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한다는 말
“뭐라고요?”
에일린은 루드비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손 안에 쥔 종이를 구기든 말든 별다른 관심이 없는 무심한 얼굴로 루드비히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에넨체 대공가의 비리 따위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이디 에일린.”
그가 늘 그러했듯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그러나 그만큼 단호하다. 당연히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해 황제의 비밀 서고까지 몰래 들어갔던 에일린은 자신의 헛고생을 떠올리며 품에 안은 서류 더미를 와그작 구겨 버렸다.
“왜 필요가 없어요? 나와 거래하는 것만큼 당신을 확실하게 대공위에 올려 줄 만한 수단은 없을 텐데!”
“레이디 에일린.”
루드비히는 잔뜩 흥분해 숨을 씨근거리는 에일린을 진정시키듯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 루드비히는 사교계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기사도를 사람으로 빚은 것만 같은 훤칠한 외모와 낮은 목소리로 늘 선망의 대상으로 손꼽히곤 했다.
‘그럼 뭐 해? 그래 봤자 사생아잖아.’
반델의 사교계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건 에일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정식적으로 황실에 입적하진 못했지만 황제의 사랑 받는 딸이었고,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자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줄 아는 영특한 사람이었으니까. 에일린과 친분을 쌓아 제국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 귀족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는 나나 루드비히를 무시하지. 잘난 것이라곤 핏줄밖에 없는 하찮은 것들이!’
그래서 더더욱 대공비의 자리를 가지고 싶었다. 공식적인 작위만 있으면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는 인간들을 몰래 암살하는 대신 공개적으로 처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이 비리들을 어떻게 수집했는데!’
황제는 비위 맞추기가 까다로운 데다 그의 비밀 서고에는 갖은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어 에일린은 예쁜 뺨을 긁히기까지 했다. 제 얼굴을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는 상처가 난 얼굴이 눈에 띌 때마다 죽고 싶어졌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에일린은 이를 부득 갈며 에넨체 대공의 비리가 담긴 서류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어째서! 왜! 당신은 나랑 같은 편이어야 하잖아!!! 당신도 대공이 되고 싶고, 나도 대공비가 되고 싶으니까!”
바락 소리를 지르는 에일린을 차분한 눈으로 훑은 루드비히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저와 당신은 원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뭐가 다르다는 거죠?”
“제가 원하는 건 캐서린입니다. 대공의 자리 따위가 아니라.”
루드비히의 선언에 에일린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캐서린 스왈렛을 원한다고. 그 자체가 스왈렛의 혈통을 원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결국 나와 손잡을 필요 따위 없다는 거잖아.’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에일린은 루드비히의 진심을 알아듣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좋아요. 당신과 거래하는 건 나도 이제 사양하겠어요.”
하지만 대공비의 자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문을 쾅 닫으며 응접실을 벗어난 에일린은 손톱 끝을 아득바득 깨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건국제가 내일이었지?”
에일린의 물음에 그녀의 충실한 시종인 폴리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폴리나는 에일린의 하녀이자 유모였다.
“네, 아가씨.”
“황실 무도회에는 분명 캐서린 스왈렛도 올 테고.”
“그녀는 대귀족의 딸이니까요.”
“나는 황제의 딸이야!”
별생각 없이 대꾸한 폴리나에게 에일린이 울컥 화를 내자, 그녀는 당황해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아가씨. 아가씨는 황제의 따님이시죠.”
하얗게 센 폴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에일린은 그녀를 마주한 채 예쁘장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기회에 캐서린 스왈렛을 죽여야겠어.”
오랜 숙원이었다는 양 비장한 어투였다. 순간적으로 에일린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폴리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네?”
“캐서린 스왈렛을 죽여야겠다고.”
그런 폴리나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차며 에일린은 새초롬히 하녀를 올려다보았다. 말로 내뱉고 나니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마법의 열쇠가 캐서린 스왈렛인 것처럼 느껴졌다.
‘캐서린 스왈렛만 죽으면, 모든 게 내 거야.’
리카르도도 에일린만 바라볼 것이고, 루드비히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터였다. 슬픔에 빠진 루드비히를 몇 번 다독여 주면 그 또한 에일린에게 푹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리카르도의 것과 달리 지독할 정도로 남성미가 풍기던 루드비히의 몸을 떠올린 에일린은 아랫배가 조여 오는 느낌에 발끝에 힘을 주었다.
“폴리나, 캐서린 스왈렛을 죽여 줘.”
에일린은 순진한 아이처럼 큰 눈을 깜빡이며 폴리나에게 살인을 요구했다. 폴리나는 에일린이 어릴 적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리카르도와 관계를 맺을 때는 망을 봐주었고, 황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양을 떨 때에는 에일린 대신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말투를 싫어하는지 알아 와 줬었다.
“……아가씨, 제가 사람을 죽이길 바라세요?”
하지만 그런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던 폴리나도 이번 부탁은 퍽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에일린은 폴리나의 일그러진 얼굴에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폴리나, 폴리나는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아?”
에일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안쓰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폴리나가 말릴 새도 없이 닭똥처럼 굵은 눈물이 후두둑 바닥을 적신다.
“흐윽, 읍!”
아이처럼 엉엉 우는 에일린을 내려다보던 폴리나는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지 마세요, 아가씨. 제가 아가씨의 행복을 그 무엇보다도 바란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캐서린 스왈렛을 죽일 방법을 찾아와. 죽여 달란 말이야! 그년이 죽어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에일린이 표독스럽게 중얼거렸다. 폴리나는 우는 에일린을 달래며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공녀를 싫어하시는 건가요?”
“캐서린이 자꾸만 대공비의 자리를 원하잖아! 저는 다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에넨체 대공비의 자리 따위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내 것을 빼앗으려고 든다고! 흐아앙!”
겨우 울음을 그쳤던 에일린이 다시금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발을 동동 구르던 폴리나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아가씨. 공녀를 죽일 방법을 알아 올게요. 울지 마세요.”
폴리나는 눈물이 더 나올 구석도 없을 것처럼 마른 에일린을 꼭 껴안은 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폴리나에게 응석을 부리듯 에일린이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리카르도도 루드비히도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에일린은 외톨이야, 혼자라고.”
“제가 있잖아요.”
에일린은 폴리나의 대답에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폴리나가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그녀는 꽤 유용한 편이었지만…….
‘평민이잖아?’
권력을 가져다줄 수 없는 사람은 에일린에게는 무용했다. 평민인 폴리나는 그녀에게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도 지니지 못했다.
“그래, 내게는 폴리나가 있어. 폴리나가 캐서린 스왈렛을 죽여 줄 거지. 그렇지?”
“……네, 아가씨.”
그럼에도 에일린은 자신을 위해 캐서린을 죽여 주겠다는 폴리나를 향해 천사처럼 환히 웃어 주었다.
***
‘어색해 죽겠네.’
