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화의 씨앗
무도회를 겸한 리카르도와 캐서린의 약혼식은 약소한 축에 속했지만, 그래 봤자 대귀족의 약혼식이었다.
‘리카르도 에넨체와 에일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새로 쓴 초대장을 전달했어.’
구태여 리카르도를 목록에서 제외한 건 캐서린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가 바람 난 남편에게 배신당해 죽임까지 당했다는 걸 알 리도 없을 텐데, 벨리나의 고집이었다.
“아가씨가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약혼 상대를 바꾸시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리카르도 에넨체가 아주 몹쓸 놈인 거죠?”
그저 캐서린이 변덕을 부리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는 듯, 벨리나는 빠른 속도로 리카르도 에넨체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사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긴 하네.’
그녀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 준 이도 기실 벨리나뿐이었다.
‘아버지조차 내가 스왈렛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며 외면하셨는데.’
그녀가 죽기 직전, 스왈렛 공작은 새로 들인 공작 부인에게서 막 아들을 본 참이었다. 후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공작은 캐서린을 버렸다. 에넨체와 진행한 결혼에서 이미 빼먹을 건 다 빼먹었다고 판단한지라 캐서린의 쓸모가 없어진 탓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을 대공비라는 자리까지 올려 줬으면 몸가짐을 바로 했었어야지! 이딴 더러운 추문을 몰고 스왈렛에 돌아올 생각을 해?!”
에넨체에서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으니 공작가로 돌아오고 싶다는 캐서린의 말에, 공작은 질색하며 그녀의 청을 거절했었다.
“너는 이제 내게는 없는 자식이다. 스왈렛의 영광에 해를 끼치는 자식 따위 내게는 필요치 않으니.”
“더는 딸이 필요하지 않으신 건 아니고요?”
캐서린은 공작이 품에 안은 갓난아기를 올려다보며 애써 억울함을 삼켜 낸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아버지도 나를 이용하셨는데 내가 그를 이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속속들이 모여드는 손님들의 향연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그녀는 성장을 돕기 위해 각종 장신구와 드레스를 들고 선 하녀들을 돌아보았다.
“그게 내가 오늘 입을 드레스니?”
“네, 아가씨. 마담 니드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드레스예요. 정말 아름답죠?”
드레스나 장신구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되레 성가셔하는 캐서린을 위해 대신 발품을 팔겠다고 나선 하녀 한 명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치수대로 정확히 만들었으니 안 맞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주근깨가 잔뜩 박힌 콧잔등이 눈에 익은 하녀가 자랑스레 펼쳐 든 풍성한 벨라인의 드레스는 마치 새하얀 눈으로 빚은 것처럼 눈이 부셨다. 알알이 장식된 진주가 화려하진 않았지만 우아한 멋을 뽐내는.
“그래?”
우아하게 걸어나가 뜨왈렛 룸 정중앙에 자리 잡은 소파에 앉은 캐서린은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게 입고 싶은데.”
약혼식 당일, 갑작스레 드레스를 바꾸겠다는 캐서린의 선언에 그녀의 드레스를 담당하는 하녀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다른 드레스가 입고 싶다고.”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캐서린은 화려한 드레스가 가득한 옷장으로 걸어가 붉은 드레스 하나를 짚어 냈다.
“나는 오늘 이걸 입을 생각이야, 밀드레드.”
머메이드 형식의 검붉은 드레스는 약혼식에 입기에는 다소 화려한 느낌이 있었다. 캐서린의 말에 눈에 띄게 경직된 하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하지만 제가 아가씨의 약혼식 드레스로 준비한 건 마담 니드페의 드레스인데요?”
“그리고 약혼식의 당사자는 나지. 내가 입을 드레스를 내가 고른다는데, 불만이라도 있는 거니?”
캐서린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하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하녀의 마음을 물속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당연히 불만이겠지. 에일린의 사주를 받았을 테니까.’
칠 년 전의 오늘, 에일린 반델은 약혼식의 당사자인 캐서린과 매우 흡사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등장했었다. 캐서린은 분명 미인이었지만, 우아하고 귀여운 느낌의 벨드레스는 누가 봐도 사슴처럼 곧게 뻗은 팔다리를 자랑하는 캐서린보다는 자그마한 체구의 에일린에게 잘 어울렸다.
‘전체적인 장신구도 마치 리카르도와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계열의 루비였지.’
반면, 캐서린의 장신구는 리카르도의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에메랄드였다.
초대장을 제대로 읽지 않은 객이라면 약혼식의 주인공이 캐서린이 아닌 에일린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었는데…….’
캐서린은 순진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에일린과 리카르도는 이미 그때부터 캐서린을 농락하고 있었던 거다.
“리카르도, 어째서 약혼반지의 보석을 루비로 선택한 거죠? 스왈렛이 약혼 선물로 에넨체에 보낸 보석은 분명 에메랄드였을 텐데요.”
스왈렛은 에메랄드 광산으로 쌓은 부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약혼반지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나눠 끼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캐서린은 자신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리카르도의 반지에 의아했었다.
“아, 나는 개인적으로 루비를 좋아해서. 하지만 스왈렛인 당신은 당연히 에메랄드를 더 좋아할 테니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았소.”
약혼반지의 모양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리카르도와 캐서린이 앞으로 쌓아 나갈 단단한 유대관계라는 그의 말에 캐서린은 더는 그의 의중을 캐물을 수 없었다.
‘단단한 유대관계는 개뿔…….’
에일린이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 루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뒤통수가 찌르르 아파 올 정도의 배신감이란.
‘그놈의 루비, 실컷 끼라지.’
어차피 화려한 붉은 머리의 캐서린에게는 잘 어울리지도 않는 보석이었다. 연약하지만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에메랄드가 박힌 티아라를 손에 쥔 캐서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돋보이게 해 줄 드레스를 턱짓했다.
“저 드레스를 입을 테니 맞춰서 준비하도록 해. 아, 그리고 벨리나는 검은 연미복을 하나 준비해 줘.”
화사한 금발의 온후한 느낌의 미모를 자랑하는 리카르도와 에일린은 온몸을 새하얗게 치장하고 나타날 것이다. 어설프게 그들을 따라 했다가는 세간의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블랙과 레드.
가볍게 진행되는 약혼식에 그리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지만, 좌중을 압도하기에 적합했다.
‘오늘 눈에 띄어야 할 사람은 나와 루드비히니까.’
“그, 그러실 수는 없어요!”
간밤 파악한 루드비히의 치수를 벨리나에게 건네준 캐서린은 자신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하녀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저희가 열심히 준비한 드레스와 장신구는요? 너무 이기적이신 거 아닌가요?!”
캐서린은 당돌한 하녀의 외침에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가 제 지적에 주춤하기라도 했다고 생각한 건지, 하녀가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저희 어머니가 당신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 텐데요.”
“음?”
“마담 벤지에께서 스왈렛의 공작 영애로서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배려하라는 가르침을 사사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게다가 아가씨, 오전에 제가 아가씨 침실을 청소하다 수상한 흔적들을 매우 많이 발견했어요.”
하녀는 캐서린의 사프롱이자 가정교사인 마담 벤지에의 딸, 밀드레드였다. 한미한 자작가의 여식이긴 했지만 평민 출신인 다른 하녀들 사이에서는 유일한 귀족인지라 으스대길 좋아하곤 했다.
“밀드레드.”
천천히 턱을 든 캐서린은 루드비히와 보낸 밤을 트집 잡아 자신을 협박하려 드는 밀드레드를 향해 눈꼬리를 휘었다. 스왈렛의 장미 따위의 수식어가 그린 듯이 어울리는 캐서린의 난감한 미소에 하녀는 그녀의 사과를 예상했다.
캐서린은 새침한 외모와 달리 좋게 말하면 순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성정이었다. 하녀들에게조차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일 정도로.
‘다른 드레스를 고르는 건 자신을 위해 발품을 판 내 노력을 무시하는 꼴이니까, 당연히 미안해하시겠지. 게다가 약혼 전에 남자를 침실에 끌어들인 치부 또한 감추고 싶을 테고.’
