강하겠어요. 좋겠네요, 좋겠어.”

“아하하, 아니, 리샤. 그렇게 재밌어요? 제국민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요?”

나는 모르는 이야기다!

차마 그렇게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팽 돌렸다. 그때 꽃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게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 원흉이었다.

“예쁜 마차죠?”

놀리듯 묻는 목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허허롭게 웃었다.

“슬슬 행진이 시작되겠어요. 그러니 이다음은 행진 끝나고 들려줄게요.”

“알았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에게 답하자 그가 잘게 웃었다. 저 꽃마차는 베아트리스 린데아를 뽑는 대회의 중심이었다. 이 대회는 건국제에서 손꼽을 수 있는 볼거리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이 행진을 보기로 했다.

“행진을 보고 가장 꽃을 많이 받은 마차의 주인이 올해의 베아트리스 린데아가 되는 거죠.”

“상품은 뭔데요?”

그의 품에서 슬쩍 내려오면서 내가 물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나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치이는 내 어깨를 감싸 주며 답했다.

“기사의 일일 레이디가 된다던가.”

“으음. 애매한걸요. 지원자가 많아요?”

“많죠. 기사의 레이디 자리를 동경하는 아가씨는 많거든요.”

“……정말 상품이 그게 다라고요?”

그는 굉장히 재밌어하며 답했다.

“부상으로 500골드를 주기는 하는데요.”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

개운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가 웃음을 꾹 참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니, 돈이 걸린 것도 아니라면, 굳이 이런 대회에 참가할 이유가 없잖아요.”

“글쎄요. 이런 대회에서 평민 아가씨가 순위권에 들면 이득이 많다고들 하죠.”

“흠, 글쎄요.”

아까 그 이야기. 뒤가 그렇게 좋을 거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을 모른다는 걸 알릴 수 없었기에 그 말을 얌전히 집어넣었다. 대신 대놓고 말했다.

“아름다운 건 좋지만, 그걸 지킬 힘이 없으면 불행해질 뿐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네.”

“그렇군요.”

어딘가 씁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그를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그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정확해요, 리샤. 실제로 이 대회에서 평민이 우승할 경우, 열에 일곱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든요.”

“네?”

“예상한 게 맞았다는데 왜 그렇게 놀라요?”

“맙소사.”

“하지만 열에 셋은 인생이 피죠.”

그것도 로맨스 소설처럼 피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그저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면 이 대회랑 관련된 에피소드가 외전에서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신경 쓰여요?”

“응? 뭐가?”

“아까 그 이야기. 열에 일곱은 불행해진다는 거요.”

“글쎄요.”

사실 그걸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안전장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어떤 식으로?”

“일일 레이디라고 했죠? 정말로 딱 일일 레이디와 기사 관계로만 끝나야 한다는 규칙을 세우고, 그걸 어기면 부상을 돌려줘야 한다는 거?”

“흐음. 그러면 상황이 재밌어지겠네요.”

그에 말없이 웃기만 하고서 나는 행진에 집중했다.

“시작한다.”

“……리샤. 참가해 볼래요?”

“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보자 그가 은근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머리색을 바꾸고, 참가해 보는 거죠.”

이 건국제 한 달 전 소축제의 에피소드는 헤레이스의 외전에서 나왔다. 아가씨들에게 나눠 줄 꽃들에 장난을 치는 무리들.

“다 됐다.”

묘한 감상에 젖어 있다가 다니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서 배부르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매혹적인 미소가 좀 불안했다.

“아. 무슨 색으로 한 거예요?”

그는 말없이 거울을 보여 주었다. 거울은 또 어디서 난 거…….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리샤?”

흑발. 완전한 흑색은 아니었고, 내 본래의 색 때문인지 아주 짙은 흑갈색이 되어 있었다.

“마음에 안 드나요?”

“음, 아니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것은 향수였다. 르페르샤 황녀에게 빙의되기 전, 나는 저런 색을 가졌다.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조금 표정이 굳어 있는 다니엘에게 짙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음에 들어요.”

“리샤.”

“그리고 아주 예쁘네요.”

부러 장난스럽게 뻐기는 투로 말하자, 그가 조금 늦게 대꾸했다.