캐서린은 민망한 작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고민하며 제 옆에 앉은 루드비히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그와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인 날 이후 처음 마주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해야 할지 아직 생각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내 멋대로 말을 뱉어 버렸다가, 또 울면 어떡해?’
캐서린은 애초에 말조심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캐서린은 맑은 눈물을 뚝뚝 흘려 대던 루드비히의 얼굴을 기억했다. 마음이 미어진다는 표현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은 깨달음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파졌다.
‘생각 정리를 다 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를 피하고 싶었는데.’
황실에서 초대장이 날아와 어쩔 수가 없었다. 건국제를 기념하는 황실 무도회를 가지 않을 수도, 약혼자로 세상에 공표된 루드비히를 파트너로 데려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자, 잠은 잘 잤어요?”
루드비히는 루드비히 나름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마차에 오른 이후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지독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캐서린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후회했다.
‘해가 중천인데 그딴 걸 왜 물어!’
지금 이 자리에 루드비히가 아닌 사교계의 인사들이 있었다면 그녀의 미숙함을 비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단정한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담담한, 언뜻 냉랭해 보이는 얼굴로 캐서린을 돌아본 루드비히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온 세상에 그녀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탐할 때는 언제고, 그는 내외라도 하듯 캐서린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캐서린은 대놓고 자신을 꺼려 하는 루드비히의 행동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됐어. 나도 말 걸지 말자.’
루드비히가 왜 냉랭한 태도를 고수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캐서린에게도 그에게 살갑게 굴 아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아직 에일린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들고 오지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상황을 설명해 주기라도 한다면 이해할 텐데.’
그는 그저 캐서린이 내민 서류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해 섭섭해하는 걸까?’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매끈한 옆얼굴을 힐끗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건 너무 당연했다. 그가 그녀의 호위 기사로 지낸 지난 일 년 그리고 죽기 전에 그녀의 곁을 지켰던 칠 년, 도합 팔 년의 시간 동안 루드비히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
‘단순히 내 핏줄만을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을 수도 있는 걸까?’
그는 그저 충실히 그녀의 기사 역할을 다할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보호했고,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해 주었으니까.
“아가씨, 황성에 도착했습니다.”
“응, 알겠어.”
마부의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까딱이자 루드비히가 자연스레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제 손 두 개가 들어가도 남을 것처럼 커다란 그의 손을 내려다보는 캐서린을 향해 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움직이기 힘드시지 않습니까.”
루드비히의 나직한 목소리에 캐서린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누구 때문에 걷기 힘든데! 아니, 그러니까 사과를 하는 거겠지.
혼자 파르르 열을 냈다 수그러뜨린 캐서린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아침까지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쑤셔서 신관까지 불러 치료를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을 텐데도 루드비히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만으로 그녀의 몸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유추해 냈다.
“…….”
한 걸음 뗄 때마다 몸을 움찔하는 캐서린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던 루드비히는 입술을 짓씹으며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짐승 같은 놈.’
사람만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제 따귀라도 후려치고 사과하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그녀에게 아무리 화가 났어도, 아무리 슬프고 서러웠어도,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안는 게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체력을 캐서린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아무리 캐서린이 원했다고 해도, 내가 자제했어야 했다.’
기사와 달리 몸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캐서린은 자신의 체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쾌감에 휩쓸려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루드비히는 그녀를 탐하는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루드비히는 절뚝이는 캐서린의 허리를 부축하듯 감싸 안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캐서린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면 주저앉아 자신을 믿어 달라 빌고 싶어질 것 같았다.
“레이디 캐서린 스왈렛, 그리고 루드비히 위그노아 경이 드십니다!”
캐서린과 루드비히의 등장에 소란했던 무도회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인기 좋은 가십지와 각종 타블로이드의 일면을 장식한 세기의 커플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과였다.
‘레이디 캐서린이 적자인 리카르도 에넨체 대신 서자를 택했다죠?’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스왈렛 공작가 입장에서는 너무 손해 보는 장사일 텐데요.’
‘글쎄요. 얼굴 아니겠어요?’
‘그럼 딱히 손해도 아니겠군요.’
그들과 가까운 거리의 귀부인 둘이 깃털 부채 뒤에 숨어 말을 소곤거린다. 캐서린이 남자 얼굴만 보고 약혼 상대를 선택했다는 듯한 뉘앙스인지라 그는 캐서린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드비히의 단단한 팔뚝에 엉겨 붙듯 매달린 캐서린이 오만할 정도로 고개를 치켜든 채 귀부인 둘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요, 앙시에 백작 부인, 마담 노테.”
“한층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레이디 캐서린. 약혼 축하드려요.”
앙시에나 노테나 스왈렛에 비하면 한미하기 그지없는 가문이었다. 언제 그녀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렸다는 양, 캐서린의 인사를 받은 귀부인 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캐서린은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제 옆에 선 루드비히의 어깨에 살짝 얼굴을 기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대들의 말이 그르지 않습니다.”
“……네?”
“남자는 얼굴 보고 고르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권력과 지위는 제게 있으니까.”
느긋한 캐서린의 말에 자신들의 대화가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귀부인들이 귓불을 붉혔다. 변명을 위해 허둥지둥 입을 여는 둘을 막은 캐서린은 루드비히를 이끌고 홀의 중앙으로 나섰다. 끝없이 높은 천장, 둥그런 아치 형태의 지붕은 탁 트인 유리로 만들어져 햇볕을 여과 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화사한 하오의 햇살을 받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에 사람들이 입을 벌린다.
“역시 잘 어울리긴 하네요. 리카르도 공자보다는.”
그들의 등장에 맞춰 시작된 노래에 춤을 추는 루드비히와 캐서린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앙시에 백작 부인의 말에 마담 노테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선남선녀이기는 하네요.”
햇살이 마치 그들만을 따라다니며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샹들리에의 크리스탈에서 번지는 찬란한 빛이 캐서린의 미소 위에 번진다. 익숙한 듯 그녀의 스텝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루드비히는 음악이 끝나는 순간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다정히 입을 맞췄다.
“뭐, 갑갑한 반델의 사교계에 저런 커플이 한 번쯤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들은 서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감까지 사위어들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루드비히와 캐서린은 악단이 다른 음악을 준비하는 순간을 맞춰 중앙에서 비켜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인식이 되었겠지.’
스왈렛과 에넨체의 약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에게까지 리카르도가 대체되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알려진 셈이었다. 에넨체 대공 옆에서 주먹을 꼭 쥔 채 붉으락푸르락 열을 올리는 리카르도를 발견한 캐서린은 후후,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흘리며 보란 듯이 루드비히의 손을 잡았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손깍지를 꼈다.
“……이건 조금 과하지 않을까요?”
손등에 입을 맞추거나 에스코트를 하는 건 다정한 약혼자나 정중한 기사가 할 법한 행동이었지만, 손깍지는 조금 낯 뜨거운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쑥스러워하는 캐서린의 반응에도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을 뿐이다. 캐서린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구는 루드비히를 향해 황제의 시종이 걸어 나왔다.
