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악녀가 되었을 때(1권) (1/15)

악녀가 사랑할 때 1권

1. 악녀가 되었을 때

르페르샤 황녀는 악녀였다. 천진하고 순수한 여주를 괴롭히며 남주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악녀. 그녀는 악녀에 어울리는 최후를 맞이했다. 눅눅하고 악취로 가득한 감옥에서 르페르샤는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후에 남주 라빌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 욕심 많던 르페르샤는 어차피 오래 살 수 없었을 것이오. 그저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괴롭게 죽었을 뿐이니 그리 슬퍼하지 마시오.”

그렇다. 황녀 르페르샤는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대사는 악녀의 최후를 안쓰럽게 여겨 눈물짓는 여주에게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었다.

남주 인성 하고는. 저걸 말이라고.

나는 우아하고 고고한 르페르샤 황녀의 팬이었다. 때문에 저 대사를 보자마자 책을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고 완결까지 보고 말았다. 그리고 몹시 황당해졌다.

“미친. 이게 뭐람?”

순수한 여주 아리엘과 집착 남주 라빌로프 황태자의 사랑이야기.

아리엘은 그 순수함을 어필하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리고 악녀 르페르샤 황녀를 끝내 물리치고 황태자인 라빌로프와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단순한 이 서사의 결말이 그들의 결혼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다 죽다니?”

우리 르페르샤 언니가 죽는 건 이해는 가능했다. 악녀였으니까. 하지만 그 잘생기고 매력적인 서브 남주들 셋 중 둘과 조연 둘이 남주와 여주의 사랑에 휘말려 죽어 버릴 줄이야. 남은 서브 남주 한 명과 최종 보스 격인 악역 다니엘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민폐 커플이네, 아주. 와.”

마지막에 웃고 있는 남주와 여주의 삽화가 그렇게 어이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책을 찢어 버리고 말았다.

……한 열 번은 독파를 하고 찢어 버릴 것을.

단언컨대,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

어느 당혹스러운 여름날. 나는 르페르샤 황녀가 되어 버렸다.

* * *

내가 르페르샤 황녀의 팬이 된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일단 작중 가장 내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차갑고 고고한 그녀는, 여느 악녀들과 달리 악녀 짓을 하면서도 품위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솔직히 좀 멋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호감은 그녀가 나온 마지막 장면에서 급격하게 커지고 말았다. 악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면회를 온 여주인공 아리엘에게 황녀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황녀다. 날 때부터 그러했고, 죽을 때에도 황녀로 죽겠지.”

후회의 기미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영애,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나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나를 악녀라 불렀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문을 반쯤 정계에서 은퇴하게 만들었던, 르페르샤의 어머니. 정말로 악녀였던 여자.

“영애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겠지.”

리시안 바누스.

그 딸조차 악녀일 거라는 편견에 갇히게 만들었던 사람. 아무리 아파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만든 그 사람 때문에…….

아니. 아니다.

“그러나 병자로 죽는 것보다는 악녀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말로 악녀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리 독한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은 결국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대를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어.”

르페르샤 황녀는 아리엘 쪽은 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나를 병자로 기억하지 않겠지.”

황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은 후반부에서 밝혀졌다. 하지만 작중 인물들에게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완벽한 악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그대는 내게 어떠한 영향도 끼친 적이 없으니. 나는 내 선택으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에 후회는 없다.”

오로지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을 응시하며 황녀가 황홀히 미소 지었다.

“단 한 점도.”

그래, 그 부분에서! 내 마음속 주인공은 아리엘이 아닌 르페르샤 황녀로 갈아 치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으헝, 황녀 언니 너무 멋있고, 예쁘고, 그냥 다 굉장해!

“……하지만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황녀의 나이 열아홉, 원작이 시작되기 세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르페르샤 황녀는 아침에 눈을 떴고, 그 속에는 내가 있었다. 전생의 기억은 몹시 드문드문했으며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르페르샤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첫째로 내가 마지막에 죽은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원작 책을 본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외모가 내 것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

치킨으로 키운 풍만한 살집은 온데간데없었다. 라면으로 부풀린 금붕어 눈도. 아빠한테만 예쁘다는 소리를 듣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거울 속 소녀는 아름다웠다. 백금빛 찬란한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뽀얀 피부는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르페르샤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예뻤다. 세상에.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쁜데. 연애 한 번도 못하고 그 어린 나이에 죽은 거란 말이지?”

그것도 고문으로 말이다. 게다가.

“고문 루트를 피해도 어차피 곧 죽고……?”

에라이. 내가 사랑한 우아한 르페르샤는 어디에도 없고 거죽만 뒤집어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끔찍한데……. 그조차 시한부라니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어헝…….”

나는 침대로 흐느적거리며 돌아가 처연하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꺼이꺼이, 내 언니님을 돌려 달라고 눈물을 쏟았다. 아니 살려 달라고 울었던가. 아무래도 둘 다였던 것 같다. 그렇게 울며 보내기를 일주일. 나는 꿈에서 르페르샤 황녀를 마주했다.

[병은 고칠 수 있다.]

르페르샤 언니는 대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헉! 혹시 르페르샤 언니?”

맙소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꿈에 강림하신 것이다. 내 반응에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왜 네 언니야.]

“그거야, 호감이 담긴 호칭이죠!”

어쩐지 회의감이 가득 담긴 눈빛이 와 닿았다. 그도 잠시, 그녀가 찝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됐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너, 내 말을 잘 들어.]

환한 빛만 가득한 꿈속에 동동 떠 있는 르페르샤는 여신 같았다. 나는 여신의 옥음에 자세를 정돈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말씀하세요, 언니.”

[그 병에 대한 해결점을 말해 주려고 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 병은 약으로 고통을 견디는 것 외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는 병이야.]

그녀가 차갑고 도도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도 악화되는 중이지.]

“어? 하지만 전…….”

[아프지 않았겠지?]

“네에.”

[그건 네가 그 몸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뭔가 추상적이네. 하지만 이미 책에 빙의된 것 자체가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을 방법은 뭐예요?”

중요한 건 그것이니까.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병의 맹점은, 영혼이 걸리는 병이라는 점이지. 그게 이 병이 불치병이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나는 눈을 깜박였다.

