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꿈조차 꾸지 않은 암흑의 시간이었다.
장막 같은 어둠 속을 끝없이 헤엄치고 또 헤엄치다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온몸이 견디기 버거울 만큼 쑤셨다.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저리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어, 잠, 일어나면……!”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는데 말리는 손길이 시야로 불쑥 튀어나왔다. 퀄린이었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리브가는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챘다. 기절하기 전의 기억만 아니었더라도 한숨을 내쉬며 ‘또 여기인가.’ 하고 체념했을 테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주인님은요?”
퀄린의 표정에 망설임이 층층이 깔렸다. 그게 그녀의 기도를 졸아붙게 했다. 혼란이 부유하던 가슴으로 한기가 쏟아졌다. 심장이 얼어붙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양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급히 이불을 걷었다. 만류에도 기어이 침대를 내려온 리브가는 비틀비틀 걸어 문가로 향했다.
“아직!”
퀄린은 그런 그녀를 붙잡으며 목구멍에 걸린 말을 토해 냈다. 리브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
“탄환이 위험한 부위를 스치는 바람에, 주치의가 할 수 있는 조치는 이미 다 취해 놓은 상태다. 이제 남은 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퀄린은 착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루 만에 정신을 차린 그녀와 달리 발렌틴은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퀄린은 그녀를 굳이 저택에서 내보내지 않았고 리브가 역시도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깨어나는 것만큼은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저를 죽을힘으로 밀쳐 내기 전 건넨 사과가 귓바퀴에 고여 사라지지를 않았다.
뭐가 뭔지 몰라도, 그게 부디 마지막 인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알았다.
그녀는 깨어난 당일, 발렌틴을 찾아가 보았다.
후두부의 출혈과 왼쪽 다리를 접질린 것을 제외하면 무사한 리브가와 달리 발렌틴은 꽤나 위중한 편이었다. 오막집이 무너져 내리며 나뭇더미에 깔리는 바람에 전신 타박상을 입었고, 불길이 빠르게 번져 화상 역시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전언대로, 침대 위의 그는 만신창이였다. 피부가 드러나는 곳보다 붕대를 감은 부분이 더 많았다.
‘죽은…….’
사람 같다.
제가 떠올린 생각인데, 제 마음이 속절없이 철렁했다.
눈앞에서 발렌틴이 총을 맞는 걸 보았을 때도 이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둔통이 속을 맥없이 덮쳐왔다. 지끈지끈. 검푸르게 멍든 부분을 자꾸만 눌러 대는 것처럼. 그 자리에 멍이 든지도 몰랐는데 그게 꾹꾹 주물러지고서야, 그리하여 아픔을 느끼고서야 그 존재를 인지하게 됐다.
멍.
그래, 그는 딱 그런 존재였다.
사랑을 뜯어낸 자리에 든 시퍼런 멍 같은 존재.
약을 바를 필요는 없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서서히 나아질 테니까. 눈살 찌푸려지는 색을 지나 본래의 하얀 피부를 되찾게 되리라.
그러나 잊을만 하면 자꾸 자극이 가해져서.
살갗 속에 퍼렇게 맺힌 피가 빠질 겨를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해도 건드리면 맥없이 신경이 쏠렸다.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미워하잖아.
싫어하잖아, 나를.
그래놓고 이제 와서 왜 이래.
왜 하나 있는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굴어?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놈 앞에서 무릎을 꿇어?
왜, 나를.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가 있지…….”
저 좋자고 양껏 무너뜨리고서 뒤늦게야 운운하는 사랑은 이기적일 따름이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 모습이 익숙했다. 아파서 헐떡대는 그의 귓가에, 기억해 주길 바라며 제 이름을 욱여넣기 바쁘던 자신의 과거가 그 이기심과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각기 마음에 품은, 시발점이 어긋난 사랑.
그건 전혀 예쁜 모양새가 아니었다.