밀드레드는 확신했다. 스왈렛 공작과 마담 벤지에가 캐서린을 그렇게 순종적으로 키웠으니까. 움직이기 쉽게 실을 매단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네, 아가씨.”
“너를 쳐다보려니 목이 아프구나. 앉으렴.”
사과를 기대했건만, 캐서린의 생뚱맞은 권유에 밀드레드는 떨떠름히 캐서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암녹색 벨벳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밀드레드의 행동에 캐서린은 미소가 가신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감히 주인과 마주 앉으려 하니.”
“……네?”
“자, 여기 앉아.”
캐서린이 섬섬옥수로 가리킨 것은 그녀의 애완견 페니의 방석이었다. 페니가 이갈이를 하는 동안 물고 뜯은 탓에 여기저기 해진 방석으로 시선을 돌린 밀드레드는 황망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보고 개 방석에 앉으라고요?”
“그래. 한 번만 더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면 혓바닥을 뽑아 버릴 테니 적당히 하고.”
캐서린의 날 선 목소리에 밀드레드는 그제야 움찔하며 무릎을 꿇었다. 제 어깨 높이에 있는 밀드레드의 머리채를 붙잡은 캐서린이 붓꽃처럼 우아한 입술을 움직였다.
“어리석은 밀. 네가 아무리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 마담 벤지에의 딸이라지만, 그녀조차 일개 가신일 뿐이란다.”
스왈렛 공작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공작가의 일원이 일개 하녀에게 무시받는 일을 좌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가주 또한 아니었다.
‘상대하기 귀찮아 넘겼을 뿐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기실 캐서린은 밀드레드가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걸 칠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윗사람으로서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했으나 돌아온 것은 콱 깨물린 발등뿐이라.
“네가 주인인 내게 이렇게 대든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공작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대, 대들다뇨, 아가씨. 저는 감히 아가씨께 대든 게 아니라…….”
“쉬이, 착하지. 입 닥치렴.”
조곤조곤 속삭이며 밀드레드의 입을 막은 캐서린은 웃으며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준비된 가위를 손에 들었다.
서걱.
썩둑. 썩둑.
밀드레드의 긴 갈색 머리가 쥐에게 파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 되고 나서야 가위를 내려놓은 캐서린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밀드레드를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벤지에 영애로 오늘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었을 텐데, 아쉽게 됐구나.”
진심으로 밀드레드를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캐서린의 기색에 하녀들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중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벨리나가 주저앉아 우는 밀드레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 지하감옥에 가둬 두렴. 물 한 모금 주지 말라고 간수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벨리나는 늘 사용인들에게 과할 정도로 너그러웠던 캐서린의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반발하지 않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
캐서린은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기다란 레이스 장갑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도회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늘의 무도회가 루드비히와 캐서린의 약혼식을 위한 자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스왈렛 공작과 그의 측근들 그리고 리카르도와 에일린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늦는구나.’
칠 년 전 오늘과 마찬가지로 리카르도는 자신의 약혼식―이라고 알고 있을―에 뒤늦게 등장할 요량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과 에일린이 남매처럼 우애가 깊은 사이라는 것을 핑계로 캐서린 대신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무도회에 등장했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남매 같은 사이에 불과하다며, 나를 집착하는 여자로 몰고 갔었지.’
그때는 그런 약혼자를 둔 캐서린을 가엾게 여기는 동정의 시선들이 수치스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들의 등장이 가볍게 기대가 될 정도였다.
‘에일린이 내 약혼식을 망치려고 했다는 증인까지 확보했으니, 뭐.’
하녀들 중 한 명이리라 어림짐작을 하고 있긴 했지만 밀드레드가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티 내줄 줄은 몰랐다. 그녀는 퍽 곱게 자란 축에 속하는 하녀였으니, 며칠 굶기고 가볍게 매질하는 것 정도로 쉬이 에일린이 제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토해 낼 것이다.
“리카르도 에넨체 대공자님이 드십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발코니에 쳐진 휘장 뒤에 선 캐서린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등장하는 리카르도를 흘깃했다. 태양을 곱게 빻아 실로 자아낸 듯이 화려한 금발의 남녀 한 쌍이 여유로운 얼굴로 홀에 들어섰다. 캐서린의 예상대로 그들은 미리 맞춘 것처럼 비슷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오늘이 마치 그들의 약혼식 날인 것마냥.
“에넨체 대공자님과 함께 참석하셨군요, 반델 양. 오랜만입니다.”
스왈렛 공작가의 가신 중 한 명인 센트 남작이 싱긋 웃으며 에일린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리카르도와 캐서린의 약혼 발표 무도회인 오늘, 보란 듯이 약혼 당사자인 리카르도를 옆에 끼고 등장했는데 놀라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듯싶었다.
“아, 네. 오랜만이네요, 남작님.”
떨떠름한 얼굴의 에일린에게 공작가의 집사가 다가가 허리를 숙인다.
“에넨체 대공자님과 반델 영애는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집사는 리카르도와 에일린이 같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캐서린이 미리 언질을 줬으니― 차분한 태도로 그들을 귀빈석으로 안내했다.
“그럼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을 모셔 오겠습니다.”
손님들을 각각 지정된 자리에 앉힌 집사는 캐서린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휘장을 향해 손짓했다.
촤르륵.
시종들에 의해 스왈렛 공작가의 상징인 백조가 섬세하게 수 놓인 검은 커튼이 걷히며 그림자만 보이던 캐서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세상에.”
리카르도와 에일린을 주목하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제히 사라졌다. 약혼식에서 흔히 쓰이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은 에일린을 흘깃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 위에 선 캐서린에게 순식간에 쏠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아름다운 사람인 건 알았지만, 오늘은 정말 눈이 멀 정도이군요.”
리카르도 근처에 앉은 누군가의 말에 에일린은 어깨를 움찔했다.
‘왜 밀드레드가 준비한 드레스를 입지 않은 거지?’
원래 캐서린이 입어야 할 드레스는 에일린을 위해 맞춘, 그녀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오늘 내가 쟤보다 눈에 띄기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에일린은 황제의 딸이긴 했지만, 사생아인 그녀에게 정식적으로 배속되는 재산이 없어 그리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오늘을 위해 어머니의 유품까지 팔아 준비한 루비 팔찌를 쓰다듬은 에일린은 캐서린의 가는 목을 장식하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목걸이는 심지어 보통 에메랄드가 아닌 빛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알렉산드라이트였다. 쉽게 구할 수도 없는 보석이었지만, 경매에 내놓으면 에일린의 팔찌 따위 수십 개는 살 수 있을 만한 가치를 자랑하는.
‘리카르도는 내게 저런 목걸이를 선물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도대체 뭐 한 거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에일린은 캐서린의 차림새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평소 즐겨 입던 우아한 드레스가 아닌, 곧게 뻗은 새하얀 어깨가 드러나는 과감한 디자인의 드레스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은은한 빛이 흐르는 새틴으로 몸을 장식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다 못해 숨을 앗아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약혼 발표날에 저런 야한 드레스를 입다니, 천박하기 짝이 없네. 그렇지 않아?”
“…….”
“리카르도?”
제 물음에 답을 하지 않는 리카르도를 돌아본 에일린은 입을 헤 벌린 채 캐서린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
등장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캐서린은 단상 위에 올라 여왕처럼 사람들을 굽어살폈다.
‘아버지는 마침 에넨체 대공과 함께 계시네.’
공식적으로 스왈렛 공작가와 에넨체 대공가의 약혼을 발표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그 대상이 리카르도 대공자가 아닌 사생아 루드비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리카르도와 에일린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스왈렛 공작뿐이었다.
‘에넨체 대공이야, 사생아를 팔아 나를 얻을 수 있게 됐으니 당연히 반색할 입장이지.’
루드비히는 대공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아들이긴 했지만 사생아, 스왈렛은 공작가의 외동딸이었다. 에넨체 대공은 변경된 초대장과 캐서린이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읽고 횡재했다 싶었으리라.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지금도 싱글벙글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무척 아름답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잠시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뻔했소.”