[동시에 내가 너를 불러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묵직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헉. 강렬한 눈빛에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내가 물었다.

“어……. 아! 그럼 언니가 저를 불러들인 거네요? 우와, 어떻게요? 그리고 왜 저를요?”

[잘. 그리고 네가 그 책을 읽었고, 또 마침 그때 죽었으니까.]

“아하. 그럼 조건에 맞는 걸 골라잡으신 거군요?”

[……그런 셈이지.]

“세상에, 그럼 전 행운아네요!”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최애 인물을 직접 보았으니 말이다! 이젠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보면서, 그녀가 냉랭하게 답했다.

[행운아이기는 하지. 너는 나와 달리 죽지 않아도 되니까.]

“아…….”

[영혼이 걸리는 병인데 그 영혼이 바뀌었으니.]

르페르샤 언니는 짜증이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이며 말을 이었다.

[그 몸과 네 영혼이 하나가 되기만 하면 병은 사라질 거다.]

이것은 정말이지 훌륭한 애프터 서비스였다.

“세상에. 그렇군요.”

그러나 감격하며 안도하기 무섭게, 그녀의 무심한 말이 치고 들어왔다.

[피를 좀 토해야겠지만.]

……네?

“피를 토해요?!”

르페르샤 언니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몸에 남아 있는 기억을 지금으로부터 1년 안에 되찾아야 하거든. 그런데 기억을 하나 되찾을 때마다, 영혼의 균열로 인해 피를 토하게 된다.]

“아…….”

[시간 순서대로 적당히 나누어 딱 백 개만 남겨 두었으니, 사흘에 한 번씩 찾으면 될 거다.]

“저기, 그거 3일에 한 번은 피를 토한다는 거죠?”

[그렇지.]

“무서운 말을 아주 상큼하게 하시네요?”

역시 우리 언니! 그러나 묻기는 해야겠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그거, 안전한 거죠……?”

[글쎄. 뭐, 딱 1년만 버텨라.]

“……네?”

[완전히 몸과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몸이 그대로 병들어 있을 텐데, 거기다 피까지 토한다면 상태가 좋지는 않겠지.]

나는 말도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병이 아니라 피 토하는 것 때문에 죽는 건 아닐까? 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그녀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내가 참 친절하게도, 기억을 되찾을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해 기억이 3일에 한 번 저절로 떠오르도록 했다.]

“그, 그렇군요.”

고마워하라며 사악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르페르샤 언니는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그러니까 나는 싫어도 3일에 한 번씩 피를 토하게 된 거네요! 아하하하하하……!

[고통은 아마도 마지막 기억을 찾을 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할 테고.]

그건 그나마 안심이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리고 심호흡을 해서 기분 전환을 한 뒤 두 손을 모으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언니,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것마다 섹시하고 냉랭할 수가 있어요? 멋있다.”

[…….]

르페르샤 언니가 정색하며 나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았다.

헤헤.

[어쩌다 너 같은 것이 걸려들었는지.]

“음, 언니가 너무 눈부신 게 문제예요.”

책으로 볼 때 이상으로 좋았다. 살아 움직이는 르페르샤 황녀와 대화를 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나의 수줍은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언니가 급기야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크.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요, 그럼 제가 이 몸으로 뭔가 해야 하나요? 새 인생을 얻은 대가로 막 피의 복수를! 이런 거요.”

르페르샤 황녀는 악녀였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었다. 근데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나는 그녀 말고도 원작에 좋아하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여주와 남주 빼고는 거의 다 좋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피의 복수 같은 걸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새 인생을 준 것이 그녀라면…….

“음, 뭐든 가능한 한 힘써 볼 테니까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다. 그저…….]

“그저?”

[자유롭게 살아. 그것은 이제 네 인생이니.]

그 말에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시야가 흐릿해졌다.

[네가 아는 원작에 대한 기억부터 완벽하게 돌려주마. 그 뒤 몸의 기억이 시간 순서대로 돌아올 거다. 행운을 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르페르샤 언니를 만난 후, 나는 약 일주일간의 방황을 끝냈다.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죽는 루트가 하나 말끔하게 사라진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에는 충분했다.

“전부 언니 덕분이에요!”

어디선가 듣고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좋았어.”

책상 앞에 앉아 지난 며칠간 원작을 토대로 잡은 인생 계획을 검토했다. 여주와 남주가 주축이 되는 3개월 후의 원작 사건들을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악녀가 빠지면 내가 아는 거랑은 다르게 흐를 것이고, 무엇보다도 여주나 남주와 조금이라도 엮이는 것이 찝찝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보통 미친놈이라야지.”

그 집착계략 남주의 눈에 띄면 꼭 악녀가 되지 않더라도 망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노리는 것은 하나.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좋아하는 인물들을 만나는 거야. 흐흐.”

원작이 시작되는 것은 건국제 날이다. 계산해 보니 지금이 딱 원작이 시작되기 3개월 전이었다.

“악녀 소문은 애초에 어머니 때문에 퍼진 거니까, 이제 와서 뭘 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테지. 그건 신경을 끄자. 어차피 원작 시작되면 바로 여길 뜰 생각이니까.”

물론 자기 것을 끔찍하게 아끼는 황태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황위계승권 정도는 반납해 두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그거만 끝내면, 3개월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만 골라서 만나야지!”

물론 만나는 것만이 목적인 건 아니었다.

“원작에서 안타까웠던 부분들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핡.”

내가 좋아하는 악녀, 서브 남주들, 그리고 조연들은 원작에서 꽤나 가혹한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원작은 여주인공 아리엘이 수도로 올라오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남주가 희대의 집착남인 데다가 여주가 눈치 없는 순수녀라 희생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희생된 사람들도 좋아했는데. 다 결말이 그 따위였어.”

정리하자면, 우선 서브 남주1. 유진 드 볼턴 경. 그는 여주를 사랑해서 악녀였던 르페르샤 언니의 스파이를 자처하지만 황태자의 질투로 인해 함정에 빠져 죽는다.

서브 남주2. 카인 드 아이릭 공작. 그는 여주를 사랑해서 지켜 주었지만 마찬가지로 황태자의 질투로 인해 팔 하나와 명예를 잃었다.

마지막 서브 남주3. 정보 길드장 헤레이스. 마찬가지로 그도 여주를 사랑해서 황태자의 함정인 걸 알고도 자기 목숨을 잃어 가며 여주를 지켰다.

