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약탈당한 밤 (1/5)

1. 약탈당한 밤

고독하리만치 적막한 밤이었다. 캐서린 스왈렛은 성에가 낀 투명한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그녀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꼭 유령 같네.”

캐서린은 색소라곤 없는 듯 흐릿한 자신의 몸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를 띤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붉은 머리 유령.”

실제로 들어 보지 못한 말도 아니었다. 붉은 머리 여자는 남편을 요절하게 한다. 세간에 도는 낭설에 불과했지만, 고결한 에넨체. 그러니까 그녀의 시가 사람들이 그녀를 불쾌하게 여기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정작 요절한 건 나였는데 말이야.”

캐서린은 죽음을 겪고 칠 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 그것도 그녀와 살이 스치기라도 하면 저주에라도 걸린다고 믿었던 남편 리카르도와의 약혼식 전날 밤으로.

그 사실이 그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는데, 그 누가 믿어 줄 수 있을까.

캐서린은 헛웃음을 터뜨린 후 뒤를 돌았다. 공작가 특유의 암적색 문에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는 두터운 캐시미어 숄을 여몄다.

“……캐서린.”

누군가 캐서린의 이름을 나직하게 속삭인다. 듣는 것만으로 야릇한 기분이 들 만큼 지독하게 남성적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이름을 속삭인 남자는 닫힌 문을 열어젖힐 만한 완력의 소유자였지만, 문에 손을 대기는커녕 감히 그녀의 이름을 되뇌어 부르지도 못했다.

캐서린은 문밖의 망설임을 알고 있었다. 낮게 흩어지는 기사 특유의 단정한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도.

과거로 돌아온 지금 이 순간에도, 칠여 년 전의 어리석었던 그 순간에도 말이다.

‘그때 나는 이 문을 열지 않았어.’

그녀는 스왈렛 공작의 딸로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였다. 정숙과 순결을 중요시하는 레이디가 외간 남자에게 침실 문을 열어 준다는 건 당시 그녀의 가치관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캐서린의 성정을 분명히 알 텐데도, 그녀를 섬기는 기사이자 남편인 리카르도 에넨체의 배다른 동생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약혼 발표 전날 그녀의 방문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아주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잡았다 놨다 고민하며.

‘위그노아 경은……. 그래, 그때도 내 약혼을 말렸지.’

캐서린은 리카르도 대공자와의 약혼을 반대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에넨체의 고귀한 피가 흐른다지만 사생아의 낙인이 찍힌 남자였으니, 단순한 열등감이리라 치부하며 넘길 것이 아니라.

‘그리고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늘 나를 원했지.’

제국에서도 가장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에넨체. 그 에넨체의 눈보라처럼 서늘한 벽안이 캐서린을 향할 때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오르는지,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내 핏줄을 향한 열망이겠지만.’

루드비히 위그노아. 위그노아는 북부의 사생아들에게 주어지는 성이었다. 루드비히는 고고한 에넨체의 핏줄로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였지만, 결국 사생아에 불과했다. 캐서린은 스왈렛 공작의 외동딸이었으니,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위치가 고작 기사단장에 불과한 루드비히에게는 퍽 탐이 나는 신붓감이리라.

문득, 사생아는 더러운 피가 섞였기에 순수 귀족의 혈통을 탐낼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 말을 누가 했었지? 리카르도던가…….’

하지만 그녀의 혈통을 탐내는 루드비히가 그녀를 호시탐탐 죽여 없애 버릴 생각만 하는 리카르도보다는 백배 천배 더 괜찮은 남편감이었다.

‘처음부터 루드비히를 택했더라면. 남편과 그 내연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추한 꼴은 면했을 텐데 말이지.’

리카르도 에넨체, 그러니까 내일 그녀와의 약혼이 계획되어 있는 에넨체 대공자는 대공 작위에 오르자마자 숨겨 둔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인 캐서린 스왈렛을 기다렸다는 듯이 살해했다.

그것도 그녀와 자신의 사생아 동생, 루드비히가 불륜 관계라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씌워서.

‘개자식.’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분명 생을 마감했던 캐서린은 칠 년 전, 그것도 리카르도와의 약혼식 전날 밤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전처럼 멍청하게 당하지 말라는 신의 뜻이 아니겠어?’

불륜을 저질렀다고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느니 정말로 에넨체의 사생아인 루드비히와 손을 잡는 것이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뒷배는 없지만 훌륭한 기사인 루드비히를 데릴사위로 들여 잘만 길들인다면, 에넨체 대공가를 삼키는 목표도 노려봄 직했으니까.

침을 꿀꺽 삼킨 캐서린은 도무지 다시 자신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는 루드비히 대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

문밖에 서성이던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루드비히는 마치 캐서린이 자신의 침실 문을 열어젖힌 양 휘둥그레 눈을 떴다. 거센 북부의 파도를 담은 듯 짙은 푸른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린다.