“고마워요, 리카르도.”
캐서린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칠 년 전 약혼식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가 에일린의 곁을 떠나 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에넨체 대공이 그리 눈치를 줘도 에일린의 옆을 떠나지 않더니.’
캐서린과 리카르도의 약혼을 공표하는 자리였건만, 리카르도는 에일린이 몸이 좋지 않다며 우스꽝스럽게도 그녀를 부축하며 캐서린을 에스코트했었다. 에일린의 안색은 그때보다도 더 파리해 보이건만 그는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은 걸까.
“당신 어깨가 이렇게 예쁜 줄은 미처 몰랐군.”
침을 꿀꺽 삼킨 리카르도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캐서린의 몸을 샅샅이 훑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오프숄더 형태의 드레스라 그대로 노출된 그녀의 하얀 어깨에 그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 기다란 인영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듯 끼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나직하고 듣기 좋은 울림이 있기는 했지만, 캐서린을 대할 때와는 달리 등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제야 루드비히가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냉정한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렸다.
“……루드비히?”
약혼식에 초대받지 못했을 루드비히의 등장에 리카르도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리카르도의 중얼거림에 루드비히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잘생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옆자리가 마치 원래부터 제 자리였다는 양 차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루드비히는 붉은 드레스의 캐서린과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리카르도보다 한 뼘은 더 큰 헌칠한 키, 그의 왜소한 체구를 전부 가릴 정도로 너른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딱 맞춰 입은 자켓의 주름이 팽팽해진다.
북부인치고 왜소한 체격의 리카르도는 늘 루드비히의 체구를 질투했다.
“도대체 누굴 보고 형님이라는 거냐. 더러운 사생아 주제에.”
결국 그는 보는 이들이 많은 자리에서 체면도 잊고 루드비히의 혈통을 들먹였다. 루드비히가 사생아라는 말은 에넨체 대공이 제 아랫도리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도 되었다. 스스로 제 가문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리카르도의 어깨를 누군가 우악스레 붙잡았다.
“리카르도, 입 조심하거라. 루드비히는 네 동생이다.”
에넨체 대공의 엄중한 목소리에 얼굴까지 붉혀 가며 콧김을 내뿜던 리카르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성을 차린 듯 보였지만, 대공이 물러서자마자 리카르도는 다시금 캐서린에게 바짝 붙어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늘 모습을 보니 당신도 드디어 내게 잘 보일 마음이 생긴 모양이오.”
“……뭐라고요?”
“기분이 상할까 저어돼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늘 당신의 고고함이 불만이었소. 아무리 공작가의 외동딸이라 한들, 남편으로 맞이할 남자의 입맛에는 맞추려고 노력을 해야지.”
리카르도가 짖는 소리에 캐서린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스왈렛의 외동딸인 그녀가 단순히 자신과 약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계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양 구는 태도도 태도였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리카르도는 자신의 불만을 감추려고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약혼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만 내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게 어떻겠소? 레이디의 미덕이란 상냥하게 웃으며 애교로 남편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일 텐데.”
캐서린이 공작가에서 교육받은 것은 사근사근하게 남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대등한 가주로서 가문을 통솔하는 방법이었다.
“처음 듣는 미덕이군요.”
떨떠름한 캐서린의 대답에, 리카르도는 뻔뻔하게도 유리 인형 장식처럼 얌전히 서 있던 에일린을 데려와 제 곁에 세웠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차갑게 구니 에일린과 나의 사이를 음해하려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는 그저 남매처럼 우애 깊은 사이일 뿐이거늘.”
세상 어떤 오라비가 다 큰 여동생의 뒷목에 입술을 비비겠는가. 캐서린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상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일린과의 관계를 대놓고 드러내기에, 정말로 혼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
캐서린은 에일린과 리카르도의 다정함에 눈을 감고 무시했다. 그만큼 관심이 가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리카르도에게 바란 것은 남편으로서의 애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선을 넘었어.’
그는 에일린과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넘어 캐서린의 자리를 내연녀에게 넘겨주기 위해 에넨체 대공가를 통솔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가주였던 그녀를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했으니까.
“노력을 해서인지, 오늘의 당신은 평소보다 배는 더 아름답소.”
“……남편이 될 사람의 취향에 부합한다면 좋겠네요.”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개소리에 생긋 웃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러자 냉랭한 얼굴로 곁을 지키던 루드비히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척 부합합니다.”
참기 힘들 정도로요.
루드비히의 말에 캐서린은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내려 그의 바지춤을 흘깃했다. 자켓이 살짝 들릴 정도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시선 끝에 걸린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긴 했지만, 제법 무게가 나가는 천이 들릴 정도의 강직함이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수납 방향을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네.’
벨리나가 그녀의 부탁을 받아 급하게 구한 검은 정장은 비록 기성복이지만 루드비히를 위해 제작된 것처럼 어울렸다. 하지만 어젯밤 목도했던 ‘그것’의 크기를 생각하면 움직이기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미안해요. 나름 당신 치수를 생각해서 구한 옷인데, 작아서 불편할 수도 있겠어요.”
“당신만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캐서린의 사과에 담담히 고개를 저은 루드비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눈을 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무심한 얼굴로 그는 캐서린이 놀랄 만한 말을 제법 자주 했다. 게다가 리카르도의 말처럼 헛소리 취급하며 넘기기엔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하다.
“……그, 그런가요.”
결국 캐서린은 제 속내를 꿰뚫을 것처럼 깊고 아름다운 그의 벽안을 피하며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럼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으니 약혼식을 진행해 보도록 할까요?”
에넨체와 스왈렛의 약혼식 진행을 맡은 젊은 신관이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사람들의 이목이 대치 중이었던 리카르도와 루드비히에서 회색 성의를 입은 신관에게로 옮겨 갔다. 약혼의 대상이 리카르도에서 루드비히로 바뀌었다는 말을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인지, 젊은 신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캐서린 스왈렛 영애는 앞으로 나와 주시길.”
성전을 품에 안은 신관의 말에 진즉 단상 위에 올라서 있던 캐서린은 정중앙을 차지하는 샹들리에 바로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본연의 광채는 덜하지만, 화사한 빛 아래에서는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에메랄드 티아라가 반짝였다. 단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캐서린의 장신구 하나하나를 세세히 살펴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에일린은 또다시 쓰라린 속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리카르도가 저 여자랑 결혼만 하면, 스왈렛의 에메랄드 광산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어.’
스왈렛의 재산을 삼킬 수만 있다면 리카르도는 캐서린의 티아라보다 배는 더 화려한 티아라를 자신에게 안겨 줄 것이다. 에일린은 질투심에 부들부들 떨려 오는 주먹을 애써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캐서린 스왈렛 영애의 약혼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다들 궁금하시겠죠. 저도 오늘 아침 갑작스레 들려온 소식에 깜짝 놀랐답니다.”
신관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사람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 당일, 약혼 대상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니까. 늘 형식적이고 진부한 약혼식이나 결혼식을 진행해 왔던 신관의 입장에서, 오늘 캐서린의 약혼식은 재미있는 연극과 다름없었다.
“그럼, 레이디 캐서린의 약혼자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신관의 말에 리카르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루드비히보다 먼저 단상을 올랐다. 회귀 전 약혼식에서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그를 배려해 낮은 굽의 구두를 신었지만, 오늘 캐서린은 10cm가 넘어가는 아찔한 하이힐을 신은 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은 캐서린과 엇비슷한 키의 리카르도를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에넨체 대공자가 제 생각보다 훨씬 왜소하군요.”
“혹독한 북부를 이끌 후계자가 저토록 가녀려서야…….”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듯, 리카르도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캐서린, 지금 신은 구두는 무엇이오? 분명 에넨체 대공가에서 약혼식에서 신을 만한 구두를 보냈을 텐데.”