“그 외에도.”

여주의 진정한 친구로서 사랑도 꿈도 전부 포기해야 했던 이비엔 영애. 여주에게 구해졌지만 그 여주를 위해 대신 죽어야 했던 시녀, 제인까지.

“게다가 최종 보스 격인 다니엘마저도 피해자였잖아?”

그는 여주와 남주로 인해 소중한 친구인 헤레이스를 잃었다. 악역 될 만했네.

“어휴, 정리하고 보니까 다들 오로지 아리엘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로 쓰였네.”

아니면 황태자 남주의 무서운 성격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거나.

“이왕 소설 속에 들어왔는데, 이런 걸 그냥 보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어?”

좋아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미래는 달갑지 않다. 원작이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안전할 수 있게 살짝 상황을 비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 라빌로프랑 아리엘은 조연들이 있든 없든 알아서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할 거야.”

집착남이 괜히 집착남이겠는가. 그러니 그들을 건드리지만 않도록 하는 거다. 나도, 내가 아끼는 조연들도.

표를 만들어 말끔하게 정리를 끝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조연들과 그들에게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소소한 소망 같은 것들을 빼꼭하게 적어 두었다.

“한 사람은 좀 애매하지만.”

목록 중 한 부분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다니엘 말이다. 암살 길드장이자, 서브 남주의 친구였던, 여주와 남주에게 마지막 시련을 던져 주고 유유히 도망쳤던 인물. 외모가 아주 기대되는 서브 남주 셋과 달리 그의 외양은 갈색 머리라는 것 말고는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었다.

“정체가 매력적인데.”

그의 정체는 제국에게 침공당해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족이었다.

“유일하게 만나는 게 걱정되는 사람이야.”

그야 내가 황녀니까. 다른 이들과 달리 딱히 내가 뭔가 해 줄 것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흠. 일단 이 사람은 보류!”

서브 남주 중 헤레이스와 친구 사이라서 내 결정과 상관없이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뭐, 만나면…….

“큼, 기필코 그 로브 안을 보고 말겠어.”

원작의 팬으로서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대강 결론을 낸 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이들을 정리했다.

* * *

“그럼, 쉬십시오, 전하.”

“응, 수고해!”

언젠가부터 리니, 아린이라는 시녀 둘과 시녀장 엠마가 내 모든 수발을 들고 있었다.

처음 책속에 빙의된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일주일 동안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영향인 것 같았다. 그때 날 걱정하며 엠마가 다른 궁인들을 물리고 저 둘만 내 시중을 들게 했던 것이다.

별로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의 안위와 내 조연들의 안위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냥하게 대하고는 있다. 저 엠마에게는 특히나.

‘우리 황녀 언니 곁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궁인이었으니까.’

어딘가 묘한 기색으로 멈칫하던 엠마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가는 그녀에게 멍하니 손을 흔들어 주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피곤했나?”

잘 먹고 잘 자고 있는데? 그러다가 퍼뜩 떠올랐다.

“아!”

병이 치료되는 것은 영혼이 완전히 몸과 하나가 된 뒤라고 했으니. 그래. 지금 이 몸은 병든 몸이었다. 생각해 보면 르페르샤 언니는 원작에서 병이 밝혀지기 전에도 종종 혼자 있을 때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술을 사악 말아 올리는 것이, 지독하게 처연하고 매혹적이라고 했었지.”

직접 보고 부축해 주고 싶은 장면이었는데. 지금 이 몸엔 전생에 건강 빼면 시체였던 내가 들어앉아 있다. 히히.

“에잇. 어쨌거나 이러면 곤란한데.”

시도 때도 없이 빈혈이 오면 3개월의 알찬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었다.

계승권 반납 때문에 황제도 봐야 하는데. 아, 안 되겠다.

“당장 의사에게 가 봐야겠네.”

정신없었던 일주일 간 내 곁에 머무른 것은 엠마와 두 시녀만이 아니었다. 의사 록스.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그를 떠올렸다. 나는 그가 부디 이것을 완화시켜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근데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네. 정말로 고통을 못 느끼는 거구나.”

빠른 걸음으로 약제실로 향하면서 나는 혼자 신기해했다.

황궁 의원은 대체로 의궁에 모여 있다. 그곳에서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연구와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각 궁의 전속 의원이었다.

황녀궁에도 전속 의원이 있었다. 그 의원이 머무는 곳이 약제실이고. 다행히 약제실은 황녀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옅은 녹색의 정복을 입은 노의사가 나를 반겼다.

“아니, 황녀 전하?”

인자한 얼굴의 노의사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반겼다. 그의 푸근한 미소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다가갔다. 아마도 르페르샤 황녀 언니는 이 의사와 마주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언니는 자신의 병이 밖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별로 상관없었다. 병이 알려지든 말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3개월 뒤에 여길 뜰 생각이니까.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병을 들켜도 상관없다. 오히려 지금은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의사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라누아 검사를 받고 싶어서 왔어. 지금 가능해?”

라누아 검사는 바꿔 말하면 이곳 식의 정밀 검사였다. 몸속 세세한 곳까지 통찰할 수 있는 검사로, 마나를 다룰 줄 알며 그걸 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통제력을 가진 의사만 시행할 수 있었다.

의궁에 속한 의사라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검사다. 르페르샤 언니의 병은 이 라누아 검사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는 언니가 어릴 때 이 검사를 한 번 받은 뒤로 다시는 받지 않았다고 했다.

“당연히 가능하지요. 한데, 전하. 뭔가, 몸이 안 좋아지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증상을 먼저 말씀해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노의사 록스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나는 엠마에게 하는 것처럼 대강 상냥하게 웃어 주며 답했다.

“증상이 특별한 건 아닌데 체력이 떨어진 것 같아. 쉽게 피곤해지지.”

일단 일반적인 증상으로 서두를 열었다.

“예, 예.”

여기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그러지 못했다.

“……피도 좀 토하고.”

“잠깐, 피를 토하셨단 말입니까?”

놀란 그에게 피가 묻은 손바닥을 살짝 펼쳐 보여주었다. 벌써 3일이 지나 언니의 1살 때 기억을 찾은 흔적이었다. 그에게 내가 피를 토한다는 걸 알린 이유는 빈혈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록스에게만은 신뢰의 문제 이전에 공개를 해야 했다.