“그래요. 예뻐요.”

“…….”

가벼운 어투인데도 진심인 게 느껴져서 절로 심장이 떨렸다. 그래서 털어 버리듯 그에게 말했다.

“큼, 이거 참가하면 다른 건 못 보겠네요.”

“내일도 있으니까요.”

“좋아요. 참가는 어떻게 해요?”

“간단해요.”

꽃마차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 위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빈 마차가 나타나기도 했다. 다니엘은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렇구나.”

막상 시작하자니 흥분이 되었다. 원작 에피소드야 원작대로 헤레이스가 해결할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어제 만났겠지? 그럼 오늘 해결하게 될 거야.’

그런 에피소드라면 애초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박찼다. 나를 안아서 올리려고 했는지 다니엘이 드물게 당황한 낯으로 나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쏙쏙 다가가 바퀴를 밟고 통 튀어 올라 빈 마차 하나를 차지한 나는 그런 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흑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마차에 실린 꽃 중 몇 송이를 입에 문 뒤, 두 손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반 묶음 머리를 했다. 머리끼리 꼬아 묶은 뒤, 입에 물었던 꽃 몇 송이로 장식했다. 다니엘이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그가 내 마차의 빈 마부석에 앉았다. 또 마법을 쓴 건지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부가 있는 마차에 앉아 나는 편안하게 행진에 참가하게 되었다. 로브 안에 입고 있던 옷은 수수했지만 황녀의 옷이었다. 나는 허리를 펴고 하늘과 사람들을 한눈에 담으며 마음껏 웃고 다니엘과 떠들었다.

“너무 편안한 거 아니에요? 자신 있나 봐요?”

“예쁘기는 제가 제일 예쁜 것 같지만, 딱히 우승은 욕심이 안 나는걸요. 그보다는 이 꽃마차가 마음에 드네요.”

달구지 같은 모양의 작은 마차는 굉장히 부드럽게 굴러가는 귀여운 마차였다.

“애초에 체력이 딸려서. 이제 슬슬 앉아야 할 것 같고요.”

다니엘이 그러냐고 응수했다. 나는 마차 위에 인어공주처럼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앉았다. 그리고 마차에 가득한 꽃들을 한 송이씩 집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넸다.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 것이라서 가능했다.

“꽃이 모인 만큼 점수를 받는 건데 그걸 나눠 주다니.”

다니엘이 한탄했다.

“하지만 이게 더 즐거운걸요.”

꽃을 받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가자 그들이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긴 행렬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다니엘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말 안 해도 알 줄 알았죠. 유명하니까요.”

다니엘이 하얗게 웃으며 대꾸했다.

행진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넓은 무대에 다다른 꽃마차들에서 아가씨들이 한 명씩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대 위에 서서 한 명씩 장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이없는 눈으로 그걸 보다가, 내가 마부 다니엘의 어깨를 쿡 찔렀다. 그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인 것처럼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봤다.

얼빠진 얼굴에 코웃음을 쳐 주고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해요. 준비한 것도 없는데.”

“가만히 서서 웃다가 내려와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너무 과대평가하네요.”

“글쎄요. 솔직히 그 색, 굉장히 잘 어울리거든요.”

그가 잘게 웃고는 쿡 찔렸던 어깨를 슬쩍 문지르며 나를 무대로 밀었다. 어느새 내 차례였다.

* * *

행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 사이에 소요가 일었다. 다채로운 색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무채색. 흑발에 흔치 않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가 그 소요의 중심이었다.

“사람인가?”

“와, 말도 안 되게 예뻐…….”

그녀의 검은색은 어딘지 따스한 느낌을 주어서 눈길을 끌었다. 색깔에 시선을 빼앗겼던 이들은 금세 그 발갛게 상기된 아름다운 얼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마치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고요하고도 맑은 미소를 흩뿌리고 있었다. 탄성을 지를 새도 없이 그녀의 마차를 저도 모르게 좇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마부 자리에 있는 남자가 무심한 눈으로 그런 사람들을 훑었지만, 그를 인식한 사람은 그 많은 이들 중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마저도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하느라 남자의 미미한 불쾌감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연히 오랫동안 그녀를 보는 이들이 늘었다. 하지만 아무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 너무 잘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마차 위에서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혼자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꽃을 던져 주면 크고 아름다운 꽃들을 골라서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긴 행진이 힘들었는지 잠깐 졸기도 했는데, 그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와서 보던 이들이 숨을 죽였다. 그렇게 약 한 시간. 대광장에 모인 수도의 사람들 대부분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늘 아래의 나무 빛깔을 가진 그녀가 무대 위에 섰다.