리카르도는 자신과 캐서린의 키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적잖이 신경 썼다.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캐서린에게는 높은 구두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렸음에도, 늘 낮은 굽의 신발을 신으라며 강제할 만큼.
“에넨체 대공가를 무시하는 처사인 건가? 실망스럽군.”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촘촘히 속눈썹이 박힌 눈만 깜빡였다. 약혼식의 의상은 서로 준비해 주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스왈렛이 보낸 보석을 착용하지 않은 건 리카르도도 마찬가지이질 않은가.
“제 약혼자가 골라 준 구두인걸요.”
“그대의 약혼자가 골라 줬다니? 난 그대의 구두로 이런 높은 하이힐 따위를 골라 준 적이 없는데.”
“네. 그러니까, 리카르도 당신 말고 제 약혼자 말이에요.”
물론 루드비히는 침실에서 쫓기듯 나간 탓에 캐서린의 구두를 골라 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나, 그녀의 뻔한 거짓말에 리카르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말고, 다른 약혼자라니…… 캐서린, 그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오?”
“제 머리는 매우 멀쩡하답니다, 리카르도 에넨체.”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날카로운 비난에도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생긋 웃었다. 반면 리카르도의 얼굴은 그녀의 미소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일그러져만 갔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리카르도의 물음에 캐서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구두를 신은 덕도 있지만, 감히 육체적으로 이길 수 있으리란 상상조차 가지 않는 거대한 루드비히와 달리 리카르도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대상이었다. 다정하게 리카르도의 어깨 위에 얹어진 먼지를 탁탁 털어 내 준 캐서린은 그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재빨리 그를 단상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으악!”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우스꽝스럽게 뒤로 넘어진 리카르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평소 에넨체 대공가를 뒤에 업고 못되게 군 탓인지, 사람들 사이에 엎어진 그를 부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리카르도!”
그가 남매처럼 우애가 깊은 사이라고 주장하는 에일린만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갈 뿐이었다.
“캐서린 스왈렛,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요! 약혼 자리에서 상대를 밀어 버리다니요!”
에일린이 가녀린 목소리로 캐서린을 원망하며 울먹였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 위에 내 약혼자도 아닌 사람이 올라와 있길래 내려가라고 부탁했을 뿐이에요. 제 손짓 한 번에 기사인 그가 나비처럼 팔랑이며 날아갈 줄은 몰랐네요.”
캐서린의 차분한 목소리로 제 손목을 들어 보였다. 쥐면 바스러질 듯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힐끗댄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 리카르도를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리카르도 공자.”
캐서린의 사과에 리카르도를 둘러싼 사람 몇몇이 키득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혼자 발을 헛디딘 모양인데, 어서 일어나는 게 낫지 않겠나.”
캐서린의 사촌이자 스왈렛 공작가의 가신인 오넬 남작이 쯧, 혀를 차며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힐난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리카르도는 벌게진 얼굴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캐서린을 노려볼 뿐이다.
“약혼자도 아닌 사람이라니? 스왈렛의 약혼 상대는 분명 에넨체일 텐데!”
리카르도의 흔들리는 시선은 캐서린과 단상을 장식한 휘장을 향하고 있었다. 스왈렛의 백조와 에넨체의 늑대가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나란히 장식된.
“네. 제 약혼 상대는 에넨체의 사람이죠.”
리카르도의 물음에 캐서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손을 뻗었다. 팔목까지 올라오는 섬세한 레이스 장갑을 낀 그녀의 손등 위에 장신의 남자가 입을 맞췄다.
“당신 말고, 당신 동생 말이에요.”
캐서린은 화사하게 웃으며 제 옆에 선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키가 엇비슷했던 리카르도와 달리,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음에도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루드비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캐서린과 그림같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루드비히가 에넨체 대공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출신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위그노아 경이 저 정도의 미남자였나요?”
“평소에는 늘 수수하게 입고 다녀 몰랐었네요. 세상에, 저 넓은 어깨 좀 보세요.”
루드비히는 장식 하나 없는 기사단의 옷을 입고 다닐 때조차 사교계의 스캔들을 몰고 다닐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금실이 화려하게 장식된 새까만 정복을 차려입은 그는 아래로 밀려난 리카르도와 비교되어 더더욱 빛이 나 보였다.
“루드비히 위그노아.”
캐서린은 앞머리를 위로 올려 반듯한 이마나 날카로운 턱선이 잘 보이는 루드비히의 미모에 만족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복수를 위한 선택이었고 여전히 결혼에 대한 로망 따위는 없었지만, 볼품없는 남편보다는 잘생긴 남편이 백배 천배 나은 법이다.
“네, 캐서린.”
“각오는 됐겠죠?”
캐서린이 속삭이는 듯한 말에 루드비히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게 당신의 뒤가 아닌 곁을 지킬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캐서린.”
루드비히의 말에 젊은 신관이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와 캐서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스왈렛의 캐서린, 그리고 에넨체의 루드비히의 약혼을 신 엘레이오스의 이름으로 축복하겠습니다.”
에넨체의 루드비히.
비록 에넨체의 성은 받지 못했지만, 루드비히의 출신은 분명 에넨체였다. 신관의 말에 이를 부득 갈며 일어난 리카르도는 콧김을 내뿜으며 앞으로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감히 나서려는 것이냐. 여기서 더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말거라, 리카르도.”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의 움직임을 파악한 에넨체 대공에 의해 손쉽게 막히고 말았다. 캐서린은 황망한 얼굴의 리카르도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에일린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의 아버지, 스왈렛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
‘단단히 화가 나셨군.’
스왈렛 공작이 자신을 직시하며 이를 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오직 캐서린뿐이었다.
공작가의 체면과 위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가 보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 자리에서 감정을 표출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는 공작의 노여움 그득한 눈빛을 모른 체 고개를 돌린 후 루드비히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맞서겠다 각오하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캐서린.”
그런 캐서린의 손에 깍지를 낀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아이를 달래듯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 늘 정중하기만 했던 그에게서 들어 보지 못한 어투였다.
“경은 이제 제 기사가 아닌 약혼 상대인걸요.”
“제가 당신의 기사가 아니게 되는 순간 따위는 없을 겁니다.”
맹세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캐서린은 순간, 그가 황실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자신을 섬기는 기사로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지킬 레이디를 선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사의 몫이었지만, 황실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기사들은 보통 황후나 황녀를 섬기기 마련이었다.
‘황실에서 분명 압박을 줬을 텐데도, 루드비히는 끝까지 나를 자신의 레이디로 지켜 줬지.’
기사로서 처음 선택한 레이디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리카르도가 캐서린과 루드비히의 관계를 부적합한 내연의 관계라며 몰고 갈 수 있었으리라.
“약혼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캐서린.”
과거를 복기하느라 캐서린이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신관의 기도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캐서린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숨을 고르기 위해 발코니를 찾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긴장으로 달궈졌던 뺨을 식혔다. 캐서린은 실크처럼 부드러운 밤의 장막 속으로 손을 뻗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네.’
도무지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 하루였다. 캐서린은 자신을 찾는 사람이 그녀가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루드비히이길 바랐지만,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은 손은 그의 것보다 훨씬 더 짜리몽땅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앞뒤 다 잘라먹은 무례한 말의 주인은 잔뜩 흥분한 기색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리카르도였다. 위로 쓸어 올린 그의 화려한 금발이 무도회장에서 퍼져 나오는 노란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갑자기 약혼 상대를 내가 아닌 루드비히로 바꾸다니. 스왈렛 공작과 상의는 한 건가?”
“아니. 내 약혼이니까 굳이 상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
캐서린의 무심한 대꾸에 흠칫한 리카르도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내게 하대를 한 건가?”
“먼저 하대를 한 건 리카르도 당신인 것 같은데.”
캐서린은 상대가 공대를 해 주지 않는데 구태여 공대를 써 줄 만한 위치의 사람이 아니었다. 에넨체는 황실과 밀접한 대공가이긴 했지만, 스왈렛은 남부를 통솔하는 대영주였으니까.
“큼, 흠……. 그건 내가 조금 흥분을 해서. 어찌 됐든,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길 바라오.”