새삼, 언제 봐도 번듯한 생김새였다. 캐서린은 죽기 직전에도, 그리고 칠 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지금에도 단정한 미남인 루드비히를 향해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그가 쉬이 침실에 들어서지 못하자, 캐서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당황한 얼굴로 저를 살피는 루드비히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계속 거기 있을 셈인가요? 그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래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더럽혀질 제 명예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아, 죄송합니다.”

캐서린이 협박 비슷한 말을 입에 담고 나서야 루드비히는 천천히 그녀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장작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살갗에 닿는 공기가 아직 쌀쌀했지만, 캐서린은 천천히 제 어깨에 두른 숄을 풀어 내렸다.

“이 밤중에 제 침실 앞을 서성이다니, 경답지 않은데요.”

루드비히는 그제야 자신이 들어선 공간이 그녀의 은밀한 침실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얇은 캐미솔만 걸친 그녀의 모습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나는 그녀의 살갗에서는 희미한 체향까지 퍼지는 듯했다.

“우선, 이렇게 늦은 밤에 영애의 침실에 불쑥 찾아든 것에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정하게 채운 셔츠와 목 끝까지 가리는 크라바트로도 감추지 못한 그의 귀는 타들어 갈듯 새빨간 색이었다. 캐서린은 그의 정중한 사과에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하네.’

그녀가 죽기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칠 년 뒤인 그때에도 루드비히는 단정한 사내였다. 그러나 대공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기사 작위만을 간신히 받은 그는 그 출신 탓에 늘 사교계의 시끄러운 스캔들에 휘말리곤 했다.

그렇게 사교계에서 닳고 닳을 만큼 굴렀음에도 잘 닦인 검처럼 올곧은 이였으니 이제 막 기사 작위를 받은 지금의 그는 단정하다 못해 서투른 남자인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 때문에 캐서린은 제 사냥감으로 루드비히 위그노아를 택했다.

‘위계를 이용하는 못된 레이디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겠지만.’

마침 죽음에서 돌아온 날이 리카르도와의 약혼식 목전이라,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그래서, 무슨 볼일인가요?”

실수인 듯 부러 캐미솔의 어깨끈을 미끄러트린 캐서린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루드비히를 소파로 이끌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은 마치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개였지만, 루드비히에게는 그런 사소한 맥락을 파악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캐, 캐서린.”

“네.”

“……어깨끈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

루드비히의 지적에 캐서린은 화들짝 놀란 척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느릿느릿, 그녀의 흰 손가락이 나비처럼 팔랑이며 움직였다.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침실에 들어서기 직전 느슨하게 풀어 둔 어깨의 리본을 추스르는 척 상체를 수그렸다.

“죄송해요.”

말로는 사과하면서도, 캐서린은 하녀 없이 옷가지를 만지는 데 서투르다는 듯 캐미솔의 리본을 기어코 완전히 푸르고 말았다.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보다도 더 창백한 윗가슴이 이제 막 훈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공기에 노출되었다.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분홍색 유륜에 루드비히는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경이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캐서린은 질끈 감은 두 눈을 뜰 생각조차 하지 않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난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혼자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어서……. 끈만 묶어 주면 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밖으로 나가 하녀를 불러오겠습니다.”

캐서린의 말에 서둘러 대답하면서 루드비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캐서린은 길게 음영 진 그의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분히 말문을 뗐다.

“지금 경이 나가 제 침실에 하녀를 불러온다면 분명 오해를 살 텐데요.”

흑심 가득한, 그러나 명분이 타당한 그녀의 설득에 루드비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스름히 눈을 떴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캐미솔의 끈을 묶을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 그의 쪽으로 은근슬쩍 몸을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고마워요.”

옅은 미소를 띤 채 감사를 표하는 캐서린에게 루드비히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이유야 뻔했다.

‘아마 제 물건이 내 허벅지에 닿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거겠지.’

그녀가 아무리 그에게 바투 붙었다 해도 원체 거리가 있었는데 닿을 정도라니. 하긴, 루드비히는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북부인 중에서도 키와 덩치가 헌칠한 편이긴 했다. 캐서린은 새삼스레 그 크기에 놀라 두근거리는 제 가슴께를 애써 잡아 누르며 그를 재촉했다.

“경?”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녀의 맑은 목소리에 루드비히는 그제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길쭉하게 뻗어 언뜻 날렵해 보이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딱딱하게 굳은 손끝이 그녀의 여린 살갗을 스친다. 자신의 것과 확연히 차이 나는 단단한 감촉에 캐서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남자의 손에 닿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아니, 사실상 이런 긴밀한 접촉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정숙한 레이디였고, 그녀의 남편이었던 리카르도 에넨체는 붉은 머리의 미신 따위를 핑계로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캐서린의 어깨끈을 매만지는 루드비히의 강건한 손가락 끝이 어찌나 떨리는지, 캐서린도 덩달아 긴장하게 되었다.