* * *

창백하고 가녀린 미인이 홀로 섰는데, 넓은 무대가 꽉 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요하고도 눈부시게 맑은 느낌의 보랏빛 눈동자가 사람들을 찬찬히 훑었다. 시선이 닿은 자리마다 사람들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엄청나군.’

넋을 잃고 그녀를 보던 사회자가 다가가 입을 열었다.

“큼, 안녕하십니다! 아니, 안녕하십니까!”

사람들이 작게 야유하며 웃었다. 사회자는 아랑곳 않고 활짝 웃으며 이 눈부신 미인에게 확성 마법이 달린 브로치를 건넸다. 그걸 받아 드는 손이 몹시 하얗고 고왔다. 사회자는 브로치를 건네는 제 손이 떨리는 줄도 모르고 또 잠깐 넋을 잃었다.

핫, 하고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아가씨의 성함을 여쭤 보겠습니다! 그, 성함이?”

“리스예요.”

잠깐 고민 끝에 여인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청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살짝 허스키한 느낌도 있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분은 노래를 하시겠군.

사회자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군요! 아름다운 리스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늘 여기서 해 주실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아가씨에게도 아주 정중한 사회자였지만, 리샤 앞에서는 유난히 삐걱대고 목소리 삑사리가 두어 번 나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회자를 보고 계속 웃다가, ‘리스’라는 아가씨가 입을 열자 약속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저는 가만히 서 있겠습니다.”

“서 있겠……! 네?”

“준비한 것이 없거든요. 다들 꽃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미인은 정말로 잠시 서 있다가, 눈을 확 홀리는 미소를 방긋 짓고는 홀연히 무대 아래로 향했다. 모두 넋을 잃고 그녀를 보았다.

* * *

고개를 푹 숙이고 입꼬리를 부들거리고 있던 다니엘이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다. 그대로 도망쳐 나온 뒤, 나는 처음 보는 다니엘의 웃음소리를 행복하게 감상했다.

소리 좋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던 경 생각을 못 했네요. 돌아가면 사과해야겠어요.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다니엘이 물들여 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한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이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다니엘은 잠시 나를 지그시 보다가 내가 입모양으로 ‘내일 또 봐요.’라고 하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였다.

“좋은 생각이야. 저녁 무도회도 준비해야 할 테고.”

싱글거리며 어디서 불쑥 튀어나와 끼어드는 헤레이스에 그를 돌아보니, 가는 눈으로 나와 다니엘을 살피고 있었다.

“그럼, 리샤?”

“……음?”

내민 손의 의미를 몰라 다니엘을 멀뚱히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이 와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회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리스! 리스양?”

“어?”

이상하게도 사회자가 나를 호명했지만, 나는 무대에 올라갈 수 없었다.

“리샤, 올해의 베아트리스 린데아에게 일일 에스코트를 해 주고 싶은데. 어때요?”

“네?”

다니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얼굴인지. 그래서, 답은?”

“아니, 전 이제 가 봐야 하는데요?”

“저녁 무도회 말이에요.”

“무슨…….”

놀랍게도 그는 살짝 느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정식으로 파트너를 청합니다, 전하.”

“……아.”

갑자기 전하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재촉하듯 눈썹을 까닥였다. 그를 가만히 보다가 나는 짐짓 고고한 표정으로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허락하죠.”

은근하게 휘어지는 그의 아쿠아마린 눈과 내 눈이 맞닿았다. 그가 시선을 그대로 마주한 채로 손에 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유진의 칼끝이 다니엘의 목에 맞닿았다. 언제 온 건지 다들 모여 있었다. 살짝 놀라 둘을 보고 있는데, 다니엘이 작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칼에 아랑곳 않는 태도로 나를 안아 들었다.

“단……?”

당혹스럽게 그를 보고 있자, 유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갈했다.