“무슨 설명을 바라는 건가요? 에넨체는 스왈렛의 캐서린과의 약혼을 원했고, 스왈렛은 그대로 이행했을 뿐인데.”
에넨체의 피가 섞인 루드비히와 약혼을 했으니 스왈렛 공작가는 대공가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은 셈이었다. 하나, 리카르도는 캐서린이 자신을 배신하기라도 했다는 양―실제로 뒤통수를 때리긴 했지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니라 루드비히와 약혼을 하지 않았소!!! 이건 나에 대한 기만이오, 캐서린 스왈렛!”
리카르도는 기만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싶었다. 캐서린은 에일린과 리카르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당장 루드비히와의 약혼을 취소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캐서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리카르도를 길쭉한 팔이 막아섰다. 캐서린은 이제 익숙해질 것만 같은 싸한 루드비히의 체향에 콧잔등을 움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낮은 목소리. 무표정한 루드비히의 얼굴은 단정했지만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리카르도의 것보다 배는 더 위협적이었다.
“제 약혼녀에게 무슨 짓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형님.”
루드비히는 리카르도를 놀리듯 그가 질색할 만한 호칭을 덧붙였다. 루드비히의 물음에 리카르도가 발작하듯 몸서리를 쳤다.
“그놈의 형님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빌어먹을 사생아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형님이라고!!!”
우악스레 인상을 일그러뜨린 리카르도가 루드비히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물 흐르듯 그의 손을 피할 뿐 아니라 휘청하는 그의 목깃을 붙들어 발코니 난간에 얹어 놓기까지 했다.
“헉.”
갑작스레 난간에 엉덩이를 걸친 채 허공에 붕 뜬 리카르도는 캄캄한 밤하늘이 코앞에 펼쳐지고 나서야 제 흥분을 가라앉혔다.
“루, 루드비히. 격 떨어지게 폭력을 쓰지 말고 대화를 하자꾸나.”
먼저 흥분해 달려든 것은 저였으면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제 목을 잡고 있는 루드비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질 않느냐. 분명 에넨체와 스왈렛이 협의한 것은 캐서린과 나의 약혼이었어.”
리카르도는 루드비히가 미리 캐서린과 합을 맞췄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캐서린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제 몸이 잘 드러날 만큼 달빛이 훤히 들어오는 곳으로 걸어 나섰다.
“글쎄요. 위그노아 경은 딱히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녀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제 머리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루드비히가 소유욕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 곳곳에 남긴 키스 마크를 발견했다.
“……설마, 설마 루드비히와 먼저 몸을 섞기라도 한 것이오?”
놀라 입을 쩍 벌린 리카르도는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와 약혼하기로 했던 캐서린 스왈렛, 당신이?”
눈앞에 펼쳐진 진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캐서린은 리카르도를 이해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러니까 과거의 캐서린은 레이디가 가져야 할 태도나 가치관, 그러니까 정절 따위를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도 눈이 있으니까요. 같은 에넨체라면, 당연히 경에게 끌릴 수밖에 없죠.”
캐서린은 리카르도와 가벼운 한담이라도 하듯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곁을 지키듯 선 루드비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유혹하듯 간질거리는 손길에 루드비히는 그녀가 리카르도의 약을 올리기 위해 부러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리카르도.”
“더러운 년!”
캐서린의 맥 없는 사과에 간신히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리카르도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을 쉬이 제압했던 루드비히 대신, 캐서린에게 삿대질을 하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약혼을 약속한 나를 두고 어찌 사생아 따위와 몸을 섞을 수 있단 말인가! 엉덩이가 가벼워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약혼을 약속한 상대를 두고 다른 사람과 몸을 섞은 건 리카르도가 먼저였다. 캐서린은 구태여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보란 듯이 루드비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훅 올라오는 달큰한 체향에 루드비히가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스왈렛은 에넨체와의 약혼을 약속했을 뿐이라고.”
“내 아버지가 이 일을 좌시할 것 같은가?!”
“대공 전하와는 이미 협의가 된 사안인데요. 설마 몰랐어요?”
리카르도가 루드비히와의 약혼에 대해 전혀 몰랐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캐서린은 놀란 척 눈을 홉떴다. 대공과 이런 일조차 상의하지 못하는 사이인 거냐, 그토록 대공가에서 제구실을 못 하고 있는 거냐라는 의미가 함축된 물음에 리카르도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튼, 이만 나가 줘요. 나는 내 약혼자랑 마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은 ‘이야기’로 포장했지만, 캐서린의 야릇한 미소에 리카르도는 그들에게 남았다는 이야기의 다른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가진 적도 없는 여자를 빼앗긴 기분에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무심하게 지켜보던 루드비히가 손을 움직였다.
“얼른 꺼져 주십시오, 형님.”
루드비히가 갑작스레 제 엉덩이를 움켜잡은 탓에 캐서린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리카르도가 앞에 있는지라 티 내지 못하고 몸을 움찔했다.
“제가 조금 급해서.”
루드비히의 단정한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미처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드러났다. 루드비히는 리카르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덜렁 들어 무도회장 안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달칵.
발코니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벌레 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적막한 공간에서 유독 크게 들려왔다.
“……문은 왜 잠가요?”
리카르도에게 루드비히와 자신의 사이를 공표한 것까지는 캐서린의 의도였다. 리카르도에게 자신이 루드비히의 여자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켜 달라는 부탁까지 했으니, 그의 앞에서 엉덩이를 움켜잡은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커튼은 왜 치는 거지?’
문을 잠그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커튼까지 꼼꼼하게 친 루드비히가 빙글 몸을 돌려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상태 그대로 발코니의 난간까지 밀려났다.
“아무래도 제가 어제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절대 아니었다. 부족은커녕 넘쳐나다 못해 과하다고 캐서린은 감히 확신할 수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루드비히의 얼굴에 꿀꺽 침을 삼키느라 부정의 말을 내놓지는 못했다.
“뭐, 뭐가 부족해요?”
“리카르도가 당신과 제 사이를 바로 눈치 못 채지 않았습니까.”
그건 리카르도가 너무 멍청한 데다 캐서린에게 관심이 없어 시선을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이 무어라 변명의 말을 덧붙이기도전에 고개를 숙인 루드비히가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달빛 아래 드러난 적당히 도톰한 혀는 그녀의 드레스보다도 짙은 붉은색이었다.
“제 흔적을 덜 남긴 모양입니다.”
간밤 루드비히가 남긴 흔적 덕에 하녀들이 민망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캐서린이 기가 막혀 입을 벌린 틈을 노려 루드비히는 그녀의 뒷목을 잡고 진한 키스를 시작했다.
“읍.”
말캉한 혀와 혀가 얽히는 감각. 루드비히는 캐서린을 한입에 삼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갈급해 보였다.
“당신이 이제 내 여자라는 걸 바로 알아보지 못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쁘더군요.”
속삭이는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정중한 평소와 달리 몹시 야하게 들렸다. 그는 속삭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캐서린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짜릿하고 오싹한 느낌에 그녀는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처럼 다리가 풀려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요? 정사를 나눈 흔적이라도 더 남기자는 말인가요?”
“리카르도가 아직 밖에 있습니다.”
쉬이.
캐서린의 말을 막듯 기다란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누른 루드비히가 입꼬리를 올린다. 희붐한 달빛 아래 하얗게 빛이 나는 그의 미모가 유독 찬란해서, 캐서린은 그의 논리를 파악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사의 흔적으로 부족하다면, 직접 들려줄 수밖에요.”
“설마 여기서 섹스하는 소리를 내자는 건 아니겠죠?”
캐서린은 경악하며 자신의 양옆으로 난간을 짚은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르도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지만,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는 야외에서 신음 소리를 내는 건 너무 민망한 짓이었다.
“당연히 소리만 낼 건 아닙니다.”
캐서린의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루드비히는, 대답과 달리 그녀의 팔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끈을 내렸다. 전조도 없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유두가 주인을 맞이하듯 팽팽하게 솟아오른다.