아프거나 힘들거나 분노하거나 억울할 뿐이었다. 때로는 저속하고, 때로는 원초적이며, 때로는 저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예쁘지 않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완전한 형태의 그것이 있다면, 비틀어지고 마모된 유형도 있을 뿐이다. 리브가가 품은 게, 그리고 어쩌면 그가 품은 걸지 모를 사랑이 딱 그 짝이었다.
흉측하고 난폭한 점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일면으로 지닌 사랑.
리브가는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붕대의 감촉이 거칠거칠했다. 마음이 자꾸 제대로 서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야 명확하게 바로 선 것이 있었다.
그가 원망스럽고 비할 바 없이 미웠다.
그러나 그게 결코, 죽음까지 가길 바란 건 아니었다는 것을.
* * *
한 달은 손 틈 사이로 새는 모래처럼 흘렀다.
발렌틴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듯, 동면에 든 듯 고요했다. 그 나름대로 버티는 걸지도 모르는데 시간은 조금도 기다려 주지 않고 냉랭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한 달간 변화는 적잖았다.
겨우내 마지막 시련처럼 매서운 눈이 몰아쳤다. 벽난로의 열기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할 만큼 냉랭했다.
저택 뒤편으로 이어지는 숲속의 호수는 하얀 눈이 쌓여 꽁꽁 얼었다. 그 위로 얼음덩어리 같은 냉풍이 이따금 불어왔다. 케시는 결혼을 하여 빌리언과 가정을 꾸렸고, 리브가는 잠이 부쩍 늘었다.
공사가 다망한 퀄린을 대신하여 발렌틴을 살피는 건 리브가의 몫이 되었다.
오늘 역시 그랬다.
눈부신 빛 조각이 정결한 낯 위에 겨울 공기와 함께 내려앉았다. 반반하기 그지없던 얼굴은 어째 마주칠 때마다 볼품없이 마르고 야위어만 갔다.
당장 관 속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 오늘 역시도 그녀의 맘 어딘가를 아릿하게 했다. 한 달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녀의 맘속에 든 멍은 낫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낫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하는 시점이었다.
<모순적이지만 차라리 이러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죽은 듯 잠만 자니 적어도 약 때문에 힘들어할 일은 없잖아.>
<……힘들어해요?>
<몰랐나? 널 보내 주고 난 뒤로 약이랑 술에 도통 손을 대질 못하더라고. 금단 증세 때문에 밤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버텨 보겠다고 제 살을 피가 나도록 긁어 대지를 않나, 먹은 것도 없으면서 연신 토악질을 하질 않나.>
어느 날 함께 그를 지켜보던 퀄린이 그런 말을 했었다.
의식 불명 상태가 이어지는 건, 이때까지 고질병처럼 앓던 금단 증세로 건강이 약화된 탓일지 모른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제야 지난날 발렌틴에게서 본 현상이 금단에 의한 수전증이라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지금이 낫다는 말대로, 흘끗 내려다본 그의 손은 미동 없이 고요했다.
정녕 이런 상태가 나은 걸까?
생과 사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느라 금단을 느낄 겨를도 없는 지금의 상태가…….
시가를 들고 필터에 희멀건 약을 덕지덕지 바르던 게 자연스러운 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몸의 어딘가를 붙잡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쪽이라든지. 그러나 기억 속의 잔상은 어느새 주체할 수 없이 떨거나, 피로 젖은 상태로만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신경이 가닿았다.
툭툭 불거진 뼈마디에 가만한 눈길을 주던 차였다.
움찔.
이불 위 곧게 놓아진 손끝이 별안간 곱아들었다.
한 달 만의 생체 반응이었다. 리브가가 주춤했다. 시선이 위를 향했다. 이대로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신기루처럼 아득한 장면이었다. 기다림이 길었음을 표하듯 좀체 믿기지가 않았다.
머지않아 감겨 있던 눈꺼풀이 어물어물 들어 올려졌다.
발렌틴이 깨어났다.
“…….”
“…….”
감격스러운 재회는 아니었다.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는 삭막했다. 아니, 너무 짙고 빽빽하게 얽혀 있어서 도리어 그게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할 말이 많으면 외려 입을 다물게 되는 것처럼.