빈혈 완화. 그것도 병을 염두에 둔 가운데 내리는 진단 결과가 필요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피를 토하게 된 이상 혼자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어.”

흐리게 웃어 보이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하자, 놀라서 내 말을 더 주의 깊게 듣던 록스의 주름진 얼굴이 몹시 심각해졌다.

“잠시 이리 앉아 주십시오!”

침착하게만 보였던 의사는 꽤나 불안한 태도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가만히 따르다가 채 못한 말을 맺었다.

“오래 걸려?”

“반나절이 꼬박 걸릴 겁니다.”

“그렇구나. 수고를 끼치게 되었네.”

“그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록스는 심각한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꼼꼼하게 진찰을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내 병을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진통제를 처방하려고 하겠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상황 파악을 기초로 알아낸 ‘빈혈에 대한 임시방편’이었다. 혈액보충제 같은 걸 주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으로 붉은 빛이 물감처럼 퍼졌다가, 순식간에 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끝났어?”

하루의 끝에 이른 순간을 음미하다가 물었다.

“…….”

“괜찮으니 어서 말해 봐.”

록스는 진찰이 끝났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재촉에 그는 입을 벌렸다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그가 나를 보며 신음 한 조각을 흘렸다.

“어떻게…….”

“응?”

잠시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보던 그는 한탄하듯 신음을 흘리다가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멀뚱히 앉아서 그가 바쁘게 움직이며 문단속을 하고 창문을 꼼꼼하게 닫는 것을 지켜보았다.

뭐, 뭐 하는 거지?

그것을 다 마친 뒤, 그는 내 바로 앞으로 의자를 더 바싹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매우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 어떻게 버티고 계신 겁니까?”

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다가, 이내 그가 내 무통증 증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무통증은 모를 테니까, 고통을 어떻게 참고 있느냐는 말이겠지?’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록스는 내 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이 병의 정식 명칭은 라파엘리스. 이명은 천사의 인형이지요.”

록스가 나만 들을 정도의 속삭이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덩달아 숨듯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만큼 심각한 분위기였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겨울 여왕이 방문한 날, 언덕에 푸른 꽃이 만발했다. ……블라웨어의 시지요.”

“…….”

나는 심각해진 표정 그대로 굳었다.

아무것도 모를 땐 그저 웃어야지. 제가 빙의자인지라 여기 상식이 조금 부족해요.

이해를 구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아련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자 나를 마주 보던 록스의 눈이 조금 젖어 들었다.

모르는 거 들켰나?

“예, 그렇습니다. 그 시의 유래가 되는, 바로 ‘그 병’입니다, 전하.”

안 들켰구나!

마치 내가 알아들은 것처럼 말을 잇는 그에 안도했다. 재빨리 다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그렇구나. 그보다 록스, 내가 찾아온 건 작은 도움을 바라서야. 이 빈혈이 덜해졌으면 좋겠어.”

“빈혈이 덜해지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가 생각도 못한 말을 들은 얼굴을 했다.

아니, 왜? 빈혈이 자주 생기면 무려 나의 덕질(무언가를 매우 좋아하는 행동) 인생에 큰 방해가 된다고!

나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더욱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실수하지는 않기를 바라.”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거, 거절하지는 않겠지?

나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래도 바라지 않아. 티타임 한 번 정도의 시간만 완벽하게 괜찮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돼.”

노의사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더욱 잦아드는 어조로 말했다.

“……한두 번뿐이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쓰이지 않는 것이지만요.”

“그래?”

꺅!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최고야.

하지만 한두 번뿐이라니, 아쉽지만 원작 인물들은 상태가 좋을 때 만나는 것으로 해야겠다. 나는 황제와 면담할 때만 쓸 생각으로 물었다.

“어떤 건데?”

“……서쪽 흑사의 독입니다.”

“독?”

“약하게 쓸 경우에, 30분 정도는 억지로 맨 정신을 유지하게 되지요. 그 후엔 잠을 오래 자야 한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만. 세 번을 쓰면 독이 남지만, 두 번까지는 독이 되지 않습니다.”

“아하, 그거 딱 좋네.”

입술 끝이 실룩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어디야?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보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이것을 말한 이유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말 쓰시겠습니까?”

나는 조금 신난 기색을 억누르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을 잇지 못하던 록스는 점점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고개를 툭 떨구었다.

“……?”

그리고 굉장히 슬픈 어조로 속삭였다.

“전하…….”

어. 으악. 나 이다음에 이어질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아시겠지만, 이 병은 치료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 응. 알고 있어.”

겁먹지 마! 이거 록스가 안다고 죽이지 않아!

그런 마음을 담아 좀 더 온화하게 미소를 그렸다. 어차피 나에 대한 악녀 소문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나이 든 의사가 옅은 흐느낌을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 아, 안 죽일 건데.

어쨌거나 노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광경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달래지?

“울지 마, 록스.”

다정하게 어르는 목소리가 어색하게 튀어 나갔다. 그러나 그게 기폭제였는지 의사가 더 크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전하. 크흑, 제가 이리 무능하여…….”

아, 그런 쪽이었구나. 세상에, 직업의식이 투철한 의사네.

“괜찮아. 그러니 자책하지 마. 록스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으니.”

진심이야!

의사는 급기야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황녀궁의 의사 록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황녀 전하.”

신음처럼 뱉는 말은 이 궁의 주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고민거리는 차마 소리 내어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주제였다. 황녀의 가장 큰 약점일 테니까.

‘라파엘리스라니.’

라파엘리스라는 그 병은 저주에 가까웠다. 영혼이 걸리는 병이기 때문에 몸을 아무리 치료해도 차도가 없다. 걸리는 이유도 알 수 없고, 오로지 죽어 가는 과정과 죽은 뒤 묻힌 무덤에 푸른 꽃이 핀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

그런 병에, 황녀가 걸린 것이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병에 대해 알린 것이었다. 르페르샤 황녀의 악명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 담기 끔찍한 그 모든 소문들과 근래의 정상이 아닌 것 같은 행동들에…… 아주 조금은, 편견을 가지고 말았다.

‘눈이 먼 게야. 지금껏 의사로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왔다고 자부했건만.’