‘내가 유혹을 해야 하는데, 설레면 어쩌자는 거야.’

캐서린은 순간적으로 쭈뼛 돋는 소름에 발끝을 오므리며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앗!”

이성을 찾은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어깨끈의 리본을 거의 완성했을 무렵, 재채기가 나오는 척 몸을 비틀었다.

“!!!”

갑작스레 손 안에 들어온 말캉한 감촉에 루드비히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캐서린은 도로 흘러내린 어깨끈을 추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의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힘이 풀렸어요.”

캐서린이 무어라 변명했지만, 루드비히는 그녀의 말을 들을 정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지. 온통 새하얬다.

“죄송, 죄송합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그가 연신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했지만, 그는 여전히 캐서린의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잡은 상태였다. 마치 본능처럼 자연스레 가슴을 쥐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비죽 웃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제 배다른 형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네.’

지금처럼 리카르도를 유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카르도의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리카르도는 캐서린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배려를 하거나 정중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리카르도는 비천한 출신의 어미를 뒀다며 루드비히를 경시하며, 혐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가 택한 연인이자 내연녀인 에일린 반델은 황실의 사생아였다. 사생아인 루드비히가 자신의 자리를 탐낼까 봐 언제나 경계하던 리카르도는, 루드비히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인 에일린에게 정실부인의 자리를 주고자 캐서린을 서슴없이 죽였다.

그의 사랑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 버릴 정도였던 걸까, 아니면 그의 신념 자체가 깃털마냥 가벼웠던 걸까.

황제의 사랑받는 딸이지만 고귀한 황실의 성을 얻지 못한 에일린 또한 루드비히와 같은 이유로 에넨체의 푸른 피가 흐르는 리카르도 에넨체를 탐냈었을지도 모르는데.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할 뿐이야.’

캐서린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리카르도와 에일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매끄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루드비히, 그래서 할 말이 뭐였어요?”

그녀의 물음에도 루드비히는 대답이 없었다. 당장 캐서린을 밀어 넘어뜨려 마구 박고 싶은 욕망과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는 기사도가 첨예하게 대립을 이루는 중이었으니까.

“…….”

그는 그녀가 지금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진 않았다. 단지, 왜 자신의 약혼식 전날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그를 흔들어 놓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뿐.

“캐서린,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의 약혼을 반대하고 싶습니다.”

리카르도 에넨체는 몹쓸 놈이다. 반듯한 기사인 루드비히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그리 평가했다. 실제로 리카르도는 에일린 반델과의 그릇된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캐서린과의 약혼을 진행하고 있었다.

“왜죠?”

루드비히의 말에 캐서린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의 핏기 없는 뺨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겼다.

눈앞의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까?

고고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처럼 보였던 캐서린의 눈빛이 오늘따라 날카로웠다. 루드비히는 그럼에도 여전히 한 떨기 장미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딱딱해진다. 물론, 바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팽창한 것은 그의 허벅지뿐만이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귀족들의 결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종류던가요.”

“그는 순진한 당신을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에넨체 대공가는 스왈렛 공작가의 풍요로운 영지를 탐내고 있습니다.”

“경, 스왈렛 공작가도 에넨체 대공가의 배경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건 매한가지예요.”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걱정을 담담히 거절했다. 리카르도와 캐서린의 결혼은 애초에 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었다. 대공가와 공작가의 합리적인 거래였을 뿐. 그러니 그녀에게 리카르도 개인의 엇나간 인성을 들먹여 봤자 딱히 설득력은 없었다.

‘내가 남편에게 기대한 건 가문을 번영시키는 거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죽음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정말이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습니까.”

캐서린의 단호한 태도에 루드비히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캐서린의 가슴을 움켜잡은 채였다.

‘도무지 놓을 생각을 못 하네.’

야릇한 자세만 제외하면, 여기까지는 칠 년 전 대화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캐서린은 잘못 번진 유화처럼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에넨체 대공의 자식은 리카르도 에넨체 한 명만이 아니죠.”

루드비히는 북부를 지키는 검이라는 칭호를 지닌 에넨체 대공가에 그 누구보다 걸맞는 기사였다. 대공가의 정식 후계자인 리카르도보다도.

‘루드비히의 생모가 에넨체의 기사여서일까.’

캐서린은 현 에넨체 대공이 리카르도에게 품은 불만을 모르지 않았다. 남부 출신 어머니를 빼닮아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리카르도는 대대로 무가인 에넨체를 이끌기엔 형편없을 정도로 검에 소질이 없었으니까.