“루드비히!”
당황한 캐서린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루드비히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흐읏.”
캐서린의 젖꼭지에서 달콤한 즙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쪽쪽 빨아 대는 탓에 가뜩이나 적막한 발코니에 민망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캐서린의 가는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루드비히는 손을 조금씩 아래로 움직여 그녀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당신 몸은 촉감이 너무 좋아요. 한시도 손을 떼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과장이 아닌지, 루드비히는 정말로 캐서린의 몸에서 한순간도 손을 떼지 않았다. 허리에서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를 쓸고 다시 허리로 올라올 뿐인 루드비히의 손길에 캐서린은 참지 못하고 헉 숨을 들이마셨다.
“아까부터 만지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무도회에 등장하는 캐서린을 발견했을 때부터?
궁금해졌지만, 거침없이 제 드레스 안에 손을 집어넣는 루드비히의 행동에 너무 놀란 탓에 캐서린은 물어보는 것을 잊고 말았다.
“루, 드비히, 흐읏, 잠, 잠깐만요.”
이 정도로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으니 리카르도도 듣지 않았을까. 하지만 캐서린의 말에도 루드비히는 그녀의 안쪽 허벅지를 쓰다듬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검을 다루는 기사의 거친 손짓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지만, 역설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캐서린은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압박해 오는 루드비히의 거대한 몸 아래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찾았다.
톡. 토독.
그녀의 몸을 거침없이 움켜잡을 때는 언제고, 허벅지 안쪽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그의 손가락은 세심하기 짝이 없었다. 얇은 레이스 천이 전부인 속옷 위를 예민하게 자극당한 탓에 캐서린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
“흣!”
그녀 앞에 무릎 꿇은 루드비히는 그녀의 붉은 드레스 안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르륵 흘러나온 애액 덕에 하얀 속옷이 투명해져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성기가 무척 잘 보였다.
“예쁘군요.”
이빨 끝으로 그녀의 속옷을 무릎까지 잡아 내린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제 머리채를 붙잡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두 다리를 붙잡아 벌렸다.
“루드비히! 제발!”
그만하라는 말인지, 빨리 빨아 달라는 말인지, 캐서린 본인도 알 수 없는 외침이었다. 저 좋을 대로 해석한 루드비히는 그녀의 갈급한 목소리에 석류처럼 새빨간 혀를 움직여 적당히 달아오른 그녀의 꽃잎을 톡 건드렸다.
“흐으응.”
“너무 맛있습니다.”
새큼한 애액이 도톰한 루드비히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타인이 제 성기를 물고 빠는 경험이 전무한 캐서린은 눈앞에 번쩍이는 별에 한껏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애써 뜨니, 정말로 별이 그득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지금 그녀가 발을 딛고 선 장소가 야외나 마찬가지인 발코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루, 흣, 이제, 이제 그만……!”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힘을 주는 대로 딸려 온 고개가 번쩍 위로 들렸다. 흐트러진 고수머리는 캐서린이 마주한 밤하늘보다도 짙은 색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무도회장에서 발코니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정원에 나온 사람이 고개만 든다면 캐서린과 루드비히를 발견할 수도 있을 법한 장소였다. 캐서린의 날카로운 외침에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인 루드비히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약혼식이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함부로 무도회장을 벗어날 무도한 이는 없을 겁니다.”
여전히 정중한 어투였지만, 들끓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쇳소리에 캐서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무도한 이들이 약혼 무도회의 당사자인 루드비히와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말에 기가 막혀 몇 마디를 더 얹고 싶었지만, 조금 풀이 죽은 듯이 눈꼬리를 내린 그의 얼굴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화내지 마십시오, 캐서린.”
“화, 화를 낸 건 아니었어요.”
“싫으셨습니까?”
자신을 올려다보며 묻는 루드비히의 여름 바다를 담은 듯 아름다운 벽안에 캐서린은 감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 기사의 눈이 이토록 맑고 투명했던가. 이렇게나 예쁜 눈이 자신의 벗은 몸을 탐할 때는 달도 없는 어두운 밤처럼 짙어진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싫지는 않았어요.”
“그럼 좋으셨습니까?”
이어지는 루드비히의 물음에 캐서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루드비히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찌걱거리며 제 아래를 자극하는 루드비히의 손가락에 캐서린은 주저앉고 싶어졌다.
“흐으응.”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그녀의 음핵을 빙글빙글 자극하던 루드비히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손가락은 두꺼운 편은 아니었지만, 손 자체가 크기 때문인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다리 힘이 전부 풀려 버렸다.
“제게 기대십시오.”
루드비히는 힘이 풀린 캐서린의 하체를 감싸 안듯 팔 하나로 지탱한 채 다시금 오른손을 움직였다. 찌걱찌걱. 젖은 구멍 안을 손가락이 파고드는 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다. 애써 신음을 참고 있던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손가락 한 개를 더 늘리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하앙, 소리를 내질렀다.
크라바트까지 단정하게 조여 맨 루드비히의 반듯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캐서린의 아래를 풀고 있었다.
“정말, 정말 여기서 하려고요?”
작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캐서린은 황망해졌다.
“지금 당장?”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는 캐서린이 불편해 보였는지, 그녀의 신발을 벗겨 내 발등에 입을 맞춘 루드비히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드비히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캐서린을 올려다보며 제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어느새 흐트러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반듯한 쇄골에 그림자가 맺혔다.
“어째서?”
“더는 참고 싶지 않습니다.”
루드비히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말에 캐서린은 의아해졌다.
더는, 이라니?
언제부터 참고 있었다는 말일까? 발코니에서부터 키운 마음이라기에는 해석하기엔 루드비히의 푸른 눈에 담긴 음욕이 너무 깊고 강렬했다. 캐서린은 매의 발톱에 붙들린 먹이처럼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느새 바로 선 루드비히의 혀가 다시금 캐서린의 입술을 탐했다.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부터 움푹 들어간 쇄골, 그리고 반쯤 벗겨진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유방을 할짝거리던 그는 그녀를 거칠게 뒤로 돌려 드레스 끝자락을 움켜잡았다.
캐서린은 행여나 드레스가 찢어지기라도 할까 걱정했지만, 루드비히는 솜씨 좋게 드레스를 그녀의 둔부까지 추켜올렸다. 애초에 노출이 적지 않은 디자인의 드레스인지라 그녀는 반라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이 훤히 비치는 매끈한 등은 신이 빚은 상아 조각처럼 아름답다.
“당신은 뼛조각 하나까지 예쁩니다.”
느릿느릿, 루드비히는 길쭉한 손끝으로 척추뼈가 도드라진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간지러워요!”
별것 아닌 손길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느낌에 밤바람에 식었던 음부가 다시금 달아올랐다. 등을 쓸어 주었을 뿐인데도 울컥울컥 애액을 뿜어내는 제 아래가 창피해서 캐서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캐서린의 머리채를 붙든 루드비히가 그녀의 뒷목에 새털처럼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가만히.”
명령조에 가까운 어투였다. 캐서린은 기사로서 자신을 섬기기만 하던 그의 엄한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그녀의 드레스를 다른 손으로 휘감은 루드비히가 공기 중에 드러난 그녀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자꾸 움직이시면 벌을 줄 겁니다.”
고통은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체벌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캐서린은 잠시 넋이 나갔다.
벌?
그녀는 공작가의 영애였고, 그는 대공가의 일원이긴 했지만 엄연히 그녀의 기사였다. 어떻게 기사가 감히 레이디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말일까.
“무슨 벌을 말하는 건가요.”
캐서린은 루드비히에게 머리채가 잡힌 지금도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아니, 않으려 했다.
“흐읏!!!”
캐서린의 물음에 루드비히는 전조도 없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언제 벗어 던졌는지 모를 그의 바지가 캐서린의 속옷과 함께 바닥을 뒹군다. 단단하고 뜨거운 쇠몽둥이로 얻어맞는 기분에 캐서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루드비히는 그녀가 도망갈 수 없도록 감싸 안아 한 팔로 발코니의 난간을 짚었다.
