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한여름의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언제나 굳건하게 닫혀있던 대문이 오래간만에 개방되었다. 그 사이로 휘황찬란한 마차가 숨 가쁘게 내달렸다. 측면으로 꽂힌 깃발 위, 로트링겐 가문의 엠블럼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이 펄럭거리기를 멎었을 즈음, 마차 역시도 본관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마중을 나와 안절부절못하던 퀄린은 부리나케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마부와 시종을 물리고 대신 마차 문을 열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 벌컥 소리가 났다.
퀄린이 에스코트하기도 전에 아리따운 영애가 우아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햇빛 조각에 부딪히는 고동색 머리칼이 윤기를 머금은 채 흩날렸다. 눈처럼 하이얀 피부에 아몬드형으로 자리를 잡은 눈매 속 금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흠잡을 데 없는 미인이었다.
“누님, 오셨습니까?”
“그래.”
간결한 대답에서 뚱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났다.
가문의 문제로 이 먼 영지까지 몇 날 며칠을 내려와야만 했던 로트링겐의 아가씨, 이아나는 굉장히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그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반응하고는 본관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구두 소리마저도 뾰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이 걸레 새끼는 어딨니?”
신랄한 어조에 퀄린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예나 지금이나 수틀리면 말을 곱게 하는 법이 없는 아가씨였다.
“누, 누님! 잠시만요!”
퀄린은 아연한 낯짝으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본관에 없습니다. 지금 별관에…….”
“별관? 그래.”
저택의 본관으로 쏜살같이 다가가던 이아나는 접수했다는 듯 냉큼 몸을 틀었다. 별관이 있는 쪽이었다. 또다시 눈 깜짝할 새에 그리로 걸음 할까 봐 퀄린은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경망스럽게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아나는 소란스러운 작태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하니? 너 지금 내 앞을 막은 거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누님.”
“사내는 나이가 들수록 진중해지는 법이거늘, 넌 어째 더 경박스러워졌구나.”
그러면 레이디들에게 인기 없어, 얘.
간결한 말로 그에게 퉁을 놓은 이아나는 비키라는 듯 퀄린의 어깨를 밀었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 게 발렌틴을 연상시켰다. 고작 반쪽의 피가 섞였음에도 이렇게 유사할 수가 있나 싶을 만큼 그와 그녀는 닮은 면이 있었다. 서로는 그 점을 절대로 인정하는 법이 없지만.
퀄린은 저를 밀치는 손을 되레 붙잡아 이아나를 막아 세웠다.
“그러지 마시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와 회포 먼저 푸시는 건 어떠실지요. 발렌틴이야 하인을 보내 호출하면 되니까요.”
“어머, 얘 좀 봐. 내가 시간이 남는 줄 아니? 너와 회포나 풀고 있게?”
아니, 이 남매가 정말 쌍으로.
퀄린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그녀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안 본 사이에 미모가 더 만개하셨군요, 누님.”
감싸 쥔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기가 찬다는 기색으로 가득하던 이아나의 눈빛이 순간 탁 풀렸다.
“수도에서 무얼 하며 지내기에 그러실까요? 누님의 얘기가 듣고 싶어지는데요.”
“흠…… 그래? 그럼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줄까.”
이아나는 고집스레 별관 쪽으로 뻗던 발을 거두고 본관으로 향했다. 행여나 다시 변덕을 부릴까 봐 얼른 그녀를 챙기며 퀄린은 뒤따르는 하인들에게 급히 눈짓했다. 이아나의 시선을 피해 파닥파닥 지시를 내리는 손짓이 부산스러웠다.
별관에 있는 또다른 주인을 모셔오라는 뜻임을 알아차린 하인이 냉큼 움직였다.
“어르신은 안녕하십니까? 수도는 요즘 어떠하고요.”
응접실 소파에 앉은 이아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평소와 다를 게 뭐 있으려구. 거기는 늘 시끄러워서 탈이잖니.”
이 대답마저 발렌틴과 동일해서 퀄린은 약간 소름이 돋았다. 하녀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이아나는 고양이처럼 도도한 눈매를 치켜떴다.
“그리고 지금 수도가 문제니? 밴텀가가 더 골칫덩어리지.”
“아하하…….”
“여기서 신병 확보하고 있는 거, 맞지?”
이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들거렸다.
“예. 관련해서 발렌틴이 수도에 기별을 넣어 조치를 취해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그 망나니가 웬일로 뒤처리할 생각을 했나 싶어서 놀라기는 했단다. 황가에서 손을 써 준 덕에 우리 쪽으로 피해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문제는 밴텀가지. 장자를 돌려 달라며 요즈음 아주 난리 난리를.”