반면, 루드비히는 에넨체의 단단한 얼음 산맥이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북부에 걸맞는 남자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루드비히의 뺨에 손을 얹은 캐서린은 야릇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루드비히, 당신도 있잖아요.”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생아의 꼬리표나 마찬가지인 ‘위그노아’ 경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짓씹었다.

“제게 바라는 게 있으신 겁니까.”

“네, 있어요. 경이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캐서린의 말에 루드비히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마치 ‘당신이, 어떻게?’라고 말하는 듯한 루드비히의 눈빛에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경, 경은 나를 원하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내 혈통을.

유서 깊은 전통의 스왈렛 공작가. 그런 스왈렛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면 그는 에넨체 대공의 자리까지 노려볼 만한 능력의 남자였으니.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아셨던 겁니까.”

언뜻 차분하게 들렸지만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그녀와 차마 눈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잔뜩 굳은 턱을 쓸었다.

루드비히 위그노아가 캐서린 스왈렛을 원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게 더 힘들었다.

캐서린 앞에만 서면 루드비히의 시선은 사탕이 탐이 나는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곤 했으니까.

‘결국 혈통을 탐하는 것이겠지만.’

캐서린은 그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려는 듯 손을 내려 그의 허벅지, 정확히 말하면 허벅지 근처에 딱딱하게 솟아오른 물건을 자극했다.

“시기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지금 내가 리카르도가 아닌 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요.”

“잠깐, 캐서린, 잠시만.”

캐서린의 질문에 루드비히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투둑, 툭.

“읏.”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자신의 바지 단추를 풀어내리는 그 순간, 제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둘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꺄악.”

짧게 대답한 루드비히는 어설프게 제 위로 올라타려는 캐서린의 몸을 한 손으로 뒤집었다. 푹신한 소파 위로 엎어진 그녀의 상체에서는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큰한 향기가 풍겨 왔다.

“제게는 당신도 저를 원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언뜻 절절한 고백처럼 들려오는 말이었다. 사랑에 회의적인 캐서린조차 순간적으로 설렐 만큼. 그녀는 놀란 고양이처럼 엎어진 상태로 제 캐미솔을 끌어 내리는 루드비히의 손길을 느꼈다.

“왜,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몸을 돌린 자세라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 등을 타고 흐르는 노골적인 시선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둥근 뒤통수부터 새빨간 머리칼이 흩어진 어깨 그리고 척추뼈가 두드러진 등을 샅샅이 훑는.

눈빛만으로 제압당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캐서린은 자신이 루드비히와는 눈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뭘 그렇게 보냐구요.”

포식자 앞에 선 사냥감이 된 기분을 느낀 캐서린이 인상을 찡그린 채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캐미솔을 반쯤 풀어내린 루드비히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

“…….”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정중했지만, 이어진 행동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흣!”

캐서린은 순간적으로 제 뒷목을 콱 잡아 누르는 루드비히의 행동에 지금 제 뒤에 선 인간이 자신이 아는 그 ‘루드비히 위그노아’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다행히 쿠션 속에 파묻힌 얼굴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아는 자신의 기사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단정함, 예의 그리고 격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작위를 받기 위해 임명된 임시직이라지만, 내 호위로 임명된 기사가 자신이 섬기는 레이디의 머리를 누른다고?’

이 순간에 새삼스레 루드비히에게 발칙함을 느끼는 자신이 우습긴 했지만, 캐서린은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그를 향해 질색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깐.”

“……?”

“그, 내, 내 허락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침실 문을 열어 준 것도, 그의 옷에 먼저 손을 댄 것도 자신이지만, 그래도.

캐서린은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 미끈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

카랑카랑 갈라지는 캐서린의 물음에 정신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감상하던 루드비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녀를 휙 돌려 끌어안았다.

“만져도 됩니까?”

질문은 ‘만져도 되냐’는 것이었지만, 캐서린의 가슴을 한 움큼 움켜잡은 것은 그의 손이 아닌 입술이었다. 캐서린은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꽉 끌어안은 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과일이라도 먹는 사람처럼 젖꼭지를 빠는 루드비히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를 유혹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남자를 제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이 제 일상인 양 굴었지만, 기실 난생처음 겪는 사건이었다. 캐서린은 루드비히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먹을 세게 쥔 채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흐읏.”

그러나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삼켜 버릴 것처럼 입에 문 루드비히가 적당히 도톰한 입술을 움직여 바짝 선 유두를 공략하는 바람에 그녀는 결국 탄성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쁩니다.”

당연히 예쁠 거라고 상상하긴 했지만.

루드비히가 나직하게 덧붙인 말에 캐서린은 화르륵 타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짓눌렀다.