그토록 속이 고인 게 너무나 많은 관계였다.
발렌틴이 굼뜬 속도로 눈을 가물거리다가 의자에 앉은 리브가를 발견했다.
“……왜, 또.”
한 달간 잠들어 있던 탓인지 목소리가 저 바닥까지 침강해 있었다. 쉰 것도 같고 꺼끌꺼끌한 것도 같다.
“왜 또 그런 눈이야.”
속에서 간신히 짜 올리는 듯한 말이 이상했다.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느닷없는 따짐 조에 리브가는 멍해졌다. 얼마 안 가 금안의 초점이 교묘히 어긋난 것을 발견했다. 의식은 차렸으나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무의식중을 헤매는 듯했다.
“왜 또, 왜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서글픔이 덩어리째로 고인 목소리였다. 듣는 이까지 기분 이상하게 만들 만큼 짙은 감정이 배겨났다. 리브가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를 기분에 잠자코 있었다.
발렌틴은 일평생 저를 괴롭혀 온 난제를 앞에 둔 사람처럼 낯을 일그러뜨렸다.
“차라리 말을 해 줘, 이브.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야…….”
혼수상태 동안 무언가에 지독히 시달리기라도 한 읊조림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마주한 제가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만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전에 없이 애끓는 독백이 그를 증명했다.
리브가는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걸요.”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입이 절로 열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올 것도 아니고, 내가 받은 상처가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다정한 손길에 반하여 어조는 사뭇 냉랭했다. 발렌틴은 진창을 헤매는 낯빛이 되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눈동자에 아주 얄따란 이채가 서렸다.
곧 입가에 메마른 실소가 걸렸다.
“이제야 대답을 해 주네. 이제야.”
그게 설령 심장을 찌르는 힐난이라고 하여도 그는 리브가에게서 반응을 끌어낸 게 그토록 기쁜 듯 보였다. 대체 무얼 봤길래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주치의를 불러야 했다. 그걸 아는데도 리브가의 발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속 시원하셨나요?”
질문이 제멋대로 나왔다.
“저를 뜻대로 괴롭힐 때, 속이 후련하셨어요?”
“아니.”
“…….”
“하나도, 후련하지가 않아서…… 더 이해할 수 없었지.”
리브가는 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그럼 왜 그러셨어요.”
원망이 탄식처럼 새어 나갔다.
이제 와 짚어 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의 복수심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던 게 바로 리브가였다. 그럼에도 서글프고 고단했던 그때의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단지 복수가 아니라, 일평생 품어온 사랑에 배신당한 기분이었으니까.
발렌틴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앳된 나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너의 안위를 먼저 떠올렸을 만큼.
그 정도로 그녀의 죽음에는 여지가 없었다. 다 타서 새까만 재가 된 줄로만 알았다. 그 잿더미가 밤마다 환청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랬기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의구심만 피어올랐고. 그 의구심으로부터 피어오른 눈먼 복수심이 끝내 모든 걸 망쳤다.
이후 알게 된 진실 속에는 오해만 그득그득 차 있었으며. 그것을 탈탈 털어 내니 그에게는 사죄를 고해야 할 죄업만 가득 쌓여 있었다.
그토록 힘겹게 다다른 게 결국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어서…….
“나는 네가, 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랬기에 네가 그 여자애가 맞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약과 술에 의존하며 산 뒤로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심장이 요란하게 맥동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등줄기를 뻣뻣하게 세우고 폐부를 팽창시키는 그때의 그 감각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듯도 해서.
살아서 다시 너를 만났다는 걸 알려 줘서.
그만큼 반갑고, 그리웠으며, 한편으로 안도하여…….
“그래서 네가 날 속였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
“차라리 네가 아니었다면 그냥 죽여 버리는 걸로 끝냈을 거야. 굳이 시간 끌지 않고. 귀찮으니까. 과거는 이제 내게 귀찮고 번거롭기만 해. 성가시기 짝이 없어……. 그런데 너라서.”
“…….”
“너라서 그러지 못하고…… 나는…….”