“함부로 그 분께 닿지 마라.”

“이런.”

다니엘이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리샤가 다치면 어쩌려고. 위험한 건 치우는 게 좋겠어요.”

유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검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슥 날아올랐다. 인상을 찌푸리는 유진이 빠르게 멀어졌다.

“걱정 말아요!”

나는 유진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나와 나갔던 기사 던 경과 함께 궁 뒷문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서 속삭였다.

“5시간 정도 남았어요.”

나는 내 머리카락이 서서히 백금빛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어 시간은 쉬어야 하겠죠. 이따 봐요, 리샤.”

“……네.”

쉬어야 하니까 빨리 데려다준 거라는 말인가? 그는 볼수록 의뭉스러우면서도 상냥했다.

기분 좋게 몸을 돌리는데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그제야 던 경의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음, 던 경. 미안해…….”

궁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다니엘은 낚시하듯 던 경을 낚아채 왔다. 다름 아닌 베아트리스 린데아 무대 뒤에서.

“아니, 아닙니다, 전하…….”

“근데 대체 왜 거기에 잡혀 있었던 거야?”

“오해를 샀던 것 같습니다.”

얼굴이 반쪽이 된 던 경이 음울한 어조로 설명했다.

나를 찾다가 인파에 잠시 휩쓸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환한 색의 머리를 보고 따라갔는데 내가 아니었다고. 따라가서 만난 그 여인은 탁한 금발을 하고 있었다나. 분홍색 머리를 물들인 것 같다고 했다.

“예…….”

그 여인은 반가워하면서 던 경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기사 복장을 한 사람을 찾아 달라고 했는데, 당신이었군요. 아, 정말 다행이야. 이 행사를 제가 얼마나 기대했다고요. 어서 돌아가요, 일일 기사님.’

나는 거기서 누가 떠올랐다.

저 말투, 행동 방식. 딱 아리엘인데. 분홍머리라니 아닐 것이지만, 닮았네.

눈을 데굴 굴리며 내가 물었다.

“그…… 그 여자가 경을 끌고 그 무대 뒤로 갔던 거구나?”

“어떤 사람들이 꽃을 줬다면서 꽃으로 장식도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받지 않으면 울어버리실 것 같아서, 얼결에 꽃을 받았는데…….”

“으음. 혹시 잠이 들었어?”

“예. 이상한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제가 보여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만.”

“……그렇구나.”

나는 이 안쓰러운 기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푹 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아린과 리니의 걱정 메들리가 나를 반겨 주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황녀님!”

“어서 욕실로!”

“세상에. 얼굴이 창백하셔요. 마사지 받으면서 조금 주무세요, 황녀님.”

두어 시간 자라던 다니엘의 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 시녀들이 무섭다. 그들의 광기 어린 눈빛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시간이 날아갔다. 그 후 노곤노곤해진 상태로 서서 남색 천에 은색 보석으로 꾸민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마네킹이 되었다.

“이게 가장 좋겠네요.”

“오늘 무도회는 짙은 색을 입는 게 좋은 곳이니까요.”

“이제 화장을!”

눈을 감았다 떴다는 얼마간 반복하며 혼을 반쯤 빼놓았다. 아까 행진에 참가했던 것보다 더 힘든 것 같기도 했다. 몸은 편한데 어딘가 지친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우셔야죠!”

리니가 힘을 빡 주며 하는 말에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전신거울 속에는 그 자체로 명화처럼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

재잘대던 둘도 만족스러운 한숨만을 쉬었다. 나는 거울을 보고 넋을 잃었다. 눈부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모든 부분이 말갛고 고급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빛으로 자아낸 듯한 백금발도, 꽃잎 같은 입술에 제비꽃 빛 눈동자도. 남색 드레스는 아름다운 몸매를 감싸며 완벽한 형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풍성하면서도 마른 스타일이 르페르샤 언니의 몸매와 유난히 매력적으로 어우러졌다. 보석을 뿌린 느낌의 드레스 장식들 또한 완벽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놀라웠던 점은 신발이었다. 앞부분은 구두였지만 뒷부분은 폭신했다. 굽이 높았으나 좁지 않아서 정말 편했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했어? 와.”