이아나는 골머리 앓는 얼굴로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이놈의 창놈 새끼 때문에 더 그래. 신병 확보하고 있으면 얌전히 수도로 보내면 되지. 왜 계속 붙들고 있는데? 더군다나 다친 것도 이제 다 호전됐다며! 수도로 귀환하라는 아버지 지시에 왜 묵묵부답이야? 나 원 참, 자기가 영지를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했다고.”
이아나의 코웃음에도 퀄린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 그게 말이지요. 코올리 밴텀의 신변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퀄린은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발렌틴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답답하게 왜 말을 끄니?”
호탕한 성격답게 기다려 주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퀄린은 울상이 되어 한숨처럼 답했다.
“발렌틴이 아주…… 짓뭉개 놨습니다.”
“짓뭉개?”
“예에. 코올리 밴텀을요…….”
발렌틴은 기차역의 운행까지 중단을 시키며(언젠가의 새벽 되풀이처럼 말이다.)하녀를 무사히 제 품으로 데려온 뒤로, 한동안 코올리 밴텀 따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살았다.
사건이 벌어졌던 겨울, 도주하는 그들을 포박하였고 발렌틴에게 막심한 해를 끼쳤기에 구금해 둘 명분은 넘쳤다. 행여나 명분이 없었더라도 발렌틴의 정재계 인맥을 이용했더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그런 녀석이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던 코올리 밴텀을 느닷없이 찾았다.
‘너 그거 왜…….’
지하 감옥으로 향하기 전 발렌틴이 챙긴 건 다름 아닌 망치였다. 무덤덤한 낯짝으로 망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오금이 바싹 조여들었다. 퀄린은 아주 오래간만에 그놈이 견줄 데 없는 미친놈임을 실감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감옥으로 들어선 그가 코올리 밴텀의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 패는 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깨달음이었다.
코올리 밴텀은 찍소리도 못해 보고 실신했다. 그때, 뺨 위로 후드득 튀었던 뜨거운 피의 감촉을 퀄린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벌써 죽었나?>
<미, 미, 미친.>
<아직 명치는 손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가 망치를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조진 부분이 바로 코올리가 그 하녀에게 해를 끼친 부위였다고 한다…….
삿된 취미도 관두고 꾸준히 재활에 임했다. 게다가 임신한 리브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모습에 드디어, 드디어! 저놈도 개과천선을 하는 건가, 싶던 퀄린의 행복한 상상은 그날 모조리 깨져버렸다. 코올리 밴텀의 머리통과 함께 아작아작 으그러져 버렸다. 역시나 사람 되긴 먼 놈이었다.
“죽었다는 건가?”
“비슷한 상태…… 라고 해야겠죠.”
그날의 참혹상이 어찌나 생생한지 다시 생각해도 오한이 들고 진저리가 났다. 새삼스럽게 몸을 부르르 떠는 퀄린과 달리 이아나는 그쯤이야 짐작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덤덤했다.
“누님, 안 놀라우십니까?”
“걔가 지 건드린 놈 가만 놔두는 거 봤니?”
“……그치만, 망치로 후려 팼는데.”
“총상으로 한 달간 혼수 상태였다며. 아예 목을 따지 않은 게 용한 지경인걸.”
퀄린은 로트링겐 가문이 진정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흠, 그래도 좀 이상하긴 하구나. 그 녀석이 평소 쓰던 방식이 아니라서 그런가?”
“방식이요?”
“걔야 뭐, 워낙 고고하시니 제 손을 더럽힐 바에야 남을 이용하자는 주의잖니.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웬일로 직접 그런 짓을 했지?”
퀄린은 이아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실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사실은요, 누님.”
그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보따리를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최근 약과 술을 일절 하지 않고, 재활 치료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무엇보다 코올리 밴텀을 직접 손봐준 것에 대한 속사정을 끝으로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이아나는 귀를 쫑긋 기울이며 좀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입을 떡 벌렸다.
“자, 잠깐만. 그러, 그러니까.”
어지간해서 말을 더듬는 법이 없는 이아나가 혀를 주체하지 못했다.
“걔가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가 생겼다는 말이니, 지금?”
경악에 젖은 이아나의 질문이 막 던져졌을 즈음.
굳건히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달칵, 열렸다. 두 쌍의 시선이 문가를 향해 나란히 돌아갔다.
“뭐야.”
발렌틴이었다.
준수한 상판이 까칠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난데없는 호출이 다소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리브가와 별관에 콕 박혀 지내기 시작한 이후로 호출할 때마다 귀찮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렇다고 퀄린이 직접 별관으로 가자니 그걸 더욱 싫어해서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퀄린은 그에게 이리로 오라 손짓했다. 발렌틴은 짜증이 물씬 배긴 낯짝으로 그의 옆에 철퍽 걸터앉았다.
“이건 또 뭐야?”