“위그노아 경,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이지?”
황제가 부른다는데도 루드비히의 무거운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반문에 시종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부 전선에 대해 보고받으실 일이 있으시다는데요.”
“아.”
시종의 설명에 그제야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며 캐서린을 돌아보았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인 양 취급하는 그의 행동에 캐서린은 그들이 냉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스왈렛의 캐서린이었는데.
“다녀와요. 나도 귀부인들과 할 말이 있으니까요.”
입이 가볍지만 낭만에 약한 귀부인들에게는 루드비히와 캐서린의 이야기를 조금 더 로맨틱한 이야기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마담 노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를 향해 캐서린이 걸음을 먼저 옮기고 나서야 루드비히는 시종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레이디, 목이 마르지는 않으신가요?”
캐서린이 앙시에 백작 부인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 시작할 무렵, 하녀 한 명이 샴페인 잔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유리잔 안에서 투명하게 찰박이는 샴페인은 은은한 과일 향을 풍기는 게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고마워요.”
귀부인들이 잔을 하나씩 들자, 목이 조금 마른 감이 있었던 캐서린도 따라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루드비히?”
캐서린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자신의 샴페인 잔을 무례하게 덥석 잡는 이가 루드비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에게서는 늘 청량한 향기가 풍겼으니까. 겨울바람처럼 서늘했지만, 계속 맡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잔을 낚아챈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의 탄탄한 등이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허망하게 허공에 붕 뜬 캐서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담 노테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음. 지금 경이 캐서린의 잔을 훔쳐간 건가요?”
“목이 말랐나 보죠.”
캐서린은 마담 노테의 물음에 떨떠름히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
“지, 지금 날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놔! 이거 놓으라고!!!”
에일린은 황실 무도회에 정식적으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행여라도 황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움을 살까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그녀는 루드비히의 손에 이끌려 한적한 복도에 내동댕이치듯 내쳐졌다.
“레이디 에일린.”
발악하는 에일린을 내려다보는 루드비히의 눈은 늘 그랬듯 무심했지만, 에일린은 왠지 모를 오한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았음에도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는 파렴치한이며, 지금 당장 무력한 당신의 목을 꺾는 데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날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요? 내가 뭘 했다고?!”
에일린의 물음에 잘생긴 미간을 슥 찌푸린 루드비히는 왼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콱 쥐었다.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무도회에서 쓰이는, 값비싸고 튼튼한 유리잔이 그의 손짓 한 번에 콰드득 부서진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찔려 피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흰 손을 붉은 피로 적신 루드비히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여전히 무감한 얼굴이었다.
“독극물을 몰라볼 정도로 무지한 기사 또한 아닙니다.”
루드비히의 말에 에일린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다.
‘어떻게 알아봤지?’
폴리나가 구해 준 독은 무색무취로 독약 중에서도 매우 상급에 속하는 독이었다. 값어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황제가 하사한 패물을 전부 팔아치워야만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에일린은 의심을 넘어서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듯한 태도의 루드비히를 올려다보며 당황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지금 당장 이 샴페인 잔을 들고 신관을 부르면 확인할 수 있겠죠.”
“설사 그 샴페인에 독이 들어가 있다고 한들, 왜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겨우 이성을 되찾은 에일린이 뻔뻔하게 반문했다. 떳떳하게 어깨를 편 에일린은 자신의 살인 미수가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애초에 범인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설사 범행이 발각된다고 해도, 폴리나가 전부 뒤집어써 줄 거야.’
독극물을 구한 사람도, 샴페인 잔에 독을 탄 사람도 전부 폴리나였다. 에일린은 그녀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며 놀라 쓰러지기만 하면 되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일린을 마주한 루드비히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폴리나를 이용한 건가요.”
루드비히의 나지막한 물음에 에일린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루드비히가 폴리나의 이름을 안다는 것조차 의아했으니까.
“포, 폴리나라니요?”
“레이디 에일린, 저는 당신을 협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캐서린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마치 협박을 할 수 있는 빌미라도 쥐고 있는 듯한 말이었다. 여즉 그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밀려들었다. 에일린은 발끝을 잔뜩 오므린 채 경련하는 입꼬리를 애써 굳혔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저는 당신이 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루드비히의 건조한 목소리에 에일린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쿵.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루드비히는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다. 쓰러진 레이디를 위해 손을 내미는 기사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더듬는 에일린을 향해 루드비히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폴리나의 딸이질 않습니까.”
루드비히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 끌려다닐 만큼 무예가 뛰어난 기사였다. 그럼에도 일개 소년에 불과했던지라,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쓴 어린 기사를 마주한 폴리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내가 사람을 죽였어. 넌 그토록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니?”
눈물 젖은 폴리나의 얼굴을 마주한 루드비히는 여전히 적장의 목구멍에 칼을 쑤셔 넣은 채였다. 콰직. 사람 뼈가 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튄 소년의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폴리나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그녀를 죽이러 온 사신을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턱 끝까지 덜덜 떨며 물어 오는 폴리나의 물음에 어린 루드비히는 그녀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태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당신이 죽였습니까?”
소년이 판단하기에 폴리나는 죄책감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외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렇지 않게 피 묻은 검을 슥슥 닦는 기사들과 비슷한 존재를.
“……아니. 내 딸, 내 딸이 사람을 죽였어. 내 딸이 로잘린 님의 아이를 죽여 버렸어!”
폴리나는 절망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여인이 엉엉 우는 소리가 병사들이 검을 맞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사위어 든다.
“내 출신 때문이야. 그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귀족이 되고 싶어 했거든.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원래는 정말 착한 아이인데.”
더듬더듬 변명을 덧붙이는 폴리나의 말에 루드비히는 무관심했다.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지도, 비난을 하지도 않는 루드비히를 붙들고 한참이나 울던 폴리나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유령처럼 자취를 감췄다.
루드비히가 폴리나를 다시 만난 건 승전을 이루고 돌아온 황성 내에서였다. 그는 그녀가 황제가 아꼈던 정부의 하녀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며, 그 탓에 그녀의 딸이 죽였다는 사람이 황제의 사생아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구태여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태생이 무심한 탓에 그는 폴리나와 에일린의 비밀을 영영 발설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에일린이 캐서린을 위협하지만 않았다면.
“폴리나는 제 하녀일 뿐이에요.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에일린은 아귀 같은 얼굴로 아득바득 루드비히의 말을 부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남자가 제 비밀을 알 리가 없다.
‘절대, 절대 아니야!’
본인조차 잊고 있었던 그녀의 출신을 루드비히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루드비히는 에일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는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 제게는 마땅한 증거가 없지만, 제가 입을 열면 황제가 신관을 불러 확인하려 들 겁니다.”