진심으로 감탄했고, 고마웠다. 배시시 웃는 두 소녀들이 너무 예뻐서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그들이 상기된 얼굴로 흡족해했다. 다 하고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남아 있었다. 10분 정도 의자에 살짝 앉아 쉬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종에게 말해 두었으니 다니엘을 안으로 들였을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드레스를 정돈했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살짝 긴장했다. 어쩐지 내가 알던 그와 다를 것 같아서.

“…….”

문이 열렸고. 그 너머에서 나는 매혹적인 악마를 마주했다.

* * *

나는 아주 잠깐 그를 한눈에 담았다. 알고 있던 그의 아름다움이 딱 두 배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정갈한 느낌인데, 어쩐지 퇴폐적이었다. 그것은 악마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무료한 낯에 매혹적인 미소가 은은하게 어려 있었다. 잠시간 나를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찬사를 던졌다.

“아름답군요.”

일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나는 얼마간 홀린 채로 답했다.

“……다니엘, 악마 같아요.”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빛났다. 미묘한 웃음기를 머금고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칭찬인가요?”

“칭찬이죠.”

그가 부드럽게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내 한 손을 쥐어 잡아끌었다. 그는 그대로 내 손등에 입술을 묻고서 말했다.

“당신은 천사 같아요.”

“……찬사죠?”

“글쎄요.”

그가 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슬쩍 그를 흘기려다, 한숨만 삼켰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나는 말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윽고, 황녀에게 주어진 새하얀 마차가 부드럽게 구르기 시작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기묘한 미소를 머금고서.

“무슨 생각해요?”

보아하니 귀족의 지위를 하나 가져온 것 같았다. 아니면 통과가 안 될 테니까. 지나가듯 묻자 그가 급하지 않게 답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왜 묻지 않을까 하고요.”

“…….”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지팡이의 머리를 가볍게 톡 두드렸다.

“물어도 되는 거예요?”

“리샤의 자유죠.”

부드럽고 느른하게 웃으며 그가 답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보다가 내가 물었다.

“본명이 뭐예요?”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답했다.

“다니엘.”

나는 느릿하게 흐르는 풍경을 잠시 보았다가 다시 물었다.

“……지금 쓰는 성은요?”

“로암 남작이에요.”

“그리고 마법사고요?”

그는 말없이 황금 지팡이를 또 한 번 툭 건드리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쓰지 않을 때는 지팡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문은 굳이 소리 내지 않아도 되는 대신 마력이 많이 들어서, 대부분은 지팡이를 하나씩 상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정령사이니 주문도 지팡이도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구나.”

어쨌거나 위장용이라 해서 황금색 장미가지 형태의 금색 지팡이는 아름다웠다.

“아름답네요. 잘 어울리고.”

그에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차가 멈췄다. 내리기 전 조금 무료한 눈길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가 물었다.

“궁금한 건 그것뿐인가요?”

“아뇨. 하지만 괜찮아요. 제 정령 덕에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

그가 모호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모습에 어느 정도 적응을 끝낸 나는 한결 담담하게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알았거든요.”

그게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은 채로 나는 마차 문을 열었다. 혼자 내리려고 하는데 어느새 밖으로 나온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그래, 가장 중요한 것. 그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그것만은 가면과 상관없는 진실이었다. 느낄 수 있었다.

‘언제든 지울 수 있는 호감이라 해도.’

쉽지 않은 암살 길드장님이다. 하지만 즐거웠다. 부드럽게 웃으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얼마 후 외궁의 연회장 문이 열렸다. 나는 찬란한 샹들리에의 빛 너머로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 무도회는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연회장은 여느 때보다도 선명한 색감으로 화려하게 술렁이고 있었다. 모든 색이 짙고 강렬했다. 그 속에서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목적 중 하나라고 한다.

“혹시 그거 들으셨나요?”

오색 빛깔이 모인 영애들의 무리 속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서두를 열었다.

“낮에 그 행사에서 우승한 여자가 남자와 함께 사라졌답니다.”

“그 행사라면 종종 그러지 않나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경우예요.”

“다른 경우라뇨?”