등받이에 팔을 걸친 그가 맞은편의 이복누이를 향해 퉁명한 눈길을 보냈다. 자그마치 몇 달만의 만남인데도 오가는 정나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아나는 시건방진 태도가 익숙한지 담담하게 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여긴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도착했단다. 하늘 같은 누님이 이곳까지 걸음해 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재깍재깍 나와서 마중을 해야지.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니?”
“너 여기 있는 거 알면 오지도 않았어.”
시간 아깝게.
발렌틴은 낮게 뇌까리고는 대기하고 서 있는 하녀에게 제 몫의 차도 지시했다. 이아나는 그런 이복동생을 묘한 눈길을 응시하다가 퀄린이 테이블에 내려둔 시가를 집어 들어 쓱 건넸다.
“치워, 끊었어,”
발렌틴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단칼에 거부했다. 벌레를 내쫓듯 손을 휘젓는 행동으로 얇은 재질의 소매가 말려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팔뚝에 남은 까끌한 화상 자국 역시 슬금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장갑 낀 손으로 입술을 가린 이아나가 과장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너 어디 아프니? 제정신이야? 드디어 회까닥?”
“넌 지금 네 꼴이 얼마나 경박스러운지 알고?”
불시에 한 방 맞은 이아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 사이에서 퀄린은 허허 웃었다.
‘진짜 그대로네.’
개와 고양이처럼 얼굴만 봐도 으르렁거리는 남매 사이는 여전했다. 하긴,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모습이 그러했으니 갑자기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더 이상할 터다.
이아나는 발렌틴 쪽을 향해 과도하게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조금 전 퀄린에게 듣기는 했지만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지. 정말 약과 술, 전부 끊었니?”
“그래.”
“왜?”
“나한테 관심 좀 끄지?”
그녀로서는 놀라 뒤로 자빠지고도 남을 일인데 발렌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되짚는 양 덤덤히 반응했다. 오히려 저 예사로운 모습이 그녀를 오리무중으로 빠뜨렸다. ‘제 의지’로 행하는 금단이라는 게 선연히 보여서 말이다.
이아나는 공작가의 일원 모두가 몇 년에 걸쳐서도 만들지 못한 그 의지를, 퀄린의 이야기 속 여자가 끌어냈음을 빠르게 간파했다.
“아니…… 마침 잘 왔나. 말할 것도 있었고.”
제 몫의 차를 홀짝거린 발렌틴이 다리를 외로 꼬아 앉았다.
“나 결혼할까 해.”
순간, 무게를 잴 수 없는 침묵이 세 사람 사이로 묵직이 내려앉았다. 이아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어야만 했으며, 퀄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린 퀄린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너 그거…… 리브가 양과 합의는 된 거냐?”
이 녀석이 결혼을 운운한다면 그 상대로 추정되는 인물은 한 사람뿐이었다. 퀄린은 이 망나니에게 찍혀 고생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그녀에게 늘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가엾기 그지없는데 결혼까지 한다니. 위로의 물결이 순식간에 가슴으로 차올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발렌틴의 눈길을 받자마자 싹둑 잘렸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소슬한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꼭 ‘내가 아니고서야 그녀와 결혼할 남자가 누구 있겠느냐’는 듯한 아주 뻔뻔하고 기가 막히는 속내가 얼핏 읽혔다.
“결호온?”
이윽고 테이블을 탕 내려친 이아나는 그런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호들갑스레 반응했다. 물론 놀라움의 원인은 오로지 화자가 발렌틴이라는 것뿐이었다.
오, 세상에.
저 망나니가 제 입으로 결혼을 운운하는 날이 오다니.
“아버지가 정해 준 혼담이란 혼담은 죄다 깨뜨렸던 놈이 이제 와 무슨 결혼?”
가지가지의 행색으로 파혼을 이끌었던 놈이었다.
약혼자 앞에서 다른 여자랑 몸을 섞는 걸 보여주지 않나. 억지로 독한 술을 먹이며 모욕감을 주질 않나. 공식적인 혼담 자리에서 시가 연기를 영애의 얼굴에 뿜질 않나.
여하간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그의 약혼자 후보에 올랐단 이유로 곤욕을 치른 영애가 한둘이 아녔다.
그렇게나 결혼을 기피하던 놈이 제 입으로 결혼을 운운하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 애를 가졌어.”
이아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곧 출산이야. 나 아버지 돼.”
“너, 너…… 너 이 미친놈!”
이아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삿대질하다가 핑글 도는 시야에 ‘아아.’ 신음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조금도, 정말 개미 손톱만큼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벌써부터 아버지가 거품을 물고 뒷목을 잡는 모습이 상상됐다.
퀄린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아나는 진정 편두통이 엄습하는데 발렌틴은 ‘그새 연기가 늘었군.’ 하며 빈정거리기 바빴다.
‘아니지, 잠깐.’
곧 이아나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굴러갔다.