‘뭐, 뭘 상상해?’

감히 종복된 기사가 주인으로 섬기는 레이디를 상대로 뭘 상상했다는 말일까. 캐서린은 루드비히를 꾸짖고 싶었지만 정작 혼이 나는 상황이 연출되는 건 자신이었다. 진주 가루를 바르기라도 한 듯 은은하게 빛이 나는 캐서린의 흰 엉덩이를 움켜쥔 그는 나쁜 짓을 들킨 아이를 바로잡는 훈육이라도 하듯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얼굴이, 아니, 온몸이 다 타서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캐서린은 한 손으로는 잡히지도 않는 루드비히의 커다란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녀의 상체에 코를 묻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높게 솟은 콧대가 그녀를 탐하는 데 방해라도 된다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린 그가 입술을 벌린다. 사이로 비치는 새빨간 혀가 기묘할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넣어도 됩니까?”

“뭘, 읏!”

질문에 캐서린의 대답이 필요 없는 건 루드비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아래를 파고드는 길쭉한 그의 손가락에 이를 악물었다.

“푹 젖으셨습니다.”

그런 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그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흐으.”

캐서린은 흐느끼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제 아래에 손가락 하나를 더 넣을 생각에 몰두한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여태 정중한 기사인 양 굴었던 게 죄 연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손끝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사과했던 남자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음부를 쑤신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조금, 좁을 것 같기도 한데.”

루드비히는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손가락 두 개를 잡아 문 캐서린의 구멍을 내려다보다 남성적인 목울대를 움직였다.

“박아도 되겠습니까?”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루드비히는 섣불리 캐서린과 교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제 엉덩이 골 사이를 푹푹 쑤셔 오는 루드비히의 물건을 한 번, 그리고 성난 그것과 달리 세심하게 제 얼굴을 살피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울컥.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귀두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철벅거린다.

“이제 와서 멈추려고요?”

“제가 자제하는 게 서투를 것 같아, 혹여 당신을 아프게 할까 걱정됩니다.”

다정한 어투였지만 루드비히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구멍을 쑤시고 있었으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음핵을 자극하고 있었다. 꿀럭이며 흐르는 애액이 그의 허벅지까지 적시는 수준이었다.

입 닥치고 박기나 했으면 좋겠다.

“흣, 읏.”

캐서린은 별이 튀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자신의 엉덩이를 스스로 움직였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기도 했고, 자신을 염려하는 루드비히에게 무언가 보여 주고 싶은 호승심이기도 했다.

“아, 아파 봤자, 지, 아악!”

“캐서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루드비히가 그녀의 상체를 붙잡았지만, 그는 곧 치닫는 쾌감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가 제게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팔뚝을 붙잡기까지 했다.

“잠, 잠깐만, 경, 잠깐만.”

뭔가 잘못됐다. 이 크기는 잘못됐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지만 캐서린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꿰뚫는 쾌감도 쾌감이었지만, 배 속까지 자극하는 것만 같은 루드비히의 성기는 이물감이 들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나, 숨이 안 쉬어져서.”

“천천히 움직이겠습니다.”

하지만 속도의 문제가 아닌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루드비히가 캐서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허리를 움직였다.

“읏.”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신을 콱콱 물어 오는 캐서린의 서투른 반응에 루드비히는 뻘뻘 땀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지금처럼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루드비히는 제 위에 꽂힌 캐서린의 하얀 엉덩이를 받들어 그녀를 던져 올렸다. 마치 성인 여성의 무게가 날렵한 레이피어 한 자루 정도 된다는 양.

“꺄악!”

캐서린은 질끈 눈을 감은 채 루드비히에게 휘말려 비명을 내질렀다. 레이디의 예법도 잊고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을 만큼 아찔한 고통이었다.

“아악!”

섹스가 이토록 아픈 것이라면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캐서린이 결심할 때쯤, 루드비히가 그녀의 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꽉 채운 느낌에 캐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등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지지한 그가 아주 천천히 제 하체를 움직인다. 쿵. 기둥이 내벽 안을 자극하는 쾌감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명멸했다.

“하앙.”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캐서린은 울컥 애액을 쏟아 내는 자신의 음부를 본능적으로 루드비히의 탄탄한 복근에 비벼 댔다.

“……후우.”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캐서린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캐서린은 허공에 뜬 발을 잔뜩 오므린 채 신음을 흐느꼈다.

루드비히는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문 캐서린의 입을 벌려 혀를 얽어 냈다.

“흐으읏.”