가뜩이나 핏줄에 예민한 황실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사생아인 그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황제가 나서지 않아도 신전이 나서서 확인하려 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겁먹은 동물처럼 바짝 굳은 에일린을 바라보며 루드비히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 과정을 버틸 수 있다면 당신 뜻대로 구십시오.”
“……캐서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내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말인가요?”
에일린은 루드비히에게 매달린 채 간절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여태 내게 무관심했던 것처럼 계속 신경 꺼 줘요! 네?”
퍽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루드비히는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손톱만큼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에일린을 밀어내며 캐서린을 떠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두 번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켜 내야 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의 약점을 틀어쥐고 겁박하는 것은 루드비히의 성정과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더는 볼일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 멀어지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에일린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어떻게 안 거지?’
그녀가 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태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는 비밀이었다.
폴리나는 황제의 정부였던 로잘린의 하녀였고, 여자에게 쉽게 질리는 황제는 로잘린에게서 딸이 태어났음에도 십 년이 넘게 모녀를 찾지 않았었다.
로잘린이 죽었다는 소식에 십 년 만에 황제가 제 어린 딸을 보기 위해 찾아온 날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에일린은 난생처음 황가의 화려한 금빛 마차를 보았다.
‘나도 저 마차에 타 보고 싶어.’
불쑥 똬리를 튼 욕망에 어린 에일린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에일린은 황제가 찾지 않는 딸임에도 불구하고 황가의 피가 섞인 소녀가 늘 부러웠었다. 그녀의 푸른 핏줄을 타고 흐를 고귀한 피를, 자신은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해 서럽기까지 했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애였어.’
로잘린의 딸은 병약한 소녀였다. 황실에서 보내 주는 호화로운 음식을 아무리 먹여도 피골이 상접한 꼴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나이는 같았지만, 제 어깨에도 닿지 못하는 마른 소녀를 우물 안으로 밀어 버리는 일은 에일린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폐하.”
소녀의 피가 묻은 손을 빗물에 씻어 버린 에일린은 황가에서 보내온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웃으며 황제를 맞이했다.
“제가 폐하의 딸인 에일린이랍니다.”
그녀의 인생을 구원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캐서린 스왈렛, 루드비히 위그노아.”
캐서린 스왈렛, 루드비히 위그노아.
에일린은 죽여야 될 사람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복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자신이 아니었다. 에일린은 루드비히를 죽일 방법을 떠올렸다는 듯 빠르게 복도를 벗어났다.
“허.”
루드비히와 에일린이 모두 빠져나가 쥐죽은 듯 조용했던 구석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일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인영은 곧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경.”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품에 안긴 채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다정하게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던 루드비히는 정색하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루드비히.”
그녀가 예쁜 목소리로 자신을 ‘경’이라고 칭할 때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이고 들어 온 익숙한 칭호였음에도. 그녀에게만큼은 기사로 남고 싶지 않다는 본능 때문일까.
“부디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루드비히의 간절한 청에 캐서린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을 너무 꼭 붙들고 있는 탓에 얼굴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루드비히의 가슴에 제 뺨을 바짝 붙인 캐서린은 북소리처럼 쿵쿵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에 당황해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래요, 루드비히. 지금 본인이 살짝 과하다는 거 알고 있죠?”
루드비히는 캐서린을 꼭 껴안은 작금의 상태에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스왈렛이 좋은 마차를 사용하며 훌륭한 마부를 고용했다지만, 필연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마차 안에서도 전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꽉 껴안은 채.
돌아온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발끝이 땅에 닿을 새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마차로 직행했다. 놀란 사람들의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은 체, 그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이 날을 세워 댔다.
“위그노아 경이 저렇게 무례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요?”
놀란 마담 노테의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당황한 캐서린이 막무가내로 자신을 들고 황성을 빠져나오려는 루드비히를 말려 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캐서린을 마차에 실을 뿐이었다.
‘누가 보면 납치라도 당한다고 생각했겠어.’
캐서린은 루드비히에게 가타부타 설명도 듣지 못하고 끌려오면서도 겁을 먹지는 않았다. 루드비히가 에일린에게 어떤 제안을 받았든, 또 그 제안을 받아들였든 간에 자신을 해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과잉보호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예요.”
캐서린의 예상대로 루드비히는 그녀를 해하려고 들기는커녕 그녀의 안위를 염려해 황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제의 눈길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과한 이목을 끌면서까지.
자신을 가볍게 탓하는 듯한 캐서린의 목소리에 루드비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목숨이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루드비히의 입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긴 했지만, 캐서린은 자신이 독을 먹을 뻔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기실 무섭지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벌어질 그 어떤 가해도 막아낼 것 같아서.
“루드비히가 날 지켜 줬으니까요.”
싱긋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캐서린은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고 사랑스러웠다. 루드비히는 제 코앞에 놓인 달콤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흐읏.”
갑작스럽게 입을 맞춰 오는 루드비히의 행태에 캐서린은 몸을 버둥거렸지만, 그가 그녀의 팔다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꽉 안고 있는 탓에 아무런 저항도 되지 못했다. 당황해 움찔하는 캐서린의 혀를 얽어내면서 루드비히는 그녀의 조막만 한 얼굴이 닳겠다 싶을 정도로 쓸어 만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사라지는 것을 상상하면 심장이 아파 왔다. 그가 전쟁 중에 겪었던 독극물을 캐서린이 입에 가져다 댔을 상상을 하니 발밑이 전부 꺼지는 듯한 두려움에 숨까지 덜컥 막혀 왔다.
이런 감정을 어째서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는가.
루드비히는 불쑥 고개를 치켜세운 억울함에 캐서린의 윗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야!”
루드비히의 발칙한 심술에 캐서린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의 그는 또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 무표정했고, 눈물 자국은커녕 감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건조한 얼굴이었는데 울 것처럼 느껴지다니.
캐서린은 그의 메마른 눈가를 닦아 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예요?”
“당신이 절 슬프게 합니다.”
“제가 뭘 했다고 슬퍼요.”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니까요.”
루드비히의 날카로운 말은 그녀의 허를 찔렀다. 정확했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은 캐서린은 더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저, 또다시 리카르도와 에일린에게 허망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두렵습니다.”
“……왜요?”
놀라 휘둥그레 커지는 캐서린의 녹안을 빤히 바라보던 루드비히는 제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니까요.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어도 안고 싶고,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감는 것조차 아까운 순간이 있습니다. 아니, 늘 그랬습니다.”
“…….”
루드비히는 또 예고도 없이 제 마음을 고백했다. 진중한, 청년 특유의 열기를 띤 루드비히의 눈빛에 캐서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였다.
“받아 달라 조르지 않겠습니다. 제 마음을 의심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루드비히.”
캐서린은 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캐서린이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루드비히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뺨에 새털처럼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게는 당신보다 소중한 이가 없습니다. 에넨체 대공의 자리가 아니라 황제의 자리를 손안에 쥐여 준다고 해도 당신과 맞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아,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요!”