누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만 같은 이 깜짝 소식과 별개로 이후 진행될 이해관계를 머릿속에서 빠르게 펼쳐 보았다. 아기, 그리고 결혼. 좀처럼 수도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던 모습. 이곳에서 만난 여자. 두서없던 생각이 하나둘씩 정리가 되며 이아나는 어쩌면 이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퀄린이 말한 그 여자니?”
“그래.”
“지금 여기서 지내고?”
“그럼 내 애를 가졌는데 딴데서 지내기라도 하겠어?”
이아나는 누가 넋을 잡아 뺀 허망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복동생을 ‘창놈’ 혹은 ‘걸레’와 같은 신랄한 호칭으로 부르는 건 다 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온 바가 있어서였다. 몸뚱어리를 무슨 걸레짝보다 더 험하게 굴리는 놈이었다. 하다못해 대걸레도 쟤보다는 깨끗할 거다.
녀석이 부른 창부와 아침마다 마주친 건 늦게까지 늘어져 자는 놈팡이 발렌틴이 아니라 그의 가족인 경우가 적잖았다. 특히나 그와 침실이 가까운 편인 이아나가 말이다. 그걸 몇 년은 봐왔기에 그의 천박하고 파렴치한 면에는 이골이 난 바였다.
그토록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던 녀석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사고가 일어나기에 딱 좋은 문란한 생활이었다. 그 우려대로, 한 번은 그의 후계를 뱄다며 공작저까지 찾아온 여자가 있었다.
발렌틴은 그때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정도 사기를 칠 거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는 한 거겠지?>
사기.
그 배 속에 들은 게 내 애일 리가 없다는 확언이었다. 그가 애장하는 총을 만지작거리며 지껄이는 그 모습은 타인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겁박보다도 일단 확인과 규명이 필요한 일이었다. 로트링겐 공작은 보좌관에게 조사를 지시하였고 끝내 사실이 아님으로 판명 났다.
<너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조사하기도 전에 내 애가 아닐 거라고 단정 짓던 발렌틴의 확언을 되짚는 질문이었다. 의외의 구석에서 철두철미한 면 있는가 싶어 이아나는 꽤 놀라 물었었다.
<뭐를.>
<그 여자가 밴 애가 네 씨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발렌틴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무감하게 답했다.
<몰랐는데?>
당당한 태도에 입이 헤벌어졌다.
알고 보니 놈에게는 무언가 비책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책임감을 쥐뿔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랬던 놈이, 이제 와 제 애를 뱄으니 결혼을 하겠다고?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쓰는 작자였다고!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달았다. 이아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말을 꿀꺽 삼키고는 싱긋 웃었다.
“만나 보고 싶어.”
“누굴?”
“그 여자 말이야.”
“네가 왜?”
“어머, 얘는. 말 한 번 싸가지 없게 하는 건 여전하구나. 네 누이로서 당연한 것 아니니?”
“너 같은 누이 둔 적 없으니까 얌전히 돌아가.”
가차 없는 말에 제삼자처럼 빠져있던 퀄린이 외려 머쓱해졌다. 그는 ‘야, 야. 살살 좀 해라…….’ 하고 속삭이며 발렌틴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발렌틴은 조금의 여지도 없는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가로 향하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꽂아 넣듯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순순히 허락하실 것 같니?”
발렌틴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신경질이 그들먹하게 배인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아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넌 나를 설득해야 해.”
“…….”
“아버지께서 누구에게 껌뻑 죽는지 잘 알잖아?”
말한 대로 로트링겐 공작은 유일한 딸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그랬고 성년이 된 지금 역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자란 덕에 이아나는 유년 시절부터 고생 한 번 해 보지 않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게 무엇인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상당히 제멋대로인 구석과 그때그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자신감이 바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증거였다.
그런 그녀이니만큼 공작을 향한 입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네 편이 되어 준다면 그것만큼 수월한 것도 없을 테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발렌틴 역시 결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공작을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기고 있던 차였다.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만나게 해 주지.”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도 리브가의 컨디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모든 건 그녀의 의사가 먼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리브가의 의향에 맞추게 된 태도는 이제 스스로도 이상함을 느낄 겨를 없이 익숙해진 바였다.
“지금? 지금 그 여자에게 가는 거니?”
“따라오지 마.”
이아나는 늘 그랬듯 그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응접실을 빠져나온 남매는 곧장 별관으로 향했다. 그녀는 별관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깨끗했었나?’
본관도 충분히 드넓었기에 로트링겐 가문에서는 별관을 주로 창고의 용도로 사용했다. 그렇기에 영지에 내려와 머물 때에도 이곳으로 걸음 할 일은 전무했다. 아주 오래간만에 찾은 별관은 본관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말끔하게 단장된 채였다. 생활감 스민 손길이 곳곳에 묻어났다.
이윽고 발렌틴의 뒤를 따라가던 이아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게 뭐람?”