울먹이는 캐서린의 뒷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은 루드비히는 자신의 남성을 그녀에게 삽입한 채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장소가 바뀌었는지, 제 허리 아래 푹신한 베개가 놓이는지 자각할 정신머리가 남지 않은 캐서린은 그저 루드비히가 제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리는 대로 늘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럼 여태까지는 본격적이지 않았다는 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성, 제 한 몸뚱이를 지키겠다는 본능으로 캐서린이 그에게 반문하기도 전에 루드비히는 제 등과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안 그래도 핏줄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팽창했던 성기가, 그녀의 몸을 뚫고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아흣!”

루드비히가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강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헉. 그의 기둥을 감싸 안는 캐서린의 내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고, 축축했고, 사랑스러웠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서 타고 흐른 땀이 캐서린의 새하얀 뺨에 툭 떨어졌다. 마치 눈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맺힌 얼굴이 탐스러워 그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여 캐서린의 뺨에 키스했다.

“흐으윽.”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정은 무척 다정했지만, 추삽질을 시작한 그의 강건한 하체는 그렇지 못했다. 루드비히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가 우악스레 움켜쥔 탓에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캐서린의 신음이 고요한 복도로 새어 나갈 것처럼 퍼져 나간다. 루드비히는 한 손으로 캐서린의 유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흐읏, 아아앙!”

“헉!”

루드비히의 허리 짓에 침대 기둥이 우지끈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삐꺽거린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 내기엔 너무 좁고 여리다는 것을 인지했으면서도 마구 박아 대고 싶은 결국 욕망을 참지 못했다. 캐서린의 붉은 머리칼부터 희고 둥근 발가락 끝까지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탐하고, 안고, 먹고 싶었다.

루드비히의 거친 박음질에 캐서린의 흰 다리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두 다리를 제 어깨로 지지한 후 더 깊숙이 자신을 꽂아 넣었다.

“아아악!”

더 들어갈 구석이 없을 것 같았는데,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루드비히는 귀신처럼 좁은 구멍을 간신히 벌린 캐서린을 감지했다. 푸욱, 내리꽂히는 감각에 캐서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죽고 싶었다. 모든 감각이 폭발할 것처럼 날뛰어서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만, 그만!!!”

더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험이 전무한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됐든 본능적인 두려움이 캐서린을 잠식했다.

“더, 더……! 멈추지 말아요!”

그러나 캐서린 안의 또 다른 그녀가 튀어나오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루드비히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그녀가 남기는 생채기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루드비히는 열기에 들뜬 얼굴을 숙여 그녀의 젖꼭지를 빨아들였다.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푸른 눈이 짙어진다.

“하아앙!!!”

푹!

캐서린이 절정에 오르기가 무섭게 루드비히가 파정했다. 캐서린의 속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주르륵 흘러나온 뿌연 정액이 가는 다리와 잔뜩 주름진 이불을 적셨다.

“……이런, 이런 기분이군요.”

좋은 경험이었다. 캐서린은 모든 행위가 끝났다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좋긴 한데, 또 하기는 무서워.’

인간의 도리를 잃고 짐승이 되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캐서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드비히는 정액을 꿀럭꿀럭 뱉어 놓고도 다시금 발딱 고개를 치켜든 성기로 그녀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

사정을 했으면 끝난 것이 아닌가. 캐서린이 의아한 얼굴로 루드비히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그와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흐으응.”

루드비히의 손이 그녀의 여린 내부를 다시 준비시키기 위해 그녀의 음모를 파고든 상태였으니까.

“캐서린, 당신은 오늘 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캐서린의 음핵을 손으로 굴리면서 그가 야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른히 속삭였다.

“흐읏.”

“제가 당신을 약탈한 밤을.”

잊으려고 해도 못 잊을 거라고, 캐서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

자꾸만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 캐서린은 침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흐트러진 이불에는 정사의 흔적이 적나라했다.

‘하녀가 보기 전에 얼른 치워야…, 아니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던 캐서린은 마음을 바꿔 소파에 기대 빨래처럼 널브러졌다. 침대와 마찬가지로 소파도 난잡하게 어질러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반 병이 넘게 비운 독한 위스키,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술잔은 두 개.

그리고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운 캐서린의 온몸을 덮은 키스 마크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간밤의 열정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칠 년 전이고, 리카르도와 약혼하기 직전이니까 내 담당 하녀는 밀드레드겠지.’

밀드레드는 캐서린의 가정교사이자 샤프롱인 마담 벤지에의 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문란함이 아버지인 스왈렛 공작의 귓속에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무조건 숨기려고 드실 거야. 약혼을 진행하고 싶으실 테니까.’

루드비히 위그노아를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삼아 에넨체 대공가까지 삼킬 야망을 품고 있는 캐서린에게, 리카르도 에넨체와의 약혼이 그대로 진행되는 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었다.

“흐응.”

그녀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캐서린은 가는 목을 한껏 뒤로 젖힌 채 나무 손잡이가 달린 종을 집어 들었다.