영애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베아트리스 린데아 행사는 건국제 사전 행사들 중 인기가 가장 높았다. 특히나 영애들은 그 행사에 관심이 많았다. 많은 로맨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행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애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하자 붉은 드레스의 영애가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저도 제 시녀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매우 짙은 흑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고 해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따스한 흑갈색 머리, 보랏빛 눈동자. 한 번 웃을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미인이었다던가.

“지금까지 본 그 행사의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는 무대 위에 올라가서 당당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더니, 무대 아래로 내려간 뒤 연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갑자기 사라졌다.

“사라졌다니. 연인이 마법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녀 아이가 제대로 홀렸나 보군요.”

“그래 보였어요. 사실 저는 제 시녀가 꿈을 꾼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눈이 높은 아이거든요. 그런데 무슨, 미의 여신이 현신하신 것 같았다는 둥, 그게 아니라면 전설 속에 나오는 마녀였을지도 모른다는 둥 그러지 뭐예요?”

“그런 찬사라니. 재밌는 아이네요. 다음 모임 때 그 아이도 볼 수 있을까요, 영애?”

“물론이죠.”

그들은 하늘로 솟은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소문이 수도 전역에 폭발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두런두런 이어지던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

그들은 방금 들어온 볼턴 경의 고결한 아름다움과 그 뒤에 들어온 라빌로프 황태자의 무료한 아름다움에 볼을 붉혔다. 또한 이번에 건국 무도회에 데뷔할 예정인 어린 영애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이가 있었다. 하늘색 머리의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영애였다.

“아리엘 랭턴이라고 하네요?”

“랭턴! 그 말로만 듣던 공작영애로군요.”

“공작께서 굉장히 사랑하신다나 봐요. 그 유명한 랭턴의 여름 별장을 통째로 주셨대요.”

“세상에! 어서 보고 싶네요.”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또다시 문이 열렸다. 르페르샤 람 트리엘. 황녀 전하의 입장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준 이들은 다시 시선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그들은 귀족의 체통도 잊은 채 황녀를 맞이했다.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아름다우시네요.”

마치 꿈에 본 요정처럼 르페르샤 황녀는 눈이 부셨다. 살포시 다문 입술부터 몸짓, 표정, 그리고 살짝 날리는 드레스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근래에 조금……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는데, 들으셨나요?”

황녀의 아름다움에 흔들리면서도 애써 부정하며 한 영애가 말했다.

“네에, 들었지요. 생각보다는 좋아 보이시지만요.”

영애들은 샐쭉한 표정으로 수군대면서도 차마 황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그들은 문득 시녀가 이야기했던 그 미인에 대한 묘사를 떠올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황녀에게는 그 묘사가 참으로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애들은 관심사를 돌렸다.

“그나저나 전하 곁에 계신 분은 대체 누구일까요?”

“처음 뵙는 분이네요.”

기실 황녀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사내였다. 그는 달콤하면서도 지독하게 퇴폐적인 미남이었다.

“지독하군…….”

누군가가 탄식하듯 뱉은 말에 다수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실 이상하게도 그가 들어오던 순간에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마치 두려운 존재를 마주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황녀를 본 뒤에야 비로소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갈색 머리에 붉은 눈. 누굴까요?”

붉은 눈이 요요했다. 모든 색을 먹어치울 듯한 귀기가 어린 그 색은, 불길함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이었다. 르페르샤 황녀와 이름 모를 사내는 숨죽인 사람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며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 입장하지 않은 황제의 옥좌와 그 옆에 앉아 있는 황태자 앞에 이르자 가볍게 예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별말 아닌 인사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고 볼을 붉혔다. 라빌로프 황태자는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르페르샤와 다니엘을 마주했다.

“잘 왔어, 누이. 누이의 파트너도.”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를 잘 들으려 더더욱 귀를 기울였지만 어쩐지 잘 들리지 않았다. 황태자가 진지하게 르페르샤 황녀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황녀가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옅게 웃었고, 그녀의 곁에 있던 사내가 그런 그녀를 온기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 사람에게 그 유명한 볼턴 경이 다가갔다. 그는 신비로운 그 미남과 대화를 하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뭘까. 무슨 관계일까. 아는 사이 같은데…….

미칠 듯한 궁금증이 사람들을 덮쳤다. 그러나 풀 길이 없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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