실내에 전에 없던 유리온실이 조성되어 있었다.
응접실 서너 개를 터 한 공간으로 만들어 설치한 듯한 유리온실은 꼭 지상 낙원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천장은 대대적인 공사를 한 모양인지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뭉게구름 사이로 빼꼼 드러난 찬연한 햇살이 여름의 공기와 함께 유리온실로 쏟아졌다.
코를 스치는 꽃내음이 사붓하면서도 강렬했다. 높지 않은 문턱을 넘으니, 파릇파릇한 초목 속에 파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쪼로롱. 청아한 새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작정하고 꾸려낸 모양이었다.
주변을 구경하기 바쁘던 이아나는 곧 허리춤을 가로막는 팔뚝에 멈칫했다.
“여기서 기다려.”
이번엔 무시할 수 없는 저음이었다.
이아나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발렌틴은 그녀가 멈춘 걸 제 눈으로 확인까지 한 후에야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온실 중앙에 놓인 와탑이었다. 꽃 더미가 주변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어서 저기에 사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머지않아 이아나의 눈에 믿기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발렌틴은 기꺼이 다리를 굽히고 앉아 와탑 위에 누운 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행동은 둘째치고, 대상을 응시하는 눈빛이 이아나의 신경을 꽁꽁 옭아맸다.
가족을 포함한 타인에게 언제나 심드렁하거나 무미건조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당장 물어뜯을 듯 사나운 눈길만 내비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저리도 온유한 눈동자라니.
이곳, 유리온실의 전경과 딱 어울리는 눈이었다. 그가 일평생 몸을 맡겨온 삿된 타락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늘 검은 탐욕으로 젖어 있는 듯 푹 꺼져 보이기만 하던 홍채에 생기가 있었다.
무어라 작게 속삭이며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넘겨 주는 모습은 설마 저 녀석에게서 보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다정함의 형태였다.
이아나의 눈길은 자연스레 그가 보듬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이 위치에서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서 외양이라고는 갈색의 긴 머리칼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깊이 잠이 든 모양인지 여인은 발렌틴의 거듭되는 부름에도 미동이 없었다.
잠시 후, 발렌틴은 굽히고 있던 상체를 세우며 여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디단 무언가가 뚝뚝 떨어져 나오는 듯한 행위였다.
돌아온 그의 눈동자에서 조금 전의 설탕 같은 기류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새 메마른 무채색의 농도로 변해 있었다. 태세전환이 어찌나 순식간인지, 이아나는 마치 거죽만 똑같고 생판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일었다.
“인사는 나중에 해. 밤새 잠을 설쳐서 지금은 자도록 놔두고 싶으니까.”
그녀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이복동생을 기가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그럼, 지금 나보고 기다리라는 거니?”
발렌틴은 정말로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언성을 높이는 이아나를 온실 밖으로 끌어냈다.
“불만이면 돌아가.”
이아나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밀려나기 전 다시금 온실 안쪽을 흘끗 보았다. 발렌틴을 이토록 쉽게도 꿇리는 여자라. 막연하던 기대감이 양껏 부풀고 호기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 *
이아나가 바람대로 발렌틴의 ‘그녀’를 만나게 된 건 다음 날 정오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퀄린을 들들 볶은 덕에 일찌감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매달리는 듯 굴어야 한다는 것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으나 정수리까지 다다른 호기심이 그를 의연하게 억눌렀다.
“입조심해.”
발렌틴이 야외 테라스로 이끌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이아나는 빙긋 웃으며 반문했다.
“무슨 입?”
“욕도 하지 말고 나에 관한 얘기도 하지 말라고.”
“어머,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거니?”
“될 수 있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군.”
또 한차례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새 테라스에 도착했다.
이아나는 테라스로 들어서는 순간에야 어제 뒷모습으로밖에 보지 못한 여인을 눈에 담았다. 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정갈했다. 교육이라도 받은 듯 딱히 트집 잡을 곳이 없었다.
그래, 꼭 깍듯한 사용인처럼.
<원래는 발렌틴의 하녀였어요.>
퀄린에게서 이 여인의 본래 신분을 들었기에 의문은 들지 않았다.
자리는 빠르게 만들어졌다. 발렌틴은 일어선 그녀를 앉히고 자신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 옆자리에 착석했다. 이아나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으며 리브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훑어보았다. 백작약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이었다. 말끔하면서도 묘하게 눈길을 잡아끄는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쟤가 저런 취향이었나?’
이아나는 그간 발렌틴을 스쳐 지나간 여자를 헤아려 보다가 관두었다.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래서 결혼을 입에 올렸을 때도 벼락을 맞은 양 굴었던 게 아닌가.
이아나가 마련된 레몬 머틀 차를 한 입 마시는 사이 리브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브가라고 해요.”
“그래, 원래 발렌틴의 하녀였다고.”