제발.
캐서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절절한 마음은 잘 알겠으니 그만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달래듯 캐서린의 머리를 토닥이는 루드비히의 손길에서는 평소와 같은 들끓는 정염 대신 한없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캐서린은 난생처음 누군가의 품 안에서 안심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잠에 든다 해도 괜찮을 것처럼.
평온한 밤이었다.
***
“오늘도 연락이 없어?”
“……네, 아가씨. 아직 연락이 없으시네요.”
몇 날 며칠을 굶어 수척해진 몰골의 에일린은 폴리나의 멋쩍은 대답에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에일린을 만나야 직성이 풀렸던 리카르도가, 벌써 일주일째 그녀를 찾지 않고 있었다. 결국, 루드비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작정하고 며칠을 꼬박 굶주린 에일린은 기운이 없는 몸을 침대 밖으로 이끌고 나왔다.
“마차를 불러 줘. 에넨체에 가 봐야겠어.”
리카르도가 캐서린에게 집적대는 꼴을 확인하고 열이 받았던 건 에일린이었지,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기분이 상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폴리나, 진주로 만들어진 파우더 좀 가져와 줘.”
에일린은 도무지 뚜왈렛 룸까지 기어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루드비히가 자신을 멋대로 황성의 한적한 복도로 끌고 갔던 그날 밤, 그에게 겁간을 당했다고 주장할 요량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는 행세를 하기 위해 에일린은 건국제 이후로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충분히 병자처럼 보이는 하얀 얼굴 위에 그녀는 진주를 곱게 빻아 만든 가루를 팡팡 뿌렸다. 그나마 생기가 있던 붉은 입술 색이 가라앉자, 그녀는 완연한 환자처럼 보였다.
“콜록, 콜록.”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나 아파 보여?”
“네. 오늘은 나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느낌이 안 좋아요.”
“하지만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아.”
작게 헛기침까지 하는 에일린은 곧 쓰러질 사람처럼 가녀려 보였다. 걱정스러운 폴리나의 만류에도 그녀는 자신의 가냘픈 어깨가 잘 드러나는 드레스를 챙겨 입고 에넨체로 나섰다.
“공자님, 에일린 아가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왜?”
“글쎄요. 이유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일단 알았어. 들어오라고 해.”
집무실에 틀어박혀 대공 몰래 부른 노름꾼들과 포커를 치던 리카르도는 집사의 말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에일린 반델.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감히 나를 속여?’
리카르도는 건국제를 기념하는 황성 무도회 날을 떠올리며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루드비히와 캐서린이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춤을 추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아 황성 구석에 박혀 독한 위스키를 퍼마시던 그는 의도치 않게 루드비히와 에일린의 밀회를 목격했다.
“당신이 폴리나의 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면, 더는 캐서린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루드비히의 경고에 하얗게 질려 가던 에일린의 얼굴을 떠올린 리카르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여즉 에일린과 놀아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춰 주기도 했지만, 사생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감히 출신도 천한 여자가 에넨체 대공가의 후계자인 나와 연인 행세를 하려고 해?’
에일린의 미모에 반해 먼저 접근한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죄 잊은 채, 리카르도는 차가운 시선으로 방 안에 들어서는 에일린을 힐끗했다.
“……리카르도. 단둘이 대화하고 싶어.”
간만에 보는 에일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새벽 이슬을 긁어모은 것처럼 청초한 미모에 노름꾼들이 떨어져라 턱을 벌렸다. 헛기침 한 번으로 사람들을 물린 리카르도는 평소보다 유독 소심한 자세로 문가를 서성이는 에일린을 돌아보았다.
“와서 앉아.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으응.”
리카르도의 말에 에일린은 느릿느릿, 아픈 몸을 이끌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한눈을 감고 봐도 그녀의 몸이 평소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챌 법도 하건만 리카르도는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갑자기 왜 찾아온 거지?”
딱딱하고 사무적인 리카르도의 태도에 에일린은 조금 당황했지만, 제 목적을 잊지 않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흐읏, 끕! 리카르도……!”
그녀는 금세 어린아이처럼 설움 그득한 얼굴이 되었다. 에일린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당장 달려가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처연한 자태에 리카르도는 움찔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엉 우는 에일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 에일린.”
“위그노아, 루드비히 위그노아 경이…….”
리카르도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에일린은 리카르도가 제게 몸을 붙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위그노아 경이 나를 강제했, 끕, 어.”
“걔가 뭘 강제했다는 거야?”
울음에 숨이 먹혀 끕끕거리면서도 에일린은 제 말을 끊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둥그레 눈을 뜨는 리카르도의 팔을 덥석 잡은 그녀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자식이 날 강제로 범했다고!!”
“……뭐?”
리카르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벌렸다. ‘그’ 루드비히 위그노아가, 여성을 강제로 범했다니. 그는 제 배다른 동생을 좋게 평가하는 부분이 단 한 구석도 없었지만, 에일린의 말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리카르도의 불신을 알아차린 에일린이 황급히 말을 덧붙인다.
“황성 무도회에서,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갔어.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야.”
에일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폴리나라면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 가며 연기를 해 줄 것이고, 싫다는 에일린을 무도회에서 끌어내는 루드비히를 본 사람들이 꽤나 많았으니까. 그가 점잖기로는 제국에서 손에 꼽는 루드비히 위그노아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분명 만류해 줬을 만큼 난폭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리카르도는 에일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딱히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제 앞에서 엉엉 우는 에일린이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날 도와줘, 리카르도.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당장 교수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파렴치한이야. 네가 대공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 주고 그를 벌하라 읍소해 주기만 한다면…….”
“루드비히 그 새끼가 널 범했다라.”
리카르도는 다급하게 이어지는 에일린의 말을 짧게 끊었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리카르도를 향해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넌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꼴이군.”
“……뭐라고?”
리카르도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에일린은 제 귀가 잘못 들었겠지, 싶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충격을 받았나 봐. 지금 네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아.”
“잘못 들은 것 아닌데? 넌 내가 아닌 놈에게도 다리를 벌려 준 거잖아. 더럽다고.”
리카르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에일린은 더는 입술만 꼭 깨물었다. 숨이 턱 막혀 오는 기분에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다. 리카르도가 쓰레기 같은 인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제 연인에게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사용한 장난감 따위는 쓰고 싶지 않아, 에일린.”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
에일린은 사람이 바뀐 것처럼 날카롭게 눈을 치켜세우며 리카르도의 팔뚝을 붙잡았다. 뾰족한 손톱 끝이 제 피부를 파고들자, 그는 짜증을 내며 그녀를 바닥으로 밀쳤다.
“아! 아프잖아, 젠장. 더러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
“리카르도 에넨체!!!”
나무 바닥에 쾅 엎어진 에일린이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리카르도는 에일린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우스워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내가 더는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우리, 별 사이 아니었잖아.”