눈가를 덮은 손끝이 섧게 떨렸다. 고작 수전증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 떨고 있었다.
저답지 않게 귀찮은 일을 벌여 지지부진하게 끌어온 것도. 좀처럼 알 수 없는 감정에 볼썽사납게 휘둘린 것도. 스스로 어딘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은 것 역시.
사랑의 증거가 이렇게나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는데.
속내를 토로하는 목소리가 무덥고 질겼다. 격정적이며 달아올라 있었다.
리브가는 눈가를 가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물기가 여실하게 차오른 눈이 보인다. 저를 무력과 재력으로 무참히 짓밟을 때조차도 아름다워 오싹함을 끼치던 눈동자. 보석처럼 영롱한 그것. 리브가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쥐고 있으려고 했던 것.
흠집 난 상태인데 그것마저도 하나의 요소처럼 치밀하게 황홀하기 짝이 없는.
“왜일까요.”
“…….”
“왜 우리는 늘…… 서로에게 미안하단 말만 하게 될까요.”
유년기부터 끝내 어른으로 장성한 지금까지 꼬인 악연 속에 사죄만 즐비했다.
그녀가 그를 숲에 두고 떠났던 어릴 적에도, 그가 그녀를 가까스로 위기에서 빼낸 최근의 일도. 관계는 응당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도 바쁘기 마련이건만, 어째서 우리는 늘 미안하고 서럽기만 할까.
미안하단 말 대신, 사랑을 고백했다면 좀 달랐을까?
연좌제랍시고 모르는 척 그의 속에 쌓인 울화를 묵묵히 수용하는 대신, 내가 당신을 구했던 거라고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런 결과가 펼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에서부터 울컥함이 치민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갈무리한 리브가는 그의 손을 내려 두고 몸을 틀었다.
수분기로 찬 발렌틴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가 점차 커졌다. 몽롱함에 잠겨 있던 의식이 별안간 그 아득한 바닷속을 빠져나왔다.
꿈이.
꿈이 아니었다.
의식을 찾지 못하던 내내 지겹도록 봐온 허깨비.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뻗고 뻗어도 잡을 수 없던 환상. 그 꿈결과 달리 그녀는 지금 잡아챌 수 있게끔 실재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격한 움직임을 타고 복부 쪽에 욱신욱신한 통증이 번졌다. 묵직한 신음이 터졌다. 피를 토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통이 엄습했다.
그러나 하잘것없는 고통 따위에 발목이 잡힐 새가 아니었다. 이따위의 외상보다 속내에 깊이도 새겨진 결핍이 그를 더욱 만신창이로 만들 게 자명했으니까.
지금은, 그녀를 붙잡는 게 더욱 급했다.
급히 발을 내디뎠으나 한 달간 움직이지 않은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갈 리 만무했다.
큰 소음이 났다.
저를 붙잡으려다가 침대 아래로 고꾸라진 그를 발견하고 리브가의 입이 헤벌어졌다. 가관인 꼴이었다.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둘둘 감은 모습으로 어떻게든 저와 닿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그 모습이.
“가지 마.”
인제 그만 주치의를 부르려고 발을 돌린 것뿐인데.
그는 꼭 어미가 저를 두고 가려는 걸 알아챈 아이처럼 세상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이브, 가지 마.”
세 살배기 아이가 떼라도 부리는 듯 볼품없는 애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지금 이 태도가 더욱 진실인 양 와닿았다. 꾸며낼 수 없는 아이의 솔직함처럼 가식 하나 없이 제 애달픈 속내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네가 날 용서해 줄 이유가 없는 거 알아.”
갈린 목소리가 부단히 떨렸다.
“그래도 용서해 줘.”
희한한 사내였다. 바닥을 기며 비는데도 그 이면에 오만함은 옅어지지 않았다. 거만하게 비는 재주가 있었다. 떼를 쓰는 식으로 선보이는 뻔뻔한 애원부터가 그러했다.
“이제 정말로 날 사랑하지 않아?”
“주인님.”
“어리석을지언정 다시 사랑해 줘.”