서릿발처럼 차갑다던 말투는 그저 차분할 뿐이었고, 얼굴에는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정신적으로 몰린 사람의 반응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덤덤하게 자신의 증세를 말하기 시작했다.

피를 토한다면서,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다고 하는 말은 이상했다. 거기서 록스는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마치 남 일처럼. 그래, 남 일처럼.

“일평생 그런 반응은 또 처음 보았어.”

황녀는 그저 말갛게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어떤 결과든 괜찮다는 듯이. 블라웨어의 시를 언급하자, 역시나 영민한 황녀는 그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멍하니 그를 보는 눈길이 어딘가 공허했다. 그러더니 그녀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록스, 내가 찾아온 건 작은 도움을 바라서야. 이 빈혈이 덜해졌으면 좋겠어. 적어도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실수하지는 않기를 바라.”

이제 겨우 19살인 황녀는 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웠다. 게다가 극독 처방을 내렸는데도 의연하게 말했다. 딱 좋다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그쯤 되자 그는 도저히 황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그 말을 하는데 나이 든 뒤로는 줄었던 눈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울지 마, 록스.”

어르는 목소리는 어딘가 서툴렀다. 그럼에도 다정했다.

“괜찮아.”

황녀는 여기 들어온 내내, 병이 나을 것에 대한 희망을 단 한 점도 비치지 않았음을, 그제야 인식했다. 그녀는 그저 괜찮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제야 록스는 깨달았다.

전하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녀는 수없이 이런 상황을 그리며,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어떻게 이리 덤덤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책하지 마. 록스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으니.”

이리 따뜻할 수 있을까.

나이 든 자는 눈이 침침하지만 그 대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어린 황녀의 의연함에서 그녀가 살아온 서글픈 세월의 무게를 짐작했다.

록스가 다시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적어도 움직여 보자고. 전설 속에 나오는 만병통치약에 대해서라도 미친 척하고 알아보자고.

“의궁에 영약과 관련된 고서적이 있겠지.”

그는 어릴 때 한 의사의 맹세까지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환자만을 생각했던 젊은 시절처럼, 움직여 보자고. 그의 눈이 의지로 작게 빛나고 있었다.

* * *

“이거 참, 일이 잘 풀리는데?”

흑뱀의 독이 든 알약이 두 알. 그리고 피가 모자랄 경우를 대비해서 혈액보충제까지 한 아름 얻어 왔다. 이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나는 서랍에서 찾은 알 수 없는 통 속에 혈액보충제를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리고 검사를 받느라 노곤해진 몸을 재빨리 누였다.

“내일 바로 황제한테 가야지.”

어느새 눈이 무겁게 내려와 있었다. 이윽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록스가 준 흑뱀의 독이 든 알약을 하나 삼켰다.

“후. 잘 하자.”

황제 앞에 가려고 하는 것은 계승권 때문이었다.

원작에 나오는 메인 남주 황태자는 자신의 것에 손대거나 손댈 기미가 보이는 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여주 아리엘에게만은 봄날의 훈풍처럼 따스했었지.

“그 갭이 멋있다기보다는 그냥 짜증이 났지만.”

그건 내가 르페르샤 언니를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집착 남주에게 황녀가 걸릴 만한 요소는 이거 하나 뿐이었다.

“뒤통수라도 치고 튀면 좋겠는데, 못 하겠지? 그 집착남이 ‘다니엘’ 말고는 대적할 사람이 없는 인간인 게 문제야.”

그건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와 그 본인의 능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즉, 힘없는 황녀로서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눈에 거슬리는 점을 지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3개월 후에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계승권 포기는 필수였다. 안 그러면 어딜 가도 쫓아와서 죽일 인물이거든.

“아니, 여주한테나 집착할 것이지.”

그래도 이제 계승권 반납만 하면, 3개월 후 언제든 황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떠날 때 돈 좀 많이 받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안 되면 황녀궁에서 금품 좀 들고 가지 뭐.”

그것도 안 되면 나중에 떠난 뒤에도 방법은 있다. 외전에서 여주 아리엘이 10년 뒤 발견할 예정인 좋은 것들을 모조리 가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안전한 백조 라이프가 완성되는 거지. 으항항항.

“빨리빨리 처리하자!”

나는 그 즉시 황제를 찾아갔다.

* * *

“폐하를 뵈옵니다.”

“황녀.”

차가운 얼굴의 황제는 소문이 좋지 않은 르페르샤 언니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던 인물이었다.

“그래, 어쩐 일이냐.”

대뜸 용건부터 묻는 낯짝이 짜증났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하여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용건을 꺼냈다.

“네, 폐하. 다름 아니라, 계승권을 포기하려 합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보더니 의심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 청을 들어주신다면 말이지요.”

나는 단정하게 미소 지으며 너무 빠르지 않도록 주의해 말을 이었다.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거래라니. 건방지구나. 감히 누구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는 것이지? 네가 지금 설마 네 외가의 힘을 믿고 이러는 것이냐.”

외가라. 하긴 르페르샤 황녀의 외가는 무시할 수 없는 ‘공신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르페르샤 황녀의 외가인 바누스는 제국의 시초를 함께한 공신 가문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계에서 물러난 채 은거하고 있었다. 언니가 힘없는 황녀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이게 다 르페르샤 황녀의 어머니인 희대의 악녀 리시안 바누스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

어쨌거나. 그래, 황제에게 거래를 운운하는 건 확실히 당돌해 보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더 바로 했다.

“폐하.”

화도 났겠지만 지금 저 황제, 당황한 것이 느껴졌으니까. 이럴 때 밀고 가야 한다.

“제가 포기하면 태자 전하께 큰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외가를 언급했으니 그것도 빼놓지 않아야겠다. 이런저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황제가 공신 가문이라서 경계를 하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폐하께서도 제 외가에 대해서 더는 염려하실 이유가 없게 되겠고요. 그들의 피가 섞인 황족이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너, 그 무슨! 네가 지금 실성한 것이냐!”

말도 안 되게 직설적인 말에 황제가 당혹스러워하며 입을 떡 벌렸다. 나는 희열을 감추며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폐하, 실은.”

나는 진지하게, 그러나 조금 사연 있어 보이는 흐린 미소를 그렸다.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려고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이건 또 뭔가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그에게 나는 연이어 폭탄을 날렸다.