별 사이가 아니라니. 대공비로 삼아 주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말 잘 듣는 개처럼 리카르도만을 따랐던 에일린이었다. 물론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그를 이용해 오긴 했지만, 리카르도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나를 대공비로 삼아 주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건 네가 질리기 전에 한 말이지. 몰랐는데 너 같은 부류의 여자는 금세 질리더라고.”
캐서린 스왈렛과 달리.
에일린은 리카르도가 구태여 덧붙이지 않은 말을 읽어 냈다. 어안이 벙벙해 넋을 놓은 에일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카르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리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 된 에일린을 향해 그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네가 황제 폐하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던데, 어떻게 된 거지?”
소문이 아니라 그가 직접 들은 대화였다. 에일린의 반응을 관찰하듯 눈을 가느스름히 뜬 리카르도를 에일린은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내가 폐하의 딸이 아니라니, 그, 그런 소문을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건데?”
“뭐. 여기저기서 들려오더군. 내게 따로 할 말은 없는 건가?”
그녀는 자신을 떠보는 듯한 리카르도의 말에 그제야 이 상황의 전말을 알아차렸다.
‘내 비밀을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버리는 거다. 더는 그녀가 쓸모없다고 판단해서.
루드비히의 입을 통해서건, 그 누구를 통해서건 리카르도는 에일린이 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없어. 난 폐하의 딸이 맞으니까.”
“그래? 알겠어. 그럼 이만 나가 봐.”
에일린의 단호한 부정에 리카르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를 부축할 시종조차 없는 상황인지라 제자리에서 꿋꿋이 홀로 일어난 에일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조금 전과 달리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감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돌아보았다.
“위그노아는 어떻게 처리할 건데?”
“사생아가 일으키는 염문 따위를 가주에 오를 내가 어찌 사사로이 챙기겠어.”
루드비히에게 겁간을 당했다는 주장을 호소해 그를 대공가에서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던 에일린은 리카르도가 제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녀의 미소를 발견하지 못한 리카르도가 혀를 끌끌 차며 사족을 덧붙였다.
“게다가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내가 네 말을 마냥 믿어 줄 수도 없고.”
그녀가 황제의 사생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먹이는 게 분명했다.
“그래?”
에일린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을 소매 아래에 숨긴 채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어. 더러운 피가 섞여 들어와서 그런가. 공기가 텁텁하네.”
리카르도는 가냘픈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에일린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세찬 바람이 들어찬다. 휙. 공작가를 상징하는 늑대가 수 놓인 붉은 커튼이 피보라처럼 휘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헉!”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리카르도는 순식간에 가까워진 지면에 발악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에일린!!! 이거 놔!!! 밖에 누구 없어?!!”
리카르도를 밀어뜨린 에일린은 하반신만 간신히 난간에 걸친 채 공중에 데롱데롱 매달린 그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눌러 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리카르도의 몸이 허무하게 아래로 낙하했다. 낭자한 비명이 바람 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리카르도는 분명 무가로 공고히 자리 잡은 에넨체 대공가의 후계자였지만, 훈련을 게을리한 덕인지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잘 가, 리카르도.”
콰직.
신체가 으깨지는 소리가 리카르도의 집무실까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빼꼼 내민 에일린은 두개골이 산산조각 난 리카르도의 모습을 관조하며 베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 통쾌해.’
진작 죽여 버릴걸.
리카르도 에넨체는 늘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캐서린 스왈렛, 루드비히 위그노아, 리카르도 에넨체.”
캐서린 스왈렛, 루드비히 위그노아, 리카르도 에넨체.
그녀가 죽이고 싶은 사람 셋 중 한 명은 제거한 꼴이었다.
‘이제 둘만 남았네.’
리카르도를 이용해 루드비히를 없앨 작정이었지만, 리카르도만이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아니었다. 콧소리를 흥얼거리던 에일린은 누군가 리카르도의 시체를 발견하기도 전에 먼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악, 리카르도!”
그 누구도 그녀가 리카르도를 밀어 버렸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
“……리카르도 에넨체가 죽었다고?”
“네, 아가씨.”
“노름꾼들과 술을 진탕 마시며 뒹굴다가 창문에서 떨어졌대요.”
캐서린은 밀드레드의 설명에 기가 막혔지만, 헛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리카르도 에넨체가 비참하게 죽길 그녀보다 바란 사람은 없겠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죽어 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잠깐, 리카르도 에넨체가 정말로 죽었다면…….’
대공의 후계자 자리는 자연스럽게 루드비히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대공의 하나뿐인 아들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대공의 지위를 위해 나와 결혼할 필요도 없어졌네.’
캐서린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뺨을 쓸었다. 루드비히의 절절한 고백이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뭐, 루드비히가 에넨체 대공가를 장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캐서린은 에넨체를 망가뜨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리카르도와 에일린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복수의 대상이었던 리카르도가 너무 허무하게 죽어 버려 전의를 상실한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며 밀드레드를 돌아보았다.
“에일린 반델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대요. 노름꾼들과 리카르도가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구요.”
밀드레드의 말에 캐서린은 두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딱 짚이는 구석은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리카르도는 분명 난봉꾼인 데다 도박과 여색에 빠져 사는 인간이었지만, 창문에서 떨어질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죽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
물론 그의 죽음에는 아무런 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캐서린은 건조한 얼굴로 제 턱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드비히는, 에넨체로 돌아갔겠지?”
“네. 대공이 급하게 불러들인 모양이에요. 아가씨가 주무시고 계셔서 인사를 못 하고 가셨어요.”
그럼 간밤에 자신을 찾아왔었다는 걸까.
‘그냥 깨워도 되는데.’
캐서린은 불쑥 찾아든 루드비히의 정중함을 탓하는 생각에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장례식이 곧 치러지겠네. 벨리나, 드레스를 준비해 줘.”
“네, 안 그래도 가져왔어요!”
원수의 죽음이긴 했지만 리카르도는 대귀족이었다. 에넨체의 장례식에 캐서린이 불참할 수는 없을 터. 그녀는 벨리나가 가져온 새까만 드레스를 안아 올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밀드레드, 너는 에일린에게 돌아가서 그녀를 감시하렴. 아무래도 수상하니까.”
“네, 아가씨.”
캐서린은 고분고분한 밀드레드의 태도에 만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영상구, 꼭 챙겨 가고.”
캐서린은 에일린이 결국에는 밀드레드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한 독극물은 매우 고가의 물건이라 황실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그녀가 구하기엔 퍽 어려웠을 테니까.
‘돈을 안 쓰고 부릴 만한 사람은 결국 밀드레드뿐이겠지.’
그녀에게는 진즉 먹여 놓은 뇌물이 있을 테니까.
물론 캐서린은 밀드레드조차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다. 캐서린은 밀드레드 몰래 그녀의 등 뒤에 달아 놓은 작은 영상구를 흘깃했다.