이전엔 속이 거뭇하게 탈 만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면, 이제는 속을 불편하게 뒤흔들릴 만큼 눈물겹게 매달렸다. 금안에 고인 눈물 줄기가 창백한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기나긴 액체의 궤적이 리브가의 눈동자를 아릿하게 찔렀다.
“이대로 날 포기하지 마. 내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
“다시 나 좀, 사랑해 줘.”
간절에 빗대어진 오만함마저도 잘 어울려서 속이 쓰렸다.
연신 벌어졌다가 다물리기를 반복하는 입술이 꼭 바다 깊숙한 곳에서 공기를 찾으려고 뻐금대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꼭, 다시 사랑해달라는 말이 나를 좀 구해달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의 음성은 먹먹하게 젖어 있었다. 단순히 울음기인가 싶었으나 그의 목소리를 적신 건 다름 아닌 아픔이었다. 초췌한 안색, 부르튼 입술, 살이 내려 날렵해진 턱선, 핏발 선 눈, 창백하게 질린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시야에 차례차례 들어오는 모습 그 어디에서도,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다 고통뿐이었다.
그 애처로움에 마음이 동하기라도 한 양손이 허공으로 뻗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닿기 전에 제동이 걸린 것처럼 멈칫, 했다. 그의 눈물은 차마 거두어지지 못하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막 깨어나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눈물의 애걸복걸은 기력이 빠진 그가 다시 잠이 든 순간에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치의와 퀄린은 그 현장을 모두 목격했다.
“미친놈…….”
퀄린은 그 행색을 보고 가지가지 한다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발렌틴은 이후로도 홀연히 깨어났다가 다시 죽은 듯 까무룩 잠들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면 일단 리브가부터 찾고 보는 태도가 주변을 아주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은 날 저택을 나서서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를 제대로 대면한 건, 겨울의 대미를 장식하듯 간만에 화창한 해가 뜬 날이었다. 물론 리브가가 그를 찾아간 게 아니라 거동이 가능해진 그가 직접 걸음 한 것이었다.
케시가 결혼하여 떠나고 홀로 남은 집안은 써늘했다. 옷을 덧대 입고 벽난로를 지피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그가 있었다. 찾아올 것 같았는데 찾아왔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만 진행되던 저와 그 사이에 처음으로 예상한 그대로가 맞아떨어져서 리브가는 왠지 생경했다.
들어오라는 의미로 문을 열어두고 발을 돌리는데 어째 따라붙는 기척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발렌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 해요?”
“들어가도 돼?”
리브가는 그 순간 ‘미친놈’ 운운하던 퀄린의 질색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발렌틴은 머뭇대다가 끝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너무…… 추운데.”
지난날에도 느꼈지만 이 집은 너무 추웠다. 외풍이 심했다. 원목으로 이루어진 집은 저택과 비교할 가치도 없을 만큼 보온성이 엉망이었다. 끝 무렵이라지만 아직도 냉하기 그지없는 날씨를 이런 조악한 집에서 어떻게 버티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브가를 둘러업고서라도 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귀소본능이나 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힘들까 봐서였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겨우 얻어 낸 그녀의 허락이 무용지물이 될까 봐 얌전히 굴었다.
“무슨 꿈을 꿨어요?”
마주 앉아,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나온 첫 질문이 그것이었다.
발렌틴은 그녀가 무얼 묻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네가 울었어.”
“울어요?”
“울면서 나를 노려보다가.”
“…….”
“……안 좋은 짓도 좀, 하고.”
그는 꿈속에서 무수한 리브가를 만났다.
무수하지만 동일하였다. 저를 볼 때마다 매번 오열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흐트러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복장을 터뜨릴 작정인 양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살벌하게 노려보는 와중에도 입술 한 번 벙긋거리는 일이 없었다. 품에 끌어안은 비통함의 수준이 결국 제 몸을 해하는 수준으로 갈 때까지도.
발렌틴이 실제로 목격한 건 추락이 전부였으나 꿈속에서는 달랐다.