“의사가 어제 제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내 말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하게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인상을 왈칵 찌푸리는 것이다. 아마도 진위를 의심하는 것이겠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수작이라니요. 아닙니다.”

“글쎄다. 황녀. 너는 아무래도 내가 만만한가 보구나. 자잘한 수작질에 넘어갈 만큼 내가 쉬워 보였더냐?”

아니, 왜 말이 그리로 튄담. 무슨 황제가 이래. 수작질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일단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야 정상이 아닌가. 그만큼 내가 내건 조건은 먹음직스러우니까 말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차분하게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답했다.

“정 믿을 수 없으시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하, 하고 그가 기가 찬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확인해 보마. 어차피 거짓이겠지. 그러나 설사 사실이라 해도, 그것으로 내게서 뭔가를 얻어 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녀.”

“폐하. 제가 폐하께 감히 무엇을 달라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대화 내내 딸을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아비를 보며 나는 생긋 미소 지었다.

“그저 자유를 바랄 뿐인 것을요.”

“헛소리.”

황제가 아무것도 듣지 않는 표정으로 내게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손짓이다. 나는 더욱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참말입니다.”

저 인간도 원작 인물인데, 영 짜증나기만 한다.

“폐하, 들어주세요. 만약 제게 자유를 주신다면, 정말로 계승권을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 그 외에 지위든 사람이든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돈만 조금 주세요!

조금은 절박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꿋꿋하게 말했다. 황제는 여전히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가라는 손짓은 하지 않았다.

“또한 황궁도 나갈 것입니다.”

“뭐.”

아항! 이거구나?

황제가 미세하게 놀람을 표했다.

“그냥 나가겠다니. 황족의 지위를 내려놓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아 그런 의미인가? 그렇다면 놀라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이르면 3개월. 그 후 나가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살아가겠습니다.”

히히, 3개월 동안 열심히 덕질을 즐기다가 돈 챙겨서 나갈 거랍니다!

아, 바보처럼 웃으면 안 되는데! 나는 애써 침울한 척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황녀, 대체 지금 왜 이러는 것이냐.”

슬슬 화보다 당혹감이 앞서는 기색이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자유롭고 싶습니다.”

가볍게 말하면 도리어 신뢰도가 떨어지겠지!

“…….”

“얼마 안 되는 세월이나마.”

……그저 그뿐입니다.

크, 나 연기 좀 하는 것 같아. 자랑스러워라!

속삭이듯 말을 맺자, 황제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불신 어린 표정이지만 당혹감이 가득 번져 있었다.

그는 아까와 달리 말이 없었다. 불같은 기색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당혹감도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긴 모습에 나는 꽤 높은 확률로 성공을 점쳤다.

자, 빨리, 결정을 내려라!

“자유라. 우습구나. ……하나.”

하나? 하나, 뭐?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그도 말없이 가만히 마주 보았다. 이번의 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변화는 상당했다.

잠시 격렬하게 황제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이윽고 그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물러가 봐라.”

에이.

하긴 혹시 모르니 의사에게 확인도 해 봐야 하겠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어쨌거나 황제가 저리 말한다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공손히 목례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느긋하게 대전을 빠져나왔다.

* * *

무려 이틀이 흐른 뒤에야 황제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사이 내 전담 시녀인 리니와 아린과 꽤 친분을 다지게 되었다. 판타지 세상의 시녀들에 대한 나의 투명한 호기심과 호감을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잘도 받아 주었다.

흐흐, 귀여운 아이들이었어.

흐뭇하게 미소를 짓다가 쿨럭 하고 기침을 했다. 입가에 피가 묻어 나왔다.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놀란 눈을 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그냥 걸어가면서 입가를 슥슥 닦아 처리했다.

“언니의 두 살 기억이구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살 기억에서는 애기 우는 소리만 들렸었다. 보배로운 언니의 애기 때 소리!

그렇게 딴 생각으로 희희낙락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 모든 것이 보배로웠다. 황제 면담 끝나면 자세히 들어봐야지!

그렇게 상념을 이어가다 보니 나는 다시 황제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다시 만난 황제는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말을 툭 꺼냈다.

“사실이더구나.”

수긍하듯 옅게 미소를 짓자 그는 나를 또 가만히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가, 눈을 가늘게 하고 먼 곳을 보았다가, 또 인상을 찌푸리기를 반복했다.

“……그저께.”

“예, 폐하.”

“네가 한 말들, 그 외에 바라는 것을 말해 봐라.”

그는 그저께와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명료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

“그때 말씀드린 것이 전부예요.”

돈에 대해서는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3개월 뒤에 넌지시 말해 보지, 뭐.

내 답에 그는 그 이상 되묻지 않았다. 여전히 미묘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을 뿐.

특히 입가를.

‘뭐지?’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그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눈을 슬쩍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자유를 원한다고 했던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걱정 없이 살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지요.”

내가 들어도 비단결같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씨였다.

크, 연습한 보람이 있다. 아, 맞다.

“물론, 정략결혼에도 매이지 않고요.”

“…….”

황제가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늦은 답을 주었다.

“윤허한다.”

그에 이예! 하고 환호성을 지르려던 찰나.

“그러나 절반의 윤허다. 향후 1년간은 황녀로서 황가와 황궁에 속해 있어야 한다.”

……네?

잠깐. 이게 무슨 소리? 그러나 내가 당황하든 말든 황제의 말은 무심히 이어졌다.

“정략결혼에선 배제시켜 줄 테니 그리하도록. 또한.”

“……?”

“계승권에 대해서도 아직 받아들이지 않겠다. 너는 1년간, 그대로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이게 뭐람? 이게 무슨 윤허야!

록스가 줬을 의궁의 진단서를 봤다면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병, 지금부터 길어야 2년이라는 것 말이다. 근데 그중에 1년을 묶어 둔다고? 이쯤 되자 나는 황제고 뭐고 그냥 어이가 없어졌다.

“1년 후에는 원하는 대로 자유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1년 안에 병을 치료해야 하는데? 피 콸콸 토하면서? 저, 저기요?

3개월 머무르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1년은 안 된다. 불치병인데 1년 후 갑자기 말짱해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먼 곳에 가서 기연을 얻었다고 하면 모를까.