“핫, 하앙! 잠깐만!”
잠깐만, 그만, 캐서린은 비슷한 단어를 반복했지만 루드비히는 거친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더, 조금 더 거칠게. 중간중간 그런 요구가 튀어나왔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퍽, 퍽. 그녀의 하얗고 탐스러운 엉덩이와 그의 단단한 골반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풀 벌레 소리에 섞여 들었다. 루드비히는 안을 파고들 때마다 제 것을 놓치지 않을 것처럼 찰지게 달라붙는 캐서린의 내부에 이성을 잃었다. 난간을 지탱하는 그의 팔뚝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차가운 밤공기와 뜨거운 캐서린의 내벽을 오고 가는 그의 기둥에 도드라진 핏줄 또한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헉.”
루드비히가 들끓는 신음을 터뜨렸다. 캐서린은 제 뒤에 선 그가 욕망에 잠겨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거칠긴 했지만 그녀가 아프지 않게 움직이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캐서린의 상체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으니까. 난간으로 밀쳐져 뭉개졌던 젖가슴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차가운 밤공기에 닿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중심으로 그녀의 흰 가슴은 온통 얼룩덜룩 발갛게 물든 상태였다.
캐서린의 가는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은 루드비히는 그녀의 등과 제 가슴에 바람 한 점 파고들지 못하도록 몸을 밀착시켰다. 밤공기가 이토록 서늘한데도 루드비히의 체온은 펄펄 끓는 돌처럼 뜨겁고 단단했다.
“캐서린.”
루드비히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임과 동시에 여태 계속 그녀의 내벽을 긁던 기둥이 빠르게 빠져나왔다가, 그녀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다시 거칠게 박아 넣어졌다. 구두가 벗겨진 그녀의 맨발은 이제 허공에 들린 상태였다. 힘이 빠져 늘어진 두 다리가 허공에 허우적거렸지만, 그녀의 가는 몸을 한 팔로 지탱한 그는 힘든 기색조차 없이 아래에서 위로 박아 넣기 시작했다.
“흐으응.”
푹, 푹.
둔부가 그의 골반에 완전히 걸쳐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루드비히의 성기가 아까보다 더 부푼 건지 캐서린의 내부는 터질 것처럼 가득 차고 말았다. 뒤에서 찔러 대는데도 아랫배가 움찔움찔 아파 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시야를 가득 메운 밤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쾌감이 함께 차올랐다.
“흐읏, 하앙!”
고양이처럼 앙앙대는 캐서린을 마구잡이로 박아 대던 루드비히가 그녀의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으로 한가득 잡아도 비죽 튀어나올 정도로 풍만한 흰 가슴의 감촉이 그의 기둥을 콱 물어 오는 뜨겁고 축축한 내벽의 느낌과 대비되었다. 캐서린의 유두가 꼿꼿하지 않은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루드비히는 하체로만 캐서린을 지탱한 채 그녀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다시금 유린하기 시작했다.
“너무 좋습니다. 당신은 늘 뜨겁고 좁아요.”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내부를 묘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더운 입김이 섞여 든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유난히 야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어깨에 제 머리를 파묻은 루드비히의 이마에서 툭, 맑은 땀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영원히 빼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깊숙이 파고든 채 영겁의 시간을 보내고 싶기라도 한 걸까.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캐서린의 몸을 어린아이 다루듯 허공에서 손쉽게 돌린 루드비히는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단단히 끌어안았다.
“무겁지도 않아요? 내려놔도 괜찮은데.”
“발이 더러워지십니다.”
맨가슴이 난간에 죄 눌리도록 박아 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제 발이 더러워지는 것을 걱정하는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돌려진 캐서린은 아까와 달리 정면에서 루드비히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안정감을 위해 그의 허리에 양다리를 두른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루드비히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렸다.
“……왜 그렇게 봐요?”
“달빛으로 사람을 빚는다면 당신과 같을까요.”
시의 한 구절처럼 로맨틱한 말이었다. 무덤덤하다 못해 무뚝뚝한 루드비히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라 캐서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달콤한 과실을 그러모아 즙을 짜낸대도 당신만큼 달 수는 없을 겁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캐서린이 벌린 입을 파고든 루드비히는 진하고 농밀한 키스를 퍼부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희붐한 달빛 아래 붉게 빛난다.
“흐읏.”
이내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줬다는 양,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고 다시금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굵은 기둥은 그녀를 정신없이 파고들고 있었지만, 루드비히는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여 캐서린이 아프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것도 좋긴 좋지만…….’
아, 자신이 이상 성욕자라도 되는 걸까.
캐서린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통스럽던 아까의 추삽질이 아쉬워졌다. 아쉬움에 엉덩이를 들썩이던 그녀는 허공에 출렁이는 제 가슴이 루드비히의 단단한 가슴에 맞부딪히도록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경.”
부끄럽지만 아까처럼 거칠게 박아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캐서린의 수줍은 부름에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루드비히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마찬가지로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캐서린의 붉은 머리칼은 흐드러진 장미 꽃잎 같았다.
“앞으로는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루드비히의 부탁 아닌 부탁에 망설이던 캐서린은 익숙하지 않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드비히.”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에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거칠게 제 기둥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흐으읏!”
퍽! 퍽!
루드비히가 억세게 움켜잡은 엉덩이는 분명 그의 손바닥 모양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으리라. 자신이 그의 이름을 속삭일 때마다 행위가 조금씩 거칠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챈 캐서린은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흐느끼며 불러 댔다. 흣, 루드비히, 조금만 더, 흐응.
“헉!”
신음과 비음이 섞인 그녀의 요구에 맞춰 아래에서 위로 처박아 대던 루드비히는 그녀의 발가락 끝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에 맞춰 파정했다.
캐서린이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한 정액이 울컥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신다. 캐서린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우윳빛 액체에 얼굴을 붉히며 루드비히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정신없이 관계를 맺긴 했지만,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와닿지 않았다. 캐서린은 흘러내린 드레스를 갖춰 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루드비히의 가슴에 폭 머리를 기대었다.
“미쳤나 봐요, 나.”
“당신이 리카르도가 아닌 제 여자라는 걸 공표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꼭 이런 식으로 알릴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 하는 척만 했어도 될 텐데.”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치 아주 오랜 기간 제 성욕을 참아 왔다는 듯한 루드비히의 단호함에 캐서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밤의 정원은 한적하기만 했고, 발코니를 가리는 두꺼운 커튼이 어느 정도의 방음 기능을 수행했으리라.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는 캐서린을 안은 상태 그대로 그녀의 구두를 신겨 준 루드비히는 흐트러진 그녀의 드레스를 꼼꼼하게 매만져 주기까지 했다. 종기사를 두는 기사로서 남의 수발을 드는 게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무척 섬세하게.
“드레스, 많이 망가진 것 같나요?”
“당신은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었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살짝 눈가를 찌푸린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품을 피해 발코니 난간에 기대섰다. 후끈 달아오른 체온을 조금 식히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으니까.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네.”
다행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캐서린을 빤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캐서린이 별이 쏟아질 것처럼 아름다운 밤하늘을 구경하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 티 나지 않게 살짝 벌려 둔 커튼을 닫았다.
“…….”
루드비히의 잘생긴 입꼬리가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손가락 하나, 그러니까 사람의 눈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틈 사이로 리카르도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
정신없이 무도회장을 벗어난 리카르도는 한산한 복도를 찾아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잔뜩 부푼 아랫도리가 성가실 정도로 바지춤을 찔러 왔다.
“젠장.”
방금 목격한 열정적인 정사의 주인공이 정말로 자신이 알던 그 캐서린 스왈렛인지,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재미없고 목석같던 여자가 어째서?’
스왈렛과 에넨체의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끊임없이 그녀를 침대로 유혹하려고 했던 리카르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늘 대귀족인 그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따져 가며 그를 거부했었다.
“그런 주제에, 씨발, 루드비히에게는 다리를 벌려 줬다고?”