감히 그녀의 곁에 두고 싶지도 않았던 날붙이로 몸 여기저기를 긁어 대고 피를 비쳤다. 다가가고 싶어도 허깨비의 탈을 쓴 그녀와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망연한 심정이 되어 그녀가 스스로를 해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기 자신이 그토록 무력하고 쓰레기같이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저를 해해 줬으면 하건만.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를 해하는 방식밖에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를 옭아매기에는 탁월한 수법이었으므로 복수라면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리브가로부터 흘러나온 진한 피가 웅덩이가 되어 제 발치에 고였다. 그는 그것이 서서히 빠지다가 머리끝까지 잠겨 색다른 죽음을 맛보았다. 그녀를 따라 저도 숨이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 단순한 허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막 깨어났을 때도 습관적으로 어르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 실제의 눈은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으나 곧 울 것처럼 푹 젖은 채 위축되어 있기는 하였다.
그 눈.
그때 목격한 눈빛 하나 믿고 그는 오늘, 용기를 내어 찾아온 것이었다.
리브가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제가 보고 싶으셨어요?”
“……그래.”
“거짓말.”
“사실이야.”
“찾지도 않으셨으면서.”
“죽은 줄로만 알았으니까.”
사실은 다 안다.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고, 막 깨어난 발렌틴의 입으로도 들은 바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그것을 입 밖으로 토해 내게 만드는 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절 원망했죠?”
“잠깐은.”
“…….”
“네가 나를 속였단 걸 알았던 그때 잠깐은…….”
따듯한 차 한 잔 내어놓지 않은 테이블 위로 적막이 감돌았다. 침묵을 곱씹으며 리브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 눈이 내리고 언제 세상이 차갑게 식었느냐는 듯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겨울에 맞이하는 따스함은, 지금 이 사내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상황만큼이나 낯설었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신 그녀가 말했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주인님 곁을 지킨 건…… 그냥 그게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라서 그랬어요.”
“이브.”
“이제 이곳에 있어야 했던 마지막 이유가 해결됐네요.”
맞은편의 그가 굳었다.
내쉬는 호흡마저 쩍 얼어붙은 채였다.
“그러니 떠날 거예요, 내일.”
의식 불명이던 그가 막 깨어났을 때를 반추했다.
당시 제게 벌어졌던 일을, 리브가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렇게나 힘들게 만든 남자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었다. 애처로운 모습에 맥없이 홀려버린 양, 기꺼이. 어리석음에도 정도가 없었다.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온 이유 역시 그러했다.
이제 이 남자의 곁이 무섭다.
스스로를 얼마나 더 망치려고 들지 모른다는 것이…….
“생각해 봤는데.”
“…….”
“주인님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그 ‘이해’가 용서에 상응하는 걸 이 자리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용서와 이해는 고작 한 끗 차이였다. 그녀가 온전히 용서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저 역시도 그의 일부분을 망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디 우리의 끝도 없는 불행을 여기서 마쳤으면 한다는 고별.
미처 끝맺지 못한 말속에 담긴 의미를 발렌틴 역시 이해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말소리 대신, 한 사람의 초연함과 한 사람의 절망만 남아 있었다.
리브가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그러쥐었다. 온기 없이 서늘하기만 하다.
끝난 듯 보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 * *
하루란 참 덧없는 시간이었다.
일일이 쪼개 보면 그 길이가 제법 되어 보이지만, 눈 감았다가 뜨면 이미 흘러가 버린 지 오래였다. 붙잡을 틈도 없이, 고정시킬 틈도 없이. 리브가는 그 하루 속에서 무수한 감정을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아득히 스쳐 지나갔다. 다채롭다면 다채롭고, 건조하다면 건조하고, 애잔하다면 애잔할 순간들.
그리고 다음 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걸음이 참 무거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떠나기 위함이란 목적은 같은데 기차역으로 향하는 느낌이 지난번과는 판이했다. 이 역시도 이유는 알지 못했다.