결국 내 제안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리고 황제를 뚫어져라 보았다. 황제가 슬쩍 눈을 피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뭐 하자는 거야!

그러나 내 마음의 소리가 그대로 황제에게 닿았다간 자유고 뭐고 즉각 사형당할 테지. 솟는 격정을 내리누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하지만.”

“그럼, 나가 보거라.”

하찮은 몸부림이었다. 사흘 전과 달리 나는 매우 애처롭게 쫓겨났다.

* * *

대전의 문이 닫혔다. 돌아 나가는 황녀를 끝까지 보다가 황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입가에 피가…….’

황제는 황녀의 입가에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떠올렸다.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의원에게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지.’

진단서만 올리라고 했더니 직접 그걸 들고 찾아왔던 의사 록스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라파엘리스. 그 끔찍한 불치병에 정말로 황녀가 걸린 것이다.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으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지.’

애초에 오랜 세월 불치병으로 판명이 나 있었던 병이다. 록스가 백방으로 알아보려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에 가까웠다. 황녀가 살아날 길은, 없었다.

“후우…….”

사랑하는 여인이 죽고, 황제에게 남은 것은 그녀가 남긴 자식 황태자뿐이었다.

더군다나 르페르샤는 빈말로도 정이 가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 자체도 그랬지만 그 아이 외가의 힘이 심상찮았다. 공신 가문이란 그런 것이다.

뿐인가. 아이는 그 희대의 악녀 황후 ‘리시안 바누스’의 소생이었다. 황태자처럼 마음을 다해 아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여겼지.’

본디 황족이란 사사로운 정이 두드러지는 족속들이 아니니까.

‘분명히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충격을 받았다. 막상 병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자, 도저히 사흘 전처럼 독하게 몰아붙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괜찮았다. 들어주자. 그 말이 전부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않나. 그러면서 황녀의 소원을 들어줄 경우의 이득도 계산했다. 그러나 그는 어제 결국, 황녀를 부르지 못했다.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황제는 하루가 꼬박 걸려서야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황녀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길어야 2년. 아마도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겨우 21살에 조그마한 무덤만 남기고 스러져 가겠지.

“왜 하필 그런 병에…….”

황제는 결국 탄식했다. 아무리 버려두었다 해도 결코 이런 일이 그 아이에게 생기기를 바란 적은 없었는데. 문득 황녀의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고상하게 웃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 어머니와는 다른, 그러나 정이 가지는 않는 미소. 평소보다 찬기가 덜했던 것은 황제의 기분 탓이었을까. 그리 웃는 속이 과연 어떠했을 지를 생각하면 아연해졌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저를 보던 눈은 또 어땠나. 아무리 황녀에게 냉정한 황제라 해도 그런 모습에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동요는 황제가 예상한 것보다 더 컸다.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나.”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고 했다. 라파엘리스에 걸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꽃이 핀다. 푸르고 아름다운 그 꽃은 바람을 닮아서, 바람꽃이라 불렸다. 혹자는 그 꽃을 영혼이라 했다. 덧없이 진 청춘이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라고.

“……자유.”

황녀가 며칠 새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말. 황제는 두 손으로 거칠게 제 얼굴을 쓸었다. 스물도 되지 않은 아이가 죽음을 입에 담는데 그 얼굴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고작 바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서.

‘이건 아니야.’

그는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을 했으며 결론을 내렸다. 황녀는 어떠했나. 그래, 황녀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에도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저 떠나기만을 바랐다.

‘그건 이곳이, 이 황궁이 그만큼 그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공간이었다는 의미겠지.’

무의미해질 만큼. 그간 오만하기만 하고 속을 알 수 없었던 황녀는, 어쩌면 그 아이는 그저 외로움에 절어 있는 아이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리석은 것. 당장 떠나게 되면 계승권을 포기했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인데.”

답지 않게 심란한 얼굴로 황제가 중얼거렸다. 황녀는 적이 많다. 황녀의 외가의 적은 황녀의 적이지만, 정작 그 외가는 황녀를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리시안 바누스에게 이를 가는 적들은 르페르샤 황녀에 대해서도 틈을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황제가 1년의 유예를 말한 이유였다. 그러나. 황제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한 번도 품어 준 적 없는 주제에 이런 일이 닥친 뒤에야 구색을 맞추려 하고 있구나.”

어쩌면 황녀가 원하는 걸 그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황녀를 위한 일일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1년을 곁에 머무르라 명한 것이다.

이곳에서 버려진 기억만 들고 떠나게 하면, 자신이 너무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더불어 훗날 황녀를 떠나보낼 때,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더 당당하기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어떻게 보아도 나는 그 아이에게 나쁜 아비로군.”

황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원작은 그들의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장면이 프롤로그고, 그 뒤 곧바로 그들이 자란 뒤의 장면이 이어진다.

순수한 공작 영애 아리엘은 아버지의 과보호로 철통 보안이 되어 있는 별장에서 안전하고 심심하게 살아왔다.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가끔 홀연히 나타나는 또래 남자아이와 노는 것이었다.

그 남자아이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아리엘은 그 소년의 이름을 몰랐지만, 10살 무렵부터 잊을 만하면 별장에 찾아오는 그 소년을 요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어느 날 소년이 말했다.

“아리엘. 너는 내 것이지?”

“응!”

아리엘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너는 내 친구지?’ 정도로 알아들었다. 만개하는 아리엘의 천진한 미소에 소년은 매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 프롤로그 바로 다음 장에서 아리엘은 18살로 등장한다.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해 건국제에 참여했다가, 15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자신의 요정님이 황태자 라빌로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주변인들만 고생문이 열리지.”

아련하게 중얼거리며 과자를 오도독 씹었다.

“예?”

“전하?”

나와 함께 둘러 앉아 과자를 냠냠 먹던 시녀 리니와 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어려서 그런 걸까. 신기하게도 며칠 만에 완전히 내게 상냥해진 두 시녀를 보며 멍하니 답했다.

“그냥. 타인에 의한 고생문이 열리면……. 난 어떻게 할까, 하고.”

“고생문이 열리면, 도망가야죠!”

리니가 귀엽게도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위해 열심히 말했다.