“네, 아가씨.”

캐서린의 부름에 그녀의 바로 옆방에 머무르는 하녀 벨리나가 들어섰다.

“헉.”

어릴 때부터 캐서린을 모셔온 충성스러운 하녀 벨리나는 눈앞에 펼쳐진 어질러진 침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홉떴다.

“……아가씨? 아가씨!!!”

도둑이라도 들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도둑이었길래 침실 커튼을 다 찢어 놓은 걸까. 물론, 악악 터지려는 신음을 참기 위한 캐서린의 소행이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요! 경비병을 불러오겠어요!!! 아니, 호위 기사, 위그노아 경을 먼저!”

“쉬이, 벨. 진정하렴.”

캐서린은 화들짝 놀라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는 벨리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붉은 입술을 눌렀다. 차분한 캐서린의 태도에 벨리나는 그제야 침실에 강도가 들었다기엔 특정 부분만 난잡하게 어질러졌다는 맥락을 짚어 냈다.

“아가씨, 혹시, 나, 남자라도 침실에 들이셨나요?”

“응.”

“설마 리카르도 에넨체 대공자님?”

정숙한 레이디다운 행동은 아니었지만, 에넨체의 대공자라면 어느 정도 용납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약혼 무도회가 바로 오늘이었으니까.

“괘, 괜찮아요, 아가씨. 어차피 약혼하실 사이잖아요.”

“어쩌지. 내가 몸을 섞은 사람은 리카르도가 아닌데.”

“아가씨, 미치셨어요?”

“벨, 너무 오랜만이라 네가 얼마나 건방진 하녀였는지 내가 깜빡 잊고 말았구나.”

“오랜만은 무슨……. 당장 어제저녁에도 저랑 포커를 치셨잖아요?”

캐서린으로선 벨리나와 포커를 친 게 칠여 년 전 일이었다. 원래의 캐서린이라면 건방진 벨리나의 말에 트집을 잡고 호통을 쳤겠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기울일 뿐이었다.

“아가씨, 무서워요. 차라리 혼을 내주세요.”

말이 없는 캐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리나는 덥석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벨리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캐서린과 친구처럼 함께 자라, 가끔 그들이 아가씨와 하녀 사이라는 것을 잊고 캐서린을 대해 종종 혼이 나곤 했으니까.

“아가씨? 저 무섭다고요?”

“혼 안 내. 겁먹지 마.”

벨리나의 재촉에 캐서린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막상 벨리나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먹이는 벨리나의 앳된 얼굴과 죽기 직전 목도했던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으니까.

“우리 아가씨는 잘못 없어! 잘못 없다고, 이 개자식아!”

“역겹게도 남편의 배다른 동생과 몸을 섞어 애까지 밴 여자가 잘못이 없다니! 이 미친 하녀를 끌어내라!”

“우리 아가씨가 그랬을 리 없어!!! 그리고 만약 그러셨대도 당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겠지!!!”

리카르도 에넨체는 신관과 의사까지 매수해 캐서린이 루드비히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웠다. 그럼에도 공작가의 여식인지라 그녀의 하녀까지는 쉬이 하며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을, 벨리나는 부득불 리카르도에게 반항해 검에 찔려 죽었다.

“이 미친년이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쏟아내는구나! 역시 그 주인에 그 종속이군! 내가 완전히 스왈렛 공작에게 속고 말았어! 그딴 더러운 여자를 정숙한 레이디로 속여 나와 결혼까지 하게 만들다니!!”

“야, 너 고자지?! 고자인 것도 이혼 사유야!!! 우리 아가씨 풀어 줘!!! 악!!!”

바보.

캐서린은 벨리나의 허망한 죽음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드넓은 에넨체를 다스리는 인간이 속도 좁지. 제 주인을 막무가내로 가두고 굶긴 탓에 정신이 나간 하녀가 말실수를 했기로서니, 비겁하게 검을 들다니.

하긴, 리카르도 에넨체는 참으로 속 좁고 비겁한 인간이었다. 암살자가 캐서린을 처리할 때조차 그녀와 당당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 에일린 반델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설마 벨이 한 말에 정곡이라도 찔렸던 걸까.’

지금의 캐서린으로서는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벨, 간밤에 내 침실에 드나든 남자는 리카르도 에넨체가 아니야.”

“걱정 마세요. 제가 아무런 흔적 없이 침실을 아주 깨끗하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캐서린은 호기로운 벨리나의 다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깃펜을 잡아 든다.

“초대장을 다시 쓸 생각이니까, 손님들에게 전달이나 제대로 해 줘.”

아버지 몰래.

캐서린이 덧붙이듯 읊조린 말에 벨리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알겠어요, 아가씨. 저만 믿으세요!”