“네.”
말간 인상답게 태도 역시 조용조용했다. 이제는 아니라지만 한때 몸담고 있던 하녀직처럼 고분고분해 보이기도 했다. 흐음, 이아나는 숨을 들이켜며 그녀의 배 쪽으로 눈을 내렸다.
“얼마쯤 남았지?”
“네?”
“출산 말이네.”
“아, 한 달 정도입니다.”
그 말대로 곡선을 그리는 배의 윤곽이 제법 도드라졌다. 품이 넉넉한 머터너티 드레스를 입고 있었음에도 저렇게 부풀어 보이는 건 막달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대화는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발렌틴의 그녀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쪽이 익숙한지 입을 다문 채로 경청의 반응을 곧잘 보였다. 그리고 이따금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아나는 썩 불편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아직은 어색함이 남아 있어 리브가보다는 발렌틴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발렌틴은 그녀의 말에 설렁설렁 반응하며 리브가를 챙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기실 앉아만 있는 것뿐인데도 뭐가 그리 걱정이 되는지 손수 수발을 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웃긴 건 그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게 이아나 한 사람뿐이라는 거였다. 챙김을 받는 리브가는 극진한 태도가 익숙한지 그저 무덤덤했다.
무엇보다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너무 뜨겁나?”
“조금.”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다.
발렌틴이야 자기 잘난 맛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놈이니 하대가 당연하다지만, 제게 꼬박꼬박 예의를 차리는 리브가도 그에게 대등하게 반말을 했다. 저건 발렌틴이 그 점을 묵인했거나 혹은 먼저 제안을 했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데 이 역시도 그 주체가 발렌틴이라는 데에서 이아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퀄린이 처음 그에게 반말을 했을 때 재수 없다며 정강이를 걷어찼던 것 같은데……. 그녀는 거푸 놀라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적당히 주의를 환기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최근에 스푸이트 가문에서 서신을 보내왔어.”
리브가의 찻잔 속에 부순 얼음 조각을 넣어주던 발렌틴이 멈칫했다.
“요즈음 교류를 안 한다며? 의외구나.”
이아나로서는 별 뜻 없이 꺼낸 이야기인데 테이블을 감싸는 분위기가 묘하게 냉각됐다. 시선을 들고서야 살짝 바뀐 기류를 인지한 이아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한 박자 늦게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스푸이트 가문의 영애, 벨라 스푸이트가 발렌틴과 어떠한 관계로 교우를 유지해 왔는지 모르지 않았다. 코올리 밴텀처럼 발렌틴이 주최하는 사교모임에 적극적인 참석률을 보이던 문란한 여인이었다.
친근하게 지내는 대다수의 사내와 몸을 섞는 게 취미인 여자라서, 발렌틴과 특별히 깊은 관계였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밀접하며 껄끄러운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리브가 역시 그녀의 존재, 그리고 발렌틴과의 관계를 아는 듯 표정이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발렌틴은 스푸이트란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리브가만 응시했다. 눈길만 지긋할 뿐 행동은 시원스럽지 못했다. 당장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소리 없는 한숨이 전부였다. 흡사 눈치라도 보듯이 말이다.
리브가는 좌불안석인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내리깐 채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불쾌한 낯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말갛기만 한 낯도 아니었다. 속내 한구석이 예민하게 건드려진 건 확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곧 발렌틴의 눈길은 이아나에게로 돌아왔다.
저 눈빛, 낯설지 않다. 이아나는 무심결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끔 ‘네 혀는 영 쓸모가 없는 듯한데 그럴 바엔 잘라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하고 서슬 퍼런 말을 할 때와 같은 눈빛이라서였다. 지금 저 살벌한 기색은 경고에 가깝던 그 말을 실제로 행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덜컥 끼쳐왔다.
세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적막을 깬 건 테라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발렌.”
퀄린이었다.
“잠시 괜찮아?”
그가 양해를 구하듯 조심스레 물었다.
발렌틴은 영 내키지 않은 얼굴로 리브가를 돌아보았다. 리브가가 다녀와도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쉰 그가 리브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키며 이아나 쪽으로 짧게 눈길을 주었다. 정말 찰나였음에도 그 안에 박힌 경고성의 의미가 너무 훤히 읽혀서 이아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댔다.
발렌틴이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테라스에는 마주 보는 두 여인만이 남았다. 단순히 우연 같아 보이는 상황이지만 아니었다. 이아나는 발렌틴이 자취를 감추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퀄린에게 티타임 도중 그를 잠시간 불러 달라고 부탁한 게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이아나의 성격상 저보다 아랫것이라고 판단되는 이에게 이토록 예의를 차려 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발렌틴이 이 여인을 무슨 금쪽처럼 매우 조심스럽고 극진하게 대하니 저 역시도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만한 척 말다툼을 곧잘 하지만 그를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건 이아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찻잔만 주시하던 리브가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그럼요.”