‘둘 중 하나는 건지는 게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죽어 버렸지만 에일린은 살아남았다. 캐서린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못했다.
***
‘어쩜 이렇게 예상대로 행동하는지.’
과거의 그녀가 에일린과 리카르도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캐서린은 바닥에 엎어진 채 발악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에일린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리카르도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죽이려고 들 줄이야. 밀드레드의 귀띔을 받고 미리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은 캐서린은 자신을 에넨체의 북쪽 숲으로 유인하는 에일린을 순진한 척 따라 들어왔다.
“리카르도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리다니, 저 너무 슬퍼요.”
“그게 절 숲으로 불러낸 이유인가요?”
“네. 남들 앞에서 우는 건 너무 창피하잖아요. 캐서린이라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죽어!!! 당신도 내가 리카르도처럼 죽여 버리겠어!!!”
내 앞길을 방해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다 죽여 버릴 거야!
리카르도의 죽음에 마음이 미어지는 척 엉엉 울던 그녀가 갑작스레 돌변해 단검을 높이 치켜든 순간, 캐서린의 기사 한 명이 튀어나와 에일린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당연히 그녀는 발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한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에도 소란스러운 소리에 달려 나온 루드비히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발악하는 에일린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캐서린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치신 곳은요.”
정신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이리저리 휙휙 돌리는 루드비히의 팔을 붙든 캐서린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전혀 없어요, 루드비히.”
리카르도의 장례식이 한참 진행 중인 상황에 다음 대 가주인 그가 어떻게 자리를 비운 걸까. 캐서린은 검은 수트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루드비히의 몸을 힐끗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예요?”
에일린과 리카르도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미 그에게 충분히 해 놓은 상태였다. 에일린이 꽁꽁 숨겨 두었던 비밀까지 알게 된 터라 캐서린은 충분히 제 안전망을 확보한 상태였다.
“당신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기에.”
그럼에도 루드비히는 유난이라고 보일 정도로 캐서린의 안위를 걱정했다. 무감했지만 왠지 모르게 끙끙 앓는 것처럼 보이는 루드비히의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캐서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대공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나만 따라다니면 어떡해요.”
“전 황제가 된다고 해도 캐서린만 따라다닐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진심입니다.”
루드비히의 진담처럼 들리는 농담을 한 귀로 흘려넘긴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드레스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면사포가 하늘하늘 움직였다. 우아한 웨딩드레스부터 정숙한 상복까지 어울리지 않는 옷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캐서린을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 루드비히의 눈앞에 뜬금없이 동그란 보석 세 개가 불쑥 들어온다.
“어쨌든, 루드비히, 여태 계약을 잘 이행해 준 대가를 드려야겠죠.”
“……이게 뭡니까?”
루드비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기실 보석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캐서린의 의도를 알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이 리카르도를 죽였다는 증거,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 그리고 그녀가 황제 폐하의 딸이 아니라는 증거가 고스란히 담긴 영상구예요.”
“그런데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떨떠름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 폐하가 꽤나 고마워할 증거들이잖아요? 제가 열심히 모은 거긴 하지만, 루드비히의 몫으로 써요.”
캐서린 스왈렛은 황제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캐서린 스왈렛이었다. 반면,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황제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영영 위그노아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렇다면 스왈렛의 데릴사위로 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캐서린은 문득 자신이 루드비히가 서자 신세를 벗어나게 된 걸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오므렸다.
“큼, 흠. 어쨌든 서자인 당신이 뒷배도 없이 에넨체를 통솔하려면 혼자 꽤나 애를 먹을 거예요. 폐하의 신임이라도 있어야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캐서린의 설명에 루드비히가 와락 인상을 찡그린 채 비슷한 질문만을 반복했다. 캐서린은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자신의 기사를 올려다보며 그를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따사로운 햇볕이 그들의 머리 위를 장식하듯 반짝였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제가 왜 에넨체를 혼자 통솔합니까.”
“아, 물론 후에는 대공비를 들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말이에요.”
루드비히의 기초적인 질문에 캐서린은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공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작위를 양도한다면 대공부터 에넨체를 오래 보좌한 집사까지. 게다가 캐서린도 그를 도와줄 용의가 충분했다.
“필요하다면 저도 도와줄 수…….”
선뜻 호의를 베풀려던 캐서린은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장면에 혀를 깨물 뻔했다.
뚝. 뚝.
아름다운 남자는 우는 모습조차 아름다워서, 캐서린은 제 발등을 적시는 투명한 물방울에 뱃속이 조여 올 것만 같았다.
“왜, 왜 또 울어요?”
당황한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붙잡은 루드비히가 처연한 입술을 움직인다.
“당신은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왜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만 하십니까.”
“네?”
캐서린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도대체 언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제 마음을 부정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그녀는 그제야 루드비히의 간절한 청을 기억해 냈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진심이었어요?”
당연히 캐서린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인 줄 알았다. 적어도 반쯤은.
“…….”
캐서린의 무심한 말에 루드비히의 바다처럼 짙은 벽안에 다시금 물기가 차오른다. 캐서린은 허둥지둥 그의 목을 껴안으며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 일단 울지 말아 봐요! 뚝!”
구슬픈 눈물을 뚝뚝 흘리는 루드비히의 모습에 캐서린은 마음이 미어졌다. 발밑이 와르륵 무너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어쩔 줄 몰라 하며 루드비히의 눈물을 닦아 낸 캐서린은 자신보다 배는 큰 너른 어깨를 꼭 껴안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라니까요? 경의 마음 잘 알았어요!”
“도대체 뭘 아셨다는 겁니까?”
“대공비가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후두둑.
낯뜨거워 차마 제 이름을 언급하지 못한 캐서린의 말에 잠시 멀쩡했던 루드비히의 푸른 눈에서 또다시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캐서린은 기가 막혀 그의 뺨을 붙들었다.
그냥 좀 알아들으면 안 되나.
“아니, 그러니까! 내, 내가 필요하다는 거죠? 알겠다고요. 경만 괜찮으면 전 이 계약을 깰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니까!”
“저와 혼인해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루드비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캐서린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는 거짓말처럼 눈물을 그쳤다.
‘설마 우는 게 연기는 아니었겠지.’
순식간에 그는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은 그가 울었다는 사실조차 알아내지 못할 만큼 멀끔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 익숙한 냉정한 표정을 되찾은 그는 영상구를 품에 넣은 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에일린 반델은 재판을 받아야 하니 구금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의 부름을 받고 속속들이 몰려나온 에넨체의 기사들이 그의 명을 받들고 고개를 숙인다. 대공의 자리에 그린 듯이 어울리는 모습이라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루드비히가 잘난 게 왜 내가 흐뭇할 일이야?’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캐서린은 스스로의 행동에 부끄러워져 자신을 놀릴 준비를 잔뜩 하고 있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리나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가씨, 지금 행복하시죠?”