뭉게구름을 헤가른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발열했다. 겨울 끝 무렵에나 맛볼 수 있는 온화한 날씨였다. 리브가는 손을 들어 이마 위로 차양을 만들었다. 날숨이 뿌연 김의 형태로 흘러나왔다. 분주한 소음이 귀를 아스라이 스쳤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모든 게 망연하다.
지난날 코올리 밴텀에 의해 가로막혔던 일들을 차근차근 행했다. 바글바글 모인 인파 사이를 헤엄치듯 거닐어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표를 보여 주고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꼿꼿하게 앞만 보았다.
오늘은 처음처럼 허둥지둥하지도 않았고, 이전처럼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고요히 침묵을 지키며 출발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
역무원 여럿이 느닷없이 마차로 뛰어들어 와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오후의 햇볕이 스며들어 평온하기만 하던 칸에 불청객 같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 누군가 의문을 토해 내는 소리, 역정, 당혹, 곤혹. 짜증. 뒤엉키는 소리에 맥없이 묻히고 잠기면서도 리브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망부석처럼 꼼짝 않는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새벽녘에 도망을 칠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펼쳐지는 그림이 유사했다. 당시 리브가는 황망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제 상황을 판단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꼭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사람처럼 시종일관 차분했다. 깊이 들이마시는 호흡과 함께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그러고서야 하나둘씩 내리는 인파의 틈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햇살을 머금은 짙은 흑발이 반짝거렸다.
이전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그가 있었다.
“…….”
“…….”
주변이 아침장처럼 난리 법석 시끄러우나 정작 이 사달을 만든 장본인들은 정적이기만 했다. 못 박힌 듯 앉아있는 여자나, 어깨가 치이고 몸이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못하는 남자나.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발렌틴이었다.
인파를 거스른 걸음이 리브가에게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그가 다가오면 리브가는 늘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붙잡을 자격조차 없는 거 알아.”
“…….”
“아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발치로 덩어리째 쏟아진다.
통보를 받은 지 하루, 그 시간동안 발렌틴의 내면에는 검푸른 욕망의 파도가 끝없이 일렁였다. 지은 죄를 알기에 놓아주어야 한다. 그걸 아는데도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과거에도 그녀가 있고, 현재에도 그녀가 있는데, 미래에만 없다는 그 상상이 그를 번번이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리브가로 점철된 이 삶을 단 한 자락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어서.
맥없이 초조하게 굴며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은,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달려오는 데에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보낼 자신이 없다.”
보내도, 보내지 않는다 해도 후회하게 될 거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너를 내 곁에 둔 채로 후회하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퀄린에게 들었어.”
발렌틴의 눈길이 리브가의 배를 향해 이동했다.
“아기…… 왜, 왜 거짓말을 한 거야. 왜 없다는 소릴…….”
거짓이 탄로 났으나 리브가는 태연했다.
지금쯤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코올리 밴텀의 사건으로 쓰러졌을 때 공작가 주치의가 몸을 살폈으니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전해 들은 듯한 발렌틴은 꼭 사면초가에 빠진 낯을 하고 있었다.
“나를 모욕하고 비난해도 좋아. 평생 원망해도 괜찮아. 어차피 네가 바라는 대로 나는 지옥에 떨어질 테니까.”
“…….”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굴게.”
발렌틴이 다리를 굽혀 몸을 수그렸다. 예전에는 거만하게 내려다볼 줄만 알던 사람이 지금은 다리를 굽혀 기꺼이 시선을 낮춘다. 옷깃이나 소매 등, 몸 곳곳에 감긴 붕대가 시야에 스쳤다.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성치 않은 몸으로 언덕 위의 집까지 찾아온 어제나, 또다시 기차역을 중단시키는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여 뛰쳐 온 지금이나.
그는 치열하게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리브가는 그 얼굴을 파헤쳐 볼 듯 응시했다. 지난날 저를 쫓아오던 그는 낫을 든 사신 같았는데 오늘은 그 느낌과는 달랐다. 애원, 애걸복걸. 그쪽이 조금 더 잘 어울렸다.
“주인님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한 달간 혼수상태인 그의 곁을 지키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하지만 그건 주인님도 마찬가지였겠죠.”