“결혼 말인데.”
“…….”
“그쪽도 동의한 게 맞긴 한 거지?”
리브가가 의아한 눈을 해 보였다. 이아나는 상체를 숙이며 바깥에 들리지 않게끔 속삭였다.
“쟤가 결혼을 하겠다는 게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 혹시 녀석의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응하는 거라면…….”
큰 의도가 있어서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서.
어제 퀄린에게 듣자 하니 제 망나니 핏줄 때문에 고생을 적잖게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그녀가 발렌틴의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걸 알았을 때 퀄린은 무척이나 놀랐다고.
영지에 도착한 이후 까무러칠 만한 일 천지여서 이아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놀란 건 발렌틴의 태도였다. 오는 여자 가는 여자 막지 않고, 대우 역시도 영 형편없던 놈이 사랑에 빠져 이토록 애지중지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솔직히 좀, 재밌기도 했다.
조금 전 스푸이트 영애를 화두에 올렸다는 이유로,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반응을 떠올리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까 발렌틴의 아기를 밴 이 여인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약점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언제나 그를 이겨 먹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이아나는 이 상황이 아주 재밌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어디를 건드리면 그가 맥을 못 추는지 알아 버렸으니까.
“아니요.”
별안간 대답이 들려와 맞은편으로 신경이 가닿았다.
리브가는 꼭 재밌는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담담할 때는 말갛기만 하던 인상이 웃으니 대번에 화사해졌다. 이 여름의 숨 막히는 공기를 조금이나마 트여 주는 웃음이었다.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니에요.”
거짓이라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지금 짓는 저 미소가 그 증거였다. 꺼리거나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은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참 이상하게도 저 얼굴을 보니 발렌틴이 왜 그토록 이 여자에게 목을 매는지 한순간 이해가 갔다. 처연하면서도 묘하게 애잔하던 분위기가 저 웃음 한 번을 기점으로 바뀌는 것도 같았으니까.
온화하고도 찬란하게 말이다.
그날 이후 이아나는 리브가와 종종 자리를 가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첫 티타임의 마지막쯤 리브가가 홀연히 꺼낸 말 때문이었다.
<차를 좋아하세요?>
<응?>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그 말대로 이아나는 차를 즐겨하기도 했고 그 종류에 관심도 많았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을 하녀된 신분으로 살아온 리브가는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 능통한 편이었다. 맛이나 향, 색깔이나 어떠한 디저트에 어떤 것이 곧잘 어울리는지.
응접실에서 발렌틴을 모셨던 얼마 안 되는 기간에도 매일매일 준비해 가는 차가 달랐다.
이아나는 리브가와의 자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와 같은 영랑들이 모이는 티파티는 언제나 남에 관한 염문과 군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이에는 정쟁 관계 간의 견제와 균열 역시 빠지지 않았다.
공작 영애인지라 그러한 자리를 피할 수 없어 꼬박꼬박 나서는 편이지만, 실은 조금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한눈을 팔다가는 매도되기 십상이라서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기만 들지 않은 전쟁터인 티 파티를 버티는 원동력은 향긋한 차가 전부였다.
리브가와의 자리는 그런 것들이 부재하여 좋았다. 내비치는 모습을, 서로 간의 눈치 싸움을, 어투만 정중할 뿐 상대방을 할퀴기 분주한 분위기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또 리브가의 태도도 그 아늑함에 한몫을 했다. 간혹 하고 싶을 말을 하면 리브가는 올곧은 시선으로 경청해 주었고 그게 아니라면 고요히 적막을 나누었다. 사용인이었던 과거 덕분인지 행동거지나 어투에 크게 거슬리는 것이 없어 흡족했다. 원래 무난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다.
“걔랑 결혼 안 하면 안 되겠니……? 네가 아깝다.”
마침내 수도로 떠나기 전날, 이아나는 저도 모르게 그런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리브가는 웬일로 소리를 내어 웃었으나 그 말에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를 보고 이아나는 그녀가 정말 발렌틴과의 결혼을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쪽의 일방적인 의사로 진행되는 건 결코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아나가 수도로 돌아갈 날이 왔다. 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떠나게 되었는데 매일 밤마다 찾아온 발렌틴이 빨리 돌아가라고 성화와 짜증을 부려서였다. 정확히는 ‘언제 꺼질래?’와 같은 협박성의 말투이긴 했다.
“누님, 모쪼록 조심히 돌아가시지요.”
그녀가 타고 갈 마차의 점검을 마친 퀄린이 말했다.
배웅 나온 자 중 리브가는 없었다. 지금 오수에 빠져 있다던데, 보아하니 둘의 만남을 시종일관 껄끄러워하던 발렌틴이 오늘 떠난다는 사실을 전하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착한 리브가의 심성상 손님이 떠난다면 몸이 무거워도 나아볼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이아나는 굳이 그녀를 부르라 명하지 않았다. 막달에 가까워진 임부를 위한 배려였다.