“아니. 막상 저렇게 짐승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는 않네.”
벨리나의 물음에 캐서린은 흙바닥을 손톱으로 짚으며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악을 쓰는 에일린을 흘깃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단 말이야! 저 여자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리카르도 에넨체도 저 여자가 죽였어! 캐서린 스왈렛이 죽였다고!”
악에 받친 목소리였지만, 에일린의 헛소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망령이 든 게 분명하다며 혀를 끌끌 찬 에넨체의 기사단장이 손을 들어 그녀를 기절시켰다. 축 늘어진 에일린을 한심하게 바라본 벨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캐서린의 귓가에 후후 바람을 집어넣었다.
“아니, 저 이상한 여자 때문에 느끼는 감정 말고요. 루드비히 경 말이에요.”
“응?”
“요즘 위그노아 경 덕에 행복하시잖아요.”
“……그러게.”
캐서린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벨리나의 말을 인정했다.
에일린은 황제에게 첨탑에 평생 구금되는 형을 받았다.
‘신성력을 이용한 시험을 거쳐 친딸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해도 그간의 정이 있어 목숨을 거둘 수는 없는 모양이지.’
아니,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일 수도 있었다. 캐서린은 탑에 갇혀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할 에일린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렇게나 뽐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평생 아무도 못 보고 살려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
그녀의 인기척을 알아차렸는지 쥐 죽은 듯 구석에 박혀 있던 에일린이 번쩍 고개를 치켜든다.
“……캐서린 스왈렛!”
바짝 창살에 달라붙은 그녀가 시체처럼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곧 쓰러질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치곤 우악스러운 손길에 간수가 달려 나와 그녀를 저지했다.
“스, 스왈렛 공녀. 날 좀 도와줘요!”
“…….”
“제발, 제발요. 폐하께서 절 탑에 가두신대요! 전 그렇게 살 수 없어요!”
그녀를 원망하려나 싶었던 에일린은 캐서린에게 욕설을 내뱉는 대신 털썩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뜨겁고 굵은 눈물방울이 더러운 바닥에 잔뜩 흩어진다. 흐윽, 윽. 처음 듣는 에일린의 진정한 울음소리가 조용한 감옥을 울려 퍼졌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방법이 없어요.”
물론 도와주고 싶지도 않았다.
캐서린의 냉정한 대답에 에일린은 바닥을 손톱 끝으로 긁으며 아득바득 목소리를 높였다.
“돈을 줘서 날 빼내 주든지 하란 말이야! 이 모든 게 너 때문이잖아!!!”
“왜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황제 폐하의 딸을 죽인 것도, 리카르도를 죽인 것도 전부 에일린의 선택이었는데요.”
캐서린은 에일린의 발악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반박했지만, 에일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이야! 그 모든 일이 전부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아악!!! 아아아악!!!
이성을 잃은 에일린의 비명에 간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캐서린은 이미 미친 사람이 된 양 짐승처럼 구는 에일린을 건조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리카르도는 죽었고, 에일린은 미쳐 버렸어.’
이로써 그녀의 복수가 완성되어 버렸다. 죽음에서 돌아온 후,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하루하루를 버텨 왔던 캐서린은 문득 자신이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로넌 스왈렛 또한 캐서린을 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제 아버지에게까지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복수를 위해서만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녀가 어릴 적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들은 복수를 끝마치고 찝찝한 죄책감에 힘들어했지만, 무너지는 에일린의 모습에 캐서린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죄책감에 힘들기는커녕 통쾌하기만 해서 그녀는 발악하는 에일린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에일린, 즐거운 인생 보내요.”
다시는 나와 마주할 기회가 없을 테니.
우아하게 등을 돌린 캐서린은 울부짖는 에일린을 뒤로한 채 감옥을 벗어났다.
***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오늘이 임명식이었다지.’
오늘은 루드비히가 위그노아의 성을 벗어던지고 정식으로 에넨체에 입적하는 날이었다. 그에게는 적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와 재산이 배분될 것이며 대공은 과거와 달리 그가 입적하자마자 대공위를 넘기고자 했다.
‘그럼 이제 위그노아 경이 아닌 에넨체 대공인 건가.’
이제는 캐서린이 그에게 공대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대공 전하. 입에 잘 붙지 않는 호칭을 읊조리던 캐서린은 창가에 주저앉아 구경할 것도 없는 밤하늘을 흘깃했다.
“……보고 싶네.”
그가 자신을 지키는 호위 기사였던 시절에는 질리도록 봤던 얼굴이거늘, 그가 에넨체에 불려간 이후로는 본 날이 손에 꼽았다. 자신이 대공이 되든 황제가 되든 캐서린만 있으면 된다는 그의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캐서린을 찾지 않았으니까.
‘아냐, 의심하지 말자.’
희미하게 올라오는 불신에 캐서린은 흠칫 몸을 떨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연인을 믿지 못하는 게 옳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또 울 거야.’
단순히 루드비히가 또다시 눈물을 뚝뚝 흘릴까 봐. 그게 무서웠다. 루드비히의 우는 얼굴을 떠올린 캐서린은 톡톡,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라도 내리는 건가?”
유리 창문을 타닥탁 두드리는 소리는 일종의 신호처럼 규칙적이었다. 소리의 근원을 따라 몸을 기울인 캐서린은 갑작스레 마주한 얼굴에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벌컥 창문을 열었다.
“루드비히!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벨리나나 밀드레드가 깨서 달려올까 크게 소리치지도 못한 캐서린은 한 팔로 창가에 매달린 루드비히를 허둥지둥 끌어 올렸다. 삼층 건물을 혼자 기어오른 루드비히가 창문을 넘는 데에는 딱히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저 그녀가 제게 매달리는 게 좋아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은 무슨. 당장 저번 주에 봤는걸요.”
방금까지 저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면서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말에 새초롬히 시선을 돌렸다. 루드비히는 그런 그녀의 턱을 낚아채 진한 키스부터 시작했다.
“제게는 영원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제정신을 못 차리는 캐서린을 바라보며 루드비히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든 그는 코끝을 맴도는 장미향이 취할 것처럼 황홀하다고 생각했다.
“영원 같았다면서 스왈렛에는 왜 오지 않았던 거죠?”
“한시라도 빨리 절차를 밟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대공이 되고 싶었어요?”
호기심에 둥근 눈을 커다랗게 뜬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인 루드비히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네. 그래야 당신과 하루라도 더 빨리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
대공자의 위치로는 대공과 스왈렛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만 결혼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그가 에넨체 대공이 된다면 말이 달라졌다. 에넨체 대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숨이 막히도록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캐서린, 제가 당신을 훔쳐도 되겠습니까?”
언젠가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캐서린은 부끄럽게도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지난했던 삶이었다. 죽음을 겪고 돌아온 삶은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
그것이 제 답이었다.
약탈당한 대공비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