루드비히는 더러운 사생아였지만 누가 봐도 자신보다 에넨체에 걸맞은 남자였다. 화려하고 곱상한 생김새의 리카르도와 달리 단정하고 섬세하지만 남자다운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북부인다운 탄탄하고 거대한 체구가 리카르도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아버지인 에넨체 대공마저 늘 루드비히를 보며 한탄하곤 했다. 대공비인 리카르도의 어미에게서 저런 후계자가 나왔어야 했는데, 하고. 대공의 아쉬운 소리에 리카르도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몸이 타고나길 검을 들기엔 너무 부드럽고 우아한 것을 어쩌겠는가? 검술은 그 필요성이 어찌 됐든 야만인의 기술이었다.
‘나, 나는 대신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루드비히 그 자식은 무식해서 시 한 줄 외우지 못할 게 분명해!’
리카르도는 헉헉 숨을 들이마시다 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창가를 내리쳤다.
“더러운 년.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결국 남자의 크기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리카르도는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죄 없는 벽에 발길질을 해 댔다. 거침없는 화풀이에 결국 아파 오는 것은 제 발끝이었지만, 그는 발톱이 빠지도록 휘청거리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리카르도!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무도회장에서 갑작스레 사라진 리카르도를 찾아 나온 에일린이 그를 발견하고 황망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리카르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다 다치겠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리카르도의 발을 살핀 에일린은 무릎을 꿇고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제 앞에 쪼그려 앉은 에일린의 자그마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리카르도가 거칠게 제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동그란 자신의 이마를 콕 찌르는 리카르도의 성기를 에일린은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이미 잔뜩 발기된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후두둑 흘러내렸다.
“빨아.”
“뭐?”
“빨라고.”
리카르도는 자신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에일린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가느다란 금발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딸려 움직였다. 황망함에 벌어진 에일린의 입안으로 리카르도의 성기가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우웁!”
“피하지 마. 어서 빨라고, 창녀처럼.”
리카르도와 몸을 섞는 건 익숙했지만 이토록 무례한 요구는 처음이었다. 에일린은 기가 막혀 리카르도의 다리를 붙잡은 팔에 잔뜩 힘을 주어 밀어냈다.
“리카르도!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네 어미처럼 빨아 보란 말이야, 걸레 같은 년아.”
리카르도의 모욕에 에일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황제의 코르티잔이라는 건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방종술을 배우기는 했었다. 신분 상승이라는 유일무이한 제 목표를 위해서.
하지만 리카르도가 그 사실을 직접 언급하며 에일린을 함부로 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왜. 못 빨겠어? 그럼 지금 당장 엔시엘로 거리로 가겠어.”
엔시엘로는 몸을 파는 창부가 즐비한 유흥가였다. 리카르도의 도발에 에일린은 이미 조금씩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그의 성기를 앙 물었다.
“흐읏.”
도톰한 혀가 귀두를 자극하는 느낌에 리카르도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에일린은 머리가 전부 뽑힐 것만 같은 거친 손길이 짜증스러웠지만, 애써 억누른 채 예쁘게 미소 지었다.
“빨아 주면 뭐 해 줄 건데?”
“뭘 바라는데.”
에일린의 아양에 리카르도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되물었다.
“오늘 캐서린이 쓰고 나온 티아라보다 열 배는 비싸고 아름다운 거.”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한 에일린은 구체적인 요구를 덧붙였다.
“에넨체 대공가의 가보라든지. 사람들이 전부 날 부러워할 수 있을 만한 선물을 받고 싶어.”
“알았으니까 제대로 빨기나 해.”
리카르도는 에일린이 말을 하기 위해 혀 놀림을 멈추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제 쪽으로 우악스레 끌어당겼다. 목구멍이 턱 막혀 오는 기분에 그녀가 캑캑거리며 헛구역질을 했지만, 리카르도는 신경 쓰지 않고 제 아랫도리를 그녀의 입안에 퍽퍽 처박았다.
“허억.”
얼마 지나지 않아 파정한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술이 안 느는 것 같은데, 에일린.”
배려 없이 제 얼굴에 왈칵 정액을 쏟아 낸 리카르도 덕에 얼굴이 엉망이 된 에일린은 그의 냉정한 말에 사납게 눈을 치켜세웠다.
“그럼 네 물건 빨아 주는 연습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 정도 노력은 해야 되지 않겠어? 사생아인 네가 대공비 자리에 앉으려면 말이야. 난 네 가벼운 엉덩이를 좋아하는 건데.”
리카르도의 비꼬는 듯한 말에 에일린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제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그의 정액을 닦았다.
“닦지 마. 먹어.”
마치 그의 것이 더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에일린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리카르도는 그녀의 볼을 붙잡아 입을 벌렸다. 에일린의 뺨에 묻은 자신의 흔적을 긁어모아 먹인 후에야 리카르도는 기분이 나아졌다.
“잘했어.”
애완동물을 칭찬하듯 에일린의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은 리카르도는 풀어 헤쳤던 바지를 정리했다.
“그런데 캐서린 스왈렛이 갑자기 왜 루드비히 위그노아와 약혼하게 된 거야? 대공 전하께 들은 말이라도 있어?”
“에넨체 대공가와 스왈렛 공작가 사이의 일이야. 네가 알 필요 없어.”
리카르도는 자신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을 티 내고 싶지 않아 부러 느긋하게 대답했다. 에일린은 리카르도가 잔뜩 헝클어뜨린 제 기다란 금발을 쓸어내리며 입을 삐죽였다.
“뭐, 잘됐지. 너 어차피 캐서린 스왈렛 목석같다고 싫어했잖아.”
“……그게 내 착각이더라고.”
“응?”
“오늘 보니 전혀 목석같지 않던데. 섹시한 드레스도 잘 어울리고.”
리카르도가 에일린의 앞에서 캐서린을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다. 둥근 눈을 휘둥그레 뜬 에일린은 캐서린이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떠올리며 동그란 이마를 찌푸렸다.
“겉모습일 뿐이잖아. 그냥 봐도 뻣뻣해 보이는걸, 무얼.”
“모르지. 그런 고고한 여자를 마구 박아 대며 내 아래에서 앙앙대는 꼴을 보는 것도 재밌을지도.”
리카르도는 에일린이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입맛을 다셨다.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
“캐서린 스왈렛이 아쉬워서?”
“그렇다기보단…… 아니, 아니야. 나한텐 네가 있잖아.”
성욕을 푼 덕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리카르도는 에일린을 달래듯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내 욕망을 이해해 주는 건 너밖에 없어, 에일린.”
리카르도는 다양한 체위와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가학적인 섹스를 즐기는 남자였다. 그런 그의 취향을 완벽하게 맞춰 준 여자는 여즉 에일린뿐이었다.
“……응. 그걸 잊지 마, 리카르도.”
에일린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듯 리카르도를 향해 눈을 빛냈지만, 그는 발코니에서 훔쳐본 캐서린의 아름다운 나신을 떠올리느라 에일린의 분노를 눈치채지 못했다.
‘에일린처럼 맞춰 주는 여자도 좋지만, 캐서린은 굴복시키는 맛이 있겠어.’
역시 루드비히에게 그냥 넘겨주기엔 아까운 여자였다. 리카르도는 뱀처럼 얇은 혀를 낼름거리며 눈을 감았다. 캐서린의 새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아른거렸다. 루드비히의 거친 추삽질에 위아래로 출렁이던 우윳빛 젖가슴도.
‘개새끼. 지금 캐서린을 떠올리고 있구나.’
에일린은 눈치가 빠르고 기민한 여자였다. 리카르도가 캐서린에게 품은 음심을 금세 눈치챈 그녀는 부들부들 떨려 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춘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가만히 내버려둘 줄 알고?’
리카르도는 에일린의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넨체 대공가의 명예와 재산이.
‘……잠깐만. 루드비히 위그노아가 스왈렛 공작가를 뒷배로 두면, 대공 작위도 노려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빠르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에일린은 리카르도 몰래 손가락을 맞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