“……그렇지? 리니도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그럼요. 고생문이라니, 그거 시집 잘못 가는 거 말하는 거잖아요. 황녀님, 그런 건 열리기도 전에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와 아린은 할 말을 잃고 리니를 가만히 보았다.

“뭐라고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응. 맞는 말인데 뭔가 이상하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아린의 말에 격하게 공감을 표했다.

“리니. 올해, 15살이었던가?”

“네, 전하!”

“그렇구나.”

하긴, 이곳에선 약혼자도 있을 나이이긴 했다. 우리 사이에 있어서 마냥 어리게 느껴졌나 보다.

나는 황제에게 다녀온 뒤로 멘탈 회복과 계획 수정을 위해 3일을 더 방에 틀어박혔다. 덕분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리니, 아린의 나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좋아진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전하.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고생문이라니요?”

아린이 편안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만 봐도 우리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걸 알 수 있었다.

“음, 글쎄. 생각보다 별거 아닌 문제 같기도 하고.”

3개월 후에 가출하면 돈은 못 받겠지? 사형……은 아니길. 그렇다면 역시 요양을 떠나는 것이 최고다. 그거면 다 해결이 되네. 최대한 멀리 간다고 하면, 내 생각에 황태자는 아주 좋아할 것 같거든.

……하지만 가는 길에 친히 죽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 계승권 반납이 안 된 상태일 테니까! 에잇, 빌어먹을 집착남! 성격 정말 민폐야!

끓는 속을 다스리면서, 나는 똑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리니와 아린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길이 두 개가 있어.”

뜬금없이 하는 말에 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귀엽긴.

“하나는 나쁘지는 않은데 오답일 가능성이 높아.”

요양만 불쑥 떠나는 것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다니엘’이다.

“다른 하나는요?”

“음……. 오답일 가능성은 없는데 나쁘게 꼬일 가능성이 높아.”

황태자가 그냥 일반적인 메인 남주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신 가문을 외가로 가지고 있으면서 힘이 없는 황녀란, 어머니의 출신이 유일한 약점인 그에게 있어 가볍게 죽이고 싶은 존재일 것이다. 계승권 포기만이 희망이었는데 그것도 유보됐고.

도망을 가면 아무래도 죽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계승권을 그 얼굴에 던져 주고 갈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찾은 것이 다니엘이었다.

“오답일 가능성이 없어요?”

“응.”

황태자가 아리엘과 결혼하는 순간에 마지막 대위기를 던져주며 제국을 비웃고 사라지는 남자. 그 다니엘은 황태자보다 강한 인물이었다. 꺾으려면 황태자도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적수.

그는 이야기 마지막에,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었다. 그래서 제국이 평화를 찾았다고 했지. 거의 마왕 취급이네. 떠날 때 나도 끼어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그는 강하다.

그런 그는 자기 사람을 몹시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의 사람이 되면 요양을 떠났을 때 아마도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건 내게 완벽한 정답이었다.

“그런데, 나쁘게 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습니까?”

“응.”

리니와 아린의 연이은 물음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 나쁘게 꼬일 가능성. 다니엘은 서브 남주도 아니고 흑막 같은 인물이다. 위험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현재 직업이 암살 길드장이야! 얼굴도 몰라!

‘무엇보다도, 다니엘은.’

황가를 증오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황가의 핏줄인 황녀고. 하지만 다니엘만이 황태자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걸.

“어렵군요.”

아린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라면 후자를 택할 것 같습니다.”

“어? 왜?”

“정답이니까요. 아무리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도, 정답이면 어떻게든 풀리지 않겠습니까? 버티기만 하면요.”

“버티기만 하면…….”

버틴다는 표현을 나도 모르게 따라 말해 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래도 그쪽이 낫지.”

아무 대비 없이 황태자의 변덕에 목숨을 거느니, 흑막에게 붙어서 친구가 되겠다.

“고마워.”

싱긋 웃으며 둘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리니가 배실배실 웃고, 아린이 어색한 얼굴로 볼을 붉혔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면서, 입가의 피를 닦았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우리 르페르샤 언니의 기억은 아직까지는 1년에 한 개씩 풀리는 것 같았다. 오늘 찾은 기억은 3살 정도의 언니였으니까.

3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언니는 미친 듯이 예쁜 아이였다. 하지만 얼어붙어 있었다. 표정이 없고 소리 없이 걸으며 주위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보송보송하기 마련인데.

“그래도 정말 예뻤어.”

헤헤헤. 우리 언니 성격이 어릴 때도 그대로였구나! 그간 소리만 들리던 기억이 영상처럼 머리에 떠오르자 나는 감격하고 말았다.

“인생은 아름다워!”

어떻게 할지도 정했겠다, 언니의 기억도 영상 식이 되었겠다. 더는 모자란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덕질이다!”

이제야!

그래! 나는 그걸 하고 싶어서 9일간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 아름다운 서브 남주들. 우리 조연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주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르페르샤 언니는 악녀로서 죽었다지만, 그들은 여주를 사랑해서 다치고, 여주를 위하다가 꿈을 포기하고, 여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 일들 중 일부는, 여주 아리엘을 온전하게 가지고자 한 황태자의 집착으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끔찍한 사실이었다.

“그 황태자. 아리엘에게 자신보다 가까운 사람이 생기는 걸 못 견뎌 했지.”

솔직히 말해서 황태자는 아리엘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을 증오했다. 증오가 아니라면 충성을 바친다는 기사를 죽이고, 검을 쓰는 자의 오른팔을 날리지는 않았겠지.

“여주도 좀…….”

자기가 원인이 되어 희생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리엘은 대체로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안타깝지만 고마워! 이런 식.

“끼리끼리 만난 건가.”

서브 남주들의 죽음이나 상실도, 대신 독을 먹어 줄 정도로 깊은 어떤 소녀의 충성심도. 친구를 위해 일생의 꿈을 포기한 여인의 희생과 흑막의 깊은 슬픔이 담긴 마지막 공격도. 전부 둘의 사랑을 견고하게 해 주는 장치일 뿐이었다.

“이왕 책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행복해지는 건 봐야지.”

원작에 직접 관여하는 건 못해도, 그 전에 원작에 휘말리지 않을 ‘씨앗’을 뿌려 두는 것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는 외모들도 기대되고.

헤헤. 다소 사심이 어린 웃음소리가 속도 없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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