벨리나는 신중하고 보편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려 하던 캐서린과 달리 위험한 일을 좋아했다. 캐서린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치켜세운 채 방을 나서는 하녀를 지켜보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 이제 나와도 좋아요.”

캐서린의 허락에 그나마 멀쩡한 커튼 한 폭 뒤에 숨어 있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캐서린은 찬란한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전라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오, 옷은 입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벌거벗은 이는 루드비히였는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이 느껴야 하는 걸까. 캐서린은 그제야 느릿느릿 옷을 주워 입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부끄러운 점이라곤 한 점도 없을 만큼 완벽한 체형이긴 했다. 기사답지 않게 새하얀 피부는 캐서린의 것처럼 창백하다기보다 진주처럼 은은하게 빛이 났고, 군살 없이 조각처럼 잘 짜인 근육질의 등이 그가 옷을 입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저 덩치가 침대에서는 더 커 보인다는 게 신기하단 말이지.’

안 그래도 큰 사람인데, 침대에서의 그는 커다랗다 못해 그녀를 짓누를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해 보였다.

‘저 몸이, 그러니까 어제 나를…….’

“다 입었습니다.”

“…….”

“캐서린?”

넋을 놓고 루드비히의 몸을 감상하던 캐서린은 옷을 전부 갖춰 입고 몸을 돌린 그가 자신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낼 때 즈음이 되어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음, 음흠! 옷 다 입었으면 이리 와서 앉아 봐요.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줄 테니까.”

캐서린은 자신은 절대 그의 몸을 훔쳐본 적이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를 턱짓했다.

“네.”

루드비히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그녀의 명령에 다소곳이 소파에 앉았다. 그런 그의 앞에 차를 한 잔 따른 캐서린이 턱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경, 나는 경에게 일종의 계약을 제안하고자 해요.”

기실 몸을 섞기 전에 나눴어야 하는 대화였다. 어쩌다 보니 육체적 대화를 먼저 나누게 되었지만.

“……어떤 계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와 결혼해 준다면 당신이 에넨체 대공 작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로맨스라곤 전혀 없는 딱딱한 프러포즈였다.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제안에 감정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을 기울였다.

“결혼, 이요.”

루드비히가 먼저 입에 담은 것은 에넨체의 대공 자리가 아닌 캐서린과의 결혼이었다. 그 점이 조금 의뭉스러웠지만, 캐서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와 리카르도 에넨체의 약혼이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니까, 추문이 도는 것은 각오해야 할 거예요.”

“제가 당신을 약탈했다는 추문 말입니까?”

얄궂은 질문과 함께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캐서린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읽어지는 장난기에 조금 기가 막혔다.

“네. 경이 여태 쌓아 놓은 평판과 명예가 얼룩질 텐데 걱정 안 되나요?”

“제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걸까, 싶었지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루드비히의 각진 턱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공 작위를 향한 열망이 이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몰랐네.’

캐서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루드비히를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도 권력도 멀리하고 오롯이 검만 가까이하기에 그녀는 그에게 기사로서의 명예가 목숨보다도 중요하리라 생각했었으니까.

“추문이 뒤따르는 것만 각오할 수 있다면 됐네요. 어차피 경은 따로 만나는 여자도 없으니까.”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실제로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죽기 직전까지도 결혼은커녕 여자를 만나는 모습조차 보여 준 적이 없었으니까.

‘남색가라는 소문을 반쯤 믿었었는데, 어젯밤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닐 것 같고.’

캐서린이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할 루드비히는 그녀의 확신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없긴 합니다만.”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거절의 말을 내놓을까 두려워 그의 말을 끊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대공 작위를 완전히 보장해 주진 못해요. 에넨체의 기수들이야 뛰어난 기사인 당신을 반기겠지만, 아무리 스왈렛 공작가를 뒤에 업는다고 해도 원로들의 반발이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예 승산이 없는 싸움도 아니었다. 현 에넨체 대공이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리카르도를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애초에 무도가인 그가 갑작스럽게 지병 따위로 죽은 것도 수상해.’

캐서린은 뒤늦게 리카르도가 승계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내연녀와의 결혼을 위해 제 아내까지 죽이는 후안무치였으니 권력을 위해서 무슨 짓을 못 할까.

“날 믿고 운명을 한번 걸어 보겠어요?”

캐서린은 루드비히를 리카르도 대신 대공 작위에 올려 줄 자신이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내민 그녀의 흰 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우선, 약혼식 준비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루드비히의 대답에 경쾌하게 손뼉을 친 캐서린은 그의 잘생긴 뺨을 어루만졌다.

‘리카르도의 약혼식 의상이 어땠더라?’

자신의 두 번째 약혼식을 망칠 생각에 후후,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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