그녀가 이만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아나.”
안으로 들어서기 전, 발렌틴의 음성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이아나는 마차의 문턱을 잡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가 가지런히 접힌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니?”
“밴텀가의 정리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이아나의 눈빛이 묘해졌다.
“코올리 밴텀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밴텀 가문.”
혹시나 싶어 물었는데 머뭇거림조차 없다. 이아나는 마차에 올라타기를 멈추고 다시 내려와 평지를 밟았다.
그녀는 다소 착잡한 얼굴로 이복동생을 응시했다.
“정녕 끝을 보겠다 이거니?”
“그 새끼 대가리를 그렇게 만들 때부터 생각한 일이었어.”
이아나는 지난날 확인한 코올리 밴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학을 떼던 퀄린의 반응대로 아주 끔찍해서 눈살이 다 찌푸려질 수준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고깃덩이 같았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그를 수도로 운송하기 위하여 이아나의 마차 뒤에는 짐마차가 딸린 차였다.
그쪽을 힐끗거린 이아나는 손에 쥐어진 종이를 폈다. 내용은 정갈한 필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도로 향해서 거기 적힌 대로만 해. 그럼 다 알아서 처리될 테니까.”
이미 그 방법까지 마련을 해 둔 모양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치밀하여 이아나는 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요즈음 아주 끼고 돌지 못해 안달인 리브가를, 코올리 밴텀이 겁탈하려다 못해 납치까지 했음을 전해 들었다.
“내가 이걸 해 줘야 할 이유는?”
이아나는 어수선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서 팔짱을 꼈다.
아웅다웅하기 바쁜 그들의 거래에는 언제나 대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발렌틴은 익히 예상한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알아보니 밴텀가가 황궁에 보고를 올리지 않은 땅이 있더군. 남부 쪽에 위치한 철의 땅. 그거면 되겠나?”
예상치도 못한 대가의 등장에 이아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 그게 사실이야?”
“그래.”
“너 그걸 어떻게 알았…… 아니, 됐다.”
그가 거미줄처럼 곳곳에 뻗어둔 정보망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몇 달간 영지에만 처박혀 있었던 주제에 대체 어떻게 수도의 사람을 구슬려 알아낸 건지, 참. 어떤 면에서는 우스운데 어떤 면에서는 번번이 소름 끼치게 만든다.
이아나는 이번 연줄에 황족이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강력하게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가 꾸린 일 역시도 무리 없이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철의 땅 정도면 섭하지 않는 지참금 수준은 되어 주겠지.”
섭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군침이 흐르고도 남을 노다지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막대한 대가를 곱씹던 이아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달라는 뇌물이니?”
“뇌물이라기에는 그쪽이 마냥 손해만 보는 건 아니잖아? 내가 수도에 올라오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실 테니.”
이아나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결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발렌틴이 수도에서 행하는 영향력이 상당한 만큼 로트링겐 가문에서도 그를 간과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가 어느 날 가주가 되겠다는 욕심이 든다면? 지금까지는 한량처럼 유유자적 살아왔다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마약을 통해 확장한 힘으로는 그 욕망을 이루는 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황족까지 구워삶아 먹는 놈인데. 지금 당장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 문제 없는 가문을 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멸문시키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로트링겐 가문은 그를 업신여기며 동시에 두려워한다.
그러니만큼 그가 자발적으로 이곳에 있어 주겠다는 게 퍽 안도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맹렬하게 정리되었던 이아나의 생각 또한 그것으로 귀결되었다. 발렌틴이 이곳에 남아 얌전히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는 쪽이, 그들에게는 나은 선택지였다.
이아나는 가끔 이런 제 속내가 역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귀족으로 태어났기에 이런 이해타산적인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역시도 발렌틴보다는 완전히 피가 섞인 오라비, 이든이 로트링겐 가주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결혼하게 된다면 초대해 줄 거니?”
단순하지만 속에 담긴 의미는 영 가볍지 않은 질문이었다.
발렌틴이 웬일로 환하게 웃었다.
“아니.”
요요한 웃음이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를 떠올리게 했다.
“오지 마.”
조금쯤은 기대했으나 그 기대를 깡그리 부수는 대답에 이아나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며칠간 리브가와 가진 티타임의 자리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리브가가 괜찮다고 하여 개입하지 못한 듯했으나 시종일관 이아나에게 면박을 주었었다. 물론 그 짓도 리브가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행했다.
여우가 따로 없지.
이아나는 아무래도 리브가가 단단히 속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이를 품에 잘 갈무리한 그녀가 이번에야말로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떠나가는 마차 너머로 환한 빛줄기가 강렬하게 드리웠다.
<욕망 덩어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