“…….”
“나나 내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아, 그래.
어릴 적 그의 악몽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코올리 밴텀에게 당한 납치로, 아이러니하게도 리브가는 발렌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은 그 잠깐 동안 운신이 제한된 건데도 미치는 줄로만 알았다. 심장을 험하게 주물러 대는 두려움을 제어할 수 없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몇 시간도 아니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거니 단 몇 분 정도.
발렌틴은 그 공포스러운 폐쇄를 자그마치 몇 주나 겪었다. 어린 나이에, 믿었던 가족에게 버림받고, 외로운 골방에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또 고통받으며.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을 악몽일 테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약에 의존했을 테고.
그의 속에 한가득 고인 아픔은 그렇게나 끔찍하게 배양된 것이었다.
그저 말로만 그를 이해하던 때와는 달랐다.
제가 당하는 입장이 되어 그 고통을 체감해 보니, 비로소 서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였다.
아버지의 탐욕이 그의 과거를 망가뜨렸고, 그의 분노가 그녀의 현재를 망가뜨렸다. 그렇게 부서지고 잔해만 남은 상태가 되고서야, 두 사람은 온전히 속내 밑바닥을 까발린 채 대등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적어도 리브가는 그랬다.
불균형하게 기울어 늘 비척거리기 바빴던 땅이 이제야 바로 선 듯한.
그렇게 대등해졌음에도 여전히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떠나려고 했다.
그게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그가 저를 잡아 주길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정말로 헤어지길 원했다면 그에게 떠난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꼴사납게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붙잡힐 여지가 있게끔 등을 보였다.
앞선 게 자존심이었다면 뒤따르는 그 미련은…….
당할 대로 당하고서도 결국에는 그를 포용하려 드는 이 어리석음의 말로.
답도 없는 사랑이었다.
제 팔자를 제가 꼬는 사랑이 있다던데 리브가는 그게 딱 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제 부채감이 없는데도 어리석은 자신은 여전히 그를 제 손으로 감싸고 싶어 했다. 이 남자의 존재가 아직도 가슴 한편을 아리게 만들었다.
일평생 겪어 왔기에 잘 알았다.
골몰해 봤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그것.
“내가, 보살피게 해 줘.”
“…….”
“바라지 않아. 용서조차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주는 걸 받기만이라도 해.”
리브가는 제 옆을 짚은 그의 손을 보았다. 핏줄이 돋아날 만큼 힘을 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너를, 내가.”
“…….”
“내가 널 사랑하게 해 줘.”
언제나 그를 종잡을 수 없었는데 요즈음은 그 속에 고인 것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지금의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브가가 저를 이대로 버리고 떠날까 봐. 제가 행한 짓으로 말미암아 끝내 아득한 지옥으로 떨어질까 봐.
그래서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절박하게 쫓아 미련처럼 내보인 등을 붙잡았다.
그리고 리브가는.
리브가는…….
“……케시에게는 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실은 조금도 자신 없어요.”
혼자서 아기를 키울 수 있겠냐는 질문에 의연하게 감추었던 추한 속내였다.
“나는 사랑이라는 걸 좀처럼 받고 자라질 못해서…….”
그리고 그건 발렌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사생아의 사정, 그리고 납치당했을 때의 이해관계를 생각해 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저만큼이나 사랑받지 못해 일평생 불행의 바다만 허우적거린 사내였다.
“양쪽 다 온전치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엉성하고 어설픈 애정이라고 한들, 모아 두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화상 자국이 남아버린 손의 피부가 까칠했다. 아마도 이건 영영 사라지지 않을 흉터일지 모른다. 그녀의 손짓에 움찔한 발렌틴은 서서히 손가락을 폈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움직임. 눈치를 살피듯 맥동마저도 죽인 심장처럼, 아주 느릿한 움직임이 리브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윽고 틈없이 움켰음에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하지만 전율의 의미는 고작 한 겹의 차이로 달라졌다.
리브가는, 그에게 붙잡혀 주었다.
단지 하루의 차이일 뿐인데.
마침내 겨울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